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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이원익 에 대한 총서 검색 결과 전체38
  • 왕의 비서실, 승정원 사람들과 승정원일기
    • 기록자료
    • 정치
    월 5일, 인조가 이원익(李元翼)을 소견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대화를 주고받았음이 나타난다. 상이 이르기를, “전조가 병력이 강성하여 적을 토벌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내란이 연달아 일어났으니 참으로 경이 우려했던 것과 같다” 하였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소신의 소견으로는, 고(故) 통제사(統制使) 이순신 같은 이는 쉽게 얻을 수 없습니다. 요즘에는 이순신과 같은 자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왜란 당시에 이순신 하나밖에는 인물이 없었다”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이순신의 아들 이예(李䓲)가 현재 충훈부도사로 있는데 그도 얻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왜란 때에 이순신이 곧 죽게 되자 이예가 붙들어 안고서 흐느꼈는데, 이순신이 ‘적과 대적하고 있으니 삼가 발상(發喪)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이예는 일부러 발상하지 않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전투를 독려하였습니다” 하였다. ―『승정원일기』 32책(탈초본 2책), 인조 9년(1631) 4월 5일 이어서 인조는 인재 천거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대화를 이어 갔다. “옛 대신들은 필히 인재를 얻어 천거하였다. 경도 쓸 만한 인재를 천거하겠는가?”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이순신 같은 사람이 있다면 천거할 수 있겠지만 신은 병으로 몇 해 동안 칩거하여 사람들과 접하는 일이 드무니, 어찌 누가 쓸 만한지를 알아서 천거하겠습니까. 선묘조(宣廟朝)에 신은 이순신의 훌륭함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천거하였는데 통제사로 등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비국(備局)에서 다시 원균(元均)을 천거하여 통제사로 의망(擬望)하자, 신이 치계(馳啓)하여 이순신을 체차하고 원균으로 대신하면 틀림없이 일이 잘못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재삼 아뢰었으나 비국에서는 끝내 이순신을 체차하였습니다. 원균이 패배한 뒤에 다시 이순신으로 하여금 대신 군대를 이끌게 하였으나 대세가 이미 기울어 결국 패하고 말았으니, 지금까지도 이 일을 생각하면 울분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승정원일기』 32책(탈초본 2책), 인조 9년(1631) 4월 5일 위의 기록에서 이원익이 선조 대에 이순신을 천거한 사실과 더불어,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천거한 부분에 대해서는 울분을 가눌 수 없다고 하였음이 나타난다. 인조와 이원익의 대화가 『승정원일기』에 정리되는 과정에서,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말이 기록되었고,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면서,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다. 【그림 18】 『승정원일기』, 32책, 인조 9년 4월 5일 무신,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그림 19】 남해 관음포 이충무공 전몰 유허 이락사문,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에서 전재
  • 조선시대 재상 이원익의 관직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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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
    르다 이공상, 이원익의 뽕나무 『선조수정실록』 20년 조와 정약용(1762-1836)의 저서 『목민심서』에는 ‘이공상’이라는 말이 나온다. 글자 그대로 ‘이원익 상공(相公)의 뽕나무’라는 뜻이다. 내용은 이렇다. 이원익이 안주목사로 부임해 갔더니 주변 다른 지역과 달리 누에치기에 힘쓰지 않았다. 누에를 키우면 누에고치를 생산할 수 있고, 누에고치에서 명주실을 생산할 수 있었다. 명주실로는 비단을 생산할 수 있었다. 때문에 누에를 키우는 양잠은 농가의 귀한 경제활동이었다. 누에의 먹이가 뽕나무 잎이다. 본래 관서(關西) 지방에는 누에 치기가 성행했다. 이원익은 유독 안주에서 뽕나무를 키우지 않는 이유를 이상히 여겨서 지역 주민들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안주의 토질이 뽕나무에 맞지 않는다고 답변했다. 하지만 뽕나무는 본래 토질에 민감한 나무가 아니다. 이원익은 실천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안주의 각 방(坊)에 지시하여 집집마다 뽕나무 씨를 파종하도록 강력히 권장했다. 그러자 몇 해 지나서 안주에는 뽕나무가 길게 연이어 숲을 이루었다. 주민들은 이 뽕나무를 ‘이공의 뽕나무[李公桑]’라고 불렀다. 정약용은 안주에는 뽕나무가 1만 그루가 훨씬 넘게 있다고 말했다. 적어도 19세기까지 안주에 ‘이공상’이 존재하고 있음을 증언한다. 실제로 순조 재위 시절인 1828년에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던 박사호(朴思浩)의 사행일기 『심전고(心田稿)』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11월 10일. 상공상(相公桑)이 청천강 들판에 있으니, 오리(梧里) 이원익 상공이 심은 것이다. 수천 그루가 빽빽하게 우거져 숲을 이루었다. 백성들에게 누에치기와 명주 짜기를 권장했던 뜻이 아직도 풍성히 남아 있으므로 ‘상공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심전고』 제1권, 「연계기정(燕薊紀程)」 ‘이공상’은 이원익이 살아있을 때는 물론이고, 그의 사후에도 200년 넘게 안주 백성들의 생계를 든든히 떠받친 밑천이 되었다.
  • 조선시대 재상 이원익의 관직 활동
    • 기록자료
    • 정치
    왕후 폐비 논의와 이원익의 목숨을 건 상소 인조반정(1623)을 일으킨 세력은 반정의 명분으로 몇 가지 사항을 내세웠다. 그중 가장 핵심적인 명분은 ‘폐모살제(廢母殺弟)’였다. 즉 광해군이 모후(母后)인 인목대비(1584-1632)를 폐하고 형제 임해군(1574-1609)과 영창대군(1606-1614)을 죽였다는 것을 가장 큰 ‘거사’ 명분으로 삼았다. ‘폐모’와 ‘살제’ 두 가지 중에서도 더욱 치명적인 것은 모후를 폐한 것이었다. 동복과 이복의 형과 동생은 죽였고 계모는 죽이지 않았지만, 더욱 큰 죄는 어머니를 폐한 것이었다. 명분이라는 것이 속성상 사회적으로 사람들이 널리 받아들여야 성립된다. 폐모가 가장 큰 반정 명분이 되었다는 것은 당시 사회적 이념이 그랬던 것임을 뜻한다. 광해군 5년에 발생한 계축옥사는 인목왕후와 영창대군을 제거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조작된 사건이다. 영창대군은 광해군 6년 2월에 이미 유배지에서 살해되었지만, 여전히 인목왕후가 살아 있었다. 광해군 6년 12월에 광해군은 “저주와 흉서(凶書) 이 두 건의 일로 한 장의 교서를 지어 내일 제출하여 중외에 반포하라”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 기사의 끝에, 사관(史官)은 “이때 (인목왕후를) 폐비(廢妃)하려는 논의가 오랫동안 쉬지 않았는데 상이 이것으로 그 단서를 열었다”라고 덧붙였다. 이 교서의 반포가 결국 폐비 문제로 번져가자, 이원익은 중대한 결심을 한다. 이 논란의 끝이 어디로 귀결될지 분명했기 때문이다. 1615년(광해군 7) 2월에 이원익은 죽음을 각오하고 자제(子弟)를 물리치고 광해군에게 글을 올렸다.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걸고 감행한 상소였다. 이원익, 『서시자손』-자손에게 이르는 글 완평부원군 이원익이 차자를 올리기를, “삼가 아룁니다. 수년 이래 병으로 물러나 있어서 한 번도 국청(鞫廳)에 참여하지 못했고 또 일찍이 외부 사람과 만나지 않았기 때문에 (계축옥사) 추국의 전말 및 외간에 떠도는 말에 대하여 자세한 내막을 전혀 듣지 못했습니다. 지난번에 유생들이 대비(大妃)를 동요한 대관(臺官)의 처벌을 청할 때 조정의 의논을 들어보았는데, ‘대신(臺臣, 사헌부 관리들)이 각기 거처해야 된다는 말만 했을 뿐, 실로 (대비를) 동요하는 뜻은 없었다’ 하고 경연에서도 이런 말이 없었다고 하기에 신이 처음에는 의심하다가 끝내는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지난날 해조(該曹)가 교서를 반포하려는 일로 (저에게) 수의(收議)해 왔을 때, 신의 생각에 이 일은 추국의 곡절과 관계된 것이라 병들어 물러난 신하로서 알 일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에 감히 왈가왈부하지 않았고 해조의 공사(公事)에 이의를 제기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항간에 떠도는 말을 들으니, 머리를 맞대고 흉흉하게 하는 말이 ‘이로 인해 장차 대비에게까지 미칠 것이다.’라고 합니다. 신은 그만 놀라고 간담이 철렁 내려앉아 자신도 모르게 혼비백산했습니다. 어미가 비록 (자식을) 사랑하지 않아도 자식은 (어미에게) 효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자간이란 그 명분이 지극히 크고 그 윤기(倫紀, 윤리와 기강)가 지극히 무겁습니다. 성인(聖人, 여기서는 임금 광해군을 가리킴)은 인륜(人倫)의 극치인데, 성명(聖明, 현명한 임금)의 시대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만일 조정에 과연 이 논의가 없었다면 신이 경솔히 항간의 말을 믿고 사전에 시끄럽게 한 것이니 그 죄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신이 함부로 말한 죄를 다스려 사람들의 의혹을 풀어주소서. 그러면 이보다 더 다행스러운 일이 없겠습니다. 임금 사랑하기를 아비 사랑하듯이 하는데, 가진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그 아비에게 고하는 것은 자식의 지극한 정입니다. 신은 숨이 겨우 붙어있어 머지않아 죽을 것입니다. 성은을 받은 것이 깊었으나 보답할 길이 없으므로 차자를 쓰다가 떨려서 문장이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처분을 바랍니다” 하니, (광해군이) 답하기를, “차자를 보고서 놀라워 마음이 편치 못하다. (인목왕후에 대해) 과인의 떠받듬과 백관(百官)이 (인목왕후에게) 아침마다 알현하는 것이 여전한데, 경은 어디에서 그런 말을 듣고 문자로 나타내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가. 솔직하게 진술하여 아뢰라” 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사관(史官)을 보내 물어서 아뢰라” 하였다. 『광해군일기』(정초본) 권87, 7년 2월 5일 이원익의 상소에 광해군은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도 그럴 것이 효(孝)의 문제는 조선시대에 가장 예민한 정치적 사회적 문제였다. 이것은 마치 중세 유럽에서 군주 개인의 신앙이 그 자체로 예민한 정치적 문제였던 것과 다르지 않다. 광해군은 이원익에게 사관을 보내서 자신이 불효한 것이 무엇인지 추궁했다. 이원익의 상소는 폐비 논의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이원익의 상소가 알려지자 삼사는, 임금을 협박하고 역적을 두둔했다며 이원익을 멀리 귀양 보낼 것을 요청했다. 그러자 성균관에 있던 수십 명 생원·진사들이 이원익을 옹호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때문에 그들도 모두 귀양을 갔다. 결국 이 일로 이원익은 1615년 9월에 69세의 강원도 홍천(洪川)으로 귀양을 간다. ‘임금을 협박하고 역적을 두둔’했다는 무시무시한 죄명에 비해 가벼운 처벌이었다. 광해군 말대로 이원익은 “공훈과 (왕실과의) 척분(戚分, 이원익이 종친의 후예라는 뜻)이 있는 대신”이고, “조정과 재야에 명망이 무거운 어진 재상”임이 고려된 것이었다. 이원익은 광해군 11년 2월에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명을 받을 때까지 홍천에 머물렀다. 위에서 이원익의 세 가지 평생 업적 중 두 번째로 열거된 것이 광해군 대에 강상(綱常), 즉 근본적 윤리 혹은 국체(國體)를 붙들어 세운 공이었다. 그것은 인목왕후 폐비사건에 대한 이원익의 항거와 귀양을 가리킨다. 이원익의 죽음을 무릅쓴 상소에도 불구하고 결국 인목왕후는 1618년(광해군 10)에 폐비가 되어 서궁(西宮), 즉 경운궁(慶運宮, 현재의 덕수궁)에 유폐(幽閉)되었다. 유폐란 지금으로 치면 가택연금에 해당한다. 인목대비 폐비사건으로 임진왜란 극복의 주역 중 또 한 재상이 사망한다. 이항복(李恒福)은 인목대비 폐비에 대해서 “진실로 아비가 설사 사랑하지 않더라도 자식은 효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춘추(春秋)』의 의리에는 자식이 어미를 원수로 대한다는 뜻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반대했다. 이원익이 상소에서 주장했던 것과 정확히 동일한 내용이다. 이항복은 관직이 박탈되었고, 1618년 1월 초 한겨울에 함경도 북청에 유배된다. 이원익보다 훨씬 가혹한 지역으로 보내진 것이다. 중풍이 재발된 63세 노인에게는 너무 가혹한 처벌이었다. 그는 한양에서 1,000리도 넘게 떨어진 곳까지 걸어가서 5월 초에 사망한다. 재상은 임금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존재였기에 무명의 시골 선비보다 오히려 더 임금에게 말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재상은 말해야 할 때는 임금의 뜻에 반해서 말하는 존재여야 했다. 『백사집』
  • 조선시대 재상 이원익의 관직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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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
    찰사(徵兵體察使) 이원익과 최흥원(崔興源), 우부승지 신잡, 주서(注書) 조존세(趙存世), 가주서 김의원(金義元), 봉교 이광정(李光庭), 검열 김선여(金善餘) 등을 인견(引見,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불러 봄)했다. 상이 이원익에게 이르기를, “경이 전에 안주(安州)를 다스릴 적에 관서 지방 민심을 많이 얻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경을 잊지 못한다고 하니, 경은 평안도로 가서 부로(父老, 지역의 영향력 있는 인물)들을 잘 설득해서 인심을 수습하라. 적병이 깊숙이 침입해 들어와 남쪽 여러 고을이 날마다 함락되고 있으니 경성(京城) 가까이 오면 (내가) 관서로 파천해야 한다. 이런 뜻을 경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하니, 원익이 배사(拜辭)하고 물러갔다. 상이 또 최흥원에게 이르기를, “경이 황해도 지방을 잘 다스렸으므로 지금까지 경을 흠모한다고 한다. 지금 인심이 흉흉하여 토붕와해(土崩瓦解, 흙이 무너지고 기와가 산산이 깨진다는 뜻으로 상황이 극도로 혼란해서 손댈 수 없는 상태)의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윗사람을 위해 죽는 의리가 없어졌다. 경은 황해도로 가 부로들을 모아서 선왕(先王)의 깊은 사랑과 두터웠던 은혜를 일깨워 줌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단결시키는 한편 군사들을 소집하여 혹시라도 이반자가 생기지 않도록 단속하여 거가(車駕, 선조 일행)를 영접하라” 하니, 흥원이 명을 받고 원익과 더불어 절하고 물러가 그날 즉시 떠났다.” 『선조실록』 권26, 25년 4월 28일 민심은 극도로 흉흉했다. 선조 자신이 “(백성들에게서) 윗사람을 위해 죽는 의리”가 없어졌다고 말하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전쟁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이미 왜군에 협력하는 ‘이반자’들이 나오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평시에 자신들의 삶을 보살펴 주고 책임지지 않았던 권력에 대해서 백성들이 의리를 지킬 이유는 없었다. 신립의 소식이 전해지자 그 즉시로 선조는 서울을 떠나기로 결심했지만, 아무 곳으로나 갈 수는 없었다. 당시 조정이 조선 안에서 갈 수 있는 곳은 결국 황해도와 평안도뿐이었다. 하지만 이미 그곳 민심도 왕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다. 이 상황에서 선조는 이 두 지역에서 이전에 지방관을 지내며 민심을 얻었던 이원익과 최흥원에 기대어, 그곳 ‘부로’들의 마음을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두 사람의 일차적 임무는 피난 오는 왕과 그 일행이, 그곳 백성들에게 불상사를 당하지 않도록 지역 민심을 다독이는 것이었다. 4월 28일에 이원익은 ‘징병 체찰사’에 임명되었다. 체찰사는 요즘 개념으로 바꾸어 말하면, 계엄 상황에서의 계엄사령관에 해당한다. 징병 체찰사는 왜군과 싸우기 위해 병사를 모으는 책임을 진 체찰사라는 뜻이다. 하지만 위에서 선조가 이원익과 최흥원에게 간곡히 부탁한 내용은 이와는 조금 다르다. ‘부로’들을 잘 설득해서 인심을 수습하는 것이 1차 목표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원익의 관직이 바뀐다. 선조 일행은 5월 7일에 평양에 들어왔고, 5월 8일에 이원익은 도순찰사에 임명되었다. 당시 상황을 더 이해하기 위해서 이원익과 최흥원을 징병 체찰사에 임명하는 기사 뒤에 이어지는 실록의 내용을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세자를 세우는 것에 관한 논의가 선조와 몇몇 중신들 사이에서 밤늦도록 진행되었다. 재위 25년째인 당시까지도 선조가 세자를 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은, 정할 수 없었다. 그 전해인 1591년에 좌의정 정철(1536-1593)이 선조에게 세자를 정하라고 말했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귀양을 간 일이 있었다. 선조는 권력 문제에 관해서 몹시 민감했다. 신하들은 이 문제를 입 밖에도 꺼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전쟁 때문에 당장 세자를 정해야 했다. 마치 오늘날 국가 비상 상황이 발생하면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따로 떨어져서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는 것과 같은 급박한 이유로 세자가 필요했다. 다음날 선조 자신의 뜻에 따라 광해군(1575-1641, 재위 1608-1623)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4월 30일 새벽 “칠흙같이 어둡고 비가 내려 지척을 분변할 수 없는 가운데” 도승지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을 앞세우고 선조는 창덕궁을 나섰다. 서대문으로도 불렸던 돈의문(敦義門)을 나와, 다시 한양에 돌아올 수 있을지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피난길에 올랐다. 실록에는 이때 선조 일행의 규모가 종친과 문무관을 모두 포함해서 100명이 못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평상시 관리를 제외하고도 궁궐 안에 거주하는 사람들 수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숫자였다. 일행의 수가 100명이 못 되었다는 것은 이미 대부분의 사람이 선조 곁을 떠났다는 것을 뜻한다. 떠나 간 사람들은 아마도 조선왕조가 패망할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일행에 끼어있는 사람들도 내심 서울로 다시 돌아올 수 있으리라고 확신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원익의 활약은 두드러졌다. 그 사이에 한강에 도착한 전세(田稅)로 거둔 곡물을 대동강으로 옮기도록 조처했다. 당시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곡물이었다. 그는 불과 며칠 사이에 파탄 난 민심을 다독여 선조 일행을 평양에서 무사히 맞아들였다. 또 선조 일행에 대한 물자 및 편의 제공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비 내리는 한양의 궁궐을 빠져나와 정신없이 피난 길에 올랐던 국왕 일행이었다. 평양에 도착해서 비로소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선조에 대한 이원익의 보살핌은 극진했다. 심지어 그는 왕이 먹을 음식을 자신이 먼저 먹고 한동안이 지나서야 들이곤 했다. 혹시 있을지 모르는 독살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민심이 어떤 상황인지 보여 주는 장면이다. 이때 선조는 이원익에게 깊은 인상을 받는다. 이것은 후일 이원익이 선조에게 신하로서는 감히 하기 어려운 수준의 직언과 비판을 해도, 선조가 그에 대한 신뢰를 바꾸지 않는 원인이 되었다.
  • 조선시대 재상 이원익의 관직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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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격을 가하다 이원익은 6월 14일 전투에서 패한 후 더 북쪽에 위치한 정주(定州)로 후퇴하여, 흩어진 병사들을 다시 모았다. 조정은 6월 21일에 이원익을 평안도관찰사에 임명하고, 도순찰사를 겸하게 했다. 6월 14일 전투에 패해 평양성의 조선군이 흩어지면서 평안감사 송언신이 실종된 상태였다. 송언신은 6월 26일에 왕에게 보고를 올렸다. 7월 4일에 이원익이 선조를 찾아왔다. 평안감사 이원익이 강변에서 왔다. … 상이 이르기를, “경은 요사이 강변에 가서 얼마나 토병(土兵)을 얻었는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대략 6백여 명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근래 (우리 조선) 군대의 숫자가 부족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흩어져 버렸던 까닭에 적을 방어하지 못했다”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토병은 남쪽 군대와 달라서 잘 쓰면 흩어지는 데에는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전에 강탄(江灘)은 어찌하여 지키지 못했는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그때 강탄의 물이 몹시 얕고 토병 숫자가 매우 적었으므로 지키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왜적의 숫자는 대략 얼마나 되었는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명확히 알지는 못하나 염탐하는 사람 말로는 2천 명이 채 못 되었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밤에 공격할 때 몇 명을 썼는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240여 명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토병들에 대해서는 따로 상을 줄 것을 의논하라. 토병 중에 사망한 자는 없는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배에 탔다가 왜적이 다가오자 배 한 척이 완전히 전복되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나머지는 흩어졌는가? 아니면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지금 한창 모이고 있습니다” … 원익이 아뢰기를, “남쪽의 군사는 흩어져버리기를 잘하니, 토병으로써 전투에 나가게 하고 남쪽 군사는 군량을 실어오게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이 혼자 수고하니 내 마음이 미안하다. 국사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더욱더 노력하라” 하였다. 『선조실록』 권28, 25년 7월 4일 6월 14일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그 책임이 이원익에게 돌아오지는 않았다. 그가 6월 21일에 곧바로 평안도관찰사에 임명되고 순찰사를 겸하게 된 것이 그 증거이다. 7월 4일 선조와의 만남에서 선조는 이원익에게 미안한 마음을 표하며 더욱 노력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후 이원익은 정주에서 모집한 군대를 전선(戰線)이 있는 더 남쪽의 순안(順安)으로 이동시켰다. 순안은 대동강에서 북쪽으로 20여 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다. 8월에 이원익 주도로 왜군이 주둔해 있는 평양성을 공격했다. 아래는 그에 대한 기록이다. 도원수 김명원이 순찰사 이원익과 순변사 이빈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으로 진군하여 공격하게 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당시 이원익 등은 순안(順安)에 주둔하여 천여 명 군사를 끌어모았는데 정예 군사가 제법 많았다. 방어사 김응서(金應瑞), 별장 박명현(朴命賢) 등은 용강(龍岡)·삼화(三和)·증산(甑山)·강서(江西) 등 바닷가 여러 고을의 군사 만여 명을 거느리고 20여 둔(屯, 군사 집결지)에 배치하고 평양 서쪽을 압박하며 때로 작은 무리의 적을 소탕하면서 성 밖까지 이르렀으나 적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별장 김억추(金億秋)는 수군을 거느리고 대동강 입구에 웅거하였고, 중화(中和)의 별장 임중량(林仲樑)은 2천 명 군사를 거느리고 보루를 쌓아 주둔하며 지켰다. 행조(行朝, 임금이 있는 피난 중의 조정)에서는 평양의 적세(賊勢)가 쇠약해져 우리 군사가 충분히 진격하여 취할 수 있고 또 명나라 군사를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여겨 영을 내려 진격하기를 재촉했다. 이에 삼로(三路)의 군사가 함께 나가 정탐하는 적을 만나 두어 명을 쏘아 죽였는데, 얼마 안 되어 적병이 크게 이르자 관군이 놀라 강가에서 흩어져 도망했다. 이에 용병(勇兵)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 세 번 싸워 모두 패했으므로 물러나 본소(本所)에 주둔했다. 『선조수정실록』 권26, 25년 8월 1일 7월 초 600명 정도 병사를 모았다고 말했던 이원익은 8월에 군사를 1,000여 명까지 모을 수 있었다. 선조는 평양성에 있는 왜군이 쇠약하고, 명나라가 참전하여 군대를 보내기만 기다리고 있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조선군의 공격은 성공하지 못했다. 세 번 공격을 시도했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하고 물러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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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열에 오르다 이원익의 정승 승진을 둘러싼 논란 이원익은 1593년 5월 평양성 탈환의 공로로 종1품 하(下)계인 숭정대부(崇政大夫) 품계에 올랐다. 그런데 평안감사 품계는 종2품이었다. 직책과 품계가 맞지 않아도 이원익이 수년 동안 평안감사 자리를 유지했던 것은, 평안도를 지켜내는 일이 당시 전쟁 상황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했기 때문이다. 평안도는 임진왜란에서 조선이 8도 중 지켜냈던 유일한 도였다. 평안도를 지켜냄으로써 조선은 나라가 망할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594년(선조 27) 끝 무렵이 되면 전쟁 상황이 점차 바뀌었다. 1594년 11월에 좌의정 자리가 비자 영의정 류성룡이 몇몇 사람들과 함께 이원익을 복상단자(卜相單子)에 올렸다. 아래는 그와 관련된 『선조실록』 기록이다. 이를 보기 전에, 우선 복상에 대해서 간단히 말하면, 이는 조선시대 의정급 관원을 선발하는 방식이다. ‘卜相(복상)’이라는 말은 이 자리에 앉을 사람의 길흉을 점쳐서 뽑았다는 고사에서 나왔다. 절차는 국왕이 자신의 비서기관인 승정원에 복상하라는 왕명을 내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명을 받은 현임 의정들은 복상단자를 작성하는데, 이는 임명 대상자들 리스트이다. 복상단자를 받은 국왕은 대상자 이름에 낙점하는 것으로 새 의정을 결정했다. 새로운 정승의 임명에 임금과 현임 정승이 의견을 함께하는 방식이다. 비망기로 이르기를, “평안감사가 바뀐다면 어떤 사람이 그를 대신할 수 있겠는가?” 하니, 류성룡이 회계하기를, “평안감사의 소임은 지금에 있어서 그 비중이 극히 크니, 경솔히 바꿀 수 없습니다. 가령 다른 사람이 그 직을 맡아도 결국은 이원익이 그대로 있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신이 이런 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다만 (이원익은) 인망이 집중된 사람이기 때문에 부득불 정승으로 추천한 것입니다. 대신할 만한 사람은 워낙 시간이 없어서 자세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비망기로 이르기를, “평안감사의 직책도 중요하지만 정승만큼 중요하겠는가. 만일 이원익으로 정승을 삼는다면 그대로 체찰사(體察使, 직책)을 부여해서 그로 하여금 남쪽 지방으로 내려가게 해서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게 하며, 그 대신으로는 이덕형(李德馨)을 (평안감사로) 보내는 것이 어떻겠는가? 잘 생각해서 아뢰라” 하였다. 류성룡이 다시 보고하기를, “하교를 받고 보니, 양쪽의 처리 대책에 있어서 극히 타당합니다. 다만, 오늘날 상황으로 볼 때 평안도는 근본 구실을 하는 지역이고 이원익은 전부터 오랫동안 그곳에 있어서 그곳 백성들과 서로 이미 매우 친숙해졌기 때문에 호령을 할 때나 무슨 일을 시행할 때 더욱 편리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덕형은 재주나 기량은 그 직을 충분히 감당할 만하지만 듣기로는 친상(親喪)을 당해 너무 슬퍼하여 몸이 워낙 쇠약해졌다 하니, 많은 일을 처리하기 어려울 듯하므로 신은 염려가 됩니다. 그러나 성상의 재량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했다. 『선조실록』 권57, 27년 11월 6일 선조는 전쟁 상황을 면밀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 왜적이 남부지방으로 내려가서 다시 서울을 위협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에 반해 남부 지방 상황은 위급했다. 여전히 왜군이 머물러 있었고, 민생은 극도로 피폐했다. 이원익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생각을 영의정 류성룡에게 말했는데, 류성룡의 입장은 선조보다 좀 더 신중했다. 그는 이원익이 좀 더 평안감사로 있으면서 평안도를 지키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선조도 류성룡 의견에 따랐다. 해가 바뀌자 1596년(선조 29) 2월에 정승 자리를 채워야 할 일이 다시 생겼다. 류성룡은 또 한 번 이원익을 포함시킨 복상단자를 제출했다. 곧이어 이원익의 품계를 종1품 상(上)계인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올렸다. 이에 대해서 실록은 “이원익이 평안도관찰사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어 한 도의 인민들이 (그를) 부모처럼 사랑했고, 군졸을 훈련시켜서 큰 성과를 거두었으므로 특별히 임금의 총애를 받아 이와 같이 품계를 올린 것이다”라고 기록하였다. 이원익은 평안감사로 있으면서 1만 명의 군대를 모으고 그들을 제대로 훈련시켰다. 전쟁 중 2년 만에 이룩한 성과였다. 이윽고 이원익을 정승에 임명하는 문제를 놓고 조정에서 논의가 벌어졌다. 유영경이 아뢰기를, “관서 지방도 중요하지만 남쪽 지방이 더욱 긴급하니 이원익을 남쪽 지방으로 보내는 것이 가장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영상(류성룡)에게 ‘이원익을 (도)원수로 삼고 이덕형을 평안감사로 삼으면 어떻겠는가?’하고 (전에) 물었더니, 영상이 불가하다고 했기 때문에 그만두었던 것이다” 하였다. 이항복이 아뢰기를, “(도원수로는) 이원익이 낫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원익으로 (도)원수를 삼는다 해도 적을 물리치는 일은 내가 기필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이항복이 아뢰기를, “그 일은 이원익이라 하더라도 능히 하지 못합니다” 하고, 유영경은 아뢰기를, “이원익이 본디 이덕형보다 낫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평안도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니, 유영경이 아뢰기를, “남쪽 지방에 우려가 없는 연후에 서쪽 지방을 보전할 수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평안도도 근본 구실을 하는 지방이니 이원익을 체직시키는 것은 좋지 않다. 그러나 내가 한 말과 여러 재상이 답한 말을 상세히 다 적어서 비변사와 상의해 처리하라” 하였다. 『선조실록』 권60, 28년 2월 20일 유영순이 아뢰기를, “(도)원수를 교체하는 문제는 중대한 일이므로 소신이 감히 아뢸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적을 칠 일이 바야흐로 급박한데, 어찌 (저의) 월권 여부를 꺼려서 아뢰지 않겠습니까. 밖의 여론은 모두 원수(권율)에게 실책이 있다 하는데, 조정에서는 갈아치우기를 어렵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원익 같은 이를 어찌 도원수로 삼지 않습니까. 관서가 비록 중하지만 어찌 남쪽 지방의 위급한 처지와 같겠습니까. 이 사람을 보내지 않으니, 여론이 모두 울분에 차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관서의 방백(方伯)을 교체시키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하자, 정곤수가 아뢰기를, “유영순의 말이 매우 옳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원익을 대신할 사람을 생각해 보라. 비록 재주가 있는 자라도 일의 전말을 모르고 갑자기 맡는다는 것은 어려울 듯하다” 하였다. 유영순이 아뢰기를, “중국 군사를 접대하는 일이 비록 중요하지만 지금은 남쪽 지방이 더욱 급박합니다. 소신의 말은 다만 여론을 아뢰었을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만일 경중을 논한다면 이원익을 당연히 원수로 삼아야 하고 이덕형을 관서 방백으로 제수하고 싶은데, 단 지금은 이미 늦어서 적기에 미치지 못할 것 같다” 하였다. 『선조실록』 권60, 28년 2월 22일 위에서 ‘비망기’라는 말이 나온다. 간단히 말하면 비망기는 국왕의 명령을 하달하는 하나의 형식이다. 왕이 내시를 시켜 승정원에 전달했다. 비망기가 조선 건국 초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고 중종 대(재위 1506-1544)에 나타나서 선조(재위 1567-1608) 때 정착했다. 선조는 비망기를 많이 내렸다. 비망기를 국왕이 직접 쓰는 경우는 많지 않았고 대개는 내시가 담당하는 승전색(承傳色)이 주로 작성했다. 비망기는 왕이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조정 현안에 바로바로 대응할 수 있는 수단이 되었다. 1594년(선조 27) 말에 미뤄두었던 이원익의 보직 및 근무지 변경 문제가 해가 바뀐 후 다시 제기되었다. 전쟁 상황이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지만 위 사료는 남부 지방 상황에 대한 좀 더 상세한 내용을 보여 준다. 남부 지방은 두 가지 문제로 고통받고 있었다. 하나는 왜군이 여전히 버티고 있어서 이들과의 전투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극심한 민생 피폐였다. 여기에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다. 도원수 권율이 상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그에 대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 유영순은 남부 지방 상황을 말하면서 이원익을 내려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은, 선조도 이전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이원익이 평안감사 역할을 워낙 잘해 왔고, 여전히 평안도가 중요했기에 후임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문제였던 것이다.
  • 조선시대 재상 이원익의 관직 활동
    • 기록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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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등하다 본래 이원익이 우의정 겸 4도 도체찰사로 남부지방에 내려갈 때, 교통정리가 정확히 되지 않았던 사항이 있다. 도원수 권율과 도체찰사 이원익의 관계, 즉 두 사람 사이의 지휘체계를 명확히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원익이 남쪽으로 내려가게 된 이유들 중 하나도 권율이었다. 권율이 피폐한 민생을 안정시키는 데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오히려 민생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었다. 때문에 조정에서는 권율을 해직하고 이원익으로 대신하는 것도 논의했었다. 하지만 결국 권율을 도원수에 그대로 둔 채, 이원익이 도체찰사 직임을 띠고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고, 1597년 1월에 이원익의 종사관이 이원익이 쓴 문서를 가지고 선조에게 왔다. 오시(午時, 오전 11-오후 1시)에 상이 도체찰사 종사관 홍문관 교리 노경임(盧景任)과 첨지중추부사 고급사(告急使) 권협(權悏)을 인견했다. 상이 노경임에게, “무슨 일 때문에 왔는가?” 물으니, 노경임이 아뢰기를, “사실이 모두 장계 가운데에 있습니다. 이원익과 권율이 마침 가까운 곳에 있는데, (각자가) 조치하는 규획(規劃)이 같지 않기 때문에 신으로 하여금 친히 와서 아뢰게 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같지 않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니, 아뢰기를, “이원익은 일을 반드시 자세히 살핀 연후에 하는데, 권율은 일의 크고 작음을 가리지 않고 급하게 하므로 같지 않음이 많기 때문에 이원익에게 고민이 많습니다” 하였다. 상이 “간섭하기 때문에 그런가?” 물으니, 아뢰기를, “규획이 같지 않아서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래서는 안 된다. 도원수는 마땅히 체찰사를 따라야 한다. 전장(戰場)에 임해서는 혹 스스로 결단할 일이 있겠지만, 평일에는 원수가 체찰사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 하였다. 우부승지 허성(許筬)이 아뢰기를, “원래 명호(名號)가 많아서 여러 장수가 영을 들어야 할 (자신의) 주장(主將)을 모릅니다. 이미 ‘원수(元帥)’라 이름했으면 원수 역시 마땅히 스스로 결단해야 하고, 또 남의 절제(節制)를 받아야 한다고 하면 부사(副使)라고 호칭해야 합니다” 하였다. 『선조실록』 권84, 30년 1월 24일 (병조판서) 이덕형이 아뢰기를, “체찰사(이원익)가 종사관까지 보내 보고했는데, 조정에서는 다만 편지만 내려보냈을 뿐 별달리 조치한 일이 없습니다. 이후에도 이같이 하면 말할 수 없게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는 작은 일이 아니다. 지난 겨울에 원수(권율)의 장계를 보니 ‘감사(監司) 이용순(李用淳)은 뜻을 펴지 못하고 있다…’ 하였기에 내가 매양 이상하게 여겼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대개 체찰(體察)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사람들의 호령이 서로 견제되는 것이 염려할 만하다” 하니, 이산해가 아뢰기를, “호령이 서로 견제되면 반드시 패하는 법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종사관에게 이르기를 ‘원수와 체찰사 사이는, 전쟁에 임해서는 보고해서 허락받을 겨를이 없으나 보통 때에는 모든 일을 상의하고 의논해야 한다. 어찌 체찰사가 백성들만 살필 수 있겠는가’ 했었다” 하였다. 이덕형이 아뢰기를, “체찰사가 한번 호령을 내렸는데, 또 도원수가 호령을 내리니 호령이 여기저기서 나오면 일의 형편이 매우 어렵게 됩니다. 중국처럼 한 사람은 군량을 주관하고, 한 사람은 군사를 주관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명호(名號)는 다르나 한 아문(衙門)이니, 이 제독(提督)은 군사를 주관하고 송응창(宋應昌)은 군량을 주관한 일과는 같지 않다” 하였다. 류성룡이 아뢰기를, “두 사람의 의논이 서로 달라서, 원수의 뜻은 4-5만 군사를 조발하고자 하고, 체찰사의 뜻은 산성(山城)을 수축하고 청야(淸野)하면서 기다리고자 하니, 두 사람의 뜻이 서로 어긋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이하 장관(將官)들이 누구를 따라야 할지 모릅니다. 만약 한 아문을 만들면 원수는 마땅히 부원수(副元帥)가 될 뿐이며, 도원수(都元帥)로 칭호하면 도원수는 싸움만을 주장할 따름입니다. 밖에서 헤아리건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선조실록』 권84, 30년 1월 27일 체찰사 이원익과 도원수 권율 사이의 갈등은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조정은 뚜렷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권율의 행동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위에서 볼 수 있듯이 도원수는 군사적으로 위에 상관이 없는 직책이었다. 또 권율은 이원익보다 10살 많고, 선조 초반에 영의정을 지냈던 권철(權轍)의 아들이다. 권율 자신도 문과 출신이고, 그의 사위가 바로 조정의 중신 이항복이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들 때문에 이원익과 권율의 갈등은 지속되었다. 그러던 중에 이원익의 상소가 올라왔다. 비망기로 이르기를, “지금 도체찰사의 보고서를 보니 이번의 조처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다고 한다. 이같이 국가의 성패가 이번 거사에 결판이 나는 것을 헤아리지 못하고 체찰사가 막연히 모르고 있었다니 매우 해괴한 일이다. 설사 십분 의심의 여지도 없어 성공이 정해져 있다고 해도 그 체통으로 보아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도원수(권율)를 추고(推考)하여 힐책할 것인지를 의논해서 조처하도록 비변사에 말하라” 하였다. 비변사가 비밀히 회계하기를, “이원익이 이미 체찰사의 명을 받고 4도의 사무를 총괄하게 되었으니 원수 이하가 모두 (그의) 절제(節制, 조정이나 통제를 받음)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권율은 대소 군무(軍務)를 모두 (체찰사에게) 품의하여 명령을 받아 시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수군과 육군을 아울러 거병(擧兵)하는 실로 말할 수 없이 중대한 일에 대해 막연하게 가부를 품의하지도 않고, 심지어는 체찰사가 만나보고 일을 의논하려고 세 차례나 전령을 보냈지만 나아가지도 않았으니 극히 부당합니다. 도원수는 비록 상급자가 없는 장수이기는 하지만 절제하는 권한을 이미 도체찰사에게 위임했는데 권율이 어찌 전혀 (체찰사 이원익에게) 품의하지도 않고 자기 뜻대로 행동할 수 있겠습니까. 잘못함이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실로 엄중히 논핵해야 마땅합니다. 다만 이처럼 적과 대치하고 있는 때를 당해서는 경솔히 처리할 수 없으니 힐책하는 글을 내려 그의 잘못을 알도록 함이 마땅할 듯합니다. 도체찰사는 이 때문에 자책하여 사직을 청하기까지 했는데, 잘못은 오로지 권율에게 있으니 이것을 혐의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사관(史官)을 보내 회유(回諭)하소서. 또 거듭 군율(軍律)을 엄히 하도록 여러 장수들을 경계함으로써 지금부터 법에 어긋나는 일이 있을 때는 한결같이 군법에 따른다는 뜻을 하유(下諭)하심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했다. 『선조실록』 권85, 30년 2월 25일 위에서 말한 수군과 육군의 합동작전이란 서생포에 주둔해 있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적진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명나라 장군 양호가 이끄는 군대와 권율이 이끄는 조선군의 서생포왜성(현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서생리)에 대한 연합작전이었다. 권율은 이 대규모 전투에 대해서 이원익과 전혀 협의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원익은 자책하며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 조정에서는 권율의 잘못임을 분명히 했다. 더구나 명나라와 조선의 합동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고 대단히 많은 아군 전사자가 발생했다. 이후 권율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체찰사 이원익의 명을 받아들였다.
  • 조선시대 재상 이원익의 관직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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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 받는 재상 이원익의 소인론 광해군 대의 정치적 파행에 가장 큰 책임을 지고, 인조반정 후 처형된 사람은 정인홍이다. 그는 인조반정이 나고 다음 달인 4월 초에 89세 나이에도 불구하고 참형(斬刑)에 처해졌다. 노인을 존중했던 조선의 관행상 있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는 임해군과 영창대군의 죽음, 그리고 인목대비의 경운궁 유폐에 모두 관련되었다. 반정이 성공한 이상, 죽음을 면할 수는 없었다. 광해군 재위 기간 동안 그와 이원익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위 세 사람의 처벌 문제를 두고, 두 사람은 계속해서 대립했었다. 이원익이 홍천에 귀양 가 있을 때, 정인홍은 그 처벌이 너무 가벼우니 벌을 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후일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라는 책에 나오는 이원익의 정인홍에 대한 언급은 이원익이 가졌던 인간관의 한 자락을 보여 준다. 인조반정 후에 이원익은 동료 재상 중 하나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당신도 나중에 마음이 바뀌어서 소인(小人)으로 변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러자 그 재상은 “제가 비록 옛 성현들만은 못해도 어찌 소인까지야 되겠습니까?”라고 응답했다. 그러자 이원익은 “정인홍이 젊어서부터 원칙을 지키는 사람으로 유명했소. 누가 그 사람이 폐모론에 관여하리라 예상했겠소?”라고 반문했다. 이어서 그는 “나이 늙고 뜻이 쇠해지고 친구들이 밖에서 권하고 자손이 안에서 충동질하여, 마침내 폐모를 청하는 상소를 올려서 90세 나이에 처형되었소”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는 그 일 이후 나 자신은 더욱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지냅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사람에 대한 이원익의 기본적인 관점을 보여 준다. “나이 늙고 뜻이 쇠해지고 친구들이 밖에서 권하고 자손이 안에서 충동질”하면, 누구나 잘못된 방향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그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너그럽게 대하면서도 스스로에 대해서는 엄격히 절제할 수 있게 해 주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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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되고 있었다. 이원익은 세 가지 현안 중에서도 가장 시급한 것이 민생 문제임을 강조했다. 그가 점점 커지고 있던 북방의 군사적 위험을 가볍게 여겼기 때문은 아니다. 이때 이원익은 “앞으로 큰 적이 국경을 짓누르고 중국 군사가 크게 이를 것”이라며 청(淸)의 군사적 도발을 예상했다. 그러면서도 “민심이 첫째이고 방어하는 것은 끄트머리”이며, “민심이 굳건한 다음에야 도적을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임진왜란을 직접 겪고 극복한 사람의 경험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의 주장에 따라 인조 초 국정 운영의 기본 방향이 결정되었고, 이 연장선상에서 ‘삼도대동법’이 추진되기 시작했다. 삼도대동법 추진을 위해 주관기관인 재생청(裁省廳)이 먼저 설치되었다. 그리고 삼도대동법 사목(운영 규정)을 만드는 일을 재생청에서 주관했다. 이것은 삼도대동법 역시 그 출발은 경기선혜법 때와 마찬가지로 ‘재생(裁省)’의 차원에서 시작된 일이었음을 뜻한다. ‘재생’이란 국가 지출을 줄이고 세금을 삭감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조선시대 공물 제도에 대한 약간의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조선시대에는 백성들에 대한 세금 수취가 세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조(租)·용(庸)·조(調)가 그것이다. ‘租’는 소위 말하는 전세(田稅)이고, ‘庸’은 노동력이고, 마지막 (調)가 각 지역 특산물인 공물이다. 전세는 가을 추수 후에 경작 면적에 따라 한 번에 거두면 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庸’·‘調’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적었다. 반면에 ‘調’, 즉 공물은 경작 면적에 따라 거두는 것도 아니고, 한 해에 한 번만 거두는 것도 아니었다. 또 공물의 질(質)이 해마다 똑같을 수는 없다. 예를 들어서 전라도 영광에서 나는 조기가 매해 같은 양과 질로 잡힐 수는 없었다. 자연에서 얻는 산물이기에 해에 따라 생산되던 것이 생산되지 않을 수도 있고, 많이 나던 것이 거의 나지 않을 수도 있다. 받는 측에서 그 품질을 문제 삼으려면 어떻게든 문제를 만들 수 있었다. 또 지역 특산물이라는 것이 변질되기 쉬웠다. 이것은 현지에서 한양에 납부하기까지 상당한 기간이 필요했기에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국가가 법으로 한 번 정하면 그것을 새로 고치기 쉽지 않은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정부도 이런 사정을 모르지 않았다. 다만 현실 상황에 따라 제도를 조정하는 속도가 현실의 변화 속도를 따르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다. 자연적 변화에 따른 정책적 조정 자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찌 되었든 공물은 그것이 생산되는 곳에서 거두는 것이 원칙이었고, 과도하게 부과되는 경향이 높은 공물가(貢物價)는 삭감되어야 했다. 공물 산지를 재조정하거나 지나치게 높아진 공물가를 낮추기 위해, 공안(貢案) 즉 공물 수취 장부를 간헐적으로 개정하는 것은, 조선의 전통적인 재정 운영 방식 중 하나였다. 덧붙여 말하면 이때 공물가란 원칙적으로 현물로 내기로 되어 있는 물품 대신에 그 물품값에 해당하는 미(米)·포(布)를 뜻한다. 조선시대에는 17세기 말까지도 미·포를 기본적인 유통수단으로 사용했다. 그렇게 과도하게 높아진 공물가를 삭감하는 것을 조선은 ‘재생’이라고 불렀다. 잘 살펴서 너무 높게 매겨져 있는 공물가를 덜어낸다는 뜻이다. 조선 전기 이래로, 공물 수취에 따른 폐단들은 이따금 ‘재생’을 통해서 너무 악화되지 않도록 일정한 수준 안에서 관리되었다. 경기선혜법 역시, 입법 당시에는 이전과 다른 제도라기보다는 ‘재생’의 실시라는 차원에서 이해되었다. ‘재생’은 이렇듯 조선의 전통적인 공물 변통 방식이었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이후 극도로 어려운 민생 현실에서 자연스럽게 요청되었다. 인조 원년에도 상황은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한편 나중에야 분명해지지만 삼도대동법이 실시되자 이러한 공물 변통의 전통적 방식이자 이전까지 극히 상식적인 조치로 생각되었던 ‘재생’이, 더이상 공납 문제에 대한 적절한 대응책이 될 수 없다는 증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증거가 나타났을 때조차 그것을 알아차렸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시 인조 원년의 상황으로 돌아가자. 이원익은 인조 원년 4월에 조익(趙翼, 1579-1655)을 재생청 실무 책임자인 낭청(郞廳)으로 뽑았다. 조익이 삼도대동법 사목 만드는 일을 주관했다. 이원익의 생각에 당시 조정이 힘써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민생을 돌보는 것이었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백성들에게 과도하게 부과된 잡다한 국가 세금을 줄이는 일, 즉 재생이었다. 그것의 새로운 이름이 대동법이었다. 이원익은 경기선혜법 실시를 주장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재생의 틀 안에서 삼도대동법 실시를 주장했다. 그는 익숙한 이름으로 자신이 정확히 알지 못하는 새로운 시도를 했던 것이다. 사실, 그런 시도가 결국 무엇을 뜻하게 될 것인지를 당시 조정 내에서 정확히 아는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삼도대동법은 경기선혜법과 몇 가지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무엇보다 법이 실시될 범위에 큰 차이가 있었다. 삼도대동법 대상 지역인 충청, 전라, 및 강원 3도는 재정적 차원에서만 본다면, 사실상 조선 전체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경기 이북 지역이 중앙재정에 기여하는 몫은 적었다. 충청, 전라, 강원 지역은 한양에서 멀기 때문에 대동미 운송이 커다란 문제가 되었다. 이것은 경기선혜법 사목을 만들 때는 논의되지 않았던 문제였다. 오늘날은 석유나 석탄 같은 싸고 안정적인 화석연료의 사용으로 운송 문제가 전근대와 비교할 수 없이 쉬워졌지만, 전근대에는 운송 문제가 대단히 큰 문제였다. 전근대 많은 국가가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할 수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이 문제 때문이다. 법 실시 범위의 확대는 공물 변통의 기본개념에 대한 근본적 수정을 필요로 했다. 이제 공물 변통은 국가 전체의 재정 운영이라는 차원에서 재설계되어야 했다. 그것은 단순히 공물가를 깎아 주는 ‘재생’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처음에 삼도대동법 사목이 1결(結)당 16두(斗)씩 거둔 것 중에서 각 고을에 자체 운영비로 2두씩만을 책정했었던 것은 확실히 경기선혜법의 연장이었다. 경기선혜법이 그렇게 운영되고 있었다. 결은 조선시대에 농토의 면적 단위 이름이고, 두는 쌀 한 말이라고 말할 때의 그 ‘말’이다. 인조 원년의 삼도대동법은 실시되자마자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민에 대한 중복 수취를 막으려던 조정의 정책 의도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각 관(官), 즉 지방 각 고을에서 나타났다. 각 고을에 배정된 결당 2두로는 각 고을 자체 경비를 위한 기존 지출 액수에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각 고을은 공물 명목으로 백성들에게 추가로 더 거둘 수밖에 없게 된다. 지방 각 고을이 공적으로 지출해야만 하는 경비에 대한 합리적 지급과 민에 대한 엄격한 중복 수취 금지가 공물 개혁이 성공할 수 있는 필수 요소라는 사실이 인조 원년 가을의 삼도대동법 실시를 통해서 분명해졌다. 그 결과 인조 2년 여름에 조익은 각 고을의 경비로 결당 5두씩을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약 30년 후 성립되는 효종 대의 호서대동법에서 실현된다. 하지만 인조 2년에 조정에서 조익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조익의 주장이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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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둔 시점이었다. 이원익은 공물과 관련해서 두 가지를 건의했다. 첫째로 그는 경제의 기본원칙으로 쓸데없는 정부 지출을 줄일 것을 주장했다. 그는 계속해서 ‘재생’의 원칙을 고수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그 대상으로 인목대비전과 종묘 제향에 들어가는 물품을 들었다. 인조가 왕실 경비의 절감에 대해서 난처해하는 태도를 보이자 이원익은 ‘이괄의 난’으로 공주에 머물렀을 때의 절박한 상황을 들어서 인조의 미온적인 자세를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그리고는 전통적인 재생의 원칙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둘째로 그는 1624년 봄에 실시하기로 되어있는 대동미·포 수취를, 전에 하던 방식으로 되돌릴 것을 주장한다. 말하자면 그가 ‘이괄의 난’ 후 한양으로 돌아와서 했던 첫 번째 발언은, 이제 막 시작된 삼도대동법을 중단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민심 안정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경기 이외 지역에서는 대동법이 경기에서만큼 효과적이지 않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물론 이원익이 대동법 확대 실시를 더이상 바라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다. ‘이괄의 난’으로 빚어진 정치적 사회적 혼란과 기득권 세력의 강력한 저항이 계속적인 정책 추진을 어렵게 했다. 더구나 개혁정책 추진이 불러온 정치적 역풍은 온통 이원익에게 집중되었다. ‘삼도대동법’은 그가 주장해서 시작된 개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이런 점들을 감안하더라도 이원익이 대동법 중단-비록 일시적일지라도-을 자기 입으로 말한 것을 전적으로 개혁 반대 세력의 공격이라는 외부 환경 요인에만 돌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의 공물 변통론 자체에도, 어떤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원익은 대동법을 이전과 다른 새로운 국가 재정 운영체계라기보다는, 재생의 연장선상에서 민의 무거운 공물 부담을 덜어 주는 방법으로 이해했다. 이원익은 조정에서 가장 숙련되고 경험 많은 관료였다. 또 공물 변통 개혁은 그 세부 내용의 많은 부분이 기존 정책과 경험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비유하자면 대동법이라는 새로운 ‘정책 기계’의 많은 부품은, 이전의 조선 재정 운영 기계에서 빼내어 재사용되었다. 하지만 모든 부품이 그랬던 것은 아니다. 대동법의 어떤 부분은 이전과 다른 이념적이고 실험적인 내용을 포함했다. 따라서 이 후자에 대한 이해와 굳은 정책적 신념이 없다면 개혁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에 한계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사실 개혁이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그 예상된 결과를 기존 경험으로는 모두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개혁에는 본질적으로 특정한 가치를 향해 위험을 내포한 도약이 포함되기 마련이다. 대동법 실시에 따른 반대 세력의 강력한 저항과 그에 따른 혼란은, 이 시기 삼도대동법을 이끌던 이원익이 왕안석에 비유되어 비판받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개혁 저항 세력들 일부가 이원익의 삼도대동법을 왕안석의 신법(新法)에 견주어 공격했다. 선혜법이나 대동법을 왕안석의 신법에 견주어 비판하는 것이 인조 초에 처음 등장한 일은 아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원익이 광해군 때는 사람들에 의해 왕안석(王安石)의 정적(政敵)이던 사마광(司馬光)에 비유되었다는 사실이다. 사마광은 『자치통감(資治通鑑)』 편찬을 주도한 인물이다. 이 책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필독서로 여기던 책이다.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왕안석은 교활하고 위험한 관리의 전형이었고, 사마광은 정직하고 원칙적인 관리의 전형이었다. 물론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정확한 인식은 아니다. 대동법을 왕안석의 신법에 견주어 비판하는 이데올로기적 공격은 단순히 말에 그치는 공격이 아니었다. 개혁에 반대하는 강력한 사회 세력이 있었다. 반면에 인조 초만 해도 개혁 입법인 삼도대동법 실시를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세력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다. 당시 우의정 신흠은 기득권 세력의 저항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삼도대동법에 따르면 경작지) 10결을 소유한 자는 10석을 내야 하고 20결을 소유한 자는 20석을 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될 경우 전결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고통스럽게 여길 것은 당연합니다. 어떤 이는 “소민(小民)은 편하게 여기는데 달갑지 않게 여기는 쪽은 호족들이다”라고 합니다. 이 말이 이치에 가까운 듯합니다. 대가(大家)와 거족(巨族)이 불편하게 여기며 원망을 하는 것이라면 이 또한 쇠퇴한 세상에서 우려스러운 일이라 할 것입니다.” 이는 백성이 편하게 여기는 대동법이 좋은 법이기는 하지만, 기득권 세력이 불편해하니 조정도 입법을 강행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경기선혜법과 삼도대동법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전자는 서울에서 가깝고 상대적으로 좁은 범위였고, 후자는 전자보다는 훨씬 멀고 또 훨씬 넓은 범위였다. 이런 실시 범위의 지리적 공간적 차이는 두 공물 개혁의 핵심 내용을 다르게 만들었다. 전자가 재생이라는 전통적인 개념만으로도 그런대로 작동했다면, 후자는 그것만으로는 작동할 수 없었다. 부분적으로 작동한다고 하더라도 애초의 정책 목표와는 큰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삼도대동법은 기존 공물 변통의 한계를 분명하게 드러내었고, 공물 변통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무엇이 더 필요한지를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요컨대 이원익이 추진한 공물 변통은 앞 단계를 완성하고, 뒷 단계에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분명히 드러내는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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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 관감당 이원익은 1634년(인조 12)에 사망했다. 그가 인조 대에 조정에 실제로 머문 기간은 길지 않다. 하지만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조정에 직접 나아가거나, 혹은 상소로 자기 생각을 밝혔다. 그러던 그가 조정과 한양을 떠나기로 처음 마음먹은 것은, 정묘호란 때 세자를 보호하여 전주에 피했다가 돌아온 후부터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미 81세의 노인이었다. 본래 병약했던 그는 육체적으로 조정에 나가는 것이 어려웠다. 하지만 이것이 그가 조정에서 물러나기로 결심한 가장 큰 이유는 아니다. 이원익 묘소 이원익 신도 당시 반정공신들 사이에서 갈등이 지속되었는데, 이원익은 영의정이면서도 그 갈등 밖에서 겉돌 뿐 그것을 통제할 수 없었다. 이원익 자신이 반정공신들 일부와 충돌하기도 했다. 물론 그들이 이원익에게 개인적으로 함부로 하지는 못했다. 사실 이원익은 인조반정의 두 주축 김류(金瑬, 1571-1648)와 이귀(李貴, 1557-1633)에게도 자신들 앞 세대의 인물이었다. 그들이 아직 문과 합격 이전의 서생이었을 때, 이원익은 이미 정승으로서 임진왜란을 지휘했다. 그의 명망이 워낙 높기도 했지만, 이원익에 대한 인조의 존경심도 대단히 깊었다. 인조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이원익을 존경했다. 따라서 가능하면 이원익의 말을 존중하여 따랐다. 이런 상황에서 반정공신들이 이원익에게 함부로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상황의 본질적 내용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이원익은 단지 높은 지위만 즐기며 하는 일 없이 조정에 머무는 그런 유형의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마침내 고향 금천으로 내려간다. 낙향 후에도 인조는 약과 음식을 승지나 사관(史官) 편에 자주 내려보냈다. 조선시대에 사관이 단지 역사를 기록하는 임무만 수행했던 것은 아니다. 임금의 메신저 역할도 했다. 1631년(인조 9) 정월에 인조는 승지 강홍중(姜弘重)을 이원익에게 보내서 문병했다. 그는 이원익이 당세 인물 중 가장 높이 평가하며 친하게 지냈던 작고한 전 승지 강서(姜緖)의 재종 조카였다. 강홍중이 돌아오자 인조는 이원익의 거처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그는 “그가 거처하는 집은 잡목으로 지은 두어 칸짜리 띠집입니다. 겨우 몸이나 들일 정도입니다. 집이 낮고 작고 좁아서 형편없습니다. 그 앞에 식솔이 들어 사는 집은 더욱 한쪽으로 기울어져 곧 허물어질 것같이 누추하여 비바람도 피할 수 없을 듯했습니다. 사람으로서는 살아나갈 수 없는 집이었습니다. 또 들으니, 그가 살고 있는 땅은 여러 세대 선조(先祖)의 묘가 있는 산 밑에 있는데 그 곁에 한 이랑의 농사지을 땅도 없고, 또 두어 명 노비도 없어서, 온 집안이 다만 매달 나라에서 주는 쌀로 겨우 목숨을 이어간다고 합니다” 하고 보고했다. 인조반정이 있던 해(1623) 9월에 인조는 이원익에게 궤장(几杖) 즉, 안석(案席)과 지팡이를 내렸었다. ‘정1품으로 70세가 넘어도 국사에 관계되어 사임하지 못하는 신하에게 궤장을 준다’는 『경국대전』 규정에 따른 것이다. 이것은 신하를 명예롭게 할 수 있는, 왕이 내리는 최고의 하사품이었다. 궤장을 하사할 때는 보통 국가에서 연회도 베풀어 주었다. 이 연회에 후배 고위 관료들이 그의 집에 모였던 적이 있다. 이때 김상헌(金尙憲)도 참석했는데, 그에 따르면 그의 집은 마당에서 말(馬)을 돌릴 수 없을 정도로 좁아서 집 곁 빈터에 휘장을 쳐서 연회를 베풀었다고 말한 바 있다. 이원익의 집이 짚으로 엮었는지 갈대나 풀로 엮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강홍중 말에 따르면 기와집은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나마 매해 지붕을 갈아주지도 않았던 것 같다. 초가집도 매해 지붕을 갈고 관리하면 비바람을 못 가리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17세기만 해도 양반집은 적어도 수십에서 많으면 수백 명 노비를 보유했다. 당시 노비는 어떤 면에서 토지보다 경제적으로 더욱 중요한 재산이었다. 이원익에게는 한 이랑 전답도 없듯이 몇 명의 노비도 없었다. 강홍중의 말을 들은 인조는 “40년 동안 정승을 지낸 사람이 다만 두어 칸 띠집을 가졌을 뿐이라니…. 만일 모든 벼슬아치들이 그를 본받는다면 백성의 곤궁을 (내가) 어찌 근심하겠는가?”라고 탄식했다. 인조는 이원익에게 새집을 지어 주고 흰 이불과 요를 주어 그의 검소한 덕을 기리도록 하라고 명했다. 이원익이 처음 우의정이 된 것은 1595년(선조 28)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정승이 된 이후 36년이 흘렀다. 조선시대 관리로서, 30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70세에 벼슬에서 물러나는 것도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70세까지 사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던 시절이다. 그런데 이원익의 경우는 정승에 오른 이후 그 지위를 유지한 기간이 거의 40년에 가깝다. 대단히 특별한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긴 기간 동안 최고위관직에 있었으면서 전혀 재산을 축적하지 않았다는 것은 더더욱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인조도 말하듯이 왕의 입장에서 이원익은 더 이상 바랄 수 없이 훌륭한 신하였다. 사실 왕이 신하에게 집을 내려 준 것은, 이원익 이전에는 세종이 황희에게 집을 내린 사례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원익은 왕이 내려 주는 집을 처음에는 거절했다. 직접 집을 지어 주어야 하는 경기감사 입장에서는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조정에 “나라에서 집을 지어 주는 일로 이원익이 다른 고장으로 옮겨가겠다고 하므로 명령을 받들어 집행하지 못하고 있으니 지극히 황공합니다”라고 보고했다. 그러자 인조는 다시 이원익에게 승지를 보냈다. 자신이 집을 지어 주라고 한 것은 그 뜻이 벼슬아치들에게 본보기를 보이려는 것이라고 말하며 자기 뜻을 받아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때서야 이원익은 왕이 지어 준 집을 받았다. 이 집이 현재 광명시 소하동에 있는 관감당(觀感堂)이다. 인조는 집과 더불어 노비도 지급했다. 관감당에서 측백 관감당에서 측백 이에 앞서 이원익이 서울을 떠날 결심을 하고 인조에게 허락을 요청하자, 인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경을 바라보는 것이 어린아이가 자애로운 어머니를 바라보듯 하오. 이제 경이 떠난다니 나는 어떻게 정치를 하란 말이오?” 인조의 이원익에 대한 마음을 잘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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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오는 말 이원익이 조선시대 재상들 모두를 대표한다고 볼 수는 없다. 재상의 모습을 더 잘 대표하는 다른 더 적당한 사람이 있다는 말이 아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조선시대에 재상은 넓게 보면 종2품 이상 고위관직자들이다. 좁은 범위로 한정한다면 삼정승, 즉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으로 좁힐 수 있다. 조선왕조는 500년 이상 지속되었다. 전근대사회 다른 왕조들에 비해서도 상당히 장수한 왕조이다. 조선시대에 정승을 역임한 사람은 모두 360여 명이다. 왕조의 지속 기간을 고려하면 적은 숫자지만, 숫자 그 자체의 크기는 적지 않다. 이런 사정을 고려하면 어떤 한 사람으로 조선시대 재상들의 전체 모습을 대표할 수는 없다. 조선시대에 다른 어떤 시기보다 인물이 많았던 시기가 선조 대(1567-1608)이다. 이 시기와 비교될 수 있는 시대는 아마도 세종 시대 정도뿐일 것이다. 이황, 이준경, 이이, 류성룡, 이순신, 정철, 이산해, 이항복, 이덕형 등 지금도 우리가 이름을 알고 있는 유명한 인물들이 한 시대 한 조정에 있었다. 이원익은 이렇게 인물이 많았던 시기에 정승에 올라 40년 가까이 그 지위를 유지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던 것일까? 동시대인들, 그와 관직 생활을 함께했던 인물들은 그의 어떤 점을 높이 평가했던 것일까? 흥미롭게도 이원익은 잘 알려진 조선시대의 인물 평가 기준에 비추어 봐도 비범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중국에서 전해진 관리 선발 기준으로 ‘신언서판(身言書判)’을 들 수 있다. ‘身’은 겉으로 드러나는 풍모, ‘言’은 조리 있는 말솜씨, ‘書’는 글씨, 마지막으로 ‘判’은 사물에 대한 통찰력이나 판단력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원익은 키가 몹시 작아서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올려다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의 풍모에 대해서 ‘오단지상(五短之相)’이라는 말이 전해 내려오는 것을 보면, 키뿐 아니라 팔다리도 모두 평균보다 짧았던 모양이다. 한 마디로 오종종하고 볼품없는 체구였다는 말이다. 또 스스로 말했듯이 말재주나 글재주도 보통 수준 이상은 아니었던 듯하다. 말하자면 신언서판 4가지 기준 중에서 앞의 세 가지는 뛰어나다고 할 수 없었다. 다만 판단력만은 상당히 뛰어났던 것 같다. 모두가 인정하는 그의 장기는 뛰어난 행정 수행 능력이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행정 능력은 사대부 개인의 우수함을 평가하는 기준으로는 그렇게 높이 평가받지 못했다. 많은 기라성 같은 인물들 중에서 이원익이 재상에 발탁되어 긴 세월 활약했던 것은 동시대 인물들이 그의 특정한 면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그가 엘리트 관리로 발탁될 수 있었던 것은 이이의 추천이, 그가 재상으로 발탁될 수 있었던 것은 윤두수의 추천이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이원익에게서 먼저 주목했던 것은 그의 탁월한 일솜씨였다. 하지만 두 사람이 단순히 행정의 숙련만을 가지고 이원익을 추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널리 알려진 대로 이이는 탁월한 경세가이고, 윤두수 역시 당대에 유명한 경세가였다. 두 사람은 이원익에게서 행정적 숙련 이상의 것을 보았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조선시대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되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이원익은 경세(經世)로 당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에 의해 발탁되어 40년 가까이 재상으로 활동했음에도 오늘날 우리는 그의 어떤 점이 탁월했는지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 이것은 조선시대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충분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조선시대에 있었던 사건이나 인물, 그리고 대표적인 제도의 성립이나 조선시대에 간행된 여러 법전의 내용 등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다. 분명히 이런 것들은 조선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 알아야만 할 사항들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조선시대, 조선 사회가 어떻게 작동했는지 대해서 우리가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그 공간에서 이원익이 활동했던 내용이 적지 않게 담겨 있는 것이, 우리가 그의 뛰어남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의 하나일 것이다. 이원익이 조선시대의 재상들 전부를 대표할 수는 없지만, 조선시대 재상이 어떤 존재인지 살펴볼 수 있는 매우 적절한 사례임은 분명하다. 조선시대 재상 중에는 매우 짧은 기간 동안 재상 지위에 있었던 사람들도 있고, 꽤 긴 기간 재상을 지냈어도 별다른 존재감이 없었던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원익은 4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재상 지위에 있었고, 전 시기에 걸쳐서 매우 뚜렷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 재상의 활동을 하위직 관리의 직무 수행과 같은 방식으로 파악할 수는 없다. 하위직 관리는 그 직책에 규정된 직무의 수행 성과로 평가할 수 있다. 반면에 재상은 그런 정해진 직무에 대한 관리 감독 기능도 수행해야 하지만, 이것들을 위해서 재상 직책을 설치한 것은 아니다. 재상은 당대의 국가적 과제를 해결해야 하는 존재였다. 따라서 해당 시기 상황에 따라서 재상의 활동은 달라질 수 있고, 결코 표준적인 모습으로 재단될 수는 없다. 이원익은 임진왜란 직전에 재상에 발탁되어 정묘호란 후, 병자호란 전에 사망했다. 조선시대 전체로 보아 가장 격렬한 변화의 시대를 살았다. 이원익을 통해서 재상 활동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원익은 염근리에 1등으로 추천될 만큼 청렴했다. 정승에서 물러난 후 그의 집은 두어 칸짜리 띠집이었고, 농사지을 땅도 없었고, 또 두어 명 노비도 없어서, 온 집안이 다만 매달 나라에서 주는 쌀로 생계를 이어갔다. 이는 그가 기본적으로 재상의 녹봉으로 살았음을 의미한다. 이원익 자신도 인정했듯이, 이것이 그가 남들에게 선물을 조금도 받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그것으로 생활의 주요 방편을 삼거나 치부를 하지 않았음을 뜻한다. 조선시대 관리의 녹봉은 많지 않았다. 흉년이 들면 그 녹봉조차 중단되거나 삭감되는 일이 잦았다. 그 녹봉으로는 규모 있는 기와집을 지을 수도, 땅을 넓힐 수도 없었다. 그가 유달리 청렴했다기보다는 녹봉 이외에 다른 치부를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원익은 23세 되던 1569년(선조 2)에 관직 생활을 시작해서 1634년(인조 12)에 사망했다. 관직에 있었던 기간이 65년이다. 이 기간은 크게 4개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1583년(선조 16)까지이다. 이해에 그는 승지로 있었는데, 동인과 서인 간 당쟁으로 인해 튄 불똥 때문에 파직을 당했다. 모두 15년 동안 승문원, 황해도 도사, 경연관, 승지 등 중앙과 지방에서 근무했다. 파직을 당한 후에 부친 사망이 이어져서 3년 정도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다. 두 번째 시기는 1587년(선조 20) 10월에 안주목사에 임명되는 것으로 시작해서, 영의정에 재직하다가 1600년(선조 33) 물러난 시기까지이다. 모두 13년이다. 이 기간에 그는 재상에 발탁되어 임진왜란 때 크게 활약했다. 조선 개국 이래 처음으로 평안도감사에서 곧바로 우의정에 발탁되었고, 4도 체찰사로 전쟁을 수행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데 탁월한 성과를 보였다. 이 시기 이원익의 활동은 정치인으로서의 활동이라기보다는 탁월한 행정가로서의 활동이다. 이 시기 마지막인 1600년에 자발적으로 물러남으로써 정치적으로 류성룡과 진퇴를 함께했다. 아마도 스스로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도 그의 관직 생활이 이것으로 마감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세 번째 시기는 광해군 시기이다. 1600년에 은퇴한 이원익은 1608년 광해군의 첫 번째 영의정에 임명되어 다시 조정에 나왔다. 이 시기 이원익의 활동 내용으로 꼽아야 할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경기선혜법 입법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광해군과 계속 갈등했다는 점이다. 광해군 시기에는 정치적으로 많은 사건이 벌어졌다. 임해군과 영창대군이 귀양을 가서 살해되었고, 인목대비가 폐비되어 경운궁에 감금되었다. 이 사건들이 일어날 때마다 이원익은 광해군 및 그를 지지하는 북인(北人) 인사들과 갈등했다. 그는 계속해서 영의정에 임명되었지만, 한양에 머물면서도 계속해서 사직상소를 올렸다. 이 자체가 그의 정치 활동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원익을 존경했고 개인적으로도 그와 가까웠던 이식(李植, 1584-1647)이 작성한 이원익의 시장(諡狀)에 이 점이 지적되고 있다. “공은 관직에 있으면서 아무런 탈도 없는데 이유 없이 사직서를 올린 적이 한 번도 없다. 공이 병에 걸리지 않았는데도 병을 핑계로 인피(引避, 일에서 물러나 회피함)하며 들어간 경우가 있긴 하였으나, 그것은 필시 공의 바른말이 그대로 행해지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구차하게 떠나려 하지는 않으면서도 그런 방법을 통해서나마 임금이 반성하여 깨닫기를 바란 것이었으니, 가령 혼조(昏朝, 광해군의 조정)에서 역옥(逆獄)을 일으켰을 적에 국청(鞫廳)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이 그런 예의 하나라고 하겠다”라고 서술했다. 거듭된 사직서는 이원익의 정치 활동이었다. 마침내 1615년에 이원익은 강원도 홍천으로 귀양을 갔다. 4년 가까이 유배 생활을 하다가 유배가 풀린 후에는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여주 앙덕리에 초가집을 엮어서 머물렀다. 광해군 시기의 절반은 영의정으로, 나머지 절반은 귀양 생활과 은둔으로 보낸 셈이다. 두 번째 시기 끝 무렵처럼 이원익은 이것으로 자기 삶이 마무리되리라 여겼을 것이다. 홍천 유배지에서 풀려났을 때 그의 나이는 73세였다. 마지막 네 번째 시기는 인조 대이다. 인조반정으로 그는 다시 한번 영의정으로 소환되었다. 그의 나이는 이미 77세였다. 흥미롭게도 인조 대 그의 활동은 크게 보면 광해군 시기와 유사했다. 이 시기에 그의 활동으로 제일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은 삼도대동법 실시이다. 인조반정 직후 산적한 중요 과제들 중에서 삼도대동법이 제일 먼저 추진되었던 것은 전적으로 이원익의 주장에 따른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시기에 추진된 삼도대동법은 실패했지만, 후일 효종 초 대동법 성립에 확고한 기반이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인조반정의 중심세력인 서인들과 계속 갈등했다. 그럼에도 그 갈등이 광해군 때처럼 파행으로 흐르지 않았던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인조 임금의 이원익에 대한 깊은 존경심이었다. 재상의 관직 활동은 정치와 행정 모두에 걸쳐있기 마련이다. 이원익 역시 그랬다. 전체적으로 보아서 이원익은 행정에 탁월한 면모를 보였던 반면에 정치에 대해서는 그만 못했다. 그런데 정치에서 유능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아마도 그것은 조정에서 강력한 자신의 정치세력을 구축하고, 임금에 대해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원익은 조정에서 자신의 정치세력을 구축하지 못했고, 그럴 의사도 없었다. 다만 그만의 방식으로 선조, 광해군, 인조 임금에 대해서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 그들은 이원익의 일에 대한 탁월함과 헌신, 청렴결백함, 나라에 대한 충성 등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점 때문에 그들은 이원익의 말에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 조선시대 재상 이원익의 관직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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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 한다. 하지만 이원익의 공 역시 류성룡 못지않다. 더구나 이원익은 류성룡과 달리 이순신을 구원하는 데에도 힘을 크게 보탰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 이원익의 공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원익이 사망한 다음 해에 생전에 그와 가까웠던 이식(李植, 1584-1647)은 이원익의 시장(諡狀)을 작성했다. 시장이란 조정에 시호(諡號)를 요청하기 위해서 작성한, 사망한 인물의 평생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시호는 제왕이나 재상, 명명 높은 인물들이 죽은 뒤 그들의 공덕을 기리는 의미로 국가가 부여하는 이름이다. 여기서 이식은 이원익이 세 조정에서 벼슬하며 국가가 동란(動亂)을 당했던 선조 때는 ‘사직(社稷)을 보존하는 공’을 세웠고, 국가가 혼란에 빠졌을 때, 즉 광해군 때에는 강상(綱常, 근본이 되는 윤리)를 붙들어 세웠으며, 인조를 만나서는 국운(國運)을 새롭게 했다고 요약했다. ‘사직을 보존한 공’이란 임진왜란으로 거의 망할 뻔한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는 말의 완곡한 표현이다. 그 구체적 내용은 무엇일까. 이를 알기 위해서 우선 임진왜란 초기 상황을 되짚어 보아야 한다.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저녁 무렵, 엄청난 수의 일본 병선(兵船)들이 부산 앞바다에 나타났다. 다음 날 아침 왜군 배들이 해안에 상륙하면서 임진왜란이 시작된다. 어떤 외교적 절차도 없이, 정식 선전포고도 없이 벌어진 일이다. 처음에 조선 조정은 부산과 동래에서 벌어진 상황과 그것의 의미를 즉각 파악하지는 못했다. 왜구의 침략은 이전에도 종종 있던 일이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17일에는 여진족 토벌에 혁혁한 공을 세운 바 있던, 당시 조선 제일의 명장 신립(申砬, 1546-1592)을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로 임명하여 남쪽으로 파견했다. 그는 용맹한 여진족 추장 니탕개(尼湯介)를 물리친 용장이었다. 니탕개는 북방의 여러 여진 부족들을 규합하여 두만강가에 있는 조선의 6진(六鎭)을 공격하고 그 일부를 점령했었다. 여러 조선 장군들은 니탕개와의 전투에서 모두 졌지만 신립은 달랐다. 그는 1583년(선조 16) 불과 500여 기 철기병과 화포로 무장한 채, 니탕개 군사 1만 명을 물리치고, 계속해서 두만강 건너 그들의 본거지까지 소탕했다. 대단한 성과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할 때까지 그는 조선 제일의 명장으로 명성이 높았다. 조선 조정이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든 것은 4월 27일이다. 이날 신립이 배수진을 치고 싸운 탄금대전투에서 패한 후 자살하고, 충주가 왜군에 떨어진다. 이제 단 며칠 안에 한양 도성이 왜군에 함락되리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고위 관료들 다수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이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 이에 앞서 이원익은 장사(壯士) 몇 명을 모집한 다음 대궐에 가서 청하기를, “신이 종척(宗戚)의 귀신(貴臣)으로 차마 앉아서 (나라가) 전복(顚覆)되는 상황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으니, 곧장 먼저 전쟁터에 나가서 결사 항전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습니다”라고 요청했다. 무모한 행동이었지만, 나랏일에 임하는 이원익이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모습이다. ‘종척’이란 왕실의 친척이라는 말이다. 법적으로 이원익은 이미 왕실의 일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스스로는 왕실의 일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자기 집안과 나라를 동일시했다. 선조가 이 문제를 조정 논의에 부치자, 많은 사람이 병약한 그를 참전케 하는 것은 무익한 일이라고 말하며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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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여송의 명군과 이원익의 조선군이 연합하여 평양성을 탈환했다. 평안도감사이자 순찰사인 이원익은 명나라 이여송의 실질적 상대역이었다. 그는 이 역할을 탁월하게 수행했다. 앞에서 말했듯이 그는 뛰어난 중국어 실력자였다. 행정 실무와 중국어에 모두 능통했다. 명나라 최고 지휘부와 일반 역관이 할 수 없는 수준의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조선의 대신들은 이여송과 명나라 장수들에게 전혀 대등한 대화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들은 오만했고, 조선의 정승까지 무릎을 꿇려 모욕 주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다. 하지만 이원익에게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원익은 행정에 능통했고, 부지런했다. 명나라 장수들도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결국 이원익을 통해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이원익이 명나라 장수들과 처음부터 원만한 관계를 맺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군량 조달은 큰 문제였다. 명나라 장수 양호(楊鎬)와 이원익의 관계가 이를 잘 보여 준다. 양호는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명나라의 명령으로 1597년 7월에 조선에 왔다. 9월에 있었던 직산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양호는 군사작전의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서 처음에는 군량이 조달되어야 할 장소와 시간을 이원익에게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자 이원익이 시간과 장소를 미리 알아야 군량을 조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당연한 말이다. 양호는 처음에 이원익의 요구를 무시했지만, 곧 이원익의 합리적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당시는 전시였다. 평상시 행정력이 작동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양호와는 군량 운반 문제로 다툼이 있었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군량을 마련해 내는 것이었다. 그것은 백성들과의 관계에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다. 평소에 나라에 은혜 입은 것이 적은 백성들에게 전쟁 중에 군량을 마련해 내게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이원익은 이 어려운 상황에서 백성들 사정을 살펴가며 곡물을 조달해 내는 어려운 일을 수행했다. 그런 한편으로 병력도 모집했다. 이여송은 평양성 탈환 후 준비가 부족한 상태로 경솔히 한양까지 탈환하려다가 경기도 고양 벽제관에서 왜군 반격에 거의 목숨을 잃을뻔했다. 이후 그는 개성으로 물러나 다시 공격을 시도하려 하지 않았다. 왜군 역시 다시 반격해 오지 않았다. 이 상태에서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강화회담이 시작되고 전쟁은 교착상태에 들어갔다. 전투가 소강상태이고 전쟁이 교착상태에 있어도, 이원익의 일은 끊이지도 줄지도 않았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을 돌봐야 했고, 명나라 군대에 식량을 조달해야 했으며, 군사들을 모아서 훈련시켜야 했다. 1593년 2월, 이원익은 평양성 탈환의 공로로 종1품으로 승진했다. 당시는 왜군에게서 한양을 되찾은 직후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서울로 되돌아가는 문제가 논의되고 있었다. 그에게 수여된 숭정대부 품계는 그간의 노고와 공로에 대한 포상이자, 더 중요하게는 왕이 떠난 후 평안도를 위임한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아직 유동적인 전황(戰況) 속에서, 선조는 전쟁 수행의 최후 근거지 평안도를 그에게 맡긴 것이다. 1593년(선조 26) 이후 조정에서 이원익의 명망은 확고해졌다. 이원익선생 영정-평양생사당구장영정 이원익은 1595년(선조 28) 6월에 우의정에 임명되어 한양에 돌아간다. 평양성 탈환 이후 한양 복귀까지 2년 남짓한 기간 동안 이원익의 행적에 대해서는 기록이 자세하지 않다. 그런데 이 기간 이원익의 활동을 간접적으로나마 짐작할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이원익이 떠난 후, 평양 백성들은 이원익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는데, 최립(崔岦, 1539-1612)이 쓴 「생사영향사(生祠迎享詞)」가 남아 있다. 최립은 17세에 진사가 되고, 21세에 문과에서 장원을 차지하여 일찍부터 유명했던 인물이다. 당대 최고 문장가로 인정받으며 중국과의 외교문서 작성에 공이 많았다. 제문이 길어서 이원익의 행정적 조치와 관련된 내용만 추리면 아래와 같다. 蓋在壬辰 / 대개 보건대 지난 임진년에 邦家播蕩 / 국가가 요동치며 피난길을 떠나게 된 나머지 上保岐坰 / 주상께서 서쪽 땅에 머무르게 되셨습니다. 公由八座 / 공께서는 판서의 신분으로 命攬巡鞅 / 순찰사 임무를 부여받으시고 則尹我京 / 우리 서경(西京)의 어른으로 부임하셨습니다. 安州之政 / 한 지방을 편안하게 다스리는 정사로 말하면 朝藉宿望 / 조정에서도 예전부터 중망(重望)을 받으셨던 터라 輿聽亦傾 / 천인들까지도 경청하며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及公下手 / 급기야 공께서 손을 대기 시작하자 雖屬草創 / 모든 것이 어설프고 어수선한 때였으나 綽然有成 / 여유작작하게 성취되었습니다. 八路學壞 / 팔도의 교육 기관이 모두 파괴되어 斯文幾喪 / 사문이 거의 망할 지경에 이르자 公首治黌 / 공께서 제일 먼저 학교를 세우기 시작하였습니다. 中外師散 / 서울이고 지방이고 군대가 뿔뿔이 흩어졌을 때 一旅誰倡 / 근왕병을 일으키자고 누가 수창(首唱, 처음으로 외침)했습니까. 公勤練兵 / 정예 군사를 부지런히 양성했던 것은 바로 공이었습니다. 亂離饑疫 / 난리 통에 기아와 병으로 신음할 때 省撫墟莽 / 공께서 황야의 백성들을 어루만져 위로하며 起死以耕 / 기사회생시켜 농사짓게 했습니다. 大援西來 / 구원병이 대거 서쪽에서 건너올 때 孚驩軍將 / 공께서 중국 장수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면서 以無擾驚 / 소요를 일으키는 일이 없게 하였습니다. 自奉貶削 / 자신의 생활은 또 얼마나 검약하였던가요. 性而非強 / 이는 천성이요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서 吏化於淸 / 관리들도 모두가 맑게 변화되었습니다. … 其存體統 / 체통을 일정하게 지키고 유지하면서도 河海爲量 / 강과 바다처럼 도량이 넓으시어 怨用不生 / 원망하는 말 한마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其辦公幹 / 공무를 처리하는 면에 있어서도 游未趨償 / 한가로이 노니는 듯 상(償)은 안중에도 없었으나 人見鬼營 / 사람들은 귀신 같은 경영 솜씨를 보았습니다. … 狄徵自寧 / 영주(寧州)에서 부름받은 적인걸(狄仁傑)이나 宋愛遺廣 / 광주(廣州) 땅에 사랑 남긴 송경(宋璟)쯤은 되어야 差與重輕 / 공과 조금 견줄 수 있다고 할 것입니다. 최립, 『간이집(簡易集)』 제1권, 「제문(祭文)」 전쟁 중에 이원익은 학교를 다시 세우고, 병사를 모아서 정예군으로 양성했다. 백성들을 보살펴 다시 농사짓게 했고, 중국 장수들이 소요를 일으키지 못하게 했다. 스스로 근검절약하여 관리들까지 청렴하게 변화시켰다. 무너졌던 일상을 회복시키면서 전쟁을 할 수 있는 힘을 길렀던 것이다. 이런 일들은 이 시기에 반드시 해야 하지만 대단히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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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신을 만나다 이원익은 1595년(선조 28) 6월에 최고의 품계인 정1품 상(上)계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우의정에 승진했고, 동시에 경상·전라·충청·강원 4도 도체찰사를 겸하여 맡았다. 도체찰사란 임금에게 보고하기 전에 먼저 재량으로 군사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최고권자를 말한다. 1594년 중반 이후로 전쟁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전투는 잦아들고, 명나라와 왜 사이에 강화회담이 진행되었다. 전선(戰線)은 완전히 서울 아래로 내려가서 고착되고, 이제 서울이 왜군의 군사적 공격에 위협받지 않게 되었다. 반면에 오랜 전쟁 때문에 남쪽 지방은 극도로 황폐해졌다. 당연히 민심 이반이 심각했다. 이원익의 장기인 주도면밀하고 마음을 다하는 관리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원익이 현직 관찰사에서 정승으로 곧바로 승진한 것은 조선 건국 이래 200여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충무공가승』, 이봉상 엮음, 1716 이원익은 상경 즉시 새로 부여된 임무 수행을 위해서 한산도로 향했다. 이때 한산도에는 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수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원익은 한산도의 군대 배치 상황을 살펴본 후 이순신을 크게 칭찬했다. 그리고 이순신의 권유에 따라 이원익은 지친 병사들을 위해서 방산(旁山)에 올라 소를 잡고 잔치를 베풀었다. 이 일 이후 방산은 ‘정승봉(政丞峯)’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원익 문집의 연보에 이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공이 영루(營壘)를 살펴보고 방수방략(防守方略)을 점검해 보고는 크게 기특하게 여겼다. 공이 돌아오려 할 때 이순신이 가만히 공에게 말하기를 “체상(體相)께서 이미 진(鎭)에 오셨으니, 한번 군사들에게 잔치를 베푸셔서 성상의 은택을 보여 주심이 어떻습니까?” 하니, 공은 뜻은 좋으나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이순신은 이미 (자기가) 잡을 소와 술을 준비해 놓았으니 허락만 하시면 잔치를 베풀 수 있다고 아뢰었다. 공이 크게 기뻐하며 허락했다. 마침내 소를 잡아 잔치를 베풀고 군사들의 재주를 시험하여 상을 주니, 군사들이 모두 기뻐하며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이를 기념하여 후인들이 그 땅을 ‘정승봉’이라고 불렀다. 『梧里先生續集附錄』 권1, 「年譜」 이원익의 행정은 신속하고 실용적이었다. 허례나 허식을 배격했다. 이는 행정적으로 대개는 바람직한 태도였다. 하지만 때로 실용적인 것만으로는 부족할 때가 있다. 이원익은 각 지역의 방수방략, 즉 왜군에 대한 전투준비 태세를 점검하며 순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투는 결국 병사들이 하는 것이고, 그들의 사기가 중요했다. 계속된 전투와 훈련으로 병사들은 지쳐있었다. 병사들에게 위로가 필요한 때였고, 이순신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이순신이 자체적으로 일종의 회식인 잔치를 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도체찰사 이원익은 왕을 대신하는 존재였다. 이순신보다 더 높은 지위와 권위를 대표했다. 이순신은 자신이 베푼 잔치보다 이원익이 베푼 잔치가 병사들 사기를 더 크게 높일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이원익은 이를 즉시 이해했다. 이원익은 잔치를 위한 물자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 효과를 높일 수 있는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이순신은 그것을 이용했던 것이고, 이원익은 그것에 흔쾌히 동의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이때 처음으로 만났다. 하지만 이후에 일어났던 여러 가지 일들로 판단해 보면, 그들은 이 만남으로 서로를 높이 평가했고 정서적으로도 크게 공감했던 것 같다. 사실 두 사람은 서로 비슷한 면이 있었다. 각각 과거의 문과와 무과를 통과한 후, 능력은 출중해도 처세술이 부족하여 여러 해 동안 하급 관직에 머물렀던 것도 유사했다. 아무튼, 이순신과의 만남 이후 이원익은 계속해서 호남의 여러 곳을 순행했고, 이어서 영남으로 건너와 현재의 경북 성주(星州)에 체찰부(體察府)를 설치했다. 이원익은 무엇보다 왜군의 살육과 약탈, 조선 정부의 군량 징발에 지친 백성들을 돌보는 일에 힘썼다. 하지만 그의 일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상소를 올려서 남쪽 지역의 군대와 지휘관 배치에 대해서도 큰 흐름을 잡아냈다. 그는 영남의 경우에 강의 형세가 좌우가 크고 넓어서 위급한 상황에서 신속하게 대응하기에 적절치 못하다고 보았다. 그는 군대를 한곳이 아닌 좌우로 나누어 배치하도록 했다. 또 선산에 금오(金烏)산성, 경주에 부산(富山)산성, 달성에 공산(公山)산성, 함안에 황석(黃石)산성, 창녕에 화왕(火旺)산성을 새로 쌓거나 보강 개축했다. 이원익이 건의한 지휘관들의 배치는 그가 인물들의 역량을 파악하는 데 상당한 감식력을 지녔음을 보여 준다. 그는 통제사 이순신을 거제에 주둔시켜서 남해안에 포진해 있는 왜군을 막도록 요청했다. 또 곽재우(郭再祐, 1552-1617)를 변경에 두어 해변을 지키게 하고, 영남 출신으로 지리와 인정에 밝은 순찰어사 정경세(鄭經世, 1563-1633)를 영남지방의 산성 수축 임무에 배치하도록 건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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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 29) 10월 이원익은 선조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돌아왔다. 이원익을 보자 선조는 이순신에 대해 이것저것 집요하게 물었다. 그 질문에는 이순신에 대한 깊은 불신이 깔려 있었다. 이것은 많은 것을 함축하면서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예시(豫示)했다. 이미 1594년에 조정에서는 원균(元均, 1540-1597)과 이순신 사이의 ‘갈등’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사실, ‘갈등’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이순신에 대한 원균의 원망 혹은 비방이라고 해야 옳다. 두 사람 관계가 이렇게 된 근본 원인은 임진왜란 발발 이후 이순신이 원균보다 훨씬 탁월한 성과를 올리며 또 높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어릴 때 서로 알던 사이였다. 허균(許筠, 1569-1618)에 따르면 자신의 친가가 건천동(현 서울시 중구 충무로 지역)에 있었는데, 모두 34가구였다고 한다. 그리고 류성룡, 자신의 형, 이순신, 원균이 모두 여기서 태어났다고 했다. 전쟁 전만 해도 이순신은 여러 가지 점에서 원균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집안의 수준이 그랬고, 무과에 붙은 나이와 성적이 그랬고, 무과 합격 이후 관력(官歷)이 그랬다. 나이도 원균이 5살 많았다. 친근한 사이에도 사회적 위계가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내면화한 심리적 위계도 있는 법이다. 오랫동안 그 위계에서 지인보다 위쪽에 있었던 사람이 어느 순간 그 아래쪽에 놓이게 될 때, 그것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원균이 그랬던 것 같다. 원균의 이순신에 대한 원망은 어느 순간 비방으로 바뀌었고, 그것이 조정에 전해졌다. 여러 연구는 이때 선조가 특별한 이유 없이 원균 쪽으로 기울어, 이순신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고 말한다. 더구나 선조는 이미 이원익이 서울에 올라오기 전에 이원익에게 이순신에 대한 ‘은밀한 단서’를 잡으라고 지시한 바 있었다. 그것에 대해 이원익은 선조의 기대에 반하여 이미 두 번이나 이순신의 충성됨을 비밀스레 보고했었다. 당시 선조는 정치적으로 몹시 곤혹스러운 상태에 놓여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싸워 보려고도 안 하고 명나라로 망명하려 했던 선조의 행적은, 백성들은 물론 사대부들에게도 공분을 일으켰다. 아무리 왕조국가여도 임금이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 더구나 조선은 사대부들의 사회적 영향력이 컸다. 심지어 선조 28년 3월 명나라 신종(神宗) 황제는 광해군에게 보내는 칙서에서 선조를 직접적으로 ‘실패한 왕’으로 규정했다. 선조로서는 몹시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실제로 그는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나겠다고 신하들에게 여러 차례 공언했다. 물론 그것이 그의 진심은 아니었다. 왕이 그렇게 말하면 신하들은 말릴 수밖에 없고, 이를 통해서 선조는 자신의 지위를 재확인했다. 이런 상황에서 백성들 신망을 얻으면 전쟁영웅으로 떠오른 이순신은 선조 입장에서 결코 기쁜 마음으로 그 승리를 축하할 수 없는 장수였다. 아랫사람의 공이 너무 크면 상을 주기 어려운 법이다. 그 공이 윗사람의 지위와 권위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선조는 먼저 이순신이 임무에 힘쓰는지 물었다. 그러자 이원익은 그가 부지런히 근무할 뿐 아니라 한산도에 군량이 많이 쌓였다고 답했다. 이어 선조는 이순신이 태만해졌다는 여론이 있다면서 이순신의 사람 됨됨이를 추궁하듯 물었다. 이에 이원익은 그가 장수 가운데 가장 쟁쟁한 인물이며 태만한지는 알지 못하겠다고 했다. 선조는 이순신이 군 지휘자로서 자질이 있는지 다시 물었다. 이원익도 물러나지 않았다. 경상도 주둔 장수들 가운데 이순신이 가장 훌륭하다고 이원익이 말하자 그제야 선조의 물음이 그쳤다. 이원익도 선조가 자신에게 어떤 답변을 듣고 싶었는지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이순신에 대해서 했던 생각을 조금도 바꾸지 않고 선조에게 말했다. 이원익은 강직한 사람이었다. 이런 모습이야말로 조선이 재상에게 기대하는 모습이다. 조선의 재상은 임금과 생각을 같이하기 어려우면 물러나야 했다. 군신의 지위를 핑계로 임금의 잘못을 따라가는 것은 조선의 재상에게 기대되는 모습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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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서 영남에 있던 이원익은 상소하여 이순신에게 씌워진 혐의가 사실과 다르다고 말했다. 사실 원균은 조정에 올린 상소에서 전쟁 초기에 자신의 병력 지원 요청에 이순신이 적극적으로 응하지 않았다고 비난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이원익은 이순신과 원균이 그 맡은 바가 각각 있으니 이순신이 가서 구원치 않았다고 죄 될 일은 없다고 말했다. 이원익은 이순신을 하옥하는 것을 세 번이나 상소를 올려서 강력히 반대한다. 이원익은 “적이 두려워하는 것은 수군이요, 수군이 믿는 사람은 순신입니다. 순신은 움직여서는 안 되고, 원균은 써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했다. 류성룡은 당시 정치적으로 이순신을 도울 수 있는 처지에 있지 못했다. 마침내 조정은 원균을 이순신 후임에 임명했다. 이 결정은 곧 조선 수군과 조선을 크게 위태롭게 했고, 마침내 원균 자신까지 죽음에 몰아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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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 중에 류성룡과 이원익을 비교하는 말들이 있다. 당시에도 두 사람을 함께 거론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던 모양이다. 그 말들 중에서 “완평은 속일 수 있지만 차마 속일 수 없고, 서애는 속이고 싶어도 속이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완평은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을 가리킨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이원익이 받은 공신 칭호이다. 이 말은 얼핏 들으면 말장난 같지만, 이 말만큼 두 사람의 차이를 분명히 드러내기도 쉽지 않다. 말인즉, 이원익은 그 사람 자체가 탁월하게 뛰어나지는 않아도 너무도 순수하고, 그 순수함이 상대에게도 전해져서 속이려는 마음을 먹기 어렵다는 말이다. 속이려는 사람 자신이 스스로 너무 나쁜 사람이 되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는 뜻일 것이다. 반면, 류성룡은 너무나 주도면밀해서 도저히 속일 수 없다는 말이다. 사실, 류성룡과 이원익은 다른 점보다는 비슷한 점이 더 많았다. 이원익보다 5살 많은 류성룡은 앞에서 말했듯이 서울 건천동(乾川洞, 현 서울시 중구 인현동1가 40번지 부근)에서 성장했고, 두 사람 모두 4부학당 중 동학(東學)에 다녔다. 또 두 사람은 같은 해인 1564년(명종 19)에 사마시에 합격했다. 류성룡은 생원, 진사시에 모두 붙었고, 이원익은 생원시에 합격하여 거의 비슷한 시기에 성균관에 들어갔다. 류성룡은 2년 뒤인 25세에, 이원익은 5년 후인 23세에 문과에 합격했고, 둘 다 승문원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사료로 확인되지 않지만, 그들은 성균관 시절부터 서로를 알았을 것이다. 그들은 또 관직 생활을 시작하고 몇 년 후에 사신단의 일원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는 것까지 같은 경험을 한다. 두 사람 모두 중국어에 능통했다. 류성룡이 더 오래 경연관을 지냈지만 이원익도 짧다고 할 수 없는 5-6년의 경연관 생활을 했고, 두 사람 모두 경연관에 이어 승지직을 지낸다. 공직 경력의 유사성보다 두 사람의 더욱 비슷한 면모는 그들의 청렴함이다. 1601년 (선조 34) 두 사람은 모두 염근리(廉勤吏)에 선정된다. ‘廉勤(염근)’이라는 말은 ‘청백(淸白)’이라는 말이 너무 높은 수준이기에 감당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대신 쓴 말이기는 하지만 같은 의미이다. 모두 네 사람을 뽑았는데 첫째가 이원익이고 둘째가 류성룡이었다. 이항복이 주관한 일이다. 당시 두 사람 모두 조정을 떠난 상태였다. 조정은 류성룡을 몰아낸 북인 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다. 류성룡만큼 당파적 공격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원익도 당시 남인으로 분류되었다. 대단히 명예로운 염근리에 두 사람이 모두 선정되었어도 조정에서 별다른 이견이나 반대 목소리는 없었다. 이원익은 류성룡과 정치적 진퇴를 함께했다. 1597년(선조 30) 봄 이순신의 백의종군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류성룡은 조정에서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려 있었다. 정유재란이 발발하면서 조정 내 갈등은 잠시 수그러드는 듯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1598년 6월에 명나라의 병부 주사(兵部主事) 정응태가 경리(經理) 양호(楊鎬)를 무고하는 사건과 관련해서, 류성룡은 집중적인 정치적 공격을 받았다. 그는 결국 10월에 영의정에서 물러나 낙향했다. 그리고 사망하는 1607년까지 다시는 한양에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류성룡, 『징비록』 초본, 한국학진흥원 소장 1597년 1월 정유재란이 시작되고 왜군이 다시 북상하기 시작했다. 9월 초 왜군이 오늘날 평택과 천안의 중간쯤인 직산(稷山)에 이르자, 이원익과 양호는 협력해서 왜군을 물리쳤다. 만약 이곳에서 왜군을 저지하지 못했다면 곧바로 서울이 다시 위험에 처하게 되었을 것이다. 직산 전투는 명나라가 임진왜란 3대첩(大捷)의 하나로 꼽는 전투였다. 정응태는 명나라 장군 양호가 큰 전공을 세우자 이를 시기하여 거짓 내용으로 명나라에 보고했다. 그에 더해 그는 조선이 여러 곳에 성(城)을 쌓는 것에 대해서도 명에 대해서 다른 뜻, 즉 공격할 뜻이 있는 듯이 보고했다. 사실 양호는 여러 명나라 장수들 중에서도 헌신적으로 임무를 수행한 장수였다. 때문에 선조와 조선의 여러 대신도 그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 조선 조정은 그의 소환을 막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결국 1598년 7월에 본국에 소환되었다. 그러자 조선 측에서는 신속히 명에 사신을 보내서 양호를 변호하고 조선의 축성에 대해서도 오해를 풀어야 할 필요가 생겼다. 조정에서 사신을 파견하는 문제가 논의되자, 선조는 이렇게 말했다. “이번 진주사(陳奏使)는 반드시 상신(相臣, 삼정승) 중 하나에서 보내되 능숙한 문장으로 변론할 수 있는 사람이 가야 한다.” 이름을 말하지 않았지만 선조가 진주사로 영의정 류성룡을 지목하고 있다는 것을 모두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류성룡은 노모(老母)를 이유로 대며 자임하여 나서지 않았다. 좌의정 김응남은 몸이 아픈 상태였다. 결국 우의정 이원익이 진주사 임무를 맡는다. 1598년 8월 초에 이원익은 무거운 임무를 띠고 명나라 수도 베이징으로 떠났다. 본래 선조가 조정 신하들 중에서 오랫동안 가장 친밀하게 여기고 높이 평가했던 인물이 류성룡이다. 하지만 진주사 문제 이후 류성룡에 대한 선조의 태도는 확실히 이전과 온도 차이를 보였다. 류성룡의 정적(政敵)들이 이를 놓칠 리 없었다. 그들은 집요하게 류성룡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렸다. 류성룡이 물러나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류성룡 자신도 물러날 것을 계속 요청했다. 그는 1598년 10월 6일에 결국 영의정에서 물러났다. 류성룡의 사직은 7년이나 끌어온 전쟁의 막바지 단계에서 일어났다. 어떤 면에서 임진왜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 개인의 결정으로 일어난 전쟁이다. 그런 그가 이미 1598년 8월에 사망했고, 조선에 나와 있는 왜군의 철수를 유언으로 남겼다. 조선에 있던 왜군들은 전쟁을 계속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또 류성룡이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나고 한 달 남짓 지난 11월 19일에 이순신도 전사한다. 같은 날 류성룡도 파직되었다. 임진왜란에서 일본과 조선의 가장 중요한 사람들 중 세 사람이 무대에서 사라졌다. 이원익은 조선에 돌아오기 전에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덕형(1561-1613)과 이항복이 각각 좌의정과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다음 해인 1599년(선조 32) 1월 초 이원익이 베이징에서 돌아왔다. 갔었던 일을 보고하는 자리에서 그는 무엇보다 류성룡을 힘써 변호했다. 먼저 그는 류성룡이 진주사 임무를 자청하지 않았던 잘못을 범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것을 빌미로 한 류성룡 반대파들의 공격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것임도 지적했다. 류성룡이 10년 동안 정사를 보필하면서 한 가지도 나라에 도움이 없었다거나, 널리 자신의 사람들을 요직에 심고 임금의 권세를 참람하게 사용해서 류성룡 집에 뇌물이 가득하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말했다. 실제로, 불과 2년 후 류성룡이 염근리에 선정되고, 그때 조정에서 이를 문제 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원익은 류성룡의 청렴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지극한 정성은 실로 본받을 만하며, “아무도 그를 대신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원익의 말에 대해 류성룡 탄핵에 나섰던 사람들은 즉각 반격에 나섰다. 이들은 왕에게 이원익의 말을 들어가며, 그렇다면 자신들이 물러나겠다고 말했다. 이원익의 말이 맞다면 자신들이 사실을 날조하여 정치적인 공격을 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선조는 그들의 사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 과정을 통해서 이들은 선조의 정치적 재신임을 받은 셈이었고, 자신들의 류성룡 탄핵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 상황을 지켜보면서 이원익은 자신도 조정에 있기 어렵겠다고 판단했다. 그는 사직상소를 올렸다. 선조는 이원익의 사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이원익에게 “우리나라는 옛날 (중국의) 초나라나 제나라가 아니다. 경이 나를 버리고 무엇이 되고자 하는가”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이원익이 요구한 류성룡에 대한 기존 조치를 되돌리지 않았다. 이후 이원익은 동호초당(東湖草堂)에 물러나서 계속해서 사직상소를 올린다. 동호는 오늘날 한강에 있는 동호대교 북쪽 끝 강북 지역이다. 1599년은 이원익에게는 정치적 투쟁의 기간이었다. 그는 조정에 나오지 않은 채 서울에 머물며 계속해서 사직상소를 올렸다. 결국 11월에 6번의 사직상소 끝에 공식적으로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난다. 이후에도 1602년(선조 35)에 크게 아프기 전까지는 간헐적으로 정사에 간여하기도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선조의 조정에서 은퇴했다. 류성룡과 정치적 진퇴를 같이 했던 것이다. 1600년부터 광해군이 즉위하는 1608년까지, 이원익은 서울의 저택에서 지냈다. 집은 그가 태어난 곳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한양 동부의 낙산 아래 건덕방(建德坊)에 있었다. 조정을 떠났어도 그에 대한 선조의 신망과 조정에서의 명망은 전혀 줄지 않았다. 1602년 그가 몹시 아파서 생명이 위태로웠다. 이 소식이 선조에게 전해지자 그는 즉시 어의 허준(許浚)을 보내 그를 진찰하게 했다. 허준이 돌아오자 선조는 그를 자기 침실로 불러 이원익의 생사 여부를 물었다. 또 점치는 사람을 불러서 그의 수명 장단을 점치게 했다. 이원익이 좀 더 살 수 있는지 확인하고자 했다. 점을 친 사람은 함충헌(咸忠憲)이라는 사람이다. 선조의 행동은 그가 이원익의 죽음을 국가적인 문제로 생각했었음을 암시한다. 선조는 죽음을 앞두고 광해군에게 “여러 신하 중에 오직 이원익에게만 큰일을 맡길 수 있다. 나는 후한 예로 그를 대우하지 못했다. 네가 성의를 보여야 그를 쓸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임진왜란을 통해서 선조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이원익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보여 준다. 선조의 생각과 무관하게 이원익 자신은 조정에서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이 끝났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실제로 그는 이제 60세에 가까웠고, 북인(北人)이 장악한 조정에서 정치적으로 소외된 존재였다. 임진왜란 중에 그가 보인 놀라운 활약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국가의 현안을 해결하는 데에는 매우 탁월했다. 하지만, 중앙정치의 권력 게임에는 재주를 보이지 못했다. 그가 류성룡을 옹호했던 것은 정치적으로 영리한 행동이 아니었다. 류성룡은 정치적 반대 당파에 공격받고 있었다. 이원익이 류성룡과 거리를 두었다면 조정에서 좀 더 유력한 존재로 남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그에게 너무 힘든 일도 아니었다. 그는 남인 측 인물로 분류될 수 있는 사람들과 친밀했지만, 그 자신이 본래 고향이나 수학(修學)과 관련해서 남인의 기반을 가졌던 인물은 아니다. 그는 왕실 인물이었다. 그가 가까이했던, 창석(蒼石) 이준(李埈, 1560-1635),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 등은 류성룡의 제자였다. 이원익은 이들의 능력과 인품을 훌륭히 여겼을 뿐이다. 하지만 조정에서 권력 투쟁에 익숙한 이들에게 이 모든 것은 당파적으로 해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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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서 물러나다 이원익이 임진왜란 경험으로 얻은 교훈 임진왜란 이후 이루어진 조선 최대 국정 개혁은 세제(稅制) 개혁인 대동법이다. 이 개혁으로 조선은 재정 및 민생과 관련된 오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고, 이후 왕조의 지속을 가능케 하는 힘을 얻었다. 대동법은 일시에 성립된 개혁이 아니다. 그 첫 번째 시도가 1608년(광해군 즉위)에 시작된 경기선혜법이다. 경기선혜법 자체가 대동법은 아니지만, 대동법 성립의 첫 번째 계기가 되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 경기선혜법을 처음으로 강력히 주장했던 사람이 이원익이다. 그가 이 개혁을 주장했던 것은 임진왜란 중에 그가 했던 경험이 결정적 단서가 되었다. 이원익은 4도 도체찰사 임무를 수행하다가 1596년 10월에 한양 조정에 복귀한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지났던 고을들의 과중한 부역을 줄여줄 것을 조정에 여러 차례 상소했다. 이원익의 이런 행동은 단순히 백성들에 대한 동정심에서 나온 일과성 조치가 아니었다. 그는 오랜 전쟁으로 황폐해진 민생을 살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그것의 핵심은 백성들의 세금 부담을 줄이는 것이라고 보았다. 조정에 돌아온 이원익은 선조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들에게 삶을 즐거워하는 마음이 있은 후에야 윗사람을 친애(親愛)하며, (그들을 위해) 목숨이라도 버리는 법입니다. (백성들에게) 이미 항심(恒心)이 없고 보면 아무리 그들을 엄한 법으로 묶어서 마음을 움직이지 않게 하려 해도, 모두 (살던 곳에서) 떠나 버릴 계획만 갖고 정착해 있을 마음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한 번 고향을 떠나고 나면 바로 도적이 되어 버립니다. 백성의 생활이 곤궁하고 어렵다는 말을 사대부들은 입버릇처럼 합니다. 성상께서도 필시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계실 것입니다. 지금 신이 (지방 사정을) 직접 자세히 보고 왔는데, 왜가 물러가도 국가의 근본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크게 근심스럽습니다. 일체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염두에 두소서. … 오직 백성만이 나라의 근본입니다. 조정은 이 점을 절실하고 급박한 임무로 삼아야 합니다. 기타 일들은 부수적인 일일 뿐입니다. … 백성에게 모두 삶을 즐거워하는 마음이 있게 된 뒤에야, (윗사람과) 더불어 고락(苦樂)을 함께할 수 있습니다. 만일 (그들에게) 항산(恒産)이 없다면, 비록 (조정에서) 명령을 내어도 (백성들은)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선조실록』 권81, 29년 10월 21일 조선의 사대부, 즉 지식인과 관리들은 입버릇처럼 백성의 곤궁함을 말했다. 그들이 이렇게 말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의 공통 교양인 유학이 권력의 정당성을 백성에게 두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원익이 보기에 그들 말에는 진정성이 부족했다. 흔히 그렇듯 배웠다고 배운 것들을 모두 진지하게 믿는 것은 아니다. 이원익은 심지어 선조조차 이 문제를 절실하고 긴급한 일로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냥 아는 것과 절실히 깨닫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절실한 깨달음은 태도와 행동의 변화를 가져오기 마련이다. 이원익은 이미 임진왜란 이전 두 차례 지방관 근무 경험을 통해 백성들 형편을 소상히 알았다. 더구나 전쟁 중에는 행정력이 무너진 상태에서 군량을 마련하고 군대를 양성해야 하는 책임을 감당했다. 이 때문에 왕과 조정 고관들이 아닌 백성이야말로, 말 그대로 국가 존립의 근본임을 절실히 인식하고 있었다. 정부가 민의 생활을 안정시켜서 백성들 마음을 붙들지 못하면 아무리 법으로 그들을 묶어 두려 해도 떠나 버리고 말았던 것을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이미 여러 곳에서 확인했다. 백성이 자신들의 삶을 즐거워하면 나라를 위해 목숨까지 버리지만, 그렇지 못하면 곧바로 도적이 되어 버리는 현실을 그는 생생히 지켜보았다. “사람들에게 삶을 즐거워하는 마음이 있은 후에야 윗사람을 친애”한다는 말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가 “백성들에게 윗사람을 위해서 죽는 의리가 없어졌다”(『선조실록』 권26, 25년 4월 28일)고 말한 것과 공명(共鳴)한다. 이원익이 선조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한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절실한 말은 서로 통하는 법이다. 이원익의 이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닌 자신의 전쟁 경험에서 우러난 증언이었다. 그는 자신의 현실 인식을, “민생 이외의 일은 모두 부수적인 일에 불과하다”는 한마디로 요약했다. 바로 이런 현실 인식이 그가 주장했던 공물 개혁 정책, 즉 대동법의 토대였다. 어떤 정책이든 그 뿌리에는 그에 상응하는 개인과 사회의 반복된 경험과 감성이 스며있기 마련이다.
  • 조선시대 재상 이원익의 관직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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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망기에 대한 이원익의 응답 상소는 비망기가 내려지고 20여 일 후인 3월 26일에야 올려졌다. 그의 응답 상소가 늦어졌던 이유는, 임해군 문제 때문이었다. 임해군은 광해군보다 한 살 많은 동복(同腹) 형이다. 임해군은 이미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유배형이 확정되었다. 위의 광해군 비망기가 내려졌던 3월 2일에 그는 이미 교동현(喬桐縣)에 귀양 가 있는 상태였다. 교동은 서울에서 거리상으로는 멀지 않지만 강화도에서도 더 떨어진 섬으로 조선시대에 중요한 1급 유배지였다. 그런데 유배로 끝이 아니었다. 조정 일각에서는 임해군을 모반죄로 몰아서 죽이려는 논의가 진행되었다. 이원익은 그 논의에 반대해서 한양 집에 머물고 있었다. 이원익은 관직 생활 내내 정치적 사건에 대해서는 늘 온건한 입장을 취했다. 그것이 이원익과 정치적으로 적대적 관계에 있던 사람들조차 그에 대해서 개인적으로는 적대적 감정을 갖지 않았던 이유이다. 심지어 광해군 대에 이원익을 죽여야 한다며 정치적으로 그와 가장 가파르게 대치했던 이이첨(李爾瞻, 1560-1623)조차 그랬다. 인조반정 직후 참형을 받을 때, 그는 “완평이 (광해군 말년에) 정승에 복위되었다면 우리 일족(一族)은 반드시 살아남게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그는 이원익이 서울로 돌아오기 사흘 전에 처형당했다. 어쨌든 3월 26일 상소에서 이원익은 먼저 “무릇 백성은 나라의 근본입니다. 백성이 없으면 나라도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백성들 사정을 잘 아는 사람 4, 5인을 뽑고 별도로 한 기관을 설치하여 일을 전담시킬 것을 요청한다. 그런데 이원익이 말한 ‘한 기관’이 반드시 상소 후 한 달쯤 뒤에 성립되는 경기선혜청을 뜻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실 이때만 해도 선혜법(宣惠法)의 대상 지역이 경기 지역에 한정되지도 않았다. 또 이원익이 언급한 사항들도 세금 중에서 공물을 줄이는 문제에만 그치지도 않았다. 이원익의 상소를 받자 광해군은 6조의 판서들을 그의 집에 보냈다. 이것은 당시 조정에서 이원익의 위상을 보여 준다. 이때는 이원익이 광해군과 임해군 문제를 놓고 일종의 정치적 힘겨루기를 하고 있던 때였다. 광해군의 지시가 내려진 다음 날 병조판서 이정귀(李廷龜, 1564-1635)를 비롯한 몇몇이 이원익을 만나 보고 와서는, “백성들의 일을 잘 아는 4, 5인 관원”을 중심으로 선혜법의 사목(事目), 즉 운영 규정을 만들라는 이원익의 뜻을 전한다. 실제로 사목은 이원익이 말한 대로 만들어졌다. 수많은 공물 항목을 일일이 검토해야 하는 문서 검토 과정을, 병가(病暇)를 내고 집에 머물러 있는 연로한 이원익이 주관할 수는 없었다. 그것이 재상이 직접 해야 할 일도 아니었다. 이로부터 한 달 남짓 뒤 광해군 즉위년 5월 7일 『광해군일기』에는 경기선혜청의 역사적 성립을 알리는 기사가 등장한다. 경기선혜법 사목은 한 달 정도의 짧은 기간에 완성되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방납(防納)’의 폐단이 전국적으로 심각했지만, 경기 지역에서 더욱 심각했던 것이 첫 번째 이유였다. 폐단이 심했던 만큼 그 시정에 대한 요구도 높았던 것이다. 방납이란 공물 물품의 질을 문제 삼아, 공물 수취처인 한양 조정의 각 기관들이 공물 수납을 거부하는 것이다. 법적으로 공물은 현물로 납부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쌀이나 포(布)를 현물 대신으로 받고 있었다. 때문에, 방납은 사실상 공물을 받는 기관이 공물가를 높여 받기 위한 핑계였다. 더구나 조선시대에는 경기(京畿)가 왕기(王畿) 즉 왕이 직접 다스리는 지역이기에 다른 지역보다 왕의 특별한 은혜가 더해져야 한다는 관념이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오히려 그 반대였다. 폐단이 심했던 만큼 그에 대한 대책도 시급했다. 둘째는 그 실시 지역이 경기에 국한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공물 변통’에서 언제나 제기되는 난점, 즉 현지에서 한양까지 공물의 운반 문제가 논의될 필요가 없었음을 뜻한다. 납부자가 직접 정부 기관에 납부하는 데 별 문제가 없었다. 셋째는 산릉역(山陵役)이나 조사역(詔使役) 같이, 함께 처리하기 곤란한 요소들을 선혜법에서 제외했기 때문이다. 산릉역이란 왕이나 왕후의 사망에 따른 국장(國葬)이 있을 때 산에 묘소를 조성하는 일이며, 조사역이란 중국 사신이 오고 갈 때 그에 따른 각종 노역을 말한다. 산릉역과 조사역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백성들에게 훨씬 큰 부담이었다. 동시에 그 속성상 수요를 미리 예측할 수 없었다. 결당 16두씩 걷는 선혜법의 정해진 수입 안에 그 몫을 예상해서 포함시키기 어려웠다. 경기선혜법은 이원익의 높은 정치적 명망과 공물 개혁에 대한 그의 평소 열망이 결합하여 맺은 결실이었다. 기록상 선혜법에 대한 논의는 광해군의 비망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아마도 이것이 오랫동안 광해군이 ‘대동법’을 처음 실시했다고 잘못 알려진 이유인 듯하다. 논의가 비망기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광해군 자신이 선혜법 실시를 원했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즉위할 때 민에 대해 다만 일회적 시혜를 베풀고자 했을 뿐이다. 결코, 그것을 항구적 입법으로 제도화하려던 것은 아니다. 광해군은 이원익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처음에는 경기선혜법 실시에 수동적으로 동의했지만, 이후 이 법을 유지하는 것에 대해서는 몹시 회의적이었다. 또 이 법의 실시 지역을 확대하는 것에 대해서는 명확히 반대했다. 실제로 그는 1610년(광해군 1) 봄 선혜법의 계속적 실시를 앞두고 이 법에 대한 자기 생각을 밝힌 바 있다. 자신은 원래 이 법을 시행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었지만, 선혜청이 방납의 폐단을 제거하려고 한다 해서 일단 그 말을 시험해 보려고 선혜청 요청을 따랐었다고 말했다. 덧붙여서 그는 송나라의 개혁 신법(新法)을 좋은 의도로 시작했지만, 마침내 커다란 재앙을 불렀다고 말했다. 선혜법에 대한 자신의 부정적 입장을 명확히 드러낸 말이다. 광해군이 말한 “선혜청의 요청”이 바로 이원익의 요청이다. 요컨대 광해군이 선혜법 실시 요청을 받아들였던 것은 당시 이원익의 정치적 영향력 때문이었다. 이렇듯 이원익은 광해군의 백성들에 대한 일회적인 시혜 조치를 항구적인 제도로 바꾸어 냈다. 광해군은 즉위년 가을 경기선혜법을 한 차례 실시한 후, 다음 해 봄에는 이 법을 폐지하려 했다. 그러자 이원익은 법이 성립된 자초지종을 말하며, 적어도 1년은 실시해 본 후에 결과를 평가하자는 의견을 냈다. 이원익에 따르면 이미 이전에도 공물을 ‘작미(作米)’하는 것, 즉 공물을 쌀로 내는 개혁 입법에 대해서 조정에서 여러 차례 논의가 있었다. 이원익은 광해군이 민생 문제 대책 마련의 필요를 제기하자, 이를 이용해서 전부터 있었던 논의를 현실화, 입법화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일단 공물 변통의 논의가 시작되자, 그에 대해 강력한 저항이 일어나서 제대로 추진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원래 의도했던 전국적 실시는 경기 지역으로 축소되었다. 말하자면 경기선혜법은 처음부터 경기 지역을 대상으로 했던 것이 아니라, 선혜법 실시에 대한 개혁 반대 세력의 강력한 저항의 결과였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이원익이 15년 후 인조반정(1623) 직후에 추진한 삼도대동법은, 광해군 때 이루지 못했던 전국적 공물 변통에 대한 재시도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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