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한국국학진흥원
사당 에 대한 총서 검색 결과 전체43건
  • 조선의 양반, 가정을 경영하다 -18세기 대구 최흥원의 가사활동을 중심으로-
    • 기록자료
    • 경제
    날짜를 정한 이후 사당에 고사를 지내고, 녜제 당일 아버지의 신주를 꺼내 마루에서 지냈다. 최흥원은 1745년에 녜제를 지내면서 품절은 잃지 않고 간소하게 품식을 정하여 지내고자 했다. 음복례에 해당하는 ‘수조(受胙)’는 예법에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없애지 못했다. 다음 해인 1746년에는 수조나 제사가 끝났다고 알리는 고이성(告利成) 등의 절차를 거행하지 않았다. 최흥원은 예법에 밝은 선학들의 의견을 참고하여 제례 예법을 만들기도 했다. 설날에 소를 잡아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시속에서 일반적으로 행하나, 결국은 도축 금지법을 위반하는 일이다. 최흥원은 법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고기를 사서 쓰면 불결하다고 여겨 법을 어겨 가면서 소를 잡았는데, 이는 국가를 속이는 행위이고, 고기를 사서 쓰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으로 생각했다. 최흥원은 퇴계 이황이 “소를 잡아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예가 아니다”라고 말했기 때문에 이 가르침을 따르고자 했다. 아내의 기제사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장모의 장사를 치르기 전이어서 최흥원은 아내의 기제사를 지내지 않기로 했다. 이는 예학에 밝은 우복 정경세(1563-1633)의 설을 따른 것이다. 이처럼 최흥원은 원칙과 시속 사이의 고민 속에서 자신의 판단과 선학들의 예법을 참고하여 옻골 최씨만의 가례를 만들어 나갔다.
  • 조선의 양반, 가정을 경영하다 -18세기 대구 최흥원의 가사활동을 중심으로-
    • 기록자료
    • 경제
    잘 익은 홍시를 사당에 올리기도 했다. 녜제 지내기 전에 쏘가리 6-7마리를 얻었는데, 쏘가리는 평소 최흥원의 아버지가 즐기던 것이어서 제수로 사용했다. 최흥원은 아버지, 아내, 죽은 동생의 제사 때에는 더욱 슬퍼하거나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특히 아내의 기일에는 제수를 너무 적게 장만하여 마음이 더욱 슬펐다. 이는 집이 가난한 탓도 있지만 아내의 유언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최흥원은 말했다. 최흥원은 제수 품목을 직접 정했는데, 품목 선정에 엄격하지는 않았다. 형식에 얽매이기보다는 신선하고 망자가 생전에 좋아했던 음식을 제사상에 올리고 정성을 다하고자 했다.
  • 조선의 양반, 가정을 경영하다 -18세기 대구 최흥원의 가사활동을 중심으로-
    • 기록자료
    • 경제
    는 종교로, 집에 사당을 지어 조상신을 모셨다. 집은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조상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조상이 세상을 떠나면 신의 존재로 각종 제례를 통해 후손과 만난다. 최흥원은 가묘와 별묘를 통해 조상을 모셨다. 최흥원의 아버지 최정석이 살아 있을 때는 사당에 최흥원의 5대조 최동집, 4대조 최위남, 3대조 최경함, 2대조 최수학, 큰아버지 최인석의 신주가 있었다. 최동집은 옻골의 입향조이다. 최수학의 아들은 최인석과 최정석인데, 최인석은 아들 없이 일찍 사망했다. 이런 경우에는 양자를 들여야 하는데, 최수학은 맏아들의 양자를 들이는 대신 둘째 아들인 최정석에게 가계를 물려주었다. 최정석이 사망하자 최흥원이 집을 잇게 되었다. 최정석이 죽은 이후 그의 신주를 사당에 모시기 위해서는 최동집의 신주를 사당에서 꺼내어 땅에 묻고 제사를 지내지 않아야 한다. 4대 봉사 규정 때문이다. 그러나 최흥원은 최동집을 불천위(不遷位)로 모시고자 했다. 불천위가 되면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영원히 모실 수 있다. 이는 최정석의 뜻이기도 했다. 그는 살아생전 불천위 사당 건립을 위해 친족과 계를 만들어 준비했다. 최정석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최흥원이 아버지를 이어 최동집을 모실 별묘를 지었다. 1737년 3월 14일에 별묘 터를 닦기 시작하여 다음 해 10월 27일에 완성했다. 최동집의 신주는 따로 봉안했다. 최흥원의 집에는 가묘와 별묘가 있게 되었으며, 최흥원은 종손의 지위를 갖추었다. 최흥원은 둘째 아우에게 큰아버지 최인석의 제사를 맡겼다. 우선, 1737년 7월 10일에 최인석의 신주를 가묘에서 흥점의 집 동쪽 방에다 옮겨 봉안했다. 1741년 11월 14일에 둘째 아우 집의 사당 공사가 끝나서 15일에 큰아버지의 신주를 새로 지은 사당에 봉안했다. 【그림 8-1】 사당 【그림 8-2】 별묘 최흥원은 별묘를 따로 건립했지만 제향할 장소가 마땅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오랜 시간이 흐른 1753년에 별묘 앞에 보본당(報本堂)이라는 건물을 지었다. 보본당의 기문은 대학자인 이상정에게 의뢰했다. 조상이 깊고 큰 공덕으로 무궁토록 돌봐 주시어 자손들이 추모하기를 그만두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기』에서 말하는 ‘불천(不遷)의 종(宗)’이 그것인데, 가업을 처음으로 시작한 조상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는 대부분 백성 중 성(姓)을 처음으로 얻게 된 조상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중엽 이후 혹 거처를 옮겨 터전을 정해 자손을 안착시키거나 아름다운 덕과 깊은 인애가 장구히 내려질 만한 조상이라면 그를 존숭해 제사 지내는 데 한계가 있겠습니까? 이상정은 「보본재기(報本齋記)」를 작성하면서 최동집을 불천위로 모시게 되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이는 최동집이 불천위로 사회적 공인을 받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동시에 최흥원의 종손 지위도 대외적으로 공인받은 셈이다. 【그림 9】 보본당
  • 조선의 양반, 가정을 경영하다 -18세기 대구 최흥원의 가사활동을 중심으로-
    • 기록자료
    • 경제
    몇 리를 가다가 사당에 하직 인사를 올리지 못한 것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와서 사당에 인사를 한 이후 다시 과거 길에 올랐다. 최흥원은 그런 아들이 대견스럽고 흐뭇했다. 1749년 11월 13일-12월 11일, 주진은 벗들과 팔공산 아래 있는 부인사에서 공부했다. 다음 해 1월에 시행되는 과거 준비였다. 최흥원은 아들과 벗들의 공부를 독려했고, 필요한 물품을 수시로 보냈다. 1751년 8월 22일에도 주진이 김용여와 함께 과거를 보러 길을 나섰다. 함께 보낸 종은 매우 재빠르나 그들은 굼떠서 걱정스러웠다. 주진이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했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1754년 6월 14일에 주진은 아버지에게 조용한 곳에 들어가 과거 공부하고 싶다고 했다. 최흥원은 주진이 보재사(寶齋寺)에 가서 공부하도록 했다. 당시 최흥원은 50세가 넘었고, 주진은 30세였다. 주진은 공부하는 가운데 집안일에도 신경을 써야 할 형편이었다. 아버지를 보필하는 가운데 여러 가지 우환으로 평온하지 못한 시간을 보냈다. 최흥원은 주진이 과거 준비와 집안일 모두 신경 쓰는 것이 어려운 일이지만 견뎌 낼 도리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주진은 보재사에서 한 달 가량 공부하다가 7월 14일에 집으로 돌아왔다. 이후 주진이 공부한 내용이 일기에 기록되지 않았다. 주진은 어느 순간 과거 공부를 포기한 듯하다. 최흥원이 주진에 대해 일기에 기록한 것은 집안의 대소사에 참여하거나 집안일을 한 내용이다. 1756년 6월 3일 새벽에 주진이 9마지기 밭의 보리를 타작하러 갔다. 최흥원은 아들이 집안일에 골몰하는 것으로 미루어 공부를 그만둔 것으로 짐작했다. 본인은 과거 응시를 일찌감치 포기했지만 자제들은 열심히 공부하길 바랐는데, 아들이 농사 감독하러 갔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매우 아팠다. 20여 년 동안 애끓은 심정으로 주진의 공부에 정성과 노력을 기울였고 과거 합격으로 조상에게 효도하길 간절하게 원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최흥원의 손자 식(湜, 1762-1807)은 최흥원이 58세 되던 해에 태어났다. 식이 태어난 다음 해 주진이 사망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부재를 느낄 손자에 대해 최흥원은 더욱 애틋한 마음을 가졌고, 손자 교육에 대한 책임과 기대도 컸다. 그러나 1775년 6월 20일의 일기에 최흥원은 14살의 손자가 점차 거칠고 게을러지며 공부도 자주 빼먹어서 가망이 없을 것으로 판단하는 내용을 적었다. 손자의 공부에 대한 체념은 최흥원의 마음을 아리게 했지만, 그렇다고 손자의 교육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최흥원은 손자의 의지를 어떻게 독실하게 할 수 있을지 계속 고민했다. 1779년 11월 15일에 18살의 손자가 ‘소학(小學)’에 입학하게 되어 최흥원은 사당에 아뢰었다. 다음 해 손자는 최흥원에게 『소학』을 읽겠다고 말했다. 최흥원은 손자가 다시 마음을 잡은 듯하나 과연 독실하게 해낼지는 모르겠다고 생각했으며, 점괘로 손자가 계속 공부할 것인지의 여부를 확인해 보기도 했다. 손자의 공부 자세는 의심스러웠지만 일말의 기대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 결국 최흥원은 손자 식의 학문에 대한 성취를 확인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 조선의 양반, 가정을 경영하다 -18세기 대구 최흥원의 가사활동을 중심으로-
    • 기록자료
    • 경제
    짜를 미리 정해서 사당에 아뢴 이후 정한 날에 지냈다. 최흥원은 시제 3일 전부터 재계했다. 제행 장소는 대개 별묘였다. 묘제의 경우에는 참여 범위가 친족까지 확대되었다. 최동집 부인 여강이씨의 무덤은 대구 도장동에, 고조부모의 묘소는 대구 지동에, 증조부모의 무덤은 경산에, 조부와 아버지의 무덤은 대구 광동에, 어머니의 무덤은 대구 도장동에 있다. 따라서 최흥원이 관리하는 무덤은 대구의 도장동, 지동, 광동 및 경산 등에 위치한다. 무덤이 여러 곳에 흩어져 있어서 10월 묘제는 직지동 6대 조부와 도장동 6대 조모의 묘제를 먼저 지냈고, 지동과 경산의 고조와 증조모, 광동의 조부와 아버지의 묘제를 차례로 지냈다. 특히 광동 묘제는 형제가 모두 모여 지냈고, 나머지는 형제와 자식이 나누어 지냈다. 광동 묘제를 지내고 나서 지역 사람들과 술과 음식을 나누면서 화합의 시간을 가졌다. 최흥원은 제사를 주재하는 사제의 역할을 철저하게 수행하고자 했다. 증조할머니의 기제사를 지내려고 했을 때 서숙이 급하게 말하길 “위패를 모신 상 아래에 개가 토해 놓은 듯 아주 깨끗지 못하니 어쩌겠는가?”라고 했다. 참으로 괴이한 일이어서 곧바로 바깥 마루에 위패를 다시 설치하도록 하고 신주를 내어 와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재계는 엄격하게 했다.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흩어진 조상의 혼령을 불러 흠향하게 하는 것은 오로지 후손의 정성에 달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기일 하루 전 새벽에 일어나 목욕하고 재계했다. 시제에는 제사 지내기 3일 전부터 새벽에 일어나 목욕하고 의관을 갖추고 여러 집사가 함께 모이기를 기다렸다. 재계할 때는 사사로운 일에 관여하지 않아야 하고, 출입도 삼가야 하며, 묘소 가는 길과 주변을 깨끗이 청소하게 했다. 제사 전에는 정침에 신위를 설치하고 물러나 제수를 직접 살피고 새벽까지 잠자지 않고 있다가 닭이 울면 씻고 머리를 빗은 이후 제사를 지냈다. 물론 재계를 엄격하게 지키지 못 할 때도 있었다. 우선, 재계 날짜에 맞추어 사람들이 일정한 장소에 함께 모이는 게 쉽지 않았다. 1744년 8월 18일 별묘 시제 당시 최흥원은 3일 전인 15일부터 재계에 들어갔으나, 여러 친족은 16일부터 재계했다. 다음 해 8월 시제에도 이틀 전에 오거나 하루 전에 온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들을 제재할 수는 없었다. 최흥원은 병으로 괴로웠고 어머니의 건강도 좋지 않은 상황에서 시사에 참석하여 잔을 올려야 할 때는 남에게 머리를 빗기게 하고 세수를 시킨 다음 재계했는데, 몸을 깨끗하게 하지 못하여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재계 시 손님의 방문이다. 최흥원은 재계할 때는 외출을 자제했을 뿐만 아니라 손님을 맞이하지도 않았다. 재계 중에는 어머니의 아침 문안도 생략했다. 어쩔 수 없이 손님을 맞이해야 할 때도 있다. 아버지의 기일 재계 때 홍우정라는 자가 방문했는데, 제사를 앞두고 있어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아팠을 때 긴요한 약재를 많이 얻었던 고마움 때문에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식사를 대접하고 돌려보냈다. 오직 나 자신을 반성하고 뜻을 굳건히 해 정성껏 접대하는 것을 요법으로 삼을 뿐이다. 갑자기 뭇사람과 달리 처신하며 고고한 체하다가 괜히 시속의 기롱을 당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데 해로울 것이니 또한 경계할 점이 작지 않다. ―1745년 3월 22일 최흥원은 재계하는 날 다른 사람과 더불어 수작하고 접대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용감하게 행동하지 못한 자신이 한탄스럽기도 했고, 재계를 엄격하게 하고 싶었지만 세평을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없었다. 이래저래 매우 인간적인 고민이다.
  • 조선 최후의 공인, 지규식의 일기
    • 기록자료
    • 경제
    웅 관우를 모시는 사당이다. 관우를 숭배하는 신앙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대가 들여온 것으로, 처음에는 조선에서 별로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숙종-정조 대를 거치면서 국왕이 직접 관왕묘에 가서 제례를 행하고, 서울에 남관왕묘와 동관왕묘를 세우면서 18세기 이후에는 관우신앙이 민간신앙으로 확산되었다. 특히 상인들에게 관왕은 ‘재복신’으로 숭배되는 대상이었다. 서울의 시전 상인들도 종루(보식각) 뒤편에 ‘중묘(中廟)’로 불리는 관왕묘를 건립하고 제사를 지내고 장사가 잘되기를 빌었다. 시전 상인들은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에 이 관왕묘에 제사를 올렸고, 대제(大祭) 때에는 육의전 상인들이 경쟁적으로 기금을 출연하였다고 한다. 지규식이 새해 첫날마다 분원에서 가까운 관왕묘를 찾아가서 제사를 올렸던 것도 아마 ‘재복’을 빌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지규식이 새해 첫날 관성제군을 배알한 뒤 처음으로 인사를 간 곳은 내곡(또는 내동)의 ‘윤 상사(上舍)’ 또는 ‘윤 진사(進士)’ 댁이었다. 가장 자세히 쓸 때는 ‘윤 상사 분서 선생(尹上舍汾西先生)’이라고 하였다. 윤 상사가 상을 당했을 때 또는 대상·소상이 있을 때, 혼사가 있을 때에도 지규식은 찾아가 위문을 하거나 부조금을 보냈다. 윤 상사가 지규식을 찾으면 곧장 찾아가 뵙고, 때로는 필요한 돈을 마련해 주기도 했다. 1892년에는 지인의 소실이 산달을 맞아 급히 거처를 구하자 지규식이 내곡 윤 상사 댁에 간곡히 부탁을 넣어 빈 건넌방을 빌려준 일도 있었다. 한편, 지규식은 ‘박 판서’라는 인물에게도 자주 찾아가 이야기를 하고 부탁을 들어주고 연말에 선물을 보내는 등 관계를 돈독히 유지했다. 보통 지규식은 귀천, 석촌 등지의 양반들을 언급할 때는 보통 지역명을 이름 앞에 붙여 언급했는데 ‘박 판서’는 별다른 지명을 붙이지 않고 언급했다. 1899년(광무 3) 6월 ‘남계(藍溪) 박 판서 대감’이 별세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이후로는 별다른 왕래가 없는 것을 볼 때, 그의 거처는 남계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굳이 지명을 붙이지 않고 ‘박 판서’라고만 한 것은 그가 가까운 곳에 살았기 때문인 듯하다. 실제로 박 판서가 아침에 불러도 급히 가서 뵈었고, 초대를 받아 아침을 먹고 돌아오는 일도 있었으며, 박 판서가 분원이나 지규식 집에 오는 일도 종종 있었다. 1894년 3월에는 박 판서 대감이 꽃구경을 하러 분원 공소에 들어와 술과 음식을 대접한 일도 있었다, 지규식은 종종 야심한 밤에 ‘내곡 이이선 선생 댁’에 가서 밤새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오기도 했다. 이이선과 형제였을 것으로 짐작되는 이일선은 분원 사람이었고, 1909년(융희 3)까지도 왕래가 확인된다. 이밖에도 지규식은 종종 이웃 마을 어르신들을 언급하며 인사를 다녔다. 이 각각의 인물들이 분원 업무에 어느 정도 관여하였는지는 명확히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분원마을에서 또는 그 이웃 마을에서 함께 거주하는 양반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지규식이 상당히 공을 들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또 분원마을은 기본적으로 분원 동료들이 함께 거주하는 마을이었으므로, 이웃 공동체로서도 그 관계가 친밀하고 중요했다고 할 수 있다. 분원마을의 구성원들도 분원을 중심으로 관계를 맺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분원마을은 이 인근 지역에서 중심지적인 역할을 하였다. 중앙관청의 분원이 여기에 있다는 점, 서울과 이곳의 왕래가 빈번할 수밖에 없었던 점, 전국적인 수준의 고품질 도자기를 제작하고 운반하기 위한 인력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점들은 이곳이 중심적인 입지를 가지기에 충분한 조건이었다. 18세기 중반 기록에서 나타나는 분원리 인구는 남녀 합계 총 664명이었고, 호수는 181호였다. 【표 1】과 같이 분원리는 남종면 중에서 인구가 가장 집중된 곳이었다. 【표 1】 18세기 중반 《여지도서》에 기록된 양근 남종면의 호구
  • 조선 최후의 공인, 지규식의 일기
    • 기록자료
    • 경제
    . ‘공당’은 ‘공사당상(公事堂上)’의 줄임말인데, 공사당상은 의정부 공사색(公事色)에 속한 당상관이었다. 1865년(고종 2)에 비변사를 의정부로 합쳐서 개편할 때, 비변사 조직의 구성과 그 기능은 공사색이라는 이름으로 의정부 아래 그대로 두게 되었다. 그에 따라 비변사의 당상관들을 뜻하던 ‘비국당상(備局堂上)’도 ‘정부당상(政府堂上)’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정부당상 중에서 공사색의 운영을 맡은 이를 공사당상이라고 하였다. 그중에는 공인과 시전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는 공시당상(貢市堂上)도 2명 포함되어 있었다. 지규식이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찾아가는 공당이 공인 관련 업무를 맡고 있던 공시당상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오히려 사옹원 분원의 일에 대해 구체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사옹원의 제조(提調)를 겸했던 당상관이었을 가능성도 높다. 사옹원에는 여느 관서에서처럼 실무직 이외에 자문직으로서 도제조(都提調) 1명, 제조 4명, 부제조(副提調) 5명을 두고 있었다. 4명의 제조는 사옹원의 세부 업무별로 나누어 일을 보았는데, 지규식이 만나는 공당은 사옹원 분원의 사무를 주관했던 제조를 맡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890년대 초반 무렵 ‘공당’이라 불리는 인물은 당시 사옹원 제조를 맡고 있었던 민영달(閔泳達, 1859-?)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규식은 공당 댁의 위치를 ‘훈서(勳西)’라고 지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1893년 5월 일기에서는 ‘훈서 민 대감’을 언급하며 그가 곧 ‘사옹원 공당’이라고 하였으며, 광주 초월면 쌍령리에 있는 부원군 민 씨의 산소에 변이 생겨 공당이 직접 광주에 내려와 분원공소에 들렀던 일을 쓰고 있다. 1894년 9월의 일기에서는 “훈서에 이르러 민영달 대감을 뵙고 돌아왔다”라고 이름을 명시한 경우도 있었다. 사옹원 제조는 분원공소의 운영 과정에서 핵심적인 권한을 행사하는 인물이었다. 앞서 살펴보았던 우천 장시를 둘러싼 분쟁에서도 지규식은 공당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분원의 이익을 관철시켜 나가려 했다. 분원의 공인들과 장인들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공당 댁에 가서 사정을 호소하였고, 공당도 그들의 사정을 들어보고 최대한 분원을 보호하는 입장에서 조치해 주었다. 지규식에게 공당 댁 방문이 필수적이었던 것은, 분원의 운영과 관련된 각종 공문을 발급받아야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공당은 왕실과 각 관청에서 요구하는 도자기 수량 목록을 보고받고, 분원 공인에게 조달을 명령하는 입장이었다. 즉 공당이 분원 관련 사무의 최종 결정권자였던 셈이다. 따라서 관련된 공문들은 공당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지규식은 백토 공문에 관인(官印)을 받기 위해서 이틀 동안 공당 댁에 가서 대기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지규식의 서울 일정 중에는 공당 댁에 방문하는 일이 자주 보인다. 하지만 지체 높은 공당을 늘 쉽게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먼저 공당에게 청할 것이 있으면 보통 집리를 통해 말을 전하였다. 그래서 집리가 제대로 말을 전해주지 않을까 봐 찾아다니며 간곡히 신신당부하는 모습도 자주 보인다. 공당 댁의 수청방(守廳房)에도 자주 부탁을 넣었고, 그 하속(下屬)들에게 의례적으로 사례비를 주었다. 1891년 2월 11일에는 아침에 공당 댁을 방문하여 공당이 잠에서 깰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공당 댁 하인들로부터 작년 진상 때 충분히 내지 않은 예전(例錢)을 독촉 받았다. 나흘 뒤에도 공당 댁 수청방에 가서 부탁한 일을 상의하였더니, 돈 170냥과 반상기를 마련해 바치라고 트집을 잡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지규식은 탈이 날까 걱정하며 요구를 받아들이고 간곡히 청하는 모습도 보였다. 2월 27일에는 결국 일이 잘 해결될 수 있도록 수고해 준 대가로 수청방 조준덕이라는 사람에게 100냥을 바쳤다고 한다. 이후에도 지규식은 공당 댁에 전할 말이 있을 때 조준덕을 통하는 일이 많았다. 공당이 먼저 지규식을 비롯한 분원 공인이나 장인들을 불러들일 때도 마찬가지였다. 1891년 1월 21일 일기에 따르면, 공당이 우천 장시의 일로 공인과 장졸을 대기시키라는 명을 내렸으므로 아침 식사 후 바로 공당 댁으로 갔으나 공당이 입궐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하루 종일 기다리기만 하다가 돌아왔다고 한다. 그다음 날에도 공당이 홍 대비의 회갑을 하례하기 위해 입궐하는 바람에 헛걸음하였다. 이 밖에도 공당 댁에 가서 기다리다가 못 만나고 돌아온 사례가 빈번히 보인다. 공당 댁에 사적으로 바치는 도자기나 선물도 상당히 많은 양이었다. 1891년 1월 23일에는 다음 날이 공당 생일이므로 ‘양지머리 1부(部), 국수 1기(器)’를 올렸다고 했다. 그다음 날에도 공당 댁에서 쓸 모리사발 3죽, 대접 3죽, 보시기 5죽, 접시 5죽, 종지 3죽을 최유현의 가게에서 구입하여 바치는 모습이 보인다. 1891년 4월 18일에도 공당 댁에서 쓸 큰 대접, 약기구 등을 집리 집으로 나르게 하였다. 공당 댁 말고도 지규식에게 도자기 상납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마동 김 지사, 김 별제, 쌍호 오위장, 현수안, 허 대감, 명동 김 참판, 간동 김 판서, 대전 호위군사, 사옹원도제조, 근장방(近仗房) 등등 말단 서리들부터 고위 관료들까지 지규식에게 도자기 상납을 요구하고 있었다. 도자기 말고 다른 선물을 바치는 경우들도 있었다. 1891년 5월 3일 지규식은 김 지사와 하 상궁에게 빚진 약값을 갚으면서 51냥으로 도미 1속(束)을 구입해 보냈다. 다음 달 6월 4일에도 지규식은 김 지사와 하 상궁에게 각각 닭 10마리씩 사서 보내느라 47냥을 지출했다. 7월 23일의 일기를 보면, 하 상궁과 대전 호위군사에게는 ‘정례적으로 보내는 그릇 단자’가 있었던 것도 확인할 수 있다.
  • 19세기 조선의 종부를 만나다 -유씨 부인의 가계경영과 재테크-
    • 기록자료
    • 경제
    단하게 준비한 후 사당에서 행해졌는데, 먼저 토지신께 술 1잔을 올린 후 의식이 시작되었다. 술은 가용주(집에서 담근 술) 중에 주로 청주나 약주를 미리 만들어 단잔으로 올렸다. 일기에는 이때 올린 다양한 차례 음식이 기술되었는데, 그중 몇 가지 사례만 확인해 보기로 한다. 기본적으로 ‘주과포혜’를 올리는 것으로 술, 과일, 마른 생선, 식혜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과포혜’는 그때그때 구하거나 살 수 있는 것으로 생률(밤)과 대합탕, 건시와 어탕, 능금(사과)과 계탕(닭고기), 참외‧호두와 계탕 등이 일기에 기재되어 있다. 둘째, ‘천신제’로 불리우는 제사가 있다. 이것은 제철에 첫 수확하는 과일이나 산물을 음식으로 만들어 조상님께 먼저 올리는 제사이다. 일기에는 1월 7일에 청어로, 5월에 보리, 8월에 햅쌀, 10월에 국화전으로 천신제를 지내는 기사가 등장한다. 지내는 날짜로 보아 부정기적인 제사로 보인다. 셋째 명절에 지내는 차례가 있다. 설과 추석 차례인데, 설에는 집에서 지낸 후 산소에 성묘를 다녀오고, 추석 때는 산소에서 차례를 모신 것으로 추정된다. 1850년 8월 15일 일기를 보면 하루 종일 비가 내려 묘사(墓祀)를 지내지 못하다가 저녁 무렵 잠깐 비가 그쳐 인근에 모신 산소에만 추석 차례를 지냈다는 기사가 나오고 있다(『경술일기』, 1850년 8월 15일). 넷째, 4대조까지의 조상이 돌아가신 기일 날에 지내는 기제사가 있다. 이 제사는 오늘날 우리가 지내는 제사와 동일한 형식과 규모로 지내고 있다. 제수 차림은 뒤에 기재하였다. 일기에 기제사는 ‘제사’로 표기되어 있는데, 4대 봉사를 하기 때문에 전부인의 제사를 포함하여 최소한 9번 지내는 것으로 보인다. 다섯째, 일기에는 10월 16일 ‘생신차례’가 등장한다. 일반적으로 부모가 돌아가신 후 3년 간, 즉 철상하기 이전까지는 부모가 살아계신 것처럼 생신상을 차린다고 하니, 이것이 바로 ‘생신차례’이다. 여섯째, 이 집안에서는 3월 3일 삼진날에는 진달래전, 5월 5일 단오날, 6월 6일 유두날에는 밀가루로 국수를, 7월 7일 칠석날 햇보리 음식, 9월 9일에는 국화전, 11월 동짓날에는 팥죽을 조상에게 올렸다고 전해지나, 본 일기에는 일부분만 반영되어 있다. 이렇듯, 일기에는 모든 제사나, 제사 음식이 다 기재되지 않았다. 다만, 제사용 편(떡)이나 술에 들어가는 쌀이나 누룩 등의 양과 기타 부재료 등이 기록되고 있는데, 이는 일기의 특성, 즉 가계부적인 일기 성격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김호근가의 예법과 제사 준비는 지금까지도 『가례원류(家禮源流)』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김호근가의 종손과 종부의 구술에 의하면 제사는 대체로 자시(새벽 1시 이후), 즉 닭 울기 전에 지냈으며, 제복으로 남성은 옥색 도포 차림, 여성은 옥색 치마저고리에 민족두리(기)를 썼다고 한다. 민족두리는 예복에 갖추어 쓰던 족두리로 검정색이며 위에 옥판이 붙어 있으나 화려하지 않게 만들어 제사용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이때 검은 댕기와 하얀 동으로 만든 큰 비녀(잠)을 함께 장착했다고 한다.
  • 활 쏘는 사람들과 나무 심는 마을
    • 기록자료
    • 사회
    으로 물이 흐르면 사당을 가로질러 나누고는 남천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서쪽 방면이 터지면 왕의 사당을 충돌해 지나가서 서천에서 합류하게 됩니다. 이로써 읍내에 거주하는 주민부터 부윤까지 모두가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큰물이 갑자기 나면은 머물 곳이 없어 갑작스런 순간에 사람들은 물고기가 됩니다. ―정극후, 『쌍봉선생문집(雙峯先生文集)』 권2, 「대경주사민청금보문평개거소(代慶州士民請禁普門坪開渠疏)」 역리들이 숲의 나무를 베고 밭을 만들고 북천의 둑을 뚫어 물길을 내자 그 즉시 정극후를 비롯한 경주의 뜻있는 선비들과 관리들은 들고일어난 것이다. 그들은 이들이 훼손한 오리수가 강의 범람을 막고 있고, 강둑이 훼손되면 홍수에 어쩔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고 호소했다. 이들은 북천이 범람하면 물이 시내를 완전히 덮쳐서 공자와 왕의 사당마저 위협한다고 설명했다. 사당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가장 소중한데 홍수를 방비하지 못하면 그럴 수 없고 마음에 큰 충격이라고 강조했다. 사실 한 해 전에 이미 수해가 경주를 덮쳤기에 그 두려움은 점점 커졌다. 경주의 또 다른 뜻있는 선비 김종일(1597-1675)은 이 사건에 대해 수해로 경주 읍내와 들판이 물에 잠겨 주민들이 물기나 자라와 다름이 없었다고 되새겼다. 그리고 그는 경주 주위에 나무를 심고 그곳에 대한 개간을 엄히 금지하고 있는 이유가 수재를 방지하고 풍수를 가꾸는 데 있다고 보았다. 정극후는 숲과 강둑이 무너지면 강으로 둘러싸인 경주 읍내가 물에 완전히 잠긴다고 묘사했다. 역리들이 숲을 다투면서 경주의 관리와 더불어 주민들이 매일매일 불안해하는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숲을 다툰 결과 강둑이 무너져 강물이 시내로 흘러들면 경주 시민들은 물고기가 되어 목숨을 위협받는 일이 눈앞에 선하다고 극적으로 적었다. 사람들은 경주 주위에 점점이 가꾸고 있는 숲은 강변과 연결되면서 수해를 방지하고 풍수를 만드는 기능이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숲이 주는 말림갓으로의 기능이 컸기에 땔감과 목재의 확보 그리고 개간을 통한 경작의 이익을 위해 서로 숲을 다투고 있었다. 이런 모습은 비단 경주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 조선 선비들의 로망, 관동유람
    • 기록자료
    • 문화
    백이정(白頤正)의 사당을 건립했기 때문이었다. 이 일로 현감이었던 윤기는 파직되어, 의금부에 하옥되었다. 풀려난 직후 하는 일 없이 유유자적 지내며 녹봉이 없어 부양할 가족을 걱정하면서도 현감 재직 중 상관을 맞이하던 일, 백성들을 매질하던 일, 세금을 독촉하던 일, 장부를 정리하던 일 등을 회상하면서 오히려 무거운 짐을 벗고 속세를 벗어난 것 이상의 홀가분함을 느끼고 있다. 윤기의 예를 든 것이 단편적이긴 하나 대체로 관인들의 생활은 이처럼 팍팍한 공무와 스트레스의 연속이었다. 관료 생활은 바쁜 일상의 연속이었다. 자신이 추구했던 학문적 이상과 관인이라는 현실에 대한 괴리감에 더하여 번다한 일에 시달릴 때면 공무에서 벗어나 탈속의 자유를 느끼고자 하는 열망을 품었다. 격무에 대한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장 많이 택한 공간은 산수였고, 그곳을 유람하며 스트레스를 해소했다. 그러나 재직 중에 여러 날이 소요되는 원거리 유람을 떠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가까운 산수를 찾아 잠시나마 유람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림 2】 강세황, 《송도기행첩》 중 나귀를 타고 유람하는 부분, 1757년,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에는 국내의 산수를 유람하는 것에도 큰 비용과 시간이 소요되었다. 교통이 발달한 현재처럼 1-2일의 여정이 아니라, 길게는 몇 달이 소요되는 여정이었으므로 서민들은 쉽게 결행하지 못하였다. 예를 들자면 유람에서 가장 필요한 준비물은 나귀였다. 말은 빠르다는 장점이 있으나, 가격이 비싼 데다가 먹이도 많이 먹고 지구력도 부족했다. 그에 비해 나귀는 먹는 양도 적고 지구력도 강해, 여유를 즐기기 위한 유람에 적격이었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1765년 지인(知人)인 즉지헌(則止軒) 유언호(兪彦鎬, 1730-1796) 등과 함께 금강산을 유람하고자 했으나 나귀 살 돈이 없어 주저했다. 박지원의 사정을 안 김이중(金履中, 1736-1895)이 나귀 살 돈 100냥을 보태 주어 박지원은 유람을 떠나게 된다. 이는 단편적인 예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대체로 유람에 많은 비용과 시간이 소요되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 주는 사례이다. 조선의 선비들이 주로 유람하는 곳은 금강산‧지리산‧청량산 등과 같은 명산이었는데, 산세가 매우 험준하여 산중 유람의 경우 때로는 일부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다. 조선시대의 산수 유람은 장기간 이동하며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경제적 능력과 시간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만의 상류층 문화였다. 고령으로 거동이 불편한 사람은 재력이 있어도 이동이 매우 힘들어 집안 노비 등의 많은 수행원을 동반하여야만 가능했다. 그러므로 산수를 유람하는 다수의 주체는 선비들이었고, 유람은 선비들이 누릴 수 있는 대표적인 여가문화였다. 당시 선비들 사이에서는 금강산‧지리산 등 일생에 한 번 이상 명산 유람을 다녀오지 않으면 문화 흐름의 대세에 무지몽매한 사람으로 취급받을 정도였다. 관료들부터 무명의 선비에 이르기까지 유람을 갈망했고, 유람을 통해 보고 즐기고자 했던 산수를 늘 그리워하며 생각에서 지우지 못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고질병 환자처럼 산수에 대한 강한 애착심으로 인해 산수벽(山水癖)을 관념처럼 지니고 살았다. 잠시라도 기회가 생기면 산수를 유람하고, 그 여흥을 잊지 못해 다시 유람하고픈 갈망에 시달릴 정도였다. 산수에 취해 평생 유람을 다니는 사람도 있었는데, 이런 사람들은 유람을 다녀온 뒤에도 감흥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였다.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은 부귀에 빠져 한 번도 산수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들이 많음을 탄식했다. 그는 부귀를 떠나 선비들이 생애에 한 번쯤 꼭 해 봐야 하는 것이 유람이라 강변했다. 유람 문화는 조선 선비들을 중심으로 확산되었고, 조선에서 열풍을 일으킨 문화 현상으로 주목된다. 조선 선비들에게 산수는 삶의 지향으로 표현하는 ‘강호’였고, 유람은 그들이 가장 선호하는 풍류이자 여가였다. 경제‧시간적 여유가 없거나, 노쇠하여 거동이 불편한 이들은 마당에 산수의 축소판인 가산(假山)을 조성하거나, 산수 유람을 기록한 산수유기(山水遊記)와 그림을 통해 와유(臥遊, 누워서 유람)를 즐겼다. 뿐만 아니라 가상의 유람을 떠나는 놀이 또한 즐겼다. 경승지를 여행하며 시문을 작성하는 보드게임의 일종인 「승람도(勝覽圖)」 놀이가 유행하였다. 「승람도」는 명승지를 유람하는 도표라는 뜻이다. 이 놀이는 유람객이 일정한 지점에서 출발하여 도표 위에 그려진 명승지를 구경한 다음, 다시 출발한 장소로 빨리 되돌아오기를 겨루는 놀이이다. 이것이 일상 문화가 될 정도로 선비들의 유람 욕구는 대단했다. 선비들 사이에서 가장 장쾌하고 호탕한 일을 꼽으라면, 유람이 단연 제일이었다. 【그림 3】 《승람도》, 조선후기, 국립민속박물관
  • 조선 지식인의 북경 관광
    • 기록자료
    • 문화
    까워질수록 인물, 사당과 절, 명승고적이 많아지고 바다와 땅이 넓어져서 두루 보고 상세히 기록하려 해도 빠뜨리는 정보가 많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드러내면서 사람들에게 특별히 북경의 사적을 상세하게 전하기 위해 『제경경물략』과 『대흥현지』를 참고했다고 밝혔다. 김순협도 김창업 및 이기지와 마찬가지로 『대흥현지』를 관광안내서로 활용하여 『대흥현지』에서 먼저 문승상사의 위치를 확인한 뒤에 실제로 찾아가기도 했다. 명대 유동(劉侗)과 우혁정(于弈正)이 편찬한 『제경경물략』은 조선 후기 많은 연행록에서 인용한 책 중 하나이다. 특히 19세기에 조선 지식인들이 널리 애독한 『신원지략』은 1788년 청대 오장원(吳長元)이 편찬한 책으로, 북경을 대내(大內), 황성(皇城), 내성(內城), 외성(外城), 원유(苑囿), 교경(郊坰) 편으로 나누어 서술하고, 각 권의 마지막 면에 해당 권역의 지도를 첨부하는 방식을 취했다. 대내는 자금성만을 가리키고, 황성은 자금성과 서원(西苑)을 포함한 것이다. 원유는 황제의 원림과 행궁이 조성된 만수산‧옥천산‧향산, 즉 ‘서산(西山)’ 권역을 집중적으로 다뤘으며, 교경은 내성과 외성 밖의 명승고적을 두루 소개했다. 또한 내성은 다시 만주족 팔기(八旗)의 거주 구역에 따라 동남·동중남·동중북·동북·서남·서중남·서중북·서북으로 구분했고, 외성은 다시 서북·서남·동북·동남으로 구분했다. 이렇게 북경성 안팎을 세분화하여 소개한 기록을 접한 조선 지식인들은 북경 지리를 더욱 체계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1850년 세폐 사행에 참여한 권시형(權時亨)은 외성의 동편문(東便門)을 나가면서 북경성이 ‘凸’ 자형 구조임을 확실하게 인지하기도 했다. 또 1811년 동지 사행에 참여한 이정수는 북경의 권역을 궁성 내(宮城 內)·성내(城內)·외성 내(外城 內)·서직문 외(西直門 外)·원명원 외(圓明園 外)·서산(西山)·서산 외(西山 外)로 구분하여 주요 관광지를 간추렸다. 각각에 속한 명승고적을 보면 ‘궁성’은 곧 『신원지략』의 황성을 의미하고, ‘성내’는 곧 북경 내성을 가리키며, 특별히 서직문, 원명원, 서산을 거점으로 설정하여 요령 있게 안내했다. 중심부인 황성을 기준으로 삼아 내성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나누어 인식하던 데서 그 주변부인 외성과 외곽으로 시야를 확장하여 북경의 지리적 위치를 폭넓게 파악하는 데 지리서가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 산의 인문학, 지리산을 유람하다
    • 기록자료
    • 문화
    꼭대기에 있다. 사당에 성모상(聖母像)이 있는데, 그 정수리에 칼자국이 나 있다. 속설에 “왜구가 우리 태조에게 패하여 어려운 지경에 처하자, 천왕(天王)이 자기들을 도와주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래서 분함을 참지 못하여 성모상에 칼질을 하고 물러갔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30 경상도 진주목(晉州牧) 이 기록대로라면 성모사는 천왕봉 꼭대기에 있었고, 그 안에 성모상이 모셔져 있었다. 이 석상을 누가 언제 만들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성모상은, 불가(佛家)에서는 석가모니의 어머니 마야부인(摩耶夫人)으로 인식하였고, 산 인근의 사람들은 모두 천왕성모(天王聖母)라 여기던 신상(神像)이었다. 질병이 있으면 가서 기도하였고, 산속의 승려들도 이 사당에 와서 성모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 외에 이승휴(李承休, 1224-1300)의 『제왕운기(帝王韻紀)』에 의거해 성모가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어머니 위숙왕후(威肅王后)라는 주장도 있었다. 이렇듯 역대로 지리산 성모의 실체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민간에서 조성되어 유행한 의식이었을 뿐, 조선조 유가 지식인들은 지리산신(智異山神)으로 여겨, 자연과 하늘에 대한 숭배 의식이 가미된 장소로 인식하였다. 김종직이 천왕봉에서 다음 날 일출을 보게 해 달라고 제물을 차려 성모에게 기도했던 행위는 이러한 의식에서 발로된 것이라 하겠다. 이후 성모사는 영남과 호남 사람들의 음사(淫祠)가 되어 귀신을 숭상하는 풍습을 양성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예컨대 유몽인은 “인근의 무당들이 모두 이 성모에 의지해 먹고산다. 이들은 산꼭대기에 올라 유생이나 관원들이 오는지를 내려다보며 살피다가, 그들이 오면 토끼나 꿩처럼 흩어져 숲속에 몸을 숨긴다. 유람하는 사람들을 엿보고 있다가, 하산하면 다시 모여든다.”라 하였다. 특히 감수재(感樹齋) 박여량(朴汝樑, 1554-1611)은 “임진왜란을 겪은 뒤 사람들이 백에 하나도 남지 않을 정도로 죽어 나가 마을이 쓸쓸해져 더는 옛날의 모습이 아닌데, 세상 밖에 사는 무당이나 승려 같은 무리는 옛날보다 더욱 번성하고 있다. 사찰로 말한다면 금대암(金臺庵)・무주암(無住庵)・두류암(頭流庵) 외에 영원암(靈源庵)・도솔암(兜率庵)・상류암(上流庵)・대승암(大乘庵) 등은 예전에 없던 절이다. 사당으로 말한다면 백모당(白母堂)・제석당(帝釋堂)・천왕당(天王堂) 등은 모두 옛날에 화려하게 지은 것이고, 용왕당(龍王堂)・서천당(西天堂) 등은 새로 지었다. 노역을 피해 숨어든 무리와 복을 비는 백성들이 날마다 구름처럼 모여들어 봉우리와 골짜기에 낟알이 어지러이 널려 있는데도 나라에서 금지할 수 없으니, 참으로 탄식할 만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당시 성모사를 비롯한 지리산 권역의 사당과 사찰이 나라에서도 손쓸 수 없을 만큼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모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와 관련해서는 김종직과 박여량의 기록에 중요한 단서가 보인다. 김종직은 “사당 건물은 3칸뿐이었다. 엄천리(嚴川里) 사람이 새로 지었는데, 나무판자로 지은 집으로 못질이 매우 견고하였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바람에 날아가 버리기 때문이다.”라 하였고, 박여량은 “봉우리 위에 판잣집이 있는데, 이 또한 이전에 본 그 모습이 아니었다. 이전에는 한 칸뿐으로 지붕은 판자를 덮고 돌로 눌러서 비바람에 날아가지 않을 정도였다. 지금은 그 규모를 넓혀 3칸 집을 지었는데, 판자에 못을 박고 판자로 둘러친 벽 바깥에 돌을 에워싸 매우 견고하게 만들었다. 그 안에는 수십 명이 앉을 수 있었다.”라고 기록하였다. 김종직이 성모사를 찾은 것은 1472년 8월 15일이고, 박여량은 1610년 9월 5일 천왕봉에 올랐다. 따라서 이들 사이에는 130여 년의 시차가 발생한다. 결국, 김종직이 머물렀던 성모사는 3칸이었는데, 이후 성모사가 쇠락하여 1칸으로 줄었다가 다시 3칸으로 지어졌고, 더구나 1칸이었을 때는 건물의 지붕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돌을 얹어 놓을 정도의 허름한 집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엄천리는 현 경상남도 함양군 휴천면 남호리 일대를 가리킨다. 곧 천왕봉 성모사는 3칸짜리 판옥이며, 함양 사람이 지었다. 그런데 우리는 박여량의 기록을 통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그의 일행이 성모사에 도착하여 승려에게 저녁밥을 지으라고 했더니, ‘한 늙은 무녀가 솥을 숨겨 버려서 밥을 할 수 없고, 물통을 아래로 떨어뜨려 버려 물을 길어올 수도 없다’고 하였다. 늙은 무녀가 선비들을 골탕 먹이려고 한 짓이어서 배가 고파도 밥을 해 먹을 수 없고, 목이 말라도 물을 마실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까닭을 물으니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상봉은 진주와 함양의 사이에 있다. 지역으로 말하면 천왕봉 중앙이 경계가 되고, 천왕당으로 말하면 사당의 중앙이 경계가 된다. 그러므로 사당을 짓고 판자를 덮은 사람은 함양의 화랑(花郞)인 남자 무당이었고, 못을 박아 견고하게 한 사람은 진주의 늙은 무녀였다. 진주는 병영(兵營)이 있는 곳이고, 함양은 그 병영에 속한 군(郡)이다. 화랑과 무녀가 이익을 다투어 서로 싸우는 바람에, 이 봉우리의 사당이 싸움의 빌미가 되었다. 무녀는 사당을 진주의 것이라 하였고, 다른 일을 꾸며 화랑을 무고(誣告)하여 함양의 감옥에 갇히게 하였다. 그리고 사당에 있던 솥을 숨기고 물통을 없애 유람하는 사람들과 시인들이 먹고 마실 수 없게 하였으니, 무녀의 죄는 이것만으로도 매우 크다. ―박여량, 「두류산일록(頭流山日錄)」 이 기록을 통해 몇 가지 단서를 포착할 수 있다. 지금의 지리산 천왕봉은 행정구역상 산청군과 함양군의 영역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천왕봉은 함양군과 진주목(晉州牧)의 교차 지점이었고, 성모사가 그 경계에 있었다. 천왕봉 꼭대기의 3칸짜리 조그마한 판옥의 지붕을 덮은 사람과 못질한 사람이 각각 다른 지역의 백성이라는 점, 그것이 빌미가 되어 이 봉우리의 사당이 두 지역의 송사(訟事) 거리가 되었다는 점 또한 재미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성모사를 포함한 천왕봉 인근의 땅은 조선 후기까지도 함양 관아의 소속이었다. 조선 후기의 유산기에 의하면, 함양군 주관으로 천왕봉에 10칸이 넘는 건물을 지어 관할 수령이 천왕봉을 올랐을 때 묵을 숙소로 사용한 기록이 보이기 때문이다. 성모사의 위치 또한 초기와 후기가 달랐던 듯하다. 지암(遲庵) 이동항(李東沆, 1736-1804)은 「방장유록(方丈遊錄)」에서 ‘성모사는 본래 위쪽에 있었는데, 언제 아래쪽으로 옮겨 세웠는지 모르겠다’라고 의문을 제시하였다. 아마도 성쇠(盛衰)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성모사의 위치가 아래쪽으로 옮겨지고, 본래의 자리에는 조선 후기 함양 관아에서 축조한 수령의 숙소가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그림 14】 천왕봉 성모사 추정 터
  • 조선시대 사람들의 더불어 살기, 향약
    • 기록자료
    • 사회
    禮)와 강신례가 향사당(鄕射堂)·향교(鄕校)·서원(書院) 등 여러 시설에서 거행되기도 했다. 조선시대 동안 향약은 여러 공동체 조직과 접목하여 다양하게 운영되었다.
  • 조선시대 양반의 부부 생활과 이혼
    • 기록자료
    • 사회
    주(祭酒)에 섞고 사당에서 난동을 부려 제석(祭席) 등의 물건을 찢고 부수기까지 하여 유정기가 예(禮)에 의거하여 죄를 성토하고 사당에 고한 후 내쫓았다는 것이다. 또, 신씨가 쫓겨난 후 유정기 전처 아들의 집에 의탁했는데, 유정기가 아들의 병을 구료하기 위해 이 집에 머물게 되자 화를 내고 한밤중에 혼자 걸어 달아났다고 했다. 사헌부에서는 이 행동에 대해 “여자의 실신(失身)이 이보다 큰 것이 없다”라고 하며, 신씨가 밤에 혼자 걸어간 행위를 ‘실신’으로 규정했다. 그다음에 유정기와 그의 친족들이 이이를 허락받기 위해 예조에 청원했던 내력에 대해 거론했다. 이 부분에서는 “정기가 비록 이미 사당에 고하고 신씨를 내보냈다 하더라도 관에 소지를 올려 명확하게 내쫓고 윤상(倫常)을 바로잡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예조에 청원하여 이이를 청했다며 유정기의 이이 청원을 정당화했다. 유정기의 이이 청원이 패악한 행위를 한 처를 내쫓아 윤상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라고 성격 규정한 것이다. 예조에서 이 청원을 물리친 일에 대해서는 신씨의 패악한 행동을 이웃 사람 중에 알지 못하는 자가 없고 목격자도 있다는 점, 이이의 법이 법전에 규정되어 있지는 않지만 남편 집안의 청원으로 이이하도록 허락한 경우가 많다는 점을 지적하며 반론을 제기했다. 마지막으로 신씨와 같이 죄악이 가득한 부녀는 고장(告狀)에 따라 부부 관계를 끊게 하는 것이 예에 합당하다고 주장했다. 예조에서 법이 없어 마음대로 직단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왕에게 아뢰어 왕명으로 이이를 허락하여 윤상을 바로잡아 부지하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만약 이이를 허락하지 않는다면 유정기 개인 집안의 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윤상을 무너뜨리고 예와 법을 크게 파괴하게 될 것이라고 하며, 예조에 명하여 특별히 이이를 허락하도록 하고, 신씨를 법에 따라 처결하기를 청했다. 이 계문에서는 유정기 측에서 주장한 신씨의 악행을 거론하며 이 부부를 이이시키고, 처 신씨를 처벌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윤상을 바로잡아 부지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그 명분이었다. 그러나 남편 측의 청원 내용과 소문만으로 이이시키고 처벌하기까지 하는 것은 공정한 법 적용이 아닐 뿐 아니라 훗날 처의 악행을 지어내고 소문을 내어 처를 버리고 이이 청원을 하는 폐단을 자아낼 수 있는 일이었다. 조선시대에 사헌부에서는 관원들의 합의하에 계문을 올렸다. 따라서 이 계문 역시 사헌부 관원들이 합의한 내용기는 하겠지만 이를 주도한 것은 사헌부 장령 임방이었다. 그런데 임방이 1703년(숙종 29) 영광 군수에 부임할 때 유정기와 이성로가 함께 술을 가지고 가 시를 주고받으며 전별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감안하면 임방이 유정기 측에서 제공한 정보에 경도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조선 전기 사헌부에서는 주로 처를 버린 남편을 적발하고 형률을 적용하여 처벌을 청하는 역할을 했다. 관원이나 관원 후보자가 처를 버린 경우 부부의 의를 저버린 남편을 형률에 의해 징계함으로써 백관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법사(法司)로서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남편 측에서 실행이나 불효 등을 사유로 처를 버리더라도 증거가 명확하지 않으면 처를 버리기 위해 허물을 씌우는 것으로 보아 남편이 이유 없이 처를 버린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이 계문에서는 사실관계가 증명되지 않은 사안에 대해 남편 측의 청원 내용에 의존하여 이이시키고 처의 악행을 징계해야 한다고 간언했다. 이때 사헌부는 국가의 행정 조치가 처, 며느리로서의 도리를 지키도록 독려하여 윤상을 바로 세우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을 주장하는 언론기관의 역할을 했다. 사헌부의 계문이 명확한 사실관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 계문이 올라온 이상 유정기 측의 두 차례 청원에 처분을 내렸던 관사이자 유정기의 상언을 심의하고 있던 관사인 예조의 입장 표명이 필요했다. 따라서 다음 날 예조 판서 민진후가 청대(請對)하여 숙종에게 이 사안에 대해 아뢰었다. 전임 예조 판서 재임 시에 올라왔던 유정기의 소지는 예조에서 법과 예문에 없는 것이라고 물렸고, 자신이 취임한 후 올라온 유정기 친족의 단자도 같은 이유로 허락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리고 현재 심의하고 있는 상언에 대한 입장은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민진후는 신씨의 패악한 행실은 진신(搢紳) 사이에서도 말하는 자가 많은 듯하지만 조가(朝家)에서 일을 처리하는 데에는 훗날의 폐단을 예방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처와 반목하여 처의 악행을 꾸며 내어 이이를 청하게 된다면 윤상의 변고라는 것이다. 실제로 신씨의 악행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를 증명할 뚜렷한 증거가 없는데도 이이시킨다면 훗날 이를 악용하여 이이를 청하는 사람들이 생겨 윤상을 무너뜨리게 될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다만 민진후는 상언에 기술되어 있는 내용 중 더러운 물건을 제주(祭酒)에 섞고 욕설이 시부모에게 미쳤다는 신씨의 행위는 모두 십악(十惡)의 대죄(大罪)에 해당되고, 성상이 이에 대해 알게 되었으니 형조에 이문(移文)하여 끝까지 실상을 조사하여 사실이라면 처벌해야 한다고 했다. 십악은 『당률』, 『대명률』 등에 규정된 매우 심각한 10가지 범죄인데, 이 중 7번째에 해당하는 ‘불효’가 신씨가 범한 십악 범죄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씨의 행위가 15~16년 전에 있었던 일이고, 집안에서 일어난 일이어서 진상을 파악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종이 주인의 행위를 증언하고, 자식이나 아우가 어머니나 형수의 행위를 증언하게 하는 것이 법리에 어긋나기 때문에 대신들과 상의하여 경연에서 아뢰려고 했는데, 아직 실행하지 못한 상황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이 일은 형조에서 법을 상고하여 처결해야 하며, 서둘러 이이시킬 일이 아니라고 했다. 즉, 형조에 명하여 신씨 행위의 진위에 대해 엄히 구핵한 후에 이이 여부를 거론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숙종은 예조 판서의 의견을 받아들여 형조에서 조사하여 결과가 나온 후에 처리하라고 명했다. 이에 장령 임방은 다시 남편이 고한 내용을 믿고 이들을 이이시키고 신씨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사헌 송상기는 임방의 계문에 대해 의견이 같지 않다며 인피(引避)했다. 그는 무거운 죄를 조사하지도 않고 처벌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며, 조사하여 신씨가 승복한 후에 판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1704년(숙종 30) 10월 의금부에서 신씨를 가두고 조사를 진행했다. 처음에는 형조에서 이 사건을 맡았지만 형조에서 신씨가 조관(朝官)의 처이기 때문에 의금부에서 조사해야 한다고 계청하여 옮겨 조사하게 되었다. 이로써 이 사건은 형사사건 조사의 형태로 전환되어 1706년(숙종 32) 4월 신씨와 유정기의 형량이 결정되기까지 1년 6개월 동안 조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신씨는 태영이라는 이름으로 지칭되었고, 남편 측에서 신태영의 악행으로 지목한 행위를 실제로 했는지 진위 여부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림 14】 『금오계첩(金吾契帖)』에 수록되어 있는 의금부의 모습 (소장처: 고려대학교 박물관) 의금부 조사 과정에서 신태영은 남편 측에서 자신이 했다고 주장한 행위들을 모두 하지 않았다고 부인했다. 또한 그는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은 유정기가 비첩에게 미혹된 탓이라고 주장했다. 자신이 유정기의 처가 된 지 27년인데, 1688년(숙종 14) 이전에는 다섯 자녀를 연이어 낳았으며, 부부간에 서로 도리를 잃은 일이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이해 이후 유정기가 비첩에게 미혹되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자신에게 덮어씌워진 죄명은 유정기가 참소하는 말을 믿고 꾸며 낸 것이라고 했다. 밤에 혼자 나가 달아났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핍박을 받아서 그런 것이고, 혼자서 간 것이 아니라 여러 명의 여종들이 따랐으며 남편의 전처 자식인 유언형이 뒤쫓아 와 같이 갔다고 했다. 친족 50여 인이 연명하여 단자를 올린 일은 유정기가 억지로 부탁해서 한 것이라고 진술했다. 증인은 유정기의 비첩 예일, 신태영이 밤에 갈 때 이를 목격한 박운산의 여종 순개, 유언명의 여종 이생, 유정기의 여종 태례, 신태영의 여종 예업, 친족 50여 인이 연명하여 예조에 올린 단자의 장두(狀頭)인 유명구였다. 이중 유명구는 병이 심하다는 직산 현감의 보고가 있어 장두 다음에 연명한 유명뢰를 대신 조사했다. 남편과 시부모에게 욕하고, 제주에 더러운 것을 섞고 행패를 부린 행위에 대해서는 유명뢰와 유정기의 비첩 예일의 증언을 청취했다. 유명뢰는 유정기의 부탁을 듣고 죄 없는 사람의 죄를 꾸며 내어 단자를 올린 것은 아니라고 부인했다. 같은 집에 거주하지는 않아 신태영의 행위를 직접 보고 들은 것은 아니지만 유정기 집 제사에 참여할 때 동종(同宗) 중에 유정기에게 그 말을 듣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했다. 예일은 그 일에 대해서 전혀 듣거나 본 일이 없다고 증언했다. 유명뢰의 공초를 받은 의금부에서는 신태영의 공사와 유명뢰의 공사가 어긋난다며 신태영을 다시 추문하기를 청하여 윤허를 받았다. 그런데 의금부에서 유명뢰의 공사(供辭)를 정서할 때 유정기가 외부에서 원정초(元情草) 1본을 들여보내 공초를 조작하게 한 일이 발각되었다. 나장을 통해 하리(下吏)에게 전해 주어 유명뢰의 공사를 고쳐 써서 들이게 한 것이 의금부 낭청에게 적발된 것이다. 의금부에서는 이 일을 조사하기 위해 유정기를 잡아들여 가두고 조사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신태영 행위의 진위 여부를 조사한 것은 아니었다. 결국 1704년(숙종 30) 11월 의금부에서는 조사 결과를 계문했다. 먼저 시부모에게 욕하고 제주에 더러운 것을 섞은 일에 대해서는 신태영이 극구 발명하고 유명뢰와 예일도 목격한 사실이 아니라고 한 데다 법리에 구애되어 남편인 유정기의 증언을 받을 수 없어 사실을 밝힐 길이 없다고 했다. 따라서 사헌부의 계문에 따라 억지로 그 죄를 감단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음으로 밤에 혼자 갔다고 한 일에 대해서는 증인들이 한결같이 여종들이 따라갔다고 증언했다며 실신했다고 하는 것은 억울하다고 할 만하다고 했다. 그런데 “부인의 도로 논한다면 설령 남편 집안에서 핍박받았다 하더라도 문밖에 한 걸음이라도 나가서는 안 되는데, 자신을 단속하지 않고 욕된 누를 스스로 취했으니, 전혀 죄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라며 부인의 도에 대한 논의를 부가했다. 그리고서 율문에 근거할 만한 조문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러한 결과를 근거로 이이는 의금부에서 논의할 대상이 아니라고 하고, 형률에 대해서는 법에 규정되지 않았는데 논단하는 것은 의금부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며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기를 청했다. 대신들은 시부모에게 욕설하고 제주에 오물을 섞은 것과 같은 행위를 실제로 했는지 여부를 밝히지 못한 상태에서 의논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의견을 내었다. 또 좌의정 이유는 유정기를 조사할 수 있는 법과 예문상의 근거를 제시하며, 유정기도 조사하기를 청했다. 이에 따라 숙종은 의금부에 엄히 조사하여 진위 여부를 밝힌 후 품처하라고 명했다. 그리하여 다시 의금부에서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금부 당상이 잇따라 바뀌어 해가 지나서도 제대로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또, 1705년(숙종 31) 3~4월 사이에 한 달여 동안 신태영이 병으로 보방되기도 했다. 따라서 이해 6월 즈음에야 신태영의 재추문이 이루어졌다. 이번에는 유정기도 잡아 가두고 조사했는데, 그는 신태영과 상반된 주장을 폈다. 그중에는 신태영이 제주에 오물을 넣는 것을 집안 사람 유후기가 목격했다는 진술도 있었다. 그런데 유후기는 이러한 유정기의 진술이 근거 없는 말이라며 부인했다. 1705년(숙종 31) 11월 의금부에서는 이 조사 결과에 근거하여 다시 의처(議處)하여 계문했다. 이이에 대해서는 유정기와 신태영 사이에 부부의 의가 끊어졌지만 의금부에서 논의할 사안이 아니라고 했다. 신태영에게는 1년 전과 마찬가지로 적용할 형률 조문이 없다고 하고, 유정기에 대해서는 가장으로 제가(齊家)하지 못한 죄를 면하기 어려우니, 이로써 감죄(勘罪)하기를 청했다. 이에 숙종이 대신들에게 수의하게 했다. 논의에 참여한 평천군 신완은 이이에 대해서는 신태영의 성행(性行)이 괴려(乖戾)하니, 부부 관계를 끊을지 끊지 않을지는 오직 유씨가에 달려 있고, 이이는 국전에 규정되어 있지 않다고 했다. 신완은 유씨가에서 성행이 괴려한 신태영을 내쫓는 것은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었다. 다만 이이가 법전에 규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이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 그의 의견이었다. 또, 전후 초사에 패악한 말이 드러난 것을 죄로 삼아 신태영의 형벌을 의논할 것을 제안했다. 숙종은 의논한 대로 시행하라고 명했다. 공초 내용을 통해 신태영의 악함을 알 수 있다는 말을 처음 한 사람은 숙종이었다. 1705년(숙종 31) 9월 지의금부사인 조태채가 신태영이 남편인 유정기에 대해 망측한 말을 많이 하면서 자신이 유명뢰와 인척 관계라서 이 옥사가 매우 염려된다고 했다며, 인혐(引嫌)하며 체직해 주기를 청했다. 그러나 숙종은 조태채의 사의를 수용하지 않으면서 “태영의 당초 원정(原情)을 보면, 그가 온갖 악을 모두 갖춘 것을 알 수 있다.”, “여인으로서 그 남편과 그 아들의 일에 공사(供辭)가 이와 같으니, 이미 크게 악한 사람이다. 어찌 이 때문에 인혐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신태영의 공초 내용을 문제 삼았다. 숙종은 신태영이 남편 유정기와 전실 자식인 유언명에 대해 나쁜 말을 한 것에서 그의 악한 성행을 추론한 것이다. 이러한 추론이 대신 수의 과정에서 재론되어 결국 최종 조율 과정에서 신태영에게 남편에게 욕한 죄에 해당하는 형률을 적용시키게 되었다. 이듬해인 1706년(숙종 32) 2월 예조 판서 이이명은 주무 관사 장관으로서 이이 허락 여부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다. 우리나라에는 이이의 법이 없어 역가(逆家)나 실신(失身)한 경우 외에는 이이를 허락할 근거가 없다고 했다. 또, 남편의 호소에 따라 이이를 허락하게 되면 여성이 의지할 곳이 없어져 원통함을 품는 단서가 되며, 부부 사이의 반목은 많이들 애증의 사이에서 나오는데 그중에는 남편의 책임이 있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다만 신태영의 행위는 매우 패려한데 죄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고 하여 남편에게 욕한 죄로 처벌하는 것은 너무 가볍게 처벌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담당 관사에서는 형률에 따라 논죄할 수밖에 없으니, 성상께서 별도로 명하여 특별히 죄를 더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이에 숙종이 적용해야 할 율문을 묻자 이이명은 장 80이라고 답했다. 『대명률』에는 첩이 남편에게 욕하면 장 80에 처하도록 규정되어 있었고, 처가 남편에게 욕한 행위에 대해서는 따로 규정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이이명은 첩이 남편에게 욕한 행위에 대한 처벌 규정을 근거로 장 80이라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답을 들은 숙종은 율문이 너무 가볍다는 입장을 취했다. 또, 이이명은 유정기와 신태영이 처벌받는데, 유정기의 비첩인 예일만 처벌받지 않을 수 없다며 예일에게 종중 과죄(從重科罪)하기를 청했다. 이해 4월 의금부에서는 유정기와 신태영에게 적용할 형률을 조율하여 계문했다. 유정기에게는 이전에 계하받은 대로 제가하지 못한 죄로 감율했다. 그러나 제가하지 못한 죄에 합당한 형률이 없어 『대명률』 불응위(不應爲)조의 사리상 중한 죄에 해당하는 형률을 적용하여 장 80으로 조율했다. 이 조항에서는 마땅히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지만 적용할 형률이 없을 때 태 40에 처하고, 사리상 중한 경우에는 장 80에 처하도록 했는데, 유정기에게 후자를 적용시킨 것이다. 신태영에게는 남편에게 욕한 것에 해당하는 형률을 적용하여 태 40으로 조율했다. 율문의 형량이 매우 가볍지만 이 외에 적용 가능한 형률이 없고 의금부에서는 율문에 벗어나는 형량을 가볍게 의논할 수 없다며 이대로 조율하여 계문했다. 1746년(영조 22)에 편찬된 『전율통보』에는 첩이 남편이나 처에게 욕하면 장 80에 처한다는 『대명률』 조문과 함께 처가 남편에게 욕하면 태 40에 처한다는 규정이 수록되어 있다. 이 규정이 제정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신태영에 대한 판결이 이루어지던 1706년(숙종 32) 당시에도 이 규정이 통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숙종은 태 40이든, 장 80이든 죄가 무겁고 율이 가볍다며, 특별히 먼 곳에 유배 보내라고 명했다. 결국 신태영은 부안현에 정배되었다. 그리고 유정기의 형량은 속장(贖杖) 80에 고신 3등을 빼앗는 데 해당하지만 공신 후손이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1등급을 감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에 따라 유정기는 실형은 받지 않고, 장 70을 속전으로 바치고, 고신 2등을 빼앗기는 것에서 마무리되었다. 이후 신태영은 4년여 뒤인 1710년(숙종 36)에 유배지에서 석방되었고, 유정기는 판결 후 5개월쯤 후인 1706년(숙종 32) 9월에 직첩을 돌려받았다. 이 판결이 내려지고 6년 후인 1712년(숙종 38) 가을, 유정기가 다시 이이를 청하는 상언을 올렸다. 그런데 담당 관사에서 상언 사안 처리 방안에 대해 보고하는 계문을 올리기 전에 유정기가 사망했다. 그런데도 이듬해 정월 사헌부 지평 김유경이 상소하여 이 일은 윤강(倫綱)에 관계되니 청원자가 사망했다 하여 처리하지 않고 버려둘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일에 대해 대신에게 다시 묻고, 외방에 있는 대신과 유신(儒臣)에게 묻고 또 물어 합당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사안에 대해 다시 논의가 이루어졌다. 1713년(숙종 39) 4월 대신들에게 이에 대해 의견을 묻자 대부분의 대신들이 역적 집안이나 실신한 경우 외에는 이이시키는 법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판부사 이여는 과거 신태영이 의금부 공사(供辭)에서 남편을 원수처럼 보고 해치고자 했다는 점을 들어 이이시켜 풍교를 맑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공조 판서 김진규는 처첩이 투기하고 아양 떠는 사이에서 애증이 일정하지 않으니, 한번 이이의 길을 한번 열어 놓으면 장차 죄가 없는 부인 중에 억울함을 품게 될 자가 많을 것이라는 점, 신태영이 패악하기는 하지만 유정기의 주장에도 의심되는 부분이 많다는 점, 유정기와 신태영이 반목한 것이 비첩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점, 신태영과 전처 자식 간 모자의 윤의(倫義)를 단절시킨다는 점 등의 이유를 들어 이이를 반대했다. 이로써 대신들과 유신들은 이여의 주장을 지지하는 측, 김진규의 주장을 지지하는 측, 국전(國典)에 어긋난다는 측 세 편으로 나뉘었다. 이해 5월에 이 문제로 김진규, 이여, 호조 참의 임방의 상소가 이어졌지만 결론이 나지는 않았다. 이전에 상언을 올려 왕의 처분이 내려지고 부부가 모두 형사처벌까지 받았던 사안일 뿐 아니라 청원 당사자가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헌부 관원이 윤상에 관한 일이라는 이유로 대신과 유신들에게 두루 묻기를 청하여 다시 대대적으로 논의가 이루어졌다는 점이 주목된다. 오늘날에는 범죄 행위로 보기 어려운 집안 내에서의 여성의 행적이 윤상에 관한 일이라는 이유로 공적 논의의 중요한 주제가 되었던 것이다. 유정기의 이이 청원 사례를 통해 처의 실행이 명확한 사안을 제외하고는 기처 승인이 매우 신중하게 이루어졌던 조선 전기의 이혼에 관한 정책이 18세기 초반까지도 관례화되어 지속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혼인에 관한 사안을 관장하는 관사인 예조에서 이이의 법이 없다는 이유로 남편의 이이 청원을 반려했다는 사실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에 유정기는 이이를 허락받기 위해 친족들의 도움을 얻어 청원을 해야 했고 상언까지 해야 했다. 한편, 조선 후기 변화한 이혼의 실상이 드러나기도 한다. 유씨 문중 50여 인이 이이를 청하는 단자를 올려 유정기, 신태영 부부의 이이를 청원했다는 사실을 통해 종자 부부의 이혼 사안은 부부 당사자의 문제만이 아닌 문중의 문제로도 인식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헌부 역할의 변화도 감지된다. 조선 전기에 사헌부는 처를 버린 남편을 적발하여 조율하고 처벌을 청함으로써 남편에게 부부의 의를 지키도록 독려하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이 사례에서는 남편의 청원 내용만을 가지고 처의 행실을 지적하며 이이시키고 처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관직자나 관직 후보자인 남성들에게 부부의 의를 지키도록 책임을 부여했던 모습에서 처의 도리를 강조하는 모습으로 변화한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당시 대신들 및 왕의 논의와 청원 처리 과정에서도 드러난다. 조선 전기 기처 규제의 업무를 관장했던 사헌부에서는 처의 실행과 불효를 사유로 처를 버린 경우 분명한 증거가 없으면 남편이 제시한 기처 사유를 인정하지 않았고, 허위로 처를 모함한 경우에는 무고죄로 처벌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사례에서는 유정기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신태영이 진술할 때 남편을 비난했다는 것을 빌미로 처의 평상시 행동을 유추하여 규정에 없는 형률을 적용하고 가중처벌하기까지 했다. 또한 유정기가 증인의 공초를 위조하고자 했던 시도가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유정기에게 이에 합당한 처벌을 하지도 않았다. 처의 도리에 대한 강조가 율문에 따른 법 적용을 압도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 조선 지식인의 북경 관광
    • 기록자료
    • 문화
    식인들은 문천상의 사당에 가서 숭명배청 의식을 드러내며 비분강개를 표출했다. 1778년 사은 정사로 북경에 간 채제공(蔡濟恭)은 문승상사에 가서 “중국의 멸망을 고금이 슬퍼하는데/ 문승상 사당에는 초목만 황량하네. 오직 해마다 동국의 사신이 와서/ 유상을 배알하고 한번 분향하네(中州淪沒古今傷, 文相祠堂草木荒. 惟有年年東國使, 拜瞻遺像一焚香)”라고 읊었다. 청대에 문승상사는 먼지와 흙이 낭자한 채 방치되어 있어 조선 지식인들은 퇴락한 사당의 모습을 몹시 개탄스러워했다. 홍대용은 문천상의 소상이 부스러져 있고 건물과 처마가 허물어진 것을 보고서 너무나 슬픈 나머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은 백여 냥을 주어 수리를 부탁하려 했으나 성사하지 못하기도 했다. 조선 지식인들은 문천상의 절의를 되새기며 그 의미를 다채롭게 논했다. 그 중 대표적인 작품이 박지원의 「문승상사당기(文丞相祠堂記)」이다. 「문승상사당기」는 1861년 열하문안사의 부사로 북경에 간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朴珪壽)에 의해 청조 문사들에게도 알려진 명문장이다. 문천상의 충절은 조선 지식인과 한족 지식인들이 공감대를 형성하는 매개가 되기도 했다. 이 글에서 박지원은 문천상의 순절을 찬미하며 문천상이 죽음에 이르게 된 원인을 원 세조가 문천상을 자신의 신하로 삼으려 한 데서 찾았다. 다소 길지만 주요 내용을 감상해 본다. 문승상(文丞相)의 사당을 참배하러 갔다. 사당은 시시(柴市)에 있으니, 곧 선생이 절의를 세운 곳이다. 동네 이름은 교충방(敎忠坊)이다. 원대에는 선비 복색으로 소상(塑像)을 만들었더니, 명 정통(正統) 13년(1448)에 순천부윤(順天府尹) 왕현(王賢)이 임금에게 여쭈어 송대 승상의 복장으로 고쳤고, 제사를 올리기는 영락 6년(1408)에 처음으로 하였으며, 매년 봄가을 중삭(仲朔)에 황제가 순천부윤을 보내어 제사를 차리는데, 술이 세 종류요, 과실이 다섯 종류, 비단이 한 필, 양이 한 마리, 돼지가 한 마리였다. 나는 두 번 절하고 물러나면서 ‘후유’ 하고 한숨을 쉬고는 탄식하여 말했다. “천고에 흥하고 망하는 판에는 하늘 뜻을 단연코 알 수 있는 것이다. 그것들이 요망스러운 재앙과 상서로운 경사로 나타날 때에는 이를 반드시 쫓기도 하고, 알뜰하게 힘써 붙들기도 하여 비록 부녀자와 어린아이라도 하늘의 뜻이 있다는 것을 뻔히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충신이나 의사들이란 한갓 단신으로 하늘에 버티다시피 하고 보니, 이 어찌 억지 놀음이 아니며 또 어려운 일이 아닐까 보냐. 천하를 얻을 수 있는 위엄과 무력이라도 한낱 지사의 절개를 꺾지는 못한다. 지사 한 사람이 버티는 절개는 백만 명의 군대보다도 강한 것이요, 만대를 통하는 떳떳한 도덕 규범은 일시에 한 나라를 차지하는 것보다도 더 소중할 것이니, 이 역시 천도(天道)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에 나라를 일으켜 융성하게 한 임금이 충분한 자신을 가지고 천자의 지위를 얻었다면, 이는 하늘이 명한 것이라 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힘으로 얻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 하늘이 이미 천자의 지위를 명하였고 자신의 힘을 들이지 않았다면, 역시 자신으로써 천하의 책임을 맡게 한 것이든가, 그렇지 않으면 천하로써 자신에게 이롭게 하려는 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늘이 이미 자신으로써 천하에 이익을 주고자 할진대, 천하에 이익을 주는 방법은 역시 어떤 원칙이 있을 것이니, 그것은 곧 자신이 하늘의 명령을 받들어 도탄 속에 빠진 백성들을 구해 낼 따름일 것이다. (중략) 무릇 자기 힘으로써 굴복시킬 수 없는 자는 모두 자기의 강적일 것이므로, 언제나 그들이 정의의 군대를 규합하고 옛날의 것을 회복할 것을 두려워하여 천하를 차지한 자는 차라리 그 사람을 죽여 후환을 없애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그 사람이란 역시 자신이 한 번 죽음으로써 천하에 대의를 밝히고자 하고 있는 것인즉, 여기서 ‘그 사람’이란 천하의 부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니, 천하의 부형을 죽이고서 어찌 그 자제들의 원수가 됨을 면할 수 있으랴. 어허, 천하의 흥망이란 운수가 없지 않지마는 전 왕조의 유민으로 문승상 같은 분이 배출되지 않았음은 아니리라. 그러면 당시 하늘의 명령을 받았다는 임금으로서 이 같은 그 사람을 어떻게 대처해야 될 것인가를 묻는다면, 나는 그를 백성으로 대하되 신하로 삼지 말고, 존경은 하되 직위는 주지 말며, 봉작도 조회도 하지 않는 반열에 둘 뿐이라고 일러 주리라. 그러면 원 세조(元世祖) 홀필렬(忽必烈)로서 할 일은 친히 문승상의 사관을 찾아들어 손수 그가 쓴 칼을 벗기고 동으로 향하여 절을 하면서 오랑캐를 중화로 변화시키는 방도를 묻고 천하의 백성들과 함께 그를 스승으로 섬김이니, 이 역시 옛날 임금들의 아름다운 법도일 것이다.” 【그림 7-1】 문승상사문 안으로 들어가면 관복을 갖춘 문천상을 새긴 비석과 문천상의 소상을 모신 사당이 있다. 【그림 7-2】 문천상을 새긴 비석 ② 서쪽 지역: 역대제왕묘, 묘응사, 광제사 내성의 서쪽 지역은 지금의 북경시 서성구(西城區) 일대이다. 명의 장수 원숭환(袁崇煥)이 참형을 당한 장소로 알려진 서사패루(西四牌樓) 터에서 부성문 방향으로 가다 보면 광제사, 묘응사, 역대제왕묘가 100여 미터 간격으로 나란히 있어 한 번에 관광할 수 있다. 역대제왕묘는 1531년 완성된 이후 대명 사행 때부터 조선 사절단이 방문하기 시작해 그 변천사가 사행 기록에 고스란히 전한다. 1760년 동지 사행에 참여한 이의봉의 『북원록(北轅錄)』에는, 정사 홍계희(洪啓禧)가 역관 변헌(邊憲)을 보내어 역대제왕묘의 모습을 그려 오도록 하여 변헌이 《배향도(配享圖)》 인본(印本) 3장을 얻어 와서 세 사신에게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의봉은 그림을 통해 삼황오제부터 요, 금, 원, 명의 황제 165인의 나무 위패가 역대제왕묘에 모셔져 있고, 좌우로는 열조(列朝)의 명신 80인이 배열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1828년 동지 사행에 참여한 박사호(朴思浩)는 「역대제왕묘기(歷代帝王廟記)」에 주요 왕과 신하의 명단을 일일이 기록하면서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군(援軍)을 파견한 신종황제(神宗皇帝)가 모셔져 있지 않음을 한탄하며 청에 대한 반감을 숨기지 않았다. 역대제왕묘가 부성문(阜城門) 안에 있다. 그 바깥문 편액에 ‘제왕묘(帝王廟)’라 씌어 있고 그 안쪽 문을 경덕문(景德門)이라고 부르며, 정전(正殿)은 무릇 2층인데, 모두 누런 기와로 덮었다. 편액이 위층에 있는데, ‘경덕숭성지전(景德崇聖之殿)’이라 하였고, 전각 안에 일곱 감실을 만들었다. 첫째 감실은 한가운데에 있는데 복희(伏羲), 신농(神農), 헌원(軒轅) 세 황제의 위판을 모셨고, 왼쪽 둘째 감실에는 5제(五帝)를 모셨으며, 오른쪽 셋째 감실에는 하후씨(夏后氏) 이하 14세, 상(商) 탕왕(湯王) 이하 26세를 모시었고, 왼쪽 넷째 감실에는 주(周) 무왕(武王) 이하 32왕을 모시었으며, 오른쪽 다섯째 감실에는 한고조(漢高祖) 이하 10세, 광무제(光武帝) 이하 8세 및 소열제(昭烈帝) 유비, 진(晉)나라의 원제(元帝) 이하 7세, 송나라의 문제(文帝) 이하 3세 및 제(齊)나라의 무제(武帝)와 위(魏)나라의 무제 이하 8세, 진(陳)나라의 문제(文帝), 선제(宣帝)를 모시었고, 왼쪽 여섯째 감실에는 당나라의 고조(高祖) 이하 16세 및 후당(後唐)의 명종(明宗), 후주(後周)의 세종(世宗), 송나라의 태조 이하 14세, 요(遼)의 태조 이하 6세를 모시었으며, 오른쪽 일곱째 감실에는 금(金)나라의 태조 이하 6세, 원나라 태조 이하 11세, 명나라 태조 이하 13세를 모시었으며, 주나라의 유왕(幽王)과 여왕(厲王), 한(漢)나라의 평제(平帝)·환제(桓帝)·영제(靈帝), 진(晉)나라의 혜제(惠帝) 및 이 밖의 망국했거나 시해된 임금은 다 여기에 참여하지 못하였는데, 명나라의 신종 황제(神宗皇帝)도 같이 모시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청인(淸人)이 원한을 갚으려는 계략에 말미암은 것 같아서 매우 통탄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그림 8】 역대제왕묘삼황오제부터 청대까지 역대 왕들과 명신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지도상으로 역대제왕묘의 동쪽에 묘응사가 있다. 묘응사는 영안사와 함께 북경에서 백탑이 있는 두 곳의 사찰 중 하나로 북경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찰이다. 원나라 때 석가모니의 사리탑이 있던 터에 백탑을 만들고 1288년 만안사(萬安寺)를 세워 황실의 종교 활동과 백관의 의례 연습을 거행하고 몽한(蒙漢) 불경과 서적을 간행하는 장소로 삼았다. 1368년 불에 타 훼손된 만안사를 1457년 천순제가 중건하고 묘응사(妙應寺)로 개칭했다. 지금도 ‘백탑사’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백탑의 터를 친히 조사한 이가 원 세조 쿠빌라이 칸이라고 전하는데 그 사실을 박사호의 「묘응사기(妙應寺記)」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묘응사는 제왕묘 서북쪽에 있다. 벽돌로 삼원문(三圓門)을 만들고 편액에 ‘칙건묘응선림(勑建妙應禪林)’이라 하였고 본전에는 큰 금부처 3좌를 모시었는데, 손에는 오옥바리(烏玉椀)를 받들고 있다. 좌우에는 오백나한(五百羅漢)의 상이 있고 편액에 ‘의주심경(意珠心鏡)’이라 하였고, 후전(後殿)의 편액에는 ‘칠불보전(七佛寶殿)’이라 했다. 뜰에는 철층각(鐵層閣)이 있고 그 위에 향로를 받들었는데, 그것은 만력(萬曆) 연간에 주조한 것이다. 뒷문으로 층층다리를 올라가면 백탑이 층층다리 위에 있는데, 탑신이 높다란 것이 그 높이가 두서너 장(丈)이나 되고, 둘레가 대략 스무 장이 되며 모가 나는 것이 집의 모서리의 모가 나는 것 모양으로 쌓아 올려져 3층으로 되었는데, 한 층마다 탑신(塔神)을 안치하고 모두 쇠 띠를 둘렀다. 그 둥근 모양이 독을 엎어 놓은 것과 같은데, 꼭 70아름이 된다. 맨 위층은 아래층에 비하여 점점 끝이 빨았는데 조각한 청동으로 빙 둘러 늘어뜨린 것이 일산을 편 모양 같으며, 거기에 수없이 많은 풍경을 달아 놓아, 바람을 받으면 곧 쟁그랑쟁그랑 소리가 난다. 탑을 둘러싸고 여장(女墻)을 쌓아 난간처럼 만들고, 밝은 등 189좌를 만들어 담장의 언저리를 둘러싸고 있는데, 그것들은 다 쇠로 감실을 만들고 사면에 돌비늘(石鱗)을 붙였다. 건륭 계유년에 만들어 낸 것이며, 이곳에 불을 켜는 예는 옛날부터 이미 있었다고 한다. 대개 요동(遼東)의 백탑과 서로 백중하여, 그 높이는 비록 요동 것보다 못하나 웅장 화려함은 천하제일이라고 하여도 지나친 것이 아니다. 또 수십 그루의 꽃나무를 상층, 중층에 심어 놓았는데, 꽃 필 때가 되면 더한층 훌륭한 광경이 될 것이다. 예부터 일컫기를, “이 탑 속에 여래(如來)의 사리(舍利)를 안치하였는데, 원 세조(쿠빌라이 칸)가 탑을 열고 보았더니 맑은 물이 가득히 괴어 있어 사리가 물 가운데 떠 있었으며, 두 마리의 용이 또한 그 곁에 떠서 사리를 지키고 있었다” 한다. 탑문 밑의 벽을 파고 부처에게 공양하는 여러 가지 모습을 만들어 놓고 장명등(長明燈)을 달았는데, 켜 놓은 불은 꺼지는 일이 없다. 그 앞에 쇠솥이 있는데 솥 거죽에 약간의 글자를 새겼으니, 곧 가정(嘉靖) 연간에 주조한 것이다. 승려들이 거처하는 곳에도 또한 정묘한 기물들이 많고, 또 불상, 신감(神龕)도 각각 신묘하기 그지없으며, 승려들은 모두 라마인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원나라 승상 야율초재(耶律楚材)의 호는 만송노인(萬松老人)이며, 문장과 정승의 업적이 원나라 조정에서 으뜸이었는데, 이 탑을 세웠다’라고 한다. 【그림 9-1】 묘응사 대각보전(大覺寶殿) 【그림 9-2】 묘응사 대각보전 백탑 묘응사의 동쪽에는 또 광제사가 있다. 광제사는 일찍이 고려 문인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방문했을 만큼 조선에서도 역사가 깊은 관광 공간이었다. 이색은 광제사에서 승려들과 교제하고 연꽃을 감상하며 시를 읊었다. 특히 조선 후기 문인들은 광제사에 있던 철수(鐵樹)를 주목했다. 1822년 사은 사행에 참여한 권복인(權復人)은 철수를 구경하러 광제사에 갔다가 “광제사는 서사패루(西四牌樓) 길가에 있는데, 뜰과 건물이 황폐하고 적막하다. 서쪽 담 아래에 옛날부터 철수(鐵樹) 한 그루가 있었으나 작년에 비바람에 뽑혀 나갔다. 옆에 작은 비를 세워서 그 사적을 기록했다”라 하였고, 박사호의 「광제사기(廣濟寺記)」에는 “광제사 절문 편액에 이르기를 묘명원통(妙明圓通)이라 하였으며, 본전에는 큰 금부처를 안치하였고, 후전(後殿)의 편액에는 대장경각(大藏經閣)이라 하였다. 서쪽 협문(夾門) 밖에 한 나무가 있는데 이름을 철수(鐵樹)라 한다. 300년 동안 가지를 뻗었는데 아직도 싱싱하고 나긋나긋하여 늙고 큰 나무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니 또한 이상한 종류의 나무다”라고 하였으며, 김경선은 「광제사기(廣濟寺記)」에서 “광제사 서전(西殿) 서협문(西夾門) 밖에 한 그루 나무가 있어 이름을 철수라고 하는데 400년 묵은 고목이다. 높이는 한 길 남짓하고 가지와 잎이 무성하며 색깔과 결이 쇠와 같다. 매년 꽃이 피면 한 달이 넘어도 시들지 않는데, 근래에는 나무가 이미 말라 죽어 다시 꽃이 피지 않는다고 한다”라고 하여 공통적으로 철수라는 나무를 특기했다. 광제사는 금 대에 창건된 사찰로 원래 이름은 서류촌사(西劉村寺)이고 원대에 보은홍제사(報恩洪濟寺)로 개칭했다. 원 말기에 전쟁으로 소실되었다가 명 천순(天順) 연간에 승려 보혜상인(普慧上人)이 발원하여 절을 복구하고 1466년 성화제(成化帝)가 ‘홍자광제사(弘慈廣濟寺)’라는 이름을 내려 주었다. 청대에 순치제, 강희제, 건륭제가 광제사에 행차하여 시문을 남길 만큼 이름난 사찰이었으며, 절 옆의 만송노인탑(萬松老人塔)이 유명하다. 현재 광제사는 중국불교협회 사무처로 사용되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③ 서양 문물을 접하다: 천주당, 관상대, 아라사관 북경에서 조선 사절단은 중화 문물의 유산을 세밀하게 관광하는 한편으로 서양의 새로운 문물과 접촉할 수 있었다. 대청 사행에서 관광한 천주당, 관상감, 아라사관이 바로 서양 문물을 접한 대표적인 장소이다. 북경에는 동당(東堂), 서당(西堂), 남당(南堂), 북당(北堂) 네 곳의 천주당이 있었다. 동당은 1655년 예수회 선교사가 세운 교당으로 남당과 함께 조선 사절단이 자주 찾았던 천주당이다. 현재 북경시 동성구 왕부정대가(王府井大街)에 있다. 서당은 1723년 북경시 서성구 서직문 안에 예수회 선교사가 세운 교당으로 조선 사절단이 방문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남당은 1605년 마테오 리치(이마두(利瑪竇))가 북경시 선무구 선무문 안에 세우고 1650년 독일 선교사 아담 샬(Adam Schall, 탕약망(湯若望))이 중건한 교당으로, 조선 사절단의 숙소인 옥하관과 가까운 거리에 있어 조선 지식인들이 가장 많이 방문한 천주당이다. 북당은 1703년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가 세운 교당으로 현재 북경시 서성구 서십고대가(西什庫大街)에 있다. 북당은 1783년 동지사 서장관으로 임명된 아버지 이동욱(李東郁)을 수행하여 북경에 간 이승훈(李承薰)이 조선 최초로 천주교 세례를 받은 역사적인 장소이다. 【그림 10】 왕부정(王府井) 거리에 있는 천주교 동당(동천주당) 조선에서 천주당을 가장 빈번하게 드나든 인물은 이기지로 파악된다. 이기지는 1722년 숙종의 승하를 알리는 고부사 정사로 임명된 아버지 이이명(李頤命)의 자제군관으로 중국에 갔는데, 2개월가량을 북경에 머무르며 동당, 남당, 북당 세 천주당을 총 8차례 방문했다. 지금까지 확인한바 이기지는 남당을 둘러본 유일한 인물이다. 이기지는 남당에서 포르투갈 선교사 소림(蘇霖, Joseph Suarez)과 맥대성(麥大成, Jean-Francois Cardoso), 벨기에 선교사 장안다(張安多, Antoin de Magalhaens), 독일 출신 선교사 대진현(戴進賢, Ignatius Kogler)를 만났으며, 동당에서 오스트리아 선교사 비은(費隱, Xavier Ehrenbert Fridelli) 등과, 북당에서 프랑스 선교사 백진(白晋, Joachium Bouvet), 은홍서(殷弘緖, Francois Xavier d’Entrecolles) 등과 만나 필담을 나누었다. 또 만나기를 희망하며 북경 현지에서 서신을 주고받던 프랑스 선교사 두덕미(杜德美)의 부고를 급작스레 접하고는 조문하는 글을 지어 보내기도 했다. 이기지는 서양 선교사들과 인연을 “하늘이 베푼 인연(天緣)”으로 여기며 그들과 동서양 역법의 차이, 천체 관측 기구 제작법, 일식과 월식의 원리, 천체의 운행 등에 관해 토론했다. 아울러 서양서와 서양화, 천문 관련 서적, 지구도, 혼천의, 자명종 등을 선물로 증정받고 와인과 카스테라를 맛보기도 했다. 이기지의 천주당 체험은 이후 홍대용과 박지원 등의 북경 관광에도 영향을 주었다. 특히 젊은 시절부터 수학과 천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홍대용은 북경에서 남당과 동당을 4차례 방문해 당시 흠천감 정(欽天監正) 유송령 및 독일 선교사로 흠천감 부정(副正)을 맡은 포우관과 교제했다. 홍대용의 전언에 따르면 강희 연간 이후로 조선 사신이 천주당에 가서 구경하기를 청하면 서양 사람들이 기꺼이 맞아들여 서양의 기구들을 보여 주고 진기한 물품을 선물로 주었는데, 조선 사람들이 점차 예의를 갖추지 않고 천주당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기물을 더럽히자 조선 사신의 관람을 거절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홍대용은 조선의 관상감(觀象監)에서 파견한 이덕성(李德成)이라는 일관(日官)을 데리고 가 여러 차례 만남을 요청한 끝에 유송령과 포우관을 만날 수 있었다. 홍대용은 자신의 고향 집에 농수각(籠水閣)이란 천체 관측소를 짓고 혼천의를 제작한바, 유송령과 포우관을 통해 혼천의, 자명종, 파이프오르간, 서양화 등을 구경하고 천체망원경으로 태양의 모습을 관찰하는 경험을 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홍대용은 관상대 진입을 시도한 끝에 마침내 성공하여, 청대에 제작한 천체의(天體儀)·적도의(赤道儀)·황도의(黃道儀)·지평경의(地平經儀)·지평위의(地平緯儀)·기한의(紀限儀) 등을 목도했다. 관상대는 1443년 관성대(觀星臺)라는 이름으로 설치되었다가 닥 청대에 그 이름을 관상대로 고쳤다. 현재 북경시 동성구 건국문(建國門) 역 인근에 ‘고관상대(古觀象臺)’란 명칭으로 보존되어 있다. 아래 홍대용의 기록은 당시 북경에서 관상대를 관광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잘 보여 준다. 관상대는 성 동남 모퉁이에 있다. 흠천감(欽天監)의 관할 아래 있으며, 의기(儀器)들로 천체를 관찰하는 곳이다. 관상대는 유송령(劉松齡)이 일찍이 말하기를, “황상의 금지구역으로 사람이 가까이 할 수 없다”라 했고, 역관들 역시, “연전에 우리나라 사람이 감관(監官)에게 뇌물을 주고 올라가 구경을 하고 왔는데, 그 뒤 일이 발각이 나서 파면을 당한 일이 있어 그 뒤로 사람을 금하는 것이 더욱 엄해졌다”라 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성에 오르면 사형에 처한다는 법률이 있다”라 하였는데, 관상대는 성을 의지하고 있어 자금성을 엿볼 수가 있고 또 위에 있는 의기들이 대부분 임금이 만든 것으로 국가의 귀중한 그릇들이므로 사람을 함부로 들여보내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3월 귀국할 때 길을 돌아 대 밑으로 갔다. 아침 해가 막 떠오르는데 멀리 10여 개의 의기가 돌난간 안으로 주욱 벌여 있는 걸 바라보니 이상한 모양과 제도들이 기이한 빛들을 반사하고 있었다. 곧장 훌쩍 날아오르고 싶었지만 도리가 없다. 대 위에서 한 사람이 난간을 의지하고 굽어보기에 나는 말을 세워 쳐다보며 이야기를 걸고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한 다음 한번 보여 달라고 했다. 그는 고개를 저었고, 손바닥을 펴서 목을 그어 보이며, “올라올 수 없다. 죄가 사형이다”라 했다. 대 아래 공청이 있었는데 문이며 담이 몹시 깊고 높다. 흠천감의 분사(分司)인 듯싶다. 나는 말에서 내려 문지기를 보고 읍을 하며 들어가기를 청했다. 그의 말이, “사(司)는 금지구역이라 들어올 수 없지만, 다만 지금은 이른 아침이라 상관이 오지 않았으니 잠시 들어오되 오래는 있을 수 없다”라 했다. 나는 고맙다고 인사하고 들어갔다. 청사 서쪽으로 두어 자 높이 평대(平臺)가 있었는데 사방이 각각 수십 보쯤 되어 보였다. 동쪽으로 혼천의(渾天儀)와 혼상(渾象)이 있고, 서쪽으로 간의(簡儀)가 있었는데 모두 청동으로 만들었다. 하나의 크기가 대여섯 뼘쯤 되고 둘레로 돌난간을 세워 두었다. 간의의 제작은 매우 복잡해서 창졸간에 제대로 다 살펴볼 수가 없었고, 혼천의만은 송대 제도로서 『서경집전(書經集傳)』에 실려 있는 그대로였다. 명 정통 연간에 만든 것으로 비록 버려두고 쓰지는 않지만, 쌍고리와 수평·수직·직선 거리 등 여러 가지 방법만은 대조해 볼 수 있었다. 북쪽에 구리궤(銅櫃)가 있는데 기계 돌리는 물을 담아 두는 것인 듯싶지만, 산실(散失)되어 잘 알 수가 없었다. 대 위에 있는 모든 기계는 다 강희 이후에 만든 것들로 육의(六儀)가 있었는데, 천체의(天體儀)·적도의(赤道儀)·황도의(黃道儀)·지평경의(地平經儀)·지평위의(地平緯儀)·기한의(紀限儀) 등이었다. 모두 서양법이 동쪽으로 건너온 뒤에 생긴 것으로, 곽수경(郭守敬)의 옛 제도에 비해 훨씬 정밀하게 되어 있다. 최근 육의의 번거로움을 피해 새로 하나로서 여섯 가지를 겸해 쓸 수 있도록 만들었는데, 기계가 너무 복잡해서 역시 육의를 각각 쓰는 것만큼 간편하질 못하다고 한다. 문지기가 빨리 나가라고 하는 통에 정신없이 나와 버렸다. 【그림 11-1】 밖에서 올려다본 관상대의 모습 【그림 11-2】 관상대의 천체 관측 기구들 천주당에서 조선 지식인들이 서양의 과학 기술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세계 지리에 대한 인식을 확장해갔다. 한편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로 조선 사절단이 북경에서 천주당을 방문하는 일은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대신에 조선 지식인들은 아라사관에서 러시아인과 접촉해 서양 문물 체험을 이어갔다. 아라사관은 러시아정교회 소속 선교사와 유학생, 외교관 등이 머물던 숙소이다. 청과 러시아는 책봉 체제에 놓인 관계는 아니었으나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고 국경을 확정지은 후 러시아가 청에 정기적으로 사절단과 상인을 파견했으며, 1727년 캬흐타 조약을 체결하면서는 러시아정교회 선교사와 학생을 북경에 상주시키고 대략 10년에 한 번씩 인원을 교체했다. 아라사관은 동강미항(東江米巷) 중간의 옥하교(玉河橋) 서쪽에 있다. 옛날에 조선관이었는데, 지금은 아라사(러시아) 사람들이 거처하는 곳이 되었다. (중략) 비록 중국의 정삭(正朔)을 받들지 않으며 공물도 바치지 않지만, 중국의 문자를 익혀서 몇 년의 기한을 두고 교대로 자제들을 중국에 보낸다. 관소를 설치하여 거처하고 스승을 두어 가르치며 그들에게 식량을 제공한다. 현재 관소에 거주하는 자는 6-7명으로, 거처하는 건물은 서양의 그것처럼 화려하고 사치하다. 또한 하나의 신을 모신 당(堂)이 있는데 세 개의 문은 매우 커다랗고, 건물 안은 매우 높으면서도 깊숙하다. 위층은 둥그런 문을 밖으로 냈는데, 모두 유리를 대고 그물로 묶었다. 벽은 벽돌을 쌓아 저절로 돌무늬가 만들어졌으니, 천주(天主)를 받드는 곳과 비슷하다. 상자 하나에는 모자와 옷을 담아 놓았는데, 복식 제도는 가사(袈裟)와 비슷하고 관(冠)의 제도는 당모(唐帽)와 비슷한데 모두 금실로 수를 놓아 만들었으니, 아라사의 제도가 본래 그렇다. 19세기 조선 지식인들은 아라사관을 방문하여 천주상과 벽화를 관찰하기도 하고 러시아 정교단의 일원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1826년 동지 사행에 참여한 홍석모(洪錫謨)는 아라사관에서 제10대 러시아정교회 전도단장 파벨 이바노비치 카멘스키(Pavel Kamensky)와 필담을 나누었는데, 우랄, 볼가강, 도나우강 등 러시아의 주요 산과 강의 정보와 더불어 당시 로마노프 왕조 제14대 황제 니콜라이 1세가 제위에 오른 지 2년이 된 사실까지 언급했다. 조선 지식인들에게 야만스러운 오랑캐라는 부정적인 인식이 대부분이었으나 홍경모는 러시아인의 인심이 온화하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아라사관 관광이 러시아에 대한 인식에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몇몇 조선 지식인들은 러시아 선교사와 시문을 주고받으며 우정을 나누기도 했다. 비교적 잘 알려진 사례가 1815년 동지 사행에 참여한 조인영(趙寅永)과 제9차 러시아정교회 전도단장 니키타 야코프레비치 비추린(Nikita Yakovlevich Bichurin, 비구림(比丘林))의 교유이다. 조인영은 동지 부사 조종영(趙鐘永)의 자제군관으로 북경에 갔는데, 러시아 동방학연구소에 보관된 문건에 조인영이 비추린에게 준 시가 적혀 있다고 한다. 조인영의 문집인 『운석유고(雲石遺稿)』에 수록되지 않은 그 시에서 조인영은 비추린과의 교감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드러내며 작별하게 된 아쉬움을 토로했다. 조인영은 1839년 기유박해를 주도하고 「척사윤음(斥邪綸音)」을 지어 천주교를 배척한 이력을 지닌 인물이지만, 이전 시기에 러시아인과 적극적으로 교제한 사실을 통해 서양 ‘문물’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를 볼 수 있다. 비추린은 1807년부터 1821년까지 북경에 머물렀는데, 러시아로 돌아가기 직전 도광제(道光帝)의 등극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된 조선의 진하사절단과 만났다. 다음은 정사 이조원(李肇源)이 북경에서 사귄 벗들을 회상하면서 지은 시편들 가운데 실린 〈화아경(和雅敬)〉이란 제목의 시이다. 奇遇鄂羅人 / 기이한 인연으로 러시아인을 만나 重譯有聽瑩 / 거듭 통역해도 알아듣기 어려웠네. 其意頗慇懃 / 그 마음이 매우 은근하여 寶刀奪相贈 / 보배로운 검을 벗어 주었네. 첫 구의 ‘러시아인(鄂羅人)’이라는 말에서 ‘화아경’이 러시아 사람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화아경은 바로 비추린의 그리스식 수사명 히아신스(Hyacinth)를 한역(漢譯)한 표현으로 추정된다. 양측은 역관과 러시아 유학생을 통해 중국어로 대화를 나누며 언어의 장벽을 초월하여 의기투합했고 이조원에게 러시아산 장검 한 자루를 선물로 증정하기도 했다. 이조원과 비추린이 교제한 경위와 그 상세한 정황은 당시 전도단의 교체업무를 관장하기 위해 북경에 체류 중이던 러시아 외교부 감호관 예고르 페도로비치 팀콥스키(Egor Fedorovich Timkovskiĭ)라는 인물의 기행문을 통해 소상히 파악할 수 있어 더욱 흥미롭다.
  • 산의 인문학, 지리산을 유람하다
    • 기록자료
    • 문화
    錄)」에서 ‘당시 사당이 모두 훼손되어 선현들이 했던 것처럼 날씨가 개기를 빌어 볼 데가 없다’고 안타까워하였다. 1937년 8월 천왕봉에 오른 김학수(金學洙, 1891-1974)는 「유방장산기행(遊方丈山記行)」에서 성모사를 산령사(山靈祠)로 표기하였고, 1940년 4월 이병호(李炳浩, 1870-1943)의 「유천왕봉연방축(遊天王峰聯芳軸)」에도 성모가 보인다. 이병호는 성모사에 성모상이 있지만 석상의 양쪽 귀가 떨어지고 코·눈이 모두 함몰되어 있다고 하였다. 적어도 이 시기까지는 성모사와 성모상이 천왕봉에 있었으나, 제 모습을 온전히 갖추지 못한 채 천왕봉 언저리에 방치되어 있었던 듯하다. 그렇게 백성들에게 넘쳐 나는 사랑을 받던 성모도 20세기 서구 문명이 들어오면서 외면받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군이 성모사를 부수고 성모상을 절벽 아래로 굴려 버렸는데, 다행히 산청에 살던 한 처녀가 발견하여 다시 천왕봉에 안치했다고 한다. 몇 차례의 수난을 더 겪었지만, 해방 이후까지도 여전히 제자리를 지켰다. 필자는 몇 년 전 지리산 권역 진주에서 지리산 관련 대중 강좌를 진행하였다. 지금까지 소개한 조선시대 선현의 지리산 유람 내용을 지역민과 소통하고 또 지리산을 홍보하는 자리였다. 강의를 끝내고 질의응답 시간이 되자, 한 청중이 손을 들었다. 자신은 젊어서 지리산 마니아였던지라 주말마다 천왕봉에 올랐는데, 1972년 여름까지 천왕봉 주변에 있었다고 증언하였다. 그는 내 강의 자료의 천왕봉 주변 사진에서 성모사 터를 정확히 짚어 주었다. 그 이후 자료를 찾아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1972년 모 종교단체의 교인들이 훼손하여 내다 버린 이후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후 이 성모상은 행방이 묘연했는데, 1987년 진주의 어느 한 시골 논밭에서 두 개로 쪼개진 상태로 발견되었다. 이를 다시 봉합하여 현 산청군 중산리의 천왕사(天王寺)에 안치하였다. 지리산 천왕봉에 있어야 할 성모가 문명에 의해 밀리고 밀려서 결국 땅으로 내려온 것이다. 천왕사에 안치된 성모는 옥석(玉石)으로 만든 성모 좌상인데, 높이 74㎝, 얼굴 높이 37㎝, 얼굴 너비 29㎝, 앉은 자리에서 목까지의 높이 38㎝, 어깨너비 46㎝, 몸 너비 43㎝의 크기이다. 성모상은 틀어 올린 머리를 하고 있으며, 얼굴은 통통하다. 상반신은 저고리를 입고 있는 듯하며, 가슴께로 손을 모아 마주 잡고 있는데 석상 전체가 청색을 띠고 있다. 천왕사에서는 그간 이 성모상을 노출하는 것에 매우 인색하였고, 그래서 이런저런 마찰이 야기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발길이 뜸하게 되었다. 결국 지금은 자유로이 성모를 만날 수 있게 되었지만 이미 떠난 관심을 다시 끌기는 쉽지 않을 듯싶다. 현재 지리산 중산리에는 성모상이 두 개이다. 천왕사 성모가 그 하나이고, 2000년에 지리산 권역 산청군 시천면(矢川面) 사람들이 조성한 성모상이 다른 하나이다. 둘은 천왕봉이 훤히 올려다보이는 중산리 계곡을 가운데에 두고 양쪽으로 배치되어 있다. 두 석상 모두 ‘지리산 성모’라 부른다. 천왕사 성모는 무속(巫俗)의 신도들이 제사를 올리고, 새로 조성된 성모는 시천 면민이 중심이 되어 제례를 지낸다. 성모가 새로이 조성된 지 벌써 20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많은 이의 기도와 염원이 쌓였고, 다른 이의 기도를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누구든 언제든지 기도를 올릴 수 있다. 이러한 질서와 예의는 이미 정착된 듯하다. 무엇보다 기도의 효험이 좋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늘 많은 사람으로 성황을 이루고 있다. 천왕봉에 있어야 할 성모가 땅으로 내려와서 더욱 바빠진 형국이다. 새로운 문화가 역사를 이루어 가는 중이다. 【그림 32】 중산리 계곡 【그림 33】 중산리 성모상 【그림 34】 중산리 성모상, 2000년 제작
  • 조선 후기 통신사, 일본을 오감하다
    • 기록자료
    • 문화
    와 가문이 여기를 사당 터로 정한 것은 진실로 까닭이 있도다. ―남용익, 『부상록』 닛코산 유람, 억지유람이었을까? 1636년 통신사들에게는 전에 없던 유람 일정이 주어졌다. 천하절경의 명산인 닛코 산을 유람하는 것이라 하였지만, 실제로는 얼마 전에 완성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당으로의 방문을 유도한 것이었다. 통신사들은 하나같이 조선 국왕의 명이 없으면 유람을 할 수 없다고 하였지만, 이 일이 성사되지 않을 경우 막대한 부담을 지게 된다는 쓰시마섬 측의 간곡한 부탁에 닛코 유람을 거절하지 못하였다. 추운 날씨 탓이었는지, 조선으로 귀국한 후 국왕의 추궁이 염려되었던 탓이었는지, 1636년 사행원들의 기록에는 하나같이 닛코 유람에 대한 악평으로 가득했다. 이 산은 대체로 우리나라의 가야산과 모양은 방불하나 천석(泉石)은 별로 보잘것없었다. 국내에서 제1 산이라는 명산이 이와 같으니 그 외의 것도 짐작할 만하다. 일본 풍속(倭俗)에서 부처를 숭상함은 고금이 같다. 관백은 일국의 군장으로서 그의 조부를 절 뒤에 있는 황산(荒山) 가운데 모시고도 조금이나마 부끄럽게 여기기는커녕, 도리어 이웃 나라의 세 사신에게 자랑하려 하니, 그의 어리석고 무식함은 나무랄 수조차 없는 것이 있었다. ―임광, 『병자일본일기』 대개 이 산은 우리나라의 가야산 모양과 비슷하나 별로 천석의 경치가 없었다. 나라 안에서 첫째가는 명산이 이러하니, 그 밖의 것은 알 만하다. 일본인의 습속은 불교를 숭상하고 믿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같은데, 관백이 재력을 다하여 사치를 극도로 하면서도 곧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유람을 청하기까지 하면서 도리어 뽐내고자 하니, 어찌 그릇된 것이 아니랴! ―김세렴, 『해사록』 대개 이 산은 우리나라 가야산의 형세와 비슷하되, 천석에 별로 볼 만한 곳이 없다. 나라 안에서 첫째가는 명산이라는 게 이와 같으니 그 나머지는 알 만하다. 일본인의 풍속이 불교를 신앙함은 예나 이제나 같아서, 관백이 재력을 다하여 사치를 다하고, 또 절 뒤에다 그 할아버지를 모시되 일찍이 그것이 괴이한 짓인 줄 알지 못하고, 이웃 나라의 사신에게 유람을 청하게까지 하여 도리어 자랑하고자 하니, 그 어리석어 무식함은 족히 나무랄 것도 없다. ―황호, 『동사록』 그런데 이들의 악평을 살펴보면, 거의 복사한 듯한 똑같은 표현으로 이루어져 있어 조금 의심스러운 생각이 든다. 이렇게 악평을 한 이유가 다른 데 있었던 것일까? 이후 사행에 참여한 통신사들은 그다지 나쁜 평을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일광산(日光山)에 이르렀다. 지세가 그다지 높지도 않고, 들어서는 입구(洞口)는 깊고 넓은데, 오래된 잣나무와 늙은 삼나무의 푸른빛이 하늘에 연했다. 나무판자로 만든 다리가 구렁에 걸려 있고 아래로는 폭포가 흐르는데, 이것이 소위 산관교(山菅橋)였다. ―저자 미상, 『계미동사일기』, 1643년 대개 산의 형세를 논하면 웅장하고 높기는 후지산보다 못하나 동문의 회포한 것과 봉만의 빼어난 것은 절승이다. 도쿠가와 가문이 여기를 사당 터로 정한 것은 진실로 까닭이 있도다. ―남용익, 『부상록』, 1655년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닛코 유람은 청과의 관계가 좋지 않던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요청된 것이라 1636년 통신사행은 이런 정세를 감안하여 사행록을 작성했을 것이다. 도쿠가와 사당인 도쇼구에 들른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고, ‘천하명산인 닛코산 유람’이라는 명목을 두었기에 그 화풀이를 ‘천하명산’을 깎아내리는 데 사용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조선 후기 통신사, 일본을 오감하다
    • 기록자료
    • 문화
    히데요시를 위한 사당이 아니라는 일본인의 말에 속아 연향에 참석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거짓이 밝혀지면서 다이부쓰지에서의 연향은 명맥이 끊어지게 되었다. 사행길에서 늘 좋은 것들만 경험할 수는 없는 일. 안타깝게도 이처럼 통신사에게 굴욕과 원통함을 안겨 주는 장소들도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 조선의 양반, 가정을 경영하다 -18세기 대구 최흥원의 가사활동을 중심으로-
    • 기록자료
    • 경제
    떠나기 전에 먼저 사당에 가서 아뢰었다. 보러 온 사람은 종인(宗人) 성산 아재, 외숙 조(趙), 김용여 군, 류상일 군, 그리고 주문성이었다. 남보석(南補石)은 관례를 치르고 왔으니 더욱 사랑스러웠다. 부노 무리들도 모두 와서 인사했다. 10일에 흐리고 구름이 남서쪽에서 북동쪽으로 몰려가더니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둘째 아우가 거느리고 나선 혼례 행차가 군색할까 봐 마음이 쓰였다. 13일에는 비가 오지 않아서 최흥원은 다행으로 여겼다. 아들이 혼례를 치르러 간 사이 최흥원은 신부에게 줄 농에 황색 칠을 해 두었는데 마르지 않아서 버릴 처지가 되었다. 너무 아까워 농을 고쳐 꾸미려고 아당을 대구부 시장에 보내 황색 칠 몇 홉을 구하여 오도록 했다. 21일 하회에서 온 심부름꾼이 돌아가는 길에 막남을 보내어 이바지 음식에 답례했다. 겨우 모양만 갖춘 것에 대해 슬픔과 부끄러움을 느꼈다. 23일 하회에서 보내온 음식을 혼자 먹기가 마음에 걸려 지묘의 여러 일족을 불러 한나절 즐기려고 했으나 대부분 일이 있었다. 오직 입암 일족 할아버지, 영천 일족 할아버지, 슬곡 일족 어른 등 세 사람만 왔다. 술자리를 가지다가 날이 저물어서 자리를 파하였다. 이제 혼례는 무사히 마쳤고, 주변에 인사도 끝냈다. 혼수 장만에 든 외상값만 갚으면 되었다. 12월 26일에는 비단 장수에게 외상으로 구입했던 혼수 값 48냥 6전을 갚았다. 옻골 최씨는 1750년에도 풍산 류씨와 혼사가 있었고, 1751년에도 풍산 류씨가 옻골 최씨와 혼인할 의사를 내비쳤다. 이는 18세기 옻골 최씨가 영남 최고의 가격(家格)을 유지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 조선시대 재상 이원익의 관직 활동
    • 기록자료
    • 정치
    익선생 영정-평양생사당구장영정 이원익은 1595년(선조 28) 6월에 우의정에 임명되어 한양에 돌아간다. 평양성 탈환 이후 한양 복귀까지 2년 남짓한 기간 동안 이원익의 행적에 대해서는 기록이 자세하지 않다. 그런데 이 기간 이원익의 활동을 간접적으로나마 짐작할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이원익이 떠난 후, 평양 백성들은 이원익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는데, 최립(崔岦, 1539-1612)이 쓴 「생사영향사(生祠迎享詞)」가 남아 있다. 최립은 17세에 진사가 되고, 21세에 문과에서 장원을 차지하여 일찍부터 유명했던 인물이다. 당대 최고 문장가로 인정받으며 중국과의 외교문서 작성에 공이 많았다. 제문이 길어서 이원익의 행정적 조치와 관련된 내용만 추리면 아래와 같다. 蓋在壬辰 / 대개 보건대 지난 임진년에 邦家播蕩 / 국가가 요동치며 피난길을 떠나게 된 나머지 上保岐坰 / 주상께서 서쪽 땅에 머무르게 되셨습니다. 公由八座 / 공께서는 판서의 신분으로 命攬巡鞅 / 순찰사 임무를 부여받으시고 則尹我京 / 우리 서경(西京)의 어른으로 부임하셨습니다. 安州之政 / 한 지방을 편안하게 다스리는 정사로 말하면 朝藉宿望 / 조정에서도 예전부터 중망(重望)을 받으셨던 터라 輿聽亦傾 / 천인들까지도 경청하며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及公下手 / 급기야 공께서 손을 대기 시작하자 雖屬草創 / 모든 것이 어설프고 어수선한 때였으나 綽然有成 / 여유작작하게 성취되었습니다. 八路學壞 / 팔도의 교육 기관이 모두 파괴되어 斯文幾喪 / 사문이 거의 망할 지경에 이르자 公首治黌 / 공께서 제일 먼저 학교를 세우기 시작하였습니다. 中外師散 / 서울이고 지방이고 군대가 뿔뿔이 흩어졌을 때 一旅誰倡 / 근왕병을 일으키자고 누가 수창(首唱, 처음으로 외침)했습니까. 公勤練兵 / 정예 군사를 부지런히 양성했던 것은 바로 공이었습니다. 亂離饑疫 / 난리 통에 기아와 병으로 신음할 때 省撫墟莽 / 공께서 황야의 백성들을 어루만져 위로하며 起死以耕 / 기사회생시켜 농사짓게 했습니다. 大援西來 / 구원병이 대거 서쪽에서 건너올 때 孚驩軍將 / 공께서 중국 장수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면서 以無擾驚 / 소요를 일으키는 일이 없게 하였습니다. 自奉貶削 / 자신의 생활은 또 얼마나 검약하였던가요. 性而非強 / 이는 천성이요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서 吏化於淸 / 관리들도 모두가 맑게 변화되었습니다. … 其存體統 / 체통을 일정하게 지키고 유지하면서도 河海爲量 / 강과 바다처럼 도량이 넓으시어 怨用不生 / 원망하는 말 한마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其辦公幹 / 공무를 처리하는 면에 있어서도 游未趨償 / 한가로이 노니는 듯 상(償)은 안중에도 없었으나 人見鬼營 / 사람들은 귀신 같은 경영 솜씨를 보았습니다. … 狄徵自寧 / 영주(寧州)에서 부름받은 적인걸(狄仁傑)이나 宋愛遺廣 / 광주(廣州) 땅에 사랑 남긴 송경(宋璟)쯤은 되어야 差與重輕 / 공과 조금 견줄 수 있다고 할 것입니다. 최립, 『간이집(簡易集)』 제1권, 「제문(祭文)」 전쟁 중에 이원익은 학교를 다시 세우고, 병사를 모아서 정예군으로 양성했다. 백성들을 보살펴 다시 농사짓게 했고, 중국 장수들이 소요를 일으키지 못하게 했다. 스스로 근검절약하여 관리들까지 청렴하게 변화시켰다. 무너졌던 일상을 회복시키면서 전쟁을 할 수 있는 힘을 길렀던 것이다. 이런 일들은 이 시기에 반드시 해야 하지만 대단히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총 43 건
/
3
다음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