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황 에 대한 총서 검색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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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양반, 가정을 경영하다 -18세기 대구 최흥원의 가사활동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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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흥원은 퇴계 이황이 “소를 잡아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예가 아니다”라고 말했기 때문에 이 가르침을 따르고자 했다. 아내의 기제사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장모의 장사를 치르기 전이어서 최흥원은 아내의 기제사를 지내지 않기로 했다. 이는 예학에 밝은 우복 정경세(1563-1633)의 설을 따른 것이다. 이처럼 최흥원은 원칙과 시속 사이의 고민 속에서 자신의 판단과 선학들의 예법을 참고하여 옻골 최씨만의 가례를 만들어 나갔다. -
조선의 양반, 가정을 경영하다 -18세기 대구 최흥원의 가사활동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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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한 사실은 퇴계 이황, 다산 정약용을 비롯한 여러 인물을 통해 밝혀기도 했다. 양반은 유학을 공부하는 인문학자이자 농업을 경영하는 지주로, 국가 경영, 향촌 경영, 집안 경영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정치, 관직, 학문, 향촌 활동을 하는 모습과 더불어 생활의 현장인 집에서의 역할이 함께 조명되어야 양반 남성에 대한 실체적이고 온전한 복원이 가능할 것이다. 남성의 가사활동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다. 집에서 이루어지는 살림살이와 관련된 다양한 활동을 가사활동으로 정의할 수 있겠다. 가사활동은 역사성을 가지기 때문에 시대별로 그 내용과 범주는 다르다. 조선은 성리학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성리학의 작동 양상은 국가, 향촌, 집 등을 통해 다층적으로 살펴볼 수 있지만, 집은 성리학의 이념을 실천하는 구체적 현장이기도 했다. 집에서 가사활동이 어떻게 분배되는지 살펴보는 것은 성리학의 실현 여부와 작동 양상을 알 수 있는 하나의 창이기도 하다. 조선시대를 들여다볼 수 있는 자료로는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의 관찰자료를 비롯하여 개인이 남긴 문집, 고문서, 일기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개인의 일상을 시간의 흐름을 따라 미시적으로 잘 보여 주는 자료는 일기이다. 양반 가운데 일기를 남긴 인물이 상당수 있으며, 수십 년 혹은 몇 대에 걸쳐 쓴 일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기도 하다. 수십 년간 작성한 생활일기는 양반이 집안을 어떻게 경영했고, 남성의 가사활동 내용은 무엇이었는지,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 미시적으로 살펴보기에 안성맞춤인 자료이다. 2,000년 이후 고문서나 일기자료를 통해 양반 남성의 사생활이나 일상 및 살림하는 남성에 대한 논문과 대중서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는 법제적 연구와는 달리 가장의 역할을 확인했고, 가사노동, 자녀 양육, 가족 돌보기에 주목하는 남성의 모습을 일부 복원했다. 이 책은 필자가 최흥원이 50여 년 동안 기록한 생활일기인 『역중일기』를 통해 조선 후기 남성의 가사활동과 그 의미에 대해 논문으로 작성한 것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 살림살이하는 남성의 모습이 역사의 수면 위로 올라왔지만, 집안의 경영과 가사활동의 구체적인 양상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살펴본 글은 드물다. 지금부터 50여 년 동안 가사활동에 충실했던 남성, 18세기의 대구 양반 최흥원을 만나러 가자. 【그림 1】 《해동지도》, 〈대구부지도〉, 서울대학교 규장각 -
조선의 양반, 가정을 경영하다 -18세기 대구 최흥원의 가사활동을 중심으로-- 기록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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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10일에 퇴계 이황의 후손인 이흥약이 편지를 보냈다. 예안의 의인에 사는 이세태는 집안사람으로 둘째 아우 집과 혼인할 뜻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최흥원은 급히 사람을 보내 행차 중인 둘째 아우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혼처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11월 28일에 최흥원은 사진의 혼처를 의인으로 허락했다. 그런데 두 집안에서 합의한 혼인 날짜를 둘째 아우가 미루었다. 상대방은 편지로 언짢은 마음을 드러냈다. 12월 16일 둘째 아우가 이흥약의 편지를 보고 당초 경솔하게 기한을 물린 것을 후회하면서, 사람을 시켜 그에게 사죄하는 마음을 전하려고 했다. 최흥원은 둘째 아우의 자세가 좋다고 생각했지만 무슨 일이든지 지나간 뒤에는 되돌리기 어려우므로 어떻게 결말이 날지, 속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혼인은 성사되지 않았다. 다음에는 의성 구미(龜尾)의 아주 신씨 신천임 집안과 혼인하기로 했다. 이번에도 둘째 아우는 아주 신씨와 혼인을 할 수 없는 사정이 생겨, 상대방에게 그러한 사실을 알렸다. 아주 신씨 쪽에 죄를 지은 심정이었기 때문에 둘째 아우가 신의를 해칠까 봐 아픈 가운데 더위를 무릅쓰고 신천임을 찾아가서 정중하게 사과했다. 세 번째는 하회의 류산음(柳山陰)이 중매하여 영천[오늘날 영주]의 김서절 집과 혼담이 있었다. 그런데 상대방이 사주단자를 청하는 심부름꾼을 보내지 않아 괴이쩍게 생각했다. 혼담이 오고 간지 몇 달 뒤에야 상대방은 혼담을 없던 일로 하자고 알려 왔다. 결국 사진은 안동 소호리의 이상정 집안으로 장가들었다. 최흥원은 매우 흡족했다. 사진 역시 혼례를 치르기 전에 관례를 치렀다. 1744년 12월 13일 식후에 외가가 있는 원북의 막내 사촌이 먼저 오고, 저물녘에 외숙부도 왔다. 15일에 사진의 관례를 행했는데, 의식을 준비하지 못하여 부형의 도리에 맞지 않은 거 같아 한스러웠다. 18일 식후에 용채라는 아명 대신 ‘사진’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19일의 혼례 행차는 셋째 아우가 인솔했다. 삼가(三嘉)의 일족 어른과 사촌 조국로가 와서 그가 떠나는 것을 보고 돌아갔으며, 여러 일족이 보러 왔다가 저물어서 모두 돌아갔다. 20일에 인발이 하회에서 돌아와 매부 류성복의 편지를 받아 보았는데, 눈보라 속에도 탈 없이 도달했다고 하여 위안이 되었다. 사진도 편지로 소식을 전해 주어 기뻤다. 다만 셋째 아우가 가는 도중에 혼례 행차에 필요한 짐을 가지고 가기가 아주 힘들다고 알려 와서 염려스러웠다. 다음날에도 혼례 행차가 걱정되어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22일은 사진이 혼례를 치르는 날인데, 날씨가 매우 추워 최흥원은 걱정을 떨칠 수가 없었다. 28일 저물녘에 셋째 아우가 사진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자세히 들어보니, 신부가 아주 예쁘다고 하여 최흥원은 나름 흡족했다. 사진이 우여곡절 끝에 한산 이씨와 혼인한 것처럼 혼인이 순탄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성년(聖年) 아우의 혼인을 예로 들자면, 혼례를 치르기 위한 일행이 길을 나서려는데, 상대측에서 퇴짜를 놓는 편지가 도착했다. 최흥원은 예측하기 어려운 세도와 인심에 분함과 탄식이 절로 나왔다. 한편, 밀양에 사는 최흥원의 처남 손진민(1696-?)은 딸을 최흥원의 둘째 조카 상진과 맺어 주려고 했다. 아내가 죽은 뒤 1년이 지난 1741년 9월 20일-28일에 최흥원은 처가에 머물렀다. 28일 장모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길을 떠나려는데, 손진민이 조카를 시켜 최흥원을 다시 문 안으로 맞아들이게 했다. 손진민은 “여식의 혼사는 반드시 둘째 아우 집으로 결정하여 결단코 다른 뜻이 없다는 뜻으로써 돌아가 말하여 주게”라고 했다. 최흥원은 “우리 두 집안이 말을 하지 않았다면 그만이겠으나 이미 말을 꺼냈다면 일이 아주 중대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손진민이 다시 말하길, “나의 뜻은 아주 확고하네”라고 했다. 최흥원은 장모의 대상(大喪)에 참석하기 위해 1743년 1월 28일 처가로 향했으며, 거기서 여러 날을 보냈다. 2월 5일 밤이 깊은 뒤에 손진민이 또 혼담을 꺼냈는데, 말의 뜻이 아주 굳건했다. 최흥원도 부탁을 물리치기가 어려웠으므로 돌아가서 둘째 아우와 의논해 보겠다고 했다. 1744년 4월에도 최흥원은 처가의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밀양 죽서에 갔다가 거기서 며칠 머물렀다. 손진민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4월 16일 밤에 다시 딸의 혼사에 대해 말했다. 그는 최흥원의 둘째 조카와 혼인을 시키기로 굳게 결심했으며, 가을이 되기를 기다리겠다고 했다. 결국 두 집안은 혼인하기로 했다. 상진도 혼례 이전에 관례를 행했는데, 아명 ‘용휘’ 대신 ‘상진’을 이름으로 받았다. 일족 사람들이 많이 오지 않아서 몹시 적적했다. 20일에 떠나는 상진의 혼례 행차는 셋째 아우에게 부탁했다. 최흥원은 굳이 갈 이유가 없으나, 사돈 쪽에서는 최흥원이 오길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최흥원도 다시 생각해 보니, 아이들의 어미가 살아 있다면 틀림없이 갔을 것이므로, 감회가 일어 곧 뒤따라 나섰다. 가는 길에 경흥사(慶興寺)에서 하룻밤 묵고, 21일 아침 일찍 밥을 먹고 길을 떠났으나 몇 리를 못가서 신임 관찰사를 만나 신점(新店)에서 잠시 쉬었다. 처가에서 겨우 10여 리 떨어진 장연촌(長淵村)에서 다시 하룻밤 묵었다. 혼례는 와요(瓦要)에서 치르기로 했다. 그런데 손진민은 진도 수령으로 관아 업무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다. 혼례를 원만하게 치르기는 어렵겠으나 사정을 헤아릴 수 있으니, 한탄할 것은 못 되었다. 22일 새벽에 납폐했는데, 부노 하징을 사자(使者)로 했다. 해거름 할 때 전안(奠雁)하고 교배례(交拜禮)를 행했다. 최흥원은 그 옆에 서서 보았다. 신랑과 신부가 모두 아름답고 덕스러운 용모가 있어서 사랑스러웠다. 날도 길하니 더욱 기뻤다. 23일에 최흥원이 신부를 다시 보니 더욱 사랑스러웠다. 상진 부부가 반드시 큰 복을 누릴 것 같아 다행스러웠다. 24일에 신부를 보고 아녀자의 직분에 대해 몇 마디 해 주었다. 나중에 그 효과가 나타날지 지켜볼 작정이다. 25일 밥을 먹은 뒤에 신부를 한 번 더 봤다. 이어 신랑과 함께 길을 떠나 저물녘에 성현역에 당도했다. 셋째 아우는 거기에 먼저 와 있었으며, 함께 머물러 잤다. 26일 아침 일찍 밥을 먹고 다시 길을 나섰다. 밀양의 손진민은 자신의 딸을 최흥원 집에 시집보내려고 몇 년을 걸쳐 정성을 들였다. 손진민의 누이는 최흥원과 혼인했고, 딸은 최흥원의 조카와 혼인했으며, 손녀도 최흥원의 조카 화진과 혼인했다. 옻골 최씨가 영남의 명문이었기 때문에 일직손씨는 중첩 혼인을 통해 옻골 최씨와 혼반을 형성하려고 했다. 최흥원은 안동권으로 혼인을 집중하면서도 밀양권과의 혼반을 유지하여 관계망을 공고히 했다. -
16세기 미암 유희춘의 경제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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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다. 선조 초년 이황(李滉)이 경연관으로 재출사한 뒤에는 교류가 더욱 빈번하였다. 유희춘은 선조 초년에 이이(李珥)와 같이 경연관으로 활동하였다. 유희춘은 그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여 사서오경의 구결(口訣)과 언해(諺解)의 상정(詳定) 작업에 추천하기도 하였다. 유희춘은 25세 되던 1537년(중종 32)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어 다음 해에 문과에 급제하여 그해 성균관 학유로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홍문관 수찬으로 관직 생활을 하다가 1543년(중종 38)년 6월 무장 현감에 부임하였다. 2년 뒤 인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홍문관 수찬이 되어 상경하고 명종이 즉위한 후로는 사간원 정언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하여 일시적으로 윤임(尹任) 세력이 득세하였으나 인종이 즉위 8개월 만에 죽고 이를 이은 명종이 나이가 어려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청정을 하면서부터 윤원형(尹元衡) 일파가 세력을 얻게 되었다. 이때 유희춘은 파직되었고, 다시 1547년(명종 2) 9월의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로 절도안치(絶島安置) 되었다. 그러나 제주가 그의 향리 해남과 가깝다는 이유로 다시 함경도 종성으로 옮겨져서 이곳에서 18년간 유배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1565년(명종 20) 문정왕후가 죽고 이어 윤원형이 축출되자 충청도 은진(현재의 논산)으로 중도양이(中道量移)되고 명종이 죽고 선조가 즉위하면서 성균관 직강으로 재출사하게 된다. 이후 유희춘은 10여 년 동안 내직으로 사헌부 장령·사간원 사간·성균관 대사성을 비롯하여 홍문관 부제학·예조 참판·사헌부 대사헌을 역임하였으며 외직으로는 전라감사를 지냈다. 이 중 홍문관 부제학에 가장 오래 재직하였다. 유희춘에 대한 선조의 신임은 절대적이어서 1571년(선조 4) 10월 유희춘이 전라감사로 있을 때 대사헌에 추천되지 않았는 데도 특채하였으며 1577년 3월 부제학이던 유희춘에게 자헌대부를 제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이전에 전례가 없었던 일이었다. 선조는 유희춘의 강독과 해설을 절대적으로 믿고 따라서 유희춘이 경연에 참석하지 않은 때에 다른 설이 제기되면, ‘유희춘은 경적을 널리 보아 학술이 정밀하고 자상하니 따르지 않을 수 없다’고 하여 이설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희춘의 부인은 송덕봉으로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류 문인의 한 명이다. 송덕봉은 1521년(중종 16) 송준(宋駿)과 함안 이씨의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녀의 휘는 종개(鍾介)이고 자는 성중(成仲)이며 호는 덕봉이다. 여성으로서는 흔하지 않게 휘와 자, 호가 모두 남아 전한다. 여기서 덕봉은 그녀가 거주하던 담양군 대곡의 뒷산을 가리킨다. 그녀는 경사(經史)와 시문(詩文)에 뛰어난 여사(女史)였다. 그녀는 조카 송진(宋震)을 통하여 『덕봉집(德峰集)』이라는 문집을 남겼으며, 남편의 일기인 『미암일기』에 그녀의 행적이 잘 드러나 있다. 홍주 송씨 집안은 송평(宋枰) 대에 순창에서 담양으로 옮겨가는데, 관직은 세자 별시위였다. 송기손(宋驥孫)은 성종 때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음서로 사헌부 감찰·단성 현감을 역임하였다. 그는 진주에 근거를 갖는 이인형(李仁亨)의 딸과 혼인하여 3남 2녀를 두었다. 3명의 아들이 송정로(宋廷老)·송정언(宋廷彦)·송정수(宋廷秀)이며 두 명의 딸은 변수정(邊守禎)과 유희춘에게 출가하였다. 송정언의 아들 송진이 송덕봉의 시 38수를 모아 첩으로 간행하였다. 홍주 송씨 중 가장 번창한 계열은 송구(宋駒)의 후손들이다. 두 아들이 모두 문과를 통해 관직에 나갔는데, 송정순(宋廷筍)은 사헌부 감찰·경상도사를 비롯하여 여러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송정황(宋庭篁)은 김인후(金麟厚)의 문인으로 홍문관 정자·전라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주자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 기대승(奇大升)과 같이 『주자문(朱子文)』을 완성했는데, 이는 『주자어류(朱子語類)』에서 요점을 가려 뽑은 것이다. 송정황의 아들 송제민(宋濟民)은 임진왜란 당시 김천일(金千鎰)의 막하에서 전라도 의병조사관으로 활약하였으며, 그의 아들 송타(宋柁)는 정유재란 당시 의병으로 활약하다가 한산도에서 왜적에게 포위당하자 투신하고 만다. 유희춘은 최보의 외손이요, 김안국(金安國)의 제자로 1538년(중종 33)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로서 관직에 나아갔다. 그러나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종성에서 18년간을, 다시 은진에서 2년간을 유배생활 하였다. 본래 유희춘의 유배지는 제주였으나 유희춘의 고향인 해남과 이곳이 해남과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18년을 지내게 된 것이다. 충청도 은진으로 유배된 것은 1565년(명종 20) 12월에 중도양이가 결정되면서 이곳으로 옮겨져서 선조가 즉위할 때까지 2년간을 지내게 되었다. 오랜 기간의 유배 생활로 인하여 당시 유희춘 일가는 양반으로서의 체모를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어머니를 비롯한 일가는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했으며, 1555년(명종 10) 을묘왜변 이후에는 담양으로 거처를 옮겨 해남의 토지와 선영은 퇴락하였으며 노비는 각지로 흩어진 상황이었다. 유희춘은 1567년(선조 즉위) 유배에서 풀려 성균관 직강으로 재출사 한 이후 정4품인 홍문관 응교를 시작으로 10여 년 동안 내직으로 사헌부 장령·사간원 사간·성균관 대사성을 비롯하여 홍문관 부제학·예조 참판·사헌부 대사헌을 역임하였으며, 외직으로는 전라 감사를 지냈다. 그러나 그는 홍문관 부제학에 가장 오랫동안 재직하였다. 그러면 이제 그의 경제생활은 어떻게 운영되고 있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유희춘은 호남에 근거를 둔 학자형 관직자로 재출사 이후 고위의 청요직을 역임한 당대 최고의 양반 관료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당대를 대표할 수 있는 성리학자였고 세간에는 청렴하고 세상 물정에 매우 어두운 인물로 인식되었다. 그러면 유희춘이 관직 생활을 통해 어느 정도의 수입을 거둬 들이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림 4】 담양군 대덕 소재 유희춘 내외의 산소 -
조선의 양반, 가정을 경영하다 -18세기 대구 최흥원의 가사활동을 중심으로-- 기록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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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안 출신 퇴계 이황(1501-1570)의 『퇴계전서』, 안동 출신 류성룡(1542-1607)의 『서애전서』와 이정회(1542-1613)의 『송간일기』, 성주에 유배 온 이문건(1494-1567)의 『묵재일기』 등을 비롯한 16-17세기의 여러 자료를 통해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류성룡이 쓴 친필 일기인 『류성룡비망기입대통력(柳成龍備忘記入大統曆)』에는 ‘병환일지’를 포함하여 중국에서 수입된 각종 의학서, 침과 뜸을 사용하는 방법과 부위, 임상경험 등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 이를 토대로 류성룡은 의학서적 『의학병증지남(醫學辨證指南)』과 『침경요결』을 저술했다. 류성룡이 『의학변증지남』을 간행한 이유는 집안의 자제들이 부모를 섬길 때 마음대로 치료하지 않고, 의학지식에 기초하여 치료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부모가 병으로 침상에 누워 있는데, 시원찮은 의사에게 맡긴다면 불효하는 것과 같으며, 부모를 섬기는 자는 의사를 잘 알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병든 부모님을 잘 모시기 위해서는 좋은 의사와 훌륭한 의학 정보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이 역시 ‘효’라고 여겼다. 【그림 16】 최흥원의 효자 정려각 최흥원 역시 어느 정도의 의학지식이 있었는데, 그 이유는 류성룡과 맥락을 같이 한다. 어머니는 1738년 12월에 비증(痞證)으로 고생했다. 그때 일기를 보면 다음과 같다. 어머니의 위중한 증세가 비록 그쳤지만 원인과 상태는 그대로 남아 있어서 인발을 급히 보내서 건강(乾薑) 등속을 사 오도록 했다. ―12월 10일 둘째 아우가 경산으로 가서 의원을 만나 보았는데, 지길온중탕 처방을 받아서 왔다. 이것은 [명치 아래가 그득하면서도 아프지 않은 증상인] 비증(痞證)을 치료하고 속을 따뜻하게 해 주는 처방이다. ―12월 11일 또 둘째 아우를 감영 의국에 보내어 약을 지어 오도록 했는데, 저물녘에 돌아와서 한 첩을 달여서 올렸다. ―12월 12일 어머니의 병환은 어제보다 더하지 않았으나 자주 허핍(虛乏)하여 거듭 찐 보리밥을 올려 보았다. 가슴속이 막히고 그득해지는 증상이 아주 심하여 생각해 보니 보리밥이 소화를 잘 시켜 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밥을 드신 뒤에 또 약을 한 첩 써 보았다. ―12월 13일 어머니의 병환이 한결같았다. 다만 드러나게 더해지지는 않았고, 아침밥을 먹기 전에 대변을 조금 보셨는데, 건조했다. 셋째 아우와 함께 머리 빗는 것을 도와드렸다. ―12월 14일 어머니의 환후는 어제와 달리 조금 안정되었다. 또 약 한 첩을 써 보았다. ―12월 15일 어머니의 병환이 마찬가지여서 몹시 애가 타고 걱정이 된다. 또 약 한 첩을 올렸다. ―12월 16일 어머니의 환후가 마찬가지였다. ―12월 17일 어머니의 흉복부가 막히는 증세는 한결같았다. 그러나 대변은 평상시와 같았다. … 오후에 어머니의 막힌 증세가 조금 뚫렸다. ―12월 18일 어머니의 병환은 더해지지 않았다. 아침에 거듭 찐 밥을 조금 올렸다. ―12월 19일 어머니의 병환은 더해지지 않았으나 원기가 허해지는 조짐이 있었다. 머리를 빗은 후에 어깨와 팔의 통증이 조금 있었고, 코막힘이 아주 심했다. 가지가지로 애가 타고 걱정이 된다. ―12월 20일 어머니의 병환이 어제와 같았다. 배꼽에 뜸을 조금 떠보았다. 저녁에 머리가 어지러운 증세가 있었다. ―12월 21일 어머니가 어지러워하고 약하게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켜며 흉복부가 불편하다고 하셨다. 너무 걱정이다. ―12월 22일 어머니의 환후는 마찬가지이다. ―12월 23일 어머니의 환후는 더해지지 않았다. ―12월 24일 어머니가 초저녁에 두통이 아주 심해지고, 복명(腹鳴)이 또 심해지셨다. 몹시 애가 타고 마음이 절박해졌다. ―12월 25일 어머니가 피곤해함이 날로 심해지고, 대변이 또 건조해졌다. 너무 애가 타고 걱정이 된다. ―12월 26일 어머니의 막히는 증세가 조금 통했다가 밤에 도로 막혔다. ―12월 27일 어머니의 병환은 한결같이 줄어들 기미가 없어서 너무 애가 타고 절박한 심정이다. ―12월 28일 어머니의 위완통이 또 심해져서 밤새도록 오락가락했다. 어찌할 줄을 모르겠다. 정 의원에게 가서 물어보니, 향사이진탕을 처방해 주어서 저물녘에 돌아왔다. 종지 할아버지와 인동 할아버지가 와서 잤는데, 내가 애를 태우며 걱정했기 때문이다. ―12월 29일 어머니의 병은 다음 해인 1739년에도 계속되었으며, 3월에 이르러서야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최흥원은 의학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처방받은 약의 효능을 이해했으며, 의학서적을 구해 보는 가운데 의료 지식을 확장했다. 최흥원은 어머니의 식사를 관리했고, 병의 진행 상태에 따라 신속하게 대응했다. “아침밥을 먹기 전에 대변을 조금 보셨는데, 건조했다”, “밥을 드신 뒤에 대변이 꽤나 미끄럽게 잘 나왔다”고 기록하는 등 변의 상태로 병의 진행 상황을 확인하기도 했다. 1739년 1월 24일, 어머니이 병이 회복될 기미가 없자, 최흥원은 절박한 심정으로 한밤중에 하늘에 빌고 약방문이 적힌 책을 보면서 어머니의 통증에 대해 분석했다. 그는 “어버이를 모시는 자는 의학을 몰라서는 안 되지만 의학을 안다는 것도 쉽지 않으니, 두려워할 만하다”라고 했다. 최흥원은 어머니의 병에 대해 의사만큼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의학지식을 가진 것은 효행의 연장이었다. 최흥원의 어머니 병간호는 개인 주치의 수준이었다. 1739년 6월부터 어머니의 가슴속이 꽉 막히고 더부룩하며 손발이 싸늘한 증세가 다시 심해지자 생강즙에 꿀을 타서 드리거나 익원산을 올리기도 했으며, 어린아이의 오줌을 드리는 등 민간요법도 썼다. 한 달이 넘도록 어머니 병환에 차도가 없고 어머니의 식사가 더욱 어려워지자 6월 하순부터 의원을 찾았고, 7월 2일에 의원한테 향사이진탕 5첩을 지어왔다. 다행스럽게도 3일부터 어머니의 환후가 더해지지 않았다. 이진탕은 따뜻하게 하고 말리는 성질의 약재인데, 함부로 썼다가는 후회가 있을 듯하고, 또 어머니가 답답해하고 갈증이 나는 것을 견디지 못하므로 따뜻한 성질의 약재는 더욱이 삼가야 할 것으로 판단했다. 최흥원은 약재 사용을 멈추고 앞으로의 경과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4일에도 어머니의 환후가 드러나게 심해지지는 않았지만, 남은 증세가 떨어지지 않았다. 주변에서 이진탕을 사용하라고 조언했으나, 최흥원은 더울 때는 이진탕을 쓰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어머니에게 드리지 않았다. 최흥원은 동생이나 제수씨가 아플 때도 약을 구해 처방하거나 관리했다. 집에는 거의 매일 아픈 사람이 있었다. 1742년 7월 14일 일기에는 어머니는 편한 날이 없고, 둘째 아우의 병도 회복될 기미가 없으며, 막내 제수 또한 크게 아프니, 흰 머리털이 하루에 한 길은 자라는 것 같다고 했다. 7월 15일은 아버지의 기일을 하루 앞둔 날인데, 둘째 아우와 셋째 아우가 아팠다. 최흥원은 의학 지식을 익혀 본인과 가족의 질병을 치료했다. 특히 본인의 질병에는 뜸을 자주 이용했다. 1741년 8월 9일에는 고황과 폐수혈에 각각 17장씩 뜸을 떴다. 1742년 3월 25일에도 견우와 곡지혈에 각각 7장씩 뜸을 떴다. 4월 9일-28일에는 고황과 폐수혈에 뜸을 떴다. 1745년 5월 초부터 최흥원은 이질로 숨이 끊어질 듯한 고통을 느꼈으며, 6월에도 두통과 이명으로 괴로운 나날이었다.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뜸을 떴다. 어머니와 며느리에게도 매일 뜸을 떠 주었다. 최흥원의 병이 심하여 일어나지 못한 지 거의 한 달이 되었다. 어머니는 하루에 세 번씩 최흥원의 병을 살피러 왔는데, 어머니의 체후를 살펴야 하는 자식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자신을 불효막심하다며 자책했다. 가족 가운데 여성이 아프면 치료가 곤란할 때도 있다. 둘째 아우의 막내딸이 복부 아래에 큰 종기가 생겨 곪았는데, 최흥원은 침을 놓으면 고칠 수 있을 거 같았다. 어린 여자아이 일지라도 남성의 손을 대게 하자니 최흥원은 걱정이 앞섰다. 마침 조카 사진의 처가 직접 불에 달군 침을 사용하여 진물을 빼내어 완쾌되었다. 최흥원은 조카며느리의 마음 씀씀이가 사랑스러웠다. 최흥원은 가족의 질병 치료와 간호를 주관하는 가운데 필요하면 의사를 부르거나 약을 구하기도 했다. 효와 자애를 비롯하여 인륜의 덕목으로 무장한 최흥원은 국가, 사회, 가족의 상호보완 속에서 해결해야 할 질병 치료의 상당 부분을 혼자 책임졌다. 최흥원과 같은 양반의 의술 활동은 결과적으로 미약한 국가 의료시스템을 보완해 주었다. -
조선의 양반, 가정을 경영하다 -18세기 대구 최흥원의 가사활동을 중심으로-- 기록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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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임중징과 퇴계 이황의 사칠이기논변(四七理氣論辨)을 강론했다. 24일에도 공부가 이어져 벗들과 이기(理氣)에 대해 즐거운 마음으로 강론했다. 25일에는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애타는 가운데도 벗들과 낮에는 이기를 강론하고 밤에는 가언(嘉言)을 독송했다. 26-27일은 이황의 문집이나 이기론의 호발(互發)과 이동(異同)에 대한 설(說)을 공부했다. 최흥원은 매일 ‘즐겁다’는 표현을 했으며, 벗들과 헤어진 이후에는 함께 공부한 것과 읊은 시를 모아 책을 만들었다. 최흥원은 시 짓기를 좋아하여 일기에는 상당수의 시가 있다. 1743년 5월 18일, 외출했다가 돌아오니 최흥원의 집에 머물던 구군칙이 이미 돌아가고 없었다. 최흥원은 얼굴을 마주하고 작별하지 못하여 서운했는데, 구군칙이 돌려보낸 말 편에 그의 편지가 있었다. 거기에는 시도 한 편 있었다. 최흥원은 곧바로 차운하여 시를 지었다. 최흥원은 지식인으로 학문을 연마하고 본성을 함양하고 싶었지만, 가족을 부양하는 책임을 외면할 수 없었다. 하루는 어머니의 병환 가운데 조용히 책방에 머물면서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 끝내 입과 배를 위해서 수고로울 뿐이고 본성을 기르지 않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는 절구 한 수를 읊으며 속내를 드러내었다. 맑고 따뜻했다. 어머니의 환후는 다행히 심해지지 않았으나 팔의 통증이 한결같고 아침저녁으로 드시는 진지가 크게 줄었으니, 매우 애가 타고 마음이 절박하다. 인발이 소금을 실어 왔다. 문희에게 집으로 인솔해 가서 서둘러 장을 담그도록 했다. ―1747년 3월 2일 날이 밝기 전에 아이 항진이 두락 산소 일로 의송을 올리기 위해 부중에 들어갔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보면 내 자신이 배우지 않고 불효한 때문에 가문의 전통이 날로 쇠퇴하여 지금 상중(喪中)에 있으면서 많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음을 겪고 있으니, 차라리 내가 죽어서 몰랐으면 좋겠다. 통곡한들 어찌하겠는가. ―1766년 7월 6일 일기에는 학자로서 수양의 길을 원하는 내면적 욕망과 가장으로서의 현실적 책임 사이의 고민이 잘 드러난다. 최흥원은 내면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을 겪었지만, 한 번도 일탈하지 않고 끊임없는 집안일에 마지막까지 성실했다. 최흥원은 영남 지역의 동향이라던가 지방관의 교체 소식은 일기에 기록했다. 그렇지만 향촌 활동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대구 향교의 교임으로 추천되었지만, 대구부와 향교에 거듭 거절 의사를 밝혔다. 1747년 11월 19일에는 대구 수령이 지역 양반들의 추천으로 최흥원을 경학 훈장에 임명했지만, 최흥원은 바로 사임 단자를 써서 수령에게 전했다. 최흥원은 외출도 자제했다. 이러한 인식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 있다. 1739년 2월 초 손군묵이 처가에 가는 길에 최흥원에게 들렀다가 4월 6일에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최흥원을 방문했다. 최흥원은 농담으로, “그대는 어버이를 모시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어찌 그렇게 오래도록 집을 떠나 있는가? 효성이 처자식으로 인하여 쇠해진다는 것이 이를 이르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니, 손 군이 부끄러운 기색을 띠었다고 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농사를 관리 감독하는 것도 최흥원의 중요한 일과였다. 하상(河上)[하회] 누이의 논을 팔아 25냥을 보냈다고 한다. 두애가 보러 왔기에 논을 파는 일을 지시했다. 종들에게 명령하여 오늘부터 전답을 갈도록 했다. ―1749년 2월 6일 목화에 굼벵이가 생겨 뿌리를 먹고, 큰놈은 올라와 줄기까지 먹어 치우고 있으니, 수확이 크게 줄어들 것이 틀림없다. ―1743년 5월 28일 흐리고 비가 내렸다. 어머니의 병환은 여전하고 입부[세째 아우]의 병도 한결같다. 애가 타고 마음이 절박하다. 양식이 오랫동안 떨어져서 뭇 식솔들이 굶주림을 호소한다. 며느리를 생각하니 더욱 불쌍하다. 그러나 가난한 집의 소원은 오직 아이들이 공부를 잘 하기를 바라는 것뿐이다. ―1748년 3월 29일 최흥원은 지식인이자 학자로서의 삶보다는 식솔들의 끼니를 걱정하고 농사를 관리하며 자제들의 출세를 위해 노력하는 일상이 우선이었다. 그에 따른 번뇌가 삶을 관통했지만, 내면의 욕망보다는 현실적 책임에 더욱 충실했다. 50여 년 동안 종손과 가장으로 날마다 자신이 수행한 역할과 집을 둘러싸고 전개된 다양한 이야기를 일기에 꼼꼼하게 기록했다. 일기는 자신의 역할과 활동에 대한 성실한 보고라고 할 수 있다. 일기를 통해 최흥원의 집안 경영과 가사활동의 내용과 실상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
조선시대 사람들의 더불어 살기, 향약
- 기록자료
- 사회
가문의 구성원인 이황이 규약을 세우고 운영 방향을 설정해 놓았기 때문에 퇴계학파의 학통을 계승한 사대부 집단에게 있어서 매우 권위가 높았으며, 여러 자치 규약에도 영향을 주었다. ‘향입약조(鄕立約條)’와 ‘동중족계(洞中族契)’는 모두 좋은 법과 아름다운 뜻이나, 변란 이후에 인심이 날로 각박해져서 형장(刑杖)과 태벌(笞罰)로는 권징(勸懲)하기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부포동(夫浦洞)에서 난수(蘭秀)가 별도의 약조를 세워서 인정(人情)으로서 인도하고자 한다. ―『성재집(惺齋集)』, 「동중약조소지(洞中約條小識)」 中 이상의 규약은 바로 퇴도선생(退陶先生)[이황]이 온계동에서 새운 조항이다. 온계에서는 이것을 따라 시행하니 ‘동령(洞令)’이 자못 엄정하여 사람들이 감히 범하지 않으니 정말 아름다운 일이다. 우리 동[오천(烏川)]을 돌아보면 선세부터 위로는 화목한 풍속이 있었고 아래로는 모질고 거만한 습속이 없었다. … 옛 풍속을 오래오래 보존하고자 지난해에 산남(山南)[김부인(金富仁)], 후조(後彫)[김부필(金富弼)], 읍청(挹淸)[김부의(金富儀)], 일휴(日休)[금응협(琴應夾)] 등 여러 형과 ‘온계동규(溫溪洞規)’를 빌려 와서 이를 따라 시행하였다. ―『설월당집(雪月堂集)』, 「동규후지(洞規後識)」 中 위의 글은 이황의 문인인 금난수(琴蘭秀, 1530-1604)와 김부륜(金富倫, 1531-1598)이 각각 자신들의 세거지인 예안의 부포(夫浦)와 오천(烏川)에서 동계 규정을 제정하면서 그 의의를 언급한 것이다. 금난수가 언급한 ‘향입약조’는 퇴계향약이며, ‘동중족계’가 바로 온계에서 시행한 온계동계이다. 김부륜은 온계동규를 ‘동령’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부포와 오천에서는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어수선해진 동리의 민심을 안정시키고, 사대부 중심의 향촌 질서를 회복하기 위하여 온계동계를 모방한 동계를 운영하였다. 이황 문인들은 온계동계를 자신들의 세거지에서만 시행하지 않았다. 금난수는 봉화현감(奉化縣監)으로 있으면서, 고을 사람들에게 퇴계향약과 온계동계를 시행하라고 권장하였다. 이황의 문인 김기가 제정한 향약은 퇴계향약과 온계동계를 참작한 것이다. 김기향약의 4대 강목 중 ‘과실상규’ 조항에서는 이황의 ‘향입약조’, ‘환난상휼’ 조항에서는 온계동계의 상호부조 규정을 그대로 인용하였다. 이후 퇴계학파를 계승한 사대부 집단이 김기향약을 자치 규범의 전범으로 활용하면서, 온계동계도 자연스레 향약의 범주에서 이해되었다. ‘온계동약’이란 명칭은 온계동계를 향약으로 인식한 것이다. 1639년(인조 17) 경상도 삼가(三嘉)에서 시행된 옥계정계(玉溪亭溪)도 처음에는 동계의 형태로 제정되었지만, 후대에는 향약을 표방하였다. 옥계정계는 옥계동계(玉溪洞契)·옥계동약(玉溪洞約)이라고도 부른다. 합천댐으로 수몰된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봉산면의 옛 노파리에 있었던 옥계정(玉溪亭)이라는 누정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이곳 출신의 송정렴(宋挺濂, 1612-1684)은 옥계정 인근에 있는 여러 반촌의 사대부와 함께 ‘옥계동’이라는 ‘동’을 설정하였다. 동의 사대부끼리 상호부조하고 옥계정에 모여 친목을 다지기 위한 모임에서 옥계정계가 출발한 것이다. 옥계정계도 일반적인 사대부의 동계로 운영되다가, 늦어도 1774년(영조 50)부터는 향약을 표방하였으며, 옥계동약이라고도 불리게 된다. 아! 남전여씨향약의 규약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대개 그 본뜻은 풍속을 바르게 하고 예의를 일으키는 것이다. 세상이 그릇되어 풍속이 어지러워져 따르지 않는 자가 드물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옛적 우리 선부로(先父老)는 그 풍속의 퇴패를 탄식하며, 일동(一洞)의 상하노소(上下老少)와 향약을 결성하였고, 조사문생(弔死問生)하고 환난상구(患難相求)하는 조례를 하나같이 쫓아, 봄과 가을 강신(講信)하는 때에 상하가 등급을 나누어 자리를 열어서, 정돈하여 가지런히 좌정한 후, 공사원과 유사가 별석(別席)하였다. 좌중은 향약절목의 의(義)를 상하에 효유한 연후에 선선악악(善善惡惡)함이 숨겨짐이 없게 적발하여 가볍고 무거움에 따라 상벌을 내리니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어김이 없었던 것이 백년이 넘었는바, 근래 인심이 예전 같지 않아 나날이 강쇄(降殺)되어 명분이 문란해지고, 기강이 해이해짐이 장차 말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으니 애석함을 이길 수가 없다. ―1774년 「옥계동내부조절목(玉溪洞內扶助節目)」 中 위의 문서는 옥계정계의 상호부조 규정을 새롭게 제정하고 그 앞에 수록한 서문이다. 서문에서 자신들의 결사 조직인 옥계정계를 향약으로 단정하였다. 처음부터 주자증손여씨향약의 정신을 계승한 향약 조직으로 출발했다는 것이다. 향약의 명부인 선적과 악적을 운영하고, 향약 의례인 강신례를 정기적으로 거행해 왔음을 밝히고 있다. 【그림 18】 「옥계동내부조절목」 그런데 옥계정계에는 1744년 작성된 네 편의 동안(洞案)이 전한다. 동안은 동약·동계의 구성원 명부인데, 옥계정계 동안에는 운영 규정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 자료에는 향약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기록이 전혀 없다. 옥계정계 결성에 중심적 역할을 했던 송정렴의 기록에도 친목을 위해 계를 결성했다는 것만 밝히고 있을 뿐이다. 다만 18세기 초·중반에 제정된 것으로 추정되는 ‘완의’의 조항 속에 “봄과 가을 중월(仲月)에 강신례를 거행하고 상하의 과실을 바로잡는다”라는 규정이 있어서, 향약에 있는 강신례와 선적·악적과의 관련성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한다면, 옥계정계도 처음에는 동계로 출발하였으나, 후대에 성리학적 권위를 부여하기 위하여 향약으로 그 외형을 탈바꿈한 것이 된다. 이처럼 16-17세기 사대부 주도의 향촌 질서가 구축되는 과정에서 반촌을 중심으로 동계가 결성되었다. 비슷한 시기 향약이 향촌사회에 보급됨에 따라, 사대부 세력은 자신들의 결사 조직에 향약을 접목하였고, 그 과정에서 기존의 동계가 ‘동의 향약’인 ‘동약’으로 불리는 사례가 나타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조선 후기에 이르면 성리학적 규범 체계가 생활 저변에 자리매김하였다. 동계를 동약으로 인식하게 되는 시점도 이 무렵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조선 후기 ‘동’ 단위로 제정되는 사대부 주도의 결사 조직 중에는 처음부터 ‘동약’으로 명명하고 향약 규정을 완비한 사례를 적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18세기 결성된 대구 부인동동약(夫仁洞洞約)과 경기도 광주(廣州) 경안면(慶安面)의 이리동약(二里洞約)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먼저 부인동동약은 대구 옻골 출신의 최흥원(崔興遠, 1705-1786)이 1739년(영조 15)에 처음 결성한 동약 조직이다. 중산(中山)·근전(芹田)·무산(舞山)·부남(夫南) 네 개의 촌락을 하나의 ‘동’으로 설정하였으며, 최흥원의 경주최씨(慶州崔氏) 일문이 동약을 주도하였다. 부인동동약은 부세 대응, 빈민 구휼, 교육 등의 공동체 사업을 수행하면서, 이와 관련된 여러 편의 절목을 제정하였다. 그중에서도 동약 구성원이 지켜야 할 도리와 상호부조 규정은 ‘동약절목(洞約節目)’이라는 제목으로 제정되어 있는데, 이황의 향약을 계승한 김기향약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그리고 동약 구성원이 향약을 실천할 수 있도록 독약례와 강신례 절차도 제정해 놓았다. 이리동약은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이 1756년(영조 32)에 실시한 동약이다. 안정복은 이리동약의 서문에서 동약의 시행 취지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나는 『주례』를 읽고 성왕(聖王)이 천하를 다스린 대법(大法)을 알았다. … 한(漢)·당(唐)·송(宋)·명(明)으로 내려오면서 삼로(三老)·이정(里正)·보장(保長)·방장(坊長)의 법이 있었으니 역시 그 제도였다. … 그래서 영달하지 못하고 아래에 있는 군자가 간혹 마음과 몸을 닦고 집안을 다스리는 와중에 여력이 있어서, 그것을 향리에 미치게 하여 사람들을 착하게 인도하더라도 주제넘게 윗사람 흉내를 낸다거나 아랫사람으로서 예법(禮法)을 논한다는 혐의가 없었다. 예컨대 남전여씨향약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나라 선배로서 수령직을 맡아 고을에서 지낸 분들도 모두 의심이 없이 행하였으니, 예를 들면 일두(一蠧)[정여창(鄭汝昌)]가 안음(安陰)에서, 퇴계가 예안에서, 율곡이 석담(石潭)에서 행한 것이 이것이다. 그러니 오늘 우리 동의 입약(立約) 또한 참람한 일이 아니요, 실로 주상(主上)께서 일으켜 행하고자 하시는 바일 것이다. ―『순암집(順菴集)』, 「경안이리동약서(慶安二里洞約序)」 中 안정복은 향약의 전통이 『주례』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았지만 그것의 기원은 『주례』에 언급된 향대부 및 향삼물(鄕三物)·향팔형(鄕八刑) 등과 같은 제도일 것이다. 그 전통은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 실시한 삼로·이정·보장·방장 등의 교화 정책과 향약 제정으로 이어졌다. 그중 향약이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여러 선현에 의해 실시되었다. 안정복은 성리학자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여러 교화 정책과 향약을 계승하여 이리동약이 제정되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리동약의 제 규정도 향약의 기본 형태를 따르고 있다. 구성원의 명부인 기명적(記名籍), 선행과 과실을 각각 기록하는 기선적(記善籍)과 기과적(記過籍)이 있는데, 이는 주자증손여씨향약에서 말한 세 개의 장부이다. 이리동약의 동회(洞會) 의식은 향약의 강신례를 참조하였다. 이리동약의 ‘여씨향약부조(呂氏鄕約附條)’는 주자증손여씨향약의 4대 강목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세부 조항은 시의(時宜)를 참작하여 변용해 놓았다. 최흥원의 부인동동약과 안정복의 이리동약은 조선 후기에 제정된 동약 중에서도 운영 규정이 상세하고 체계적인 편이다. 특히 두 동약은 하층민을 포괄하는 상하합계에 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두 동약에는 동리 안에서 신분 질서를 명확히 하고 하층민을 통제하기 위한 조항이 제정되어 있다. 그런데 하층민을 포괄하는 상하합계 형태의 동약·동계는 18세기 후반 이후에는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다. 조선 후기 사대부 중심의 신분 질서에도 변화가 일어났고, 그것이 동약·동계 조직에도 영향을 끼쳤다. 특히 사대부 계층의 권위 약화와 하층민의 의식 성장은 상하합계가 구축해 놓은 향촌 질서를 위협하였다. 하층민은 사대부 계층이 주도하는 동약·동계에서 이탈하였으며, 대신 자신들의 거주지를 중심으로 별도의 촌락 공동체를 결성해 나갔다. 신분 질서의 변화 속에 상하합계 형식의 동약·동계가 해체되었다고 해서, 향약이 가지는 권위가 동약·동계에서 사라지거나 약화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대부 문화를 지향하는 새로운 계층의 성장 속에 향약의 권위가 더욱 광범위하게 활용되었다. 무릇 동에 명부가 있는 것은 향(鄕)에 서(序)가 있고, 주(州)에 학(學)이 있는 것과 같다. 대개 옛날에는 풍속이 간박하고 인정이 순후하여, 고기 잡고 나무하고 밭 갈고 책 읽음을 각자 수업해 왔으니, 이는 곧 만세의 큰 아름다움이었는데, 근세에 이르러 풍속이 퇴패해지고 인정의 소박해짐이 여러 대에 이어져 동안에 이름이 실리는 것이 드물게 되었다. … 대개 이 동리가 동이 된 것이 어느 때에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바다가 동쪽에 임해 있어 해가 처음 뜨고 물과 육지가 뒤섞인 집들이 즐비하니, 한 동리의 사람들은 같은 들판에서 쟁기질 하며 농사일에 힘쓰고 같은 바다에서 배타며 생애를 보내며, 질병이 있으면 함께 도우고 수화(水火)에는 서로 구제하니, 비록 행원(杏垣)의 이웃이 아니지만, 오히려 남전(藍田)의 옛 규약을 지키니, 이것은 습속의 돈후함과 이웃 간 서로 구휼함이 정말로 지금 세상에 하나 있는 오래전 백성들의 동리가 아니겠는가? ―「동안(洞案)」, 김경두(金景斗) 서문 中 위의 서문은 강원도 평해(지금의 경상북도 울진) 구암동(狗巖洞)의 동계 조직이 1909년 작성한 「동안」의 서문이다. 서문에서는 구암동 동계가 향약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동안의 전통이 고대 중국의 향서(鄕序)와 주학(州學)에 버금간다고 하였다. 유학의 교육·교화 기관과 향약에서 동계의 연원을 찾고 있다. 이러한 평가는 16세기 이후 여러 명현들이 작성한 동약·동계의 서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서문에 언급되어 있듯이 동해안 가에 위치한 구암동은 반농반어(半農半漁)의 촌락에 해당한다. 구암동에는 밀양박씨(密陽朴氏) 가문의 족세가 강하나, 주민들의 생업과 촌락에서 거행되는 의례의 형태를 보았을 때 전통적인 반촌과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구암동의 동계는 일반적인 반촌의 동족의식과 별개로 촌락민의 생업과 관련 깊은 공동체 조직이다. 실제 구암동 동계의 주요 사업도 상호부조, 복리 증진, 부세 대응이 주축을 이루고 있으며, 어촌 촌락의 특징을 살려 미역 채취나 멸치 조업을 조정하는 역할을 했다. 【그림 19】 1909년 구암동 「동안」 구암동 동계가 시작된 시점은 1840년 무렵이다. 1840년 구암동 동계에서 제정한 완의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생각하건대 우리 상(上)·하촌(下村)이 합동(合洞)했을 때 각항(各項) 상납(上納)이 복잡할뿐더러, 시비가 가끔 일어남이 끊이지 않는 까닭에 상·하 촌민이 별반으로 공의(公議)하여 박곡(朴谷)은 박곡의 동역(洞役)을 하고, 구암은 구암의 동역을 한다면, 장래에는 끝내 예전처럼 안도할 것이니, 이에 영구히 준행할 일. ―「구암분동동안(狗巖分洞洞案)」, 〈완의〉 中 이 완의는 1840년 구암동이 이웃한 박곡동과 ‘분동(分洞)’할 때 작성한 것이다. ‘분동’은 동약·동계의 단위인 ‘동’이 분리됨을 뜻한다. 동약·동계는 보통 하나의 촌락으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주도 세력의 영향력이 미치는 복수의 촌락을 포괄하기도 한다. 그럴 경우 사대부 계층이 세거하는 반촌이 주로 동약·동계를 주도적으로 운영하였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은 촌락은 조직 운영에서 통제를 받거나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았던 촌락의 여건이 좋아지고, 촌락민의 의식도 성장한다면, 이들은 동약·동계를 주도하던 세력에게 동등한 권리를 요구할 것이다. 만약, 그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 경우, 기존의 동계·동약에서 이탈하여 별개의 공동체 조직을 운영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분동’의 형태로 나타난다. 앞서 살펴본 부인동동약이 19세 중반 중단된 것도 바로 ‘분동’ 때문이었다. 1840년 구암동의 분동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원래 박곡동과 구암동은 하나의 동으로 묶였는데, 부세 문제로 분쟁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그래서 의논을 모아 분동을 하기로 합의를 보았고, 구암동은 박곡동과 완전 별개의 동계를 운영하게 된다. 그런데 완의에 따르면 박곡동이 상촌, 구암동이 하촌으로 인식되고 있다. 아마 하나의 동으로 묶여졌을 때, 구암동보다 박곡동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구암동이 분동을 요구한 것도 촌락민의 사회·경제적 성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구암동은 1840년에 분동하여, 비교적 늦은 시기에 동계를 운영하였다. 이러한 점을 감안할 때 구암동 동계는 조선시대 결성된 유서 깊은 반촌의 동약·동계와 같은 선상에서 이해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1909년 서문에 언급되어 있듯이, 구암동의 촌락민은 자신들의 동계가 향약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았다. 더 이상 향약은 양반 사대부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조선 후기 이후 신분 상승이 욕구와 더불어 사대부 문화를 지향하는 계층이 증가하게 된다. 그러면서 기본의 사대부 계층이 향유하던 문화와 규범이 사회 저변으로 확대되어 갔다. 향약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전통적인 신분 관념이 해체되어 가는 근대 전환기에 이르면, 일반 촌락민도 자신들의 결사 조직에 향약 정신과 규정을 접목시키는 경우가 늘어나게 된다. 현재 우리가 향약을 양반 사대부만의 규범이 아니라, 향촌사회의 보편적인 실천 규범으로 인식하는 것도 이렇게 조선시대 동안 사회 저변에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다. -
조선시대 사람들의 더불어 살기, 향약- 기록자료
- 사회
12개 조는 퇴계 이황이 제정한 퇴계향약의 벌목을 옮겨 온 것이다. 나머지 8개 조는 온계동계의 규정을 약간 변용하였다. 하나. 약중(約中)에 화재가 있으면 상하가 서로 모여 구원하고 또한 위문한다. 각기 빈 가마니[空石]와 이엉[蓋草], 장목(長木)을 내어 힘써 도와준다. 도적을 당하면 서로 구원하고 질병이 있으면 서로 문안한다. 전염병[癘疫] 때문에 농사일을 못 하면 상하가 각기 농군(農軍)을 내어 밭 갈거나 씨를 뿌리거나, 김을 매거나 수확해 준다. 홀아비·과부·고아 또는 늙어서 자식 없는 사람[鰥寡孤獨]이 몹쓸 병에 걸렸는데, 돌봐 줄 사람이 없는 저는 모두 가엾게 여기고 도와주어, 잃어버리는 바가 없게 한다. 하나. 약중에 초상이 생기면 상하가 모두 모여 함께 조문한다. 호상유사(護喪有司) 1원과 하유사(下有司) 2인을 정하여 돌보게 하며, 장례 때 또한 그렇게 한다. 양반은 각기 힘센 종[壯奴] 1명을 내고 상인(常人)이면 역부(役夫) 1명을 내어 상여를 메거나 묘소를 만드는데 하루 동안 가서 일을 도와준다. 하나. 흉사는 상하 모두 각기 백미 두 되, 탁주 여섯 사발, 통 한 기(器), 일꾼 한 명을 내는데, 만약 다른 일이 있는 자는 하루 나와 일하고, 뒤에 곡식 두 말을 거두어들인다. —「온계동규(溫溪洞規) 부(附) 계상동계(溪上洞契)」 中 위의 조항은 계상동계의 운영 규정 중 상호부조와 관련된 것이다. 기본적으로 재난이 일어났을 때, 상장례 때, 각종 흉사를 당했을 때 물력과 노동력을 내어 주고, 슬픔을 나누기로 규정하고 있다. 특히 이 조항은 20개 조에 이르는 계상동계 규정 중에서도 가장 상세한 편이다. 계상동계가 구성원 간의 결속력 강화와 공동체 유지에 있음을 잘 보여 준다. 이러한 상호부조 항목 중 사대부 입장에서 가장 절실한 것이 노동력 차출이었다. 하층민의 노동력이 필요한 것은 상장례 때뿐만이 아니었다. 하층민의 노동력은 동내에서 거행되는 각종 의례와 행사, 공공사업을 수행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였다. 사대부 계층은 동계 조직을 통해 ‘동’ 안의 하층민과 각종 하계 조직을 통제하고 노동력을 징발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형태의 동계·동약은 상하합계 형태로 운영되었으며, 명문 벌족이 세거하는 반촌에서 쉽게 확인된다. 1719년(숙종 45) 경상도 삼가의 옥계정계에서는 동안을 새롭게 정비하면서, 개정된 규정을 완의로 남겼다. 해당 완의는 모두 10개 조 구성되어 있는데, 아래의 조항은 하층민에 대한 통제 규정이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이 완의는 동의 풍속을 부식(扶植)하고 기강을 일으키기 위한 것이다. 우리 동의 풍속은 평소 순후하였으나, 근년 이래 예(禮)가 무너지고 풍속이 경박해져 사람마다 그 마음에 연소자는 어른을 알지 못하고, 천인(賤人)은 귀인(貴人)을 알지 못하며, 논의할 때에 이르러서는 망령되이 스스로 존대하고, 혹 지위가 낮은데 소리를 높이고, 혹 연소한데 잘못된 의논을 일으켜 장로를 장로로서 대하지 아니하고, 집강을 집강으로써 대하지 아니하니 … 지금 이후부터 만약 외람된 자가 동의 여론을 빗나가게 하고, 언사가 거만하고 무례한 것은 동내에서 있을 수 없으니 동안에서 삭거(削去)할 것이다. 하나. 상한(常漢)[상놈]의 선악은 일일이 장부에 적어서 상벌을 행하고 그중에 완악한 자는 일제히 관에 정문(呈文)을 올려 엄하게 다스리며, 불통수화(不通水火)할 것. 하나. 동내 상한과 향도(香徒) 등이 조묘(造墓)와 성빈(成殯)의 역을 동유사가 미리 분부한 후에도 거역하고 행하지 않거나, 유사의 분부가 아닌데도 사사로이 일을 할 경우가 있으니, 이 습속이 매우 통탄스러우므로 지금 이후로 규찰관(糾察官)과 동유사가 함께 이름을 장부에 적은 뒤 강신과 회집하는 때에 좌중에 두루 보인 다음 일일이 벌을 내릴 것. 하나. 동내의 수행원이 만약 혼상(昏喪)을 당하면 상중하를 막론하고 유사가 동중에 발문(發文)·통고(通告)하여 각기 두루 돌아보고, 아무 까닭 없이 불참하는 원은 삭적하고 제마수(齊馬首)를 하게 할 것. —「동안 기해년수정(洞案 己亥年修正)」, 〈완의(完議)〉 中 1719년 옥계정계에서는 새롭게 동계 규정을 완의하였다. 그 서문에서는 완의의 목적이 상하 간의 질서를 뚜렷이 하는 데 있다고 명시해 놓았다. 이는 동계 안에서 하층민이 사대부의 통제를 잘 따르지 않고 있음을 의미한다. 옥계동에서 하층민은 상한과 향도라고 불렀다. 여기서 향도는 상장례 때의 상여꾼으로 보이며, 상하합계에서 하계를 구성하였다. 【그림 20】 상여행렬, 국가문화유산포털 상한과 향도는 옥계정계 내에서 노동력으로 동원되었다. 무덤을 조성하는 조묘와 빈소를 차리는 성빈 때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한데, 사대부에서 임명되는 동유사가 이들의 노동력을 차출하고 통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만약 동계의 지시를 듣지 않거나 상장례 때 참여하지 않으면, ‘불통수화’와 ‘제마수’ 같은 처벌을 받았다. 여기서 ‘불통수화’는 동리 안에서 일체 교류하지 않는 것이며, ‘제마수’는 용서받는 대신에 술과 음식을 다른 구성원에 대접하는 것이다. 한편, 동리 안에는 다양한 목적의 결사 조직이 존재하였다. 하층민들도 상호부조와 생업 및 공동노동을 목적으로 하는 조직을 별도로 운영하고 있었다. 이에 사대부들은 자신들이 주도하는 동계·동약 조직으로 이들을 통제하고, 하층민의 조직을 노동력으로 동원하고자 했다. 1601년(선조 34) 경상도 예천 고평동(高坪洞)에서 시행한 동계는 이러한 하층민 조직을 체계적으로 관리하였다. 원래 고평동계(高坪洞契)는 임진왜란 이전에서 존재하였으나, 전란으로 중단되어 1601년 새롭게 중수하였다. 당시 중수를 주도한 인사는 선조 연간 정승을 지낸 정탁(鄭琢, 1526-1605)이었다. 정탁은 향약을 중수 때 작성한 서문에서 “남전여씨향약 전질(全帙)을 빌려다가 참고하면서 현실에 맞는 몇 가지를 간추리니 겨우 여씨향약에서 열에 한둘에 불과하나 힘써 따르기에 편리한 것과 세속의 사례를 몇 가지를 끼워 넣어 한 편으로 만들었다”라고 하였다. 고평동계 역시 주자증손여씨향약을 따르되 시의를 참작하여 변용한 것이다. 상계(上契) -도유사(都有司): 1원 -부유사(副有司): 좌우 2원 하계(下契) -유사: 3인 -고직(庫直): 2인 -영수(領首): 정원에 한정이 없음 그 밖에 혹 영장(領長)을 두어 그 영(領)을 규찰하는 소임을 맡긴다. ―「고평동계약문(高坪洞契約文)」, 〈계중입식(契中立式)〉 中 하계의 서인(庶人)이 이것[약조]를 어기는 등의 죄를 저질렀을 때 가벼우면 당대(當隊)의 영수가 스스로 규찰하거나, 아니면 벌주(罰酒)를 준다. 무거우면 하계유사에게 알리고, 하계유사는 수본(手本)[보고 서류]을 상계유사에게 바치며, 상계유사는 범한 바에 따라 여러 존위(尊位)에게 고하여 벌을 주되, 만약 큰 잘못을 저질렀으면 사유를 일일이 들어 단자를 써서 관아에 알리어 법의 심판을 받게 함과 동시에 동계에서 영원히 축출한다. 만약 스스로 뉘우쳐 벌을 받고 향례대로 복속하기를 원하거나 조약에 따라 벌을 받기 원하면 들어준다. 무릇 사노(私奴)가 약조를 어겨 저대로 그 죄가 있는데도 그 주인이 간혹 정리로 비호하는 자가 있으면 각별히 벌을 준다. 그래도 경계할 줄 모르고 도리어 구실을 붙여 약조를 경시하는 자는 영원히 동계에서 축출하고 공동 우물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한다. ―「고평동계약문」, 〈금제조(禁制條)〉 中 고평동계 관련 규정과 문적을 엮어 놓은 「고평동계약문(高坪洞契約文)」에 따르면 상계와 하계에 각각 임원을 둔 것으로 나타난다. 운영 규정인 ‘금제조(禁制條)’에서는 하계에서 죄를 범하는 일이 발생할 경우 하계유사가 전말을 갖추어 상계유사에게 보고하는 상하 구조를 명백하게 규정하였다. 특히 주목할 점은 하계에 대한 규찰을 ‘당대의 영수’가 맡는다고 규정한 대목이다. 여기서 ‘당대’와 ‘영수’는 농경사회에서 유래한 두레 용어로 보인다. 두레에서는 일정한 인원으로 각 대(隊)를 만들고 그 대의 장을 영수라고 하였다. 당연히 두레 조직은 하층민으로 구성되었다. 고평동계의 특징은 하층민을 개별적으로 통제한 것이 아니라, 두레 조직을 하위 구조에 두고 상하 관계를 명백하게 규정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고평동의 사대부들은 상호부조나 동리 단위의 공공사업 때, 두레 조직이 관리하는 개별 하층민의 노동력을 활용하였을 것이다. 상호부조와 더불어 부세 대응도 동계·동약의 중요한 공동체 사업이다. 조선 후기 하위 해정 구역이 정비됨에 따라, 각종 부세와 잡역세(雜役稅) 등이 면리 단위로 부과되었다. 그 중 동리 단위로 부과되는 부세는 동약·동계 조직이 공동납의 형태로 대응하였다. 그 방법으로는 특정 동리에 일정 분량의 부세가 부과되면, 동약·동계 조직이 동리 안에 거주하는 촌락민의 사정을 감안하여 재분배한 세액을 거두어들이는 형태와 ‘존본취식(存本取殖)’을 통해 동리에서 부세를 미리 대비하는 형태가 있다. 부세 중 잡역세의 경우 관아 운영이나 수령 부임 때 투입되는 비용, 기타 부족한 세액을 메꾸기 위한 명목으로 부과하였다. 잡역세는 비정기적으로 부과되는 경우가 많았기에 일반적인 부세와 달리 미리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해당 비용은 주로 동약·동계에서 ‘존본취식’ 즉,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늘리는 방식으로 마련하였다. 대구 부인동동약의 ‘선공고(先公庫)’는 공동납의 모범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선공고는 “공적인 일을 먼저하고 사사로운 일을 뒤에 한다”라는 ‘선공후사(先公後私)’라는 용어에서 취한 것으로 최흥원이 주도하여 1753년에 조성하였다. 약중에서 부유한 자들과 약속하여, 공세(公稅)를 먼저 내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방도를 도모하였다. 이에 동의 밭 1단을 팔아 수천 전을 받고 또 강회(講會)에 쓰고 남는 것을 별도로 저축하여, 해마다 늘였다가 이자를 떼어서 토지를 매입한 것이 수십 년에 이르니, 사들인 논이 백여 두락에 가깝고 저축한 곡식도 수백 곡(斛)에 이른다. 그 밭을 공전(公田)이라 하고 창고를 공고(公庫)라고 해서, 이것으로써 약중 백성의 세역(稅役)에 충당하기로 하였다. ―『부인동지(夫仁洞誌)』, 「공전비문(公田碑文)」 中 위의 「공전비문(公田碑文)」은 1765년에 선공거의 조성 경위를 밝히기 위해 찬술되었다. 비문에서는 동리 백성에게 공동납이 형태로 부과되는 공세, 즉 부세를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선공고를 조성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림 21】 『부인동지』,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선공고의 재정은 하루아침에 조성된 것이 아니었다. 우선 동의 밭을 팔아 기본 자금을 마련하고, 이를 여러 해 동안 이자를 놓아 다시 공전을 매입하는 방식으로 조성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관리하기 위한 규정으로 「선공고절목(先公庫節目)」을 제정하였다. 그 절목에 따르면 선공고는 상안(上案), 즉 사대부로 구성된 상계에서 뽑은 상유사 1인과 하안(下案), 즉 하계에서 뽑은 하유사 1인에 의해 관리되었다. 동리의 사대부와 하층민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선공고는 공동납의 모범 사례로서 조정에도 알려졌다. 당시 경상도관찰사는 최흥원의 부인동동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으며, 정조는 신료들에게 최흥원을 등용하라고 지시하였다. 전 주부(主簿) 최흥원은 행실만 훌륭할 뿐만 아니라, 재물을 내어 빈궁한 사람을 구제하였으며, 집안에 ‘선공후사’의 창고가 있어서 이웃 사람들이 일정한 부역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으며, 또 향약으로 권장하고 가르칩니다. ―『정조실록』, 7년 2월 19일 기사 中 이리동약을 시행했던 안정복도 공동납을 적극 활용하고자 했다. 다만 그의 공동납 구상은 수령 때 계획되었다. 안정복은 평소 왕도정치 실현을 위해, 그 대리인으로 지방에 파견되는 수령의 올바를 자세에 대하여 고심하였다. 그 결과 수령의 정무 지침서라 할 수 있는 『임관정요(臨官政要)』를 저술하게 된다. 1776년(정조 즉위) 안정복은 목천현감(木川縣監)으로 부임하였다. 안정복은 자신이 구상했던 수령 통치를 목천현에서 시험하고자 했다. 그는 수령 통치에서 교화와 명분을 우선순위로 삼았으며, 그 후에야 세세한 절목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안정복은 수령을 보조할 교화 체계로 동약을 주목하였다. 이와 관련해 『임관정요』에서는 “모든 정교(政敎)는 동약이 시행된 뒤에야 쉽게 거행할 수 있다. 부임한 뒤에 동리에 동약이 있는지 없는지를 묻되 동약이 있으면, 그 동헌(洞憲)을 거둬들여서 미비한 약조는 정리한다”라고 하였다. 고을의 교화는 올바른 동약의 실시 여부에서 시작된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부임 직후 목천현 전체에 다음과 같은 유시문을 내리게 된다. 듣건대 이곳에는 모두 동계가 있다고 하는데, 무릇 한 동네 안에서 선을 표창하고 악을 미워하는 일이 있다면 그 동네의 정사가 닦여져서 교화가 밝아지고 명분이 바르게 되는 것이 이로부터 가능해질 것이다. 이는 실로 옛사람이 행한 향약의 뜻이며, 향리의 비(比)·여(閭)·족(族)·당(黨)의 운영도 이를 통해서 행해지는 것이다. 각 마을의 군자들은 동헌을 잘 다듬어서 실시하되, 이 두 가지를 반드시 실천해야 할 급무(急務)로 삼기 바란다. ―『순암집(順菴集)』, 「목주정사(木州政事)」 中 안정복은 목천현에서 동리 단위로 결성된 자치 조직의 현황을 파악했을 것이고, 동약은 아니더라도, 관내 곳곳에 동계가 조직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동리별로 광범위하게 동약·동계 조직이 운영되고 있었던 것이다. 안정복은 지금 목천에서 동약이 없더라도, 동계 조직이 있으면 동규를 제정하여 향약의 형태로 운영하면 된가도 판단하였다. 나아가 안정복은 동약을 단위로 방역소(防役所)를 운영하고자 했다. 방역소는 방역고(防役庫)라고도 불리는 민고(民庫)이다. 민고는 고을별로 공동납의 형태로 부과되는 각종 잡역세를 대비하기 위해 만든 재정 기구였다. 이를 위해 안정복은 방역전(防役錢)을 조성하였으며, 이를 운영하기 위한 규정으로 8개 조의 절목과 23개 조의 추후(追後) 절목을 제정했는데,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은 방역전의 관리 및 운영 계통이다. 「방역소절목(防役所節目)」 하나. 2백 냥을 마련한 뒤 8개 면의 각 동에 나누어 준다. 동이 모두 40개이므로 매 동당 5냥씩 나누어 관리케 하고 이름을 방역전이라 한다. … 각 동의 상존위(上尊位) 및 여러 소임들이 맡아서 내어 주고 받아들인다. 하나. 지금 이 방역소를 관가에 설치하고, 유향소와 아전 무리로 하여금 맡아서 관리하게 하고자 하나, 만일 관가에 설치한다면 그 수가 방대하여 거두고 내는 때에 반드시 한 가지 폐단이 생길 것이다. … 그러니 대소 백성들은 이런 뜻을 부디 깊이 체득하여 오래도록 시행할 수 있게 해 주기 바란다. 하나. 이 돈이 이미 동의 물건이 되고 나면 동의 상계 및 소임들이 이를 침탈해서 쓰는 경우가 필시 많을 것이니, 이럴 경우 완의를 통해 논벌해서 손을 대지 못하도록 한다. 「방역추후절목(防役追後節目)」 하나. 각 리의 백성으로서 동을 이루지 못하여 통괄하는 곳이 없는 자들은, 부근의 동에 분속시켜서 규례에 따라 거두고 낸다. 하나. 이 돈은 사채(私債)와는 다르다. 그러므로 사고가 있다고 핑계대어 받기 어려운 자가 있으면, 관에 알려서 면임으로 하여금 징수해 주게 한다. 하나. 매년 가을 모임을 마친 후에 각 동에서는 나누어주고 받아들인 문서 한 통을 면유사(面有司)에게 바쳐서 증빙 자료로 삼는다. 하나. 대동의 역[대동세]을 당하여 관가에서 옛 규례에 따라 전령(傳令)하여 도유사에게 알려주기만 하면, 도유사가 각 면의 존위(尊位)에게 통고한다. 그리하여 각 면별로 거두어 면유사의 집에 모으게 하고, 각 동의 신실한 하소임(下所任)을 시켜서 문서를 갖추어 관에 바치도록 한다. 하나. … 상계(上契)와 당시의 소임(所任)은 절대로 이 돈을 써서는 안 되며, 이것을 범한 자는 면존위(面尊位)가 적발하여 벌을 준다. ―『순암집』, 「목주정사」 中 위의 두 절목은 안정복이 동약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잘 보여주는데, 여기서 확인되는 특징을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그림 22】 안정복의 「목주정사」 첫째, 방역전은 ‘방역소-면-동’으로 분배되는데, 최종적인 분배는 ‘동’ 단위로 이루어졌다. 여기서 ‘동’은 안정복이 조직을 권장했던 동계·동약의 시행 범위이다. 최하위 행정구역 단위로는 ‘리’가 있지만, 자치 조직이 결성되어 있는 ‘동’을 운영 단위로 설정하였다. 만약 여기서 제외된 ‘리’가 있다면, 인근 ‘동’에 분속시켜 운영하도록 했다. 둘째, ‘동’에서 방역전은 동계·동약 조직이 운영하였는데, 그 운영 책임은 사대부로 구성된 상계가 맡았다. 안정복은 사대부가 실질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동’을 향촌 교화 정책의 단위로 설정하였으며, 나아가 이 조직을 각종 부세에 대응하는 자치 조직으로 운영하고자 했다. 향촌의 실질적인 담당자에게 부세를 담당하게 함으로써, 중간 계층의 농간이 개입하는 것을 방지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셋째, 유향소[향청]과 질청은 방역전 운영에서 제외하였다. 대신 교화를 담당하는 동약 조직에게 방역전 운영을 전담시킴으로써, 관부의 개입을 차단하고 있다. 부세를 거두어들이고 납부하는 데 있어서, 명목 없는 잡세가 발생하는 폐단을 무수히 목격하였기에 향청과 질청의 개입을 배제한 것이다. 넷째, 관부는 단지 방역전 운영을 감독하고 행정적 지원을 해 줄 뿐인데, 이는 면리 조직이 담당하였다. 각종 면임과 이임은 동계·동약의 상계에서 함부로 방역전을 소용하지 않도록 감독하며, 방역전을 미납하는 자가 있으면 공권력을 동원해 대신 징수하는 정도이다. 최흥원의 선공고와 안정복의 방역전은 모두 부세 대응을 목적으로 조성되었으며, 동약 조직에서 운영하였다. 동약이 부세 대응에 앞장선 것은 촌락 공동체의 안정을 위해서이다. 당시 수령과 아전들은 부세를 부과하는 과정에서 가렴주구를 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과중한 부세로 인해 하층민들이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다면, 촌락 공동체 유지도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뜻있는 사대부들은 동약을 통해 각종 부세를 적극적으로 대응해 나갔던 것이다. -
조선 선비들의 로망, 관동유람- 기록자료
- 문화
했던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도 “산을 유람하는 것은 독서와 같고, 산을 등정하는 과정은 도(道)의 절정을 찾아가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주자가 겨울에 남악을 유람한 일을 상고하여 한겨울에 청량산(淸凉山)에 올랐다. 관직에 나가지 않고 평생 학문에 전념했던 이황의 문인 치재(耻齋) 홍인우(洪仁祐, 1515-1554)도 자신의 금강산 유람을 공자의 태산 등정과 주자의 남악 유람에 빗대었고, 유람은 성현을 본받는 일임을 강조했다. 상술했듯 유람으로 즐겨 찾는 명산 대부분은 산세가 험준하여 항상 위험이 상존해 있었다. 그럼에도 선비들 사이에서 명산을 유람하는 풍조가 확산한 것은 산수유관이 유람을 구경과 놀이 이상의 의미로 인식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수몽(守夢) 정엽(鄭曄, 1563-1625)은 산수를 ‘음란한 음악이나 미색(美色)과 같아, 점점 그 가운데로 빠져들면 돌아올 줄 모르게 하는 마성이 있는 것’이라 했다. 하지만 마성이 있는 위험한 산을 오르는 고행을 통해서라도 공자의 ‘등태산소천하’의 이치를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조선 선비들에게 산수 유람이란 단지 경치와 풍류를 즐기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유람은 공자와 주자, 그리고 선학을 본받아 산수에서 학문적 이치를 깨닫기 위한 것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임진‧병자호란으로 국토가 황폐화되고, 국가가 전후 복구에 몰두하고 있는 시점에서도 선비들의 유람은 끊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욱 성행하게 된다. 국가의 양 변란 이후 제기된 국가재조론(國家再造論, 국가를 재건하자는 논의)의 논점 가운데 유교 본래의 정치이념을 실천하자는 주장이 중요한 논점으로 떠올랐다. 주자학 정치이론의 핵심인 수기치인(修己治人, 스스로를 먼저 수양하고 세상을 다스림)의 수양론(修養論)을 통해 국가를 재건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조되었다. 국가재건을 위해서는 어질고 도덕적인 정치가 구현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치자인 선비들의 자정(自淨)과 수양은 필수였고, 스스로 학문에 몰두하고 수기치인 하여 국가, 그리고 민생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념의 강화는 양 변란 이후에도 선비들이 스스럼없이 유람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 주었다.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유람에 나섰다. 선비들에게 유람은 곧 산수를 통해 ‘인지지락(仁智之樂)’을 이루는 공부이자 자신을 수양하는 행위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선비들에게 산수는 단순한 자연현상의 의미로 그치지 않았다. 정신 수양의 장소이자 국토의 역사와 문화가 집합된 장소였다. 산수 유람을 통해 단순히 경물을 보고 즐기다 뜻한 바를 잃어버리는 ‘완물상지(玩物喪志)’의 경계를 벗고, 자연이 지닌 내재적 의미를 탐미하며 유람을 의미 있는 행위로 만들어 갔다. 이것은 조선 선비들이 대외적으로 표방한 유람 명분이기도 했다.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 1369-1430)은 산을 유람하면서 “먼 산길 구름 속에 반쯤이나 들어가니 이 유람이 세속의 먼지를 피하기에 족하구나”라고 감탄했다. 유람을 통해 탈속의 기분을 느끼고 있다. 선비들은 복잡하고 번다한 일상에서 벗어나 탈속의 자유를 느끼고자 하는 열망을 항시 가지고 있었다. 일상에 여가가 생기면 잠시나마 탈속과 안분을 체험하고자 했는데, 이러한 방편으로 유람을 택하였다. 아름다운 산천 속에 들어서노라면 마치 신선 세계에 든 듯한 감흥을 느꼈는데, 이는 유람의 목적 중 하나인 바로 탈속의 추구와도 부합한다.. 그리고 산수는 글쓰기의 좋은 소재였다. 선비들의 일상에서 글쓰기는 자신을 수양하고 학문적 성과를 표현하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선학에게 배움을 청하기도 했고, 방법을 스스로 찾아 나서기도 했다. 글쓰기 방법 중에 천하의 장관을 유람하면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구하는 것은 유학자인 선비가 해야 할 일이라 생각했고, 호연지기는 글쓰기에 큰 도움이 된다고 인식했다. 선비들은 『사기(史記)』를 쓴 중국 사마천(司馬遷)의 문장이 변화무쌍한 명문인 것은 유람을 통해 문기(文氣)를 함양했기 때문으로 생각했다. 선비들은 사마천의 고사를 유람의 명분으로 자주 피력하였고, 유람을 통해 자연의 이치를 깨닫는 것은 문기를 함양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것으로 여겼다. 산수는 글의 소재였고, 감수성을 자아내는 대상이었다. 선비들은 글짓기 능력을 배양하기 위한 중요한 방편으로 유람을 택했고, 실제 유람 중 수많은 시문을 창작해 냈다. 유람을 떠나기 전 유람에 필요한 식량과 물품들은 중국 송(宋)나라 진직(陳直)이 지은 『수친양로서(壽親養老書)』를 참고하여 구비했고, 유람 중에도 소지하고 다녔다. 이 책에는 노인 봉양에 필요한 계절별 섭생 및 약재 등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 외에 성리학 서적을 지참하였다. 공자나 주자, 또는 이황과 같은 성현(聖賢)들을 본받아 산수 유람 중 독서를 통해 성리학적 이념을 궁구하며 구도(求道)하겠다는 다짐에서였다. 선비들은 역사 현장과 선현의 자취를 답사하기 위한 목적으로도 유람에 나섰다. 유람을 통해 역사 현장을 답사하고, 역사의식을 고취했다. 조선 선비들은 주로 개성 유람을 통해 고려의 유적을 답사하고 나라의 흥망을 상고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자신들이 학문적으로 추모하는 선대 명현들의 행적을 찾고자 유람을 떠났다. 청량산은 이황, 지리산은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이 유람했고, 그 기슭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이 산들은 두 명현으로 인해 큰 명성을 얻었고, 후학들이 무시로 찾아 유람하였다. 이처럼 조선 선비들에게 산수란, 도(道)가 깃들어 있는 공간이었다. 산수는 유람을 통해 선현의 뜻을 본받고 도심(道心)을 기르는 장소였고, 심신 수양의 장이었다. 이러한 산수유관은 당시 선비들이 지향하는 유람의 목적이었다. 그러므로 학문의 이치를 궁구하여 경물의 이치를 깨닫지 못하는, 학문적으로 낮은 수준에 있는 사람은, 유람 본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므로 자중시키기도 했다. 일례로 1703년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이 황규하(黃奎河, 1687-1719)에게 유람의 유익함을 설명함과 동시에 함부로 유람하지 말 것을 권면한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황규하의 나이 16세 때였다. 일의 전말은 황규하가 김창협에게 유람을 떠나고자 하니, 전별의 글을 지어달라 요청한 것이었다. 김창협은 외물(外物)의 도움에만 의존한다면 유람하는 데 큰 의미가 없으므로 학문의 이치를 궁구하여 깨달은 이후 유람하도록 권유했다. 김창협 자신도 젊은 시절 금강산을 유람하면서 아름답고 화려한 점만 좋아하여 바쁘게 오르내리며 널리 구경함으로써 만족하려고 했던 것이 매우 유감스러웠다고 밝히고 있다. 경물을 많이 보는 데 빠져 도의 견지에서 관찰하고, 정신으로 이해한 후 성정을 도야하여 심금을 넓히는 기회로 삼지 못했음을 아쉬워했다. 젊은 황규하가 유람을 나선다고 하자 자신이 젊은 시절 유람할 때 겪은 불찰을 설명해 주고, 그러지 말도록 권면한 것이다. 다른 예로 윤증도 지인인 고송재(孤松齋) 심정희(沈廷熙, 1656-1714)의 아들이 재차 금강산을 유람하고 싶다고 하자, 조금이라도 한가한 때에 학업을 연마하지 않고 한가로이 돌아다니며 도로에서 세월을 허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표명한다. 학문의 깊이 없이 유람하다가 자칫 외물의 경치에 빠져 유흥에 그칠 것을 염려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어느 사람을 막론하고, 유람의 목적에는 일상의 권태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도가 공존한다. 조선시대 유람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퇴폐적 행위도 적지 않게 발견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유람이란 유희적이고 퇴폐적인 것’이라고 결론 짓게 할 만큼 보편적인 것은 아니었다. 조선 선비들은 유람에 있어 그 체모를 매우 중시했다. 자칫하면 신랄한 비판을 받을 수 있는 일이 유람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름의 뚜렷한 명분과 목적의식을 갖추고 유람을 결행했다. -
조선 선비들의 로망, 관동유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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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정이다. 이외에 이황이 경포를 설명하면서 “강릉의 동북쪽에 있는데…. 즉, 관동팔경의 제일이다”라고 한 것과 태천(苔泉) 민인백(閔仁伯, 1552-1626)이 “삼척 죽서루의 승경이 관동팔경 중 최고이며 재차 논의하는 것이 무의미하여 다시 화폭을 보았다”라는 글에서 관동팔경이라는 용어가 나타난다. 이후 조선 선비들의 문집 등에 관동팔경이라는 용어가 지속 등장한다. 박상이 처음 제시한 관동팔경은 강원도 동해안을 중심으로 한 것이 아니라 강원도 전체를 아우르는 팔경이다. 현재 통용되는 강원도 동해안의 영동(嶺東)을 중심으로 하는 관동팔경의 장소 8곳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사람은 하음(河陰) 신집(申楫, 1580-1639)이 처음이다. 신집 이후 많은 선비가 관동팔경의 장소 8곳을 제시하고 있다. 16-17세기 초에는 이미 선비들의 인식 속에 관동팔경이 정형화되어 있었다. 조선 선비들이 제시한 관동팔경을 나열해 보면 경포대‧낙산사‧만경대‧망양정‧사선정‧삼일포‧시중대‧영랑호‧월송정‧죽서루‧청간정‧총석정‧청초호‧해산정 등 총 14곳 정도이다. 여기서 영랑호는 현재 속초시의 영랑호가 아니라 북강원도 고성군에 있는 영랑호이다. 관동팔경은 제시하는 사람이 보고 인식하는 관점에 따라 약간의 편차가 있어 어느 것이 정설이라 할 수 없다. 보는 사람마다 대략 14개소의 명승 중 자신의 취향에 맞는 8곳을 뽑아 관동팔경으로 제시했다. 사람들은 흔히 조선시대 관동팔경이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를 정철(鄭澈, 1536-1593)의 「관동별곡」에서 찾는다. 정철이 1580년 강원도관찰사 재임 시 도내를 돌아보면서 지었던 「관동별곡」에서는 산영루‧총석정‧삼일포‧청간정‧의상대‧경포대‧죽서루‧망양정 등 현재 흔히 알려진 관동팔경 장소가 동해안의 이름난 명승으로 거론되었으나, ‘관동팔경’이라는 용어가 직접 사용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정철의 「관동별곡」은 후대 기행문학에 큰 영향을 끼친 작품으로, 여기서 제시된 동해안의 명승지가 관동팔경의 장소 고착화에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은 분명하다. 현재 통상적으로 일컫는 관동팔경은 통천의 총석정, 고성의 삼일포, 간성의 청간정, 양양의 낙산사, 강릉의 경포대, 삼척의 죽서루, 울진의 망양정, 평해의 월송정이다. 그리고 흡곡의 시중대와 고성의 해산정을 포함하여 ‘관동십경’이라 부르기도 한다. 총석정‧삼일포‧시중대‧해산정 등 이 4곳은 현재의 북강원도에 있거나, 있었다. 관동팔경은 주로 누정(樓亭)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람에서 누정은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선비들은 유람할 때면 수려한 경치를 조망할 수 있는 누정에 올라 시를 읊으며 풍류를 즐겼다. 조선의 문인 관료들에게 누정은 손님을 접대하며 시회(詩會)를 열어 여가를 즐기는 장소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관동팔경이 누정 중심으로 정형화된 것도 이러한 영향이 있었다. 【그림 8-1】 작자미상, 《금강산도권》 중 관동십경(8곳) 발췌, 〈시중대〉, 조선후기, 국립중앙박물관 【그림 8-2】 작자미상, 《금강산도권》 중 관동십경(8곳) 발췌, 〈총석정〉, 조선후기, 국립중앙박물관 【그림 8-3】 작자미상, 《금강산도권》 중 관동십경(8곳) 발췌, 〈삼일포〉, 조선후기, 국립중앙박물관 【그림 8-4】 작자미상, 《금강산도권》 중 관동십경(8곳) 발췌, 〈해산정〉, 조선후기, 국립중앙박물관 【그림 8-5】 작자미상, 《금강산도권》 중 관동십경(8곳) 발췌, 〈청간정〉, 조선후기, 국립중앙박물관 【그림 8-6】 작자미상, 《금강산도권》 중 관동십경(8곳) 발췌, 〈낙산사〉, 조선후기, 국립중앙박물관 【그림 8-7】 작자미상, 《금강산도권》 중 관동십경(8곳) 발췌, 〈경포대〉, 조선후기, 국립중앙박물관 【그림 8-8】 작자미상, 《금강산도권》 중 관동십경(8곳) 발췌, 〈죽서루〉, 조선후기, 국립중앙박물관 【그림 9-1】 전 김홍도 필, 《해동명산도첩》 중 관동십경(2곳) 발췌, 〈망양정〉, 조선후기, 국립중앙박물관 【그림 9-2】 전 김홍도 필, 《해동명산도첩》 중 관동십경(2곳) 발췌, 〈월송정〉, 조선후기, 국립중앙박물관 관동팔경이 정형화되고 조선 제일의 팔경으로 널리 회자하면서 금강산과 더불어 유람명소가 되었다. 물론 관동팔경이 금강산을 오가는 길에 연접해 있어, 금강산 유람의 특수를 누린 영향도 있다. 용재(容齋) 이행(李荇, 1478-1534)은 관동은 진실로 형승의 고장이어서 선비가 세상에 태어나면 누구나 유람하고 싶은 뜻을 품기 마련이라고 했다. 이행 자신도 젊은 시절 금강산‧삼일포 등지를 유람하였으나, 그 향수를 잊지 못해 다시 유람하고픈 마음에 밤마다 꿈에 그렸다고 한다. 심지어 죽창(竹窓) 이시직(李時稷, 1572-1637)은 삼생(전생‧현생‧내생)의 숙원이 관동을 유람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죽기 전 지인과 함께 짚신을 신고 대지팡이를 짚으며 경포대와 금강산을 유람하고자 하는 소원이 있었으나, 결국 이루지 못했다. 병자호란으로 강화성이 적에 의하여 포위되고 남문이 함락되자 활 끈으로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실학자인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은 “강원이 바다에 연하여 관동팔경이 있다. 연해 7백 리에 산세가 아름답고, 해당화가 흰 모래에 깔리고, 누대가 서로 바라보인다. 아름답고 정숙하고 상쾌함이 국내 제일의 승경이다”라고 하여 관동팔경을 국내 제일의 경치로 꼽는 등 조선 선비들의 글 속에는 관동팔경을 격찬한 내용이 무수하게 많이 나타나고 있다. 관동팔경은 우리나라 산천의 아름다움을 진경산수로 꽃 피우게 했던 장소이자 유람의 명소로 명성을 얻었다. 선비들이 자주 찾아 문학작품 속에 다채로이 표출되었음은 물론, 조선후기 실경산수화의 소재로 가장 선호되는 장소였다. 그러므로 관동팔경 도처에는 왕으로부터 무명의 선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의 시문과 족적이 남겨져 있다. -
조선 선비들의 로망, 관동유람- 기록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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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작할 수 있다. 이황도 1549년 소백산을 유람하면서 승려가 메는 가마를 탔다. 이황은 걸어 올라가고자 했으나 승려들이 의논하여 “견여가 아니면 안 되니, 전에 주태수께서 이미 타고 가신 고사가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주세붕이 청량산 유람에 가마를 타고 올라갔음을 말한 것이다. 결국 이황도 가마를 타고 걷기를 번갈아 하면서 소백산을 유람하였다. 선비들은 승려들을 가마꾼으로 동원하는 것을 당연시했다. 구전(苟全) 김중청(金中淸, 1566-1629)은 1601년 청량산을 유람할 때 승려에게 가마를 메게 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므로 함께 간 친구에게 승려 2-3명을 데려오도록 하고 있다. 승려의 가마를 타고 유람하는 내용은 유람 기록에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고 있다. 유람에 승려들의 가마를 이용하는 것은 유람에 있어 상용화된 것으로 보인다. 그냥 오르기도 힘든 가파른 산길에 가마를 메는 것은 매우 고된 노역이었다. 선비들은 자신들이 가마를 타면서도 가마를 메는 승려들을 안쓰러워하기도 했다. 1680년 범허정(泛虛亭) 송광연(宋光淵, 1638-1695)이 지리산을 유람하면서 승려의 가마를 타고 갔는데, 길이 몹시 비탈져 승려들이 한 번에 열 걸음 이상을 갈 수 없었다. 송광연은 이런 상황에서 가마를 타면서도 승려들을 지극히 불쌍하고 가엾게 여기고 있다. 최립은 자신의 금강산 유람에 가마를 메어 준 승려 행정(行正)에게 감사의 뜻으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주기도 한다. 늙은 몸으로 산 헤매기엔 다리 힘 부족하니 / 白首尋山脚力微 천봉에 올라 어찌 휘파람 소리 한번 내 보리요 / 千峯一嘯計全違 남여타고 등반하면 통쾌함 맛보기 어렵지만 / 藍輿濟勝難稱快 그대 덕분에 나는 듯 빨리 달린다고 으스대네 / 賴汝翻誇疾若飛 『간이집(簡易集)』 권8, 동군록(東郡錄), 「남여를 맨 승려 행정에게 감사의 뜻으로 지어 주다(謝贈藍輿僧行正)」 정엽은 금강산을 유람할 때 유점사 승려의 가마를 타고, “가마를 탔어도 피곤하여 견딜 수 없는데 가마꾼은 오죽하겠는가?”라고 하면서 가마꾼 승려의 고통을 말하고 있다. 정엽이 안문점에 이르자 장안사의 승려들이 가마 교대를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장안사 가마꾼 승려가 모자라 부득이 유점사의 승려에게 다시 가마를 메게 하였는데 매우 괴롭게 여겼다고 한다. 가마꾼 승려는 유람객의 수에 따라 수십 명까지 동원되었다. 윤휴가 금강산을 유람할 때 안문점에 이르자 유점사 승려 50-60명이 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유점사 승려들이 윤휴 일행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가마 교대를 위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금강산 안문점은 회양 내금강과 고성 외금강의 경계로, 승려들이 가마를 교대하는 장소였다. 이유원의 『봉래비서(蓬萊秘書)』에 “안문점에 오르면, 정상에 초막 하나가 있는데 가마를 교체하는 곳이다”라고 하였다. 금강산처럼 큰 산은 유람의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찰의 승려들이 가마를 멜 수 없었으므로, 일정 구간에서 승려들이 교대했다. 유람객이 자주 찾는 산에는 사찰들이 유람객을 수행하는 구간을 나누어 놓았기 때문이다. 승려들은 가마 메는 것이 괴롭고 힘들어 뚱뚱한 유람객은 기피했고, 오르기 어려운 곳은 유람객에게 볼만한 것이 없다고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금강산을 처음 찾는 유람객이 높은 봉우리의 경치를 감상하고자 승려들에게 물으면, 승려 대부분은 곧바로 볼만한 곳이 없다고 했다. 가마를 메고 오르기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정약용의 『여유당전서』에 수록된 「견여탄(肩輿歎)」이란 시는 산중에서 가마를 메는 모습, 가마를 탄 사람의 기쁨, 가마꾼 승려의 고통을 구체적으로 묘사해 주고 있다. 사람들이 가마타기 좋은 줄만 알고 / 人知坐輿樂 가마 메는 고통은 알지 못하네 / 不識肩輿苦 가마 메고 높은 비탈 오를 때는 / 肩輿上峻阪 빠르기가 산 오르는 사슴 같네 / 捷若躋山麌 … 평탄한 곳처럼 신속히 달리어라 / 快走同履坦 귓가에 씽씽 바람이 이는 듯하네 / 耳竅生風雨 이 때문에 산에서 노닐 적엔 / 所以游此山 이런 즐거움을 반드시 먼저 꼽는다오 / 此樂必先數 … 통솔하는 아전은 회초리로 지시하고 / 領吏操鞭扑 우두머리 승려는 대오를 정돈하네 / 首僧整編部 영접하는데 시한을 어기지 않고 / 迎候不差限 가는 데는 엄숙히 서로 뒤따르네 / 肅恭行接武 헐떡이는 숨소리 여울 소리에 섞이고 / 喘息雜湍瀑 헌 누더기 땀이 흠뻑 젖는구나 / 汗漿徹襤褸 팬 곳 지날 땐 곁사람 빠져나가고 / 度虧旁者落 험한 곳 오를 땐 앞사람이 구부리네 / 陟險前者傴 멜빵에 눌려 어깨엔 홈이 생기고 / 壓繩肩有瘢 돌에 부딪쳐 멍든 발은 낫지를 않네 / 觸石趼未癒 스스로 고생하여 남을 편케 함이 / 自瘁以寧人 당나귀나 말과 다를 것이 없구나 / 職與驢馬伍 승려들은 특별한 품삯을 받는 것 없이 가마를 메고 다녔다. 가마꾼 사역에 종사해 봐야 선비들이 먹다 남은 쌀 등의 생필품을 사찰에 조금 남겨 두고 가거나, 시 한 줄 써 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품삯이라고 해 봐야 술 한 잔 정도였다. 반대로 사찰에서는 유람객 접대에 막대한 비용을 소진했다. 정약용의 『목민심서(牧民心書)』에 이러한 실태가 잘 나타나 있다. 고을 수령이 사찰에서 한 번 놀면, 동반한 사람들의 접대를 위해 사찰의 반년 생활비가 동이 난다고 하였다. 그리고 혹시 수령들이 비용을 충당해 주기 위해 사찰에 돈과 쌀을 주면, 수령이 절 밖을 나서자마자 아전과 관노들이 빼앗아 버렸다고 한다. 금계(錦溪) 배찬(裵瓚, 1825-1898)이 고을의 모 수령과 산을 유람하였는데, 암자에서 숙식하며 수령이 음식 경비를 자비로 충당한다고 하자 승려들이 은혜에 감사하고 덕을 칭송할 정도였다. 승려들은 사찰에서의 숙식 수발, 기생들과 함께 춤을 추기도 하는 등 선비들의 종과 같은 역할까지 해야 했다. 제호(霽湖) 양경우(梁慶遇, 1568-1638)는 지리산을 유람하면서 승려들에게 물놀이를 시키기도 했다. 폭포연(瀑布淵)과 북지당(北池塘)에 이르렀을 때, 따라온 노복이 승려들이 물놀이를 잘한다고 이르자 어린 승려 7-8명에게 물놀이를 시켰다. 승려들은 발가벗고 음부를 가린 채 시키는 대로 물놀이했다. 못 위에 있던 한 승려가 숲에서 나온 큰 벌에게 이마를 쏘여 땅에 쓰러져 울부짖자 흥이 깨져 자리를 파하였다. 윤휴는 금강산 유람 중 승려들에게 약초를 캐도록 시키기도 했다. 유람객이 사찰에 요구하는 작폐도 적지 않았다. 김육은 개성 천마산의 절 태반이 비어 있는 이유가 산중에 유람을 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이중 무뢰한 자들이 사찰을 침탈하였기 때문이라 하였다. 1589년 강원도관찰사 팔곡(八谷) 구사맹(具思孟, 1531-1604)은 한계산 유람 중 한계사 터에 장막을 치고 머물렀는데, 대찰이었던 한계사의 폐사 원인이 유람객 영접의 고통 때문이라고 했다. 인제를 거쳐 가는 유람객은 반드시 한계사에서 투숙하였고, 승려들이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해 절을 떠나 사찰이 비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조 때에는 역군(役軍)을 거느리는 어떤 군관이 사찰에 가서 가마를 내어 오도록 요구하며 승려들을 잔인하고 혹독하게 대했고, 승려를 결박하여 마구 때리며 먹을 것과 물품을 내키는 대로 요구하기도 하였다. 유람 사역과 접대는 지역민에게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관동지방은 금강산과 관동팔경으로 인해 유람객이 끊임없이 찾아왔으므로 유람 사역으로 인한 지역민의 피해가 다른 지방에 비해 특히 심했다. 이러한 폐해는 고려시대부터 쭉 있었다. 고려 후기의 문신 졸옹(拙翁) 최해(崔瀣, 1287-1340)는 이와 같은 폐해를 직접 목도하였다. 이때는 고려 왕실의 명을 받고 사시사철 금강산에 예불하러 오는 중앙의 관리들이 많았다. 관동의 관리들은 중앙관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예불에 수반되는 큰 비용을 부담하였고, 백성들을 접대에 동원하였다. 최해 자신도 금강산을 유람하였지만, 이러한 상황을 목도한 후 선비들이 금강산을 유람하는 것을 비루하게 생각했다. 접대에 시달린 관동의 백성들은 유람의 명승지인 금강산과 관동팔경이 있는 것을 한탄했다. 유람하는 사람은 일생에 한두 번이지만 관동지방의 관아에서는 연쇄적으로 찾아오는 유람객들의 향락을 제공하느라 사철 분주했다. 백성들은 접대 노역에 징발되어 농사의 시기를 잃는 등 폐단이 심하였다. 백성들은 자신이 사는 곳에 금강산과 관동팔경이 있는 것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원망의 대상으로 인식했다. 관동유람으로 인한 폐해가 점점 심해지자 정조 때에는 비변사(備邊司)에서 관동으로 파견되는 어사(御史)가 가서 규찰해야 할 규칙(사목(事目))을 시달했는데, 첫 번째가 유람객으로 인한 폐해를 막으라는 내용이었다. 관동은 이름난 산수가 가장 많으므로 사찰과 민촌(民村)을 막론하고, 폐해를 끼치는 한양이나 외지 유람객을 발견하면 통렬하게 금단하라는 것이었다. 【그림 40】 작자미상, 〈한송정〉, 광복직후, 강릉오죽헌시립박물관 세태가 이러하다 보니 관동의 백성들은 유람 사역과 접대가 싫어 유람객이 자주 찾는 명승을 훼손시키기도 하였다. 고성 삼일포 절벽에는 영랑‧술랑 등 신라의 화랑이 와서 놀았던 흔적인 “술랑도남석행(述郞徒南石行)”이라는 글씨가 5촌 깊이로 새겨져 있었다. 워낙 유명하여 유람객은 반드시 이 글씨를 보고자 하였다. 그런데 이중 ‘도(徒)’와 ‘행(行)’자는 백성들이 깎아내 희미해졌다고 한다. 백성들이 이 글씨를 보러 오는 유람객들을 접대하기 어려워 그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강릉 해변에는 이름난 유람 장소인 한송정(寒松亭) 터가 있었다. 한송정은 신라시대에 만들었던 정자로, 신라의 화랑들이 유람하며 차를 달여 마신 곳으로 전한다. 창건된 이후 없어졌지만, 워낙 유명한 장소라 조선시대에는 그 터에 한송정을 상징하는 정자를 건립하여 놓았다. 그러나 유람객이 많이 찾아오는 것을 싫어한 백성들이 정자를 철거하였으므로 화랑이 차를 달이던 흔적인 돌절구와 돌우물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심지어 금강산 신계사는 근처 역(驛)의 노비가 유람 오는 벼슬아치들을 따라 말을 몰고 험한 곳을 다니는 것을 괴롭게 여겨 사찰에다 불을 질렀다는 얘기도 전한다. 예나 지금이나 모든 여행에는 피로가 있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선비들이 유람 여정에서 오는 피로를 감내하며 편안하고 즐거운 유람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승려들과 백성들의 사역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것은 비단 관동유람에 한정된 관행은 아니었다. 조선시대 모든 지역의 유람에 나타난 관행이었지만, 유람객이 가장 많이 찾던 관동지방이 특히 심하였다. 조선시대의 관동유람은 누군가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즐거움이었고, 누군가에게는 평생의 고역 중 하나였다. -
조선 선비들의 로망, 관동유람- 기록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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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하기도 했다. 이황과 같은 대유학자의 글씨는 제자들이나 후대 사람들이 유람할 때 찾아보고, 마멸을 우려하여 극진히 보호하였다. 이황은 1564년 제자들을 데리고 청량산을 유람할 때 치원암(致遠庵) 벽에 친필로 이름을 썼다. 1601년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가 안동부사로 부임하여 청량산을 유람하다가 임진왜란 중 방치되어 퇴락한 치원암을 보았다. 유람 후 이황의 글씨를 보호하기 위해 치원암을 중수하고 글씨를 화판(畵板)으로 덮어 사람들이 더럽히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데 1670년경 이웃 고을의 수령이 이황의 글씨 다음에 자신의 이름을 나란히 써 놓자 지역의 선비들이 일제히 분노하여 그 수령을 퇴출해 버리려고 하였다. 그러자 그 수령이 두려워하여 다시 가서 자신의 이름을 깎아 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유람객들이 유람 장소에 각자를 남기는 것은 후대의 표식으로 삼기 위함이었다. 인적이 드물고 험한 산중에 각자가 있는 것은 사람이 그곳을 올라다닐 수 있다는 증표였다. 박지원은 국내의 산들을 유람하면서 외지고 깊숙한 곳에 이를 때마다 세상 사람들이 오지 못한 곳을 자신만이 왔다고 자부하였으나 그런 곳마다 ‘김홍연(金弘淵)’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어 화가 치밀어 오른다고 했다. 그러나 유람 중 산중의 험준한 바위를 딛고 두려운 곳에 오르면서 돌아가지 못할까 떨다가도 ‘김홍연’이란 각자를 발견하면 도리어, 마치 위험하고 곤경에 처했을 때 옛 친구를 만난 듯 기쁜 마음이 들어 힘을 내어 오르게 된다고 했다. 박지원이 말한 김홍연이란 사람은 험난한 곳을 가리지 않고 유람했고, 가는 곳마다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조선시대에는 김홍연과 같이 자신의 이름 새기기를 매우 좋아하는 호사가들이 있었다. 조선후기의 문인 정식이 그러한 인물이었다. 정식은 일찍이 과거에 뜻을 버리고 산수를 유람하다가 만년에 지리산 덕산(德山)으로 들어가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은거하였다. 정식은 수석의 아름다움을 즐기고, 냇가와 조그마한 바위라도 눈을 둘 만한 곳이 있으면 반드시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고 한다. 반면, 어당(峿堂) 이상수(李象秀, 1820-1882)는 선비들이 금강산에 너도나도 제명한 것을 보고, 불멸의 명성을 추구하는 데서 기인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름을 각자하는 것으로 명성을 얻을 수 없으므로 내면의 성찰이 있어야 함을 촉구하며, 이름 새기는 것을 비판하기도 했다. 【사진 25】 구룡폭포의 ‘미륵불(彌勒佛)’ 각자 사진, 일제강점기, 강원도DMZ박물관 유람객의 글씨를 돌에 새기는 작업은 주로 석공(石工)이 담당했고, 승려가 담당하기도 했다. 글씨를 전문으로 새기는 승려를 ‘각승(刻僧)’이라 했다. 각자는 현지의 돌 위에 유람객이 붓으로 직접 쓰거나 종이에 써 준 글을 석공에게 주어 새기게 했다. 절벽이나 위험한 곳에 새겨진 대형 글씨는 유람객이 종이에 쓴 것을 석공이나 각승이 받아다가 새긴 것이다. 특히 절벽에 대형 글씨를 새기려면 밧줄을 타고 내려가서 작업해야 했으므로 고난도 기술과 오랜 시간이 필요했고, 목숨을 건 위험한 일이었다. 금강산 구룡폭포 암벽에 구한말의 서화가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 1868-1933)이 쓴 ‘미륵불(彌勒佛)’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그 크기가 전국적이다. 각자는 금강산 유점사의 승려가 밧줄에 의지하여 3년에 걸쳐 새긴 것으로 전한다. 【사진 25】의 ‘미륵불’ 글씨는 그 틈에 흰 석회를 발라 흰색으로 보이긴 하나, 조선시대 각자 대부분은 인주(印朱)를 발라 시각적으로 눈에 잘 띄게 하는 효과를 주었다. 조선시대 유람 기록에는 붉은색 글씨로 표현하고 있는 각자들이 많이 나타난다. 현존하는 각자는 시간이 오래 지나 인주가 지워져서 붉은색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다. 경상남도 거창군의 명승인 수승대(搜勝臺)에는 아직도 인주가 지워지지 않은 각자가 있다. 돌에 글을 새기는 것은 기술과 시간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유람에 석공을 대동하지 않고서는 유람 중 즉시 새기기는 어려웠다. 대부분 석공이나 각승을 시켜 후일에 새기도록 했다. 윤증이 1662년 금강산 비로봉 정상에 올랐을 때, 동행한 승려가 후일 그의 이름을 새겨 주기로 약속했으나 이를 지키지 않았다. 문인 권구(權絿, 1658-1731)가 윤증에게 금강산 유람 계획을 밝히자, 윤증은 비로봉에 오르거든 자신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지 확인해 볼 것을 부탁했다. 권구는 1710년경 금강산 유람을 다녀온 후 윤증이 금강산에 남긴 자취를 일일이 기록해 보내 주면서 비로봉에 새겨진 이름 가운데 윤증과 함께 가지도 않은 백부의 이름만 새겨져 있고, 윤증의 이름이 없다고 하였다. 승려가 윤증에게 이름을 새겨 주기로 한 약속을 어긴 것이다. 윤증의 백부 이름은 다른 사람이 새겨 넣은 것이다. 선비들이 바위에 각자한 것은 그곳의 지명, 그리고 시와 인명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문양이나 그림을 새겨 넣기도 했다. 현 강원도 화천군에 김수증이 농수정사(籠水精舍)를 짓고 은거한 화음동정사지(華陰洞精舍址)가 있는데, 김수증은 이곳을 수시로 거닐며, 바위에 태극도(太極圖)‧팔괘도(八卦圖)‧하도낙서(河圖洛書)와 같은 기하학적 문양을 새겨 놓았다. 그리고 동해시 무릉계곡 반석에는 지역의 금란계원(金蘭契員)들과 향란계원(香蘭契員)들이 유람하며 계원 명단을 새기고 그 위에 계를 상징하는 난초를 새겨놓기도 한다. 【사진 26】 화천 화음동정사지 문양, 이상균 【사진 27】 동해 무릉계의 난초 각화, 이상균 【사진 28】 강릉 경포대의 기문 현판, 이상균 조선 선비들이 유람 처에 자신의 이름과 글을 남기고자 한 각자의 흔적은 누정기(樓亭記)에서도 나타난다. 유람 장소로 명성이 있는 명승지에는 누정이 상존한다. 관동팔경도 모두 누정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누정은 주로 주인의 사색‧글쓰기‧강학 등에 사용되었고, 손님과 교유가 이루어지는 접빈(接賓)의 공간이었다. 특히 가장 경관이 좋은 곳의 중심에 위치하면서 주변 자연경관을 비롯한 다양한 볼거리를 끌어모으는 구심점 역할을 했으므로 유람객들은 누정에 올라 주변 풍광을 감상하며, 그곳의 유람이 불러일으키는 감회를 담은 시나 기문(記文)을 지었다. 선비들은 유람 중 누정을 찾아 그 누정 자체를 문학작품의 주요 소재로 삼았다. 그러므로 유람하고 남긴 시 등의 문학작품 중에는 누정과 관련된 것이 많이 남아 있다. 유명한 인사들이 지은 시나 기문은 지역에서 현판(懸板)으로 새겨 걸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누정에 다녀간 유람객이 많아지고, 그들이 지은 기문을 새긴 현판도 점점 늘어났다. 누정의 기문을 짓고, 새겨 거는 것은 근본적으로 선비들의 문예 활동에 기인한 것이지만, 지역의 누정에 걸린 외부 유명 인사의 기문 대부분은, 그 인사가 유람을 와서 남겨 놓은 것이다. 관동팔경 중 강릉의 경포대와 삼척의 죽서루는 누정 문학의 정점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곳이며, 이곳에는 당대 걸출한 선비들이 유람하며 읊었던 무수한 시문이 현판으로 남아 있다. 조선의 선비들은 선배 학자에 대한 추모, 명산에 대한 숭모 의식, 유람을 통해 발현한 기상 표현 등 다양한 이유로 전국 도처에 자신의 이름과 글을 새겼다. 이러한 풍조는 유람의 유행과 함께 더욱 확산하였다. 이들의 각자나 기문들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유람이 남겨놓은 인공의 문화 흔적으로 평가받으며, 앞으로도 불후의 징표로 남아 전해질 것이다. 조선의 선비들이 누구 할 것 없이 자연 속에 자신의 이름과 글줄을 새긴 것은, 불멸의 명성을 남기려는 만용보다는, 이렇게 해서라도 언젠가 장구한 세월의 무심함 속에 한 줌의 티끌로 사라져버리게 될 자신의 흔적을 산수 자연 속에 영원히 남겨 기리고픈 마음에서가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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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밝히고 있다. 이황이 1549년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소백산을 유람하고 지은 「유소백산록(遊小白山錄)」에, 유람을 기록으로 남기는 이유를 비교적 소상히 밝히고 있다. 유람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후대 유람객에게 큰 도움이 되고, 다른 사람이 기록을 남겼다 하더라도 각자의 느낀 바가 다르므로 그 감흥을 다시 기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황은 소백산 유람에 나서기 전, 먼저 주세붕의 소백산 유람 기록을 구해 읽고 감흥을 얻었고, 소백산 유람에 참고하였다. 그러면서 주세붕 이후 여러 선비가 소백산을 유람했지만,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것을 비판했다. 빼어난 산의 명성을 알리고 참다운 감상을 위해서는 반드시 유람 기록을 남겨야 함을 피력했다. 후대에 이황 자신의 글을 보는 사람의 감흥이, 자신이 주세붕의 유람 기록을 읽고 느낀 감흥과 같기를 바라고 있다. 유람한 선비들은 이황과 같이 자신의 유람 기록을 후대 사람이 읽을 것을 염두에 두었다. 양대박은 1572년 금강산을 유람하고 「금강산기행록」을 남겼다. 이를 기록한 것은 금강산이 한양에서 멀리 떨어져 사람들이 자주 가지 못하므로, 뜻이 있으면서도 유람하지 못한 자를 깨우쳐 주기 위해서였다. 자신의 금강산 유람 여정과 감상을 기록으로 남겨 후대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는 뜻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후에 자신의 유람 기록을 읽을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쓴 것이다. 당시 선대의 유람 기록은 유람에 대한 사전정보 습득에 매우 유용한 지침서 구실을 하였다. 그러므로 선비들은 유람에 나서기 전, 선대의 기록을 통해 유람 정보를 습득하고, 자신 또한 유람을 기록으로 남겨 후대 사람이 길잡이로 삼을 수 있도록 했다. 특히 유람 장소로 가장 흥행을 이끌었던 금강산과 관동팔경에 대해서는 자주 애독되던 선대의 유람 기록들이 있었다. 고려시대 이곡의 기록과 조선시대 이원(李黿, ?-1504)‧성제원(成悌元, 1506-1559)‧홍인우‧양대박의 기록 등이 베스트셀러였다. 양대박은 금강산 유람 전 이곡의 「동유기」를 사전에 읽어 참고했고, 관동을 유람한 윤휴는 이원의 「유금강록(遊金剛錄)」을 읽고 유람에 나선다. 유가적 소양을 가진 선비들의 유람은 학문수양의 목적으로 행해진 경우가 많았으므로, 유람 후 자신의 학문을 성찰하고 반성하는 자료로 삼기 위해 유람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공자가 태산에 대해, 주자가 남악에 대해 학문의 깊이를 발휘한 이유를 유람을 통해 깨달았다는 것이다. 공자와 주자에 비하면 유람에서 깨달은 바는 미미하지만, 유람의 전말을 기록하여 보관하고, 깨달은 바를 힘쓰고자 했다. 또 벗들과의 유람에서 수많은 시를 짓기도 하는데, 시에 대해 더불어 토론하고 연구하지 못한 반성으로 유람 기록을 남기고, 스스로 책망하고자 하는 자료로 삼기도 한다. 지금껏 살핀 많은 이유들 외에 조선 선비들이 유람 기록을 남긴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을 곁에 두어 와유의 자료로 삼기 위함이었다. 훗날 자신이 다시 보며 와유로 즐길 것에 대비하고, 다른 사람들의 와유를 위해 남겨 두고자 했다. 당시는 교통편이 좋지 않아 유람이 쉽지 않았다. 원거리 유람의 경우 한 번 하고 나면 언제 다시 할 수 있을지 기약이 없었다. 그러므로 염원했던 유람을 이루면 그 기억을 잊지 않고 간직하기 위해 기록으로 남겨 두고자 했다. 와유를 위해 기록해 두었다가 시간이 없거나 노년에 거동이 불편할 때 다시 꺼내 보며 유람 때의 감흥을 오래도록 느껴 보고자 한 것이다. 이산해가 평해에 유배되었을 때 선암사(仙巖寺)를 유람한 적이 있는데, 훗날 늙고 병들어 세속에 묻혀 살다 보면 다시 와서 유람하기 쉽지 않을 듯하고, 오랜 시간이 지나면 기억에 잊힐까 염려하여 이때의 유람을 기록으로 남겼다. 성제원은 1531년 금강산을 유람하면서 평생 품었던 장대한 뜻을 온전히 이루지 못한 것에 아쉬워하며, 유람의 내용을 기록으로 남겨 훗날 감흥을 일으키는 자료로 삼았다. 신익성도 자신이 관동을 유람한 자취가 없어질까 하여 유람을 기록으로 남겨 훗날 와유의 자료로 삼는다. 선비들은 자신이 직접 유람을 가지 못하면 유람을 떠나는 이에게 산수의 풍광과 여정을 기록해 줄 것을 부탁한다. 윤증은 손자가 장차 유람하려고 하자 편지를 보내, 와유의 자료로 삼을 수 있도록 날마다 유람 내용을 기록해 놓았다가 가져다줄 것을 주문했다. 이덕무도 박제가가 장차 관동유람을 떠나려 하자 경치와 유적을 잘 기록하여 자신으로 하여 와유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다른 이의 유람 기록을 통해 산수에서 노니는 흥취를 대리 만족하고자 했다. 여러 사정으로 유람하지 못할 때는 자신이 남겨 놓은 기록이나 다른 이의 유람 기록을 읽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 것이다. 【사진 30】 『와유록』,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조선 선비들은 산수에 대한 애착이 강했으므로 산수 유람 기록은 문예 취향의 독서물로 애용되었다. 역시 와유를 즐기기 위함이었다. 한 자리에서 여러 산수를 한꺼번에 즐기기 위해 선대의 산수 유람 기록을 선별하여 『와유록(臥遊錄)』을 편찬하기도 하고, 자신의 유람 기록을 모아 책으로 만들어 보기도 하였다. 현전하지는 않지만, 조선의 산수를 대상으로 한 최초의 『와유록』은 1664년 김수증이 편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로도 선비들의 문집류에 『와유록』에 대한 기록이 간간이 나타난다. 김창협은 1671년 금강산을 유람할 때 『와유록』을 지참하였고, 1662년 금강산을 유람한 윤증도 『와유록』을 보았다. 박세당은 지인인 회은(晦隱) 남학명(南鶴鳴, 1654-1722)이 편찬한 『와유록』에 서문을 써 주면서 “이 『와유록』을 읽고, 노쇠하여 유람하지 못한 숙원을 풀었다”고 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극재(克齋) 신익황(申益愰, 1672-1722)은 『동국승경와유록(東國勝境臥遊錄)』을 엮었고, 잠옹(潛翁) 남하행(南夏行, 1697-1781)은 평소 산수 유람을 좋아했으나 산천을 두루 다닐 수 없어 선배들의 유람 기록을 모아 『와유록』을 만들어 읽었다고 하였다. 현전하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와유록』은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 『와유록』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본 『와유록』, 동국대학교 소장본 『와유록』이 있다. 이 『와유록』 속에는 관동산수의 유람 기록이 가장 많다. 담허재(澹虛齋) 김지백(金之白, 1623-1671)은 수많은 사람이 자신보다 먼저 지리산을 유람하며 유람록을 지었고, 세상에 유행한 것이 참으로 많다고 했다. 지리산만을 대상으로 하더라도 17세기에는 많은 유람 기록이 출현하면서 사람들이 애독하였다. 1748년 지리산을 유람한 명암(冥菴) 이주대(李柱大, 1689-1755)도 산을 유람하고 기록을 남기는 것은 오래전부터 있어 온 일이라 하고, 이 같은 일은 훗날 와유의 도구로 삼거나 유람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남기려 한 것이라 하였다. 조선 선비들은 유람 내용을 기록하여 후대에 전하는 것을 관행시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현재 국내 산수를 대상으로 한 조선 선비들의 유람 기록은 방대하게 남아 있다. 필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약 1,400여 편에 달하는데, 유람 장소로 유명했던 주요 산들로만 놓고 보면 금강산이 140여 편으로, 수적이나 내용의 분량상으로 단연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한다. 선대의 유람 기록은 그 소재가 되는 유람 장소가 더욱 홍보되는 계기가 되었고, 유람의 관심 또한 촉진시켰다. 사숙재(私淑齋)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은 이곡의 「동유기」와 안축의 『관동와주』를 보고, 예나 지금의 시인묵객이 반드시 가서 유람하고자 하는 관동을 직접 유람하기를 열망하였다. 양대박도 금강산을 유람하기 전 이곡의 「동유기」를 보고, 금강산에 오르는 것을 평생의 소원으로 간직했다. 선비들은 유람의 여정을 글로 기록하는 것에 더하여 유람 중 현장에서 마주한 경치를 본인이 직접 그리거나 대동한 화가를 통해 그리게 하였다. 또는 화가들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직접 유람에 나서기도 한다. 이러한 그림을 기행사경도라 하는데, 그림의 소재가 유람 장소의 산수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와 대동소이하다. 실경산수화나 진경산수화는 그림의 소재를 접하는 장소에서 직접 그리기도 하고, 자신이 봤던 산수를 회상하며 그리기도 한다. 조선을 대표하는 화가인 정선을 필두로 유행하였던 진경산수화는 단순히 경치의 외형묘사에 그친 것이 아니라 회화적 재구성을 통하여 경관에서 풍기는 가흥과 정취까지 화폭에 표현하고자 한 특색이 있다. 이러한 정선의 화풍은 조선 화가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형상의 사실에 기초하면서 정신까지 표출하는 전신사조(傳神寫照)의 영향이 반영된 것이다. 이 화론(畫論)은 중국 인물화의 최고로 불리는 동진(東晋) 고개지(顧愷之)의 초상화 이론을 바탕으로 한 것인데, 조선 화가들은 초상화뿐만 아니라 모든 그림에 반영하고자 했다. 이러한 점에서 기행사경도는 현장감 있는 기록성이 더 강조된다는 일면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종래 중국의 그림을 베껴 그리는 관념 산수에서 벗어나 조선에 실재하는 산수를 소재로 한 진경산수의 전통이 정선에 의해 구체적으로 발전되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정선이 활동하던 시기 이전에도 국내의 실경을 대상으로 한 기행사경도류의 제작이 있었다. 고려의 화원 이녕(李寧)이 「예성강도(禮成江圖)」를 그린 것이나, 「송도팔경도(松都八景圖)」를 그린 것이 고려시대부터 국내의 실경을 소재로 한 그림이 그려졌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국내의 여러 실경 중 금강산을 대상으로 한 그림은 고려시대부터 그려시기 시작했다. 양촌(陽村) 권근(權近, 1352-1409)이 “내가 어릴 적, 일찍이 듣건대 천하에 구경하러 오기 원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나 보지 못함을 한탄하여 그림을 걸어 놓고 예찬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하니 금강산을 향하여 그리워함이 이와 같다”라고 한 것을 보면, 고려 말에도 금강산 그림이 그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금강산은 고려시대부터 국외에까지 그 명성이 알려졌고, 유람을 소망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금강산 유람의 염원을 그림으로 대신하고자 한 것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명나라 사신들이 오면 금강산 유람을 직접 가거나 혹은 가기를 원했고, 때로는 「금강산도」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1431년 명나라 사신 창성(昌盛)이 세종에게 금강산 그림을 요구하자 내려 주었고, 1455년에는 사신 정통(鄭通)이 금강산 그림을 요청하여 단종(端宗)이 화공을 시켜 그려 오게 하였다. 세조는 1468년 화원 배련(裵連)을 금강산에 보내 그 형상을 그려서 오도록 했고, 예종(睿宗)은 1469년 명나라 사신 최안(崔安)‧정동(鄭同)에게 「금강내산도」를 각기 한 폭씩 내려 주었다. 명나라 사신들이 요구한 「금강산도」가 비록 공리적 목적으로 그려졌다고는 하나, 당시의 화원들이 금강산을 직접 방문하여 그림을 그리고 있어 어느 정도 기행사경의 형식을 갖춘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조선의 선비들이 그림에 남긴 제화시(題畫詩)들이 상당수 남아 있다. 삼탄(三灘) 이승소(李承召, 1422-1484)는 「박연폭포도」,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 1485-1541)은 「신륵강산도(神勒江山圖)」, 이황은 「유경포대도(遊鏡浦臺圖)」에 제화시를 남겼다. 낙파(駱坡) 이경윤(李慶胤, 1545-?)은 금강산을 유람하고, 「제학림수유금강축(題鶴林守遊金剛軸)」을 남겼는데, 양송당(養松堂) 김제(金禔, 1524-1593)가 산형을 그리고 이산해와 노수신이 시를 지었다. 김제는 1537년 부친인 희락당(希樂堂) 김안로(金安老, 1481-1537)가 권력을 남용하다 죽음을 맞이하자 과거와 벼슬길이 막혀 독서와 서화로 일생을 보낸 인물인데, 그 시기 명성이 높던 화가이기도 했다. 김제가 그린 「유금강축」은 현전하지 않지만, 화원뿐만 아니라 문인화가에 의해서도 기행사경도가 그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557년 강원도관찰사 정암(正菴) 박민헌(朴民獻, 1516-1586)이 강릉을 유람하다가 기묘사화 때의 명현이었던 강호(江湖) 박공달(朴公達, 1470-1552)이 기거하던 쌍한정(雙閒亭)의 풍광을 화가를 시켜 그려 가기도 한다. 정선을 필두로 하여 진경산수화가 발달하는 조선후기 이전에도 국내의 실경을 대상으로 한 기행사경도류의 그림 제작은 꾸준히 있었으나, 기행사경도 제작이 급증하는 시기는 17세기 이후부터이다. 유람의 붐이 조성되면서 산수유기의 작성은 물론, 기행사경도 제작이 함께 급증하기 시작한다. 그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유람이다. 정선‧김홍도 등의 전문 화가들은 진경을 그리기 위한 목적으로 유람하기도 했지만, 그림 기술이 없는 선비들은 유람에 화공을 대동하여 그림을 그려왔다. 1603년 금강산을 유람한 이정귀는 표응현(表應賢)이라는 화공을 대동하여 자신이 유람한 금강산을 화폭에 담았다. 1603년 흡곡현령 시절 금강산을 유람했던 한호도, 유람을 기념하기 위해서 화공을 시켜 병풍을 제작하였다. 이 사실은 최립의 『간이집(簡易集)』에 실려 있는 「관동승상록발(關東勝賞錄跋)」에 기록되어 있다. 한호는 간성군수로 재직하고 있던 최립과 함께 금강산을 유람하였다. 여기서 최립은 몸소 체험하는 유람을 ‘쾌(快, 즐거움)’라 하고, 이를 그림으로 소장하여 간편하게 산수를 늘 가까이 두고 즐기는 것을 ‘요(要, 요긴하다)’라 설명했다. 최립은 한호가 ‘쾌’와 ‘요’를 겸비한 인사라고 칭찬한 것이다. 이는 선비들이 산수의 직접 체험인 유람과 간접 체험인 와유를 함께 중요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최립은 한호가 금강산을 직접 유람한 후 기행사경도로 남겨 소장하고, 훗날 와유의 자료로 삼음으로써 직간접적인 체험 모두를 즐길 줄 앎을 칭찬하고 있다. 이정귀‧한호와 같은 선비들은 화공을 대동하여 기행사경도를 그렸지만, 창강(滄江) 조속(趙涑, 1595-1668)과 같은 문인화가는 오대산‧금강산‧삼일포를 유람하며 자신이 직접 그림을 그렸다. 17세기에는 조선에서 유행한 소상팔경 시화(詩畵)로 인해 국내의 팔경도가 본격적으로 그려졌다. 이식은 화가 이신흠(李信欽)에게 현 양평군의 동계(東溪)팔경 병풍을 그려 달라고 청하였고, 백아곡(白鵶谷) 경치가 아름다워 8곳을 골라 팔경도를 만들어 감상하였다.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은 1674년 함경도의 「북관십경도(北關十景圖)」와 「함흥십경도(咸興十景圖)」에 서문을 남기고 있다. 팔경이 시문학에서 주로 다루어져 오다가 기행사경도식 팔경도가 제작되었고, 관동팔경이 그림의 소재로 가장 많이 애용되었다. 【그림 41】 작자미상, 〈관동팔경팔폭병풍〉, 국립민속박물관 기행사경도 제작이 점점 늘어나는 것은 산수를 감상하고 즐기는 방식에 그림 활용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그림은 선비들에게 애호되는 감상품이었고, 산수화는 와유를 가장 손쉽게 즐길 수 있어 산수유기와 함께 선비들이 선호하는 와유의 수단이었다. 조선 전기의 선비들이 주로 와유를 즐겼던 그림은 중국의 「소상팔경도」나 「서호도(西湖圖)」 등이었다. 선비들은 중국의 산수에 폭넓은 관심을 보였고, 중국을 가 보지 못하는 대신 그 경치를 베껴 그린 산수화를 보고 와유를 즐겼다. 그러나 중국의 산수화를 즐기는 것은 어디까지나 중국 산수의 관심과 동경이었고, 조선의 경치에 대한 흥취를 대신하지는 못했다. 그러므로 조선의 풍광을 와유하고자 할 때는 조선을 소재로 그린 그림으로 즐겼다. 이러한 현상은 종래 선비들이 관념 산수화를 와유의 도구로 사용하다가 기행사경도를 제작해 와유의 자료로 삼고자 하는 풍조를 만들어 냈다. 유람의 확산에 따른 와유 체험이 유행하고, 이에 대한 도구로 기행사경도의 제작도 활발히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글로만 유람 기록을 남기던 방식에 그림이 더해지면서 18세기부터 기행사경이 본격적으로 유행한다. 중국에서는 명나라 때 산수 유람의 유행과 동시에 기행사경도의 제작이 증가하고, 유람의 욕구를 대체하는 와유물이 부각되었다. 특히 명나라 때 소주(蘇州)에서 활동한 문인화가 집단인 오파(吳派)의 심주(沈周)와 문징명(文徵明)에 의한 소주의 기행사경도 제작은 중국 실경산수화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고, 문인 산수화의 새로운 영역으로 정착되었다. 기행사경도는 중국 명‧청대 화단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조선에서도 명나라의 그림 풍조에 관심을 보였고, 명나라의 이러한 화풍은 18세기 조선의 기행사경도 제작의 확산에도 영향을 주었다. 또 선비들의 기유문예 취미 현상도 기행사경도 제작 증가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정선의 관동지방 기행사경은 후대 화가들의 기행사경을 촉진시킨다. 정선은 1711‧1712‧1747년 3회에 걸쳐 금강산과 관동지역을 유람하며 사경하였다. 1711년 《신묘년풍악도첩》과 1747년의 『해악전신첩』이 현존하는데, 이 그림은 18세기 기행사경도의 대표적인 작품 유형으로 자리 잡았다. 정선의 지기인 이병연은 정선의 「달성원조도(達成遠眺圖)」 발문에 “시인의 사경(寫景)과 화가의 사경이 유사하다”라고 하여 시와 그림이 사물을 묘사하는 의미가 비슷하다는 것을 피력하였다. 글로 남기던 유람의 가흥과 정취가 그림으로 함께 표현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병연은 정선과 함께 김창흡의 문하에서 수학한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이병연은 당시 시로써 금강산을 표현해 낸 대표적인 선비로 칭송받았고, 정선은 그림으로 표현해 낸 최고의 화가로 인정받았다. 두 인물은 당시 조선의 경치를 시와 그림으로 가장 잘 표현해 낸 각 분야의 대가들이었다. 어디에서 이곳 물의 근원을 물을 수 있으랴 / 欲從何處問源頭 깊고 얕은 물 서로 통하며 위에서 아래로 흐르네 / 深淺相通上下求 삐죽삐죽 기울어진 봉우리는 빈 땅을 다투고 / 擾擾側峯爭隙地 푸르게 빗긴 산등성이 가을 하늘에 닿았네 / 蒼蒼橫嶺界高秋 골짜기가 골짜기 속으로 열려 끝을 알 수 없고 / 洞開洞裏不窮路 못물이 못 가운데로 떨어져 고요히 흐를 일 없구나 / 潭落潭中無靜流 해 질 무렵 구름 밖에서 옥 악기 소리 들리는 듯 / 薄暮如聞雲外磬 숲속이 아득하여 홀연히 시름이 이는구나 / 中林漠漠忽生愁 이병연, 『사천시초(槎川詩抄)』 권상, 시 「만폭동(萬瀑洞)」 【그림 42】 정선, 〈금강전도〉, 1734년, 삼성미술관리움(사진, 문화재청) 【그림 43】 정선, 《신묘년풍악도첩》 중 〈금강내산총도〉, 1711년, 국립중앙박물관 정선의 그림은 최고 문인들의 시문과 나란히 비견될만한 가치를 인정받았다. 정선은 선비들에게 가장 인기 높은 화가였다. 금강산 화첩을 여러 차례 그린 것은 선비들의 요구에 부응한 것이기도 했다. 1712년 지기인 이병연과 함께 금강산을 유람했고, 금강산 곳곳의 명소를 담아낸 산수화를 그려 화첩으로 만들었다. 이 화첩에 이병연의 제화시와 스승 김창흡의 제화시를 부쳤다. 정선의 화첩은 유람을 즐긴 선비들이 훗날 와유를 즐기기 위해 그려졌다. 창하(蒼霞) 원경하(元景夏, 1698-1761)는 정선의 그림을 보고 “김창흡의 시와 정선의 그림을 얻어 명산을 와유하니, 진실로 고인이 부럽지 않다”고 하면서 와유의 흥취를 즐기고 있다. 이병연은 시나 그림이 사경을 표현하는 작품으로 유사하다 보고 있지만, 실경을 보지 못한 사람이 글을 읽었을 때는 풍광을 상상하는 것에 그치므로 현장의 실감을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기행사경도는 산수유기가 표현하지 못하는 시각적인 효과를 화면에 담아냄으로써 산수유기와 함께 와유 체험의 도구로 수요가 증가하게 된 것이다. 기행사경도를 많이 그렸던 강세황은 본인이 금강산을 유람하고 작성한 「유금강산기」에서, 산수유기도 사경의 좋은 문예물이지만, 회화가 사물의 실제 모습을 만분지일이라도 잘 표현할 수 있어 후일 와유를 위한 자료로 적합하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금강산이 생긴 이래 제대로 그려낸 사람이 없었는데, 김홍도가 기행사경한 금강산 그림을 보고, 수려하고 섬세한 것이 교묘한 모양을 다하여 우리나라에 전에 없던 신필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관동의 경치는 정선을 필두로 심사정(沈師正, 1707-1769)‧허필(許佖, 1709-1768)‧이인상(李麟祥, 1710-1760)‧김윤겸(金允謙, 1711-1775)‧강세황‧김응환‧정수영(鄭遂榮, 1743-1831)‧김홍도‧이인문(李寅文, 1745-1824)‧이방운(李昉運, 1761-1815)‧조정규(趙廷奎, 1791-?)‧김하종(金夏鍾, 1793-1875)‧엄치욱(嚴致郁, 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 등 17-19세기를 대표하는 화가들이 화폭에 담아 갔다. 강세황은 정선과 심사정의 그림을 평하면서, 정선은 평소에 익힌 필법을 가지고 마음대로 휘둘렀기 때문에 돌 모양과 봉우리 형태를 막론하고 열마준법(裂麻皴法, 삼베가 세로로 찢어진 생김의 필법)으로 일관하여 난사(亂寫)하였으므로 진경을 그렸다고 논하기는 부족함이 있다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좀 더 사실적인 김홍도의 금강산 그림을 높이 평가하였다. 김홍도는 정선에게 부족했던 현장의 사실성을 보완하여 기행사경도의 자기 양식을 완성하였다는 것이다. 【사진 31】 김홍도‧김응환의 해운정과 오죽헌 방문기록(좌: 『해운정역방록』, 우: 『심헌록』) 김홍도는 1788년 정조의 명에 의해서 금강산을 비롯한 관동지역을 기행사경하였다. 도화서 화원 김응환이 함께하였다. 서화가 조희룡(趙熙龍, 1789-1866)의 『호산외사(壺山外史)』에 의하면, 정조는 이때 관동 각 고을에 명을 하달하여 기행사경을 떠나는 김홍도 일행을 각별하게 대접하라고 지시하였다고 한다. 정조는 김홍도의 그림을 통해 자신이 직접 가 보지 못한 금강산을 비롯한 관동지역의 명승을 와유로 즐기고자 한 것이다. 김홍도와 김응환이 강릉의 경포대를 사경 할 때 이이가 출생한 오죽헌과 강릉 출신 문신인 어촌(漁村) 심언광(沈彦光, 1487-1540)이 경포호변에 건립한 해운정(海雲亭)을 방문하고, 이곳 방명록인 오죽헌 『심헌록(尋軒錄)』과 『해운정역방록(海雲亭歷訪錄)』에 각각 이름을 남긴 것이 지금도 전하고 있다. 【그림 44】 전 김홍도필, 《해동명산도첩》 중 〈와선대〉, 조선후기, 국립중앙박물관 【그림 45】 전 김홍도필, 《해동명산도첩》 중 〈해금강〉, 조선후기, 국립중앙박물관 관동의 경치는 유람 온 선비들도 그려 가길 원했고, 유람하지 못한 이들은 그림을 구해 보고자 하였다. 특히 정선과 김홍도가 관동을 유람하며 기행사경을 한 후, 관동지역은 사경 장소로 크게 유명해져서 전국의 화원이 관동으로 오게 되었다. 현존하는 기행사경도 중 관동을 소재로 한 그림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신선의 세계로 불릴 만큼 정평이 나 있던 관동의 경치가 신필(神筆)의 경지를 지닌 두 화원의 붓끝으로 묘사되자 감상하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훌륭한 소재와 명인의 기예가 만나 사람들의 혜안을 자극하는 회화작품이 탄생하였고, 당시 사람들은 이 그림에 열광했다. 김홍도의 금강산 그림을 모사한 임모본(臨摹本)이 유행했고, 대형병풍에 정선의 금강산도가 과장하여 그려지기도 했다. 【그림 46】 작자미상, 〈금강산도십폭병풍〉, 조선후기, 국립중앙박물관 19세기에 접어들면, 유람하는 선비들이 직업 화가를 대동하고 기행사경도를 주문하는 사례가 더욱 빈번해진다. 이 시기 직업 화가로 동참한 인물들은 조정규‧엄치욱‧이재관(李在寬, 1783-1837)‧이인문‧김하종‧이방운 등이었다. 이들은 선비들의 유람에 동참하여 기행사경도를 주문받아 그렸다. 이광문(李光文, 1778-1838)‧이유원‧이풍익(李豊瀷, 1804-1887)‧안숙(安叔) 등과 같은 문인들은 유람에 나서면서 직업 화가들을 대동해 기행사경도를 제작하였다. 19세기 유람수요에 부응하여 기행사경도 제작이 더욱 활성화된 것이다. 기행사경도는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민화의 유행에 따라 특정 계층이 누리던 고급화된 그림에서 탈피하여 서민들의 수요에 부응하기 위한 민화풍의 다양한 표현으로 그려졌다. 조선후기 기행사경도는 회화의 한 장르로 크게 진작되었고, 기행사경을 유행시킨 산수의 중심에는 관동지역의 수려한 경관이 있었다. 【그림 47】 김하종, 《해산도첩》 중 〈가섭동〉, 1815년, 국립중앙박물관 【그림 48】 엄치욱, 〈구룡폭〉, 조선후기, 국립중앙박물관 -
조선시대 사람들의 더불어 살기, 향약- 기록자료
- 사회
의 접목은 일찍이 이황과 이이에 의해 시도되었다. 그들의 문인 집단도 주자 성리학의 실천이라는 측면에서, 제각기 유향소를 중심으로 향약을 시행하였다. 그 중에는 수령 재임 중 부임지에서 향약을 시행한 인사도 있다. 주현향약의 형태는 부임지의 특성과 해당 수령의 구상에 따라 다양하였는데, 여기서는 김세렴(金世濂, 1593-1646)과 이헌영(李𨯶永, 1837-1908)의 사례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김세렴은 퇴계 이황의 학통을 계승한 인사로서, 1632년(인조 10) 현풍현감(玄風縣監)으로 부임하였다. 이곳에서 김세렴은 퇴계향약을 계승한 ‘현풍현향약’을 제정하였다. 이 향약은 현풍의 별호를 따서 ‘포산향약(苞山鄕約)’ 또는 ‘포산약조(苞山約條)’라고도 불리는데, 그 내용은 이황의 문인인 김기(金圻, 1547-1603)의 향약과 거의 비슷하다. 현풍현향약의 조항은 기본적으로 주자증손여씨향약의 4대 강목을 따르고 있지만, 과실상규 조항은 퇴계향약처럼 극벌·중벌·하벌 및 기타 벌목으로만 구성하였다. 예속상교는 주자증손여씨향약의 예속향교 조항 중에서도 연장자를 섬기는 것과 이작(異爵), 즉 특별히 벼슬이 있는 자를 예우하는 규정을 인용해 놓았다. 환난상휼 조항은 후술할 ‘온계동계(溫溪洞契)’의 상호부조 규정을 따르고 있다. 현풍현향약에는 4대 강목 이외에도 향약의 조직 및 운영과 관련해 10개 조의 추가 규정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다음 조항이 주목된다. 하나. 나이와 덕망이 높은 사람을 추대하여 도약정으로 삼는다. … 덕행이 훌륭한 두 사람을 뽑아 부약정으로 삼되, 그 중에 하나는 향좌수(鄕座首)가 겸임한다. … 학행이 있는 사람 한 명을 정밀하게 잘 선택해 직월로 삼는다. 각면(各面)에는 약정 한 사람을 선택하여 정한다. … 각면의 하인(下人) 가운데 공손함이 있고 연로한 자 한 사람을 별도로 선택해 각면 향약소(鄕約所)의 이정(里正)이라 칭한다. 열 집에서 각각 한 사람을 내어 행수(行首)라 칭하고, 향약의 권유와 규검(糾檢)의 일을 맡긴다. 하나. 무거운 죄는 관사에 보고하고, 가벼운 죄는 태(笞) 20대를 한도로 논단한다. 태 30대 이상은 관의 결정에 따른다. 하나. 봄과 가을에 강신례를 행한다. 대·소·상·하인이 모두 모이되 품관이 하나의 청(廳)을 이루고, 서얼이 한 청을 이룬다. … 향리도 한 청을 이루며 … 하인도 한 청을 이루는데 하인은 남녀가 모두 모이되, 남자는 왼쪽, 여자는 오른쪽에 자리한다. 각기 수대로 좌정하여 예를 행하는데, 별도로 좌중에서 한 사람을 뽑아 향약 일편을 소리 내어 읽는다. 다만 4조는 우리말로 풀이해 주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들어서 환하게 깨달지 못하는 것이 없도록 한다. 함께 화목의 도리를 가르치고, 이어서 향음주의(鄕飮酒義)를 따라 술을 따라 올리며 실컷 다 논 후에 파한다. ―『동명집(東溟集)』, 「현풍현향약(玄風縣鄕約)」 中 현풍현향약의 대표는 도약정으로 나이가 많고 덕이 있는 자를 추천해서 뽑았다. 또한 덕행이 있는 자 두 사람을 부약정으로 삼았는데, 한 사람은 유향소의 수임(首任)인 좌수가 겸직하였다. 주현향약이 유향소 조직과 연계되는 양상을 보여 준다. 주현향약의 또 다른 특징 중 하나가 면리 조직을 적극 활용했다는 점이다. 조선 후기 중앙집권체제의 강화 속에 지방의 하위 행정 구조는 면리 체제로 정착하였다. 조선 전기까지 독자적인 치소(治所)와 향리를 갖추고 있던 향·소·부곡(鄕·所·部曲) 및 속현(屬縣)과 같은 지역이 면(面)과 리(里)로 재편된 것이다. 면리에는 각각 면임(面任)과 이임(里任)이 임명되어 부세(賦稅) 행정을 비롯해 각종 관령을 수행하였다. 그런 가운데 김세렴은 고을 단위의 교화 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면임·이임 조직과 별개로 면리 단위의 향약 조직을 구상하였던 것이다. 현풍현향약에서는 덕망과 학행이 있는 자를 면 단위 향약의 책임자인 약정으로 임명하였다. 약정은 사대부 계층에서 선발하였으며, 하인 중에서 나이가 많고 근면한 자 한 사람을 향약소 이정으로 뽑았다. 이정에게는 해당 면의 향약을 보좌하는 임부를 부여하였다. 또한 열 집마다 향약을 수행하는 행수를 뽑았는데, 이는 조선의 최말단 행정 체계인 오가작통(五家作統)의 통수(統首)와 견줄 수 있다. 주현향약의 임원 임명은 기본적으로 구성원 간의 추천으로 이루어졌으나, 최종 결정권은 수령이 가지고 있었다. 수령은 주현향약을 통해 행정뿐만 아니라 자치계통의 교화 체계까지 총괄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 원활한 지방 통치를 도모할 수 있었다. 한편, 현풍현향약에는 향촌에서 일어나는 죄목 중 그 죄질이 약한 것에 대한 처벌권이 부여되어 있다. 사소한 사건으로 관부의 행정이 번잡해질 수 있기에 일정 부분의 사법권을 향약 조직에게 양도한 것이다. 또한 봄과 가을에 행해지는 강신례 절차에서는 향촌 내 여러 신분 간의 위계질서를 확인할 수 있다. 사대부 계층인 품관에서부터, 서얼·향리, 그리고 하인에 이르기까지 앉는 자리와 예를 취하는 법을 달리하였다. 이러한 조항들은 현풍현 사대부의 지위 유지와 관련되어 있다. 지역 사대부들의 협조하에 주현향약을 안정적으로 시행하기 위하여, 사대부 계층의 권위를 인정하는 조항을 향약 규정에 명시한 것이다. 당시 경상도 지역의 명유였던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은 현풍현향약을 열람한 뒤, 발문(跋文)에다가 “이 향약 가운데의 절목(節目)은 성분(性分)과 직분(職分)에 벗어난 것이 없다"라고 평가하였다. 원활한 수령 통치를 위해서는 사대부 계층의 협조가 필요하였다. 그것은 사대부 주도의 안정적인 향촌 질서가 전제되어야지 가능하였는데, 현풍현향약은 그러한 관변적 의도가 잘 반영된 향약이다. 이처럼 ‘주자증손여씨향약 → 퇴계향약 → 김기향약·현풍현향약’으로 이어지는 향약의 전통은 퇴계학파를 계승한 여러 지역에서 제정되었다. 예컨대 밀양에서는 1648년 밀양부사(密陽府使) 강대수(姜大遂)가 유향소를 중심으로 주현향약인 이른바 ‘무자향약(戊子鄕約)’을 시행하였다. 강대수는 장현광의 문인으로서, 그가 제정한 무자향약은 현풍현향약의 조항과 거의 동일하다. 대구 부인동(夫仁洞)에서는 1739년(영조 15) 최흥원(崔興源)이 동약을 제정했는데, 그 역시 김기향약과 현풍현향약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주현향약은 고을 수령뿐만 아니라, 한 도의 장관인 관찰사가 시행하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경상도관찰사 이헌영의 향약 시행을 주목하고자 한다. 이헌영은 개항기 내외 관직을 두루 지내면서, 관직 생활 중의 주요 기록과 문서를 정리한 여러 편의 공무 일기를 남겼다. 그 중 「교번집략(嶠蕃集略)」은 1890년 12월부터 1893년 3월까지 경상도관찰사를 지내면서 작성한 일기이다. 여기에는 각 고을에 향약 시행을 지시하면서 작성한 여러 기록이 수록되어 있다. 1891년 경상도관찰사 이헌영은 직접 제정한 「향리약법(鄕里約法)」을 경상도 70여 고을에 배포하였는데, 그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언급이 있다. 대개 향약의 법은 주관(周官) 삼물(三物)·팔형(八刑)의 뜻에 근원하며, 송나라 남전 여씨의 조례에 있는 것이다. 주부자[주자]가 증손한 것은 대개 풍속을 더 낫게 고쳐, 세상을 좋게 하는데 있다. 이것보다 좋은 것이 없는 까닭에, 우리 열성조(列聖朝)에서 여러 차례 반시(頒示)하는 지시를 내렸고, 여러 선유(先儒) 또한 수행하는 노력을 많이 하였다. … 이곳을 평소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 칭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진실로 개탄스러움을 이길 수 없다. … 일찍이 여러 군(郡)을 맡을 때, 또한 이 법을 행하였는데 효과가 없지 아니하였으니 … 이에 참람하고 방자함을 무릅쓰고, 향약의 여러 조항 중 번잡한 것은 깎고 그 요점만 취해 수정한 다음, 향약장과 직월 및 여러 임원에게 하송하였으니, 반드시 한 고을의 좋은 선비를 택할 것이며, 응해서 거행하는 규정을 그들과 함께 잘 의논하여 좋은 방법을 강구할 것이다. … 만일 세속의 풍습에 길들어져 오활한 것으로 돌아가 별일 아닌 것으로 보고 지시를 잘 따르지 않는다면, 진실로 감영과 고을 간에 서로 믿는 뜻이 없어질 것이다. ―『교번집략(嶠蕃集略)』, 「향리약법서(鄕里約法序)」 中 위의 서문에는 향약 제정의 취지가 잘 드러난다. 이헌영은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기 전에 외직으로 부안현감·정주목사·의주부윤·영흥부사를 지냈는데, 부임지마다 어김없이 향약을 시행하였다.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경상도 여러 고을에서 시행할 향약을 만들었다. 이헌영 역시 이황이 그랬던 것처럼 향약의 유래를 『주례』에서 찾았다. 여기서 삼물(三物)과 팔형(八刑)은 각각 주나라 때 백성을 다스리는 세 가지 일과 여덟 가지 형벌을 뜻한다. 이러한 전통이 북송의 여씨향약, 남송 주자의 증손향약, 그리고 우리 조선에서 여러 명현이 제정한 향약으로 이어졌다고 하였다. 그러나 근래 향약의 전통이 단절되었고, 특히 경상도의 풍속이 예전과 같지 않다며, 각 고을에 향약 시행을 지시하고 있다. 서문 말미에는 감영과 고을 간의 신뢰를 강조해 놓았다. 이처럼 이헌영은 관찰사로서 원활한 지방 통치를 도모하고 개항기 새로운 문물이 유입되는 과정에서 전통적인 가치를 고수하기 위하여 향약을 시행하였다. 【그림 12-1】 경상도 비안현에 배포된 이헌영의 「향리약법」 【그림 12-1】 경상도 비안현에 배포된 이헌영의 「향리약법」 그런데 이헌영의 주현향약은 김세렴의 현풍현향약과 비교해 관부의 영향력이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이는 유향소의 기능 약화와 무관하지 않다. 16-17세기 사대부 계층의 향촌 지배력 강화와 함께 유향소의 권위도 높아졌다. 유향소가 향약을 시행하는 장소로 주목받았으며, 그 구성원은 향대부에 비견되기도 했다. 그러나 18-19세기를 거치면서 유향소는 향권을 다투는 자리로 변질되어 갔다. 특히 수령권의 강화는 유향소의 자치 기능을 제한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치 기능보다 수령 행정을 보조하는 기능이 부각되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어느 시기부터 유향소는 향청(鄕廳)으로 불려졌다. 행정적 기능이 강화되면서 유향소는 아전들의 기구인 질청[作廳]과 비슷한 성격의 기구로 인식된 것이다. 이헌영도 이러한 점을 알고 있었기에 유향소보다는 관부가 주도하는 향약 조직을 구상하였다. 1891년 이헌영이 반포한 「향리약법」의 〈입약장(立約章)〉에는 향약의 직임과 임무 등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도약장(都約長): 해당 고을의 수령 도직월(都直月): 향교 재임(齋任) 중에서 임명, 각면의 약속을 규찰 면약장(面約長): 대중이 나이·덕행·학행이 있는 자를 추천, 면내의 약속을 관장 면직월(面直月): 근면하고 공정한 자를 임명, 여러 규약의 실무를 주관 우선 「향리약법」에서 향약을 주관하는 자는 다름 아닌 각 고을의 수령이다. 향약이 제대로 시행될 수 있도록 수령이 도약장을 맡게 했다. 그리고 부임은 향교의 임원인 재임, 즉 교임(校任)이 맡도록 하였다. 이는 앞서 현풍현향약에서 유향소 좌수를 향약 임원으로 임명한 것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나아가 〈입약장〉에서는 세 개의 장부를 둔다고 하였다. 그것은 각각 향약에 들어오기를 원하는 ‘자원입약자(自願入約者)’ 명부, 행실이 바른 ‘덕업가관자(德業可觀者)’ 명부, 과실을 저지른 ‘과실가규자(過失可規者)’ 명부로서, 주자증손여씨향약에서 규정한 명부·선적·악적으로 구성된 세 개의 장부와 같다. 그런데 선적에 해당하는 ‘덕업가관자’ 명부는 향촌의 여러 임원을 선발하는 기준이 되었다. 즉, 여기에 입록된 인사 중에서 면약의 약장과 직월을 비롯해 향교의 교임·재임 및 면임과 이임까지 선발하게 했던 것이다. 또한 「향리약법」에서는 면 단위 향약을 지시하였다. 각 면에서 명망 있는 자를 대중으로부터 추천받아 면약장으로 삼게 하였다. 「향리약법」에 수록된 〈면약의주(面約儀註)〉는 면 단위로 거행되는 집회 때의 절차를 규정한 것인데, 여기에 참여하는 인사로는 향약 구성원 외에도 관내의 향교 교생(校生), 서원 원생(院生), 그리고 무업(武業)에 종사하는 무열인(武列人)까지를 포괄한다. 해당 면에서 영향력을 가진 모든 인사를 향약례에 참여시킴으로써, 주현향약을 시행하는 관부의 권위를 높이고자 했던 것이다. 관부의 영향력은 향약 집회 규정에 잘 드러난다. 집회 규정을 수록한 11개조의 조목 중에서 다음 5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나. 향약 중에 선한 자가 있으면 무리에서 추천하고, 허물이 있는 자는 직월이 규제한다. 선한 자는 선적에 기록하고, 허물이 있는 자는 과적에 기록해 좌중에게 두루 보여 준다. 선행과 과오가 가장 큰 자는 관청에 보고하여 상벌을 내린다. 하나. 선행을 기록하고 과오를 기록하는 것이 공정하지 아니하면, 한 고을이 함께 관에 호소해 변무한다. 하나. 지금 이 약조를 집집마다 베껴서 두고, 때때로 읽고 익힌다. 매번 약회 때 향약 읽기를 마치면, 약장이 향약 중의 각 사람에게 약편(約篇)을 고강해서 등급을 나누어 관에 보고한다. 관은 향교에서 약회를 거행할 때, 다시 고강해서 상벌을 내린다. 하나. 30세 이하로 관례를 마친 자가 향약에 참여하지 않고 약회에 3회 빠지면, 향약에서 벌을 내리는데, 끝내 불복하는 자는 관에 보고하여 벌을 내린다. 하나. 봄과 가을 약회가 끝난 후, 설행 일자를 즉각 감영에 보고한다. ―『교번집략』, 「향리약법서」, 「향리약법서·집회독약청고강장약(集會讀約聽考講章約)」 中 여기서 관은 향약 시행에 있어 중재 및 관리의 역할을 하고 있음이 나타나는데, 특히 관의 고강 규정이 주목된다. 각면에서 「향리약법」을 고강하고, 우수한 자를 향교에서 개최하는 약회 때 재차 고강한다는 개념이다. 그리고 규정 말미에는 감영에 향약 시행 일자를 보고하라고 지시해 놓았다. 경상도관찰사의 정령에 의해 제정된 주현향약인 만큼, 감영이 각 고을의 향약 시행 여부를 직접 감독하였다. 이처럼 원활한 지방 통치를 위하여 뜻있는 수령들은 주현향약을 제정하고 직접 시행하였다. 향약 규정의 제정부터 임원의 임면까지 모두 관부가 총괄하되, 향약 조직에게 향촌 교화에 대한 임무를 부여함으로써, 수령의 막중한 업무를 분담할 뿐만 아니라, 향촌 세력의 자발적인 교화와 협조를 이끌어 내고자 했다. 그러나 수령 주도의 주현향약은 통치 보조를 위해 시행되었기 때문에 관변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며 여러 부분에서 한계를 드러내었다. 가장 큰 한계는 본연의 자치 기능이 퇴색되었다는 점이다. 그 형태는 수령 또는 관부와 관련된 인사가 향약의 임원을 맡거나, 향촌에서의 역할이 수령의 행정을 보조하는 수준으로 격하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 현풍현향약의 전통을 계승한 밀양에서는 17-19세기 동안 수령 주도의 주현향약이 여러 차례 제정되었다. 처음에는 고을의 명망 있는 사대부와 유향소의 좌수가 향약의 임원이 되어 향약을 운영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제정된 밀양 지역 주현향약의 제 규정은 자치보다는 통치 보조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난다. 그런 가운데 1889년 밀양부사 정병하(鄭秉夏)는 「기축장정(己丑章程)」 또는 「밀주장정(密州章程)」이라는 명칭으로 주현향약을 제정하였다. 해당 향약의 규정은 모두 25개의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기에 규정된 약임의 권한과 임무는 종전의 그것과 차이가 크다. 향촌 교화와 관련된 권한은 소략한 데 반해, 부세·단속·공사 등 각종 행정 업무가 상세하게 규정되어 있다. 특히 다음의 조항은 「기축장정」에서 규정하고 있는 약임의 위치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하나. 약정은 각리의 공의(公議)에 따라 면임을 차정한다. 두 사람은 식자(識者)이며 일을 해결함에 게을리하지 않는 자들이다. 무릇 지시를 거행함에 있어, 각리의 여러 가지 일을 상세하고 명백하게 왕복해서 처리할 것이며, 모호하게 지연시켜 일이 지체되고 시끄럽게 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밀주징신록(密州徵信錄)』, 「고종기축장정(高宗己丑章程)」, 中 종전에는 각면의 약임에게 교화를 담당케 하고, 면임은 관령에 따른 행정업무를 맡게 하였다. 그러나 위의 조항에서 관부가 바라보는 약임과 면임의 위치는 큰 차이가 없다. 같은 행정 업무 종사자로 인식하고 있다. 19세기에 이르러 수령이 주도하는 주현향약의 관변적 성격이 더욱 강화됨에 따라, 향약은 관의 정령을 하달받는 위치로 전락해 버렸다. 이는 마치 교화와 풍속 검찰의 임무를 가지고 있다가 조선 후기 이후 점차 권위가 약해져, 행정업무를 보조하는 향청으로 전락해 버린 유향소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관변적 주현향약의 또 다른 한계는 수령의 의지에 따라 시행되었기 때문에 임기가 끝난 후에는 흐지부지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향약에 협조해야 하는 사대부들도 해당 수령이 향약을 시행할 때는 협조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수령이 이임하면 조직해 놓은 향약을 방치해 버렸다. [1891] … 6월에 향약책자와 강학조규(講學條規)로써 각읍에 고루 배포하였으나, 가을이 이미 다 지났고, 겨울 또한 반이 지났다. … 각 고을 중 오히려 강약장(講約長)과 향교 수임을 차정하고 보고하지 않은 것이 반에 이르니, 준행하고도 그렇게 한 것인가? ―『교번집략』, 「칙각읍강장급향교수임보래(飭各邑講長及鄕校首任報來)」 中 지난 임진년[1892]에 명을 받들어 남쪽으로 오니, … 이에 안타깝게 여겨 100여 동(銅)을 내어서, 강약소(講約所)를 창설해서 많은 선비들이 강습하는 재용으로 삼았다. 지금 또 이 자리에 올라 물어 채집하였는데, 도중에 군의 서리에 의해 다 써 버리고, 마침내 본소에서 사용할 것이 없게 되었으니, 어찌 해괴한 일이 아닌가? ―『재번집략(再蕃集略)』, 「대구향교별보절목(大邱鄕校別補節目)」 中 앞의 글은 1891년 6월 이헌영이 관내 각 고을에 「향리약법」을 배포하고 연말까지 향약 조직을 편제하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이를 따른 고을은 절반이 채 되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실제 편제를 한다고 해도 독약회만 거행하고 향약 시행을 주저하는 고을이 상당수였다. 뒤의 글은 1902년 경상북도관찰사로 재부임한 이헌영이 향약 시행을 위해 제정한 절목 중 일부이다. 1891년 이헌영은 자신의 녹봉 중 일부를 내어 달성향약(대구향약)을 지원한 적이 있었다. 시간이 흘러 1902년 경상북도관찰사로 재부임한 이헌영은 이번에도 달성향약을 시행하기 위하여, 10여 년 전 자신이 낸 지원금의 용도를 확인하였는데, 그 돈은 이런저런 일로 고을의 서리가 모두 써 버리고 말았다. 감영이 소재한 대구에서조차 수령이 떠나 버리자 향약은 유야무야되었던 것이다. -
조선시대 사람들의 더불어 살기, 향약- 기록자료
- 사회
유산포털 전제 이황과 이이는 유향소에 향약을 접목시킨 선구적 인물이다. 이황은 자신의 고향인 경상도 예안(禮安)에서, 이이는 청주와 해주에서 각각 향약을 제정하였다. 이전까지 유향소는 전횡을 일삼던 토호의 소굴이라는 비판을 받았었다. 그런 가운데 두 명유는 유향소와 연계한 향약을 제정하였다. 이황의 향약은 1556년(명종 11) 제정되는데, 일반적으로 퇴계향약 또는 예안향약으로 불린다. 퇴계향약은 주자증손여씨향약과 달리 4대 강목은 없으며, 서문과 몇 가지 처벌 조항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명칭 또한 향약이라 하지 않고, ‘향입약조(鄕立約條)’라고 명명하였기에 향약과 무관한 유향소 규정으로 보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이황의 문인 집단과 그의 학맥을 계승한 인사들은 ‘향입약조’를 향약으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옛날 향대부(鄕大夫)의 직책은 덕행과 도예(道藝)로써 백성을 인도하고 따르지 않는 자는 형벌로써 규탄한다. 선비 된 자는 또한 반드시 집에서 닦아 고을에서 드러난 후라야 나라에 등용되니, 이와 같음은 어째서인가? … 지금의 유향소는 바로 옛날 향대부가 끼친 제도이다. 알맞은 사람을 얻으면 한 고을이 화평해지고, 알맞은 사람이 아니면 온 고을이 해체된다. 더욱이 시골은 왕의 교화가 멀어서 좋아하고 미워하는 자들이 서로 공격하고, 강하고 약한 자들이 서로 알력을 벌이고 있으니 혹시라도 효제충신(孝悌忠臣)의 도리가 저지되어 행해지지 못하면 예의를 버리고 염치가 없어지는 것이 날로 심해져서 점점 이적(夷狄)이나 금수(禽獸)의 세계로 돌아갈 것이니, 이것이 실로 왕정(王政)의 큰 걱정인데, 그 규탄하고 바로잡는 책임이 이제는 유향소로 돌아오니, 아아, 그 또한 중요하다. ―『퇴계집(退溪集)』, 「향입약조서(鄕立約條序)」 中 퇴계향약 서문에서 이황은 유향소를 주(周)나라의 향대부에 비견하고 있다. 향대부는 『주례(周禮)』 지관(地官)에 속한 관직으로서, 군주 직할지인 향(鄕)의 각종 정무를 담당하였다. 그 임무는 병역과 노역 징발, 현명한 자와 유능한 자의 추천, 서리에 대한 업적 평가 등이다. 조선의 유향소도 비슷한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홀로 파견된 수령을 보좌하여 고을의 인재를 천거하고 변별하였으며, 호적·군적 등을 관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향리를 규찰하고 고을의 풍속을 바로잡았다. 이황은 유가(儒家)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던 주나라 향대부와 유향소를 동일시함으로써, 그 기능에 대해 성리학적 명분을 부여하였다. 퇴계향약은 처벌 조항, 즉 벌목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죄목에 따라 크게 극벌(極罰)·중벌(中罰)·하벌(下罰), 기타 벌목으로 구분하였다. 극벌 부모에게 불순한 자 형제가 서로 싸우는 자 가도(家道)를 어지럽히는 자 일이 관부(官府)에 간섭되고 향풍에 관계되는 자 망령되이 위세를 부려 관을 흔들며 자기 마음대로 행하는 자 향장(鄕長)을 능욕하는 자 수절(守節)하는 상부(孀婦)[과부]를 유인하여 더럽히는 자 중벌 친척과 화목하지 않는 자 본처를 박대하는 자 이웃과 화합하지 않는 자 동무들과 서로 치고 싸우는 자 염치를 돌보지 않고 사풍(士風)을 허물고 더럽히는 자 힘을 믿고 약한 이를 능멸하고 침탈하여 다투는 자 무뢰배와 당을 만들어 횡포한 일을 많이 행하는 자 공사(公私)의 모임에서 관정(官政)을 시비하는 자 말을 만들고 거짓으로 사람을 죄에 빠뜨리게 하는 자 환난을 보고 힘이 미치는데도 가만히 보기만 하고 구하지 않는 자 관가의 임명을 받고 공무를 빙자하여 폐해를 만드는 자 혼인과 상례·제례에 아무 이유 없이 시기를 넘기는 자 집강을 업신여기며 유향소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 유향소의 의논에 복종하지 않고 도리어 원망을 품는 자 집강이 사사로이 향안(鄕案)에 들인 자 구관(舊官)[전임 수령]을 전송하는데 연고 없이 참석하지 않는 자 하벌 공회(公會)에 늦게 이른 자 문란하게 앉아 예의를 잃은 자 좌중에서 떠들썩하게 다투는 자 자리를 비워 놓고 물러가 편리한 대로 하는 자 연고 없이 먼저 나가는 자 기타 벌목 원악향리(元惡鄕吏)[지위를 이용하여 악행을 저지르는 지방관서의 향리] 아전으로서 민가에 폐를 끼치는 자 공물(貢物) 값을 범람하게 징수하는 자 서인(庶人)이 문벌 있는 자손을 능멸하는 자 ―『퇴계집』, 「향입약조서」 中 위의 벌목에서 극벌은 공동체 질서를 무너뜨리는 죄들이 해당한다. 가족 간의 인륜을 저버리거나, 관부 및 유향소의 권위를 위협하는 죄를 가장 무겁게 다스렸다. 중벌에 해당하는 벌목도 공동체 질서와 관련되어 있는데, 극벌과 비교한다면 일반적인 윤리규범과 사회의식 준수에 가깝다. 하벌은 유향소 집회 때 발생하는 소란을 통제하기 위하여 규정한 것이다. 유향소가 통제하는 향리와 일반 하층민에 대한 규정은 기타 벌목으로 구분하였다. 퇴계향약에서는 유학적 윤리관을 바탕으로 유향소의 책임을 보다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향촌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도덕적 책임감을 유향소에 부여한 것이다. 한편으로 유향소를 주도하는 사대부의 권위도 강조하고 있다. 한 고을의 풍속을 책임지고 있는 만큼, 중간 계층인 향리와 서얼, 일반 하층민과의 위계를 명확히 하되, 이것을 어겼을 경우 향약의 벌목으로 직접 통제하였다. 이이는 정부에서 ‘선민생’을 내세우며, 정령으로 향약을 시행하는 것에 대하여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향촌에서는 누구보다 향약 제정에 적극적이었다. 특히 이이는 1574년 황해도관찰사로 부임한 후 해주에서 실시하기 위하여, 해주향약(海州鄕約)과 해주일향약속(海州一鄕約)을 제정하였다. 이 가운데 해주일향약속은 한 고을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해주향약과 별개로 유향소 구성원을 대상으로 제정한 향약이다. 벌목만 제정해 놓은 퇴계향약과 달리 주자증손향약을 보다 구체적으로 차용하였다. 무릇 한 고을에는 네 가지의 약속이 있다. 하나는 덕업상권, 둘은 과실상규, 셋은 예속상규, 넷은 환난상휼이다. 무릇 선과 악이 겉으로 특별하게 드러난 자는 선적과 악적에 적어 두되, 과오를 고치면 이를 말소한다. ―『율곡전서』, 「해주일향약속(海州一鄕約束)」 中 해주일향약속은 유향소에서 실시하는 것이지만, 그 운영 규정의 골자는 주자증손여씨향약이다. 향약의 4대 강목에 맞추어 유향소 규정을 배정하였다. 봄과 가을 강신 때 향약을 읽는 독약의 의례도 예속상교 조항에 수록해 놓았다. 선적과 악적에는 유향소 구성원뿐만 아니라, 향리·서원(書員)·관인(官人) 등 고을 행정의 실무를 보는 중간 계층의 행실도 기록되었다. 특히 과실상규 조항에서는 향임(鄕任, 유향소 임원) 자리를 몰래 청탁하는 자, 유향소에서 공무를 빙자하여 사익을 도모하는 자, 환곡을 거둘 때 사사로운 뇌물을 받아 백성에게 폐해를 끼친 자 등을 상벌(上罰)로 다스린다고 규정해 놓았다. 이는 유향소 기능에서 인사와 조세 업무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그림 6-1】 이황의 향입약조,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 【그림 6-2】 이이의 해주일향약속,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 이처럼 이황과 이이는 성리학 이론뿐만 아니라, 그것의 실천과 성리학적 이상향이 반영된 향촌사회 구현을 위하여 향약을 제정하였었다. 그리고 향약의 실천할 주체로 유향소를 주목하였다. 종전까지 유향소는 중앙 정부에 의해 ‘향원(鄕原)’으로 지목받기도 했다. 향원은 공자가 말한 ‘도덕의 적(賊)’이다. 향원은 시골에 사는 사람으로서 어느 정도 지위를 가지고 있지만, 근후한 척하면서도 세상의 부조리와 영합하였다. 향원은 바로 세속의 병폐를 조장하는 세력을 뜻한다. 그런 가운데 이황과 이이는 유향소에 향약을 접목함으로써, 유향소에 대한 인식 전환을 이끌어 내었다. 유향소는 교화의 주체로서 성리학적 명분을 부여받은 것이다. 이 때문에 16-17세기 동안 사대부 문화의 성숙과 더불어 유향소의 권위도 높아질 수 있었다. 그러나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예컨대 현대의 지방 의회는 풀뿌리 민주주의를 명분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공론이라는 미명하에 지방 세력 간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곳이다. 공무를 빙자해 사리사욕을 챙기는 일은 그때나 지금이나 빈번히 일어났다. 그중에서도 가장 시끄러운 일은 향안 입록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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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
에서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 율곡 이이 등과 같은 명유가 등장하였다. 사림 세력의 외연은 더욱 확대되었고, 선조 즉위 후에는 정치권력의 판도마저 자연스레 사림에게 귀결되었다. 사림파가 정국 전면에 등장하면서, 정부에서도 기묘사림의 정책을 재평가하였다. 당연히 향약 시행도 다시 논의되었다. 1573년(선조 6) 사간원(司諫院)에서 향약 시행을 건의하자, 선조는 대신과 정부 원로에게 의견을 물었는데, 모두 긍정적으로 답하였다. 좌상(左相) 박순(朴淳) … “여씨향약은 본디 풍속의 교화를 돕는 아름다운 뜻이고, 주자가 그것을 취하여 증감하였기에 그 규모와 절목이 평실(平實)하고 간편합니다. … 또 우리나라 풍속은 안으로 서울부터 밖으로 촌마을까지 모두 동린(洞隣)에 계와 향도(香徒)의 모임이 있어 사사로이 약조를 세워 서로 단속하려 하나, 각각 자기 뜻에 따르기 때문에 엉성하고 질서가 없어서 … 이제 선현이 이미 정한 규약을 거행하라고 명령을 내리신다면 백성이 장차 순종하기에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판부사(判府事) 이탁(李鐸) … “다만 사람이 행하지 못할까 걱정일 뿐입니다. 신이 보건대 주회암(朱晦菴)[주자]이 장경부(張敬夫)[장식(張栻)]에게 답한 글에 ‘향약의 글은 … 유행시키고 싶으나, 실은 또한 거기에 이른 대로 행하기 어려울까 염려된다. 독자(讀者)가 보고서 … 스스로 닦는 절목을 알게 하는 것도 조금 보탬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 신의 생각으로는 이 책을 많이 인간하여 중외에 널리 반포하되, 서울에는 동몽학(童蒙學), 외방에는 향교로부터 촌리의 학장(學長)까지 나누어 주어, 배우는 자가 글을 읽는 여가에 이 책을 버려두지 않고 때때로 보게 한다면, 사람들이 다 스스로 닦는 도리를 알아 백성의 풍속도 이에 따라 변해 갈 것입니다.” ―『선조실록』, 6년 8월 17일 기사 中 당시 건의되었던 여러 의견 중에서도 박순과 이탁의 견해가 주목된다. 박순은 향촌사회에 향약과 같은 결사 조직으로 계와 향도를 언급하였다. 이들 조직은 고대부터 향촌에 존재했던 자생적 결사체이다. 성리학 보급 이후 향약이 하루아침에 등장한 것이 아니라, 기존에 있던 자치 조직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지역의 오랜 관습에 따라 운영되다 보니, 그 규약의 엉성함을 피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박순은 이들 조직을 향약으로 대체하자고 건의하였다. 이날 논의해서 여러 대신과 원로들은 정부가 나서서 향약을 정책적으로 시행하자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이탁만은 향약 시행에 대해 신중론을 펼쳤다. 향약을 증손한 주자의 고사(故事)를 들며, 제도적으로 시행하기보다는 책자를 반포하여 스스로 익히기를 기다리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정부에서 일부 이견이 있었지만, 향약 시행을 건의하는 신료들의 청원은 지속되었다. 그 결과 같은 해 선조는 전국적으로 향약을 시행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전국적인 향약 시행은 직제학(直提學) 이이의 반대로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이 무렵 정부에서 이이는 백성들의 삶이 고달픈데 향약을 먼저 시행하면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아뢰었다. 아래 백성들의 경우 굶주림과 헐벗음이 절박해 본심을 모두 잃어 부자 형제간이라도 오히려 길 가는 사람이나 다름없이 보고 있으니, … 강상(綱常)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고 형정(刑政)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고 있는데 … 향약을 널리 시행하여도 좋은 풍속을 이룩하는 성과가 없을까 염려됩니다. ―『율곡전서(栗谷全書)』, 「만언봉사(萬言封事)」 中 요사이 신료들이 향약을 행하고자 청하므로 임금께서 행하도록 명했습니다만, … 민생(民生)을 기르는 것이 먼저 할 일이고 … 민생들의 곤궁이 오늘날보다 심할 때가 없었으니, 시급하게 폐해를 바로잡아 우선 급박한 상황을 해소한 다음에야 향약을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조실록』, 7년 2월 29일 기사 中 위의 글은 이이가 1574년 1월에 올린 상소문과 2월의 조강(朝講)에서 향약에 대하여 아뢴 대목이다. 여기서 이이는 향약의 즉각적인 시행을 반대하였다. 반대 명분으로는 백성이 편안하게 된 후에야 향약을 시행할 수 있다는 ‘선민생(先民生)’을 내세웠다. 앞서 이이는 파주와 청주 지역에서 향약을 직접 시행하였다. 그렇기에 누구보다 향약 시행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이이가 ‘선민생’을 내세우며 전국적인 향약 시행을 반대하자, 이전까지 자신의 견해를 뚜렷하게 밝히지 않고 있던 선조도 향약 시행을 유보하게 된다. 선조는 자치 규약을 법제화하는 것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전제 왕조의 최고 권력자로서, 국왕의 정령이 자치 규약에 의해 훼손되는 것을 우려한 것으로 보인다. 허엽(許曄)이 말하기를 “지금 세상 사람은 선한 자가 많고 선하지 않은 자는 적기 때문에 향약을 시행할 수가 있습니다”고 하였다. 이이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당신의 마음은 선하기 때문에 사람이 선한 것만 보셨습니다마는, 나는 선하지 않은 사람을 본 것이 더 많으니 필시 내 마음이 선하지 않아서 그런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몸으로 가르치면 따르고 말로써 가르치면 말썽이 생기는 법인데, 지금 향약의 경우 어찌 말썽이 없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허엽이 말하기 “당신은 고집부리지 말고 대죄해야 합니다. 그런 뒤에 양사(兩司)[사헌부·사간원]로 하여금 다시 논죄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이가 말하기를 “나는 내가 그르다는 것을 스스로 모르므로 감히 대죄하지 못하겠습니다”고 하니, 허엽이 개탄해 마지않았다. ―『선조수정실록』, 7년 2월 1일 기사 中 이이가 유보론에 따라 향약 시행이 중단되자, 여러 신료들이 반발하였다. 특히 향약의 즉각 시행을 주장하던 허엽과 이이 간에는 위와 같이 언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들 모두 향약의 긍정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그것의 시행 시점에 대해서는 견해가 달랐던 것이다. 이이는 향약 시행을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중 하나가 향약을 이해하고 시행할 만한 역량을 갖춘 선한 사람, 바로 사대부의 존재이다. 이이는 향약을 시행하고 운영할 만한 역량이 전혀 갖추어지지 않은 고을에서, 갑작스레 향약을 시행할 경우 오히려 혼란이 일어나고, 또 다른 폐단이 발생할 수 있다고 보았다. 실제 이른 시기 향약이 시행된 고을은 명망을 갖춘 사대부 가문이 형성된 곳이다. 선조 이후 조선 정부의 향약 정책은 이이의 유보론을 견지하였다. 뜻있는 사림이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향약을 시행할 경우 권장하고 포상하였지만, 정령에 의거한 향약 시행에 대해서는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게 된다. 이러한 정부의 의지가 잘 드러나는 것이 1797년(정조 21)에 있었던 『향례합편(鄕禮合編)』 반포이다. 『향례합편』은 정조의 지시에 따라 향약을 비롯해 향음주례·향사례 등 여러 향례에 관한 기록을 엮은 책으로 민간의 자발적인 교화를 이끌어 내기 위하여 간행하였다. 【그림 4】 『향례합편』 수록 정조의 「향약윤음」, 국립중앙박물관 이처럼 조선 정부의 향약 정책은 권장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 후기 동안 향약이 위축된 것이 아니다. 사대부 문화가 한층 더 성숙해지는 가운데, 향촌사회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향약이 시행되며, 우리 선조들의 생활 속에 점차 뿌리내리고 있었다. -
조선시대 사람들의 더불어 살기, 향약- 기록자료
- 사회
것이었다. 일찍이 이황은 유향소를 주나라의 향대부와 비견하였으며, 이곳에서 향약을 시행하였다. 이황 이전에 유향소가 사회·경제적 폐단을 일으킬 때마다 중앙에서는 이를 토호의 소굴이나, 공자가 말한 도덕의 적인 ‘향원’에 빗대어 비판하였다. 하지만 향약 시행의 중심지가 되면서, 유향소는 성리학적 운영 명분을 부여받게 된다. 같은 목적을 가지고 동계에도 향약이라는 외투를 입혔다. 비록 향약과 동계의 시행 범위는 다르지만, 향약을 동계에 접목시킴으로써, 동리 단위의 자치 조직에 대한 성리학적 명분을 부여한 것이다. -
조선 후기 출세의 사다리에 오르려는 이들- 기록자료
- 정치
였다. 김령은 이황의 문인인 부친과 친족에게서 일찍부터 경학을 접하게 되었고, 15세에 도산서원에 입학한 수재였다. 특히 이황의 영향으로 제술은 학문이 아니라고 여겼기에 지인과 모여 지내면서 제술 공부를 한 적이 없었다. 그의 집안은 사회적으로는 예안의 유력한 사족이었으며, 학문적으로는 이황의 뜻을 실천하여 도산서원을 드나들었고, 경제적으로도 항산의 기반이 굳건하였다. 김령은 과거에 응시하기 시작하여 1612년 증광 문과에 급제하기까지 10년 동안 생원진사시는 7회, 문과는 8회를 응시하였다. 그가 응시한 생원진사시 7회 중 3회는 초시에서 진사시에 입격하였으나, 회시에서 낙방하였다. 문과에서도 별시 문과 초시와 식년 문과 초시에 입격하였으나 결국은 증광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는 서울까지 8-9일의 여정이 필요한 지방에 살고 있어 비정기 문과 응시가 자유롭지 못하였기에 비정기 문과 중에 지방에서 초시가 시행되는 증광 문과에 많이 응시하였다. 그는 문과 응시를 위해 굳이 자주 서울을 드나들지는 않았다. 서울에 사는 처남과 처조카의 재촉으로 비정기 문과를 치르기 위해 한 차례 서울로 올라가서 알성 문과와 별시 문과 초시를 치렀다. 알성시에는 낙방하였으며, 별시는 초시에 입격하여 전시까지 치렀으나, 낙방하였다. 김령은 생원진사시 초시와 문과 초시 등에 5번이나 입격하여 회시를 위해 서울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조극선도 제술과 경학을 겸비한 선비였으나, 김령과는 사뭇 달랐다. 조극선은 개국공신이자 정사공신이며 좌명공신인 조온의 후손이다. 그의 6대조 조증이 서울을 떠나 그의 처 영덕 김씨의 세거지인 충청도 홍주 녹운동으로 입향하였고, 그의 증조부 조곤은 처 평산 신씨의 세거지인 덕산으로 옮기게 되었다. 조극선의 부친 조경진도 공신의 후손으로 충의위에 속해서 무산계를 받았다. 그러나 관직 진출은 조극선의 5대조인 조윤상 이후로 조극선에 이르기까지 전혀 없었고 과거 입격자 역시 전혀 없었다. 조극선의 조부 조흥무는 치산 능력을 발휘하여 경제적 기반을 확고히 하는 한편 자손들의 교육에 관심을 두었다. 그리고 조극선의 부친 조경진은 장남 조극선의 영민함을 보고 과거에 급제하기를 기대하였다. 조경진은 장남 조극선이 시험공부에 열중하지 않을 때는 꾸짖기도 하였는데, 심지어 26세의 아들이 별시 문과에서 낙방하였다고 매를 들기도 하였다. 게다가 24세의 아들의 학업을 독려하기 위해 닷새에 한 번씩 글을 짓게 하였다. 그는 어려서는 부친에게서 배웠으나, 그가 15세가 되던 해에 덕산현의 수령으로 부임했던 이명준에게서 시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명준이 수령에서 해임되어 서울로 올라간 이후에는 이렇다 할 스승을 만나지 못했다. 더욱이 이명준이 정치적 문제에 연루되어 유배를 갔기에 그에게는 직접적으로 조언을 줄 스승이 없었는데, 다행히 이명준의 소개로 박지계와 조익에게서 경학과 예학을 배울 수 있었다. 조극선은 17세가 되던 1611년부터 1636년 42세까지 26년 동안 생원진사시 10회와 문과 17회에 응시하였다. 그는 생원진사시 초시에 2번이나 입격했으나 회시에서는 낙방하였다. 그는 29세 때부터 생원진사시에 응시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이후로는 문과에만 응시하였다. 그후 조극선은 문과 응시에만 주력하여 17회 중에 7회 입격하였으나, 문과 급제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그가 초시에 입격한 문과는 증광 문과 초시 2회, 별시 문과 초시 3회, 식년 문과 초시 2회 등이다. 7회의 각종 문과 초시에 입격한 시기는 거의 관직 생활을 하고 있을 때에 집중되어 있다. 그는 31세 때인 1625년 유일로서 천거되어 동몽교관에 제수되어 서울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고향에서 문과 초시를 치른 것보다 서울에서 초시를 치른 경우가 많았다. 그는 제술 과목 중에서 논과 부에는 능하여서 좋은 성적으로 초시에 입격하나, 대책문 작성에는 어려움이 있어 증광 문과나 별시 문과 급제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식년 문과의 경우는 식년 문과 회시 초장이 사서와 오경 중에서 7과목을 배강해야 한다. 그러나 7과목의 배강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절대적 시간이 필요하였다. 관직 생활을 하면서 강서 공부를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기에 회시의 문턱을 넘기 어려웠다. 그는 부친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관직에 나간 이후에도 10회의 문과에 응시하여야 했다. 조극선처럼 관직에 나아가서도 과거 응시를 계속해야 했던 사람은 진사 황윤석이었다. 황윤석의 집안은 그의 8대조 황수평이 처가의 세거지인 흥덕으로 입향하였다. 그의 6대조 황처중이 관직에 나간 이후로는 과거 급제자나 관직에 나간 사람이 없었다. 황윤석은 조극선만큼이나 부담이 컸다. 황윤석은 10대에 이미 제술 능력이 빛을 발하였는데, 31세 때인 1759년 식년 생원진사시에서 진사 3등 9위로 입격하였다. 황윤석은 지방 유생 과시인 공도회에서 장원하여 직부 회시를 받아서 식년 생원진사시 회시에 바로 응시하여 진사 3등 9위로 입격하였다. 공도회에서 직부 회시를 받은 유생이 생원진사시에 입격될 확률은 약 25% 정도에 지나지 않는데, 황윤석은 그 직부 회시의 기회를 살려 진사가 되었다. 그는 진사가 된 이후에 성균관과 반촌에 머물면서 원점 50점을 채워 절일제와 같은 유생 과시를 통해서 문과 급제를 이루려 했다. 1759년 진사가 된 후에 그해 7월 말 서울로 와서 성균관과 반촌을 오가며 원점을 챙기고, 스승 김원행을 뵙고 석실서원에서 경학 공부를 하기도 하였다. 그의 첫 번째 성균관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그는 병으로 고생하다가 약 3개월간의 서울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두 번째 성균관 생활은 1764년 3월 28일에 시작되었다. 그는 유생 과시를 위한 원점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성균관 유생의 정치 활동으로 성균관에 머물기 어려운 경우가 두 번이나 있었다. 지방 유생으로서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상황에 처하면서 마음고생이 심하였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유생 과시 응시는 원점 부족으로 무산되고 빈손으로 고향에 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11회의 유생 과시에 응시하였는데, 1769년 7월 칠일제에서 유일하게 2등으로 입격하여 2분의 점수를 받았다. 이 당시 그는 종부시 봉사로 재직하면서 칠일제에 입격하였다. 2분 점수는 다음 식년에 시행되는 식년 문과에 적용되는데, 직부 회시와 함께 초시를 면제받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회시 초장에서의 배강 시험의 산을 넘어야만 했다. 회시 초장을 통과하기 위해서 경서 공부에 절대적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제술에만 주력하는 이들은 유생과시에서 직부 전시의 은사를 받지 않으면 식년 문과의 회시 초장을 통과하기 어려웠다. 실제 직부 전시를 받을 때까지 과시에 도전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황윤석 역시 식년 문과에는 응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칠일제로 받은 2분은 그 가치를 발하지 못하였다. 그는 유생 과시를 제외하고는 증광 문과나 정시 문과와 같은 비정기 문과에만 응시하였으나, 끝내 급제하지 못하고 25년간의 과거 응시 여정을 마쳤다. 조세환은 황윤석과 마찬가지로 생원진사시에 입격한 후에 성균관 유생으로서 과시를 통한 문과 급제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닮은 점이 있으나, 황윤석과는 다른 길을 갔다. 그는 충청도 홍주 사족으로 본관은 임천이었다. 그의 가문이 홍주에 입향한 것은 1602년이었다. 그의 조부가 가족을 데리고 양모를 뵈러 갔다가 숙환으로 사망하자, 조모 여흥 민씨가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조세환의 선대는 누대에 걸쳐 서울에 거주하였다. 그의 6대조 조원경을 비롯하여 그의 자손들이 문과와 무과에 급제하여 지속적으로 관직에 나간 관료 가문이었다. 그런데 조세환의 증조부로부터 조세환에 이르기까지 관직 진출이 없었다. 증조부와 생증조부가 일찍 사망였으며, 그의 조부인 조인현은 윤근수의 문하에 공부하고 박학하여 장래가 촉망받았던 인재였으나 31세에 사망하였기 때문이었다. 조세환의 인척 가문 역시 조선시대 명문거족이었다. 조세환의 외고조부 가문은 인수대비 가문이었으며, 생외고조부는 광해군의 장인과는 사촌사이였다. 외증조부는 공신이었으며 외조부는 이지함의 증손이었다. 조세환은 18세에 생원진사시에 입격하여 생원이 된 후에 24년이 지난 43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생원을 획득한 이후에 시험공부를 포기하였다가 조모의 권유로 뒤늦게 다시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1648년에서 1657년까지 10년 동안 3회의 식년 문과, 3회의 정시 문과, 2회의 별시 문과 등 8회의 문과에 응시하였다. 그는 3회의 식년 문과 중 2회의 문과 초시에 입격하였으나, 회시 초장 배강의 벽을 넘지 못하였다. 조세환은 각종 문과와 함께 4회의 유생 과시를 치렀다. 조세환이 유생 과시를 치를 당시 절일제는 원점이 요구되지 않았으나 전강을 위해서는 도기가 필요하였다. 따라서 조세환도 성균관과 반촌을 오가며 원점을 채웠다. 조세환은 1655년 2월 15일 시행되는 전강에 낙점되었다. 그는 『주역』을 강하여 약을 받아 2분을 받았다. 조세환은 1657년 식년 문과 회시가 있을 때까지 2년 동안 경서 배강을 위한 준비에만 몰두하였다. 그 결과 7과목의 경서 가운데 『주역』만 약을 받고 나머지 6과목은 순통과 통을 받아서 14분을 획득함으로써 제술의 생획 없이도 회시에 급제하였다. 그는 식년 문과 전시에서도 책문을 잘 지어서 갑과 3등을 차지하였다. 조세환은 식년 문과 회시 초장에서 계속 낙방하자, 유생 과시를 통해 문과에 급제할 방법을 강구하였다. 그는 생원으로 유생과시나 문과에 응시하려면 원점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서울에 거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1654년 그는 아예 식구를 데리고 서울로 올라와 청파에 거처를 정하고, 성균관에 드나들며 식당 도기를 채워 갔다. 1655년 그는 전강에 낙점되었을 때 아마도 직부 전시를 꿈꾸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2분의 점수를 받았기에 피하고 싶었던 식년문과 회시 초장을 치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식년 문과를 치르기 전까지 시행된 각종 유생과시에 응시하지 않아서 시간을 절약하였다. 그는 비정기 문과에 응시한 것에 대해서도 시간을 낭비하였다고 후회하였다. 오로지 식년 문과 회시를 위해서 2년 남짓 경서 공부에만 몰두하였다. 이러한 그의 전략이 적중하여 식년 문과 갑과 3등이라는 좋은 성적으로 문과에 급제할 수 있었다. -
조선 후기 출세의 사다리에 오르려는 이들
- 기록자료
- 정치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제자인 김령의 부친 김부륜은 생원이 된 이후 1572년(선조 5) 경상도에서 유일로 천거하여 집경전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후 1576년(선조 9) 전생서 참봉에 제수되었다. 1580년(선조 13)에는 문소전 참봉에 제수되었다가 곧 돈녕부 봉사로 옮겨져서 중종의 묘역인 정릉(靖陵)의 석역(石役)을 관장하여 선조에게 말을 하사받았다. 그후 제용감 직장, 내섬시 주부를 거쳐 1585년(선조 18) 동복현감에 제수되어 향교 교육에 힘썼다. 임진왜란 때에는 가산을 내어 향병(鄕兵)을 도왔고, 수령이 도망간 봉화의 가현감(假縣監)으로서 현성(縣城)을 지켰다. 그 이듬해 선조가 그의 성과를 듣고 특명을 내려 현감에 제수되었으나 1년 후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김부륜은 감찰 박순(朴純)의 딸인 밀양 박씨와 혼인하였으나, 자녀가 없었다. 그는 부호군 신수민(申壽民)의 딸인 평산 신씨와 재혼하여 김령과 그의 누이들을 두었다. 【그림 1】 김령의 가계도 김령의 선대는 문과·무과 급제자, 생원진사시 입격자가 거의 끊임없이 배출되었고, 그에 따른 관직 진출도 활발하였다. 또한 경제적으로도 상당히 부를 축척하였다. 그의 선대의 경제적인 상황을 보면, 그의 증조부 김효로는 김효지의 계후가 되어 오천의 토지를 상속받고, 생부모와 처부모에게도 재산을 상속받았다. 재산은 크게 전답과 노비로 구분된다. 전답을 보면, 그는 계후가 되어 상속받은 오천의 전답을 바탕으로 다른 지역의 상속분 전답을 매매나 상환하여 예안의 전답을 집중적으로 집적해 갔다. 그가 자녀들에게 상속한 전답은 20여 곳의 488두락으로 약 5결 정도가 된다. 노비의 경우 김효로가 상속받은 것은 41구(口)였으나, 자녀들에게 상속한 것은 190구에 이르렀다. 1550년(명종 5) 김효로의 처 이씨의 상기를 마친 후 작성된 화회문기를 보면, 김효로의 차남이자 김령의 조부인 김유가 상속받은 전답은 7곳의 논 39두락, 작개 논 7두락, 밭 30두락으로 합계 76두락이다. 상속받은 노비는 부친 쪽에서 22구, 모친 쪽에서 29구로 총 51구였다. 이 외에 1566년(명종 21)에는 김연 남매가 1550년 화회문기를 작성할 당시 함경도의 노비 수를 파악하지 못해 미루어 두었던 비를 추가로 분재하였다. 이때 김유의 몫은 6구였다. 김유가 상속받은 전답과 노비만으로도 그가 부유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김유의 처가 상속 내용이 확인되지 않으며, 그의 경제 활동도 상세하지 않아 재산의 규모를 명확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이황이 지은 김유의 묘지명에 의하면, 김유는 종고모부의 재산까지 상속하여 재산이 고을에서 내로라할 정도였다고 하였으므로, 그의 재산이 상당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김령의 부친인 김부륜과 김령 때의 경제 상황을 파악할 만한 자료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김부륜은 동복현감으로 있을 당시 사재를 내어 향교에 책을 구비하였으며, 임진왜란 당시에도 사재를 내어 향병을 도왔다고 하니, 집안이 여전히 넉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림 2】 「1550년 김연 남매 화회문기」 중 김유의 상속 부분, 안동 오천 광산 김씨 후조당 소장, 한국국학진흥원 제공 -
조선 후기 출세의 사다리에 오르려는 이들- 기록자료
- 정치
진사시는 이언적과 이황의 문묘종사를 저지하는 한편 자신의 스승인 조식의 추존 사업을 추진하던 정인홍을 탄핵하는 일로 전국의 유생들이 들썩이던 때에 시행되었다. 이미 시험 전부터 다른 도의 선비들과 동맹하여 시험에 응시하지 말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김령의 입장은 달랐다. 그는 선비의 기개로 과거에 응시하지 않을 수는 있으나, 국가시험을 아예 응시하지 않는 것은 온당한 도리가 아니라고 여겼다. 그는 자신의 소신대로 시험장에 들어갔으나, 시험장에서의 소란으로 시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여 파장되었다. 그는 응시생들의 경거망동으로 경상좌도 생원진사시를 망친 것에 대해 한탄스럽게 생각하였다(『계암일록』 1610년 9월 2일, 9월 3일, 9월 4일). 김령은 7회의 생원진사시 초시에서 3번 입격하였으나, 회시에는 1603년 식년 생원진사시와 1605년 증광 생원진사시 등 2번만 응시하였고, 1606년의 식년 생원진사시 회시는 병으로 응시하지 못했다(『계암일록』 1606년 10월 9일). 식년 생원진사시는 일반적으로 식년 전해에 초시를 치르고, 식년 봄에 회시를 치르게 되어 있다. 그런데 식년인 1606년에는 선조의 즉위 40주년을 맞이하여 증광시가 치러질 예정이므로 식년 회시가 가을로 미루어졌다(『계암일록』 1606년 2월 2일). 그는 1606년 7월 증광 생원진사시 초시를 치를 때부터 이미 몸의 이상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식년 회시가 시행되었던 10월에는 서울에 가기 어려울 정도로 병이 깊어졌다(『계암일록』 1606년 10월 9일). 그는 1606년 7월에 치른 증광 생원진사시 초시에 입격하였으나 조정에서는 뒤늦게 경상좌도 생원진사시 방목을 삭제하였다(『계암일록』 1606년 8월 2일; 『선조실록』 선조 39년 7월 22일). 1606년에 있었던 증광시는 선조 즉위 40주년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경상좌도 증광생원진사시 향시와 문과 향시 때에는 시관과 응시생의 갈등이 심각하였다. 생원진사시 향시의 경시관이었던 조즙은 임진왜란 이후 경상도 도사를 역임했던 인물로, 도사로 있을 당시 여러 고을의 사람들과 격의 없는 친분을 쌓았다. 그런 그가 경시관으로 오면서 경상우도인 상주와 함창 사람들을 데려왔는데, 이 사람들 중에 다른 고을 과거도목에 이름을 올려서 온 자들도 많았기에 여론이 들끓었던 것이다(『계암일록』 1606년 7월 1일). 7월 4일, 시험장에서 응시자들이 조즙에게 그와 함께 왔던 사람들 가운데 조즙과 몰래 약속하고 온 몇 사람을 시험장에서 내보내라고 요구하였으나 조즙이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응시자와 조즙의 실랑이가 정오까지 계속되며 결판이 나지 않았다. 그러다 응시생 중 안동 유생 류득잠(柳得潛)이 머리를 다치자, 격앙된 응시생들은 모두 시험을 거부하고 시험장을 나와 버렸다. 일부 유생은 시험관들이 사과하니 다시 시험장에 들어가자고 설득하였다. 김령과 그 일행은 들어가기를 완강히 거절했으나, 권자심(權子深) 등이 간곡하게 설득하여 들어가서 시험에 응시하였다(『계암일록』 1606년 7월 4일). 김령은 이 시험에 입격하긴 했으나, 시험장에서 나왔다가 다시 들어간 자신의 행동을 똥물로 목욕한 것과 같다고 자책하였다(『계암일록』 1606년 7월 9일). 이와 마찬가지로 경상우도의 증광 생원진사시 향시 역시 시관과 응시생 간의 갈등이 심해 시험을 치르지 못했다. 이후 입격자의 발표가 끝난 뒤인 7월 22일에는 정언 박안현(朴顏賢)이 경상좌도와 경상우도의 시험장에서 있었던 소란에 대해서 상소하였다. 그는 시관들이 시험장 밖으로 나간 응시생을 설득하여 시험장에 들어오게 하여 시험을 치른 것은 국가시험을 구차하게 한 것이니, 시관을 파직하고 좌도의 생원진사시 방목을 삭제하기를 청하여 선조의 윤허를 받았다. 김령은 이 소식을 8월 2일에 접하게 되었다(『계암일록』 1606년 8월 2일; 『선조실록』 선조 39년 7월 22일). 1606년의 증광시는 경상좌도와 경상우도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황해도 향시도 방(榜)을 낼 수 없는 지경이었으며, 서울에서 있었던 2개소의 생원진사시 초시는 채점에 문제가 있어 파장되었다(『계암일록』 1603년 8월 25일; 『선조실록』 선조 39년 8월 18일). 사간원에서는 향시 입격 인원이 가장 많고 인재가 많은 영남의 증광 생원진사시 향시가 파장되었는데 회시를 시행하는 것은 나라의 선비를 선발하는 법에 어긋나고 뒷날의 폐단도 클 것이니 초시를 파방하라는 상소문을 올렸다(『선조실록』 선조 39년 8월 13일). 조정에서 파방 문제를 놓고 논의하는 동안 지방의 회시 응시자들도 갈팡질팡하여 서울까지 왔다가 되돌아간 사람들도 있었다(『계암일록』 1610년 9월 2일). 김령은 10년 동안 시행된 문과에는 약 53%인 8회에만 응시했던 반면 생원진사시에는 약 87.5%인 7회에 응시하였다. 그가 이처럼 생원진사시에 주력하였던 것은 왜일까? 문과 응시 자격은 통훈대부 이하 관직자, 생원·진사, 그리고 학업 중인 유학 등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김령이 시험을 치렀던 17세기 전반기 문과 급제자는 관직자 43.5%, 생원·진사 42.4%, 유학 13.9%로 관직자와 생원·진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령도 생원진사시 입격이 문과 응시의 지름길이라고 인식한 것은 아닐까 추측된다. 게다가 선대 대대로 생원시에 입격하였기에, 생원진사시 입격이 더욱 절실하였을 것이다. 【그림 3】 「김령의 생원진사시 시권」(1603년, 27세)원소장처 광산김씨 설월당종택, 현소장처 국학진흥원 문과 응시 양상 김령이 문과에 응시한 10년 동안 식년 문과, 증광 문과, 알성 문과, 정시 문과, 별시 문과 등 15회가 시행되었다. 그는 식년 문과 2회, 증광 문과 2회, 알성 문과 1회, 별시 문과 1회, 정시 1회 등 총 8회의 시험에만 응시하였다. 그중 1606년에 시행된 증광 문과 초시는 시관과 응시생의 갈등으로 파장되기에 이르렀다. 1606년 경상좌도 증광 문과 향시는 용궁에서 있었다. 김령은 생원진사시 초시에 응시한 후 다시 문과 초시에 응시하였다. 7월 18일 초장(初塲) 시험장에 들어갔는데, 논제(論題)를 3번이나 수정하였다. 경시관인 조즙은 시제(試題)를 고치기를 원한 응시자를 비난하였다. 7월 20일에 시행된 중장(中塲)에서도 시제를 수정하였는데, 수정된 시제 중 표제(表題)가 “예조는 서울과 지방의 시험장에서 일절 시제를 수정하는 것을 허락하지 말아서 선비의 경박한 습성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청하였다”라는 것이었다. 응시생들이 시제를 보고 분통을 터뜨렸으나, 시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말고 해가 저물어 시간이 되면 시험장을 나가자는 중론이 모였다. 응시생들은 답안은 작성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다 날이 저물자 시험장을 나왔다(『계암일록』 1606년 7월 18일, 7월 20일, 7월 21일). 김령의 일기에는 종장 응시에 대한 언급이 없다. 문과는 초장과 종장으로 이루어진 생원진사시와는 달리, 초장·중장·종장으로 되어 있고 하루 걸러 시험이 시행되는데, 일기에는 종장이 시행되는 7월 22일의 기록이 없는 것으로 봐서는 파장된 것으로 여겨진다. 중장이 치러진 후 시관은 경상좌도 증광 문과 초시 진행 실태에 대한 장계를 준비하였다. 그 초안에는 초장과 중장에서 시제 문제로 시험이 원활하게 진행되지 못했으니, 자신을 파직시켜 달라는 내용이었다. 이처럼 장계 초안이 종장을 시행하기 전에 작성된 점은 파장의 정황을 뒷받침하고 있다. 일기를 참조하면, 그의 문과 응시 기록은 1604년에 보이기 시작하지만, 1610년에 처음으로 문과 초시에 입격하였다. 1610년 이전에는 생원진사시 초시 입격이 잦았던 반면, 1610년 이후로는 문과 초시 입격이 많았다. 이것은 김령이 처음에는 생원진사시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1610년 이후에는 문과에 더 관심을 기울인 결과가 아닌가 한다. 그는 1610년(광해 2) 서울 태평관에서 있었던 별시 문과 초시에서 3등을 하여 전시에 응시할 자격을 얻었으나(『계암일록』 1610년 9월 27일, 10월 6일), 문과 급제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1611년에는 예천에서 시행된 식년 문과 초시인 향시에 2등을 하여 회시에 응시할 자격을 얻었지만(『계암일록』 1611년 9월 24일, 10월 3일), 회시에는 응시하지 못하였다. 그는 향시를 치른 이후 계속 병중에 있었다. 문과 회시는 이듬해인 1612년 3월로 정해졌는데, 그는 그때까지도 완전히 회복되지 못하였다. 그는 이해 4월 병에서 회복되어 다시 증광 문과에 응시하게 되었다. 청송에서 시행된 증광 문과 초시인 향시를 거쳐 증광 문과 회시에서 6등으로 급제하였고(『계암일록』 1612년 7월 22일, 7월 25일), 최종적인 등위를 결정하는 전시에서는 병과 22위를 받았다.(『계암일록』 1612년 8월 2일) 【표 2】 김령의 문과 응시 이력 김령이 10년 동안 응시하지 못한 문과는 7회다. 그중 1603년(선조 36)에 있었던 정시와 식년시에 대해서는 상세하지 않은데, 그의 일기가 이해 7월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정시는 1월에 있었기에 그의 일기에서는 응시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해 8월 식년 생원진사시 회시를 위해 서울에 상경하였을 때 서울에 살았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것으로 보아 정시 때에는 서울에 올라가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식년시의 경우는 이해가 식년 문과 회시가 있었던 해이므로 1602년에 실시된 식년 문과 초시 응시 여부는 알 수 없다. 나머지 5회 중에서 1회는 1608년(광해 즉위년)의 중시(重試)인데, 이 시험은 문과 급제자 이상 당하관이 치르는 시험이므로 유학이었던 김령에게는 응시 자격이 없었다. 1605년(선조 38) 6월에 시행된 정시 문과와 12월에 시행된 별시 문과에 대해서는 일기에 별다른 언급이 없다. 6월에 시행된 정시 문과는 정시 무과 때문에 시행된 것이다. 이해 4월 28일 병조에서는 북방 오랑캐 남침을 대비하여 무사를 증강시키는 방안으로 직부 회시를 받은 무인들을 모아 정시를 치르기를 청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다(『선조실록』 선조 38년 4월 28일). 그러다가 6월에 직부 회시를 받은 무인들 대상으로 정시 무과를 시행하면서 정시 문과를 시행하였다. 12월에 시행된 별시는 선조가 3년 동안 앓다가 회복되어 그것을 경축하기 위해 시행된 별시이다. 이 별시는 막대한 경사이므로 초시를 서울과 지방에서 시행해야 했으나, 이해에 흉년이 심했던 탓에 초시와 전시를 모두 서울에서 열었다(『선조실록』 선조 38년 9월 27일). 조정에서 비정기시의 시행을 결정하면, 서울 거주자들이 지방의 친인척이나 지인 등에게 발빠르게 소식을 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김령의 경우에도 서울에서 거주하였던 처남과 처조카가 비정기시에 대한 정보를 상세히 알려 주곤 했는데, 1605년 비정기시의 경우 김령은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시험 소식을 접하지 못하였다. 1605년은 김령에게 있어 매우 바쁜 한해였다. 1605년 2월에는 증광 생원진사시 회시에 응시를 위해 상경하였다가 시험에서 낙방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알성시가 있다는 헛소문에 귀향길을 하루 늦추기도 하였다. 그리고 8월에는 의흥에서 식년 생원진사시 향시를, 9월에는 그의 거주지인 예안에서 식년 문과 향시를 치렀다. 당시 예안은 여름에 홍수가 휩쓸어 남은 게 없을 정도였다.(『계암일록』 선조 38년 8월 28일) 이러한 상황에서 비정기시 정보를 들었더라도 서울로 상경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1609년 풍기에서 시행된 식년 문과 초시는 병으로 응시할 수 없었다(『계암일록』 1609년 11월 23일). 김령이 과거에 응시한 10년 동안 식년 문과는 4회가 시행되었다. 그의 일기에 따르면, 그는 식년 문과에는 2회만 응시하였다. 1603년 식년 문과는 이해에 회시와 전시가 시행되고 전해에 향시가 시행되었는데, 일기에서 그가 향시에 응시했었는지 확인하기는 어렵다. 그는 10년 동안 시행된 식년시는 문과이든 생원진사시든 건강상의 문제가 아닌 이상 다 응시했다. 그는 2회의 식년 문과에 응시하여 1611년 예천에서 시행된 경상좌도 문과 향시에서 2등으로 입격했다. 그런데 1612년에 시행된 식년 문과 회시에는 응시하지 못했다. 그는 1611년 10월 문과 초시에 입격한 이후에 계속 병으로 고생하였다. 문과 회시 일자가 1612년 3월로 정해졌으나, 그때까지도 병석에 있었기에 서울로 올라갈 수 없었다. 1611년 2월 18일에 시행된 별시에는 응시하고자 하였으나, 말이 없어서 포기하였다(『계암일록』 1611년 2월 2일). 그는 비정기시 가운데 식년 문과와 유사한 체제로 운영되는 증광 문과에는 1604년부터 계속 응시하였으나, 알성 문과, 정시 문과, 별시 문과 등 그 외의 비정기시에는 1610년부터 응시하기 시작하였다. 사실 1607년 11월에는 처남인 홍할(洪劼)이 김령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은 서북 방면을 방비하는 일로 대대로 인재를 선발하자는 의논이 있었으니, 별시나 정시가 반드시 시행될 것이라는 것이었다(『계암일록』 1607년 11월 29일). 이 당시는 누르하치의 세력이 계속 확장되면서 조선에 귀화한 여진인을 송환하라는 요구를 하던 시기였다. 조정에서는 귀화한 여진인을 돌려보내지 않는다는 방침을 세우고 그들의 동정을 탐문하여 보고하게 하였고(『선조실록』 선조 40년 10월 16일), 평안도에서는 안주에 성을 쌓아서 서북 지역의 방비에 대비하였다(『선조실록』 선조 40년 10월 4일). 이때 만약에 대비하여 무인들을 확보하기 위해 무과를 시행하자는 논의가 나왔고, 무과와 짝하여 문과도 시행할 계획이었다. 별시 문과의 초시는 1월 22일이며, 시험 과목은 논·부·책이었고 무과의 경우에는 초시에서 2천 명을 뽑으려 하였다(『계암일록』 1607년 12월 4일). 그러나 영의정 류영경이 탄핵받은 일로 계속 연기되다가 2월 2일로 시험이 정해졌는데, 선조가 계속 병이 2월 1일 사망함으로 인해 시험은 무산되었다(『계암일록』 1608년 2월 7일; 『선조실록』 선조 41년 2월 1일). 김령은 별시 초시에 대한 소식을 자형인 전경업(全景業)에게서 들었다. 그는 별시에 대한 소식을 듣고도 시험에 응시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가 광해군이 즉위한 이후 증광시 이외의 비정기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608년(광해즉위년) 12월 시행된 대거 별시 문과 중시에서 남인들이 가장 많이 급제했기 때문이다(『계암일록』 1609년 1월 1일). 또한 그의 친구 류진(柳袗)이 식년 생원진사시에서 진사로 입격하기도 하였다(『계암일록』 1610년 3월 25일). 게다가 처가 쪽에서도 비정기시 응시를 재촉하였다. 그동안 그의 처남 홍할은 서울에 살고 있으면서 각종 시험 정보를 보내 왔었다. 그런데 1610년 5월 처조카인 홍우형(洪遇亨)이 김령에게 편지를 보내 알성시가 있을 예정이며, 시험은 표문이나 사운(四韻)에서 출제될 것이니 올라오기를 기다린다고 하였다(『계암일록』 1610년 5월 6일). 그 역시도 응시하고자 했으나, 건강상으로 문제로 확신할 수 없었다. 다행히도 시험이 연기되어 그해 8월에 상경하였는데, 이때에도 짐 싣는 말을 구하지 못하는 등 모든 일이 준비되지 않아 출발일을 하루 미루었다(『계암일록』 1610년 8월 18일). 그는 8월 27일 서울로 출발하여 9월 9일 알성 문과, 10월 1일 별시 문과 초시, 10월 15일 정시, 10월 19일 별시 문과 전시에 응시하는 등 2달을 서울에 머무른 뒤 10월 26일에 예안으로 출발하였다. 증광시 이외의 비정기시에는 이때 처음 응시한 것이었다. 그는 알성 문과와 정시에서는 실패하였으나, 별시 초시에서 ‘문풍(文風)’에 대한 책문을 지어 이하(二下)를 받아 3등으로 합격하였다. 그는 10월 19일 그의 처남 홍할과 함께 전시에 들어갔는데, 책문의 제목이 ‘도학숭장(道學崇獎) 운운’이었다. 김령은 이러한 책문은 서인들에게 의미가 있는 것으로 파악하였다(『계암일록』 1610년 10월 19일). 1610년 9월,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 등 오현의 문묘종사가 결실을 보게 되었다. 유생들이 붕당의 대결 구도 속에서도 성공적으로 문묘종사 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사림정치의 확립이라는 공통된 명분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남인은 조광조를 제외한 사현이 영남 출신이라는 점에서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서인은 그들의 학통을 오현에 접목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였고, 기축옥사와 관련되어 삭탈관직된 성혼(成渾)의 신원 등의 현안을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김령은 기축옥사를 일으켜서 최영경을 죽음에 이르게 한 이들을 ‘정철 도당’이라고 할 만큼 부정적으로 생각했기에 별시 문과 전시의 시제 출제 의도를 불순하게 생각했다. 그는 시관이 원하는 답안이 아니라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는 답안을 작성하였다. 게다가 서편(書篇)을 마무리하고 몇 글자를 더 써야 하는데 군사들이 시권을 가졌으니(『계암일록』 1610년 10월 19일), 급제를 기대할 수 없었다. 별시 문과 초시를 치른 후 전시가 시행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정시(庭試)에도 응시하였다. 이 정시는 정식 과거는 아니었다. 광해군이 서총대에 나아가 관무재(觀武才)를 시행하였는데, 이와 짝하여 유생들에게도 시험한 것이었다(『광해군일기』 권34, 광해군 2년 10월 15일 병술). 김령은 이날 시험 문제로 제시된 표문 제목이 매우 쉬워서 글을 지어 시권을 제출하려 했으나, 시간이 지났다고 받아 주지 않았다(『계암일록』 1610년 10월 15일). 이 시험에서 장원한 이사규(李士珪)는 직부 전시를 하사받았다(『광해군일기』 권34, 광해군 2년 10월 16일 정해). 1610년 그는 알성 문과에 응시하러 갔다가 별시 문과와 정시까지 치렀고, 별시 문과 초시에서 좋은 성적으로 입격했기에, 비정기 문과 응시에 자신감을 가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래서 그다음 해인 1611년에 시행된 별시 문과에도 응시하고자 했으나, 말을 구하기 어려워 포기하였다. 김령이 과거에 응시한 10년 동안 시행된 생원진사시와 문과는 총 23회로, 매년 약 2회의 시험에 응시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김령의 입장에서 향시의 경우는 시험장이 경상좌도에 정해지므로 큰 부담이 없었으나, 서울로 올라가야 하는 시험은 만만치 않았다. 김령이 1603년 증광 생원진사시 회시를 위해 서울에 올라갈 때에는 9일이 소요되었다. 8박 9일의 여정에 경상우도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응시생들과 마주칠 때면 숙소를 구하기 어려웠다. 식사는 강가나 냇가에서 지어 먹는 경우가 많았으니, 식사를 위한 짐까지 싣고 다녀야 했다. 때문에 지방 유생들이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짐을 나르고 타고 가야 할 말이 중요하였는데, 주변 사람들이 대거 시험 응시를 위해 서울로 갈 때는 말이 더 귀했다. 김령이 문과에 응시했던 당시의 문과 시행 양상을 보면, 비정기시 시행이 많았다. 비정기시는 조선 초 태종이 즉위한 이후부터 시행되기 시작하였다. 15세기 전반에는 11회의 비정기시가 시행되었으나, 15세기 후반에는 35회, 16세기 전반은 48회, 16세기 후반은 50회, 김령이 문과에 응시하던 17세기 전반에는 71회가 시행되었다. 3년에 한 번 치러지는 식년시 이외에 시행되는 비정기시가 16세기에 들어서면서 약 1년에 한번씩 시행될 정도로 늘어났고, 17세기 전반에는 1년에 1회 이상 시행되었다. 17세기 전반기에 급격하게 늘어난 비정기시는 증광시였다. 증광시는 원래 임금의 등극을 축하하기 위해서 시행되어 각 왕대에 1회씩만 시행되었는데, 선조 때에 그 원칙이 무너졌다. 선조 때에 시행된 증광시는 선조의 즉위(1568), 태조 이성계를 고려 말 권신 이인임의 아들로 잘못 기록한 것에 대해 수정을 요청한 종계변무의 성사(1589), 종계를 수정한 『대명회전』을 반사하고 종묘에 존호를 올린 것(1590), 전란 후 공신책봉을 마무리하고 임금에게 존호를 올리게 된 것(1605), 선조의 즉위 40년(1606) 등을 경축하기 위해 시행되었다. 선조 때 시행된 5번의 증광시는 임금의 즉위, 왕실의 경사로 압축된다. 증광시는 식년시의 선발 인원과 같았다. 그런데 1590년에 시행된 증광시의 경우 문과 급제 인원을 7명 더 늘이게 하였는데, 이러한 경우를 대증광시라고 하였다. 선조 때에 증광시의 시행 횟수를 늘이자, 이것이 선례가 되어 그 이후에는 임금의 즉위 이외에도 왕실의 큰 경사가 있을 때에는 으레 증광시를 시행하였다. 그 결과 선조 이전에는 한 왕대에 1회에 지나지 않았던 증광시가 선조 때 5회, 광해군 때 5회, 인조 때 3회 등이 시행되었다. 증광시는 과거시험에 적용되는 시험 형식과 입격 인원이 모두 식년시와 유사하였다. 증광시 초시는 식년시와 마찬가지로 지방에서의 향시, 성균관 유생들을 위한 성균관시, 서울 유생을 대상으로 한 한성시 등이 치러졌다. 따라서 지방 유생들은 서울에까지 올라가지 않아도 되었기에, 시험에 응시하기가 수월하였을 것이다. 김령 역시 지방에서 초시가 치러지는 시험을 위주로 응시하였다. 김령이 시험 당락의 결정이 빨리 나며 시험 빈도가 잦았던 다른 비정기시보다 증광시를 더 많이 치른 것은 서울에 가야만 했던 다른 비정기시와 달리, 증광시는 지방에서 응시할 수 있는 시험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가 다른 비정기시보다 증광시를 더 많이 치른 것은 문과 급제를 조급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처남과 처조카의 재촉으로 알성 문과에 응시하러 가긴 했으나, 문과 급제에 연연해하지는 않았다. 알성시를 치른 다음 해에 시행된 별시에 응시하려 했으나, 말이 없어서 그만둔 일도 있었다. 그가 어떻게든 별시 문과에 응시하고자 했다면 말을 준비할 여력이 없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1612년 문과 급제 이후 그의 행적을 보면, 서울에서의 관직 생활보다 예안에서 사족으로 살아가는 삶을 더 즐긴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의 건강이 타지에서 관직 생활을 할 만큼 받쳐 주지는 못한 것도 있고, 급제 당시의 정치적 상황도 그가 관직 생활하기에 적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반정 이후 인조가 여러 차례 관직을 제수했음에도, 그는 나가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