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당 에 대한 총서 검색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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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양반, 가정을 경영하다 -18세기 대구 최흥원의 가사활동을 중심으로-
- 기록자료
- 경제
원 풍속도첩》, 〈서당〉, 국립중앙박물관 1744년 1월 15일 밤에 치른 시험에서도 자제들이 통과하지 못하자, 최흥원은 종아리를 각각 열 대씩 때렸다. 막내아우가 화가 나서 조카들에게 욕된 말들을 함부로 하자, 최흥원은 몹시 통탄했다. 3월 15일, 용채와 용휘 등이 비로소 시험에 통과했다. 최흥원은 이들에게 사랑스러움이 느껴져 처음으로 매를 대지 않았다. 3월 21일에는 용채에게 주자의 설을 보도록 했는데, ‘사등기질(四等氣質)’이라고 한 곳은 배우는 자에게 유익한 바가 있다고 여겨져서 병을 무릅쓰고 써서 벽면에 걸어 두었다. 11월 1일 수업에서도 모두 시험에 통과하지 못했다. 15일 수업에는 개몽이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여 종아리를 맞겠다고 자청했다. 사랑스러운 마음이 넘쳐 살살 때렸다. 1748년 10월 11일 밤에 둘째 아우가 용채를 위하여 공부를 권장하는 가운데 잘못 말하는 것이 있어 최흥원은 둘째 아우에게 가서 말을 멈추도록 했다. 둘째 아우는 자식들의 공부에 감정적으로 대응하고 성질을 못 이겨 아들에게 함부로 매질했지만, 최흥원은 조카들을 가르칠 때 좀 더 이성적이고 너그러웠다. -
조선 최후의 공인, 지규식의 일기- 기록자료
- 경제
봐주고 있었던 ‘서당 이 선생’도 1892년 9월에 150냥을 공방에 들였는데, 그중 86냥이 월수전이었다. 즉 월수계는 개개인이 가입하여 운영되는 계였지만, 그렇게 모이는 자금은 어떻게든 공방의 운영 자금과도 연관을 맺고 있었다. 월수계는 다른 지역으로까지 확장되어 운영되었던 듯하다. 지규식의 일기에는 팔곡의 변 첨지와 관련된 ‘팔곡 월수계’도 언급이 되며 매달 3.9냥의 곗돈을 내는 모습도 보인다. 이 팔곡의 월수계가 지규식이 주관하던 월수계와 어떠한 관련을 맺고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월수계는 이천에서도 운영되고 있었다. 1890년 10월 지규식은 박 참봉에게 5천 냥을 2푼 5리의 선이자로 빌린 후 친구 이천유에게 주고 이천에서 빚을 놓게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1년도 안 되어 이천유가 죽자 1891년 10월부터는 지규식이 그 5천 냥을 책임지게 되었고, 이천에 가서 월수 장부를 살피게 된다. 한편, 분원 동료들이 함께 가입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되는 포목계도 있었다. 기존 연구에서는 포목계가 이천에 속한 계로 보았는데, 이는 1891년 1월 6일의 일기 내용을 오인한 것으로 보인다. “이천유가 이천에 갔다”라는 문장과 “(지규식이) 포목계 계방에 참석”하였다는 문장은 별개의 문장으로 봐야 하는데 이천과 포목계가 이어지는 것으로 오해한 것이다. 이 밖에 포목계가 등장하는 일기 기록들에는 모두 포목계가 분원 인근에 있었던 정황을 보여 준다. 지규식은 포목계 모임에 자주 참석하였고, 1899년에는 ‘분원 안(院中)의 포목계 도가 건물을 700냥에 방매하고 이사를 한다는 기록도 보이며, 20세기 초 분원마을에 학교를 설립할 때는 포목계 도가 건물을 기부받는 모습도 보이기 때문이다. 포목계는 포목전으로도 불리는 것을 볼 때, 분원마을에서 포목을 파는 점포에서 연원한 것으로 보인다. 또 이 포목계에는 분원 공인들이 여럿 연관되어 있었던 듯하다. 1891년과 1892년에 포목계의 임원으로 선출된 인물들은 지규식과 분원의 임무를 함께 하는 동료들이었다. 또 이때의 계원 전체 회의에서 돈 10냥씩을 마련하여 공방에 바치는 것을 연례적으로 시행하기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한편, 1892년 1월의 포목계 회의에는 분원의 변방 장인들이 앞으로 포목 구문(口文)을 자신들이 주관하겠다고 통보하였고, 이에 대해 지규식은 오히려 반대의 입장을 표명하는 모습이 확인된다. 하지만 결국 포목계에서 분원 변방에게 일정한 액수를 정례적으로 보내기로 합의가 된다. 이를 볼 때, 자세한 관계까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포목계는 분원과 가까이 위치하며 상호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지규식은 포목전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포목전에서 고사(告祀)를 지낼 때 지규식을 초청하였다는 기록, 포목계에서 베푼 잔치에 참석한 기록, 1894년 2월, 포목전의 현판을 쓰고 잔치를 베푼 일 등이 그의 일기에 종종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귀천의 사계와 석촌의 금석계는 해당 지역의 양반들과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결성된 계였다. 그런데 이러한 계들도 모여서 먹고 마시고 즐기기 위해서 곗돈을 거두고 있었으며, 그 곗돈은 다른 용도로 대출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즉 순수한 친목 도모의 계라기보다는 지인들과 돈을 갹출하여 목돈을 굴리는 역할도 하는 계였다고 할 수 있다. 또 이러한 친목계에도 분원 공방이 상당 부분 관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892년 5월 20일, 귀천의 사원(射員)이 계책(契冊)을 가지고 오자, 공방에서 모여서 의논을 모으고 “월수의 조목에서 잿돈은 영구히 폐지하고 매월 3차례씩 10일 간격으로 모여서 활쏘기를 하기로” 정하였다고 한다. 사계와 관련된 회의를 분원 공방에서 하였던 것을 볼 때 그 관계성을 엿볼 수 있다. 초상계, 조애계 등은 계원들이 상을 당하였을 때 잿돈을 지급하기 위해 결성된 상호부조 목적의 계였다. 이들 계에 가입을 할 때는 나중에 자신의 가족 중 누구누구가 사망했을 때 잿돈을 타겠다는 것을 미리 정해 두었던 듯하다. 그리고는 오랫동안 잿돈을 타지 못한 계원에게는 정해진 때에 잿돈을 치러 주기도 하였고 이를 ‘생재(生齋)’라고 하였다. 이렇게 조직에 가입할 때 잿돈을 받을 대상을 미리 설정해 두는 방식은 다른 상인 조직에서도 확인된다. 이러한 장례 상호부조 목적의 계에서도 다른 목적으로 자금을 대출해 주고 이자를 받은 정황이 확인된다. 특히 분원 공방에도 빚을 내어 준 일도 보인다. 1893년 8월 17일에는 조애계의 곗돈을 분원공소에서 빌려 오고, 1894년 2월 17일 일기에서는 연반계의 곗돈을 분원공소에서 빌려 왔다. 연반계와 조애계로부터는 춘추봉(春秋捧)이라 하여 봄가을마다 정례적으로 분원공소에거 거두어 쓰는 돈도 있었다. 1893년 9월 29일에는 분원공소에서 산통계를 설립하려고 광고하여 800명이 넘는 계원을 모집한 일도 있었다. 산통계는 곗돈을 모아 목돈을 만들고, 정기적으로 제비뽑기를 하여 당첨자가 그 목돈을 타는 사행성(射倖性)이 짙은 계였다. 앞서 종로 사기전에서 살펴본 기전계도 종로의 시전 상인들과 분원 공인들이 함께 가입하여 돈을 모아 내고 돌아가며 3천 냥의 곗돈을 타는 목적으로 결성된 산통계였다. 여기에 지규식도 2몫을 가입하였고 공방의 이름으로도 1몫을 달아 두었다. 분원공소가 운영 자금의 융통에 어려움을 겪자 이러한 사행성 계에도 가입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1894년 1월, ‘잡계(雜契)를 혁파’한다는 전령이 있고 계문서와 계알을 빼앗긴 이후에도 지규식은 계속 암암리에 계를 운영해 나갔다. 1899년 만든 상무사계(商務社契)가 몇 개월 만에 파했을 때도, 지규식은 다음 날 다시 계를 만들었다. 이러한 계들은 지규식이 개인적인 차원으로도 가입하고 활동하는 것이었지만, 그의 동료들도 함께 얽혀 들어가 있었으며, 분원 공방도 일정 부분 개입되어 있었던 만큼, 사적인 경제생활과 공적인 경제생활이 혼재되어 있는 대표적인 사례였다고 할 수 있다. 또 친목 도모나 상호부조 등을 목적으로 하는 계였음에도 불구하고 지규식과 동료들 또는 공방이 급전을 융통하는 수단으로 전용되고 있었던 것도 엿볼 수 있었다. 경조사 부조 다음 【표 12】는 1891년부터 1894년까지 지규식이 부조를 한 내역을 정리한 것이다. 부조의 대상은 혼례와 장례가 가장 잦았고, 회갑연과 과거 합격 축하연(도문연)도 종종 부조의 대상이 되었다. 드물지만 이삿날에 부조를 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잔치에서 공연을 한 예인에게 부조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표에 따르면 혼례와 장례, 회갑, 도문연 때에는 돈 10냥을 부조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관계의 멀고 가까움에 따라, 또는 부조 대상자의 신분적 지위에 따라 차등을 두는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적게는 5냥을 부조하는 경우도 있었고, 가까운 동료이자 친구였던 김익준이나 남한산성 박정인이 상을 당하였을 때는 20냥을 부조하였다. 새해마다 첫 세배를 갔던 윤 진사 댁에 혼사가 있었을 때는 50냥을 부조한 적도 있었다. 윤 진사 댁에는 소상(小祥)과 대상(大祥) 때도 10냥씩 부조하였고, 공방 도중 차원에서도 따로 20냥을 부조하기도 했다. 매일 정담을 나눴던 애인의 조부상에 50냥을 부조한 것도 인상적이다. 지규식과 친분이 도타웠던 이천유나 김익준 등이 상을 당했을 때는 지규식이 장례 절차 내내 직접 그 집에 가서 장례 절차를 도왔다. 직접 방문하여 위문할 경우에는 돈 대신 술 한 동이를 부조하는 경우도 자주 보인다. 혼례나 회갑 등의 경사에는 돈 대신 백면(白麵)이나 떡 등의 음식을 부조하는 경우도 있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규식은 분원의 공인으로서 생활하며 광주·양근과 인근 지역, 강원도 지역과 서울까지 방대한 인맥을 맺고 있었다. 그의 인맥은 그의 생계를 위해서 중요한 것이었으므로, 지규식은 동료와 지인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유지하기 위해 공을 들였고 경조사가 있을 때는 이처럼 부조를 하며 축하나 위문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표 12】 1891-1894년 지규식의 동료·지인에 대한 부조 내역 -
활 쏘는 사람들과 나무 심는 마을- 기록자료
- 사회
중심에 있는 이남서당에서 설날과 추석 그리고 정기 계회날 마을 사람들이 모였다. 이남서당은 바로 조선시대 동안 방어리 동계를 실시하던 그곳이었다. 우리 동계의 옛 조약에 따르면 길사에는 서로 기뻐하고, 흉사는 서로 조문하였다. 그런데 지금 계원 중에 만일 서로 호혜를 주고받는 일에 막힌 자가 있으면 곧 동계에서 살핀다. 그런데 살피고 말을 들어 그 곡직을 분별하여 잘못된 자는 동계의 명단에서 제외한다. ―『상동계안―병자 3월일(上同契案-丙子3月日)』, 「절목(節目)」 【그림 34-1】 2019년 방어리 인근과 마을회관 【그림 34-2】 현재의 장부 관리 기록 동계를 지탱하고 있는 힘은 기쁜 일에 함께 기뻐하고 슬픈 일에 서로 조문하는 것이었다. 바로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함께하면 반이 된다”는 교훈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1930년대 후반에도, 일제강점기라는 무시무시한 시기에도 동계에서는 인용문과 같은 가치를 굳건히 지키면서 마을 주민이 서로 위로하며 지역사회와 나라를 지켰다. 그리고 독립을 쟁취한 이후에도 이러한 가치가 동계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남았다. 지금은 방어리 동계의 많은 계원이 외지로 나가 있다. 계원 명단을 보면 가까이는 경주, 울산, 대구에 사는 계원이 있고 멀리는 서울과 경기 등 전국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혼례와 초상에 있어 서로 돕는 가치를 유지하고 있어 예전의 동계를 이어 가고 있다. 그런데, 2023년 방어리 동계가 400년 동안 이어진 역사를 담고 있는 사실이 고문서에서 밝혀졌다. 활 쏘는 무부들의 사계에서 성리학적 가치를 담은 동계로 전환한 내용에 가치를 부여하면서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동계는 활동의 가치를 상호부조에서 나아가 지역사회가 기대하는 내용을 담을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갓뒤마을의 동계도 상호부조의 가치를 현대사회에도 이었다. 독립 직후 동계를 새롭게 하기 위한 활동이 있었다. 1947년 계원 이길우가 마을회관을 새로 짓고 쓴 글에서 엿볼 수 있다. 근래에 와서는 사람들의 마음이 옛날과 같지 않고 풍속이 오히려 차츰차츰 변해 가니, 텅 빈 마을 사무소는 주인이 없는 물건과 같았다. 위로는 비가 새고 옆으로 바람이 불어대어 썩어 부서지고 무너지게 되었다. 옛날 문헌에서 기록들이 동계를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매우 통탄스럽다. 마을의 노소 여러 선비가 이것을 걱정하여 중창할 것을 충분히 상의하였으나 그 일을 주동할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늙어 쓸모없으나 선대를 사모하는 정성으로 자임하며 맨주먹으로 일을 시작하였다. 원근의 사람들이 앞다투어 의연금을 내고 앞다투어 노동에 나오니…. ―갓뒤마을의 『연의방명기(捐義芳名記)』 중에서 【그림 35-1】 2020년 현재 갓뒤마을 인근 도시개발 현황 【그림 35-2】 황성공원 안내도 1945년 독립을 되찾자마자 갓뒤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가장 먼저 한 일이 예전에 남아 있던 동계를 새롭게 중수하는 것이었다. 글에서는 중수에 앞서 엄혹한 시기를 보내다 보니 경주 시내에 있던 갓뒤마을 사람들의 인심이 예전만 못하게 변하고 말았다는 한탄이 곳곳에서 일었던 사정을 적었다. 그리고 마을 사람과 동계의 활동 중심이었던 마을 사무소가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으며 쇠락한 모습이 마치 그때의 현실과 같았다고 보았다. 그래서 몇몇 뜻있는 원로들이 마을 사무소를 새롭게 하기로 결의하고 돈을 모으고 사람들이 함께 공사에 참여했다. 갓뒤마을에서 마을 사무소를 새로 짓는 일은 단순한 건물의 보수에 그치지 않았다. 글에서 밝혔듯이 선배들이 동계를 조직하고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며 부대꼈던 옛날을 되살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바로 혼례에 축하하고 초상에 슬퍼하는 그것이었다. 1947년을 계기로 갓뒤마을 동계는 새롭게 출발했다. 그런데, 2000년을 전후하여 마을 주위가 도시화 과정에서 아파트가 들어서고 숲이 사라졌으며, 마을에 오랫동안 살던 사람들도 흩어지면서 동계는 크게 위축되었다. 지금은 몇몇 계원들이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상호부조를 이어 가고 있다. 마을 가꾸기와 새마을 운동 조선시대 동계는 주민들이 모두 누릴 수 있는 호혜의 가치를 위한 협동에 있고, 협동을 실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서로의 생각을 엿보고 조정하는 과정이 있었다. 동계가 전해 준 지식과 지혜는 현대 한국 사회에도 그리고 미래 한국과 인류에도 의미가 있다. 먼저 현대 대한민국에 작동한 동계의 가치는 1970년대 새마을 가꾸기와 이 운동에서 확장한 새마을 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 경주 인근의 문성리 사례이다. ·67년도 대 한발로 모 한 포기 심지 못한 마을 주민들은 냇가로 몰려나가 한해 극복을 위한 양수장 설치에 의견을 모았고 집수 암거 작업을 편 것이 다행히도 성공을 거두게 되어 주민들은 영구적인 한해 대책을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 양수장을 설치하고 송수관을 매설하는 데 서로 의견이 충돌되고 말다툼이 생기고 불평이 일 때마다 그 고충은 말할 수 없었고 송수관 매설이 끝나고 시험 송수할 때 수압을 못 이겨 터진 송수관을 옷을 찢어 틀어막기도 했었다. ―내무부, 「지도자의 집념으로 일어선 문성동」, 『새마을 運動-시작에서 오늘까지』, 1973 【그림 36-1】 1970년대 포항 문성리 마을의 새마을 운동 계획 【그림 36-2】 포항 문성리 새마을 회관 1967년에는 뜻하지 않은 심한 가뭄으로 마을 사람들의 생존이 위협받는 일이 발생했다. 마을 사람들은 회의를 통해 강물을 끌어오는 양수기 설치에 모두 뜻을 모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모두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일찍이 모은 기금을 바탕으로 양수기를 사는 것과 더불어 마을의 농업 환경을 전환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합의에 이르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토지의 전환과 부업 조성에 처음부터 모두가 동의한 것은 아니었고 양수기 도입을 반대하는 등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다른 의견을 조정할 수 있었던 데는 역시 이 마을에도 있었던 동계의 지혜, 즉 마을 어른들이 동계를 통해 서로의 의견을 조율했던 협동의 경험이 작동했다. 그리고 한번 결정한 일은 마을 사람 모두가 망설임 없이 함께했다. 문성리에서 쏘아 올린 마을 가꾸기 노력은 1970년 당시 정부에 의해 새마을 운동으로 전환되었다. 문성리 사람들은 새마을 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 마을에서는 여전히 마을 주민들의 회의를 통해 주민 모두에게 혜택을 주는 호혜의 가치를 담은 사업을 결정했다. ·주요 실적: 차도 개설, 농로 개설, 지붕 개량, 리어카 공급, 마을회관 건립, 공동 우물, 공동 빨래터, 부엌 개량, 변소 개량 ·부녀회장 황여분의 지도 아래 농번기에는 전 동민이 누에를 치고 농한기에는 홀치기를 하여 농가 소득 증대에 앞장서고 빨래터 조성, 담장, 부엌, 화장실, 마을 환경개선 등을 부인회원들이 일심동체가 되어…. ―「새마을 운동 발상지 문성마을 회고록 이석걸」, 『새마을 운동 발상지-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기계면 문성리』, 포항시 마을 사람들은 정부로부터 지원받은 철근과 시멘트의 혜택이 모두 골고루 돌아가도록 여러 차례 회의를 거듭한 결과 우선순위를 결정했다. 차도 개설에서 변소 개량에 이르는 사업은 그 결과물이었다. 1970년대의 글이다 보니 ‘지도’라든지 ‘소득 증대’ 등의 단어와 공격적인 문장으로 쓰였다. 하지만 공동 우물과 빨래터 조성, 담장·부엌·화장실 개선으로 마을 환경을 조성하는 일에는 조선시대의 남성 중심 동계와 달리 여성들도 함께했다. 우물과 빨래터 등은 함께 사용하기에 조금은 결정이 쉬웠지만, 부엌과 화장실 개선은 우선순위를 정하는 데 많은 고민과 서로의 양보가 필요했다. 바로 호혜를 위한 협동의 과정이었고 이 가치는 조선시대 동계에서 이어진 유산이자 지혜였다. 조선시대 동계는 예전에 양반들이 지역의 권력을 잡기 위해 동원한 하나의 수단이라고 보는 시각이 있었다. 그래서 마을 안에 권력과 갈등이 항시 작동했다고 보았다. 그럴 수도 있다. 그랬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만으로는 몇백 년 동안 같은 마을에 함께 살면서 동계를 작동한 사실을 모두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바로 공동의 이익을 함께하기 위한 호혜와 협동의 지혜가 여기에 있었다. 호혜와 협동의 지혜는 과거의 유산에 그치지 않고 1970년대 마을 가꾸기와 새마을 운동 과정에서 빛을 발했다. 대한민국은 이런 저력이 작동해서 새마을 운동을 성취하고 인류사에 전례가 없는 농촌개발 성공의 신화를 만들었다. 세계는 한국의 새마을 운동의 경험을 함께하기 위해 주목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조선시대 동계는 ‘오래된 미래’라고 하겠다. 동계, 새마을 그리고 인류 조선시대 여러 마을에서 작동했던 동계에서 어울려 잘살기 위해 만들어 낸 지혜는 오늘날에도, 어쩌면 가까운 미래에도 여전히 소중한 것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동안 한국은 한국문화의 가치를 발견하고 인정받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조선시대 농촌 마을에서 얻은 지식과 지혜가 인류를 위해 작동하면서 한국이 인류에 이바지하게 되었다. 한국이 세계에 존재를 알리는 노력은 길고 길었다. 일제강점기 “아와 비아의 투쟁”이라는 한민족과 일제와의 대결 구도 속에서 우리를 찾기 위해 ‘국학’ 운동을 펼쳤다. 이는 우리의 독립을 찾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고, 그 속에서 우리 문화가 우수하다는 자기 긍정이 필요했다. 독립으로 빛을 되찾자, 일본 제국주의가 심어 둔 한국문화에 대한 폄하를 떨쳐 내는 일에 다시 힘을 모았다. 우리를 객관화하고 인류를 바라보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식민사학의 낙인을 벗어 던지고 민족문화의 가치를 발견하는 ‘국학’ 연구에 계속 노력을 기울여 우리 문화가 가장 멋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자 애썼다. 1970년대 이후로는 고도 경제성장을 거듭하면서 ‘한국문화의 정수’를 연구하여 ‘민족문화 창달’을 위한 국학에 덧대어 한국학 연구를 했다. 이제, 21세기 우리나라는 국가의 위상에 맞게 인류 발전에 함께하는 대한민국이 되었다. 인류에 이바지하는 대한민국의 지식 중 대표적인 것이 농촌의 지식일 수 있다. 인류에 한국의 지식을 알리고 또 한국의 가치를 인류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하는 일이 ‘한국학’이다. 그렇다면 한국사에 있어 농촌이 가꾸었던 마을 사람들이 서로 돕는 호혜의 가치를 위해 쌓아 올렸던 협동의 노력도 그중 하나가 될 수 있다. 조선시대 경주 지역에는 많은 동계가 있었으며, 지역마다 여러 목적의 계가 작동했다. 이들 동계는 한 마을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수백 년 동안 미움과 사랑을 녹여서 작동시켰다. 그 중심에서는 호혜와 협동이라는 가르침이 있었고, 잠재되어 있던 이런 지혜는 1970년대 농촌 빈곤과 환경개선을 목표로 한 새마을 운동에서 빛을 발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사람은 자기 평가에 인색하지만, 인류사에 이처럼 농촌의 빈곤과 질병을 극적으로 이겨 낸 사례는 없다. 놀라운 일이다. 【그림 37-1】 1970년대 마을 개발 계획서 【그림 37-2】 아프리카의 새마을 운동 대한민국은 21세기부터 한국의 농촌 빈곤 해결 성과를 농촌개발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이 내용을 지구 남반구의 이른바 ‘개발도상국’에 수출하고 있다. 놀라운 성과는 당연하다. 그렇지만 이제 우리는 남다른 가치를 인류에 제안해야 한다. 한국이 수출한 농촌개발 현장에서는 사업 관리를 우선하면서 현지 토착문화에 주목하기 어렵다. 봉사자들은 현지 농촌에서 환경개선과 소득 증대를 위해 한국의 경험과 지식을 전수하는 사업을 설계하고 성과를 관리하는 업무에 주로 집중한다. 이런 시행착오에 대한 답을 고민한다. 해외의 농촌개발 현장에서는 지역의 토착문화를 존중하기 어렵게 하고, 사업 관계자는 현지의 지식을 참고로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되돌아보는 데 한계가 있다. 농촌개발 사업 진행에 앞서 그곳의 토착문화에 관한 관심과 연구를 선행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현지의 토착문화에 대한 관심과 탐구는 한편으로는 조선시대 농촌 그리고 동계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할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있다. 조선시대 농촌에서 공동 이익을 위해 협동하면서 호혜의 지속성을 유지하고자 했던 동계와 유사한 지식을 한국의 농촌개발 원조를 받는 지구 남반구 사회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런 농촌 마을의 가치는 아시아의 ‘하크(Haq)’, 아프리카의 ‘우분투(Ubuntu)’, 남아메리카의 ‘수막 카우사이(Sumak Kawsay)’와 같은 지구 남반구 지역 토착 지식의 사례가 그것이다. 이 부분은 한국의 토착 가치도 지구와 인류의 문화와 연대 혹은 비교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렇기에 국제개발로서 수원국 농촌개발 사업에 착수하기에 앞서 인문학 관점에서 토착 지식에 관한 관심을 기울이는 노력은 한국 토착문화의 가치도 발견하는 계기가 된다. 한국은 이제 한국과 한국인 그리고 민족을 중심에 두고 세상을 바라보기보다는 세계사와 인류의 문화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고민할 때가 되었다. 우리가 세계사에 그리고 인류에 끼치는 영향력이 생각 이상으로 커졌기 때문이다. 그만큼 대한민국의 어깨도 무겁다. 한국이 인류에 제공하는 지식, 그중에서 변하지 않는 사례는 조선시대 농촌에서 작동했던 동계와 그 동계의 호혜와 협동을 위한 끊이지 않는 노력의 유산이다. 이 부분에서 방어리의 활 쏘는 사람들과 갓뒤마을의 나무 심는 마을이 우리와 인류에게 주는 가치는 소중하다. -
조선 지식인의 북경 관광- 기록자료
- 문화
는 동당(東堂), 서당(西堂), 남당(南堂), 북당(北堂) 네 곳의 천주당이 있었다. 동당은 1655년 예수회 선교사가 세운 교당으로 남당과 함께 조선 사절단이 자주 찾았던 천주당이다. 현재 북경시 동성구 왕부정대가(王府井大街)에 있다. 서당은 1723년 북경시 서성구 서직문 안에 예수회 선교사가 세운 교당으로 조선 사절단이 방문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남당은 1605년 마테오 리치(이마두(利瑪竇))가 북경시 선무구 선무문 안에 세우고 1650년 독일 선교사 아담 샬(Adam Schall, 탕약망(湯若望))이 중건한 교당으로, 조선 사절단의 숙소인 옥하관과 가까운 거리에 있어 조선 지식인들이 가장 많이 방문한 천주당이다. 북당은 1703년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가 세운 교당으로 현재 북경시 서성구 서십고대가(西什庫大街)에 있다. 북당은 1783년 동지사 서장관으로 임명된 아버지 이동욱(李東郁)을 수행하여 북경에 간 이승훈(李承薰)이 조선 최초로 천주교 세례를 받은 역사적인 장소이다. 【그림 10】 왕부정(王府井) 거리에 있는 천주교 동당(동천주당) 조선에서 천주당을 가장 빈번하게 드나든 인물은 이기지로 파악된다. 이기지는 1722년 숙종의 승하를 알리는 고부사 정사로 임명된 아버지 이이명(李頤命)의 자제군관으로 중국에 갔는데, 2개월가량을 북경에 머무르며 동당, 남당, 북당 세 천주당을 총 8차례 방문했다. 지금까지 확인한바 이기지는 남당을 둘러본 유일한 인물이다. 이기지는 남당에서 포르투갈 선교사 소림(蘇霖, Joseph Suarez)과 맥대성(麥大成, Jean-Francois Cardoso), 벨기에 선교사 장안다(張安多, Antoin de Magalhaens), 독일 출신 선교사 대진현(戴進賢, Ignatius Kogler)를 만났으며, 동당에서 오스트리아 선교사 비은(費隱, Xavier Ehrenbert Fridelli) 등과, 북당에서 프랑스 선교사 백진(白晋, Joachium Bouvet), 은홍서(殷弘緖, Francois Xavier d’Entrecolles) 등과 만나 필담을 나누었다. 또 만나기를 희망하며 북경 현지에서 서신을 주고받던 프랑스 선교사 두덕미(杜德美)의 부고를 급작스레 접하고는 조문하는 글을 지어 보내기도 했다. 이기지는 서양 선교사들과 인연을 “하늘이 베푼 인연(天緣)”으로 여기며 그들과 동서양 역법의 차이, 천체 관측 기구 제작법, 일식과 월식의 원리, 천체의 운행 등에 관해 토론했다. 아울러 서양서와 서양화, 천문 관련 서적, 지구도, 혼천의, 자명종 등을 선물로 증정받고 와인과 카스테라를 맛보기도 했다. 이기지의 천주당 체험은 이후 홍대용과 박지원 등의 북경 관광에도 영향을 주었다. 특히 젊은 시절부터 수학과 천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홍대용은 북경에서 남당과 동당을 4차례 방문해 당시 흠천감 정(欽天監正) 유송령 및 독일 선교사로 흠천감 부정(副正)을 맡은 포우관과 교제했다. 홍대용의 전언에 따르면 강희 연간 이후로 조선 사신이 천주당에 가서 구경하기를 청하면 서양 사람들이 기꺼이 맞아들여 서양의 기구들을 보여 주고 진기한 물품을 선물로 주었는데, 조선 사람들이 점차 예의를 갖추지 않고 천주당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기물을 더럽히자 조선 사신의 관람을 거절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홍대용은 조선의 관상감(觀象監)에서 파견한 이덕성(李德成)이라는 일관(日官)을 데리고 가 여러 차례 만남을 요청한 끝에 유송령과 포우관을 만날 수 있었다. 홍대용은 자신의 고향 집에 농수각(籠水閣)이란 천체 관측소를 짓고 혼천의를 제작한바, 유송령과 포우관을 통해 혼천의, 자명종, 파이프오르간, 서양화 등을 구경하고 천체망원경으로 태양의 모습을 관찰하는 경험을 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홍대용은 관상대 진입을 시도한 끝에 마침내 성공하여, 청대에 제작한 천체의(天體儀)·적도의(赤道儀)·황도의(黃道儀)·지평경의(地平經儀)·지평위의(地平緯儀)·기한의(紀限儀) 등을 목도했다. 관상대는 1443년 관성대(觀星臺)라는 이름으로 설치되었다가 닥 청대에 그 이름을 관상대로 고쳤다. 현재 북경시 동성구 건국문(建國門) 역 인근에 ‘고관상대(古觀象臺)’란 명칭으로 보존되어 있다. 아래 홍대용의 기록은 당시 북경에서 관상대를 관광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잘 보여 준다. 관상대는 성 동남 모퉁이에 있다. 흠천감(欽天監)의 관할 아래 있으며, 의기(儀器)들로 천체를 관찰하는 곳이다. 관상대는 유송령(劉松齡)이 일찍이 말하기를, “황상의 금지구역으로 사람이 가까이 할 수 없다”라 했고, 역관들 역시, “연전에 우리나라 사람이 감관(監官)에게 뇌물을 주고 올라가 구경을 하고 왔는데, 그 뒤 일이 발각이 나서 파면을 당한 일이 있어 그 뒤로 사람을 금하는 것이 더욱 엄해졌다”라 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성에 오르면 사형에 처한다는 법률이 있다”라 하였는데, 관상대는 성을 의지하고 있어 자금성을 엿볼 수가 있고 또 위에 있는 의기들이 대부분 임금이 만든 것으로 국가의 귀중한 그릇들이므로 사람을 함부로 들여보내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3월 귀국할 때 길을 돌아 대 밑으로 갔다. 아침 해가 막 떠오르는데 멀리 10여 개의 의기가 돌난간 안으로 주욱 벌여 있는 걸 바라보니 이상한 모양과 제도들이 기이한 빛들을 반사하고 있었다. 곧장 훌쩍 날아오르고 싶었지만 도리가 없다. 대 위에서 한 사람이 난간을 의지하고 굽어보기에 나는 말을 세워 쳐다보며 이야기를 걸고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한 다음 한번 보여 달라고 했다. 그는 고개를 저었고, 손바닥을 펴서 목을 그어 보이며, “올라올 수 없다. 죄가 사형이다”라 했다. 대 아래 공청이 있었는데 문이며 담이 몹시 깊고 높다. 흠천감의 분사(分司)인 듯싶다. 나는 말에서 내려 문지기를 보고 읍을 하며 들어가기를 청했다. 그의 말이, “사(司)는 금지구역이라 들어올 수 없지만, 다만 지금은 이른 아침이라 상관이 오지 않았으니 잠시 들어오되 오래는 있을 수 없다”라 했다. 나는 고맙다고 인사하고 들어갔다. 청사 서쪽으로 두어 자 높이 평대(平臺)가 있었는데 사방이 각각 수십 보쯤 되어 보였다. 동쪽으로 혼천의(渾天儀)와 혼상(渾象)이 있고, 서쪽으로 간의(簡儀)가 있었는데 모두 청동으로 만들었다. 하나의 크기가 대여섯 뼘쯤 되고 둘레로 돌난간을 세워 두었다. 간의의 제작은 매우 복잡해서 창졸간에 제대로 다 살펴볼 수가 없었고, 혼천의만은 송대 제도로서 『서경집전(書經集傳)』에 실려 있는 그대로였다. 명 정통 연간에 만든 것으로 비록 버려두고 쓰지는 않지만, 쌍고리와 수평·수직·직선 거리 등 여러 가지 방법만은 대조해 볼 수 있었다. 북쪽에 구리궤(銅櫃)가 있는데 기계 돌리는 물을 담아 두는 것인 듯싶지만, 산실(散失)되어 잘 알 수가 없었다. 대 위에 있는 모든 기계는 다 강희 이후에 만든 것들로 육의(六儀)가 있었는데, 천체의(天體儀)·적도의(赤道儀)·황도의(黃道儀)·지평경의(地平經儀)·지평위의(地平緯儀)·기한의(紀限儀) 등이었다. 모두 서양법이 동쪽으로 건너온 뒤에 생긴 것으로, 곽수경(郭守敬)의 옛 제도에 비해 훨씬 정밀하게 되어 있다. 최근 육의의 번거로움을 피해 새로 하나로서 여섯 가지를 겸해 쓸 수 있도록 만들었는데, 기계가 너무 복잡해서 역시 육의를 각각 쓰는 것만큼 간편하질 못하다고 한다. 문지기가 빨리 나가라고 하는 통에 정신없이 나와 버렸다. 【그림 11-1】 밖에서 올려다본 관상대의 모습 【그림 11-2】 관상대의 천체 관측 기구들 천주당에서 조선 지식인들이 서양의 과학 기술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세계 지리에 대한 인식을 확장해갔다. 한편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로 조선 사절단이 북경에서 천주당을 방문하는 일은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대신에 조선 지식인들은 아라사관에서 러시아인과 접촉해 서양 문물 체험을 이어갔다. 아라사관은 러시아정교회 소속 선교사와 유학생, 외교관 등이 머물던 숙소이다. 청과 러시아는 책봉 체제에 놓인 관계는 아니었으나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고 국경을 확정지은 후 러시아가 청에 정기적으로 사절단과 상인을 파견했으며, 1727년 캬흐타 조약을 체결하면서는 러시아정교회 선교사와 학생을 북경에 상주시키고 대략 10년에 한 번씩 인원을 교체했다. 아라사관은 동강미항(東江米巷) 중간의 옥하교(玉河橋) 서쪽에 있다. 옛날에 조선관이었는데, 지금은 아라사(러시아) 사람들이 거처하는 곳이 되었다. (중략) 비록 중국의 정삭(正朔)을 받들지 않으며 공물도 바치지 않지만, 중국의 문자를 익혀서 몇 년의 기한을 두고 교대로 자제들을 중국에 보낸다. 관소를 설치하여 거처하고 스승을 두어 가르치며 그들에게 식량을 제공한다. 현재 관소에 거주하는 자는 6-7명으로, 거처하는 건물은 서양의 그것처럼 화려하고 사치하다. 또한 하나의 신을 모신 당(堂)이 있는데 세 개의 문은 매우 커다랗고, 건물 안은 매우 높으면서도 깊숙하다. 위층은 둥그런 문을 밖으로 냈는데, 모두 유리를 대고 그물로 묶었다. 벽은 벽돌을 쌓아 저절로 돌무늬가 만들어졌으니, 천주(天主)를 받드는 곳과 비슷하다. 상자 하나에는 모자와 옷을 담아 놓았는데, 복식 제도는 가사(袈裟)와 비슷하고 관(冠)의 제도는 당모(唐帽)와 비슷한데 모두 금실로 수를 놓아 만들었으니, 아라사의 제도가 본래 그렇다. 19세기 조선 지식인들은 아라사관을 방문하여 천주상과 벽화를 관찰하기도 하고 러시아 정교단의 일원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1826년 동지 사행에 참여한 홍석모(洪錫謨)는 아라사관에서 제10대 러시아정교회 전도단장 파벨 이바노비치 카멘스키(Pavel Kamensky)와 필담을 나누었는데, 우랄, 볼가강, 도나우강 등 러시아의 주요 산과 강의 정보와 더불어 당시 로마노프 왕조 제14대 황제 니콜라이 1세가 제위에 오른 지 2년이 된 사실까지 언급했다. 조선 지식인들에게 야만스러운 오랑캐라는 부정적인 인식이 대부분이었으나 홍경모는 러시아인의 인심이 온화하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아라사관 관광이 러시아에 대한 인식에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몇몇 조선 지식인들은 러시아 선교사와 시문을 주고받으며 우정을 나누기도 했다. 비교적 잘 알려진 사례가 1815년 동지 사행에 참여한 조인영(趙寅永)과 제9차 러시아정교회 전도단장 니키타 야코프레비치 비추린(Nikita Yakovlevich Bichurin, 비구림(比丘林))의 교유이다. 조인영은 동지 부사 조종영(趙鐘永)의 자제군관으로 북경에 갔는데, 러시아 동방학연구소에 보관된 문건에 조인영이 비추린에게 준 시가 적혀 있다고 한다. 조인영의 문집인 『운석유고(雲石遺稿)』에 수록되지 않은 그 시에서 조인영은 비추린과의 교감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드러내며 작별하게 된 아쉬움을 토로했다. 조인영은 1839년 기유박해를 주도하고 「척사윤음(斥邪綸音)」을 지어 천주교를 배척한 이력을 지닌 인물이지만, 이전 시기에 러시아인과 적극적으로 교제한 사실을 통해 서양 ‘문물’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를 볼 수 있다. 비추린은 1807년부터 1821년까지 북경에 머물렀는데, 러시아로 돌아가기 직전 도광제(道光帝)의 등극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된 조선의 진하사절단과 만났다. 다음은 정사 이조원(李肇源)이 북경에서 사귄 벗들을 회상하면서 지은 시편들 가운데 실린 〈화아경(和雅敬)〉이란 제목의 시이다. 奇遇鄂羅人 / 기이한 인연으로 러시아인을 만나 重譯有聽瑩 / 거듭 통역해도 알아듣기 어려웠네. 其意頗慇懃 / 그 마음이 매우 은근하여 寶刀奪相贈 / 보배로운 검을 벗어 주었네. 첫 구의 ‘러시아인(鄂羅人)’이라는 말에서 ‘화아경’이 러시아 사람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화아경은 바로 비추린의 그리스식 수사명 히아신스(Hyacinth)를 한역(漢譯)한 표현으로 추정된다. 양측은 역관과 러시아 유학생을 통해 중국어로 대화를 나누며 언어의 장벽을 초월하여 의기투합했고 이조원에게 러시아산 장검 한 자루를 선물로 증정하기도 했다. 이조원과 비추린이 교제한 경위와 그 상세한 정황은 당시 전도단의 교체업무를 관장하기 위해 북경에 체류 중이던 러시아 외교부 감호관 예고르 페도로비치 팀콥스키(Egor Fedorovich Timkovskiĭ)라는 인물의 기행문을 통해 소상히 파악할 수 있어 더욱 흥미롭다. -
활 쏘는 사람들과 나무 심는 마을- 기록자료
- 사회
계를 실시했던 이남서당 【그림 14-2】 동계를 실시했던 이남서당 1698년(숙종 24) 10월 1일, 남구명이 지은 사계를 동계로 새롭게 한 일을 기념하면서 지은 글이다. 그는 당시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를 반영하여 사계의 ‘의리’를 ‘신의(信義)’로 바꾸었다. 이러한 노력을 선배들의 노력을 고쳐서 이은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래서 사계가 습사를 통해 함양하고자 했던 의리를 ‘덕(德)’이라고 보고 그 뜻을 신의라는 새로운 가치로 승화했다. 남구명의 중수 참여는 우연이었다. 사계를 주도하던 여러 마을과 가문 중 경주 이씨가 있었다. 남구명은 경주 이씨 집안의 사위로 방어리에 머물렀다. 이때까지만 해도 장가를 가기 때문에 장인 집, 즉 처가에 일정 기간 거주했기 때문이었다. 남구명(1661-1719)의 호는 우암(寓庵)이다. 호가 있다는 사실로 볼 때 그는 유명했고, 조선시대에 유명하다는 말은 성리학에 조예가 깊은 학자라는 사실을 의미했다. 그는 경북 영해에서 태어나 1693년(숙종 19), 33세의 나이에 그 어렵다는 문과에 급제했다. 그리고 처가가 있는 경주 방어리 입구 호수 인근에 조그만 집을 짓고 몇 해 동안 독서에 열심이었다. 큰 인물은 세상을 유람하거나 잠시 자기계발을 하는 시간을 가진다. 남구명은 방어리에서 장인이 참여하고 있는 사계를 접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부들이 추구하는 의리가 더 이상 시대의 변화를 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는 점에서 어쩌면 조금은 안타까운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문과에 급제해서 시대가 요구하는 성리학적 지식이 높은 그로서는 사계를 새롭게 할 자신도 있었겠다. 망설이지 않고 실천에 옮겼다. 남구명은 무부들의 의리를 ‘덕’으로 평가하면서 새로운 가치인 신의를 제시하면서 마을 선비들의 모임 동계로 전환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
산의 인문학, 지리산을 유람하다- 기록자료
- 문화
사재(尼泗齋)·니동서당(尼東書堂) 등의 이름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마을의 역사는 대략 7백 년을 웃도는 것으로 추정된다. 남사의 토성(土姓)인 진양 하씨가(晉陽河氏家)의 대표 인물 하즙(河楫, 1303-1380)과 하윤원(河允源, 1322-1376) 등을 통해 고려시대 말기까지로 마을의 역사를 소급할 수 있다. 그러나 남사마을은 진양 하씨 외에도 여러 성씨가 입향하여 집안을 형성한 다성촌(多姓村)이다. 대표적 성씨로는 성주 이씨(星州李氏)·밀양 박씨(密陽朴氏·)연일 정씨(延日鄭氏·)전주 최씨(全州崔氏)가 있으며, 현재 남사마을에는 동성족(同姓族)이 살고 있진 않으나 역사적으로 이 마을을 빛낸 진양 강씨(晉陽姜氏)와 현풍 곽씨(玄風郭氏)도 빼놓을 수 없다. 다양한 이들 문중과 여러 인물 덕분에 남사마을은 선비가의 수많은 문화유적이 현전하는, 지리산 권역을 대표하는 전통 선비마을이 되었다. 현재 남사마을은 ‘남사예담촌’으로 더 유명하다. ‘예담촌’이란 이름은 2003년 ‘농촌전통테마마을’로 지정된 이후부터 사용하였는데, 남사예담촌 홈페이지에 의하면 ‘오랜 세월을 묵묵히 지켜 온 옛 담의 신비로움, 전통과 예를 중요시하는 이 마을의 단정한 마음가짐을 담아 가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남사마을의 담장은 2006년 12월 등록문화재 제281호로 지정되었다. 남사·상사·초포마을을 모두 합하여 150여 가구에 300여 명이 살아가고 있다. 우리나라 여느 곳이 마찬가지겠지만, 남사마을 또한 전통과 현대의 사이에서 여러 진통을 겪어왔고, 현재도 겪는 중이다. 산청군은 남사마을의 오랜 전통을 보호하고자 행정적 지원과 함께 훼손을 막는 여러 제약을 적용해 왔다. 예컨대 음식점이나 유흥시설의 무분별한 개업을 금지하고, 개업한 식당도 철저하게 지자체에서 관리하며, 마을 입주 시 전통 기와집을 짓도록 하는 등이다. 그 덕분에 마을의 전통적 모습이 덜 훼손되고 유지되어 온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그렇지만 지역민의 생계가 유지될 때 마을도 지속될 수 있으므로 이를 위해서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지역민의 요구에 부응하되 전통과 현대의 절충을 고민하여 꽤 괜찮은 대안을 찾았다. 남사마을 고택에서 숙박 체험을 허용하고, 산청군에서 특화한 한방약초를 활용해 관광객에게 족욕(足浴) 체험을 허용하고 수익을 창출하도록 한 것이다.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한편으로 현명한 일 처리라 생각한다.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조화 속에서 필자가 끔찍이도 아끼는 남사마을이 오래도록 보존되기를 기대해 본다. 자, 지금부터 남사마을을 한번 둘러보기로 한다. 【그림 42】 남사마을 전경정면에 솟아있는 산이 니구산이다. -
조선 후기 출세의 사다리에 오르려는 이들- 기록자료
- 정치
인들이 힘을 모아 서당을 건립하여 학업과 유생들의 소통 장소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조경진은 지방의 유학자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조경진의 집안은 공신 가문의 일족으로 홍주에 입향한 조증이후로 관직에 나가지 못하였다. 위축되어 가는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경제적 부의 축적도 중요하지만, 지속적인 관직 진출도 중요하였다. 그렇기에 조극선의 조부인 조흥무가 자녀의 교육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었다. 그러나 조극선의 부친인 조경진은 계속 과거에 응시했음에도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그가 언제부터 과거에 응시하였는지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그는 50세인 1614년(광해 6)에도 장남인 조극선과 함께 증광 생원진사시 초시에 응시하였다. 그는 이 시험에서 아들인 조극선이 초시에 입격하면서 더 이상 과거에 응시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조경진은 장남 조극선이 생원진사시 초시에서 입격하는 것을 보고 아들의 과거 급제에 큰 기대를 걸었다. 이해 증광 생원진사시가 있기 직전에 생원진사시 회시 직부를 받을 수 있는 도회 백일장이 있었다. 조경진은 아들이 이 시험에 입격하지도 못했는데 지인들과 놀러나갔다가 돌아오자, 아들의 벗들 앞에서 학업에 나태한 아들을 꾸짖었다(『인재일록』 1616년 6월 16일). 그뿐 아니라 조경진은 24세의 아들의 학업을 독려하기 위해서 닷새에 한 번씩 규칙을 정해 글을 짓게 하였고(『인재일록』 1618년 7월 25일, 8월 29일), 26세의 아들이 별시 문과 초시에서 낙방하였다고 화를 내며 매질을 하기도 하였다(『인재일록』 1620년 8월 8일). 그가 아들 조극선에게 가혹하게 했던 것은 아들의 과거 급제를 간절히 바랐기 때문이었다. 조극선은 부친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서 42세까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러나 조극선은 유일로 천거되어 동몽교관에 제수된 이후 내외직을 두루 거치고 사헌부 장령에까지 이르렀다. 조극선의 관직 진출은 그의 5대조 조윤상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림 4】 조극선의 가계도 -
조선 후기 출세의 사다리에 오르려는 이들- 기록자료
- 정치
하였다. 그는 구암서당을 지어 후학 양성에 힘썼고, 김창협과 서신으로 교유하기도 하였다. 황윤석의 부친인 황전 역시 숙부 황재중의 문인이었다. 게다가 부안 출신으로 서인 학맥인 최서림(崔瑞琳, 1632-1698)의 문인인 은정화(殷鼎和, 1650-1724)의 문인이기도 하였다. 황전은 서인 노론 계열의 인물들과 교유하면서 그의 학맥을 확실히 하였다. 황윤석이 1756년(영조 32)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 1703-1772)을 찾아가 문인이 되겠다는 뜻을 밝히게 된 것 역시 부친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다. 이처럼 황윤석 집안은 그의 8대조가 흥덕에 입향한 이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등의 전란으로 서울 옛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흥덕 사족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그의 5대조부터 황윤석의 부친인 황전에 이르기까지는 성실히 학문에 임하였으나, 과거와는 인연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관직 진출도 없었다. 그렇다면 황윤석 집안은 어떻게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황윤석의 8대조 황수평이 처가의 근거지인 흥덕에 입향하긴 했으나, 6대조 황처중이 서울 옛집으로 돌아가려 한 것으로 보아 서울에 집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622년(광해 14)에는 6대조 황처중의 부인이 손자인 황종혁에게 춘천의 비(婢) 2구(口)를 별급한 기록이 있으며, 1650년 화회문기에는 황종혁의 몫으로 춘천 외거노비 1구가 주어졌고, 1691년(숙종 17)에는 춘천의 외거노비 5구에 대해서도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춘천에도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노비들이 있었다. 거주지 흥덕에서의 황윤석 집안 경제 규모는 확실하지 않으나, 일부 토지매매문서와 화회문기를 통해서 재산 정도를 가늠할 수는 있다. 황종혁은 아들 황세기 하나뿐이었는데, 두 번째 손자 황재중이 태어나자 기뻐하면서 노비 1구와 전답 30마지기를 별급했다. 황종혁이 토지를 사들인 3점의 문서가 현전하는데, 논 32마지기, 밭 20마지기가 된다. 이러한 정황을 볼 때, 황종혁 때는 재산 규모가 적지 않았다. 게다가 황윤석의 부친 황전은 재산을 늘려 초가 6칸의 집을 지었으며, 전답은 약 30결을 소유하여 쌀의 생산량이 천석에 이르렀다고 한다. 황윤석 자신도 만년에 전답 16결을 소유하였다고 하니, 부친의 경제력에 따르지는 못하나 항산(恒産)의 바탕은 마련되어 있었다. 또한 유력한 재지사족과의 중첩된 혼인이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사례는 태인의 도강김씨 가문이다. 황윤석의 7대조 황뉴, 황윤석의 조부인 황재중 그리고 황윤석의 부친 황전 등이 도강김씨와 혼인하여 약 300년간 인척관계를 유지하였다. 도강김씨 집안을 매개로 하여 호남에 세거한 순흥 안씨, 전주 최씨, 여산 송씨와도 인척관계가 맺어질 수 있었다. 【그림 6】 황윤석의 가계도 -
산의 인문학, 지리산을 유람하다- 기록자료
- 문화
면우 곽종석과 니동서당 【그림 54】 니동서당 남사마을을 대표하는 지식인이라면 근세의 유학자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1846-1919)을 꼽을 수 있다. 그의 세거지는 초포마을이었다. 경북 칠원에 살던 그의 집안이 초포로 이주한 것은 조부 곽수익(郭守翊) 때이다. 그의 부친 곽원조(郭源兆)는 단성향교의 원임을 지내기도 하였다. 곽종석은 본관이 현풍(玄風)이고, 자는 명원(鳴遠)이며, 호는 면우 외에도 유석(幼石)·회와(晦窩) 등이 있다. 아명(兒名)은 석산(石山)인데, 부친이 마을 뒷산인 석대산(石臺山)이 방 안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꾼 후 태어났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경술국치(1910) 후에는 이름을 도(鋾), 자를 연길(淵吉)이라 하였는데, 이는 도잠(陶潛)과 김이상(金履祥)의 성을 따서 이름을 만들고, 도잠의 자인 연명(淵明)과 김이상의 자인 길보(吉父)의 앞 글자를 딴 것이라고 한다. 4살 때 부친과 함께 이홍렬(李鴻烈)에게 사서오경(四書五經) 등을 배웠고, 부친이 세상을 떠난 12살 이후에는 유가경전뿐 아니라 도가(道家)와 불가(佛家)의 경전까지 섭렵하였다. 이후 주자학(朱子學)에 전념하여 20대 초반에 이미 학자로서의 명성을 떨쳤다. 25세 때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 1818-1886)의 문하에 나아가 심즉리설(心卽理說)에 더욱 천착하였다. 1883년 퇴계학(退溪學)에 천착하였고, 이 시기 기호학계의 논쟁에 뛰어들기도 했다. 1896년 거창 다전(茶田)으로 옮겨 살았다. 그 직후 미국·영국·러시아·프랑스·독일 등의 공관에 열국의 각축과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는 글을 발송하였다. 1899년 중추원 의관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903년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고 비서원승(秘書院丞)에 제수되었다. 당시 신기선(申箕善) 등이 여러 차례 출사를 권유하여 10여 일간 고종을 독대(獨對)하고 구국(救國)의 의견을 상주하였다. 을사늑약(1905) 때는 약정 폐기와 오적(五賊) 처단을 요구하는 상소를 하기도 했다. 이후 학자적 명성은 더욱 알려졌고, 그래서 3·1운동 때 137인의 파리장서에서 대표로 추대되어 초안을 작성하였다. '파리장서'는 1919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세계평화회의에 곽종석 등 유림 대표 137명이 서명하여 대한민국의 독립을 호소한 2,674자의 독립청원서다. 이 일로 인해 2년간 옥고를 겪고 옥사 직전 병보석으로 나왔으나, 그 여독으로 곧이어 세상을 떠났다. 남사마을에 현전하는 그의 유적으로는 니동서당(尼東書堂)이 있다. ‘니동’은 ‘니구산의 동쪽’이라는 뜻으로, 니동서당의 위치를 알려 줌과 동시에 공자의 학문을 닦는 곳임을 상징하고 있다. 곽종석의 항일독립운동 공적을 기리기 위해 그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1920) 지역의 유림과 제자들이 건립하였다. 이후 이 지역 후학들의 강회(講會)와 문집 출간 등을 위한 회합 장소로 활용하였다. 대문은 국가와 민족을 위한 그의 마음을 대변하듯 일직문(一直門)이라 편액하였고, 마당 한편에는 그의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그의 문화유적은 ‘국가보훈처 현충시설 43-1-20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1993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96호로 지정되었다. 그 외에도 곽종석을 비롯해 이 지역 유림의 독립 활동을 기념하기 위해 2013년 10월에 준공한 유림독립기념관이 있다. 니동서당 곁에 세웠으며, 전시실과 수장고 등을 갖춘 전통한옥 건축물이다. 주로 파리장서에 서명한 137명의 활동 상황과 유적 등을 전시하여 선현들의 정신을 이어 주고 있다. 현재 남사마을에는 현풍 곽씨가 살지 않지만, 그는 당시 우리나라 유림을 대표하는 인물이자 남사를 상징하는 선비의 표상이었다. 【그림 55】 니동서당과 유림독립기념관 -
조선 후기 문신 권상일의 관직 생활- 기록자료
- 정치
29일 상주의 영빈서당(潁濱書堂)에 가서는 『소학』 강회를 마치고, 또 읽은 글을 가지고 배강(背講)을 하였다. 또 과거가 없을 때에는 순제(열흘마다 시문을 시험함)를 하고, 과거가 있을 때에는 거접을 하는 것으로 일찍이 여러 장로들과 완의(完議)한 일이 있었기에 면에 통문(通文)을 내어 시행을 독촉하였다. 이어 순제를 위해 열 수(首)를 출제하여 보내면서, 제사에는 “강 위쪽은 수계소에 두고, 강 아래쪽은 서당에 두며, 유생들이 각자 베껴 가게 하라”라고 썼다. 이는 서당 노복들의 농사를 짓지 못할 우려를 덜어 주려는 것이다. 또 서당 출입문이 낡고 부서져서 과객을 접대할 수 없다는 것을 완의로 정하여 벽에 게시하였다. 7월에는 임호서원 재임이 권상일에게 편지를 보내왔는데, 다음 달 1일에 함창 검호(檢湖) 송정(松亭)에서 『소학』 도강(都講)을 연다며 와 주기를 청하였다. 그래서 답장을 써 보냈다. 10월 3일에는 임호서원에서 강회를 열었다. 아침이 된 후에 유생들이 모두 사당에 참배하고 나와 곧바로 앞뜰에서 서로 읍하는 예를 행하고 비로소 강을 시작하였다. 또 질문 제목도 내걸었는데, 유생들에게 물은 것은 “『대학』에서 사람을 가르치는 법은 다만 ‘밝은 덕을 밝히는 데 달려 있다(在明明德)’라는 한 구절뿐이다. 그러면 여기서 말한 ‘밝은 덕’이란 어떤 것이며, 그것을 밝힐 때는 어떤 공부를 해야 할 것인가,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한다(新民)는 설은 공자께서 조술한 바가 있으니, 하나하나 가리켜서 말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었다. 또한 동몽(童蒙)에게 물은 것은 “옛날에 사람을 가르치는데 각각 그 규모에 맞게 가르치는 곳이 있으니 가(家)에는 숙(塾)을, 향당(鄕黨)에는 상(庠)을, 주(州)에는 서(序)를, 국(國)에는 학(學)을 두어 가르치는 법을 갖추었다. 오늘날에도 옛 제도를 따르고 모방은 하고 있었으나 한갓 형식만 갖추었을 뿐 실효는 전혀 없으니 어찌하여서인가”였다. 이렇게 고향에서 지역 내 어른으로서 갈등이나 현안 등을 해결하며 바쁜 일상을 보내던 권상일은 1749년 8월 10일 이조참의에 제수되었다. 이조참의가 제수되자 권상일은 “매우 떨리고 두려우면서도 꿈 밖”이라고 의아해하였다. 권상일과 같은 남인이 이조의 직임을 맡지 않은 지가 벌써 56년이라며 회한의 뜻을 비쳤다. 1721년(경종 1) 심단이 이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소론(少論) 일부가 논척(論斥)하여 행공(行公)하지 못하고 체차되었다. 저녁이 된 뒤에 권상일의 집에 이조의 하인과 색장구종(色掌驅從) 및 구종 2명이 왔고, 교지 두 장과 도정(都正) 홍중인(洪重寅)과 우윤(右尹) 홍중형(洪重衡) 형제·사간 이광식(李光湜)·정언 권항(權抗)·청하(淸河) 권정택(權正宅) 등의 여러 편지가 왔다. 단골서리(丹骨吏) 이덕함(李德涵)과 색장서리(色掌書吏) 손득유(孫得瑜)·김담령(金聃㱓) 흥문(興文)이 보낸 고목도 왔고, 조보와 도목정사 초고도 왔다. 단골서리는 관리들에게 임명장을 작성해 주고 또 인사에 관한 각종 정보를 제공하는 한편 관리들은 서리에게 수수료라는 명목으로 돈을 건네거나 각종 선물 등을 보내 주었다 의외의 관직 제수에 대해 권상일은 조보와 도목정사 초고 등을 통해 그 전말을 파악하였다. 권상일이 이조참의에 제수된 10일의 도목정사에는 국왕이 친림하였고, 이조판서 정우량과 이조참판 윤급(尹汲), 도승지 조명리(趙明履), 이조정랑 조중회(趙重晦)와 심발(沈撥), 좌랑 이기덕(李基德)과 심눌(沈訥)이 참여하였다. 처음에 권상일은 말망으로서 낙점을 받았다. 그런데 그 자리에 참석한 국왕이 “이조참의는 대신에게 물어 변통하되, 장망(長望)으로 갖추어 의망하라”라고 전교하자, 좌의정 조현명이 곧바로 들어와서 심성진(沈星鎭)·윤심형(尹心衡)·오수채(吳遂采)·한익모(韓翼謨)·이창수·홍봉조(洪鳳祚)·홍중일(洪重一) 등 7인을 갖추어 장망에 의망하였다. 장망이란 삼망을 넘어서 다수의 후보자를 보고하는 것이다. 그러자 국왕이 친히 어필(御筆)로 장망 끝에 ‘사간원 대사간 권상일’ 아홉 글자를 쓰고 거기에 낙점을 하였다. 권상일도 지적한 바와 같이 이 시기 이조참의의 제수는 의외였다. 비록 출사하지 않았으나 권상일이 이조참의에 제수된 것은 탕평의 성과였다. 1749년(영조 25) 조현명은 치우친 논의의 근본이 되는 2개의 구멍은 막았으나 2개의 구멍은 남았다고 하며 또 다른 관직 개편이 필요함을 시사하였다. 그가 지적한 남은 2개의 구멍은 이조참의 및 홍문신록(弘文新錄)으로 이 2개의 구멍을 막아야 치우친 논의가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가 주장한 이조참의 관련 개편 내용은 천망(薦望) 시에 비삼망을 하지 말고 장망을 하자는 것으로 이를 통해 정치적 분쟁을 종식시키자는 것이었고, 홍문신록의 경우 한림소시(翰林召試)의 제도처럼 하자고 제안하였다. 이렇게 해야만 향인(鄕人)들도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조현명의 이런 주장 가운데 특히 이조참의의 장망은 얼마 후 실제 현실에 적용되었다. 같은 해 8월 10일 마침 이조참의 임정이 병으로 인해 사직을 청하여 이조참의 자리가 궐석이었다. 그러자 영조는 조현명을 입시하게 하여 그 대상 범위를 대사성과 부제학으로 교서관과 비변사 부제조를 역임한 자를 통망(通望)하도록 하였고, 그 결과로 권상일이 이조참의에 낙점될 수 있었다. 의외의 관직 제수였지만 권상일은 사직을 청하는 상서를 올렸다. 상서는 당시 대리청정을 하고 있던 세자(후일의 사도세자)에게 올린 것이다. 상소라 하지 않고 상서라 한 것은 세자에게 올렸기 때문이었다. 사직을 청하는 상서는 물론 받아들여지지 않고, 9월 18일 감영을 통해서 국왕이 전유(傳諭)한 비지(批旨) 관문이 비로소 왔다. 국왕의 전유까지 받았으나 권상일은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조보 등을 통해서 사세를 관망하였다. 이러던 차에 사간 권현(權賢)이 상소를 올려 권상일의 체직을 요청하였다. 권현은 “이조참의 권 아무개(權某, 권상일)는 곧 시골의 자호(自好, 스스로 잘났다고 여김)하는 선비인데도 성상께서 또 쓸 만한지를 시험하고자 하여 중비(中批)로 특별히 임명하셨으니, 성상의 뜻을 누가 공경하고 우러르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비록 젊었을 때에도 본디 눈을 흘기면서 살펴야 하는 지위는 견디기 어려워하였고, 지금은 나이가 일흔이 넘었으니 결단코 올라올 이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헛되이 전형(銓衡)의 직책에 매어둔 지가 벌써 넉 달이 지났습니다. 이처럼 대정(大政)이 임박하여 해조(該曹)의 업무가 많아지는 날에 한결같이 전형의 직책을 비워 둘 수는 없습니다. 신의 생각은 빨리 체개(遞改, 다른 관원을 임명함)하도록 명하시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권현의 상소 소식을 접한 권상일은 “이와 같은 때에 이렇게 말한 것은 참으로 나를 위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매우 감격스럽다”라 하였다. 과연 권현이 요청한 내용이 권상일이 생각하는 의도였는지는 좀 더 검토가 필요해 보인다. 권현의 상소에 대해서 국왕은 “이조참의 권상일을 지난번에 특별히 임명한 것은 뜻이 대체로 깊어서이다. 그러나 승지일 때 치사를 청한 사람이니, 그가 지나치게 사양하는 것은 이유가 없지 않다. 대정(大政)이 멀지 않은데 한결같이 서로 버티는 것은 옳지 않으니, 지금은 우선 체개를 허락한다”라고 전교하였다. 아울러 “대정은 달을 넘겨서는 안 되니, 반드시 이달 내에 시행할 것을 분부하라”라고 전교하였다. 결국 판서를 소환해서 정사를 개최하고, 권상일은 12월 27일 이조참의에서 체차되었다. 권상일은 다음 해인 1750년(영조 26) 1월에 장례원 판결사에 제수되었다. 장례원 판결사의 수망에 올라 낙점을 받은 것이다. 판결사가 제수되자 권상일은 “이전 이조참의 자리에서 체개된 뒤에 조금 안심되었는데, 또 새로운 명을 받들었으니 황송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며 소회를 전한다. 더욱이 팔이 아팠고 완치되지 않아서 숙배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어 1752년(영조 28) 11월 8일에는 의금부 하인이 권상일의 집으로 내려왔는데, 교지와 정목, 조보를 함께 가지고 왔다. 이는 권상일이 동지의금부사에 제수되었기 때문이었다. 승정원에서는 국왕에게 품의하여 권상일에게 속히 올라오도록 분부하였다. 그리고 며칠 뒤인 11월 12일에는 권상일을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한다는 유지가 도착하였다. 권상일은 곧바로 일어나서 관복을 갖추고 뜰 아래로 내려가서 팔배례(八拜禮)를 행하였다. 그러면서 “황송하고 답답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고 하였다. 11월 21일 사직소를 봉진(封進)하려고 일단 상주 관아로 보냈다. 이른바 현도상소(縣道上疏)라 하는 것으로, 향촌에 있는 관원이 현(縣)이나 도(道)를 통해 올리는 상소이다. 권상일의 사직상소는 1752년 12월 20일 국왕에게 보고되었다. 이에 대해 국왕은 비답을 내려 “소를 보고 잘 알았다. 경은 사직하지 말고, 속히 올라와서 직임을 살피라”라고 하였다. 1753년(영조 29) 1월 25일 교지·유지 및 조보가 권상일에게 또 전달되었다. 앞서 1월 14일 정사에서 대사간의 수망에 들어 낙점을 받았던 것이다. 2월 4일 사간원 서리의 고목과 조보가 왔다. 이 시기 권상일에게뿐 아니라 집안에 의미 있는 일이 있었다. 권상일의 공적이 평가되어 선대에게 관직을 추증하는 증직첩(贈職帖)을 받은 것이다. 증직첩은 이미 이조 당상의 수결(手決)을 받아서 입계하여 내려온 것을 수찬 채제공의 손을 빌려서 써 두었는데, 24일 도목정사 때를 기다려 어보(御寶)를 찍어서 받들고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 권상일의 아버지는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할아버지는 이조참의에 추증되었으며, 증조할아버지는 집의에 추증되고, 어머니와 할머니, 증조할머니의 증직첩은 각각 그 부군의 품계를 따랐다. 4월 26일에는 증직첩을 받들어 받으니 영광스럽고 행복하여 감회를 다 말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후에도 권상일에게는 지속적으로 관직이 내려왔다. 1754년(영조 30)에는 병조참판과 한성부좌윤, 동지의금부사 등에 낙점되었다. 계속 사직 상서를 올렸는데, 6월 2일 사직 상서는 한결같이 관아의 교서에 따라 ‘겸 동지의금부사(兼同知義禁府事) 신(臣)’이라고 하였는데, 감영에서 상서의 머리말이 격식을 어겼다 하여 돌려보내면서 머리말을 고쳐 쓰라고 하였고, 상주목사가 보낸 편지도 있었다. 6월 3일 상주목사가 일부러 사람을 시켜 보낸 편지를 삼가 받들고 곧바로 고쳐 썼는데, ‘가선대부(嘉善大夫) 행 용양위부사직 겸 동지의금부사(行龍驤衛副司直兼同知義禁府事) 신(臣) 모(某)’라 하여 돌아가는 아전에게 부치고, 또 상주목사에게 답장도 써 올렸다. 다음 해인 1755년(영조 31) 2월에는 다시 수망으로 대사간에 제수되었다. 권상일은 이번에도 역시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17일에 국왕이 광릉(光陵)에 거둥해서는 지방에 있는 대간을 변통하여 개차할 것이므로 이를 간절히 기다린다고 하였다. 그러나 권상일의 기대는 기대로 끝나고 체직되는 일은 없었다. 결국 사직상소를 올리고 국왕에 대한 판단을 기다렸다. 국왕의 대답은, “서장(書狀) 중의 경(卿, 관찰사)이 올려 보낸 사간원 대사간 권상일의 사직 상서는 내용을 보고 잘 알았다. 며칠 간 정사에 임하는 나의 마음이 애타고 절박하더니, 왕법(王法)이 통쾌하게 거행되어 신인(神人)의 울분이 펴졌으니 기쁘고 다행함을 어디에 비유하겠는가. 경(권상일)은 그같이 사직하지 말고 올라와 직분을 살필 것을 경(관찰사)이 전유하도록 유지하노라”라고 지시하였다. 4월 권상일은 “병이 중하여 올라갈 수 없다”는 뜻을 전달하였고, 5월에는 결국 관직에서 체차되었다. 1756년(영조 32) 영조는 특별히 의복과 음식물을 보내어 78세의 권상일을 위로하기도 하였다. 1월에는 권상일이 경제적으로 곤란하다는 이유를 들어 세자는, “식물로 쌀 3석, 콩 2석, 민어 10미, 조기 10속, 돼지고기 20근, 숯 2석, 땔나무 500근을 전례를 참고하여 마련하고, 이 수량에 의거하여 되도록 후하게 제급(題給)하라는 뜻을 본도에 분부할 일”로 달하(達下)하였다. 3월 13일에는 감영에서 안부를 묻는 편지를 보내면서 별회조(別會租) 5석, 간지(簡紙) 70폭, 건시(乾柿) 1첩, 광어 2미를 보내왔다. 곧바로 답장을 써서 올렸다. 권상일은 이에 대해 “사양하거나 받기가 아주 어려운데, 어쩔 수 없이 천한 자는 감히 사양하지 못하는 예를 핑계로 받았으나, 곡물은 마음이 더욱 미안하다”고 하였다. 6월에도 관찰사가 안부 편지를 보내면서 부채 18병과 간지 70폭을 보내왔다. 진휼(賑恤)을 시행한 뒤여서 물력(物力)이 부족하여 약간의 부채만 만들었기 때문에 많이 보낼 수 없었다고 한다. 곧바로 답장을 써서 올렸다. 이후 12월 21일에는 국왕의 전교에 의해 감영에서 식물단자(食物單子)가 왔다. 앞서 국왕이 관찰사에게 특별히 지시한 데 따른 것으로, 의복과 음식물로 쌀 5석, 황두 5석, 명주 10필, 돼지 1구, 조기 20속, 민어 10미를 보내왔다. 【그림 9】 권상일이 식물을 보내준 것에 대해 감사해하며 올린 전문, 『청대집』 권5 1758년(영조 34) 권상일의 나이가 80세가 되었다. 80세에 접어든 권상일에게 명예로운 특전이 주어졌다. 1758년 1월 3일 권상일은 정2품의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되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임명되면서 동시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같은 날 앞서서 국왕이 승지를 불러 전교를 내렸다. “들으니 올봄에 기로소에 들어간 사람이 전 한성부 판윤 유최기(兪最基), 행사직(行司直) 한사득, 전 참판 권상일이라고 하는구나. 한사득, 권상일은 정2품이니 실직으로 삼은 뒤에 곧바로 이조에 들여보내어 그곳에 만약 빈자리가 있다면 내일 정사에서 곧바로 의망하고, 만약 빈자리가 없다면 지중추부사로 빈자리에 부쳐서 내가 나이를 존중하여 원로로 삼는 뜻을 보이게 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대해 권상일은 몇 차례 사직상소를 제출하려고 하였으나, 처음에는 관찰사 단계에서 윤허를 청할 뜻이 없었기에 막혔다가 아마도 4월 중에 국왕에게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국왕은 사직하지 말라는 내용으로 비답을 내렸다. 기로소에서는 정기적으로 물품을 보내왔다. 기로소에서 매월 초하루에 약값 다섯 냥, 죽미(粥米) 열 말을 보내오고, 명절에 쌀 한 섬을 보내왔다. 기로소에서 1월은 설날과 상원일(上元日)에, 2월은 한식에, 3월은 삼짇날에, 4월은 초파일에, 5월은 단오에, 6월은 유두(流頭)에, 7월은 칠석과 백중(百中)에, 8월은 추석에, 9월은 9일에, 그리고 동지(冬至)와 납일(臘日)에 물품을 보내는 관행이 있었다. 기로소에 들어간 권상일에게 이후에도 한 차례 대사헌이 제수되기도 하였으나 바로 체직되면서 권상일은 문신으로서의 관직 생활을 마치게 되었다. -
조선 후기 문신 권상일의 관직 생활- 기록자료
- 정치
집단 또는 서원, 서당 등에서 강회를 열었다. 권상일이 공부를 하던 시기에는 경상도 관찰사가 주도한 강회가 열린 적이 있다. 1703년(숙종 29) 1월 5일 경상도 관찰사는 예하 각 군현에 지시하여 유생의 강경과 제술 계획안을 작성하게 하였다. 군현에서는 각 면의 훈장(訓長)에게 제술은 고을 수령이 고사하되 장원(壯元) 답안지는 깨끗하게 써서 감영(監營)에 보내고, 강경은 훈장이 맡도록 지시하였다. 이런 까닭으로 서원 재사에서 강회를 개설하였고, 권상일도 참석하였던 것이다. 강회는 상황에 따라 운영 방식이 달라지곤 했다. 가령 1704년(숙종 30) 9월 관찰사가 각 군현에 보내는 공문에서, 강회를 각 면에서는 매달 한 차례 시행하고 두 달마다 읍내에서 수령이 직접 시험을 관장하도록 하였던 것이 한 예이다. 백일장은 유생들이 모여 그동안 쌓은 실력을 겨루는 일종의 경시대회이다. 백일장은 지방관이 주도하거나, 지방 사족이 자체적으로 시행하기도 하였다. 1703년(숙종 29) 9월 20일 목사로부터 백일장을 개설한다는 통보가 전달되었고, 9월 29일 백일장이 시행되었으며 권상일도 참여하였다. 이날 백일장의 시제(詩題)는 “봉황지(鳳凰池)에 직접 드나드는 것보다 훨씬 낫겠네(全勝身到鳳凰池)”였고, 부제(賦題)는 “좌백도(左伯桃)를 따라 자살하다(自殺從伯桃)”였다. 이날 백일장에서 권상일은 삼하(三下)의 성적을 받았다. 1704년(숙종 30) 5월 23일에는 관찰사가 상주에 오는 것을 기념해 백일장을 시행한다는 통보를 받았으나, 정작 관찰사가 육촌상을 당해 백일장이 취소되었다. 백일장에 참여하기 위해 많은 선비들이 모였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갔다. 1704년 8월에는 상주 고을 수령이 백일장을 열었는데, 권상일은 과거시험 때문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같은 해 7월에 권상일은 영천(榮川)에서 열린 백일장에 참가한 적도 있다. 7월 25일 권상일은 영천 읍내를 지나면서 관아에서 백일장을 열어 많은 선비가 모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시와 부를 지어 제출하였다. 이때 권상일은 또 삼하의 점수로 합격하였다. 지방관과는 무관하게 지방 사족이 수계소에서 자체적으로 백일장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권상일은 강회나 백일장 등에 참여하는 한편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다. 조선 시대 관직에 나아가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다. 과거에 급제하거나 음서(蔭敍)로 진출하는 방법이다. 이 중 과거는 문신을 선발하는 문과와 무신을 선발하는 무과가 있었고, 기술직 중인인 역관이나 의관 등은 잡과를 거쳤다. 이 밖에도 소과(小科)로 분류되는 생원·진사시가 시행되었다. 소과는 바로 관직에 진출하는 과거시험은 아니었으나, 성균관 입학 자격이 주어지며 성균관에 가서 각종 절일제(節日製) 등의 테스트를 거쳐 관직에 나아갈 수도 있었다. 권상일의 과거 도전은 1702년(숙종 28) 2월 문과의 초시 단계인 향시(鄕試)로부터 시작되었다. 조선시대 문과는 3년마다 시행하는 식년시와 비정기 시험인 별시 등이 있다. 이 중 식년시는 초시·복시(혹은 회시)·전시 3단계로 치러졌는데, 첫 단계인 초시는 대개 응시자의 거주지에서 치러지는 향시 단계이다. 향시는 도내(道內)의 2곳에서 치러졌다. 권상일이 처음 도전한 향시는 1702년 2월 10일 현풍에서 치러지는 시험이었다. 이때 거창에서도 향시가 치러졌다. 권상일은 2월 시험이 치러진다는 소식을 대략 한 달 전쯤인 1월 6일에 들었다. 권상일은 2월 4일에 시험을 치르기 위해 집에서 말을 타고 출발, 2월 7일 현풍에 도착하였다. 도착한 뒤에는 거처를 마련하였다. 이전에 머물던 곳에서 거처하려고 하였으나, 이미 밀양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어 새로운 거처를 마련하여 들어갔다. 2월 8일에는 녹명소(錄名所)에 나아가 시지(試紙)에 도장을 받았다. 이번 시험의 감독관은 경시관으로 이광저(李光著), 참시관으로 진주목사와 함양군수가 왔다. 2월 10일에 치러진 시험은 시(詩)를 짓고, 부(賦)를 지으며, 사서에서 뽑은 구절에 대한 논술시험인 의(疑)로 치러졌다. 합격자는 2월 24일에 발표되었는데 권상일은 불합격이었고, 그가 작성한 시권은 다음 달인 3월 2일에 전달되었다. 권상일은 같은 해 11월 순흥에서 치러진 향시와 2년 뒤인 1704년(숙종 30) 8월에 치러진 향시에 모두 불합격하다가, 1707년(숙종 33) 8월 창녕에서 치러진 향시에서 비로소 합격하였다. 그가 합격했던 1707년 8월의 과정을 잠깐 따라가 보도록 하겠다. 권상일은 그해 시험 소식을 8월 5일에 접하였다. 경상우도는 의령에서, 경상좌도는 창녕에서 치러진다는 것이었다. 권상일은 이때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왕래하는 과정에서 드는 경비를 걱정하였다. “올벼는 다 떨어지고 늦벼는 아직 익지 않아” 먼길에 양식이 고민이었다. 8월 19일 집을 나서서 선산→성주→현풍 등을 거쳐 창녕에 도착하였다. 창녕을 가는 과정에서 선산에서는 길재(吉再)의 “찌를 듯한 높은 절개”를 상상하기도 하였다. 8월 27일에 시와 부를, 8월 29일에는 의(疑)와 의(義) 시험을 보았다. 이때 권상일은 부친과 함께 응시하였는데, 부친은 마침 시관으로 파견된 종조부와 상피(相避)해야 했기에 결국 시험을 보지 못하였다. 권상일은 시험을 치른 뒤인 9월 6일에 집으로 돌아왔으며 9월 9일 종장(終場)에서 2등 세 번째로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향시에 합격한 권상일은 다음 해인 2월 한양에서 치러진 회시에 응시하였다. 향시에 합격한 뒤 권상일은 공부에 여념이 없었다. 문을 닫고 공부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전년 연말부터 마을에 퍼진 전염병 때문에 피접(避接)을 다니느라 공부를 제대로 못 한 것을 걱정하기도 하였다. 1708년(숙종 34) 2월 13일 권상일은 한양으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문경의 초곡(草谷)에서 1박을 하고 새재(鳥嶺)을 넘어 충주의 달천을 지나서 가흥창→이천(利川)→광주 경안역→송파 나루를 거쳐 2월 18일 서울의 반촌(泮村)에 도착하였다. 2월 28일에 시험이 치러졌는데, 의(疑)와 의(義)였다. 같은 날 치러진 시험에 80살의 황창술(黃昌述)이 참가한 것을 보면, 과거에 대한 열망을 느낄 수 있다. 권상일은 시험을 치르고 바로 다음 날 귀가하기 위해 서울을 나왔다. 아마도 서울에 머물면서 지출되는 경비에 상당한 부담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낙향하던 중인 3월 1일에 방목(榜目)이 발표되었는데, 본인을 포함해 함께 낙향하던 일행 모두가 낙방하였다. 하향하면서는 일행들과 함께 주머니를 털어 술을 사서 큰 잔으로 한 잔씩 들이켜고 헤어졌다. 과거에 대한 권상일의 도전은 계속되었다. 2년 뒤인 1710년(숙종 36)에 뜻하지 않게 과거가 시행되었다. 병환으로 고생하던 국왕 숙종의 회복을 종묘(宗廟)에 고유하고 사면령을 내린 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부정기적으로 치러지는 증광시가 열린 것이다. 증광감시(增廣監試)는 3월 20일에, 동당시(東堂試)는 4월 11일에 시행하도록 결정되었다. 여기서 증광감시란 증광시로 치러지는 생원·진사시를 말하며, 동당시는 문과의 초시인 향시를 말한다. 3월 20일에 치러지는 감시는, 경상우도는 안음(安陰, 뒤에 안의(安義)로 개칭됨)에서, 경상좌도는 청도(淸道)에서 열렸다. 3월에 치러지는 증광감시 때 권상일은 청도에서 시험을 치렀으나 낙방하였다. 권상일은 이어지는 4월의 동당시에도 응시하였다. 경상우도의 동당시는 산음(山陰, 후에 산청)에서, 경상좌도는 안동(安東)에서 치러졌다. 권상일은 4월 8일 우도의 시험 장소인 산음으로 향했다. 이어 4월 11일 산음에 당도하였다. 4월 13일 부·표(表)로 답안을 작성하였고, 4월 15일에는 책문(策問)을 제출하였다. 책문의 주제는 “농시(農時)를 어기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묻는다(問不違農時)”였으며, 답안의 작성은 밤 초경(初更, 저녁 7시-9시 사이)까지 이어졌다. 산음에 있으면서 과거시험이 없는 시간에는 지역의 주요 명소를 방문하였는데, 환아정(換鵞亭)에서 석봉 한호(韓濩)가 쓴 웅건하고 호방한 필력의 편액을 감상하였다. 권상일은 4월 16일 귀갓길에 올랐으며, 4월 22일에 시험 결과인 방목이 발표되었는데, 기다리던 소식을 접하였다. 합격 소식을 들은 것이다. 향시에 합격한 권상일은 다음 달인 5월 서울에서 열리는 증광시 회시에 응시했다. 역시 과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걱정이 있었다. “서울 갈 날이 다가오나 여러 차례의 과거 걸음으로 집에 아무것도 없어서” 답답하였다. 경비 마련을 위해 서울댁 인장(仁庄)의 곡식을 꾸었다. 권상일은 5월 16일 집을 나섰는데, 서울로 들어가는 여정은 앞서 1708년 2월 때와 같았다. 권상일은 5월 20일 도성에 도착해서는 반촌에 거처를 마련하였다. 과거 시험은 5월 28일에 치러지는데, 권상일은 본 시험에 앞서 5월 26일 도성 내 서학(西學)에 가서 전례강(典禮講)을 치렀다. 전례강은 『경국대전』과 『가례』를 암송하여 뜻을 풀이하는 고강이다. 전례강을 통과하여야 응시자를 등록하는 녹명(錄名) 절차를 거칠 수 있었다. 권상일은 5월 28일 부·표의 답안지를 작성하였고, 5월 30일에 책문 답안지를 제출했다. 책문 답안지를 제출하기 전날인 5월 29일에는 과거 시험장에서 답안지를 베낀 부분이 의심스러운 자의 시권이 적발되어 하인을 옥에 가두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6월 3일 고향으로 가기 위해 길을 나서 왕심촌(枉尋村, 즉 현재의 왕십리)에 이르렀는데, 방목이 발표되었다. 권상일은 합격 소식을 들었는데, 성적은 3등 16인이었다. 권상일은 합격 소식을 듣고는 최종 시험 단계인 전시(殿試)를 보기 위해 발걸음을 돌려 서울로 들어갔다. 서울로 돌아온 권상일은 분주한 일상을 보냈다. 합격을 축하하기 위해 지인이나 관직자의 방문이 빈번해졌다. 또한 현직 인사들 다수가 찾아왔는데, 수찬(修撰) 권세항, 장령 이웅징, 장령 김시경, 관찰사 홍근하 등이 찾아왔다. 6월 8일 증광시의 마지막 단계인 전시가 경덕궁(慶德宮, 후일의 경희궁(慶熙宮))에서 열렸다. 전시는 국왕이 친림(親臨)하여 회시 합격자의 순위를 정하는 시험으로, 국가 의례인 문과전시의(文科殿試儀)에 준해서 시행되었다. 권상일이 참여한 전시의 시험 과목은 표로, 권상일은 오전에 답안을 마무리해 제출하고 나왔다. 이날 시험에 응시한 인원은 회시 합격자와 함께 직부전시(直赴殿試)의 특혜를 받은 인원과 진시(陳試) 인원 9명이 추가되었다. 진시란 초시에 합격하여 회시에 응해야 했으나 상(喪)이나 병 등으로 인해 여의치 않자 예조(禮曹)에 청원하여 다음 번 회시에 응한 인원을 말한다. 당일에 권상일의 성적이 발표되었는데, 병과(丙科) 20등이었다. 과거 평가는 갑과(甲科)·을과(乙科)·병과(丙科) 3단계로 평가하는데, 정규 시험인 문과 식년시의 경우 합격자는 갑과 3명, 을과 7명, 병과 23명이었다. 【그림 2】 『국조방목』,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奎貴11655, https://kyudb.snu.ac.kr/ 급제 소식이 전해진 뒤 관원이나 지인들은 안부를 전하거나 직접 찾아와 합격을 축하하였다. 6월 15일에는 궁궐에서 창방(唱榜)이 진행되었다. 창방은 방방(放榜)이라고도 하는데, 과거 급제자에게 합격 증서를 나누어 주는 의식이다. 합격 증서는, 문·무과 급제자에게는 홍패(紅牌)를, 생원·진사시 입격자에게는 백패(白牌)를 나누어 주었다. 창방은 궁궐의 정전(正殿)에서 문무백관과 종친 등이 도열한 상태에서 진행되는데, 성적순대로 모두가 입장하면 국왕에게 사배(四拜)를 하고 나왔다. 창방 의식에서는 합격 증서와 함께 어사화(御賜花), 술과 음악, 일산(日傘) 등도 하사하였다. 권상일은 창방에 참여했다가, 6월 17일 성균관에 나아가서는 알성(謁聖)을 행한 뒤에 귀향하기 위해 서울을 나왔다. 고향에 내려온 뒤인 7월 4일 아침에 도문연(到門宴)이 열렸다. 도문연이란 과거에 합격을 축하하기 위해 베푸는 잔치로, “원근의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
조선 후기 문신 권상일의 관직 생활- 기록자료
- 정치
5월 19일 매악서당(梅岳書堂)에서 여러 사람들이 『상산지』를 수정하는 작업이 진행되었으며, 각 동리의 내용은 동리에서 수정하도록 하여 다음 달인 6월 4일에는 백화(白華)·봉성(鳳城)·지천(智川) 등 서당 세 곳에서 수정 내용을 보내오기도 하였다. 일정 정도 수정이 진행된 뒤에는 상주목사와 협의가 진행되었는데, 상주목사는 권상일이 주도한 『상산지』 속집(續集)의 수정 내용에 불만이 있었던 듯 간략하게 하기를 요청하였다. 권상일의 『상산지』 수정 작업은 대략 5년여 정도가 경과한 듯하고, 마침내 1754년 6월 20일 『상산지』의 본집과 속집도 한 책으로 합본하였다. 1738년(영조 14) 12월 울산부사는 6년과(年窠) 수령이지만 고과에서 3차례 중(中)을 받았기에 그대로 둘 수 없다는 이비(吏批)의 요청으로 파출되었다. 더구나 이때 권상일의 나이가 이미 60세였다. 1740년 5월 26일 장령직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해유(解由)가 아직 나오지 않았다고 하여 개차되었다. 해유란 임기가 다 차서 직임이 해면된 것을 ‘해(解)’라 하고, 그 근무 성적을 매기는 것을 ‘유(由)’라 일컫는 말이다. 또한 해유는 관리가 교체될 때 후임자에게 인계하는 사무와 관리하였던 물건을 자세히 기록하여 일정한 절차를 거쳐 심사한 후 그 책임을 면하는 행정절차를 말한다. 당시까지 권상일에 대한 해유 절차 나오지 않았기에 이어지는 관직 제수가 철회되어 개차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권상일에 대한 관직의 제수와 체차, 개차 등이 진행되었다. 권상일은 부사과와 부호군을 거쳐 1741년(영조 17) 5월 4일 장령에 다시 제수되었다. 그러나 지방에 있다는 이유로 며칠 못가 다시 부호군에 제수되었다가 6월 2일에 또다시 장령에 제수되었다. 이때도 권상일은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급기야 6월 14일에 국왕이 참석하는 친국(親鞫) 시에 참여하지 않아 다시 개차되었다. 1741년 11월 17일에 세자시강원 필선에 제수되었으나, 10여 일도 지나지 않아 개차되어 부호군에 제수되었다. 한동안 관직에서 떨어져 지내던 권상일에게 1743년(영조 19) 5월 2일 종부시정을 거쳐 7월 2일에 장령이 제수되었으나 지방에 있다고 하여 체차되었다. 9월 15일에 또다시 장령에 제수되었다가 지방에 있다고 하여 체차된 뒤 부호군에 제수되었다. 이어 1744년(영조 20) 1월 5일에 다시 장령을 거쳐 1월 23일 부호군에 제수되었다가 1745년(영조 21) 3월 5일 봉상시정(奉常寺正)에 제수되었다가 신병(身病)을 이유로 5월 14일에 체차되었다. 그러나 봉상시정의 제수는 권상일의 관직 생활 중에 의미 있는 단계이다. 봉상시정과 승문원판교(承文院判校)·통례원통례(通禮院通禮)·훈련원정(訓鍊院正)은, 임기가 차면 당상관(堂上官)으로 올리는 것이 상례로서, 차후 권상일이 당상관으로 올라가게 되는 과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권상일은 1745년 8월에 도남서원의 재임에 선출되었다. 재임이 되면 서원의 운영에 참여하게 되는데, 마침 권상일이 재임으로 선출될 때 서원의 심원록(尋院錄)에 문제가 있었다. 1745년 8월 28일 서원 심원록에 어떤 과객(過客)이 성이한(成爾漢)·김남기(金南紀)에게 검은 먹으로 권점을 쳤던 것이다. 이는 불만의 표시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향교에서 통문을 내어 그 과객의 성명을 적발하여 보고해 줄 것을 청하였으며, 성우주(成于柱)도 통문을 내어 수임(首任)과 부임(副任)이 이 일 때문에 일전에 모두 모였는데, 원장이 성이한에게 편지를 써 답장을 받았으므로 미봉의 경지에는 이르게 될 것 같다고 했다. 이어 1747년(영조 23) 7월에는 도남서원의 원장이 사직단자를 보내왔다. 앞서 서원 모임 때 소를 도살한 일 때문에 상주목사가 담당 아전(色吏)과 고지기(庫直)를 잡아다 가둔 지가 이미 여러 날이고, 또 다른 물의가 있어 책임을 지고 사직을 청한 것이었다. 이에 권상일은 제사(題辭)를 써서 좌기(坐起)하기를 권하였다고 한다. 이 와중인 1745년 9월에 다시 세자시강원 필선에 제수되었다. 수망으로서 낙점을 받았는데, 유지가 내려와 “기한을 넘기면 의금부의 심문을 삼사와 동일하게 적용한다”고 하였기 때문에 세자시강원 하인이 밤을 잊고 달려왔다. 권상일은 먼저 선문(先文)을 보내 일정을 통보했으나 도착하기 전인 10월 5일 헌납에 제수되었다. 마침 서울로 올라가는 중이어서 그랬는지 10월 6일에 바로 대청에 나아가 사은숙배하고, 사간 이위보(李渭輔)가 들어와 상회례(相會禮)를 행하였다. 남북으로 서서 서로 읍(揖)을 하는 행위이다. 권상일은 헌납으로 재직 시에 마침 관직에 나와 있던 사촌 권상룡(權相龍)에게 동궁, 즉 우리가 흔히 사도세자라 칭하는 인물과 관련된 일화를 전해들었다. 흥미로운 주제이기에 아래에서 제시한다. 권상룡이 전해 주는 이야기는 소대(召對) 때의 일화이다. 동궁이 국왕을 탑전에 모시고 앉았는데 사립(絲笠)을 쓰고 청포(靑袍)를 입었으며, 기품이 의젓하여 16-17세 된 아이와 같았다고 한다. 이때 『사략』의 ‘주위상저장(紂爲象箸章)’을 강하였기 때문에 국왕이 “상아 젓가락과 옥잔이 너의 마음속에 갖고 싶은 것인가, 갖고 싶지 않은 것인가?”라고 하였다. 그런데 사도세자가 한참 동안 대답을 앉자 국왕이 경연관에게 “이는 필시 그의 마음이 갖고 싶기도 하면서 갖고 싶지 않기도 한, 의(義)와 리(利)가 서로 갈등을 일으켜 아직 분간이 되지 않기 때문에 대답을 않는 것이다. 만약 마음속으로 갖고 싶으면서 갖고 싶지 않다고 나에게 고한다면 이는 제 아비를 속이는 것이어서 제가 속이지 않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것이다”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권상일이 헌납에 제수된 다음 날인 10월 6일 마침 국왕이 종묘에 거둥하였다. 이 자리에 권상일도 참여해야만 하였다. 사간원 서리가 엄(嚴)할 시각이 가까워 왔다고 고하였기 때문에 권상일은 명정전 문밖 헐청(歇廳)으로 옮겨 앉아 사간 이위보·교리 윤득재(尹得載)와 함께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엄(嚴)이란 준비 단계를 알리는 시점이다. 이어서 내반(內班)으로 들어갔는데, 동반 수시신(首侍臣)은 사간 이위보와 교리 윤득재였으며, 서반 수시신은 권상일 한 사람이었다. 인의(引儀) 두 사람은 맨 뒤에 따라와서 떨어져 앉았는데, 이는 시신(侍臣)을 인접(引接)하기 위해서였다. 이윽고 국왕이 연(輦)에 오르고, 연 앞에 양쪽으로 나뉘어 걸어서 인도하여 건양령(建陽嶺)을 넘고 돈화문(敦化門) 밖에 이르러 노차(路次)에 마주 섰다. ‘시신상마(侍臣上馬, 시신은 말에 오르시오)’의 명령이 내려진 뒤에 비로소 말에 올랐다. 종묘 문밖에 이르러 백관들은 모두 말에서 내려 걸어서 들어가고, 시신은 ‘하마(下馬, 말에서 내리시오)’의 명령을 기다렸다가 비로소 내려 걸어서 인도하였다. 이때 권상일은 묘정(廟廷) 동문 밖에 이르러 반열에 앉았다. 국왕이 재실에 들어간 뒤 약방(藥房)·승정원·옥당이 문안하니 답하기를 “알았다”고 하였다. 두어 식경이 지난 뒤에 국왕이 친히 종묘와 영녕전(永寧殿)을 봉심하였다. 오후에 성생례(省牲禮)를 마치고 나서는 국왕이 재실로 들어가고, 백관들은 각자 임시 막사로 갔다. 친제의 정시(正時)는 4경 1점이었고, 개문(開門)은 2경(二更) 1점이었다. 권상일은 당일 초경에 선잠이 들었다가 이경 말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세수하고 관복을 갖추어 외반열로 나아간 뒤 묘정으로 들어갔다. 이때 권상일은 권상룡과 함께 11실(十一室)의 집준재랑(執樽齋郞)이라는 소임을 맡았는데, 종묘의 11실이 숙종의 신실(神室)이었던 듯 감회에 젖어들기도 하였다. 날이 밝으려고 할 때 권상일은 비로소 마치고 임시 막사로 돌아왔다. 대가의 환궁 시간은 초엄(初嚴)은 진초(辰初) 초각(初刻), 이엄(二嚴)은 진초 1각, 삼엄(三嚴)은 진초 2각이었다. 이때 권상일은 시신으로서 앞에서 인도하였다. 명정전 문밖에 이르러 국왕이 한참 동안 연에 있었고, 풍악이 크게 울렸다. 국왕이 표신(標信)을 발부하여 선전관을 대궐 문밖으로 보내어 군문(軍門)에 진을 치도록 하였다. 복명(復命)한 뒤에 국왕이 침전(寢殿)으로 들어가고, 권상일은 사간 이위보와 함께 각자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며칠 뒤 권상일은 신병을 이유로 체직을 요청하는 상소를 제출했으나 승정원에서는 접수하지 않고 도로 내주었다. 권상일은 10월 8일 이른 새벽에 출사하라는 패초(牌招)를 받고 대궐에 나아갔으나, 정작 국왕이 참석하는 친국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며칠 후 파직되었다. 권상일은 사촌 권상룡에게 종과 말을 빌려 고향으로 돌아갔다. 몇 개월 뒤인 1746년(영조 22) 4월 부사직에 제수되었다가 5월 2일에 말망인데도 헌납에 제수되자 상주 지역의 향리가 유지를 가지고 왔으며, 사간원의 서리가 고목과 조보(朝報)·정목(政目)·소장(疏章)을 가지고 왔다. 9월 3일 성균관 사성(司成)에 제수되었는데, 이날의 정사에서 홍주목사(洪州牧使)의 부망에 들었고, 또 보덕(輔德)의 말망에 들었으며, 또 사성의 수망에 들어 낙점을 받았던 것이다. 이후에도 권상일은 집의와 사간 등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출사하지 않았다. -
조선 후기 어느 양반가의 무관 진출기- 기록자료
- 정치
르치는 교육기관은 서당, 향교, 사학(四學), 성균관 등이 있어서 유학자로서 소양을 닦거나, 생원진사시 또는 문과를 준비할 수 있었다. 반면에 무관을 위한 교육기관은 전무했다. 선조 대에 무학(武學)을 정비했으나 이마저도 얼마 뒤에 유명무실해져서 실효성이 없었다. 무관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이 미비하다 보니 어린 시절부터 무관이 되겠다는 꿈이나 정체성을 가질 기회를 얻기가 쉽지 않았다. 끝으로, 문관과 무관의 인적 관리도 공정했다고 볼 수 없다. 조선왕조에서 문과와 무과의 시행은 문과가 빨랐다. 문과는 1393년(태조 2)부터 시행했으며 무과는 1402년(태종 2)부터 시행했다. 무과를 시행한 뒤로는 ‘대거(對擧)’라 하여 서로 짝을 이뤄 문과와 무과를 동시에 치렀다. 문·무의 균형을 중시하여 문과 무가 수레의 두 바퀴와 같다고 여긴 결과이다. 하지만 급제자의 명부인 방목(榜目)의 간행은 달랐다. 문과 급제자의 경우 급제자 전체를 집성한 종합방목을 몇 차례씩 간행했으나, 무과 급제자 전체를 집성한 종합방목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국가적으로 무관에 대한 인적 관리가 문관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허술했다는 의미다. -
산의 인문학, 지리산을 유람하다
- 기록자료
- 문화
서원(書院)이나 서당(書堂)보다 사찰 수가 훨씬 많았다는 연구 성과가 보고되기도 하였다. 그의 문집은 19세기 유교적 성향이 짙어진 불교의 모습을 선명하게 보여 준다. 예컨대 『경암집』의 「오효자전(吳孝子傳)」·「박열부전(朴烈婦傳)」을 통해 유교 사회의 불합리한 폐쇄성을 비판하고 있다. 「박열부전」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열녀함양박씨전(烈女咸陽朴氏傳)」과 동일 인물을 다루고 있어, 유가와 불가의 시선 차이에 주목해 볼 만하다. 또한, 「논한자설(論韓子說)」은 조선조 유자들이 추앙하는 당나라 문장가 한유(韓愈)를 비판하였고, 심지어 맹자(孟子)까지 비판하는 논지이다. 조선 후기 불교에 대한 인식이 완화되었다 하더라도 과연 이런 의식이 가능했을까도 싶다. 응윤은 특히 유교 문헌을 두루 섭렵하고 유자들과 폭넓게 교류하며 존숭을 받았는데, 그 과정에서 형성된 자신감이 드러난 것인가도 생각된다. -
조선 후기 출세의 사다리에 오르려는 이들- 기록자료
- 정치
강학에 치중하는 서당을 건립하고 이황의 가르침에 따라 심학을 중시하였다. 그리고 이황과 이황의 문인이 건립한 서당이나 서원에서는 제술 공부를 학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김령 역시 제술에 대해서는 독학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그는 제술에 능하였다. 과거에 입격하지도 않은 김령에게 월과(月課)를 부탁했던 관원들이 있었는데, 한림 배용길(裵龍吉)과 영덕현령 권수지(權守之)가 그들이다(『계암일록』 1603년 12월 24일, 1605년 3월 7일). 그는 생원진사시 향시에서 진사시에 두 차례나 입격하여 제술 능력을 인정받았다. 1604년(선조 37) 창녕에서 시행한 증광 생원진사시 향시에서 진사 5등으로 입격하였고, 1605년(선조 38) 의흥에서 시행한 식년 생원진사시 향시에서는 진사 1등으로 입격하였다(『계암일록』 1604년 12월 6일, 1605년 8월 18일). 그의 부친을 비롯해서 선대에서 지속적으로 생원이 배출되었던 것과는 달리 그는 진사시 초시에 입격하였다. -
서당, 모든 이의 공부방
- 기록자료
- 문화
18-19세기, 서당의 황금기 다변화되는 서당의 교육내용 서당의 강독과 계절학습 서당 교육은 대개 강독(講讀), 제술(製述), 습자(習字)라는 세 가지 활동으로 이루어졌다. 이 가운데 교재를 읽고 이해하며 암송하는 강독이 가장 중심이 되었다. 제술(시나 문장 작성)과 습자(글씨 쓰기) 역시 중요한 활동이었지만, 강독만큼은 아니었다. 강독의 목표는 교재를 반복해서 암송하게 하여 그 의미가 환하게 이해되는 경지, 이른바 ‘문리(文理)가 트이는 경지’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었다. 스승이 학생의 실력과 단계에 따라 공부할 범위를 정한 뒤 이를 읽고 해석해 주면, 학생은 자기 자리로 돌아가 반복해서 읽고 암송하였다. 이때 학생은 책을 앞에 펴고 정좌를 한 뒤 몸을 좌우로 흔들거나 상하로 흔들면서 운율과 박자에 맞추어 큰 소리로 읽는 성독(聲讀)을 하였다. 성독을 할 때에는 옆에 서산(書算)을 놓고 읽은 횟수를 표시하였는데, 일반적으로 100독씩 하였다. 성독의 과정을 묘사한 흥미로운 시가 전해지고 있다. 「서산시(書算詩)」라는 이름의 이 시는 다음과 같다. 한 번 읽으면 꽃 한 송이가 피어나고 / 一讀一花開 두 번 읽으면 꽃 두 송이가 피어나며 / 二讀二花開 열 번 읽으면 꽃 열 송이가 피어나고 / 十讀十花開 백 번 읽으면 꽃 백 송이가 피어나네. / 百讀百花開 읽으면 읽을수록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니 / 讀讀花爭發 봄 햇살이 책 가운데 가득하다네. / 春光滿書中 책 속에 꽃을 피우는 이 과정이 끝나면 스승은 학생의 학습 정도를 평가하였다. 평가는 강의(講儀), 지강(指講), 강심(講尋) 등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대개 ‘강(講)’이라 칭해졌다. 이는 학생이 공부한 내용을 소리 높여 읽거나 암송하고 그 의미에 대해 문답하는 방식이었다. 이 평가는 교재를 보면서 읽는 면강(面講)과 교재를 보지 않고 암송하는 배강(背講)으로 나뉘었다. 그리고 그 등급은 대개 순(純)·통(通)·조(粗)·약(略)·불(不)의 다섯 등급이나 순통(純通)·순조(純粗)·순략(純略)·불통(不通)의 네 등급으로 매겨졌다. ‘불’이나 ‘불통’의 등급을 맞는 경우 새로운 단계로 나아갈 수 없었다. 【그림 13】 서산, 천안박물관 소장 따라서 서당의 강독은 일종의 완전학습이었다. 또 학생 각자의 수준에 맞는 학습 진도, 평가를 한다는 점에서 개별학습이기도 하였다. 학생의 학습 내용을 날마다 평가하는 일강(日講)이 주를 이루었지만, 때때로 열흘마다 하는 순강(旬講), 보름마다 하는 망강(望講), 달마다 하는 월강(月講)도 이루어졌다. 강독 교재 강독 교재는 서당의 수준과 성격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가장 기초적인 문자 해독 교재에서부터 역사와 성리학의 형이상학·심성론 등에 관한 교재까지 다양하였다. 이상수(李象秀, 1820-1882)는 당시 향촌 서당에서 시행되는 잘못된 교육법에 대해 지적하였는데,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서당에서 강독 교재들이 어떠한 순서를 따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내가 보니, 향촌의 자제들이 어려서부터 서당에 다니기 시작하여 스무 살이 되도록 문리(文理)가 여전히 어둡고, 경전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열에 여덟이나 아홉이다. … 최근에 그 문제의 원인을 알게 되었다. 이는 자질이 부족한 훈장들이 학생들을 방임한 채 더 이상의 노력을 하도록 만들지 않고, 가르치는 준칙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시골 서당에서 널리 시행되는 방법은 이러하다. 어린아이가 처음에 주흥사(周興嗣)의 『천자문』과 박세무(朴世茂)의 『동몽선습』부터 배우게 한다. 이때에는, ‘음을 읽기만 하고 해석하지 않는다’. 이어서 증선지(曾先之)의 『사략(史略)』이나 강지(江贄)의 『통감절요(通鑑節要)』를 배우게 한다. 이때부터 비로소 ‘글의 의미를 해석(訓釋)하기 시작한다’. 나이가 점점 많아지고 이해력이 나아지더라도, 서당의 훈장이 항상 해석해 줄 뿐, 스스로 해석하게 하지는 않는다. 나이가 15~16세가 되어도 마찬가지이다. … 한 번 훈장이 해석을 해주면, 그제야 해석하고 읽을 수 있게 된, 보는 사람은 ‘문리가 거의 트였다’고 말한다. … 그래서 경전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먼저 『맹자』를 『맹자집주(孟子集註)』를 가지고 배우는데, 처음에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훈장이 해석해 준다. 하지만 스스로 해석하지 않으니 한 권을 다 배워도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 다음에 『논어』를 배우는데, 훈장이 해석할 뿐 스스로 해석하지 않으니, 한 권을 다 배워도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모두 배워도 전과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 -『어당집(峿堂集)』 여기서 이상수는 스승의 해석에만 의존하고 스스로 학습하는 능력을 기르지 못하게 하는 훈장의 교수법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다시 말해, 자기주도적 학습 능력을 전혀 키워주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이상수는 학생의 능력에 맞는 교재를 선택하고, 적절한 학습량을 제시하여 글의 뜻을 스스로 깨우치는 학습을 통해 문리를 터득하게 하며, 암송과 반복 학습을 통해 완전학습을 시행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제 서당의 강독 교재를 살펴보면, 이상수는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고 있다. 첫째, ‘음을 읽기만 하고 해석하지 않는 단계의 교재’로 『천자문』이나 『동몽선습』이다. 이는 서당교육의 가장 기초적인 학습교재로, 문자 학습 단계의 교육이다. 우리말과 한문이 다르기 때문에 한자를 하나씩 학습하는 과정이 가장 우선되어야 했다. 둘째, ‘해석 단계의 교재’로 『사략』과 『통감절요』이다. 이 두 책은 모두 역사책이나, 실제로는 역사적 내용을 학습하기보다는 주로 문리를 깨우치기 위한 교재로 사용되었다. 문리가 어느 정도 트이면, 마지막 단계인 ‘경학(經學) 단계의 교재’로 넘어간다. 이는 『논어』, 『맹자』를 비롯한 『사서삼경(四書三經)』으로, 유교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담은 경전들이다. ◌ 문자 학습 단계의 교재: 『천자문(千字文)』, 『동몽선습(童蒙先習)』, 『훈몽자회(訓蒙字會)』, 『유합(類合)』, 『신증유합(新增類合)』, 『아학편(兒學編)』, 『추구(推句)』, 『자류주해(字類註解)』, 『정몽유어(正蒙類語)』, 『몽학이천자(蒙學二千字)』, 『통학경편(通學徑編)』 등 ◌ 해석 단계의 교재: 『사략(史略)』, 『통감절요(通鑑節要)』, 『명심보감(明心寶鑑)』, 『격몽요결(擊蒙要訣)』, 『계몽편(啓蒙篇)』, 『양정편(養正篇)』, 『경민편(警民編)』,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해동속소학(海東續小學)』 등 ◌ 경학 단계의 교재: 『소학(小學)』,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 『시경(詩經)』, 『서경(書經)』, 『주역(周易)』, 『춘추(春秋)』, 『예기(禮記)』, 『근사록(近思錄)』, 『심경(心經)』, 『이정전서(二程全書)』, 『주자대전(朱子大全)』, 『성리대전(性理大全)』,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역대정사(歷代正史)』, 『동국제사(東國諸史)』 등 물론 서당에서 이 모든 책을 다 배울 수는 없었다. 상황에 따라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교재들을 선별하여 학습하였다. 경전을 가르치고 과거시험 준비까지 아우르는 경학서당(經學書堂)이나 이름난 유학자들과 제자들과 함께 했던 ‘도학서당(道學書堂)’은 경학 단계의 교재로 직접 들어갔다. 반면, 가장 일반적인 서당 유형인 학문에 입문하는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동몽서당’에서는 문자학습의 첫 단계부터 차근차근 밟아나갔다. 『천자문』과 『동몽선습』으로 시작하여, 해석 단계의 교재 두세 개를 선별하여 학습한 뒤, 『소학』에서 마무리되었다. 결국 동몽서당의 최종목표는 『소학』에 대한 이해와 내면화였다. 첫 문자학습단계에서 배우는 『동몽선습』이 『소학』에 앞서 배워야 할 책이라는 점을 앞서 논의한 바 있다. 따라서 동몽서당의 교육은 그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소학』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던 것이다. 이는 앞서 17세기 서당에 대해 논의했던 바와 같이, 당시 사림들이 개념화한 서당에 대한 인식이 지속되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서당은 ‘『소학』을 기반으로 아동들이 지켜야 할 행동 준칙을 가르치고 체득시키는 교육기관’이라는 인식이 지속되었 다. 『천자문』과 『아학편』 서당 첫 강독 교재인 『천자문』은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의 스테디셀러이자 베스트셀러였다. 서당에서 가장 널리 보급된 『천자문』은 선조의 어명을 받아 당대의 명필이었던 한호(韓濩, 1543-1605)가 쓴 『석봉천자문(石峰千字文)』이다. 이 책은 명필에 의해 쓰였기 때문에, 서당에서 강독 교재이자 글씨를 쓰는 것을 배우는 습자 교본으로도 사용되었다. 또 각 글자마다 뜻과 음을 한글로 새겨, 한자 입문서로 널리 이용될 수 있었다. 【그림 14】 『천자문』,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천자문』은 운율에 따라 암송하기에 적합한 책이었다. 시작하는 ‘천지현황(天地玄黃)’부터 마지막 ‘언재호야(焉哉乎也)’까지 총 250구(句)의 운문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8자마다 압운(押韻)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압운이란 비슷한 음절의 글자를 일정한 곳에 규칙적으로 반복하여 운율을 조성하는 방식이다. 요즘 음악의 랩(Rap)에서 라임(Rhyme)과 유사한 개념이다. 처음 12구(句)만 보더라도 이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천지현황(天地玄黃) 우주홍황(宇宙洪荒) 일월영측(日月盈昃) 진수열장(辰宿列張) 한래서왕(寒來暑往) 추수동장(秋收冬藏) 윤여성세(閏餘成歲) 율려조양(律呂調陽) 운등치우(雲騰致雨) 노결위상(露結爲霜) 금생여수(金生麗水) 옥출곤강(玉出崑岡) 8자마다 끝 글자의 음을 살펴보면, 각각 ‘황’, ‘장’, ‘장’, ‘양’, ‘상’, ‘강’으로 모두 발음이 비슷하다. 다른 말로, 운(韻)이 같다. ‘운’이란 글자의 발음에서 초성(初聲)을 뺀 중성(中聲)과 종성(終聲)을 합쳐 말한 것이다. 앞의 여섯 글자 모두 중성이 ‘아’이고 종성이 ‘ㆁ’이기에, 모두 운이 같다. 이와 같이 『천자문』은 ‘운’을 규칙적으로 반복함으로써 리듬과 박자를 지니게 하였다. 운율에 맞추어 몸을 움직이면서 소리 내어 읽거나 암송할 때에 단조롭지 않게 하는 점에서, 『천자문』은 ‘한자의 세계’에 입문하는 데 최고의 교재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천자문』은 결코 만만한 내용의 책이 아니었다. 각 구절 모두 『사서오경』을 비롯한 여러 동양 고전에서 발췌하여 4자씩 1구(句)를 이루는 운율시 형태로 압축한 것으로, 중국의 자연·철학·역사·인물·인륜 등에 관한 수많은 논의를 총동원한 대서사시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천자문』은 좋은 아동용 입문교재라고는 볼 수 없다. 정약용도 “『천자문』은 한 때 장난으로 지은 것이며, 어린이를 가르치는 책이 아니기에 어린이에게 가르쳐서는 안된다”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천자문』은 여러 고전에서 발췌되었기 때문에 자주 사용되는 한자가 아니며, 글자의 난이도도 조절되지 않았다. 또, 4자씩 1구를 이루는 운율시 형식으로 압운을 맞춰야 했기에 문장 배열도 체계가 없다. 무엇보다 문장 자체도 상당히 난해하다. 그 첫 구절인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라는 “천지현황(天地玄黃)”만 보더라도, 학문에 입문하는 아이의 입장에서는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이 구절은 『주역』에서 가져온 것으로, 심도 깊은 동양 철학의 입장이 담겨 있다. 여기서 ‘하늘이 검다’는 것은 눈으로 보이는 하늘의 색이 아니라, ‘현묘(玄妙)한 하늘의 본바탕’을 추상적으로 말한다. 그리고 ‘땅이 누렇다’는 것은 목(木)·화(火)·토(土)·금(金)·수(水)로 우주를 설명하는 오행론(五行論)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토(土)는 황색에 해당하기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이렇기에, 서당에서 아이들이 그 본래 의미를 알지 못하고, 무의미하게 철자를 읽고 외우는 것에 그치곤 했다. 심지어 정약용의 표현처럼 ‘하늘 천(天), 땅 지(地), 감을 현(玄), 누를 황(黃)’이라고 배웠기에, ‘하늘은 감거나 묶고(bind), 땅은 누른다(press)’는 식으로 잘못 이해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의 지식인들은 『천자문』을 대체할 여러 입문서를 제작하였다. 대표적으로, 최세진(崔世珍, 1468~1542)의 『훈몽자회(訓蒙字會)』, 『유합(類合)』,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의 『신증유합(新增類合)』, 정약용의 『아학편(兒學編)』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아학편』은 현대의 교육학이나 언어학의 입장에서 보아도 과학적이면서도 체계적인 입문교재이다. 정약용은 기존의 한자 입문교재들의 문제점을 극복하고자, 상·하 각 권에 천 자씩 하여 총 이천 자의 『아학편』을 제작했다. 상권은 유형자(有形字), 즉 구체명사로 구성되어 있고, 하권에는 무형자(無形字), 즉 추상명사, 대명사, 형용사, 동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아동이 감각기관으로 경험하거나 관찰할 수 있는 유형자에 관한 개념을 먼저 학습한 후, 주관적인 판단이나 이해가 요구되는 무형자에 관한 개념을 학습하도록 했다. 추상적인 개념보다 실제 경험과 연결된 개념이 더 빠르게 학습된다는 원리에 따른 것이다. 예를 들어, 인간에 관한 이해를 돕고자 하는 데 있어, 상권에서는 이목(耳目)·구비(口鼻)·수족(手足)·두뇌(頭腦) 등의 글자를 통해 신체와 감각기관에 대해 설명하고, 하권에서는 인의(仁義)·예지(禮智)·효제(孝悌)·충신(忠信) 등의 글자를 통해 정신적 덕목과 개념을 배우도록 했다. 이러한 『아학편』의 제작 원리는 근본적으로 ‘촉류방통법(觸類旁通法)’에 기반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정약용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체로 문자를 가르침에 있어서는 ‘맑을 청(淸)’ 자로 ‘흐릴 탁(濁)’ 자를 깨우치고, ‘가까울 근(近)’ 자로 ‘멀 원(遠)’ 자를 깨우치며, ‘가벼울 경(輕)’ 자로 ‘무거울 중(重)’ 자를 깨우치고, ‘얕을 천(淺)’ 자로 ‘깊을 심(深)’ 자를 깨우치도록 해야 한다. 두 글자씩 들어서 서로 드러내면 두 가지 의미가 모두 통하게 되지만, 한 글자씩 들어 말하면 두 가지가 의미가 모두 막히게 된다. 특별히 뛰어난 지혜가 아니면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는가. … 이미 알고 있는 대상과 유사한 대상을 연결시키지 않으면 널리 통할 수 없게 된다.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촉류방통법은 ‘이미 알고 있는 대상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그와 유사한 다른 대상에 대한 인식을 넓히고 통달하는 방식’이다. 다시 말해, 학습자가 기존에 알고 있는 지식을 활용해 유사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 이해를 확장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아학편』의 교육방식은 학습자가 새로운 지식을 기존의 지식 체계(Scheme)에 통합하고, 이를 통해 더 넓은 이해를 도모하게 하는 현대 교육학의 구성주의(Constructivism) 학습 원리와 정확히 일치한다. 이러한 우수성 때문에 『아학편』은 서당 교재로서 실제 사용되었다. 또한 의료인이자 한글학자인 지석영(池錫永, 1855~1935)은 『아학편』을 모태로 하여 한글, 영어, 중국어, 일본어 어휘와 독음을 함께 적은 책을 발매하였다. 지석영은 그 서문에서 “이 책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 저술한 것으로, 사람의 일상 생활에서 사용되는 글자들을 빠짐없이 담고 있으니, 진실로 아이들이 학문에 입문할 때의 필수 교과라 할 수 있다”라고 언급하였다. 이처럼 『아학편』은 문자의 세계에 입문하는 아동들을 위한 대단히 뛰어난 교재였다. 【그림 15】 『아학편』, 디지털 한글박물관에서 전재 『전등신화』와 『아희원람』 18세기 조선에서는 평민층 가운데 농업 생산력 및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로 인해 상당한 부를 축적한 이들이 등장하였다. 특히 17세기 이래 중국과의 무역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서울에 살던 역관, 기술관, 아전 등과 같은 중인들이 상당한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이들은 경제적 여유를 바탕으로 자녀 교육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 결과, 서울에서는 이러한 중인 이하의 평민들을 위한 서당이 설립되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이곳의 서당 훈장이 중인 출신은 물론이고 심지어 노비 출신이었다는 사실이다. 성균관 노비인 정학수(鄭學洙)는 서당을 세우고 가르쳤는데, 그의 학생 수는 무려 1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노비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학생을 가르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평민서당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정학수 서당의 모습을 조수삼(趙秀三, 1762~1849)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강당의 꽃나무 사이로 길 하나 나 있는데 / 講堂花木一蹊成 아침과 저녁이면 종소리 듣고 몰려드네 / 斯夕斯晨趁磬聲 사방의 아름다운 자제를 교육하는 이 누군가 / 敎育四隣佳子弟 품 넓은 옷에 폭넓은 띠를 한 정 선생이라네 / 裒衣博帶鄭先生 -『추재집(秋齋集)』 조수삼은 위항문인(委巷文人)으로, 학문적으로나 문학적으로 뛰어난 소양을 지닌 중인층 출신 지식인이었다. 이러한 위항문인들 가운데 당시 서울의 평민 서당을 이끌었던 여러 훈장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위항문인의 맹주이자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를 주도했던 천수경(千壽慶, ?-1818)이 있다. 송석원시사는 중인 출신 지식인들이 천수경의 거처인 송석원에 모여 시문(詩文)을 즐겼던 문학 단체이다. 천수경의 서당은 오늘날의 대형 입시학원에 맞먹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학생 수가 가장 많을 때는 무려 300명에 이르렀고, 평소에도 50~60명 정도의 학생이 있었으며, 이를 여러 반으로 나누어 교육하였다. 또 학생이 많다 보니 뛰어난 학생이 다른 학생을 가르치는 시스템을 도입하였으며, 수업료는 매달 현금으로 지불하였으니 거의 상업화된 전문 서당이었다. 이러한 평민서당의 교육은 양반서당과 마찬가지로 『소학』을 중심으로 하는 강독 교재를 사용했다. 그러나 이 서당의 교육 대상이 중인 이하의 평민층이었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다른 양상의 강독 교재가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점은 조선 후기의 파격적인 문체로 이름을 날린 이옥(李鈺, 1760~1815)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등신화(剪燈新話)』는 구우(瞿佑, 1347~1433)가 원대와 명대 소설들을 수정하여 만든 소설이다. … 이 책의 문장이 모두 속되고 가벼워서 쉽게 이해하고 따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이서(吏胥)들은 반드시 이 작품을 읽었다. … 지인(知印)인 장종득(張宗得)이 『전등신화』를 가지고 와서 배우기를 원했기에, 나 또한 때때로 읽어 보니, 주석이 상당히 자세하게 달려 있었다. -『이옥전집(李鈺全集)』 이옥이 유배되어 서당 훈장을 할 때, 지인(知印)이었던 학동 하나가 『전등신화』를 배우고자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지인은 수령의 잔심부름을 하는 아이로, 주로 향리의 자제들이었다. 『전등신화』는 중국 명대의 전기(傳奇) 소설로, 남녀의 농염한 애정사를 중심으로 요괴와귀신 등이 등장하는 작품이다. 오늘날의 로맨스 판타지 소설에 해당한다. 이 책은 비현실적이고 비윤리적인 내용으로 인해 많은 비판을 받았다. 중국에서는 이 책이 “이단사설을 날로 번성시켜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힌다”라는 이유로 한때 금서가 되기도 했다. 조선에서도 정사신(鄭士信, 1558~1619)과 같은 인물은 “그 내용을 신중히 살피지 않고 탐독하면, 사악하고 비뚤어진 영역에 빠져들어 윤리적 폐해가 적지 않을 것”이라며 비판했다. 이처럼 『전등신화』는 사대부의 교양서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책의 제목 즉 “등불의 심지를 잘라 불을 밝혀 가며 읽는 재미나고 새로운 이야기”였기에, 중국과 조선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이옥의 위 언급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 중인층 아전이나 향리들에게 『전등신화』는 필독 권장 도서였다. 이들은 양반 지배계층의 이념적이고 사변적인 도덕적 교화서보다 신화적이고 초현실적인 소설에 더 매력을 느꼈다. 이러한 이유로, 이옥의 서당에서 중인 출신 학동이 『전등신화』를 배우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평민서당에서는 기존 『소학』류의 사대부 교재와는 다른 교재가 사용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이와 관련하여, 서민적인 특성을 보여 주는 주목할 만한 아동 학습서가 있었다. 바로 천수경과 함께 송석원시사를 이끌었던 장혼(張混, 1759~1828)이 지은 『아희원람(兒戱原覽)』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아이들이 재미있게 찾아볼 수 있는 초학용 유서(類書) 즉 어린이용 백과사전이었다. 이 서적은 『소학』류의 서적과 달리, 아동들이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는 동화적이고 우화적인 내용을 가득 담고 있어 일반 민중의 욕구를 충족시켰다. 이로 인해 상업성을 목적으로 하는 방각본(坊刻本)으로 간행되어 널리 유포되었다. 【그림 16】 『아희원람』,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아희원람』의 저자 장혼은 중인 출신으로, 초학자나 아동을 위한 여러 책을 저술하였다. 그의 책들은 유교적 가치관에 중점을 둔 기존의 교화적인 아동 서적과는 달리, 다분히 세속적이면서도 민중적이었다. 장혼은 『아희원람』에서 당시 아이들이 알아야 기초 상식을 10개의 대주제와 530여 개의 항목으로 선별하여 제시하였다. 구체적으로, 아이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우리나라의 역사와 지리, 세시풍속, 놀이 등에 관한 상식들뿐만 아니라 신화와 민담도 가득 담아 놓았다. 그중 흥미로운 내용 설화와 민담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천황씨(天皇氏)는 세 개의 혀를 가지고 있고 몸에는 비늘이 있었다. 지황씨(地皇氏)는 용의 이마와 말발굽을 가지고 있었다. • 치우(蚩尤)의 형제 18명은 모두 짐승의 혀를 가지고 사람의 언어를 말하며, 머리는 동으로, 이마는 쇠로 되어 있다. 오곡을 먹지 않고 모래를 씹으며 돌을 삼켰다. • 용은 뿔로 듣고, 소는 코로 듣고, 뱀과 자라는 눈으로 듣고, 거북이는 귀로 숨을 쉰다. • 늑대와 여우는 모두 팔백 살까지 산다. 삼백 살이 되면 모두 사람 모습으로 변하고, 백 살이 된 여우의 정령(精靈)은 미녀가 된다. • 『남사(南史)』에 따르면, 유옹(劉邕)은 부스럼 딱지를 즐겨 먹었는데, 그 맛이 복어와 비슷하다고 하여 남의 부스럼 딱지가 떨어지는 것을 보면 얼른 주워 먹었다고 한다. • 유성(流星)이 묘성(昴星)을 관통하는 것을 보고 감응하여 14개월간 임신한 뒤, 등을 찢고 우(禹)임금을 낳았다. -『아희원람』 이처럼 『아희원람』은 기이하고 신비로운 내용으로 아이들의 흥미를 끌었으며, 초자연적인 내용으로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했을 것이다. 이 초학용 백과사전은, 이옥의 제자가 『전등신화』를 가져와 서당에서 배우고자 했던 것처럼, 평민서당에서 읽혔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기존의 유교적 가치관에 중점을 둔 초학 교재와는 달리, 세속적이면서도 민중적인 내용으로, 과거시험에 응시할 여건이 어려운 중인 이하의 자제들에게 적합했기 때문이다. 실용 문서와 탄원서 평민서당은 사회적 제약으로 인해 관리 등용 체계에서 배제되었던 중인 이하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하였기에, 실질적인 생활 능력 향상과 실용적인 지식 습득에 초점을 맞춰야 했다. 『백범일지』에도 이와 관련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때에 아버지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밥 빌어먹기는 장타령이 제일이니, 큰 글을 배우려고 애쓰지 말고 실용문서 작성이나 배우거라. ‘우명문표사단(右明文標事段)’하는 토지문서 쓰기, ‘우근진소지단(右謹陳訴旨段)’하는 고소장 쓰기, ‘유세차감소고우(維歲次敢昭告于)’하는 축문(祝文) 쓰기, ‘복지제기자미유항려(僕之第幾子未有伉儷)’하는 혼서지 쓰기, ‘복미심차시(伏未審此時)’하는 편지 쓰기를 배우거라.” 나는 틈틈이 이 공부를 열심히 하니, 문중에서는 내게 무식한 사람들 가운데 빛나는 사람이 되어 장래 존위(尊位)에 상당하는 지위는 갖출 것이라고 기대하게 되었다. -『백범일지』 김구의 아버지는 신분상 평민이기에 높은 관리는 될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닫고, 먹고 살 수 있는 방안을 해결할 실용적인 학문을 배우라고 권유한 것이었다. 그가 요청한 것은 ‘토지문서, 고소장, 축문, 혼서지 등’과 같은 실용 문서 작성이었다. 이러한 문서 작성 능력을 키우면 언젠가 존위(尊位), 즉 높은 향리 정도는 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 실용문서는 ‘우명문표사단(右明文標事段)’, ‘우근진소지단(右謹陳訴旨段)’과 같은 나름의 형식과 체제가 있었다. 이 실용문서들 가운데 탄원서는 향리를 꿈꾸는 평민 자제들에게 중요한 교육 내용이었다. 18세기 이후 서당의 확산을 통해 교육이 평민 계층까지 확대되었고, 권리나 소유에 대한 인식이 향촌사회까지 정착되면서 민원이 활발하게 제기되었다. 따라서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청원할 일이 있을 때를 대비하여 탄원서를 작성하는 요령을 배워야 했다. 이옥이 훈장을 할 때도 탄원서를 배우고자 하는 요청이 쇄도하였다고 한다. 먼 시골의 학동들이 배우기를 원하는 것은 탄원서(所志狀)의 글로, 베껴 쓰고 외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여기 의령의 양갓집 딸 필영(必英)의 탄원서는 대체로 『전등신화』를 많이 읽어 그것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다. 내가 대강을 수정하여 『전등신화』를 읽는 시골 학동들에게 보여 주고자 하였다. -『이옥전집』 학동들이 배운 탄원서 중에는 실제 사례도 있었지만 『전등신화』 등 소설을 바탕으로 각색된 것들도 있었다. 이옥은 서당 아이들을 위해 탄원서를 교육적으로 각색하여 새롭게 작성하였는데, 그 내용은 전통적인 서당 교재인 『소학』류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양가집 딸 필영이 서울에서 이사 온 미남자 최랑과 사랑에 빠져 부모의 허락 없이 혼인하기로 약속했다가, 가족의 노여움을 사서 관기(官妓)가 되었으니 이를 선처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당시에는 부모의 승낙 없이 외간 남자와 혼인을 약속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행실로 여겨졌다. 이러한 비윤리적인 탄원서가 교육 내용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평민서당이 기존의 교육 틀에서 상당히 벗어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탄원서 양식을 학습하기 위한 교재로 19세기에 제작된 『요람(要覽)』이라는 서적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 책은 실용 문서 작성을 위한 학습 교재로, 사대부처럼 높은 한문 실력이 없어도 한문에 대한 기본 소양을 지닌 사람이라면 충분히 모방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또 탄원서와 같은 실용 문서는 이두(吏讀)가 많이 사용되는데, 『요람』에는 이두로 작성된 글들이 여러 개 실려있다. 또한 이 책에 실린 동물들이 소송을 벌이는 문서들은 평민층 아이들에게 상당한 흥미를 유발하여, 탄원서의 학습을 더 용이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고양이가 주인에게 개에 대한 처벌을 요청하는 탄원서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제가 어릴 때 어머니를 잃고 주인님에게 길러 주심이 지금까지 여러 해입니다. 저는 채소를 좋아하지 않고 고기반찬을 좋아하자, 주인님께서 가자미와 대구를 잘게 부수어 밥과 섞어 주셨고, 그 은혜는 하늘과 같았습니다. 장성한 후에는 쥐 잡는 일을 맡아 밥과 반찬을 훔치는 쥐를 잡아 아침, 점심, 저녁거리를 마련했습니다. 쥐의 머리와 꼬리가 보이면 높은 소리를 내어 쥐가 도망가도록 하였죠. 주인님께서 저를 데려온 후로는 쥐가 옷을 물어뜯는 일도 없고, 밥도 깨끗하게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인님께서는 저를 다른 가축들과 다르게 방에 출입할 수 있도록 허락하시며, 저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습니다. 하지만 저 개똥은 바깥에서 지내는 종으로, 문턱을 넘지 않고 마루 아래에서 뒹굴기만 합니다. 그는 남은 찌꺼기 밥이나 얻어먹고 다행이라 여겨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저를 질투하여 몰아내고 물려고 합니다. 저는 힘이 약해 맞설 수 없어 처마 위로 도망가 겨우 목숨을 부지했습니다. 개똥과 저는 비록 다른 종류의 동물이지만 같은 집에 살며, 원한도 없고 다툴 이유도 없습니다. 우리는 한마음으로 주인을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개똥은 저를 질투하고 미워하여 해치려 합니다. 개똥은 심술이 불량하여 이웃집 아이가 불씨를 구하러 오면 다리를 물어 주인님께 욕을 먹게 하고, 밥을 주는 여종이 태만하면 그 틈을 타서 밥을 훔쳐 먹습니다. 배부르게 먹고 나서는 책망을 피하려고 핑계를 대며 마루 아래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주인님께서 밥을 드실 때마다 거드름을 피우며 눈을 굴립니다. 본심은 빼앗아 먹고 싶지만 형편상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쁜 버릇을 고치지 않으면 저는 몸을 보존할 수 없습니다. 간절히 바라옵건대, 개똥을 엄하게 징계하여 제가 안전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비묘금지소(婢猫今所志)」- 고양이 묘금은 자신의 탄원서에서 다양한 수사적 장치를 활용하여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우선, 묘금은 까다로운 입맛을 맞춰준 주인에 대한 깊은 감사와 은혜를 잊지 않고 있음을 강조한다. 또한, 주인을 위해 쥐를 잡는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헌신적인 존재로 자신을 묘사하며, 이를 통해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인정받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낸다. 반면, 개똥은 게으르고 심술궂은 동물로 묘사되어 그의 행동이 주인에게 끼치는 해로운 영향이 부각된다. 이처럼 묘금은 자신과 개똥을 대조하는 방식으로 주인에게 개똥을 징계해 달라는 요청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고 있다. 결국, 주인이 개똥을 불러 사실 관계를 조사하자, 개똥은 억울함을 호소하며 다음과 같은 탄원서를 올리게 되었다. 저는 불만이 있었지만 방법을 찾지 못해 참고 지내왔습니다. 이제 이 조치로 억울함을 풀고자 합니다. 비록 말을 못하지만, 주인님의 뜻을 잘 이해하며 충실히 섬겼습니다. 흉년으로 도둑이 활개를 치는 상황에서도 매일 밤 울타리 밑에서 경비를 서며 새벽까지 고생했습니다. 주인님이 연로하시고 집안이 가난해 적절한 반찬이 없는 것도 걱정되었습니다. 저는 사냥에 능숙하여 꿩과 토끼를 잡아 주인님께 바치며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주인님께서는 저에게 상을 주지 않으셨고, 밥도 이틀에 한 번 주셔서 배고파 인분(人糞)을 삼켜 요기한 적도 있었습니다. 반면 묘금은 쥐를 잡는 일을 맡고 있지만 게을러서 늘 자고만 있습니다. 쥐들이 반찬을 훔치고 옷을 물어뜯어도 신경 쓰지 않고, 오히려 반찬과 고기를 훔쳐 먹었습니다. 가끔 병든 쥐를 잡아도 가지고 놀기만 합니다. 직무 태만한 죄로 벌을 받아야 하지만, 주인님께서는 이를 모르시고 묘금을 은혜롭게 대우하십니다. 좋은 밥과 맛있는 음식을 주시고, 비단 자리에서 지내게 하십니다. 그럴 때 저는 스스로 책망합니다. “충성을 다했어도 예우받지 못하고, 묘금은 아무런 덕이 없는데도 은혜와 사랑을 받는구나. 이게 다 묘금의 모함 때문이구나.” 그 생각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으나, 제가 원래 포악한 성품이 아니라서 묘금은 용서해주었습니다. 하지만 묘금은 도리어 주인님께 저를 무고하고, 터무니없는 죄목으로 시비를 걸어왔으니, 차라리 솥에 삶아져 죽는 한이 있어도 묘금과 함께 살고 싶지 않습니다. 또한, 저의 억울한 상황과 묘금의 간교한 행동에 대해 상세히 말씀드리는 것이 두려워 대강만 말씀드렸습니다. 피차간의 선악에 대해 더욱 자세히 설명드리오니, 주인님께서 각 조목마다 세심히 살펴 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 주인님께서는 선한 이를 선하게 여기고 악한 이를 악하게 여기지 않으셔서 억울함이 깊습니다. 이제 모든 것을 숨김없이 아뢰옵니다. 방안에 나들며 비단 자리에 앉거나 눕는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아침저녁으로 밥을 주어 굶주림을 면하게 해 주시고, 묘금의 태만과 모함한 죄를 엄중히 다스려 내쳐 주시길 바랍니다.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는 뜻을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노구동원정(奴狗同原情)」 여기서 개똥은 자신이 주인에게 충성을 다했음에도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함을 강조하고 있다. 또 고양이 묘금이 게으르고 부정한 행동을 일삼는데도 주인에게 과분한 대우를 받고 있음을 지적한다. 특히 개똥은 자신이 받은 부당한 대우와 고양이 묘금의 부정한 행동을 대조시키며, 주인이 선악을 구별하고 공정하게 처벌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림 17】 이암,《화조묘구도(花鳥猫狗圖)》, 공유마당에서 전재 이처럼 『요람』에 수록된 동물들의 탄원서는 대립하는 양측이 서로의 잘잘못을 지적하고 자신의 선행을 내세우며 판결을 구하는 실제 소송의 구조를 반영하고 있다. 이를 통해 학동들은 감정적 호소, 대조적 묘사, 구체적 사례 제시 등 탄원서 작성에 필요한 다양한 설득 전략을 습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원고와 피고 양측의 주장을 균형 있게 판단하는 공정성도 함양할 수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이와 같은 탄원서 교육을 통해 평민서당의 아동들은 실용문서 작성의 형식과 특성을 익힐 수 있었다. 더불어 도덕적 교훈을 통해 선악을 분별하는 윤리의식도 함양할 수 있었을 것이다. 18세기 이후 설립된 평민서당은 양반서당과 다른 교육내용을 다루고 있었다. 『아희원람』, 『전등신화』, 『요람』 등의 교재가 보여 주듯, 평민서당에서는 실용성과 재미를 겸비한 새로운 교재가 활용되기 시작하였다. 장혼의 『아희원람』은 신화와 민담, 세시풍속 등 아동들의 흥미를 끌 만한 내용을 담은 초학용 백과사전으로, 전통적인 유교 교재와는 차별화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전등신화』의 경우 비윤리적인 내용으로 사대부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재미있는 이야기 덕분에 평민 자제들 사이에서 널리 읽혔다. 『요람』 역시 실용문서 작성법을 익히기 위한 학습서로, 등장인물로 동물들을 내세워 아동들의 흥미를 이끌어 내는 한편 소송 과정의 실제를 생생하게 보여 주었다. 이처럼 평민서당의 교재들은 『소학』류의 교재를 통해 유교적 가치관을 강조하기보다는, 평민들에게 실질적으로 요구되는 능력을 배양하는 데 주력하였다. 세속적이고 통속적인 내용을 담은 책들이 교육 현장에 도입된 것은 성리학적 이념 교육에서 벗어나 보다 실용적인 교육을 지향하는 시대적 변화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평민서당은 유교 이데올로기의 틀에서 벗어나 대중의 욕구를 수용하고 실생활에 도움 되는 교육을 실천함으로써 근대 교육의 맹아를 보여 주었다. 봉건적 신분질서를 전제한 기존의 교육 패러다임과 결별하고, 보다 실용적이고 대중적인 교육 내용을 지향한 평민서당의 시도는 근대로의 이행을 준비하는 의미 있는 변화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
서당, 모든 이의 공부방- 기록자료
- 문화
18-19세기, 서당의 황금기 풍속과 놀이의 다양화 서당의 풍속 18~19세기에 걸쳐 서당의 성장과 확산은 교육의 보편화에 크게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서당 내의 풍속과 놀이문화의 발달로 이어졌다. 이 시기 서당은 단순한 교육기관을 넘어, 지역사회의 문화적·사회적 중심지로서의 자리매김하였다. 서당에는 교육운영과 밀접히 연관된 다양한 풍속들이 존재했다. 그중에서도 개학식과 종업식에 해당하는 ‘개접(開接)’과 ‘파접(罷接)’, 그리고 한 권의 책을 마칠 때마다 치르는 ‘책씻이’가 특히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 개접과 파접의 유래와 의의 ‘개접’과 ‘파접’은 ‘개거접(開居接)’과 ‘파거접(罷居接)’의 준말이다. ‘접(接)’은 원래 ‘무리’를 의미하나 서당에서는 동급의 학도를 지칭한다. 여기서 ‘거접’이란 ‘동급의 학생들과 함께 공부한다’는 뜻인데, 이는 고려시대 사학(私學) 전통에서 유래했다. 12개의 사설 교육기관을 의미하는 12도(十二徒)는 매년 여름이면 사찰이나 정사에 모여 과거 공부를 하는 ‘하과(夏課)’ 또는 ‘하천도회(夏天都會)’를 열었다. 이러한 집단 학습 방식이 조선의 서당과 향교, 서원 등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서당의 개접은 무더운 여름철에 서당을 벗어나 시원한 정자나 냇가에 모여 시문(詩文)을 낭송하고 암송하며 직접 짓는 특별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개접례(開接禮)라 불리는 이 행사에는 인근 서당 학생들과 학부모, 손님 등이 모여 성대한 시문 경연을 펼쳤다. 학생들은 동접(東接)과 서접(西接)으로 편을 갈라 훈장이나 손님이 출제한 시제(詩題)로 실력을 겨루었는데, 경쟁이 매우 치열하여 전투나 전쟁을 뜻하는 ‘전예(戰藝)’ 또는 ‘백전(白戰)’이라고도 불렸다. 파접은 대개 칠석이나 그 전날에, ‘파접례(罷接禮)’ 또는 벼루를 씻는다는 의미의 ‘세연례(洗硯禮)’로 시행되었다. 이때의 글제는 주로 한유(韓愈, 768~824)의 시구인 “등화초가친(燈火稍可親)”으로 주어졌는데, 이는 ‘등불 밑에서 책을 읽기에 좋은 계절’이라는 뜻으로, 가을에 학업에 정진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파접 후 가을을 맞는 학생들에게 학업을 독려하는 의미를 담았다. 그러나 개접과 파접의 시기에도 변화가 생겼다. 조선 후기의 각종 놀이와 명절 풍속 등의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는 최영년(崔永年,, 1856~1935)의 『해동죽지(海東竹枝)』에 따르면, 4월 초에 개접례를, 7월에 폐접례를 행했다. 이는 서당의 학사 일정에 맞추어 조정한 것으로 보인다. ◌ 책씻이의 의미와 전통 ‘책씻이(冊施時)’는 서당의 풍습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으로 세책례(洗冊禮) 또는 책세식(冊貰式), 책거리(卦冊禮)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책씻이나 세책례는 책을 씻는다는 의미인데, 이는 책을 깨끗하게 씻는다는 것이 아니라 ‘갈고 닦는다’는 뜻이다. 이 책씻이는 서당뿐만 아니라 왕실에서도 이루어졌다. 유난히 책을 사랑했던 왕으로 전해지는 정조도 이 책씻이를 시행하였다. 내가 요즘 일과를 정해서 새로 간행된 『춘추(春秋)』를 읽어 왔는데 오늘에야 겨우 끝났다. 그런데 자궁(慈宮)께서 내가 어렸을 때 책씻이하던 일을 생각하시고 음식상을 마련해 주셨기에 경들과 함께 맛보려고 하는 것이다. -『정조실록』 권52, 정조 23년 12월 8일 여기서 자궁은 정조의 생모인 혜경궁 홍씨이다. 1799년 정조는 『춘추』를 완독하고 모친인 혜경궁 홍씨에게 이를 알리자, 정조가 어렸을 때 책씻이를 해 주었던 것처럼 술과 떡을 만들어 주어서 신하들과 나눠 먹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책씻이는 자식의 학문적 성장에 대한 축하와 격려, 그리고 감사의 뜻으로 훈장과 학동들을 비롯하여 동네 어른들에게 간단한 음식과 술 등을 대접하는 것이었다. 책씻이 때에는 반드시 송편을 만들어 먹었는데, 이는 송편이 담긴 상징적 의미 때문이었다. 송편은 비어 있는 속에다 팥이나 콩 등의 소를 넣어 만드는데, 마치 아이의 머릿속에도 지혜를 가득 채우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서당의 풍속은 학생들 간의 경쟁과 실력 향상에 그치지 않고, 학습의 진척을 함께 즐기며 지역사회 구성원 모두가 교육의 즐거움과 가치를 공유하는 축제의 장을 마련했다. 이를 통해 서당은 학습의 즐거움을 나누고 교육 공동체의 유대감을 강화하는 뜻깊은 교육 문화를 만들어 갔다. 개접과 파접은 학부모와 지역 주민들이 참여하는 성대한 시문 경연의 장이 되어, 교육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더불어 책씻이 행사에서는 학생의 학업 성취를 축하하고 격려하는 한편, 훈장과 학동들, 그리고 동네 어른들이 함께 어울려 음식을 나누며 서당을 중심으로 한 끈끈한 정을 쌓아갈 수 있었다. 이렇듯 서당의 다양한 풍속은 조선 후기 지역사회의 문화적, 사회적 중심지로 발돋움하는 데 기여하였다. 서당의 놀이 18-19세기 서당은 학습자의 폭을 넓히고 교육 내용과 방식의 다양화를 가져왔는데, 놀이는 이러한 변화의 핵심에 있었다. 당시 서당교육은 아동의 흥미와 적성을 고려한 실생활 중심의 교육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서당의 놀이는 학습에 지친 학생들에게 즐거움과 생기를 불어넣는 동시에, 자연스레 지식을 습득하고 덕목을 체화할 수 있도록 하였다. 훈장과 생도의 우두머리인 접장(接長)이 주도하고 학동들 간에도 즐겨 행해진 이 놀이들은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언어능력과 인지능력, 사회성 등을 기르는 종합적인 학습활동이었다. 서당의 놀이는 대단히 다양하지만, 여기에서는 교육적 효과를 지닌 학습놀이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 한자와 시문 이해를 도모한 놀이 한자와 고전에 대한 이해를 돕는 서당놀이로 ‘초중종놀이’와 ‘글자맞추기 놀이’가 있다. 먼저, 초중종놀이는 사운희(射韻戲)라고도 불리며, 시구를 구성하는 ‘운(韻)’자의 위치에 따라 첫 운자(初), 중간 운자(中), 마지막 운자(終)를 맞추어 가며 한시를 암기하고 창작하는 학습놀이다. 매 국면 새로운 운자를 도입해 학생들이 연상하고 조합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며, 이를 통해 시의 형식미와 율격을 직관적으로 익히고 시구 암기의 폭을 넓혔다. 놀이 규칙은 다음과 같았다. ▪ 첫 운자: 훈장이 첫 운자로 ‘물 강(江)’ 자를 제시한다. 그러면 생도가 ‘강벽조유백(江碧鳥逾白)’과 같이 ‘물 강(江)’ 자로 시작하는 시구로 대답한다. ▪ 중간 운자: 훈장이 중간 운자로 ‘꽃 화(花)’ 자를 제시한다. 그러면 생도가 ‘산청화욕연(山靑花欲然)’와 같이 ‘꽃 화(花)’ 자가 중간에 포함된 시구로 대답한다. ▪ 마지막 운자: 훈장이 마지막 운자로 ‘지날 과(過)’ 자를 제시한다. 그러면 생도가 ‘금춘간우과(今春看又過)’와 같이 ‘지날 과(過)’ 자가 마지막에 들어가는 시구로 대답한다. 한편 글자맞추기 놀이는 훈장이 글자를 묘사하면 학생들이 그에 맞는 한자를 맞히는 방식으로, 부수나 모양, 소리, 뜻 등 한자의 다양한 속성을 수수께끼로 출제하여 한자에 대한 심층적 이해를 도모하였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은 한자의 조자(造字) 원리를 자연스레 체득하고 유사 글자들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식별하는 관찰력을 기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사람 인(人) 변에 두 이(二)가 있는 글자’를 물으면 ‘어질 인(仁)’이, ‘입이 셋 있는 글자‘는 ‘품수 품(品)’이 정답이 된다. 이는 마치 수수께끼 같아서 학생의 상상력과 추리력을 자극했다. 좀 더 복잡하고 수준 높은 문제도 있었다. ▪ 한자 요소들의 공간적 배치를 묻는 경우: ‘왼쪽에 일곱 칠(七) 자, 오른쪽에 일곱 칠(七) 자, 옆으로 누인 뫼 산(山) 자, 완전히 뒤집은 뫼 산(山) 자가 있는 글자’라고 물으면, ‘며느리 부(婦)’가 정답이다. ▪ 한자의 뜻을 바탕으로 조합하여 묻는 경우: ‘물고기와 양이 함께 있는 글자’라고 물으면, ‘물고기 어(漁)’ 자와 ‘양 양(羊)’ 자가 결합된 고울 선(鮮)’이 정답이다. 이처럼 초중종놀이와 글자맞추기 놀이는 단순 암기식 학습의 지루함을 넘어, 흥미로운 언어유희를 통해 고전 지식의 내면화를 이끌어 낸 서당 교육의 창의적 방법이었다. 나아가 학생들의 상상력과 사고력을 이끌어 내는 데도 기여하였다. ◌ 벼슬과 관직 이해를 도모한 놀이 서당에서는 학동들의 벼슬과 관직에 대한 이해를 제고하기 위하여 ‘승경도놀이’와 ‘원놀이’를 적극 활용하였다. 이들 놀이는 관료제와 통치 과정에 대한 지식과 통찰을 함양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먼저, 승경도놀이는 종정도(從政圖)놀이, 종경도(從卿圖)놀이라고도 불리며, ‘벼슬길에 오르는 그림’이란 뜻의 ‘승경도(陞卿圖)’를 바탕으로, 윷놀이 방식을 차용하여 관직 서열의 학습과 출세 과정의 간접 체험을 도모한 학습놀이였다. 놀이판에는 조선시대 중앙과 지방의 주요 관직명 300여 개가 품계별로 기재되어 있어, 학동들은 관직 구조에 대한 거시적 이해와 함께 실제 관료제 운영의 감각을 익힐 수 있었다. 놀이판에는 300여 개의 관직명이 품계별로 기재되어 있어, 중앙의 정1품부터 종9품까지, 지방 외관직의 감사, 병사, 수령 등을 두루 망라한다. 학동들은 윷가락을 던져 말을 이동시키며 최고위 관직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게임 중간에는 특정 관직에 도착하면 상벌이 주어지기도 한다. 가령 정3품 당상관에 도착하면 한 번 더 윷을 던질 수 있고, 반대로 파직 칸에 들면 관직에서 쫓겨나는 것이다. 2-4명이 편을 나누어 하는 이 놀이는 관직 구조에 대한 거시적 인식과 함께, 실제 관료제의 운영 감각을 익히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학동들은 300여 개에 이르는 관직명을 자연스럽게 습득하고, 성공과 실패의 기회가 공존하는 관료제의 노정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다. 한편 원놀이는 사또놀이, 양반놀이, 감영(監營)놀이라고 불리며, 학동들이 지방관아의 원님과 백성이 되어 통치와 송사 해결 과정을 모의 체험하는 놀이였다. 접장이나 영리학 학동이 원님 역할을, 여타 학동들이 백성 역할을 담당하며 소통과 민원 해결의 절차를 익혔던 것인데, 이는 백성을 대하는 원님의 태도와 판결의 적절성을 직접 체감하며 통치자의 자질과 책임의식을 함양하는 효과적 교육방법이었다. 원놀이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원님과 백성의 역할 수행 과정에서 학문적 능력의 발휘가 중시되었다는 사실이다. 백성 역할의 학동 중 글재주가 뛰어난 이에게는 과거시험을 치르게 하여 통치 역량과 학문 능력의 연계성을 확인토록 했다. 이는 조선시대 학문과 정치의 불가분성을 반영하는 동시에, 원놀이가 단순한 흥미 위주의 놀이가 아닌 교육의 장으로 인식되었음을 방증한다. 나아가 원놀이에서는 지역 현안과 사회문제를 주요 소재로 다루어 민본정신의 이념적 토대를 학동들에게 내재화하는 계기로 삼기도 하였다. 즉, 놀이 과정에서 지배자로서 원님과 피지배자로서 백성이라는 고정 관념을 탈피하고, 백성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민본 행정의 이상을 자연스럽게 체득할 수 있었다. 이처럼 승경도놀이와 원놀이는 관료제의 구조와 운영 원리를 습득하고, 역할극을 통해 위민 행정과 민본 정치의 요체를 자연스레 내면화하는 기제로서 작동하였다. ◌ 지리와 명승고적 이해를 도모한 놀이 서당의 학동들이 우리 국토지리와 문화유산에 대한 지식을 학습할 수 있도록 ‘고을모둠놀이’와 ‘남승도놀이’를 활용하였다. 이들 놀이는 지역과 명승지에 대한 정보를 단순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놀이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체득되도록 하여 향토애와 문화적 소양을 함양하는데 기여했다. 고을모둠놀이는 조선의 행정구역인 고을의 이름과 위치를 파악하는 놀이로, 남승도놀이를 하기에 앞서 어린 학동들 사이에서 주로 행해졌다. 놀이의 기본 방식은 다음과 같다. ◌ 먼저 둘 이상의 학동이 모여 한문책의 아무 쪽이나 펼쳐놓고, 각자 고을 이름으로 쓸 만한 한자를 한 글자씩 찾아낸다. 그 한자에 자신이 알고 있는 다른 한자를 조합해 두 글자로 된 고을 이름을 완성해 종이에 적는다. ◌ 예를 들어, 첫 자가 ‘도울 부(扶)’자이면 부여(扶餘), ‘공평할 공(公)’자이면 공주(公州), ‘편안할 영(寧)’이면 영월(寧越)로 쓰도록 한다. 이렇게 각자 알고 있는 고을 이름을 모두 적고 나면, 책을 덮고 가장 많은 고을 이름을 적은 사람이 이기게 된다. 또한 고을 이름은 당시의 행정지명을 기준으로 하므로, 옛 지명을 사용하면 감점 대상이 되었다. 이는 고을의 명칭뿐 아니라 그 연혁과 변천사까지 알아야 한다는 의미였다. 이처럼 고을모둠놀이는 지명 암기를 넘어 지역의 역사적 맥락까지 익히게 함으로써 종합적 향토 이해의 기회가 되었다. 남승도놀이는 전국의 명승지를 가상 유람하는 놀이로, 주로 청소년과 선비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고을모둠놀이를 통해 사전 훈련을 쌓은 뒤 본격적으로 하게 되는 놀이였다. 남승도(覽勝圖)란 ‘명승지를 유람하는 도표’라는 뜻으로, 놀이판에는 전국 각지의 명소들이 그려져 있다. 놀이의 방식은 아래와 같다. ◌ 참가자들은 모두 6명으로, 시인, 한량, 기생, 중, 농부, 어부의 역할을 맡아 출발지에서 윷을 던져 말을 이동시킨다. 윷의 결과에 따라 각자의 말은 전국의 명승지를 하나씩 거쳐 가며 관광을 즐기고, 가장 먼저 출발지로 돌아온 사람이 이기게 된다. ◌ 이 과정에서 특정 장소에 도착하면 해당 역할에 걸맞은 특전이나 불이익이 주어지기도 한다. 예컨대 한량이 진주 촉석루에 도착하면, 임진왜란의 격전지였다는 이유로 특권이 주어져 다른 참가자들은 자신의 획득 점수를 모두 한량에게 바쳐야 한다. 반면 기생이 머무는 곳에 중이 도착하면 다음 차례를 양보해야 하는 식이었다. 또 남승도에는 한라산이나 울릉도 등 특정 지점에 함정을 설정해두어, 예측 불허의 긴장감을 맛볼 수 있었다. 이러한 남승도놀이는 각 지역의 지리적 특징과 전통, 역사적 사건, 설화 등을 입체적으로 익히는 문화사 교육의 장으로 기능하였다. 아울러 시인, 중, 기생 등 다양한 계층의 시선을 경험함으로써 폭넓은 세계 이해와 포용력을 기르는 데도 기여하였다. 요컨대, 고을모둠놀이와 남승도놀이는 우리 땅과 역사에 대한 총체적 관심과 애정을 고취하고, 문화유산 속에 담긴 조상들의 정신을 계승·발전시키려 한 놀이였다. 특히 남승도놀이는 가상 여행을 통해 조국 산천을 유람하는 심미적 체험과 풍류의 즐거움까지 선사하였다. 【그림 18】 《청구남승도(靑邱覽勝圖)》,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서당의 다양한 학습놀이는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지식 습득과 덕목 함양을 위한 종합적 교육활동이었다. 초중종놀이와 글자맞추기 놀이는 흥미로운 언어유희를 통해 한자와 고전에 대한 심층적 이해를 이끌어 냈고, 남승도놀이와 원놀이는 관료제의 구조와 민본정신을 자연스럽게 내재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고을모둠놀이와 남승도놀이는 지역 문화와 역사, 국토애를 익히는 향토교육의 장으로 기능하였다. 이처럼 서당의 학습놀이는 지식, 덕목, 실천력을 함께 기르며 학습자의 전인적 성장을 도모했다. -
서당, 모든 이의 공부방- 기록자료
- 문화
3. 20세기 서당: 전통과 근대의 기로 근대 교육의 수용과 식민지 시대의 서당 근대학교의 설립과 서당의 개량 1867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고 서구 열강과의 교역이라는 새로운 길로 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제국주의 세력의 거센 침략 위협과 맞닥뜨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조선은 이에 맞서기 위해 개화정책이라는 과감한 변화의 깃발을 들었다. 하지만 이는 보수 유생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고, 개화의 길은 험난하기만 했다.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인재 양성을 위해서는 교육 개혁이 시급했다. 낡은 교육의 틀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교육 시스템을 구축해야만 했다. 개화파는 정부 기관지인 「한성순보(漢城旬報)」를 통해 서양의 근대 교육 제도를 상세히 소개하며 기존 교육 체제에서 벗어날 것을 강조하였다. 이후 조선 정부는 영어 교육 기관인 동문학(同文學, 1883)과 육영공원(育英公院, 1886)을 설립하여 서양 문화를 교육하려 했으나, 학생들의 무관심과 운영 부실, 재정난 등의 이유로 실패하였다. 이에 조선 정부는 1894년 갑오개혁을 통해 근대 교육 제도를 본격적으로 정착시키려 하였다. 과거 제도 폐지와 신분제 타파와 함께 ‘학무아문(學務衙門)’을 설치하여 학교 정책과 교육 업무를 독립적으로 관리하도록 하였다. 1895년 고종은 「교육입국조서」를 반포하여 근대적인 학교 제도와 규칙을 제정하고, 한성사범학교를 시작으로 서울과 주요 도시에 소학교를 설립했으며, 1899년에는 중학교도 설립하였다. 또한 외국어학교, 법관양성소, 경성의학교 등 실무 교육기관도 설립하였다. 【그림 19】 『관보(1894-1910)』, 「교육입국조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정부의 노력과 더불어 민간에서도 근대 교육의 성립을 위한 다양한 움직임이 나타났다.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된 근대 교육 기관으로는 아펜젤러(Appenzeller)의 배재학당(1885), 언더우드(Underwood)의 경신학교(1886), 스크랜턴(Scranton)의 이화학당(1886) 등이 있다. 선교사들은 이들 학교를 통해 신분 평등과 남녀 평등 사상을 전파하며 민중의 평등 의식과 민권 의식을 고취시켰다. 다른 동양권 국가들처럼 조선에서도 선교사들이 의료 활동과 함께 근대 교육 운동을 선도적으로 실시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선교사가 아닌 우리 손으로 설립한 최초의 근대 학교가 있다. 바로 원산학사(元山學舍, 1883)이다. 원산은 부산, 인천과 함께 주요 항구 도시로, 당시 개항과 함께 일본 상인들이 치외법권 등의 조항을 내세워 경제 침투를 강화하고 있었다. 이러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외국어, 상업 지식, 법률 등 신학문과 무예를 갖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된 학교였다. 원산학사는 정부의 개화정책 이전에 지역 주민들에 의해 설립된 최초의 근대 학교였다. 외국의 근대 학교를 모방한 것이 아니라 전통 서당의 개량을 통해 발전된 형태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원산학사와 같이 전통 서당을 개량서당으로, 개량서당을 다시 근대 학교로 전환한 사례는 매우 특수한 경우였다. 갑오개혁 이후에도 조선인 상당수는 근대 교육에 대해 이해가 부족하거나 거부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남궁억(南宮檍, 1863~1939)이 1907년 현산학교(峴山學校)를 설립할 때에도 나타났다. 남궁억 선생이 학생을 모집하려고 가정을 방문하였으나 자녀를 자발적으로 보내는 가정은 없었다. 자진 입학 권유가 효과가 없자, 부모들에게 자녀를 의무적으로 보내도록 설득해야 했다. 그러나 많은 백성은 자녀를 한문 글방으로만 보내려 했다. 학생 모집 중에는 학교에 이름만 걸어두고 아침에 얼굴만 내밀다가 다시 한문 글방으로 돌아가는 학생들을 붙잡아 가르치기도 했다. 일부 부모는 자녀를 멀리 친척 집에 보내 한문 글방에 다니게 하거나, 양학(洋學)을 배우면 눈이 노랗게 변한다거나 혀가 꼬부라진다는 등의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리며 반대하였다. -김세한, 『한서 남궁억 선생의 생애』 이와 같은 서당과 근대 교육에 대한 이해 부족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도 지속되었다. 자식을 서당 대신 근대 학교에 보내면 예의도 윤리도 모르는 경박한 인간이 된다고 생각하였고, 보통학교 졸업 후에는 부모의 말을 듣지 않고 뜻만 높아져 농사일이나 육체노동을 기피한다는 인식이 있었다. 심지어 재물 문제로 사기를 치다 감옥에 가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근대 교육을 받은 이들이라는 주장까지 있었다. 이는 전통적인 농업 사회의 인식에서 벗어나 산업화 사회를 추구하는 근대 교육의 가치관이나 직업관을 수용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은 당시 조선인들의 일제 보통학교에 대한 거부감을 보여 주는 신문 기사이다. 「십년 전 세상, 나의 10세 전후(1)」 경성개벽사 박노아(25세) “숨어라 숨어라! 순검 잡으러 올라!” 순사나 헌병보조원들이 자기 키만 한 장검을 들고 동네 밖에서 번쩍이기만 해도, 이 소식은 각 서당에 순식간에 퍼졌다. 그럴 때마다 서당에서는 일대 소동이 벌어지며, 어린 학생들은 고양이 만난 쥐처럼 피난처를 찾느라 바빴다. 장검을 앞세운 면서기나 군청 직원들이 시시때때로 서당을 습격해 아이들을 잡아가는 까닭에, 아이들은 끌려가 머리를 깎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학교에 다니면 일본 군인으로 뽑혀갈 거라는 두려움 때문에 학교라면 경기를 일으켰다. 그런 시기에 나는 소위 ‘개화꾼’의 집에서 태어나 열 살 때 벌써 보통학교 2년급이 되었다. 그때는 자식까지 둔 어른들이 수두룩한 학교에서, 제일 어린 나는 동무들 사이에서 귀염을 받았다. -『동아일보』, 1930년 4월 2일 일제는 〈조선교육령〉(1911)을 통해 ‘모든 조선의 아동을 일본의 충량(忠良)한 신민(臣民)으로 만들겠다’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여기서 ‘충량한 신민’이란 일제의 통치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오직 충성과 복종만을 다하는 존재를 뜻한다. 이는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말살하고 일본 제국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러한 목적으로 일제는 조선의 학령기 아동들을 강제로 보통학교에 취학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보통학교에서 모든 취학 아동을 수용할 수 없었다. 당시 상황은 지원자의 약 3분의 1만이 보통학교에 간신히 입학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반면 서당의 경우 엄청난 성장세를 나타내고 있었다. 1911~1916년까지의 6년 동안 서당의 수는 1만 6천여 개에서 2만 5천여 개로, 학생 수는 14만 1천여 명에서 약 26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사실 이러한 서당의 급성장은 양적 증가만이 아니라 서당이 항일 애국적인 성격으로 변화한 것도 담고 있었다. 이 시기 서당들 상당수가 애국지식인과 민중에 의해 설립된 것으로, 항일 민족 교육 기관의 성격을 갖춘 것들이었다. 전통적인 한문 교과뿐만 아니라 우리 말과 우리의 역사, 지리, 산술 등의 교과를 교육하여 학생들에게 근대 지식을 전수함과 동시에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있었다. 사실상 서당의 개량이 서당 내부에서 자발적으로 진행되는 상황이었다. 예를 들어, 한일병탄(1910)이 이루어지기 직전에 실린 「사숙개량의(私塾改良議)」라는 논설을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아, 이 시대가 어느 시대인가? 풍운(風雲)이 완전히 변하고 천지가 새로 열려 대문명의 빛이 동서에 비치며, 대분투의 활극이 세계를 가로지르는 시대가 아닌가. … 그런데 이 시대에 『중용』과 『대학』을 끌어안고 … 『통감』과 『고문진보(古文眞寶)』를 읽으며 “이 외에 더 배울 것이 없다”라고 하는 사람은 미친 사람이 아니면 꿈꾸는 사람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한국의 인재를 가두고 민력을 쇠약하게 만든 한문 사숙이 지금도 그 뿌리를 뻗어 신교육의 흐름을 방해하고 있다. …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사숙 개혁안을 제안한다. … 사숙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함께 … 사숙 제도를 개혁하여 한문 서적만 가르치지 말고 신학문에 관한 교과를 도입하며, 한자 연구를 전적으로 의지하지 말고 신지식이 있는 교사를 초빙하여 국내외 지리, 역사, 국어, 산술, 체조 등의 기본이라도 가르쳐 신교육의 혜택을 받도록 하라. -『대한매일신보』 1910년 5월 7일 이에 총독부는 서당의 존재와 확산을 경계했지만, 이를 활용하는 방안을 구상하였다. 서당을 갑자기 타파하기보다는 이를 활용하여 일본어와 일제의 가치관을 교육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일제는 「서당규칙」(1918)을 통해 서당의 설비, 교육 내용, 교수법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면서 고루한 서당을 개량하겠다고 공표하였다. 하지만 이는 ‘서당 개량’이라는 미명 아래 식민지 지배의 도구로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보통학교로의 입학률이 낮은 상황에서 사립학교들이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서당으로 전환하였기 때문에, 서당에 대한 통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먼저, 서당에서 식민지 민중을 동화하는 데 필요한 일본어 교육을 강제하였다. 다음으로, 일제의 가치관을 교육하고자 서당의 교사와 교재를 통제하였다. 민족주의적 성향을 지닌 서당 훈장을 감시하고 지도하며, 일제의 가치관과 어긋나는 교재를 검열하여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예를 들어, 경기도 수원군 음덕면에서 북양서당(北陽書堂)을 설립·운영한 백남운은 학생들에게 애국하는 길을 교육하다가 발각되어 탄압을 받기도 했다. 또한 서당의 가장 기본적인 교재인 『동몽선습』도 한국사 부분이 실려 있다고 하여 서당에서 금지시켰다. 사실상 일제의 ‘서당 개량’은 교육의 근대적 개량이 아니라 식민지배를 위한 개량이었다. 더군다나 일제는 ‘서당 개량’을 통해 서당을 보통학교 아래에 편제함으로써 그 위상을 대단히 약화시켰다. 이는 서당이 다양하고 폭넓은 역할과 성격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서당을 초등 교육을 보조하는 기관으로 제한하려 했음을 보여 준다. 서당의 민족교육과 일제의 탄압 일제의 탄압정책에도 불구하고 서당은 민족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지속하였다. 「서당규칙」이 공포된 이듬해인 1919년 3·1운동과 그 이후의 만세운동에는 상당수의 서당 훈장들과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훈장들이 만세운동을 위한 격문을 작성하고, 서당에서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실제로 경남 창원군 진전면의 변우범 훈장은 서당에서 태극기를 제작하여 주민들에게 배포하기도 하였다. 3·1운동 당시 전국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난 75개 학교 중 12곳이 서당이었으며, 체포된 1만 9525명 중 3754명이 서당 교육을 받은 인물이었다. 이는 서당 출신들이 3·1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음을 보여 준다. 대표적인 예로 강원도 원주군 소초면 둔둔리서당의 훈장 박영하(朴英夏)를 들 수 있다. 그는 4월 5일의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청년들을 규합하였으며, 만세운동 전날에는 “노예로 사는 것이 죽음보다 좋을쏘냐? 죽음 속에서도 삶의 길을 찾으리라”라는 내용의 격문을 배포하였다. 당일에는 직접 면사무소에 가서 면장에게 독립만세를 외치라고 요구하였고, 거절당하자 스스로 선두에 서서 군중들의 호응을 이끌어 냈다. 이뿐만 아니라, 서당 훈장으로서 독립운동에 직접 참여한 이들도 있었고, 서당에서 민족교육을 위한 야학운동을 벌이는 이들도 있었다. 1장에서 언급하였듯이, 경북 영주 무섬마을의 ‘아도서숙’은 항일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많은 서당 훈장들이 파리장서운동에 참여하였다. 이 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열린 파리 강화 회의에 한국 유림 대표 137명이 연명으로 독립을 국제 사회에 청원하는 서한을 작성한 것이다. 이 가운데 경남 밀양 자암서당(紫巖書堂)의 훈장 노상직(盧相稷, 1855~1931)과 제자 13명이 함께 서명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서당이 민족교육의 장소로 활용됨에 따라 일제는 서당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1929년, 기존의 「서당규칙」을 개정하여 서당 운영에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고, 1930년대에는 전국적으로 서당 폐쇄 명령을 여러 차례 내렸다. 허가 없는 서당은 경찰이 폐쇄하였고, 인가제를 시행하여 서당 신설을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 또한 서당 정원을 30명으로 제한하고 이를 초과한 서당에 제재를 가했다. 일제는 다양한 구실을 들어 서당을 폐쇄하였다. 예를 들어, 목포 남교동서당은 학생이 190여 명에 이르는 대규모 서당이었는데, 수신(修身) 시간에 일제의 가치관과 어긋나는 계급투쟁 의식을 가르치고 “왜 우리는 가난한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와 같은 시험문제를 출제하여 교사 3명이 검거된 후 폐쇄되었다. 또한, 강원도 철원군 어운면의 전기범이라는 서당 교사는 제자들에게 민족주의 의식을 고취하는 작문을 짓게 하고 이를 실천하게 했다는 이유로 기소되어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다. 이처럼 일제의 강력한 통제 정책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선각자들의 애국 정신과 교육 활동이 서당을 통해 발현되었다. 그러나 1930년대 이후 일제의 강력한 탄압으로 서당의 수는 급격히 감소하게 되었다. 서당을 ‘부패한 한문 교육을 담당하는 낡은 교육기관’이자 ‘초보적인 아동 교육기관’으로 보는 잘못된 인식만이 남겨졌다. 이러한 일제강점기의 잘못된 인식은 해방 이후에도 지속되어, 서당을 민족교육의 요람이자 항일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 보지 않고 시대에 뒤떨어진 교육기관으로 평가절하했다. 그러나 서당은 시대와 상황에 맞춰 유연하게 변모하면서 교육의 본질을 지켜왔던 교육기관이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시대의 변화에 편승하지 않고 전통적인 방식을 강건하게 유지하면서 민족교육의 요람으로 기능했던 서당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제자들과 함께 파리장서에 서명했던 노상직의 자암서당이다. 이 자암서당은 전통적인 운영 방식을 강하게 고수하였다는 점에서 조선시대 서당의 일상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전통적인 서당 교육이 민족운동으로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도 살펴볼 수 있다. 이제 자암서당을 통해 서당의 일상을 들여다보도록 하겠다. -
서당, 모든 이의 공부방- 기록자료
- 문화
3. 20세기 서당: 전통과 근대의 기로 자암서당의 일상 자암서당의 교육철학 【그림 20】 경남 밀양 자암서당(紫巖書堂) 자암서당의 훈장 노상직은 1899년 3월 21일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보여 주었다. 훌륭한 명성은 벗의 충고에 달려 있으니 / 令名蓋在友之爭 서로 사귐에 있어 어찌 영합할 수 있으리오. / 相接那會事合迎 말과 행동을 기록해 바로잡고 경계하여 / 籍記云爲規且警 잠시라도 악한 마음 생기게 하지 말지니. / 須臾勿使惡心生 -『자암일록(紫巖日錄)』(1899.3.21) 이어서 그는 “장부 하나를 마련해야겠다. 매일 각자의 선악을 기록하여 악을 없애고 선을 좇는 데에 도움이 되도록 해야겠다. 또한 일을 처리하는 방식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함께 기록하여 그것의 적절함을 검토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라고 말하였다. 자암서당의 일지인 『자암일록』은 이렇게 탄생하였다. 이 『자암일록』은 지금까지 알려진 서당에 관한 가장 상세하고 구체적인 기록이다. 매일 생도 중 1명이 당번인 직일(直日)을 맡았다. 직일은 노상직을 포함한 생도들의 일상과 서당 생활을 빠짐없이 기록했다. 전체 일지의 분량은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는 자암서당 초기 약 2년간(1899.3-1900.12)의 기록만 남아 있다. 그러나 이 자료는 마치 눈앞에 펼쳐 보인 듯 서당의 일상을 너무도 생생히 보여 준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노상직은 29세(1883)부터 생을 마칠 때까지 거의 5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서당교육에 헌신하였다. 개항 이후 신학문 전파를 위한 근대교육기관이 설립되고 과거제가 폐지되는 등 전통적인 서당교육의 실효성이 약화되는 상황에서도, 그는 서당교육을 포기하지 않았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았을 때에도 노상직은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되찾기 위한 계책을 도모하지 못하고 있으니 평소 배운 학문이 모두 헛된 것이겠지만, 배우러 온 제자들을 돌려보내지 않는 것은 우리 조선의 근본인 유학의 맥을 잇기 위해서이다”라며 굳건한 의지를 보였다. 심지어 1910년 일제의 국권 침탈로 대한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그는 아래와 같이 말하며 서당 강학을 이어가고자 했다. 우리들의 운명이 불행하여 고국의 역사를 지키지 못하였으므로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학문을 해도 학문이 될 수 없다. 이미 죽을 자리를 얻지 못하였으니, 오히려 마땅히 우리 선왕(先王)께서 교육으로 자강(自强)을 꾀한 방책을 지켜야 할 것이다. -『소눌선생문집(小訥先生文集)』 이처럼 노상직에게 서당교육은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니라, 격동의 시대에 사라져가는 조선의 정신적 뿌리인 유학을 이어감으로써 구국(救國)의 희망을 지켜 내려는 노력이었다. 다시 말해, 민족 정체성과 정신을 지켜 민족 재건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한 숭고한 사업이었던 것이다. 이 점은 노상직이 서당의 이름을 ‘자암(紫巖)’이라 지은 이유에서도 분명하게 확인된다. 서당 근처에 자줏빛 바위가 있었던 것은 핑계일 뿐, 사실 남송의 명신(名臣) 장준(張浚, 1097~1164)의 호 ‘자암’을 따온 것이었다. 장준은 금(金)나라와의 화의(和議)를 거절하고 송나라의 영토 회복을 주장한 인물이었다. 노상직이 생각한 조선유학의 맥은 ‘성인의 책을 읽고 그 내용을 몸과 마음으로 익혀 성인이 되는 공부’ 즉 ‘성학(聖學)’이었다. 이는 아침에 일어나 저녁에 잠들 때까지 도덕적 각성 속에 살아가는 인간상을 추구하는 공부였다. 그것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소학』에서 가르치는 ‘자신의 주변을 깨끗이 하고 어른의 부름에 잘 응하며 상대방을 맞이하고 배웅할 때의 예절’을 몸과 마음에 완전히 체화하는 공부였다 노상직은 이러한 기본에 충실할 때 국권 회복이라는 거대 과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 기본을 지키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앞서 제자들에게 보여 준 시에서 언급했듯이 ‘잠시라도 악한 마음 생기지 않도록’ 부단한 자기성찰과 수양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바로 ‘경(敬)’의 공부가 요구된다. 이와 같은 ‘일상에서의 경건함과 예의범절 체득’은 노상직이 평생 굳건히 지켜온 서당교육의 철학이자 운영 원리였다. 노상직이 직접 편찬한 『훈몽첩(訓蒙帖)』은 자암서당의 교육철학을 구현한 중요한 교재였다. 이 책에는 서당 생활의 규범과 행사 규정, 그리고 학생들의 마음가짐을 바로잡아 주는 여러 잠언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노상직은 『훈몽첩』에 자암서당의 교훈에 해당하는 「춘첩(春帖)」을 포함시켰다. 이 시는 서당 대문과 학생들의 거처에 부착되어, 그들이 수시로 마주할 수 있도록 했다. 일찍 일어나 밤이 깊어서야 잠들고 / 夙興夜寐 마당 안을 물 뿌리고 깨끗이 청소하라. / 灑掃庭內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화하고 공손하며, / 溫恭朝夕 일을 처리함에 조심하고 성실하게 하라. / 執事有恪 네가 꺼내는 말을 신중히 하고 / 愼爾出話 너의 행동을 경건하게 하라. / 敬爾威儀 두 마음을 품지 말고 근심하지 말지니 / 無武無慝 하늘이 너를 굽어보고 계시느니라. / 上帝臨汝 -「춘첩(春帖)」 노상직의 「춘첩」은 단순히 학생들에게 행동 규범을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 시는 학생들에게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 도덕적이고 경건한 태도를 견지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시의 전반부에서는 ‘근면, 청결, 예의, 성실, 신중함, 경건’ 등의 덕목을 하나하나 열거하며, 이러한 가치들을 생활 속에서 실천할 것을 강조한다. 하지만 「춘첩」은 이러한 덕목들이 단순히 외적인 규범으로만 준수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시의 마지막 두 구절, “두 마음을 품지 말고 근심하지 말지니, 하늘(上帝)이 굽어보고 계신다”라는 표현은 이 덕목들이 내면의 진실한 신념과 태도로 구현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도덕적 행위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보고 있는 하늘 앞에서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고자 하는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암서당의 교육이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예의범절의 실천에만 그치지 않음을 보여 준다. 「춘첩」은 이러한 외적 규범의 이면에 자리한 경건한 마음가짐, 즉 ‘경(敬)’의 체득을 학생들에게 촉구하고 있다. 노상직은 학생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예의범절을 실천하는 동시에, 그 근간이 되는 경건한 태도를 내면화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피상적인 규범 준수를 넘어, 진정한 내적 수양을 통해 덕을 일상에 구현할 때 비로소 성인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교육철학이었다. 노상직은 이와 같은 성학(聖學)의 이념을 근대 이행기의 혼란한 현실 속에서도 굳건히 지켜져야 할 조선 유학의 정수로 파악했고, 이를 서당 교육을 통해 구현하고자 했다. 격변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으로서 그가 선택한 실천적 방도는 서당을 통해 성학의 교육철학을 실천하고 성인을 목표로 하는 인재를 양성하는 일이었다. 노상직은 이러한 인재들이야말로 구국을 위한 사회적 실천을 이룰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이는 ‘내적으로 성인의 덕을 닦고 외적으로 왕도(王道) 정치를 구현한다’라는 내성외왕(內聖外王)의 이상에 대한 믿음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노상직은 자암서당에서 800여 명이 넘는 제자를 키워 냈다. 그가 자신의 제자 13명과 함께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파리 장서’에 서명한 것은 이러한 교육철학과 신념이 구체적 실천으로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노상직의 이러한 교육철학은 당시 현실에서 요구되는 실천 역량을 갖춘 인재를 배출하는 데 있어 일정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개항 이후 조선 사회가 맞닥뜨린 급격한 변화 속에서 전통 유학의 가치관과 방법론만으로는 새로운 시대의 과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대의 시대적 조류에 완벽히 부응하지는 못했을지언정, 구국을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실천했던 노상직의 면모 자체는 결코 폄하할 수 없을 것이다. 급격한 서구화와 일제 침략으로 인해 조선의 정체성이 흔들리던 상황에서, 민족 고유의 전통과 윤리를 지켜 내는 일 또한 중요한 과제였기 때문이다. 노상직은 서당 교육을 통해 이러한 문화적 자존심을 지키고 민족 정신을 함양하는 데 기여하고자 했던 것이다. 자암서당의 하루 자암서당의 하루는 새벽녘 어스름이 걷히고 동이 트기 시작할 무렵, 고요한 적막 속에서 시작된다. 훈장 노상직의 처소인 구사재(九思齋)를 시작으로, 학생들의 기숙사인 문창재(文昌齋), 노화정(蘆花亭), 세곡정사(細谷精舍), 몽재(蒙齋)에 이르기까지 하나둘씩 등잔불이 밝혀진다. 학생들은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정갈하게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는다. 옷을 단정하게 입고 정좌하여 전날 배운 내용을 복습한다. 서당의 인원은 50여 명. 7세 전후의 어린아이부터 30대 장년까지 다양한 연령대가 함께 수학하고 있지만, 대부분은 20대 청년들이다. 아침 해가 떠오르자 그들은 연장자부터 차례로 줄을 서서 읍례(揖禮)를 한다. 경건한 마음으로 합장하고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한다. 이내 조용히 식당으로 향하는 발걸음에서는 단정함이 느껴진다. 밥상에 마주 앉은 학우를 향해 공손히 인사를 한 후, 나이 많은 이가 수저를 들기를 기다려 식사를 시작한다.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오늘의 당번인 직일(直日)이 앞으로 나와 「경재잠(敬齋箴)」을 암송하기 시작한다. 옷을 단정히 입고, 자세를 바르게 하며, / 正其衣冠 尊其瞻視 마음을 가라앉히고, 하늘을 마주 모신 듯 하라. / 潛心以居 對越上帝 한 발 한 발 무겁게 디디고, 손놀림은 공손히 하라. / 足容必重 手容必恭 … 젊은이들이여, 생각하고 공경하라. / 於乎小子 念哉敬哉 먹으로 경계하는 글을 써서, 감히 마음에 고하노라. / 墨卿司戒 敢告靈臺 -「경재잠」 「경재잠」은 주희가 서재의 벽에 써 붙이고 스스로 경계한 ‘잠(箴)’을 말한다. 여기서 ‘잠’이란 ‘마음에 두는 침(針)’으로, 곧 자신을 다잡기 위해 자기에게 놓는 치료법이다. 자암서당에서 매일 아침 식사 후 직일이 「경재잠」을 암송하는 시간은 단순히 귀로 듣고 머리로 외우는 의식이 아니다. 그것은 경건한 삶의 태도를 일깨우는 나침반이자, 성현의 가르침을 내면화하는 과정이다. 겸손한 자세로 자신을 성찰하고, 욕심을 경계하며 학문에 정진할 것을 되뇌도록 했다. 이를 통해 자암서당의 학생들은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눈길을 공손히 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무겁게 내딛을 것을, 욕심을 경계하고 경건한 마음을 잃지 않기를 다짐한다. 이처럼 자암서당의 아침은 경건함으로 시작된다. 학생들은 「경재잠」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늘 경계하는 자세로 하루를 보내고자 한다. 이는 단순히 지식을 쌓는 공부가 아닌, 몸과 마음을 다스리고 인격을 도야하는 수신(修身)의 과정이다. 자암서당은 이렇게 성현의 발자취를 좇는 경건한 배움으로 가득 차 있는 도학서당(道學書堂)이었다. 「경재잠」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학생들은 다시 강당으로 모여든다. 아침 강독 시간인 조강(朝講)이 시작되는 것이다. 자암서당에서는 학생들의 수준에 맞는 다양한 교재를 활용하였다. 한자를 막 배우기 시작하는 어린 학동들을 위해서 『천자문』, 『추구』, 『동몽선습』 등과 같은 ‘문자 학습 단계’의 교재들이 사용되었다. 이 책들로 기초를 다진 학생들은 『사략』, 『통감절요』 등과 같은 ‘해석 단계’의 교재를 통해 한문 해석 능력을 길렀다. 더 나아가 『사서오경』, 『근사록(近思錄)』, 『심경(心經)』 등 유교 경전의 심오한 내용을 공부하는 단계로 이어졌다. 여기에 『이백시집(李白詩集)』, 『두율(杜律)』 등과 같은 시문집, 『고경중마방(古鏡重磨方)』, 『훈몽첩』등의 다채로운 책들이 더해져 학생들의 학식을 풍부히 하였다. 매일 이뤄지는 조강에서는 ‘시독강(時讀講)’을 통해 학습의 진도 상황을 점검한다. 시독강이란 최근에 읽고 있는 내용을 학생 스스로 암송하고 해석하는 시간이다. 여기서 학생들의 이해도는 통(通)·조(粗)·약(略)·불(不)의 네 등급으로 평가되며, ‘불’에 해당하면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이는 학습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함이었다. 자암서당의 점심 식사 후 오후 일과(日課)는 고시(古詩) 창작을 중심으로 한 문예 교육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었다. 매일같이 훈장 노상직이 직접 출제한 시제에 맞춰 학생들은 시를 지었고, 그 결과물은 즉석에서 평가를 받았다. 노상직은 시 소재 선정에 있어 학생들의 시야를 최대한 넓히려 노력했다. 서당 안에서 일어나는 일상적 사건부터 특별한 행사, 자연 풍경, 절기 등을 폭넓게 아우르되, 서당 밖의 일이라도 교훈적 가치가 있다면 마다하지 않고 채택했다. 흥미로운 점은 노상직이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적 고사, 특히 자신의 학문적 계보에 해당하는 정구(鄭逑, 1543~1620)와 관련된 일화를 시의 소재로 자주 활용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시 창작이 단순한 문예 활동을 넘어 역사의식을 함양하고 학통을 계승하는 의미 있는 과정이었음을 말해 준다. 또한 제문(祭文)을 짓게 하거나 기부에 대한 감사의 뜻을 담은 시를 쓰게 한 것은, 시를 통해 인간관계를 돈독히 하고 사회적 책임을 일깨우려 한 노상직의 교육관이 반영된 결과로 볼 수 있다. 학생들이 지은 시는 연령에 따라 차등을 두어 평가했다. 애초에는 성년과 미성년 학생을 함께 평가하다가, 어린 학생들이 상위 등급을 받기 어려워하자 20세를 기준으로 상재(上齋)와 하재(下齋)로 나누어 평가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이는 학구열이 있으나 역량이 부족한 어린 학생들의 의욕을 고취하고, 연령에 맞는 맞춤형 교육을 제공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오후 일과가 끝난 뒤에 저녁식사 전까지 학생들은 독서나 서사(書寫) 활동을 하며 개인적인 성장을 도모하였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에는 등잔 아래 모여 앉아 석강(夕講)을 시작하였다. 석강의 주된 내용은 잠명(箴銘)을 읽고 해설하는 것이었다. 잠명이란 자신을 경계하고 수양하는 데 도움이 되는 교훈적인 글이다. 자암서당에서는 주로 이황이 엮은 『고경중마방(古鏡重磨方)』에 수록된 잠명을 사용했다. 『고경중마방』에는 중국 고대 성왕의 글부터 당·송대 명현들의 잠언까지 다양한 글들이 실려 있어, 학생들은 선현들의 지혜를 배우고 내면화할 수 있었다. 석강은 대개 연령순으로 진행되었고, 잠명을 읊기 전에는 반드시 읍례(揖例)를 행했다. 이는 학문에 임하는 경건한 자세를 일깨우기 위함이었다. 잠명 외에도 『소학』, 『대학』, 『중용』, 『논어』 등의 유교 경전에서 핵심적인 구절을 뽑아 암송하기도 했다. 한편 자암서당에서는 날씨나 기타 사정에 따라 석강을 탄력적으로 운영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철에는 매일 하던 석강을 6일에 한 번꼴로 줄이고, 그마저도 너무 더울 땐 임시 휴강하기도 했다. 휴강 때는 잠명 대신 절구나 율시를 짓는 과제를 내주어, 학생들의 문학적 소양을 기르는 기회로 삼았다. 때로는 학생들이 자신의 꿈과 포부를 말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서로의 생각과 가치관을 공유하며 견문을 넓혔다. ▪ 함: 조정의 높은 자리에 올라 소인이 멀리 도망가고 군자가 뜻을 이루도록 하고 싶습니다. ▪ 우상: 열심히 공부하여 천하 제일의 인물이 되고 싶습니다. ▪ 우철: 조정에 나아가 천하의 어지러움을 다스려 안정시키고 싶습니다. ▪ 우직: 항상 학문에 정진했으면 합니다. ▪ 명주: 독서에 힘써 선비의 본분을 지키고 싶습니다. ▪ 기락: 성군(聖君)이 다스리는 축복받은 세상을 만나고 싶습니다. ▪ 우전: 산골짜기에 거처하며 유유자적하며 살고 싶습니다. ▪ 후명: 부자가 되어 많은 벗을 사귀고 싶습니다. ▪ 재정: 평생 독서에 힘써 천하의 저명한 인물이 되고 싶습니다. ▪ 일화: 입신출세하여 임금을 섬기고 싶은데, 학업이 뛰어나지 못한 것이 유감입니다. ▪ 기수: 선비의 길을 걷고 싶습니다. ▪ 상현: 부모님께서 오래 사시고 학업에서 성취를 이루고 싶습니다. ▪ 해종: 어진 스승을 모시며 바른 마음과 행실을 지키고 싶습니다. ▪ 건흥: 큰 고을의 수령이 되어 학문을 발전시키고 싶습니다. ▪ 승립: 평생 독서에 힘써 성인이 가르침을 즐기며 실천하고 싶습니다. ▪ 용우: 당대에 명성을 떨치고 싶습니다. -『자암일록』(1900.6.1) 이렇듯 자암서당의 석강은 엄숙하면서도 유연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학생들은 선현들의 잠언을 읊조리고 되새기는 가운데 자신을 성찰하고 심신을 다스리는 법을 배웠다. 또한 배움의 과정에서 서로의 꿈을 확인하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 소중한 시간이기도 했다. 석강을 마치면 학생들은 나이 순서대로 읍례를 행한 뒤 각자의 거처로 돌아가 취침했다. 한편, 직일 담당 학생은 석강 후 강석에서 제출된 내용을 대조한 후, 학생들의 선행과 악행을 기록한 장부인 『선악적(善惡籍)』에 기록했다. 이 장부는 학생들의 몸과 마음을 단속하며 성인의 학문을 익히고자 하는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매일 학도들의 언행을 관찰하여 특별한 선행과 악행이 있으면 이를 선악적에 기록하고, 매달 일정 시기에 이를 점검하여 상벌을 시행했다. 『선악적』은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고 반성하게 하는 계기였다. 자신의 악행이 기록된다는 사실은 학생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켰고, 언행을 조심하게 만들었다. 반면 선행을 인정받는 것은 학생들에게 긍정적 동기부여가 되었다. 이는 외적 행동뿐 아니라 내적 동기와 마음가짐의 변화를 이끌어 냈다. 지금까지 보았듯이, 자암서당의 하루는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고 예절을 익히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이곳에서의 교육은 학생들의 마음가짐과 인격을 변화시키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다. 이는 자암서당의 교육철학인 ‘경(敬)’의 공부와 맞닿아 있다. ‘경’은 겉으로 드러나는 예의범절을 넘어, 내면의 경건함과 진실함을 가리킨다. 자암서당의 하루는 『경재잠』을 암송하며 아침을 맞이하였다. 성현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또한, 석강에서 『고경중마방』 등의 잠명을 읽고 해설하는 것 역시 ‘경’의 정신을 함양하기 위함이었다. 학생들은 선현들의 잠언을 되새기며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교만함을 경계하고 겸손함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였다. 나아가 선행을 실천하고 악행을 멀리하고자 다짐하였다. 이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뿐만 아니라, 내면의 수양을 중시하는 자세였다. 노상직은 학생들이 선현의 가르침을 삶 속에서 실천하며 인격으로 체화되기를 희망했다. 자암서당은 단순한 훈육의 공간이 아닌, 덕망 있는 인재를 길러내는 도학(道學)의 요람이었다. 이곳에서의 교육은 단순히 출세, 지위, 돈, 명예 등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학생들에게 평생 공부하고 수양하는 선비의 자세와 태도를 심어 주는 것이 자암서당의 진정한 목적이었다. 시대의 혼란과 격변 속에서도 자암서당은 교육의 본질적 목적인 인격의 함양과 가치관의 확립을 향해 나아갔던 것이다. -
서당, 모든 이의 공부방- 기록자료
- 문화
나오는 말 서당의 역사와 유산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해군 소위 후보생으로 두 차례 강화도 침공에 참여했던 장 앙리 쥐베르(Jean Henri Zuber, 1844~1909)는 조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극동의 국가에서 우리가 경탄하지 않을 수 없고 동시에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아무리 가난한 집이라도 집 안에 책이 있다는 사실이다. -『조선원정기』 당시 프랑스에서는 상당수가 문맹이었고, 서적은 일부 특권층의 전유물이었다. 선진국이라고 자부했던 프랑스와는 달리, 조선에서는 책에 대한 사랑과 문자를 소중히 여기는 전통이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쥐베르는 이러한 조선의 문화에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서당이라는 교육 시스템 덕분이었다. 서당을 통해 누구나 책을 접하고 학문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이다. 서당은 조선의 독서 문화를 지탱하는 중심축이었다. 모든 사람이 배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지식에 대한 접근성을 높인 서당은 조선 사회에 깊이 뿌리내려 있었다. 당시 조선의 교육 환경은 동아시아는 물론이고 유럽의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서당은 고려 말 사학(私學)의 전통에서 시작되어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사회 변화의 흐름에 능동적으로 적응하고 대응하며 꾸준히 발전해 왔다. 근대로 이행하는 격동의 시기에도 서당은 시대정신을 선도하고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는 교육 기관으로서 그 본령을 다하였다. 유교적 가치관의 고양과 인재 양성, 신분제 동요에 따른 질서 유지, 민족정신 계승과 항일 독립운동의 거점 등 서당은 시대가 부여한 다양한 교육적 소명을 성실히 수행해 왔다. 조선 건국 초기에 서당은 민간 교육의 핵심 주체로 부상하였다. 관료 임용의 주요 통로인 과거 제도를 뒷받침하는 인재 양성 기구로서 역할을 하였고, 학식과 덕망을 갖춘 학자들이 서당을 운영하여 개인 수양과 향촌 교화의 장소로 활용하였다. 16세기에 들어 서당은 사림(士林)이 성장하는 흐름 가운데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사림들은 성리학적 이념을 심화하고 정치에 적극 관여하며 사회 변혁을 주도해 나가고자 했다. 이 일련의 정신적·사회적 운동의 토대가 된 것이 바로 서당이었다. 당대 최고의 석학들이 교육에 매진했던 퇴계 이황의 도산서당 등은 도학적 이상 실현과 후학 양성을 위한 거점으로 기능하였다. 이들은 강학을 통해 학문적 지평을 확장하고 정치적 비전을 공유하는 한편, 『주자가례』의 생활화와 향약의 보급 등을 통해 향촌 현실에 성리학적 질서를 구현하는 데 진력하였다. 결과적으로 서당은 사림의 성장을 추동하고 조선 중기 사상계의 판도를 뒤흔드는 데 일조하였으며, 그 자체로 하나의 교육 운동이자 사회 운동으로서 자리매김하였다. 17세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양란의 참화는 조선 사회에 극심한 동요를 초래했다. 수많은 인명 피해뿐만 아니라 서원과 향교의 피폐, 농지의 황폐화, 신분제의 균열 등 사회 전반에 걸친 위기가 도래하였다. 이에 통치 권력과 재지 사족들은 유교적 교화를 통해 사회질서를 회복하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국가 차원에서 서당 진흥책이 추진되었으며, 수령과 유림이 협조하여 서당 설립을 주도하고 재정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서당은 전국적으로 급속히 보급되었고, 양란 이후 혼란한 사회를 재건하는 교육의 구심점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소학』을 중심으로 유교 윤리를 교육하고 신분제 질서를 재확립함으로써 17세기 교육계를 대표하는 중추 기관으로 발돋움하였다. 18-19세기, 서당은 신분과 연령을 초월한 보편교육 기관으로서 큰 번영을 이루었다. 교육의 저변이 획기적으로 확대되어 양반은 물론 중인, 상민, 노비에 이르기까지 신분의 제약 없이 교육받을 수 있었고, 학습자의 연령 역시 어린아이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서당은 성별과 신분, 연령에 관계없이 배움에 대한 열정만 있다면 누구나 수학할 수 있는 ‘모든 이의 공부방’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또한 교육 내용과 방식에서도 평민적이고 대중적인 변화가 감지되었다. 기존의 성리학적 교육 내용에서 탈피하여, 『전등신화』나 『아희원람』 같은 민중적 취향의 교재가 사용되었고, 탄원서와 같은 실용 문서 교육의 강화로 평민층의 교육열에 부응하고자 하였다. 각종 의례와 풍속, 다양한 학습놀이는 서당을 지역 공동체의 축제와 화합의 장으로 변모시켰다. 이처럼 조선 후기 교육의 보편화와 생활화를 선도하며 서당은 대중교육의 전당으로 우뚝 섰다. 근대 문물이 도입되기 시작한 19세기 말, 서당은 전통과 변화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근대 학교의 설립과 신교육의 충격으로 전통 교육기관으로서의 서당은 심대한 위기에 직면하였다. 하지만 선각자들은 이를 교육 개혁의 기회로 포착하고 서당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개선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신구 학문의 장단점을 절충하고 근대적 교육과정과 교수법을 과감하게 수용하여 서당을 자생적으로 발전시키는 작업을 시도했다. 그러나 1910년 한일병탄으로 우리 민족은 총체적 위기에 직면하였다. 일제는 종주국 본위의 식민교육을 강요하며 전통 교육기관 말살에 혈안이 되었다. 1918년에는 「서당규칙」을 발포하여 서당의 시설과 운영, 교과와 교재를 탄압하고 감시하기 시작했으며, 1930년대 이후로는 대대적인 서당 폐쇄령을 남발하였다. 일제가 서당에서 근대적 지식이 아닌 봉건적이고 낡은 지식과 도덕을 가르친다는 구실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서당을 기반으로 민족교육이 확산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일제는 ‘서당개량’이라는 명목하에 서당에서 일본어 교육을 강제하고, 서당을 보통학교 아래에 편제함으로써 그 위상을 대단히 약화시켰다. 비록 일제의 탄압이 거셌지만, 서당은 굴하지 않고 민족정신을 고수하며 항일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서당의 교사와 학생들은 만세운동의 선봉에 섰으며, 민족교육을 지속해 나갔다. 일제가 서당을 ‘낡고 해로운 악습’으로 매도했음에도, 서당은 애국계몽의 횃불을 높이 치켜들며 우리 민족교육의 맥을 잇고자 분투했다. 그러나 일제의 강력한 탄압으로 인해, 서당이 ‘구시대적이고 부패한 교육기관’ 혹은 ‘초보적 수준의 아동교육기관’이라는 왜곡된 인식이 식민지배의 잔재로 남게 되었다. 이러한 그릇된 편견은 시급히 바로잡아야 할 과제이다. 서당이 남긴 교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다. 급변하는 시대상황 속에서 서당의 가르침은 교육의 존재 이유와 방향성에 대해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한다. 무엇보다 서당교육의 핵심은 공부를 단순한 도구가 아닌 삶 그 자체로 인식하는 관점에 있다. 공부의 궁극적 목적은 외형적 성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 성장에 있으며, 인격을 도야하여 이상적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육이 입시와 경쟁의 수단으로 전락해 교육 본연의 의미를 상실해가는 현실 속에서, ‘공부가 곧 삶’이라는 서당 교육의 정신은 어느 때보다 소중한 가치로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이에 공부의 참된 의미와 가치를 훌륭하게 구현한 도산서당의 훈장인 퇴계 이황의 말로 이 책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군자의 학문은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며,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란 ‘어떤 목적을 두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깊은 산과 울창한 숲속에 홀로 피어난 난초가 하루 종일 향기를 내뿜으면서도 스스로 그 향기를 알지 못하는 것처럼, 군자가 자기 자신을 위해 공부를 하는 진정한 의미와 일치한다. -『퇴계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