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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노비 에 대한 총서 검색 결과 전체151
  • 조선 후기 중앙관청의 숨은 실세, 경아전
    • 기록자료
    • 정치
    제는 느슨해졌다. 노비층에서도 경제력을 바탕으로 신분 상승을 꾀했고, 과거를 통해서 관직에 진출하려는 시도도 넘쳐났다. 하지만 한정된 관직 자리로 인해 실직이 아닌 액외 인원이나 출신 등 다양한 형태의 관직 자리도 생겼다. 실력과 능력이 있음에도 관직 진출이 어려웠던 층에서는 겸인이라는 새로운 출구를 모색했다. 고위 재상가나 명사 집안을 드나들면서 중앙의 고급 정도를 접할 수 있고, 생계를 마련할 수 있으며 헌신도에 따라서 경아전으로 진출할 기회도 가질 수 있었다. 한편 늘어난 양반층과 함께 중앙정계에서는 당파의 경쟁도 더욱 치열해졌다. 따라서 같은 당색을 중심으로 정권을 장악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인력과 자본이 필요했다. 서울의 양반가나 대갓집의 겸인, 청지기는 어느 정도 실력과 능력을 갖춘 인물이 많았고, 이들은 같은 당파 그룹에서 인적 자본이 될 수 있었다. 경아전직을 통해 행정운영뿐 아니라 경제권, 정보를 확보할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이었다. 주공과 겸인은 정치적, 경제적 윈윈 관계를 공유했다. 겸인의 입장에서는 생계를 보장받고 성장할 수 있는 출구 전략으로 활용될 수 있었다. 하지만 주공의 권력 부침에 따라 동요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기 때문에 중앙정계의 변화에 관심을 두고 때에 따라서는 주공을 바꿔 가면서 생존, 성장해 나갔다. 경아전이 이들 겸인들로 채워지면서 조선 전기의 관료-향리층의 네트워크 구조는 파괴되었고, 주겸 관계라는 특수한 사적 관계가 중앙관청에서의 공적 관계와 중첩되면서 법의 경계를 허무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미 다양해지고 복잡해진 사회구조를 법 규정이 따라가지 못했고, 조선 정부는 국초부터 이어온 국가통제를 고집하면서 그 괴리가 더욱 확대되었다. 따라서 주겸 관계의 경아전 구조도 비리로 점철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조선의 양반, 가정을 경영하다 -18세기 대구 최흥원의 가사활동을 중심으로-
    • 기록자료
    • 경제
    食口)’는 가족과 노비들이었다. 오늘날은 가족과 밥을 같이 먹는 ‘식구’를 비슷한 개념으로 사용하지만, 조선시대의 ‘식구’는 가족보다 훨씬 넓은 개념이다. 최흥원은 관직을 역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농사 경영으로 수입을 창출하여 식구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최흥원이 58세 되던 해인 1762년의 호구 자료에 등재된 혈연가족은 12명이다. 최흥원의 호에는 아우 흥건과 흥후 및 그의 가족, 그리고 서종제(庶從弟) 등이 기록되어 있다. 물론 형제들은 인근에 각각 따로 살고 있었다. 직접 부리는 솔거노비는 27명이 기재되어 있다. 호적의 호 구성은 현실을 그대로 반영했다고 보기 어렵지만 최흥원이 부양해야 하는 식구는 39명 정도이다. 비가 크게 내려서 강물이 불어 넘쳐 갯가의 보리가 모두 잠겼다. 우리 집에서 잃어버린 것을 계산하여 보니 거의 40여 섬이 되었다. 백여 명의 입이 먹고 살아갈 방책이 없으니 가슴이 막히지 않을 수 있겠는가? ―1745년 6월 9일 일기에는 최흥원이 먹여 살려야 할 식구를 100여 명이라고 했다. 여기에는 동생들의 집에 같이 사는 노비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최흥원의 일상에서 가족을 포함한 식구를 건사하는 것은 가계를 유지하는 기초가 되기 때문에 가족의 건강과 더불어 끼니를 해결할 식량 확보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최흥원은 벼와 보리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작물을 재배하지만 풍년으로 수확이 넉넉하기보다는 가뭄과 홍수 등으로 흉년이거나 생계가 어려운 경우가 더 많았다. 봄에 거둘어 들인 보리로 가을 추수까지 먹기에 부족할 때도 있었다. 사촌 “통숙에게 보리쌀 2말과 돈 5전을 보냈다”, “보리쌀 67되를 사촌 아우가 앓고 있는 곳에 보내어 병구완하는 사람들의 식량을 하도록 했다”, “보리쌀 및 돈 1냥과 장조림을 사촌 아우에게 보낼 계획이다”, “보리쌀 1섬을 실어 보내어 누이 집에 보태 주도록 했다” 등의 내용으로 미루어 최흥원은 본인, 아우, 누이, 사촌의 식량까지 챙겼으며, 이들에게 수시로 곡식을 보냈다. 조제고(助祭庫)는 제수를 위한 것이고, 의고(義庫)는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마련한 기구이다. 최흥원은 흉년이 들거나 끼니를 때우기 힘든 경우에는 여기의 곡식을 변통하여 식구를 먹여 살렸다. 1762년에는 아우들이 가난하여 굶어 죽을 처지가 되었다. 최흥원은 어머니가 너무 걱정할까 봐 어쩔 수 없이 제수로 쓰고 남은 약간의 볏섬으로 식구 수에 따라 나누어 주었다. 가난이 심한 아우부터 먼저 곡식을 주되 한 집 당 5말을 넘기지 않고 기한은 4월로 했다. 4월이면 보리와 밀이 익기 때문이다. 1763년에도 조제고의 곡식을 이용했는데, 5월부터는 각 집에 조제고의 식량을 나눠 주는 것을 그만두었다. 조제고의 곡식이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보리가 익었기 때문이다. 최흥원은 조제고의 곡식이 조상을 섬기기 위한 것으로 생계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용도를 바꾸어 사용했다. 그는 의고도 열어 겉벼와 보리 약간씩을 아우들 집에 나누어 보냈다. 최흥원은 흉년이나 춘궁기에 곡식을 빌려주는 환곡도 이용했다. 환곡을 받기 위하여 상만을 수성창에 보내기도 했고, 환곡을 빌려 식량을 잇게 하거나 돈으로 바꾸어 부세와 잡물을 마련하는 데 사용했다. 부노 진욱은 빌린 돈 20냥과 환곡 겉벼 20섬을 최흥원에게 바쳤는데, 최흥원은 이를 혼수 마련에 사용했다. 1757년에는 엄청난 풍년으로 원근의 논에서 난 곡식의 소출이 이전 해에 비해 두 배나 많았다. 그런데 임금이 특별히 명령을 내려 1755년과 1756년의 환곡을 반감해 주도록 했다. 정말 반가운 소식이었다. 최흥원은 “정말 성군 시대의 정사이다”라고 임금을 칭송했다. 환곡은 형편이 어려운 농민만 이용한 것이 아니었다. 지주 최흥원도 환곡으로 생계를 잇거나 혼수나 잡물을 마련하는 등 일상적으로 필요한 경비에 보태었다. 환곡은 갚을 때는 큰 부담이다. 최흥원은 환곡을 제때 갚지 못해 독촉에 시달리기도 했고, 이 때문에 괴롭고 혼란스러운 감정을 느낀 적도 있었다. 종 만세가 환곡 이자 독촉을 견디지 못하고 힘들어하자, 겉벼 1섬과 돈 2냥을 주어서 마음을 놓도록 했다. 관에서 환곡을 갚을 때는 정결한 품질의 곡식을 요구하기 때문에 곤란한 적도 있었다. 최흥원은 지주로 여유로웠지만 흉년으로 식구들의 끼니를 걱정할 때도 있었고, 공동조직의 기금과 국가의 진휼제도를 이용하기도 했다.
  • 조선의 양반, 가정을 경영하다 -18세기 대구 최흥원의 가사활동을 중심으로-
    • 기록자료
    • 경제
    은 623두락이고 노비는 22구였다. 호구자료에 근거하면 최흥원의 조부 최수학이 4남 2녀에게 남긴 논과 밭은 712.5두락이고, 노비는 48구이다. 【그림 7】 1760년 10월13일에 조모 조씨가 손자인 최주진에게 노비를 지급한 별급문기(別給文記) 1746년에 최흥원의 아버지 최정석이 5남매에게 물려준 논과 밭은 405두락이고, 노비는 61구였다. 이때 최흥원이 물려받은 논과 밭은 60여 두락이다. 아우 흥점은 양자 간 아들 몫을 포함하여 78두락, 흥건은 66두락, 흥후는 68두락, 사위 류성복은 62두락을 물려받았다. 최흥원의 경우 제사를 지내는 몫으로 정해진 것과 일찍 사망한 동생 재열의 몫까지도 관리했을 것이다. 1733년 최흥원은 조부의 재산 분급 당시 34두락의 논과 밭 및 5구의 노비도 물려받았다. 따라서 문서를 통해 확인되는 최흥원의 논과 밭은 166두락이고, 노비는 23구이다. 실제로 최흥원의 논과 밭 규모는 이보다 훨씬 컸을 것이다. 【표 1】은 『역중일기』에 나오는 논과 밭의 소재지이다. 【표 1】 『역중일기』에 나오는 논과 밭의 소재지 논과 밭의 정확한 소재지를 확인할 수 없지만, 대구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흥원은 위에 언급한 토지 외에도 개간과 매매를 통해 토지를 늘리거나 빚을 갚기도 했다. 1739년 4월 12일에는 깊고 후미진 땅이 일굴 만하여 관아에 정장(呈狀)을 올려 공증 문서를 요청했다. 최흥원은 본인 소유의 논 9마지기를 둘째 아우에게 팔기도 했다. 둘째 아우에게 45냥을 받아, 그에게 진 빚 34냥과 막내아우에게 진 빚 10냥 5전을 갚았다. 하회 누이 몫의 논을 팔아 25냥을 하회에 보내기도 했다. 지묘의 논 8마지기를 팔아서 묵은 빚 18냥을 갚았고, 중심 서씨의 집터와 밭 2마지기를 2냥 5전에 구입하기도 했다. 최흥원은 100여 명의 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재산을 증식하고 이를 꼼꼼하게 관리했다. 작황은 생계에 가장 중요하다. 날씨는 작황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최흥원 일기의 대부분은 날씨의 기록에서 시작한다. 날씨에 따른 작황 현황과 이에 따른 심경을 일기에 기록하기도 했다. 봄비가 때를 알고 내려서 사방 못물이 모두 그득했다. 보리가 비록 알이 배지 못했으나 앞으로 농작물이 매우 살아날 가망이 있어서 다행이다. ―1739년 4월 16일 비가 종일 크게 쏟아져서 강물이 불어 넘칠 듯하니 갯가 보리를 수확하지 못할까 걱정스러워 종들에게 일을 시켰는데, 때맞추어 일을 하지 않아 이런 사태를 불렀으니 역시 반성할 부분이다.(1740년 5월 30일) 오후에 갑자기 서쪽 하늘에서 우레가 치고 큰바람이 불면서 우박이 쏟아졌다. 크기가 환약 알 크기만 했다. 농민들이 목화, 보리, 마가 손상을 입었다고 말했는데, 다만 한 줄기 우박만 급히 지나가서 큰 재앙을 피한 것 같다. ―1759년 5월 10일 날씨 덕분에 풍년이 들기도 하고 날씨 때문에 한 해의 농사를 망치기도 했다. 날씨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최흥원은 날씨를 꼼꼼하게 기록했고, 날씨와 농사와의 연관성도 기록했다. 이 밖에도 씨 뿌리기, 곡식이 익어 가는 상황, 추수와 수확량 등도 자세하게 기록했다. 1739년 8월 1일에 최흥원은 둘째, 셋째 아우와 함께 동구 밖을 거닐고 제방 언덕에 올라서 멀리 들을 바라보니, 햇벼가 한창 익어가고 있어서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만약 바람이나 서리 피해가 없다면 전에 없던 풍년이 될 것이었다. 두보의 ‘나랏일 근심하여 풍년을 기원한다[憂國願年豊]’라는 구절을 읊조리며 기분 좋은 시간을 보냈다. 최흥원은 직접 농사를 관리 감독했다. 농사철에는 파종과 추수로 바빴다. 종들에게 밭에 보리를 파종하도록 했는데, 파종 시기가 늦어 싹이 날까 걱정했고, 해안의 보리타작을 위해 종 10여 명을 보내기도 했으며, 계집종들에게 모내기, 김매기, 가을걷이, 보리타작 등을 시켰다. 종 상만을 강각동에 보내어 거둔 모초로 재를 만들게 하여 가을갈이에 대비하도록 했다. 매일 밭갈이와 곡식 수확을 점검하느라 바쁘게 쫓아다니니, 그런 자신이 우습기도 하고, 한탄스럽기도 했으며, 날마다 생업에 대처하고 힘을 쓰느라 어머니를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 자신을 탓하기도 했다. 논과 밭이 여러 곳에 있어서 최흥원이 일일이 관리하거나 감독할 수 없었다. 아우를 비롯하여 아들 주진, 사촌 통숙과 문희 등에게 파종과 타작을 감독하게 했고, 그들은 최흥원에게 작업 결과를 보고했다. 관직으로 나아가지 않은 양반은 지주로서 농업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습득한다. 최흥원도 여느 양반처럼 농사 기술 등에 대한 나름의 지식이 있었다. 본인의 경험이나 농민에게 들은 말도 명심하고 이를 기록했다. 1738년 봄에 보리 씨가 단단히 뿌리 내리지 못한 것에 대해 최흥원은 씨를 늦게 뿌린 결과라고 판단하고 그 이후에는 일찍 씨를 뿌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다음 해에 최흥원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 나이 든 농부에게 직접 물어봤다. 농부가 호미질을 해서 흙을 부드럽게 해 주면 도움이 된다고 조언하자, 최흥원은 곧바로 종들에게 김매도록 했다. 【그림 8】 김홍도, 《단원 풍속도》, 〈논갈이〉, 국립중앙박물관 최흥원이 농사에 골몰한 것은 꿈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한 번은 죽은 아내가 병들어 신음하면서 한 사람도 와 보지 않는다는 뜻으로 원망하는 꿈을 꾸었다. 깨어나서 생각해 보니, 그저께 내린 비로 무덤이 무너진 것이 아닌가 싶었다. 서숙에게 가서 무덤을 살펴보라고 했는데, 돌아와서 광촌의 논이 물에 쓸려 거의 3-4마지기가 망가졌다고 했다.
  • 조선의 양반, 가정을 경영하다 -18세기 대구 최흥원의 가사활동을 중심으로-
    • 기록자료
    • 경제
    자를 자처하다 노비의 감독과 물건을 바치는 사람들 최흥원은 논밭뿐만 아니라 노비의 관리 감독에도 신경을 썼다. 농사는 노비의 노동력에 의존했으며, 이들은 집을 운영하고 관리하는 다양한 일에 동원되었다. 홍수가 났을 때 종들이 갯가에 나가 잠긴 보리를 건져 수습한 것이 적게는 5-6말, 많게는 혹 8-9말이 되어 최흥원은 재앙을 당한 중에도 다행으로 여겼다. 최흥원은 종들에게 일을 시킨 이후 급료를 주기도 했다. 최흥원은 노비가 제대로 먹지 못하는 데다 과도한 노동에 시달리거나 죽어 나가는 것에 대해 연민이 있었다. 노비들에게 먹을 것을 챙겨주고 마음을 써 주었다. 다만 불성실한 노비는 엄하게 다스렸다. 노비들이 풀 뽑는 일을 불성실하게 하자, 모두 뜰로 불러들여서 말로 꾸짖었다. 며칠 사이에 응접하느라 꽤나 소란스러워서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으니, 평소 함양이 깊지 못한 것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종종 종들에게 가혹하게 명령을 내리면서도 문득 후회하며 반성할 겨를도 없었다. 집안의 노소들을 대하면서 근심으로 여기지 않고 도리어 가혹하게 굴며 시원하게 여겼으니, 이게 어찌된 까닭이었던가. ―1743년 10월 18일 최흥원은 노비를 관리하는 차원에서 수시로 벌을 주었는데, 가혹하게 대하는 자신을 반성하면서 수양하는 계기로 삼기도 했다. 노비는 최흥원의 주요 재산이었지만 함께 생활하는 가운데 몇몇 노비들과는 가족과 같은 정을 나누기도 하였다. 특히 두애를 총애했다. 그는 가사활동의 조력자로, 인동 할아버지, 서숙이 맡은 수준의 역할을 했고, 최흥원을 충직하게 받들었다. 두애가 15섬의 보리로 5년 만에 180냥의 돈을 만들어 오자 최흥원은 두애를 매우 기특하게 여기고 그의 노고에 10냥을 주어 밭을 사서 갈아 먹도록 했다. 두애는 병을 앓고 있는 와중에도 제사 비용으로 마련한 곡식인 조제위의 보리를 수합 하는 일과 관련하여 계집종 분화를 보내어 최흥원에게 상황을 설명하도록 했다. 최흥원은 아픈 가운데 본인에게 맡겨진 일을 충직하게 처리하는 두애를 칭찬하고 아꼈다. 대구 옻골과 멀리 떨어져 지내는 노비들은 신역(身役) 대신 자발적으로 신공(身貢)을 바치기도 했고, 최흥원이 사람을 시켜서 신공을 거두기도 했다. 의성의 종 을철이 꿀을 공물로 바쳤고, 종지의 종들은 밤 8말을 납부했으며, 다산의 종 세창의 처가 태재와 세백 두 종의 신공으로 각각 1냥씩을 가져오기도 했다. 외지에 거주하는 노비의 신공은 주로 아당과 만세가 받으러 다녔다. 1737년 연일(延日)에 아당을 보냈는데, 돈 2냥과 생선 몇 마리만 받아 왔다. 1742년 아당이 해변에서 13냥의 신공을 받아 왔는데, 최흥원은 형편없이 적다고 했다. 1740년 만세를 성주로 보내 신공을 거두어 오도록 했는데, 열흘 만에 돌아와 바친 신공이 너무 적어 가소로웠다. 다음 해에도 만세를 성주에 보냈는데, 역시 돈 8냥뿐이었다. 1742년에는 만세가 성주에서 거두어 온 공물이 너무 허술하여 최흥원은 만세에게 벌을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1743년에는 만세가 다산에서 신공으로 10여 냥을 거두어 왔다. 최흥원은 종을 채근하여 공물을 받아오지만 큰 흉년이 든 해에 가난한 노비들이 곤궁하여 원망하는 것을 알 만하여 마음이 편치 않은 적도 있었다. 신공을 바친 지역은 대구의 여러 마을을 포함하여 성주, 흥해, 연일, 영일, 의성 등지였다. 노비들은 빈번하게 도망을 갔다. 주로 인동 할아버지, 막내아우, 아당이 도망간 노비를 잡아 왔다. 1741년에 막내아우와 인동 할아버지가 여러 계집종을 추쇄했고, 신공 열 몇 냥을 거두어 왔다. 오랜만에 신공을 잘 받아와서 최흥원은 흡족했다. 밀양으로 종을 잡으러 갔던 인동 할아버지가 돌아와 말하기를, 도망간 계집종을 찾았으나 잡아 오는 대신, 신공 5냥만 받았다고 했다. 인동 할아버지가 아당을 데리고 군위, 의성, 비안 등지로 갔다가 군위 어로곡에 가서 계집종 명금을 잡아서 돌아오고, 의성 빙산에 사는 계집종 필춘에게는 공물로 소 1마리를 받았다. 계집종 엽덕의 딸 홤진을 추쇄하기 위하여 막내아우와 인동 할아버지를 경주로 보냈는데, 거기서 홤진을 잡았고 계집종 여러 명도 추쇄했으며 신공도 열 몇 냥을 거두어서 최흥원은 매우 흡족했다. 1741년에 의진의 딸 명옥이 도망갔다. 인동 할아버지를 하양에 보냈다. 1742년 1월에 명옥을 잡아 와서 심하게 매질했는데, 장독으로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죄는 괘씸하지만 죽게 만든 것은 지나친 처사여서 최흥원은 종들에게 죄를 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4년 뒤 명옥은 그의 딸과 함께 다시 도망갔다. 최흥원은 이들의 행동에 특별한 미련은 없었다. 다만 안주인이 없어 계집종들이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 걱정되었다. 최흥원은 명옥을 잡아 오기 위해 이번에는 인동 할아버지를 밀양으로 보냈다. 명옥이 거기에 사는 것을 확인했으나, 잡아 오지는 않고 신공 5냥만 가져왔다. 12월 2일에는 아당이 계집종 의춘을 잡아 왔다고 했다. 명옥 사건도 있어 의춘에게는 벌을 대충 주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속량을 요구하는 노비들도 있었다. 부노 계달은 자신의 딸을 속량시켜 달라고 요구했으나, 제사 지내는 데 배정된 종이라서 최흥원은 허락하지 않았다. 노비는 농사와 집안일에 필요했지만, 일을 열심히 하지 않거나, 도망을 가거나, 신공을 제대로 바치지 않아 관리가 쉽지 않았다. 소작인이나 노비 가운데는 신공 이외의 물건을 바치기도 했다. 1739년 6월 25일에 최흥원의 토지가 있는 해안의 군창과 학이 두 사람이 각각 숭어 몇 마리씩을 가져왔다. 같은 해 8월 1일과 3일에 두석이 숭어를 가지고 와서 어머니의 찬거리를 도와주었으니, 최흥원은 그 뜻에 사랑스러운 감정을 느꼈으며, 이를 일기에 적었다. 8월 2일에는 북산의 종 태공이 당귀 몇 뿌리를 캐어 바쳤는데, 최흥원은 이를 땅에 묻어 두었다가 봄이 오면 심어서 키우고 싶어했다. 최흥원은 종 몇 명을 관아 근처에 파견하여 여러 가지 정보를 파악하거나 관아와 최흥원 집 사이의 연락을 담당하도록 했다. 일기에는 이들을 ‘부노(府奴)’로 적었다. 옻골과 대구부 관아와의 거리는 13km 정도 된다. 부노들은 최흥원에게 수시로 물건을 바쳤다. 책력과 부채 등 관아에서 최흥원에게 주는 것을 받아 전달해 주는 역할을 했다. 부노 하징이 겨울에는 책력을 바쳤고, 여름에는 부채를 바쳤다. 최흥원이 인발을 부노에게 보내어 흰 부채 두 자루를 받아오게도 했다. 부노가 보낸 부채가 그럴듯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익영이 부채 16자루를 바쳤으나 품질이 형편없어서 미운 마음이 생겼다. 옻골 주변에는 동화사, 부인사, 은해사, 파계사 등의 사찰이 있는데, 여기에 소속된 중들도 수시로 최흥원에게 물건을 바쳤다. 관순이 흰 종이 17묶음을 바쳤고, 재생 종이 6권을 바치기도 했다. 최흥원은 부인사에 닥나무껍질 109근을 보냈다. 절에서 종이를 만들거나 책을 간행했기 때문이다. 중들은 붓, 먹, 쑥, 삿갓 모자, 초롱[燭籠] 등을 주거나, 산살구를 바치기도 했다. 은해사 중이 제철 채소를 주었고, 동화사에서 강활(羌活)과 후추를 보내기도 했다. 한번은 중 순해가 꿩을 바친 적이 있었다. 최흥원이 “중으로서 꿩을 바치는 것이 옳은가?”라고 하니, 순해가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이것도 산에서 나는 물건입니다”라고 하기에 웃으면서 받았다. 여러 아우 집에서 벼를 거두어 11말을 모아 두었는데, 순해에게 실어 가도록 했다.
  • 19세기 조선의 종부를 만나다 -유씨 부인의 가계경영과 재테크-
    • 기록자료
    • 경제
    여겨진다. 그리고 노비 막돌이를 시켜 고가의 식재료인 꿀을 4냥어치 사 오고, 갈비도 한 짝 구매하여 경화의 환갑 선물로 보냈다. 그리고 자신이 그날 받은 저고리와 옥비녀를 판매한 값으로 총 9냥 7전을 기입하였다. 양반집 맏며느리(종부)가 자신의 저고리와 비녀를 팔았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조선 양반의 모습과 거리가 멀다. 이 일기에는 돈의 흐름과 출납을 구체적으로 적은 다른 이야기들도 종종 등장한다. 당시 대부분의 남성이 생산한 자료들, 즉 행장이나 제문에는 양반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바느질과 길쌈에 힘썼다’, ‘밤낮없이 베를 짜다’, ‘치산으로 집안을 일으켰다’는 등의 서사가 종종 등장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것을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빠져 있거나 다소 막연하게 그려져 있다. 그동안 여성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조선시대 여성들의 아름다운 덕행으로 칭송되던 가사노동과 가계 운영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수행되었을지에 관한 궁금증이 컸다. 아마도 ‘돈은 어디에서 났을까?’ 하는 물음이 핵심이었을 것이다. 필자는 우연한 기회에 『경술일기』는 충남 홍성 갈산면 수한리에 세거했던 안동 김씨 선원파 가문의 다락방에서 종부 기계 유씨(1818-1875)의 언문 일기를 발굴할 행운을 가졌다. 안타깝게도 이 일기는 170여 년 동안의 습기와 쥐의 습격 속에서 일부만 살아남아 1849년부터 1851년까지 약 1년 반 가량의 기록만이 전해져 내려올 뿐이다. 그렇지만 유일한 조선시대 여성의 일기로 남평 조씨의 『병자일기』(1636-1640)만 현존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경술일기』의 발견도 역사적 사료로서 소중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더욱이 다른 일기와는 달리 일종의 가계부적인 성격이 강한 것으로 하루의 금전 출납과 주요 일과 및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어 조선시대 한 가정의 경제생활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뜻이 깊다. 본 책에서는 『경술일기』를 토대로 19세기 중반 종부의 가계경영과 그 시대를 엿보기로 한다. 【그림 1】 경술일기
  • 19세기 조선의 종부를 만나다 -유씨 부인의 가계경영과 재테크-
    • 기록자료
    • 경제
    을 드는 43명의 노비들과 함께 큰 살림을 꾸려 나갔다. 【그림 2】 안동김씨 養齊公諱時逸 출계후손 계보
  • 19세기 조선의 종부를 만나다 -유씨 부인의 가계경영과 재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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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데, 5-9명의 노비들에 의해 4월 16일부터 26일까지 계속 진행되었다(『경술일기』, 1850년 4월 16일-26일). 이후 본격적인 명주 직조를 하였는지 더 이상의 기록을 일기에서 확인할 수 없으나, 아마도 유휴 노동력의 부족으로 생산한 고치를 시장에 판매하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이 집의 노동력은 주로 여종과 유씨 부인인데, 여종들은 가사노동과 농사, 부인은 바느질에 집중했던 터라 명주 생산에 종사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명주는 직조 기술이 필요한 것이므로, 쉽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 19세기 조선의 종부를 만나다 -유씨 부인의 가계경영과 재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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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분이므로 자신의 노비들을 판매책으로 활용하고 있다. 일기에는 광점, 춘옥, 개천, 업손 등에게 물건 판매값을 받은 내역이 적혀 있다. 그 외에도 막돌과 판금을 통해 물건을 거래하고 있다. 그중 “광점에게 받은 23냥은 오더팔에게 받은 것이오, 6냥 2돈은 안경 판 것, 5냥 3돈은 내 저고리 판 것이니라”(『경술일기』, 1849년 10월 29일)라는 내용이 주목할 만하다. 오더팔은 상인 이름으로 보여지며, 아마도 이 지역의 유통을 담당하는 ‘육군상무사’ 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광점은 막돌, 판금과 함께 부인의 노비로 보이는데, 그가 부인을 대행하여 오더팔이라는 상인과 접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춘옥, 개천, 업손도 부인의 가사 일에 종사하지 않으므로 노비가 아닌 상인으로 보인다. 여기서 주목을 끄는 인물은 여성인 춘옥과 판금이다. 판금은 부인의 비로 추정되며, 춘옥이는 인근에 거주하고 있는 여성으로 보인다. 남녀가 유별한 조선 사회에서 남성 상인이라도 양반가의 안채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실제 소비생활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대적으로 높기 마련이며, 고가의 옷이나 직물, 종이, 장신구류 등이 상당량 유통되었던 역사적 사실을 감안해 볼 때, 안채와 외부 세상을 연결시켜 주던 여성 보상(褓商, 보따리 장사)들의 활동을 눈여겨봐야 할 것이다. 바로 판금이와 춘옥이가 인근 사족 여성들의 안채에 드나들면서 유씨 부인을 대신하여 판매 행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으로 총 6명의 중개인들이 부인을 대신하여 거래했던 듯하며, 이들에게는 일정의 구전이 주어지고 있다. 당대 상인들의 구전료도 물건 판매값의 1/5-1/10 정도라 하는데, 춘옥이에게 준 구전료를 계산해 보면 약 1/20 정도이다. 그러면 부인이 확보한 판매 수익금은 얼마 정도일까? 일기에는 부인이 자신의 가락지 값으로 판금에게서 본전으로 2냥 4전과 이익금 2냥 4전 4푼을 받았다는 내용이 있다. 즉, 여기서의 판매 수익금은 100%가 넘는다. 그다음으로 판금에게 준 6냥은 윤댁의 가락지 본전이고, 그 이익금은 5냥 7전이라는 것이다. 이 또한 수익률이 거의 100%에 육박함으로써 귀금속 소매가 상당한 수익성 사업임을 짐작할 수 있다. 사족 여성들의 상업 활동은 『병자일기』의 남평 조씨의 사례에서 보이고, 사족 남성들의 상업 활동도 오희문가의 『쇄미록』에서 엿볼 수 있다. 남평 조씨는 노비를 활용하여 소금, 미역, 조기 등을 구입하였다가 판매하는 영리 활동을 하였다고 하며, 관공서의 물품 공급을 독점하는 공인권 매매 기록 중 여성인 강씨 부인이 공인권을 파는 이야기도 발굴되고 있다. 그 외에도 19세기 중반 조선의 대표적인 위정척사론자였던 이항로의 둘째 딸의 경우에도 술을 빚어 생계를 삼고자 하였는데, 부친의 반대로 그만둔 사례가 있다. 그러나 성리학적 규제에서 벗어난 평민 여성들의 경우, 본 일기에서 간혹 등장하는 것처럼 떡이나 가래떡, 술, 국수, 두부, 장, 기름, 초 등을 자유롭게 판매하거나 삯을 받고 주문 생산하였다. 이 같은 현상은 조선 후기 일상생활을 그린 민화나 소설에서 목격할 수 있지만, 그동안 사족 여성들의 상업 행위는 잘 드러나지 않았다. 이렇듯 성리학적 가부장 사회에서 사족 여성의 영리 활동은 표면상 금기시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판매 행위는 대체로 자신이 소유한 귀금속이나 의복 정도를 필요 시 처분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17세기 중반 『병자일기』의 남평 조씨처럼 유씨 부인도 비록 소규모이고 간헐적이지만, 서울 등지에서 상품을 구매해 와서 노비나 중간책을 대행시켜 소매하는 등 적극적인 경제 행위를 하고 있다. 그동안 심증은 가지만 자료로 확인할 수 없었던 양반가 여성들의 상행위가 그 실체를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부인의 치산 활동을 과대평가할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가계를 넉넉하게 운영하기 위한 부수입 정도였을 확률이 높다. 이렇게 애써 번 돈은 누구의 것일까? 흥미롭게도 부인은 자신의 수익을 남편의 것과는 별개로 인식했다. 즉, 집안의 수입과 지출은 가장과 부인의 것이 각각 따로 계산되고 있었다. 남편의 돈과 지출 등을 정확하게 기록했으며, 심지어는 자신의 돈으로 산 논에 대해서는 ‘내 논’, 자신의 돈도 ‘내 돈’이라고 기입하였다. 또한, 남편이 고리대로 놓아 달라고 준 돈은 ‘임자 돈 30냥’이라는 등, 소유권을 확실히 구분하였다(『경술일기』 1851년 7월 29일). 이 같은 현상을 해석해 본다면 조선 후기에도 ‘일부’ 여성들은 여전히 자신의 재산을 소유‧처분하고 상속시켰다는 의미이며, 실제로 영조대에 편찬된 『속대전』에서도 남녀균분상속제가 확인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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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발은 모두 솔거 노비인 개덕이의 짚신으로, 가격은 4푼, 1년 6개월간 총 11번이 지급되고 있다. 그 외 집안에서 만들지 않은 각종 가공 식료품류를 구매하였다. 예를 들어 집에서 수시로 만드는 떡이나 술 등의 구매 빈도수는 매우 적으나, 국수는 6번, 두부는 5번, 엿과 꿀은 3번을 구매하고 있다. 국수의 경우 품삯을 주어 만들어 오기도 했다. 한편, 집에서 재배하지 않거나 추가로 필요한 팥‧녹두‧들깨‧깨 등의 특용 곡물류를 구입하고 있다. 무‧생강‧마늘‧머위‧청각‧배추‧파 등 일상적인 채소류는 대체로 집에서 재배하여 수요를 맞추지만, 모자라는 부분은 시장을 통해 충당하고 있다. 옷감도 다양하게 구매하고 있다. 면포‧삼베 외에 염료‧실‧바늘‧신발 등도 구매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집안에서는 양잠도 하고 노비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무명실을 생산하기도 하며, 외부에 노임을 주어 면포를 주문 생산했다. 그 외 주문하기 어려운 고급 서양목이나 5승포 군포를 비롯 노비에게 지급될 값싼 옷감류 및 기타 옷감은 시장에서 구입하고 있다(『경술일기』, 1851년 8월 26일). 그러나 의외로 어린아이 옷을 12분(푼)을 주고 구입하는 것만 나타날 뿐 다른 의복 완제품 구입은 없다. 오히려, 가족 및 친족 어른 의복까지 모두 자가 생산하여 선물로 보내고 있다. 그것은 부인이 주변 노동력을 활용하여 시장에 판매할 의복까지 생산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타 상품을 보기로 하자. 부인이 지불하는 상품 중 가장 비싼 것은 나귀 한 마리에 40냥, 논 5두락에 15냥, 은 6돈 7분에 2냥 6전, 그 외 노리개, 안경 등이 있다. 이중 나귀는 양반의 품위 유지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지출이었다. 이상 그녀가 구입한 상품의 구성비를 보면, 양반가에서 일상적으로 지출하는 문구류나 책, 담배, 고급 신발이나 갓과 같은 용품은 보이지 않으며, 일반 농가에서 자주 등장하는 농기류 구매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남편이 고급 육촉, 담배, 동정차 등 사치품들을 서울에서 구입 혹은 선물로 받아 본가로 보내고 있으며, 혁화(革靴)나 흑화(黑靴)와 같은 고급 신발도 지방 현청에서 선물로 받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 집안에서 소비되는 상품의 종류와 구매 빈도수, 지출 경비 등은 일기에 나타난 것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구매 목록에 기록된 것은 대체로 여성들의 권한으로, 가계를 운영하는 데 일상적으로 소소하게 필요한 생활용품이자 식료품들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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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 부인과 그녀의 노비들은 일 년 내내 제사 준비에 동원되고 있다. 제사의 종류는 일반적으로 사시제(四時祭), 기제(忌祭), 차례(茶禮)로 나뉜다. 사시제는 보통 시제라 불리는 것으로 음력 2‧5‧8‧11월에 지내는 합동제사이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네 번 모두 지내는 사람은 적었고, 5월과 11월 시제만 지낸 것으로 보인다. 기제는 조상이 돌아가신 날 새벽닭이 울기 전에 지내는 제사이다. 차례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설날과 추석 외에도 기본적으로 매달 음력 1일과 15일에 지내는 초하루 차례와 보름 차례가 있다. 이 중 한식과 추석 때에는 묘제로 진행되기도 하였다. 김호근가의 제사도 이와 유사한 패턴을 보이고 있다. 일기에 기재된 제사만 해도 1년에 총 26번이다. 족보에 보이는 기제사 3-4회 정도는 누락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을 합하면 총 30여 차례 된다. 이 같은 현상은 다른 양반 가문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16세기 말에 살았던 오희문은 임진왜란 중에도 25회의 제사를 지냈다고 하며, 16세기 인물 이문건도 19회의 제사를 모시고 있다. 17세기 『계암일록』을 작성한 김령(1557-1641)도 44회의 제사를 주관 내지 참석하였다. 반면, 19세기에 『단계일기』를 기술한 김인섭(1827-1903)은 13회의 제사를 주관 및 참여하였다고 하는데, 얼핏 제사의 빈도수가 줄어든 듯 보인다. 이에 대해 정진영은 19세기 들어 단오제 등 속절 제사를 대거 폐지하는 대신 기제사를 4대로 강화시킨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으나, 본 김호근가의 사례나 필자가 조사를 진행했던 아산의 예안 이씨 집안에서도 30여 회 가까이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보아 지역마다 차이가 있으며, 호서 지역의 제사 종류와 수는 그다지 감소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부인이 지냈던 제사를 유형별로 분류해 보았다. 첫째, 매월 초하루에 ‘차례’로 불리우는 제사를 모셨다. 이 차례는 제물을 ‘주과포혜’ 정도로 간단하게 준비한 후 사당에서 행해졌는데, 먼저 토지신께 술 1잔을 올린 후 의식이 시작되었다. 술은 가용주(집에서 담근 술) 중에 주로 청주나 약주를 미리 만들어 단잔으로 올렸다. 일기에는 이때 올린 다양한 차례 음식이 기술되었는데, 그중 몇 가지 사례만 확인해 보기로 한다. 기본적으로 ‘주과포혜’를 올리는 것으로 술, 과일, 마른 생선, 식혜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과포혜’는 그때그때 구하거나 살 수 있는 것으로 생률(밤)과 대합탕, 건시와 어탕, 능금(사과)과 계탕(닭고기), 참외‧호두와 계탕 등이 일기에 기재되어 있다. 둘째, ‘천신제’로 불리우는 제사가 있다. 이것은 제철에 첫 수확하는 과일이나 산물을 음식으로 만들어 조상님께 먼저 올리는 제사이다. 일기에는 1월 7일에 청어로, 5월에 보리, 8월에 햅쌀, 10월에 국화전으로 천신제를 지내는 기사가 등장한다. 지내는 날짜로 보아 부정기적인 제사로 보인다. 셋째 명절에 지내는 차례가 있다. 설과 추석 차례인데, 설에는 집에서 지낸 후 산소에 성묘를 다녀오고, 추석 때는 산소에서 차례를 모신 것으로 추정된다. 1850년 8월 15일 일기를 보면 하루 종일 비가 내려 묘사(墓祀)를 지내지 못하다가 저녁 무렵 잠깐 비가 그쳐 인근에 모신 산소에만 추석 차례를 지냈다는 기사가 나오고 있다(『경술일기』, 1850년 8월 15일). 넷째, 4대조까지의 조상이 돌아가신 기일 날에 지내는 기제사가 있다. 이 제사는 오늘날 우리가 지내는 제사와 동일한 형식과 규모로 지내고 있다. 제수 차림은 뒤에 기재하였다. 일기에 기제사는 ‘제사’로 표기되어 있는데, 4대 봉사를 하기 때문에 전부인의 제사를 포함하여 최소한 9번 지내는 것으로 보인다. 다섯째, 일기에는 10월 16일 ‘생신차례’가 등장한다. 일반적으로 부모가 돌아가신 후 3년 간, 즉 철상하기 이전까지는 부모가 살아계신 것처럼 생신상을 차린다고 하니, 이것이 바로 ‘생신차례’이다. 여섯째, 이 집안에서는 3월 3일 삼진날에는 진달래전, 5월 5일 단오날, 6월 6일 유두날에는 밀가루로 국수를, 7월 7일 칠석날 햇보리 음식, 9월 9일에는 국화전, 11월 동짓날에는 팥죽을 조상에게 올렸다고 전해지나, 본 일기에는 일부분만 반영되어 있다. 이렇듯, 일기에는 모든 제사나, 제사 음식이 다 기재되지 않았다. 다만, 제사용 편(떡)이나 술에 들어가는 쌀이나 누룩 등의 양과 기타 부재료 등이 기록되고 있는데, 이는 일기의 특성, 즉 가계부적인 일기 성격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김호근가의 예법과 제사 준비는 지금까지도 『가례원류(家禮源流)』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김호근가의 종손과 종부의 구술에 의하면 제사는 대체로 자시(새벽 1시 이후), 즉 닭 울기 전에 지냈으며, 제복으로 남성은 옥색 도포 차림, 여성은 옥색 치마저고리에 민족두리(기)를 썼다고 한다. 민족두리는 예복에 갖추어 쓰던 족두리로 검정색이며 위에 옥판이 붙어 있으나 화려하지 않게 만들어 제사용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이때 검은 댕기와 하얀 동으로 만든 큰 비녀(잠)을 함께 장착했다고 한다.
  • 16세기 미암 유희춘의 경제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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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노비 소유와 그 사환 노비 사환 방식 유희춘가에서 사환되고 있던 노비 중 『미암일기』에서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노비는 다음과 같다. 「노」 계복(繼福)·귀학(貴鶴)·남이(南伊)·내은(內隱)·단정(端正)·대근(大斤)·대공(大工)·돌공(乭工)·말똥(馬乙同)·막동(莫同)·말석(末石)·망종(芒種)·몽고리(夢古里)·몽근(夢斤, 勤)·무적(茂迪)·방원생(房原生)·병진(丙辰)·백진(白進)·분석(粉石)·붕세(朋世)·석산(石山)·석견(石堅)·석이(石伊)·석정(石丁, 鼎)·순수(順受)·억정(億丁)·연부(連阜)·영수(永守)·오석(梧石)·원목(元木)·윤손(尹孫)·와석(臥石)·이부(李阜)·일석(一石)·일산(一山)·점손(點孫)·진이(眞伊)·천근(千斤)·천리(千里)·치산(致山)·풍손(風孫)·필동(必同)·탕근(湯斤, 勤)·한복(漢福)·한수(漢壽, 守)·한양(漢陽)·한풍(漢豊, 風)·허수(許壽) 「비」 강아적(强阿赤)·계비(戒非)·구화(九花)·금향(金香)·단화(丹花)·담덕(淡德)·돌금(乭今)·막덕(莫德)·만화(萬非)·말덕(末德)·말이(末伊)·백은비(白隱非)·백물비(白勿非)·부용(芙蓉)·분향(焚香)·복수(福壽)·돌진(乭眞)·설매(雪梅)·순지(順之)·시월(十月)·옥매(玉梅)·옥지(玉枝)·유지(有之)·이덕(李德)·이대(李臺)·이비(李非)·죽매(竹梅) 즉, 노는 49명이고 비는 27명이다. 1576년(선조 9) 유희춘가의 노비가 100여 명이었으므로 약 76%의 이름이 확인된 것이다. 최근에 이들 사노비를 새롭게 구분하고 있는데 본고에서는 『일기』에 나타나는 노비들의 사환 모습을 통해 잠정적으로 사환노비와 납공노비로 구분하기로 한다. 여기서 사환노비란 유희춘의 집과 토지가 있는 해남과 담양 인근에서 유희춘가의 농토를 경작하면서 유희춘가의 대소사에 동원되는 노비를 말하고, 납공노비란 거주에 관계없이 신공만을 바치는 노비를 일컫는다. 그러면 이들 노비 중 사환노비와 납공노비의 비율은 어느 정도의 비중을 차지할까. 김제에 사는 말똥과 마덕이, 진주에 사는 돌진의 아비, 돌공, 개성에 사는 한 명의 노비가 납공노비였던 것으로 보인다. 즉 납공노비는 76명 중 5명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난다. 납공노비가 유희춘가에서 사환되고 있지 않아 『미암일기』에 등장할 기회가 적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름이 확인되지 않은 노비 중에 납공노비가 상당수를 차지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도 납공노비의 수는 사환노비에 비해 절대적으로 적다. 다음의 자료를 통해 납공노비들이 어느 정도의 신공을 납부하고 있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 노 내은석(內隱石)이 개성부에서 돌아왔다. 유기주발 2개와 동쟁반 1개를 10년 신공을 내지 않은 것에 대한 대가로 바친다기에, 내가 웃으며 받았다. ㉡ 돌공(乭工)이란 놈이 전날에 신공으로 면포 필을 가지고 여기에 왔으나, 나타나지 않고 도망가 버렸다. 오늘 내가 잡아다가 볼기를 때렸다. 개성부의 내은석은 10년 동안의 신공으로 유기주발 2개와 동쟁반 1개를 바쳤다. 이는 유희춘이 해배된 이후의 기록이므로 정당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이는 10여 년간의 신공으로 급하게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돌공은 신공으로 면포 필을 가지고 왔다. 그러나 유희춘을 찾아보지도 않고 도망간 것으로 보아 이는 실제 바쳐야 할 것과는 차이가 컸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유희춘이 첩 무자(戊子)와 얼녀 해성(海成)이 백미 10말 정도의 신공을 바치고 있었으므로 유희춘도 이 정도의 신공을 수취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백미 5말이 5승목 1필로 상환되고 있었으므로 이는 면포 2필에 해당되는 것이다. 당시 유희춘은 공노비로부터 선상가(選上價) 8필, 일반 양인으로부터 보병가(步兵價) 12필, 그리고 반인(伴人)으로부터 신공 12필을 수취하고 있었다. 따라서 노비의 신공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크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이들 노비들의 사환 실태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유희춘은 노를 ‘해남노’․‘담양노’라고 부르는데 이는 그들의 거주지에 따른 호칭으로 보인다. 유희춘의 본가는 해남이었고, 처가가 담양이었으므로 이들 노비도 대체로 이 지역을 중심으로 거주하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이들이 토지의 경작에만 종사하는 것이 아니라 유희춘가의 대소사에도 동원되고 있었다. 즉, 유희춘가의 경작자인 석정·막동·필동 등도 혼인·집짓기·제사 등 유희춘가의 대소사에 수시로 동원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주거만을 기준으로 솔거와 외거로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하겠다. 이 노비들은 각자의 능력과 여건에 따라 역할을 달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농사와 가사 전반을 관리하는 수노가 있었고, 옆에서 시중을 드는 안전 사환노비도 있었으며, 부엌일을 담당하는 취비, 바느질을 담당하는 침비, 땔감을 해 오는 초노가 있었다. 그밖에 당시 중요한 운송수단인 말을 관리하는 노가 있었고 또한 가직비(家直婢)라 하여 집을 지키는 비도 있었다. 유희춘은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서울에 집을 소유하지 못하여 남의 집을 전전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 노비도 유희춘을 따라 상경하였다가 다시 귀향하게 된다. ㉠ 듣자 하니 부인이 봉세(朋世)·천공(大工)·옥석(玉石)·남이(南伊)를 상경하는 노(奴)로 삼는다고 하나 나는 한풍(漢風)을 더 데리고 가고 싶다. 또 비는 유지(有之)·백은비(白隱非)로 정했는데 백은비는 느리고 둔해 두 비의 역(役)이 모자라니 바꿔야겠다. ㉡ 해남노 계복(繼福)과 한복(漢福)이 또 왔다. 내가 몽고리(夢古里)를 이곳에 머무르라고 했다. 그 나머지 노는 올라간다. 노 한양(漢陽)·계복(繼福)·한복(漢福)은 상경한다고 했다. ㉢ 노 오석(梧石)이 그 어미의 생계를 위해 돌아갈 것을 청하기에, 그렇게 하라고 했다. 유희춘은 대체로 노 3~4명과 비 2~3명을 상경시켜 사환했다. 노는 오석·붕세·대공·몽근·한양·한풍·계복·한복 중에서 그리고 비는 유지·옥지·백은비·돌진 중에서 선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주로 부인 송 씨가 결정하는데 노비들의 형편과 사정을 감안하여 결정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유희춘은 좀 더 많은 인원을 데려가기 원하였으나 형편은 여의치 못하였다. ㉢에서와 같이 상경하여 사환되던 노비도 사정이 있을 경우에는 귀향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상경하게 되면 근거지를 떠나 오랜 기간 가내 사환에만 동원되었기 때문에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이들 노비는 상경하여 노는 경향간의 연락, 녹봉 수록, 호행(護行), 말 관리, 땔감하기 등에, 그리고 비는 집안일, 부엌일, 바느질, 제수 준비, 빨래, 가까운 거리의 잔심부름 등에 종사하게 된다. 주목되는 사실은 이들 상경 노비에게 일정한 삭료가 지급되었다는 사실이다. ㉠ 노비에게 삭료를 지급하였는데 비는 쌀 3말이고, 노는 쌀 5말씩이다. ㉡ 노비에게 삭료를 지급했는데 3명의 노에게는 각각 5말을 2명의 비에는 각각 3말씩이다. ㉢ 노비에게 삭료를 지급했는데 3명의 노에게는 각각 5말을 비에는 각각 3말씩이다. ㉣ 3명의 노에게 쌀 각 5말과 팥 1말씩을 2명의 비에게는 각각 쌀 3말씩을 주었다. 『미암일기』에서 확인되는 노비 삭료지급 기록은 위의 4건뿐이다. 유희춘이 노에게 쌀 5말, 비에게는 쌀 3말씩을 일정하게 지급한 사실로 미루어 매달 주는 것이라 하겠다. 어떠한 이유로 자신이 소유한 노비에게 삭료를 지급했는 지에 대한 의문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그런데 위의 자료가 나오는 시기가 모두 유희춘이 상경하여 생활하던 때이고, 삭료의 지급이 대체로 녹봉의 수록 시기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통해 이러한 삭료가 모든 노비에게 지급되는 것이 아니라 상경하여 생활하던 일부의 노비에게만 지급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 상경노비에게 삭료가 지급된 것은 이들이 경작지가 소재하지 않은 서울에서 가족과 떨어져 가내 사환에만 동원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향리에 있는 노비들도 주가에 의해 일방적으로 사역되는 것이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급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물론 유희춘을 비롯한 양반들은 존비(尊卑)를 구분하는 철저한 신분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유희춘의 외손녀 은우(恩遇)의 다음과 같은 행동에서 잘 나타난다. 외손녀 은우(恩愚)의 영특함이 남달라 함께 놀던 어린비 말덕(末德)이 손가락을 다쳐 울자 옆에 있던 소비(小婢) 죽매(竹梅)가 말하길 “아기씨는 어찌 같이 울지 않습니까?” 하자 은우(恩遇)가 말하길 “만일 어머니가 우신다면 내가 당연히 울어야겠으나 비가 우는데 어찌 같이 울겠느냐?” 하였다 한다. 친소존비(親疎尊卑)의 구분을 분별할 줄 알아 식견이 높은 것이 보통이 아니니 어찌 기특하지 않겠는가. 은우(恩遇)는 유희춘의 외손녀로 영특한 아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어머니가 우신다면 나도 당연히 울어야 하겠지만 비가 우는데 어찌 같이 울겠느냐!” 하며 친소·존비를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교육을 통해 존비가 서로 구분된다는 생각을 지니게 되었을 것이다. 유희춘은 노비를 다스림에 있어 ‘공명구립(公明俱立) 은위병행(恩威竝行)’의 방법으로 통제를 하였다. 1) 함께 담소하지 않는다. 2) 그 개인 물건을 빼앗지 않는다. 3) 하지 못하는 것을 분명히 한다. 4) 까다롭게 살피는 것을 일삼지 않는다. 5) 죄가 드러나지 않으면 때로 포용한다. 6) 죄가 이미 드러났으면 태와 장을 적절히 친다. 7) 죄를 자백하고 사실을 아뢰는 자는 죄를 줄인다. 8) 근거 없는 말로 죄를 남에게 전가하는 자는 죄를 더한다. 9) 공이 있는 자는 재물과 의복으로 상을 준다. 10) 수고함이 있는 자는 음식으로 상을 준다. 11) 지나치게 상을 주면 자기들끼리 질투하고 원망하니 살피지 않을 수 없다. 12) 서로 싸우는 자는 이치의 맞고 틀린 것과 다친 정도의 경중을 헤아려 죄를 결정한다. 13) 상대방을 미워하여 주인에게 꾸며서 아뢴 자는 죄를 준다. 14) 대요는 공명구립과 은위병행이다. 즉, 「정훈(庭訓)」에 실려 있는 부친의 교훈을 실제 생활에 실천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유희춘은 자신의 노비들에게 여러 가지 온정적 은혜를 베풀었다. 이들 노비에게는 때때로 면포와 가죽을 주어 의복을 장만하게 하여 주었다. 또한 노비에게 공이 있거나 심부름하는 등의 수고함이 있을 경우 현물로써 그 대가를 치렀다. 이러한 기록은 『미암일기』에 많이 나타나는데 일부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 모재(慕齋) 김상공 댁의 노 감손(甘孫)은 일찍이 상공(相公)을 위하여 제사를 지냈던 자인데 장단(長湍)까지 따라간다고 왔다. 내가 백미 1말을 주었다. ㉡ 노비 중에 옛 적에 공이 있던 자에게 모두 상을 주었다. ㉢ 박난정(朴蘭榮)의 노가 메주 만들 콩 20말을 받아갔다. 따로 콩 1말을 수고의 대가로 주었다. ㉣ 사방으로 얼음을 구해도 얻지 못했는데 노 옥석(玉石)이 다행히 내빙고직(內氷庫直)으로부터 1덩이를 얻어 왔다. 기뻐서 상으로 부채와 쌀을 주었다. 유희춘은 해배되자 노비들을 시켜 장단에 있는 스승 김안국(金安國)의 묘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그때 김안국의 노 감손(甘孫)이 길 안내를 하기 위해 따라왔는데, 그가 이전에도 김안국의 제사를 지냈던 사실을 기억하고 쌀 1말을 주었다. ㉢에서와 같이 박난정(朴蘭榮)의 노가 유희춘에게 와서 메주 콩 20말을 받아 가자 따로 1말을 마련하여 지급하였다. 또한 사방으로 얼음을 구해도 얻지 못했는데 마침 옥석(玉石)이 내빙고직에게 청해 얼음 한 덩이를 얻어 오자 상으로 부채와 쌀을 주었다. 당시 얼음은 음식을 상하지 않기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옷감에 쪽물을 들이는 데 있어서는 반드시 필요하였다. 옥석은 유희춘가에 입역하던 구종(丘從)으로 내빙고직과 면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유희춘은 노비들과 특별한 인연이 있었거나 감회가 있을 경우 그 사연을 기술하고 그 마음을 현물로써 표현하였다. ㉠ 연지동 이정랑댁(李正郞宅)의 비 막덕(莫德)이 그 주인의 명을 받아 인사차 왔는데, 옛날 습지(習之)를 따라 갑산(甲山)에 왔던 자이다. 내가 백미(白米) 1말을 주었다. ㉡ 듣자 하니 오자댁(吳姉宅)의 늙은 비 강아지(强阿只)가 죽었다고 한다. 나이는 71세이다. 젊었을 때 어린 나를 업어 주었던 자이다. 마땅히 부조를 해야겠다. ㉢ 석정(石丁)은 주인을 위한 일에 정성을 다하고 거짓을 꾸미는 일이 없다. 부인이 1571년(선조 4) 해남에서 병에 걸렸을 때 마음을 다해 구호했다. 우리 부부가 특별히 먹을 것을 주었고, 부인이 포(布) 반 필을 그리고 내가 붓과 먹을 주었다. 석정이 고마워서 울먹였다. ㉣ 포(布) 3자 반을 늙은 비 응이(應伊)에게 주었다. 가문의 오래된 비이기 때문이다. 즉, 이정랑댁 비 막덕(莫德)이 유희춘의 유배지인 갑산(甲山)까지 왔던 것을 기억하며 그를 만나자 백미 1말을 지급하였으며, 해남의 큰 누이에게 상속된 늙은 비 강아지(强阿只)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어렸을 때 업어 주었던 정을 생각하여 부조를 하였다. 또한 석정이 1571년 부인이 병에 걸렸을 때 진심으로 구호하였기에 유희춘 내외가 음식과 포와 필묵 등을 지급하였다. 또한 비 응이(應伊)는 이종인 나주 나씨 가문에 상속된 비인데 가문의 오래된 비라 하여 포 3자 반을 주었다. 유희춘은 노비가 병이 났을 때 관심을 기울여 치료에 힘썼다. ㉠ 노 옥석(玉石)이 감기가 들어 배가 아프다고 하고 기가 막힌다 하기에 급히 소합원(蘇合元)을 먹였더니 나았다. 아침에 의원 김언봉(金彦鳳)이 와서 옥석을 살폈는데, 맥이 순하니 나을 것이라고 했다. ㉡ 노 옥석(玉石)이 풍에 걸려 아파 누웠다. 집안 식구들이 살리려고 애쓰고 있다. 김언봉(金彦鳳)이 와서 진맥하고는 치료할 수 있다고 한다. ㉢ 어린 비 돌금(乭今)이 딸의 방을 지키다가 깜박 졸다가 정원으로 굴러떨어지는 바람에 머리를 장독에 부닥쳐 깨졌다. 모든 식구들이 놀랐다. ㉣ 비 이대(李臺)가 홍역에 걸린 지가 이미 6일이 지났다. ㉤ 의원 심안신(沈安信)이 왔기에, 내가 비 담덕(淡德)의 핵결(核結)을 살피게 하였다. 심이 썩을 수가 있다고 하면서 그 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동대문 밖에 있다고 한다. 유희춘은 노비의 질병에 상당한 관심을 보이며, 이를 치료해 주고자 하였다. 노 옥석이 독감에 걸리자 소합환을 먹인 뒤에 의원을 불러 치료하게 하였다. 그 후 옥석이 다시 풍으로 앓아 눕자 온 집안 식구들이 안타깝게 여기며 의원을 불러 치료하게 하였다. 또한 어린 비 돌금이 딸의 방을 직숙하다 떨어져 머리가 깨지자 식구들이 모두 놀라워하고 있다. 비 담덕이 핵결(核結)이 생기자 의원을 불러 살피게 하였다. 이는 노동력의 상실을 우려한 측면도 없지 않지만 노비에 대한 인간적인 배려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유희춘은 노비들의 사정을 살펴 그들에게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해 주었다. ㉠ 노 오석(梧石)이 그 어미의 생계를 위해 돌아갈 것을 청하기에, 그렇게 하라고 했다. ㉡ 노 천리(千里)가 지난해 8월 20일에 종성에 도착해 그 어미를 만났다. 그 어미가 이미 병이 들었으나 만나 보고 기뻐했다. 9월 3일에 이르러 죽었다. 천리가 간 것은 우리 부부가 갈 것을 권했기 때문이다. 죽어 갈 무렵 만나서 임종을 할 수 있었으니 이것도 큰 행운이다. ㉢ 노 몽근(夢勤)이 말미를 받아 해남으로 돌아갔다. 노비에게도 부모가 있으며, 그들은 따로 떨어져 생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우 유희춘은 이들 노비가 자식의 도리를 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상경하여 사환되던 노 오석이 그 어미의 생계를 위해 귀향을 청하자 이를 허락하였으며, 노 천리에게는 종성에 사는 그의 어미가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죽기 전에 만나볼 수 있게 해 주었다. 사실 노비에 대해 배려를 하면 할수록 그들의 충성은 더 커지게 마련이다. 유희춘이 보다 용이하게 노비를 사환시킬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이러한 배려와 보살핌 때문이었다. 유희춘가의 대표적인 충성스러운 노는 석정이었다. 그는 ‘사주유성 불위사사(事主有誠 不爲欺詐)’ 인물로 일정하게 문자 해독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희춘 내외는 석정이 1571년(선조 4) 부인이 해남에 있으면서 아팠을 때 마음을 다해 구료 했던 일을 기억하며 먹을 것과 여러 가지 물품을 내어 주었다. 석정은 유희춘가 농사 전반을 관리하고 유희춘가가 해남과 담양에 집을 지을 때 이를 관리·감독하였다. 또한 유희춘 일가가 모두 상경하여 생활할 때에는 집안의 제사를 봉행하기도 하였다. 당시 집안마다 이 같은 수노(首奴) 한 명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돈인 김인후(金麟厚) 집안의 세동(世同)이 여기에 해당되었다. 이들 충노의 덕목 중 중요한 것은 주인에게 정성을 다하고 속이지 않는 것이었다. 석정을 가리켜 ‘주인의 일에 정성을 다하고 거짓으로 속이지 않았다’고 하고 세동을 가리켜 ‘1자의 면포도 사사로이 하지 않았다’ 하는 말에서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유희춘은 석정이 종성에 와서 아들 경렴의 병을 구제하고, 함경도로 심부름을 와서도 1자의 면포도 사사로이 취한 적이 없다는 점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사돈집 노이지만 우리집 노 석정을 보는 듯한다고 하였다. 사실 이들 노비의 사환과정에서 주인을 속여 물건을 훔치거나 떼어먹는 일은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희춘도 항상 배려하고 보살피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노비에게 잘못이 있을 때에는 엄하게 꾸짖고 매질을 함으로써 잘못을 뉘우치게 하였다. ㉠ 오늘 낮에 몽근(夢勤)과 대공(大工)에게 태를 쳤다. 이는 어제 수행을 하다가 멋대로 이탈했기 때문이다. ㉡ 노 몽근이 풀베기를 싫어하여 성을 내고 오만하게 굴며 불손하기에, 내가 종아리에 40대의 태를 쳤다. ㉢ 비 부용(芙蓉)과 노 대공(大工)이 서로 싸워서 내가 다리에 태를 쳤다. ㉣ 행랑방 옆에서 불이 나는 바람에 놀랐으나 겨우 껐다. 조심하지 않은 비에게 태를 쳤다. ㉤ 노 한풍(漢風)이 말먹이를 훔쳐 먹는 바람에 흰 총마(驄馬)가 수척해졌다. 여주 리마소(理馬所)에서 알게 되어 그 죄를 나중에라도 다스리기 위해 정강이와 볼기에 태를 쳤다. 몽근과 대공이 유희춘을 수행하던 중에 함부로 이탈하자 매를 쳤으며, 노 몽근이 풀베기를 싫어하고 성을 내고 불손하게 굴자 매질을 했다. 또 비 부용과 노 대공이 서로 싸우자 정강이에 매질을 했으며, 행랑방 옆에 불이 나자 조심하지 않은 비를 불러 매질을 했다. 또한 노 한풍이 말먹이를 훔쳐 먹는 바람에 말이 수척해졌다는 사실을 안 뒤에 이미 지나간 일임에도 불구하고 정강이와 볼기에 매질을 했다. 즉, 유희춘은 노비가 본연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지 않고 거만할 경우 여지 없이 매질을 함으로써 다시는 그러지 못하게 경계하였다.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더라도 밝혀졌으면 처벌을 하였다. 유희춘은 자신의 노비가 주인가의 권세를 빙자하여 방자하게 구는 것을 가장 경계하였다. 노 한수(漢守)가 항거하고 오랫동안 오지 않기에 그 처를 가두었더니 그때야 왔다. 완악하고 고약한 죄를 다스리기 위해 내가 사랑채로 나가 앉아 태를 40대 치고 또 노자(奴子)·비부(婢夫)들에게 이르기를 “세간에 유향소(留鄕所)의 노들도 오히려 방자하다는 소문이 나도는데 하물며 재상집 노복은 더욱 삼가해야 한다. 너희들이 만약 작답(作畓)할 때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물을 고르게 나누지 않거나 장시에 나가 다른 사람과 같이 이익을 다투는 등 (나의) 권세를 믿고 다른 사람을 침해하는 일을 일체 해서는 안된다. 감히 나의 가르침과 명을 따르지 않으면 볼기에 장(杖)을 치고 정강이에 태(笞)를 가할 뿐만 아니라 발바닥도 때릴 것이니 너희들은 각별히 근신하고 삼가하라”고 하였다. 노들이 모두 “예 예” 하고 물러갔다. 한수가 오랫동안 항거하고 오지 않자 유희춘은 그의 처를 볼모로 잡아들인 후 욕심이 많고 고집이 센 죄로 태 30대를 쳤다. 그리고는 그의 노와 비부를 모두 모아 놓고 재상가의 노복이라는 사실을 이용하여 논을 경작하는 데 있어서 물을 균등히 나누고 장시에서 다른 사람과 이윤을 다투지 말라고 하고 있다. 당시 노비들이 주인가의 권세를 믿고 다른 사람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유희춘의 가르침과 명을 따르지 않으면 장을 치고 태를 가할 것이니 각별히 근신하고 삼갈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는 당시 노비들이 주인집의 권세를 믿고 횡횡방자하는 사례가 만연하였음을 반영한 것이다. 실제 북질구미(北叱仇未)에 사는 사노 거손(巨孫)은 배를 가지고 물건을 실으면서 이 배는 유승지댁의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야만 다른 사람보다 물건을 빠르게 실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노 한풍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유희춘은 곧 해남현감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해남현감은 그를 잡아들여 태 40대를 쳤다. 요컨데 유희춘가에서는 100여 구의 노비가 사환되고 있었는데 그중에서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노비는 노 49명, 비 27명으로 모두 76명이다. 이들 중에서 5명만이 신공을 바치는 납공노비이고, 나머지는 사환노비이다. 사환노비들은 유희춘가의 인근에 살면서 유희춘가의 토지를 경작하는가 하면 집안의 대소사에 동원되었다. 이 중 일부가 상경하여 사환되었는데, 이들에게는 일정한 삭료를 지급하였다. 유희춘은 이들 노비를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정훈」에 ‘공명구립 은위병행(公明俱立 恩威竝行)’의 방식으로 다스렸다. 그는 선대의 유훈을 깊이 새겨 그러한 원칙 하에 다스리고자 하였다. 노비가 공이 있을 때에는 상을 주고, 아플 때는 의원을 통해 구제하며, 잘못이 있을 때는 엄히 다스렸다. 즉 노비의 사정을 잘 살펴 따듯하게 배려하되 그들의 잘못은 엄히 꾸짖어 뉘우치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유희춘은 그의 노비들이 자신의 권세를 믿고 함부로 방자하게 구는 것을 가장 경계하였다.
  • 16세기 미암 유희춘의 경제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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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 대개 양식 및 노비 삭료, 식객 접대, 제물 준비 등에 사용되었을 것이다. 주목되는 사실은 서울에 올라와 있는 재경노비에게 삭료를 지급하였다는 사실이다. 유희춘은 노에게는 쌀 5말씩을, 비에게는 쌀 3말씩을 지급하고 있었다. 이들에게 지급한 것을 삭료(朔料)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매달 지급한 것인지, 아니면 녹봉을 받을 때만 지급한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1년에 4회를 지급한다고 해도 지속적으로 지급하였다면 그 규모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상경한 노비가 5-7명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1573년에는 포 3필로 중국산 조복(朝服)을 사들인 사실이 확인된다. 이는 아들의 관직 진출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쌀 70말로 5승목 14필을 구입한 기록이 확인되는데, 이는 쌀의 변질을 우려하여 면포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쌀보다는 목면의 변질 가능성이 적기 때문이다. 또한 이 때는 유희춘 일가가 모두 상경하여 생활하고 있어 집에서 사용한 것도 많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표 2】 녹봉의 사용처 유희춘은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서울에 집을 갖고 있지 못하였다. 이는 서울 소재 집의 가격이 높은 데에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는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5-7명 정도의 노비를 데리고 남의 집을 빌려서 생활하였다. 그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녹봉을 받아도 이를 쌓아 둘 창고가 없었다. 그리하여 인근에 사는 동료 박개(朴漑)의 집에 맡겼다가 필요할 경우에 가져다 쓰고 있었다. 유희춘이 자신이 받은 녹봉을 자신의 향리인 해남과 담양으로 가져가는 경우는 없었다. 유희춘이 1570년(선조 3) 담양으로 내려가 서울에 있는 녹미 2섬과 콩 3섬을 보태어 논을 사들이기도 하나, 이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이다. 대부분의 경우는 식구들의 양식, 손님 접대, 제수 준비, 재경노비의 삭료, 서책과 비단의 구입이나 지인의 경조사 부조 등 주로 서울에서 사용하였다. 유희춘은 녹봉으로 경제생활을 영위한다는 생각이 없는 듯 중국으로부터 서책·약재· 조복 등을 구입하고 부인을 위해 단자와 명주 등의 값비싼 옷감 등을 사들였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친인척이나 지인에게 지급하였다. 그리고 귀향할 경우에는 남은 녹봉을 서울에 올라와 있는 친인척에게 넘겨주고 떠났다. 사실 이를 싣고 멀리 담양이나 해남으로 간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녹봉이 양반 관료의 주된 생활 보장의 명목으로 지급되었지만, 실제 그것이 갖는 의미가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유희춘이 녹봉을 가볍게 생각한 것은 아니다. 유희춘은 녹봉의 수록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수록 후에는 감록 여부를 기록하고, 감록 된 연유를 알아본다. 규정량을 받았을 때는 갑자기 부자가 된 것 같다든지, 전에 볼 수 없는 일이라고 기뻐하는가 하면, 녹미가 광주·담양·창평의 쌀이라는 것을 알고 품질이 좋을 것이라고 흡족해하였다. 주목되는 사실은 유희춘이 충의위 박명성(朴命星)의 녹을 대신 수록하여 유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박명성은 담양에 연고가 있는 인물로 선대부터 유희춘 집안과는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사실 다른 사람의 녹봉을 받아서 사용하는 것은 불법적인 행위이다. 호조에서도 유희춘의 대록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서리가 직접 파견되고, 광흥창에서 봉사와 부봉사가 나와 박명성 녹패의 반납을 요구하였지만, 유희춘은 이를 듣지 않았다. 요컨대 16세기 중엽 이후 관료의 처우 내지는 생활을 보장한다는 녹봉의 의미는 점차 퇴색되어 갔다. 그리하여 이러한 녹봉을 통해 양반으로서의 체모까지 유지하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여겨진다.
  • 19세기 조선의 종부를 만나다 -유씨 부인의 가계경영과 재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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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안방마님의 노비 경영 ‘사적인’ 영역과 경영의 대상인 노비들 19세기 중반 김호근가에는 ‘공적인 공간’에서의 남편 일과 ‘사적인 공간’에서의 부인 일이 정확하게 구분되고 있다. 가장인 남편은 과거 준비와 가례의 수행, 소작지 관리 및 기타 ‘밖’의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한편 부인은 ‘안’의 업무를 관장하였는데, 일기에 나타난 총 43명의 노비들을 부리며 3명의 자녀를 키웠다. 또한 집에 방문한 133명의 손님 접대, 일년 30여 차례의 제사 준비, 외부로의 수많은 선물 송출, 가족 및 개인의 사회적 네트워크 등을 관리하였다. 부인은 이른바 ‘사적 영역’으로 인정받고 있는 안살림, 즉 가계경영에 대해서는 가장이나 다른 어느 누구의 간섭을 받지 않고 전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여기서 전권이란 가사에 필요한 재화의 처분권, 노비 인사권, 노동력 배분권, 그리고 가사 운영권을 의미한다. 가계 구조상 그녀는 사회적으로 지위와 권위를 인정받는 종부였으며, 직접적으로 시집살이를 시킬 수 있는 시부모는 사망한 상태이다. 남편 또한 상당 기간 동안 서울에 체류하면서 과거 준비에 몰두거나 출타 중이므로 간섭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할 상황이 아니었다. 또한 “남자는 집안의 일을 말하지 않고 여자는 밖의 일을 말하지 않는다.”라는 「내외법」의 논리가 그녀에게 가정 운영과 자녀 양육에서 전권을 행사할 수 있는 명분이 되었다. 조선의 종부들은 비록, 밖에서는 구별 당하고 차별받았지만, 안에서는 독자적인 영역을 인정받았다고 할 수 있다. 유씨 부인의 일기에는 경영의 대상자들인 노비들의 이름이 무수히 등장한다. 사득, 상득, 천금, 천만, 판손, 판길, 판금, 판절, 개금, 개덕 금례, 열, 금섬 등이 기재되어 있으며, 그들을 부를 때에는 종‧노복‧년‧놈‧계집종‧남노‧‘것’의 호칭이 나오고 있다. 예속민으로 추정되는 사람들도 등장한다. 차복, 원섬, 귀점, 옥복이, 춘매, 춘금, 늦네, 검손 어미, 조잘이 어미 등이 그들인데, 갈치나 계란 등을 들고 유씨 부인에게 문안 인사를 핑계로 청탁을 하거나 돈을 빌려 가는 사람들이다. 그밖에 사람들은 교군·상군·장군·일군·성명 등 직업에 따른 명칭이나 이름으로 표기되고 있다. 양 집단 호칭 중 가장 큰 차이는 노비를 지칭할 때는 비인격적 사물인 -것, 예속민을 지칭할 때는 인격적 사물인 ‘-사람’으로 부르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들이 부인의 관리 대상자이다. 그런데, 한 집안에서 일하는 노비의 수가 40여 명이나 된다고? 기존의 연구에 따르면 19세기는 노비제 해체기로 알려져 있다. 사노비들의 도주 그리고 노비 면천법의 실시로 노비들도 합법적으로 신분 상승이 가능해졌다. 결국 공노비의 노비안이 유명무실해지자 1801년 순조는 중앙관서에 소속된 공노비를 해방시켰다. 1886년 고종이 노비세습제 폐지를 공포하면서 조만간 종말을 고할 것으로 예측되었고, 1894년 갑오개혁을 기하여 완전히 폐지되었다. 이같이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지주가와 양반가에서 소유하고 있는 노비의 수는 대폭 감소하여 호적대장에는 많게는 10명, 대체로 1-2명 정도만 기재되고 있었다. 이같은 현상에 대해 학계에서는 노비제 해체기를 반영한다고 해석하였다. 그러면 유씨 부인의 집에는 왜 이리 노비가 많이 있을까? 혹시 일반 고용인들이 아닐까? 이 집안에는 유씨 부인이 생존해 있던 1861년도와 1867년도 호구단자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 두 개의 호구단자에 각각 32명과 28명의 노비가 기재되어 있다. 즉 노비가 일기에 기재된 43명이 아닐지라도 적어도 32명은 실재했다는 이야기이다. 종손의 증언 역시 노비의 존재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과연 노비제는 종말을 고하고 있었을까? 많은 고문서에서 나타나듯이 육족(六足), 즉 두 발을 갖는 노비와 네 발을 갖고 있는 말은 양반이 행차할 때 동반해야 할 필수품이었다. 또한 종가집에서 ‘봉제사 접빈객’ 업무를 수행하려면 상당량의 노동력이 확보되어야 한다. 현재 공장에서 생산하여 판매하는 많은 식재료와 물품, 품이 많이 들어가는 정미 작업, 요리, 가옥 관리 등을 모두 사람의 손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노비 노동을 대체할 다른 수단이 등장하지 않는 한 노비제의 소멸은 시간이 좀 더 필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림 6】 함남북청 청해백 자손 집안 노비,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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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안방마님의 노비 경영 북적거리는 찬방과 노비의 업무 유씨 부인은 자신의 노비(종)들에게 어떤 업무를 부여했을까? 먼저 남자 노비인 노(奴)의 경우를 살펴보자. 일기에 등장하는 약 19명의 가내사환 노들은 다수가 농사일보다 물건 구매와 장거리 선물 및 편지 교환, 집안 내 다양한 잡무들과 가마 메는 업무에 종사했다. 이 중에서 9명의 남자 노들은 서울과 황해도 쪽의 편지 및 물자 수송에 수시로 교대하면서 동원되었다. 노의 절반이 물자 수송 업무에 할당된 것은 이 집안의 사회적 지위와 연망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남편과 아들이 서울에서 장기간 체류하고 있었기에 이들과의 통신 및 물자가 빈번하게 오르내렸을 것으로 보인다. 일기가 작성되는 동안에 관손이가 서울을 2회, 금례, 중천, 청록, 충선이 서울을 각 1회씩, 운천과 청록이 청양에 각 1회씩, 그밖에 이름이 기재되어 있지 않은 종이 서울에 4회, 황해도에는 2회를 왕래하고 있다. 또한 남편이 서울에서 수한리로 귀가할 때는 가마꾼 서너명이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수치는 상대편에서 보낸 종의 수와 인근 지역에 보낸 종의 수는 제외한 것이다. 이처럼 이 집안은 물자 및 편지 수송에 많은 인력을 투입했다는 특징이 있다. 이는 양반가에서 사회적 네트워크를 유지‧확대하기 위해 노력했음을 방증하며, 조선시대의 거리와 공간 개념은 생각보다 가까웠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경술일기』, 1850년 2월 27일) 한편 유씨 부인의 오른팔인 막돌이는 다른 중요한 업무에 투입되었다. 부인은 여성복과 장신구 등을 제작·판매하여 현금을 확보한 후 이를 이용하여 고리대를 하는 모습이 포착된다. 이때 부인은 믿음직한 막돌이를 통해 돈을 대출하거나 회수하고 있다. 그 외 다른 노들은 집안 심부름, 물품 구매, 소규모 제초, 씨 뿌리기, 밤 수확, 땔감 장만, 제사에 쓰이는 세육(고기) 담당 등의 작업에 종사하였다. 이 외에 지붕과 울타리 등의 집 보수 작업도 중요한 업무 중 하나였다. 그러나, 외부에서 농사를 위해 대규모 노동력이 동원되는 경우 이들에게는 감독 역활이 주어진다. 노동 조직은 대체로 노 1명에 외부 노동력 15명 내지 30명씩으로 편제되어 있으며, 함께 노동과 식사를 했던 시스템이었을 것이다. 유씨 부인은 여자 노비인 비(婢)들에게 다양한 가내 업무를 담당시켰다. 비들은 식사나 빨래, 청소, 제수 준비, 용정(정미 작업), 김장, 참기름 짜기 등 가사 일이 주 업무이나 밤 수확, 농번기 제초 작업 및 수확 등 농사일에도 동원되었다. 또한 바느질, 양잠, 목화 및 면포 작업도 주요한 업무 중 하나였다. 그 외에도 근거리 잔심부름이나 주인 대신 대리 문병 혹은 조문도 다닐 뿐더러 인근 친족들에게 편지나 세찬 등을 돌리는 사환역도 겸하고 있다. 특히 새해에 남편이 인근 친족 어른들에게 새해 인사를 다녀왔음에도 불구하고 유씨 부인은 판절이를 방곡댁에, 복매를 노호댁에, 점래를 오곡댁에, 판업을 야계댁에 보내어 새해 인사를 대행시켰다. 물론 그 반대로 지곡댁 종과 오곡댁 종이 이 집에 다녀간 것도 기록되고 있다. 부인은 자신의 비를 친족 집에서 김장이나 메주 만드는 작업, 혼‧상례 업무 등 대규모 노동력이 일시에 필요할 때 파견 근무도 시키곤 했다. 물론 반대급부도 예상할 수 있으므로 일종의 품앗이 형태라 볼 수 있다. 이렇게 여성 노동력은 다방면으로 쓸모가 많았기 때문에 유씨 부인 일기에도 비의 수가 더 많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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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안방마님의 노비 경영 작업 배분과 경영 비법 안방마님의 노비 다루는 솜씨를 보기로 하자. 먼저 경영 체계를 파악해 보자. 유씨 부인은 최종 결정자이자 감독관이다. 그 아래 수노(首奴)인 막돌이가 집사로서 부인의 명을 받드는 집행자이자 부감독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밑에는 직접 업무를 담당하는 42명의 노와 비로 구성되어 있다. 그밖에 일손이 추가로 필요할 때마다 고용되는 고공들, 그 외 정주댁, 정화, 물화 어멈 등이 그녀의 명을 받아 업무에 종사하고 있었다. 부인은 실질적인 인사권을 갖고 각각 업무를 배분했다. 유씨 부인의 작업 배분은 일정한 기준과 계획하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매일매일 용정(정미) 업무를 수행하는 노비의 이름, 배분된 벼의 양, 그리고 수납되는 쌀의 양을 정확히 일기에 기록하는 것에서 확인된다. 그녀는 심지어 노비들의 휴가 일수를 비롯하여 먹는 끼니의 수와 양까지도 자세히 기재하고 있다. 노동력을 많이 요하는 메주 작업도 용정 작업과 마찬가지로 행랑채 13집에 골고루 배분되고 있다. 이 작업은 메주콩 삶기 → 콩 으깨어 메주 만들기 → 메주 띄우기 등 시간과 노동력이 필요한 것으로, 작업의 양과 배분도 일정한 작업 기준과 배분 원칙에 따라 행해지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그녀의 작업 분배 방식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인다. 첫째, 부인은 노비들이 수행하는 다른 가사노동과의 양을 고려하여 용정의 양과 빈도를 배분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한 사람에게 일이 가중되어 불만의 소지가 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겠다는 뜻이다. 둘째, 특정 노동은 주인집이 아닌 노비의 집에서 행해진다는 점이 특이하다. 노비들은 주인집에 거처하면서 공동으로 작업하는 것인 일반적인 형태이다. 그러나 부인은 용정이나 메주 제작의 경우 작업량을 배분하고 각자 집에서 작업을 끝낸 뒤 생산물을 납품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때 동일한 업무를 수행할 때 확보해야 할 작업장과 작업 도구들이 필요 없게 되어 경제적이며, 작업 과정을 감독할 필요 없이 결과물만 확인하게 되어 효율적이다. 바로 노비 노동이 시간제가 아니라 성과제로 운영된다는 뜻이다. 물론 이 같은 것은 업무에 따라 차이가 있다. 즉, 김장이나 요리 등은 주인가에서 수행하지만, 결과물이 예측 가능한 용정이나, 메주, 가래떡 제작 등은 각 행랑처에 배분했다는 점에서 유씨 부인의 효율적인 노비 경영을 엿보게 한다. 마지막으로 제사나 기타 행사 등 예측 가능한 업무는 미리 계획하여 재화나 재물을 준비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렇듯 부인의 가계 경영은 나름 구조화되었으며, 계획하에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노비들은 집단 휴가나 개인 휴가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추수기와 농번기 등 집안의 주요 업무가 끝나면 부인은 한 해 동안 애쓴 노비들에게 휴가를 일괄 보내기도 하였다.(『경술일기』, 1849년 10월 6일). 각기 필요에 따라 단기 휴가도 얻었는데(『경술일기』, 1849년 10월 6일, 1850년 5월 1일-3일), 주로 자신의 농지에서 농사를 짓거나 수확하기 위해 봄 가을철로 휴가(말미)를 얻고 있다. 시월의 경우 남편의 삼년상을 치루기 위해 4일 동안 휴가를 받기도 하였다(『경술일기』, 1850년 3월 8일). 그밖에도 김장이나 고된 노동이 끝난 후 상전의 배려에 의해 임시 휴가도 얻었다. 유씨 부인은 설이나 추석, 호미씻이, 단오 등에는 흰떡 3말을 하여 노비들에게 2가래씩 나누어 주거나(『경술일기』, 1849년 12월 30일), 일 년에 수차례 ‘해자밥’을 하여 한턱내기도 하였다. 해자밥이란 농번기나 추석‧설 등 명절에 밥과 술을 한턱내는 것을 뜻하는데 해자밥 혹은 호미씻이 등 여러 가지 용어로 불리고 있다. 일기에는 총 5차례의 해자밥 기록이 나온다. 대개 설과 추석 명절 준비로 노비들이 강도 높은 노동을 행하는 기간이나 11월 추수가 끝난 후에 집중 분포되어 있다. 또한 노비들의 환갑 등 특별한 날에는 갈비 한 짝을 보내거나 선물을 보내기도 하였다(『경술일기』, 1849년 10월 24일). 그 외 노비 가정에 제사가 있을 때에는 제수품도 잊지 않았다(『경술일기』, 1850년 3월 8일). 이러한 일련의 행위는 노비들의 복지에 해당하는 것으로 양질의 충성스러운 노동력을 확보하고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이처럼 양반가의 노비 관리는 중요한 사안이었다. 노비 노동은 가정경제를 지탱하는 핵심 수단이었기에 그들의 근면과 충성은 필수적이었고, 유자(儒者)가 인(仁)을 수양하는 방편으로 노비를 활용했기에 긴요한 것이었다. 이에 송시열 등은 「노비부리는 도리」 등을 작성하였는데, “회초리와 음식”을 병행하는 강온책, 즉 은혜로움과 엄격함을 병행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안동 김문의 김양행은 「거가의절」을 집필하여 남녀 종에 대한 교육과 훈계 등을 세세하게 제시하고 있는데 이 집안에서도 엄격하고도 세밀한 노비 사역 기준이 전해진 것으로 판단된다. 그 내용 역시 상과 벌이 혼재된 것으로, “충성스러운 자는 음식과 재물, 의복으로 보상하고, 태만하고 죄를 지은 자는 회초리를 가한다”라는 유희춘의 방식과 유사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조선의 노비 관리는 대를 이어 각 가문에 전해졌을 것이며, 유씨 부인도 이 방식을 따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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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안방마님의 노비 경영 농사력과 일꾼들 수한리 유씨 부인의 집도 향촌사회의 일반 농가처럼 1년 24절기에 따라 농사가 행해지고 있다. 대부분 가내 소비를 위한 농사와 노동으로 보인다. 음력 3월 청명부터 본격적인 농사철이 시작된다. 주로 남자 노비들과 고공들에 의해 밭과 논 갈기가 행해지는데, 동원되는 일꾼은 많을 때는 9명, 적을 때는 3-4명 정도이다. 논이나 밭의 크기는 나타나지 않으나, 2차에 걸쳐 씨를 뿌렸으며, 1차에는 벼 한 말(1두) 정도를 파종했다. 그 외에도 과일 심기와 여성 노비들의 겨울 빨래와 다리미질이 집중 행해졌다. 4월과 5월에도 농사가 계속 진행된다. 이 중 양잠이 큰 비중을 차지하면서 기술되고 있다. 3월 28일에 누에를 놓기 시작하여 4월 16일부터 26일까지 총 9번에 걸쳐 노복 5명을 동원하여 뽕잎을 따고 있다. 아울러 목화밭, 고추밭의 제초 작업을 위해 10여 차례 노동력을 투입되고 있는데, 많게는 9명, 적게는 3-4명의 비와 노의 노동력을 동원하고 있다. 6월에 이르면 목화밭 제초 작업과 목화 타기, 기타 제초 작업이 이루어지는데 5월에 비해 적은 노동력이 투하된다. 7월 말에 이르면 가을 김장을 위한 파종 준비와 지붕과 울타리 수선 등에 노동력이 동원된다. 8월에는 가을 배추‧무‧목화밭의 제초 작업이 시작되고, 추석 준비에 여념이 없다. 또한 집에서 필요한 옷장을 짜기 위해 장인을 부르기도 했다. 9월은 가을 수확철이다. 햇벼를 말리고, 부인의 논에서 벼를 두 섬 두 말(2석 2두)을 거두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관장한 논 외에 다른 논의 추수 내용이 기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추수는 남편의 담당 업무이며, 기타 소작지에 대한 추수기는 남편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9월과 10월은 농촌에서 일 년 중 바쁜 달이다. 노동력이 부족한지 외부에서 노동력을 구매하여 지붕과 담장 보수 등 겨울을 위한 집수리에 여념이 없었다. 담장 수리에는 일꾼 18명과 지붕 이엉 엮기에는 20명이 동원되었다. 이후 본격적인 김장 준비에 들어갔다. 10월에는 밭에서 무와 배추를 캐서 김장을 준비하는 데 노복이 대략 7명 정도 동원되었다. 또한 다음해 봄에 수확할 마늘 600쪽도 파종하였다. 11월에는 가을 농사와 겨울나기 준비가 계속되었다. 수수밭 갈기와 면포 제작, 겨울 땔감 준비에 많은 노동력이 동원되고 있다. 이 집의 연료는 일 년에 3차례 대규모로 준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집에 있는 남자 노비 외에 외부에서 노동력을 사 온다. 4월과 7월에는 약 20명 이상의 노동력을 동원하지만, 겨우내 사용할 땔감을 준비하는 10월에는 3차례씩 각각 34명, 15명, 31명의 일꾼을 고용하였다. 이상은 일기에 기술된 내용을 토대로 정리한 것이다. 그러나 일반 농가에서 행하는 시비(거름) 준비나 가을 타작, 농기구 수리 및 가마니 짜기 등은 누락되어 있어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한편 일기에 나오는 농사의 종류는 벼·목화·팥(수확량 6말)·콩(수확량 6말)·보리·참깨(수확량 1말 반)·담배(수확량 1장)·마늘(600쪽 파종)·무(50개 종자)·홍당무(10개 종자)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오리와 닭, 말을 키운 것이 확인되나, 소나 돼지는 언급되지 않았다. 비록 불충분한 일기 내용이지만, 다음과 같은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이 집은 대규모로 농사를 직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체로 가내 소비를 위한 정도만 생산한다. 그러나 일기 곳곳에 나타나는 쌀의 소비량을 보면 외부에서 상당량을 공급받지 않고서는 감당할 수 없는 규모이다. 가을 추수기에 황해도 해주, 황주, 전라도 임실 및 각처의 봉물이 적게 들어와 서울에 있는 남편에게 확인할 것을 편지로 부탁하는 내용으로(『경술일기』, 1849년 11월 2일) 보아, 이 집은 소작료 외에 전국 각지에서 봉물이 수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남편의 담당 업무인 듯하다. 다음으로 유씨 부인은 대규모 노동력이 집중 투하되는 농사철·양잠철과 뗄감 준비, 지붕 고치기 등의 업무에는 외부에서 단기 노동력을 대량 구매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농사철, 특히 모내기에 동원되는 인부들은 마을공동체의 두레패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외 양잠이나 뗄감 준비 등에 동원되는 노동력은 필요에 따라 구매하고 있다. 일기에는 많은 일꾼(日雇)들이 등장한다. 이들에 대한 임금은 그때그때 지불되며, 점심이 함께 제공된다. 하나의 사례로 면화 밭의 김을 매기 위해 남편이 일꾼 12명을 점심 한 끼와 1냥에 구매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때 일꾼의 하루 임금은 7.7푼 정도로 동일한 시기(1853년) 경상도 예천 대저리 머슴(年雇)의 일 년 품삯으로 8냥(호미씻이로 5전)을 지불했다는 기사와 비교할 때 약간 높은 편이다. 일꾼의 임금 구성에는 화폐 이외에도 식사비와 술값이 포함된다. 일기에서는 1식(食), 2식, 3식, 그리고 1인당 식사량이 모두 정확히 기재했는데, 바로 식사의 제공 횟수와 양에 따라 임금액이 변동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사례로 성인 남성 일꾼의 경우 1인당 큰 되로 1승(1되)의 밥에 청어 2마리나 관목 1마리, 새우젓이 반찬으로 나갔다. 그 외에도 밭 갈기에 동원되는 인부에게 임금 외에 술값 1전과 안주값 1전이 제공되었다(『경술일기』, 1850년 3월 29일) 이와 같이 이 집안의 가작지 농사는 소규모였음에도 불구하고 외부 노동력에의 의존도가 높았다. 아마도 그것은, 단기고용이 신분적‧경제적 예속 관계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에 노비 노동력보다 노동생산성이 높았을 것이며, 무엇보다도 노비 소유 및 경영에 따른 노비 복지 및 생활에 대한 부담을 덜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을 것이다. 이에 김호근가도 계절적으로 노동력이 많이 투하되는 시기에 단기고용 노동을 선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기존 연구에서 지적하는 19세기 중반 노비제의 쇠퇴와 맥을 같이 하며 부역체제의 변화와 함께 급가고용(給價雇傭, 임금 고용)에 의한 노동력 동원 방식이 확대되는 시대적 현상을 반영한다고 하겠다. 【그림 7】 김홍도, 《단원풍속도첩》 중 〈논갈이〉,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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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안방마님의 노비 경영 안방마님과 노비와의 긴장 관계 노비와 노비주의 관계는 일방적인 착취와 억압의 성격으로만 규정할 수 없다. 기근과 재난이 수시로 도래했던 전근대 사회에서 이들의 관계는 일면 후원자-의존자의 성격이 내재해 있다. 인신적인 예속에 따른 노동력 제공 대신에 노비가 살면서 부딪히게 되는 다양한 사회‧경제적 문제와 신체적 위험은 일차적으로 노비주가 해결‧보장해 주어야 하는 부분이었다. 그것은 장기간 안정적인 노동력을 공급받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지불해야 할 대가이자, 유교적 도덕 윤리를 근간으로 하는 신분사회에서 지역 유지로 인정받기 위해 강요된 측면이기도 했다. 양자 간의 정교한 보호―예속의 장치는 생존 위협에 대처하는 일종의 사회적 보장이었다. 부인의 일기에도 이러한 메커니즘이 곳곳에 포착된다. 물론 노비주의 입장에서 기술된 것이므로 일정한 한계가 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일기에는 많은 여성 노비들의 병과 출산 이야기가 나타난다. 일기가 기록된 약 2년여 동안 5명의 비(婢)들이 아들과 딸을 낳았다. 그중 4명이 여자아이고, 1명이 남자아이다. 비들은 출산 당일까지 뽕잎을 따는 등 노동에 시달리다가 저녁에 출산하였다(『경술일기』, 1850년 3월 4일, 1850년 4월 22일). 이들에게 대체로 보름 동안의 출산휴가가 주어졌다. 많은 비들은 고된 노동과 출산, 열악한 식생활과 위생 문제 등으로 인해 수시로 병에 시달렸다. 부인은 이들에게 주로 2일에서 5일 사이의 병가를 주었는데, 병과 관련된 기록의 빈도수는 매우 높게 나타난다. 열악한 의료시설과 노동으로 인해 사망하는 노비도 등장한다. 그중 하나가 금섬이다. 금섬이는 출산 후 사망하는데, 그녀 집에서 갓난아이를 보살필 상황이 아니었는지 유씨 부인은 아이의 젖값을 금섬이의 동료인 판절에게 지불하고 자신의 집에서 키울 것을 명하였다. 그녀는 아기를 약 40여일 간 데리고 있다가 아기가 백일을 맞이하자 돌려보냈다. 이후에도 갓난아이를 위해 젖값으로 벼 한말과 돈 6푼을 추가로 지불하였다. 부인의 이러한 행위는 온정주의 혹은 측은지심이라는 개인적인 측면으로 볼 수 있지만 사회적 측면, 즉 노비주로서 노비에 대한 책임과 생존에 대한 의무가 복합적으로 작동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해당 노비가 위기를 극복하고 생존해야 노동력을 제공하고 노비들을 지속적으로 재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것은 유교적 인본주의와 도덕을 근본으로 삼았던 당대 가치관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노비 측에서는 어떻게 반응하고 있을까? 금섬이의 아들 응술이는 어린 동생에 대한 부인의 시혜에 대해 고마움을 표하고, 고을 관아에 상직하러 들어가기 전 인사차 오기도 하였다(『경술일기』, 1850년 2월 21일). 후원자-의존자 관계는 노(奴)인 응술이가 후원자인 유씨 부인에게 자신의 상황을 고하고 감사를 표했던 것과 같이 상호 간의 일정한 사회적 협의에 따라 지속되었다. 한편 많은 노비와 예속민은 도미 두 마리나 갈치 한 마리, 밤, 감, 떡 꾸러미 등을 들고 유씨 부인을 방문하였다. 표면적인 목적은 상전에 대한 안부 인사였겠지만, 급전 대출이라는 목전의 이유가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상전가와의 관계 지속 내지 친분 유지를 통해 후원자-의존자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목적도 내재해 있었다. 부인은 이들이 가지고 온 상품의 종류와 양을 꼼꼼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기록한다는 것은 받은 사실을 잊지 않겠다는 것이며, 후일 상품의 제공 내지 보호-의존의 관계망 지속이라는 의지를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노비와 노비주와의 관계가 우호적으로만 지속되는 것은 아니었다. 양자 간에는 갈등과 불만도 나타났다. 특히 노동 상황이 열악하거나 노동 강도가 강할 경우 발생하였다. 1850년 10월 9일부터 김장이 시작되면서 많은 준비와 일손이 필요하였다. 각종 김장에 들어가는 갖가지 양념 준비와 배추와 무를 뽑아 절이기, 김칫독과 저장 장소 준비 등 많은 품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김장 채비는 약 5일 이상 계속된 것으로 보이는데, “안에서 하루 종일 일하는 것들…”이라는 표현에서 노비들의 노동 양과 강도를 감지할 수 있다. 김장을 시작한 지 4일째 되는 날 노비들의 불만이 드디어 폭발하였다. “소한 추위가 대한같이 추워, 물속에서 배추를 씻는 종들이 몹시 투덜거려 저녁을 먹여 보냈다”(『경술일기』 1850년 4월 3일, 1850년 3월 20일)라는 사료에서 볼 수 있듯이 노비들은 처한 노동 상황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고, 노비주는 이들을 달래기 위해 식사를 제공하기도 했다. 또한 일기에는 “낭하에 콩 닷 말(5두)씩을 맡겨 … 전례대로 받았는데, 춘강이가 3덩어리, 탱운이가 1덩어리를 축내어 양이 적어졌다”(『경술일기』, 1850년 3월 30일)라고 노비들의 착복을 기록하고 있다. 그 외에 다른 착복기사도 간혹 보이며, 유씨 부인이 은가락지를 분실하여 노비들을 의심하는 내용도 찾아 볼 수 있다. 이처럼 노비와 주인이라는 양자 간의 긴장과 갈등의 기류를 감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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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 8월 하순부터 노비 노동력을 활용하여 목화를 추수하여 볕에 말린다. 이후 방적을 위해 솜을 타는 과정이 시작된다. 이는 목화송이에서 씨를 제거한 후 활을 이용하여 솜에 붙어 있는 씨앗과 껍질 등을 제거한 후 솜이 부드럽게 피어오르게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금열이와 영점이가 솜을 탔는데, 이후 금열이가 또 타기에 부인은 노비에게 추가 품삯을 지급하였다(『경술일기』, 1849년 11월 19일) 탄 솜은 이후 비벼 말아 실로 잣은 후 무명을 짜기 위해 바디에 꿰어 도투마리에 고정시킨 다음 좁쌀 풀칠을 하여 말리는 무명매기 과정이 이어진다. 일기에는 8월 21일에 무명을 매고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첫 번째 수확한 목화솜의 품질이 최상급이라 하니 아마도 이를 이용한 실 제작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풀칠한 실을 말리기 위해 왕겨 불을 이용하는데, 무명매기용 왕겨가 없으므로 부인이 인쇠에게 벼 13말을 주어 정미를 명하고 있다(『경술일기』, 1850년 8월 21일) 무명매기 과정이 끝나면 무명 올이 감긴 도투마리를 베틀로 옮겨 직포 과정이 시작된다. 그러나 유씨 부인은 면포를 직접 생산하지 않은 듯싶다. 무명실 생산까지의 공정만 끝내고, 마지막 면포 제작은 인근 지역의 방직인에게 맡기고 있다. 부인은 왜 집에서 활용할 수 있는 노비 노동력을 마다하고 외주를 주었을까? 집에서 일반적으로 제작하는 거친 5승포는 당대 가격이 1필(35척)에 1냥 75분이다. 반면 고운 12승포는 제작 기간도 길고 기술이 있는 방직인이 제작하는 것이어서 1필(35척)에 14냥에 거래된다. 물론 방직업자에게 제공하는 제작비는 5승포보다 훨씬 높았지만 전체적인 수익률을 높일 수 있다. 이에 부인은 가장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과정에 집중하고 생산된 면포 제작을 전문 방직인에게 맡겨 수익을 극대화시키는 전략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유씨 부인과 같은 물주가 재료(실)와 임금을 제공하고 전문 직조인이 직조 과정을 전담했다는 기사는 공정별 작업의 분화를 뜻하며, 면제품 생산이 점점 고급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동안 학계에서 심증은 있었지만, 사료로써 확인할 수 없었던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12승포 이상의 고급 면제품을 짜는 기술력이 발달했다는 기존의 연구와 맥을 같이 한다. 실제로 방직 분야에서 면화 재배지를 소유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 그리고 직조 기술이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 간의 직무 분리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아래 사료를 보기로 하자. “집안은 마치 사람이 없는 듯 조용하고 아무 일이 없는 듯 고요하여 마치 탁탁하는 칼질 소리, 찰찰하는 베틀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친척들 가운데 부러워하던 사람들이 다투어 찾아와서 그 법을 배우려 했는데 이를 배운 사람들은 능히 자기 집안 살림을 일으켰다.” 이 사료의 주인공 광주 안씨는 집에서 방직에 종사하는데 방직 기술이 뛰어나서 주변 친족들에게 그 기술을 전수하였고, 이를 배운 사람들과 안씨 부인은 방직을 통해 재산을 모았다는 것이다. 물론 이 이야기는 약간 과장된 듯하나, 기술이 좋은 부인네들이 전문 방직자로 인정받았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이 사례처럼 기술을 가진 방직인이 한 마을에 여러 명이 존재했을 것이고, 유씨 부인처럼 마을 주민들은 자가 생산한 무명실을 가지고 이들에게 방직을 맡겼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현상이 얼마나 일반적인지는 의문이지만, 『경술일기』에서 볼 수 있듯이 일부 직조인들은 고급 직물을 짰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현상은 면화의 주산지로서 옥천‧영주‧공주‧횡간을 위시하여 경상도‧전라도 지역이 대두되는 것과 맥을 같이 하며, 진목(晋木)‧송도목‧순천목처럼 명성이 높은 무명제품이 있었다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 외에도 품삯을 받고 방직업에 종사하는 수많은 여성 노동자의 존재를 보여 주는 자료가 있다. “부인들이 바느질품을 팔고 베 짠 삯을 받아서 식량을 샀다”는 이야기나 “이웃집 여인의 품을 사서 실을 뽑아 베틀에 올려 명주필을 같이 더했다” 등이 서사가 전해 온다. 아울러 “베 짜는 품을 팔아 재물을 마련하여 날마다 밥을 지어 매일 밤 오경에 뜰에서 이슬을 받고 서서 깨끗한 물을 떠놓고 사방의 하늘을 향하여 절하여 할아버지께서 귀양에서 풀려나도록 축수하였다” 등 조선 후기 회화나 소설에서는 여성의 품팔이와 품삯 이야기가 종종 등장하고 있다. 기존 연구에서 추정하듯이 18·19세기 여성 고공화 현상이 진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성들이 고용되는 분야는 주로 방적·방직업과 의류업, 밭농사, 가사노동 등이었다. 이중 방직 분야는 장기간 경험이 축적되고 기술력이 향상되면서 전문화될 수 있는 영역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과거 집안의 여성이나 비에 의해 수행되었던 직물 생산이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여성 방직인들에게 이행되면서, 이들이 노동의 대가로 품삯을 받았는다는 것이다. 특히 토지로부터 유리된 빈민 가정의 여성이나 해방된 비, 혹은 몰락 양반 여성들이 생계를 위해 또는 생계를 벌충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그리고 쉽게 방직업에 종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목면 생산과 면포 제작은 인구 압력이 높고 소득 수준이 낮은 빈농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인근 장시의 활성화는 물론 멀리 서울과 함경도까지 팔려 갔다고 보고 있다. 또 다른 연구에 의하면 양잠업도 한 가정에서 양잠‧제사‧견직의 3공정을 모두 전담하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전담하는 집도 일부 있었겠지만, 누에고치째로 시장에서 팔거나 견직을 하는 집에 판매하고, 양잠 농가가 제사 공정까지 끝낸 후 생사를 장시에서 유통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와 같이 면업에서도 양잠업과 동일한 현상이 진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이 과거 노비와 가내 여성들이 전담했던 직포의 일부분이 임금노동자, 즉 여성 고공에 의해 수행되기 시작했다는 점은 서서히 임금 노동자화되어 가던 이 집안의 노비 노동과 같은 맥락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림 8】 유운홍, 《유운홍필풍속도劉運弘筆風俗圖》, 국립중앙박물관조선 후기의 면사/면직 과정을 보여 준다
  • 19세기 조선의 종부를 만나다 -유씨 부인의 가계경영과 재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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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것으로 보인다. 노비인 어린 개덕이 옷을 만들어 주기 위해 5승 군포 22척을 1냥 6분에 사고, 적삼을 만들기 위해 무명 14척을 5냥 6전에 사고, 남색으로 5척을 구입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무늬가 있는 서양목 10척을 무려 5냥이라는 거금을 주고 샀다는 것이다. 1척에 5전 꼴로 앞서 본 조선산 5승 정포의 10배 가격에 해당한다. 또한 중국산 면제품인 당목도 거래하고 있어 지방에서도 외국산 제품을 쉽게 구매할 수 있었으며, 그만큼 호서 지역 장시나 유통망이 상당히 발달했다는 증거로 이해할 수 있다. 19세기 중반 행세하는 양반 여성들 사이에 서양목이 화려하고 톡톡해서 호평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부인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시장에서 구입한 다양한 면포를 활용하여 판매를 위한 의복 생산으로 선회하였다. 주목적은 물론 수익 증대이다. 의복 생산은 조선시대 양반 여성들이 광범하게 종사했던 분야이다. 19세기 행장과 비문에는 이러한 사례가 종종 등장한다. “바느질에 힘써서 살림에 보탬이 되었다. 10년이 되지 않아 저택은 높고 크며, 토지(莊田)는 풍족하고 살림살이는 화려하고 아름다워졌다”라는 사료에서 보듯 바느질, 즉 의복 생산을 통해 살림을 일구었다. 또한 “바느질과 길쌈을 하여 다른 물건으로 바꾸어다가 시어머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것과 편안히 여기시는 것을 장만하셨다” 라는 글을 통해 생산한 의복은 다른 상품과의 교환, 즉 판매를 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부인의 일기에는 의복 생산의 구체적인 규모와 수익률을 확인해 볼 수 있는 단서가 있다. 먼저 지적할 점은 그녀의 의복 생산과 판매는 소규모이고 간헐적이다. 아마도 이 일기가 작성된 시기에 그녀가 수시로 그리고 상당 기간 병마에 시달렸다는 점과 더불어 ‘봉제사 접빈객’의 과중한 업무도 함께 수행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빈도수와 내용을 분석해 보면 유의미한 점들이 눈에 띈다. 먼저 부인은 의복 제작을 위해 색실‧바늘‧초록실‧물감 등을 자주 구입하고 있으며(『경술일기』 1849년 10월 4일, 1849년 10월 17일, 1849년 11월 28일 1850년 2월 6일, 1850년 4월 7일, 1851년 7월 30일), 여성을 주 고객으로 하는 저고리, 치마, 속치마 등을 전문적으로 생산하고 있다. 물론 자가 소비와 선물로 송출하기 위해 남성 의복을 제작하기도 한다. 저고리‧누비 속곳‧당목 겹바지‧토시‧배자(소매없는 덧저고리)‧솜옷‧잔누비 저고리(좁게 누빈 옷)‧주 누비저고리(중간 정도로 누빈 옷)‧당목 소창 옷‧누비바지‧버선 등이 일기에서 언급되고 있다. 유씨 부인이 바느질, 즉 의복 생산에 상당한 전문 기술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경술일기』 1849년 10월 14일, 1851년 8월 3일, 1850년 2월 8일, 1851년 9월 2일, 1851년 9월 15일, 1851년 8월 24일). 따라서 부인의 관장하에 제작된 의복들이 고객들에게 호평을 받은 듯하며 순조롭게 판매되었다. 【표 1】 의복 판매 가격 샘플 【표 1】에 부인이 판매한 의복의 가격을 기입해 보았다. 1849년 11월 29일 남치마를 14냥에 팔았으며 12월 3일에 판매한 반주(斑紬) 치마는 개천이가 대행했는데 7냥 4전에 팔았다는 것이다. 12월 5일에는 당목 치마 판돈을 윤집이 4냥 5전에 가져갔다는 것이다. 또한 1850년 4월 29일에 자주 저고리를 판매하여 그중 6냥을 광점에게 빚을 주었다는 것도 있다. 일기를 보면 부인은 총 14회의 여성용 저고리와 치마를 판매하고 있으며, 판매 시기는 한 해 농사가 끝난 늦가을과 겨울철이다. 즉, 상대적으로 농가에 현금이 회전되고 있을 때이다. 그럼 저고리와 치마를 판매한 수익률은 어느 정도일까? 필자가 계산을 해보았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에는 면포 1필(35척)로 한복 1벌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이 중 치마는 26척 가량의 옷감이 필요하고, 저고리는 9척 가량이 필요한다고 한다. 판매 가격을 보면, 옷감이 많이 사용되는 치마는 13-14냥 정도로 판매되며, 반주치마는 속치마로 치마의 절반 가격인 7냥 5전 정도에 팔렸다. 저고리는 하나당 약 7냥 정도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옷감은 치마가 훨씬 많이 들어가지만, 1척당 판매가를 비교해 볼 때 저고리의 수익이 훨씬 높다. 저고리의 판매 수익이 높은 것은 인건비가 많이 들어가기 때문이며, 부인은 치마보다는 수익률이 높은 저고리를 더 많이 제작하고 있었다. 앞서 부인이 인근 방직업자에게 1냥 2돈을 지불하고 주문 제작한 12승짜리 53척 면포의 최종 수익률을 계산해 보자. 부인이 면포만 주문했을 경우 판매 대금으로 약 20냥(생산가 제외)을 받을 수 있다. 이는 면화 생산에서 방적 과정까지의 제작 비용이 포함된 금액이다. 그러나 이것을 의복으로 제작할 경우, 수익률은 급증한다. 12승 면포 53척으로 치마 2개를 만들 경우 예상되는 판매 총액은 28냥이고, 치마 1개와 저고리 3개를 제작하면 총 35냥 정도이다. 즉, 방직 수공업자가 받는 총 1냥 2돈이라는 수익 금액과는 비교도 안되는 8-15냥 정도를 추가로 확보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바느질 솜씨 좋은 많은 여성이 의복 제작에 몰두한 것으로 보인다.
  • 16세기 미암 유희춘의 경제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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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은 퇴락하였으며 노비는 각지로 흩어진 상황이었다. 유희춘은 1567년(선조 즉위) 유배에서 풀려 성균관 직강으로 재출사 한 이후 정4품인 홍문관 응교를 시작으로 10여 년 동안 내직으로 사헌부 장령·사간원 사간·성균관 대사성을 비롯하여 홍문관 부제학·예조 참판·사헌부 대사헌을 역임하였으며, 외직으로는 전라 감사를 지냈다. 그러나 그는 홍문관 부제학에 가장 오랫동안 재직하였다. 그러면 이제 그의 경제생활은 어떻게 운영되고 있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유희춘은 호남에 근거를 둔 학자형 관직자로 재출사 이후 고위의 청요직을 역임한 당대 최고의 양반 관료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당대를 대표할 수 있는 성리학자였고 세간에는 청렴하고 세상 물정에 매우 어두운 인물로 인식되었다. 그러면 유희춘이 관직 생활을 통해 어느 정도의 수입을 거둬 들이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림 4】 담양군 대덕 소재 유희춘 내외의 산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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