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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일기 에 대한 총서 검색 결과 전체220
  • 조선 후기 중앙관청의 숨은 실세, 경아전
    • 기록자료
    • 정치
    구성되었다. 그의 일기, 『이재난고』에는 그를 둘러싼 주변 상황뿐 아니라 인물 배경, 인물 관계, 당시의 정국 현황 등 다양한 측면의 상황이 종합적으로 드러난다. 특히 이 시기 전생서를 중심으로 형성된 당대의 권력자, 고위 관료와 중앙관청 서리들 간 네트워크가 비교적 소상히 나타나 있다. 조선의 행정체제는 법과 제도, 관행으로 운영되었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보이는 행정체제에는 관습적인 운용 과정 이면에 인적인 네트워크가 깔려 있고, 이를 기반으로 중앙관청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의 생존 방식과 삶이 녹아 있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신분과 직역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조선 후기의 사회에서, 정교하고 체계적인 행정조직과 운영체제 아래 사적인 네트워크가 공식적인 체제 물밑으로 강하게 작용하는 모습을 살펴보려 한다. 이 과정은 조선 후기의 사회 변동과 사적 경제의 발달로 국가통제에서 벗어나는 다양한 유통, 상업망 등 경제적 현상과 함께 구성되어 있다. 이런 현상은 중앙관료층뿐 아니라 각 관청에서 행정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경아전층에서도 정치경제, 사회적으로 대를 이어 존속하고 있었다. 또 이 층들은 상호 윈윈 관계를 지속하고 점차 관습화되고 있었다.
  • 조선시대 농민들의 농사짓기
    • 기록자료
    • 경제
    서 농서(農書), 일기(日記) 등을 주요한 사료로 살필 것이다. 조선시대 농민들의 농사짓기라는 역사적 행위를 전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살피면서 이와 더불어 생활사와 미시사에 해당하는 부분에 주목하여 정리할 것이다. 농사짓는 활동을 크게 시간적인 흐름에 따라 몇 가지 작업 과정으로 나누어볼 수 있고, 또한 그러한 작업과정은 기술적인 측면에서 몇 가지 단계로 묶어서 살펴볼 수 있다. 논밭을 일구어 적절하게 토양을 다스리는 작업, 작물을 재배하는 과정, 농기구를 활용하고 시비 기술을 적용하는 방식, 물을 다스리리는 기술과 도구를 개발하는 모습 등을 주목할 것이다. 그리고 자연재해로 말미암아 농민들이 겪은 고난을 극복하는 양상도 추가할 것이다. 이와 같이 작물 재배라는 단순하고 반복적이면서 기본적인 농사짓는 노동 과정뿐만 아니라 이외의 농민들의 농사짓기에 관련된 생활노동 등을 살펴볼 것이다. 【그림 1】 김홍도, 〈벼타작〉, 국립중앙박물관조선시대 농민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가장 기원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풍년이 드는 것이었다. 가을 수확을 마치고 개상에 볏단을 내리쳐 타작하는 농민들의 웃는 모습과 이들을 감독하면서 음주와 흡연을 즐기는 마름으로 보이는 인물의 시큰둥한 모습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또한 조선시대에 실제 농업생산을 담당하였고 나아가 농업 기술의 변화 과정을 주도하였던 농민층을 중심으로 농사짓기의 실제 모습과 변화 양상을 사례 중심으로 정리하고 이와 더불어 각 지역에 각인되어 있는 농업 기술의 특색과 성격, 시대적 흐름 속에서 변화하는 농사짓기의 특징과 의의를 서술할 것이다. 그리고 농민들의 농촌생활, 생업과 도구에 주목하여, 농업생산이 곧 사회적 생산이라는 점, 그리고 조선은 농업생산이 그 토대를 이루는 사회, 나라, 세상이라는 점을 주목한다. 이는 농사짓기를 바탕으로 인민의 삶, 생활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나아가 나라의 운영, 지배층의 생활, 상인 공장의 물물교환 등이 가능해질 뿐만 아니라 인간세계의 추상적인 측면인 제도, 사상, 문화, 예술, 종교 등도 농민들의 농사짓기에 의지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따라서 농민생활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문인 농사짓기에 초점을 두어서 본서의 내용을 구성하고 서술한다. 본서의 서술을 농민들의 농사짓기에 집중하기 위하여 농민생활의 여러 측면을 배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말해서 농민생활을 구성하는 내용 가운데 상당 부분을 본서의 내용 구성 및 서술에서 가능한 한 반영하지 않는 방향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농민의 생산활동과 실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생산물의 소비와 유통에 연관된 활동은 언급해야 할 연관 지점이 너무나 광범위하고, 더구나 우선 그 연관지점을 언급한다면 국가적·사회적 경제활동에 대한 부분까지 모두 살펴보아야 했기에 제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국가의 부세 수취와 관련된 움직임도 일단 본서의 내용에서 빼 놓고자 한다. 농민의 경제활동의 주요한 내용인 생산, 소비, 유통과 관련된 생활사적 부분은 다른 기회에 연구를 진행하고자 한다. 또한 농촌사회에서 사회조직으로 운영되고, 그리하여 지배층 중심의 사회질서 유지의 관건이었던 향약, 동약 등에 대한 서술도 다루기 어렵다고 파악하였다. 본문에서 본격적으로 서술하는 농사짓기의 구체적인 내용은 작업 내용의 성격을 중심으로 다음과 같은 세부항목으로 나누어 우선적으로 고려할 것이다. 먼저 농사짓기의 공간 배경이자, 생산조건에 해당하는 경지를 만들어 나가는 데 주목한다. 논밭을 확보하기 위한 과정으로서 개간, 간척, 등을 살필 것이다. 다음으로 논밭에서 경작하는 작물 재배 기술의 실제에 관심을 기울인다. 세부적으로 논농사와 밭농사가 중심이 될 것이다. 그리고 논밭에서 농민들이 활용하던 농기구에 대해서 개괄적으로 소개한다. 이어서 농사짓기의 생산조건에 해당하는 물 관리 기술, 즉 제언, 천방 등 수리시설의 축조와 관리에 대해서 살핀다. 이와 더불어 두레, 무자위 등 수리도구에도 주목할 것이다. 이와 같이 농사짓기의 기술적인 요소에 주목하는 것과 더불어 농사짓기의 기술적인 요소 이외의 측면으로 농업생산에 차질을 초래하는 재해에 대한 것과 이를 대비하기 위한 방책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농민들의 농사짓기가 갖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되새길 것이다. 이상과 같은 여러 가지 요소와 측면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는 작업을 통해 조선시대 농사짓기의 진면목을 찾아보는 데 본서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길 기대한다.
  • 조선의 양반, 가정을 경영하다 -18세기 대구 최흥원의 가사활동을 중심으로-
    • 기록자료
    • 경제
    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의 관찰자료를 비롯하여 개인이 남긴 문집, 고문서, 일기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개인의 일상을 시간의 흐름을 따라 미시적으로 잘 보여 주는 자료는 일기이다. 양반 가운데 일기를 남긴 인물이 상당수 있으며, 수십 년 혹은 몇 대에 걸쳐 쓴 일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기도 하다. 수십 년간 작성한 생활일기는 양반이 집안을 어떻게 경영했고, 남성의 가사활동 내용은 무엇이었는지,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 미시적으로 살펴보기에 안성맞춤인 자료이다. 2,000년 이후 고문서나 일기자료를 통해 양반 남성의 사생활이나 일상 및 살림하는 남성에 대한 논문과 대중서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는 법제적 연구와는 달리 가장의 역할을 확인했고, 가사노동, 자녀 양육, 가족 돌보기에 주목하는 남성의 모습을 일부 복원했다. 이 책은 필자가 최흥원이 50여 년 동안 기록한 생활일기인 『역중일기』를 통해 조선 후기 남성의 가사활동과 그 의미에 대해 논문으로 작성한 것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 살림살이하는 남성의 모습이 역사의 수면 위로 올라왔지만, 집안의 경영과 가사활동의 구체적인 양상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살펴본 글은 드물다. 지금부터 50여 년 동안 가사활동에 충실했던 남성, 18세기의 대구 양반 최흥원을 만나러 가자. 【그림 1】 《해동지도》, 〈대구부지도〉, 서울대학교 규장각
  • 조선의 양반, 가정을 경영하다 -18세기 대구 최흥원의 가사활동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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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
    1. 최흥원, 일기로 들여다보다 50여 년의 일상, 책력에 기록 18세기의 대구 양반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 1705-1786)은 30대부터 사망하기 직전인 80대에 이르기까지 50여 년간 일기를 썼다. 오늘날의 달력에 해당하는 책력(冊曆) 위에 일기를 썼기 때문에 『역중일기(曆中日記)』로 부른다. 일기의 주인공은 옻골 출신이다. 옻골은 대구부 북쪽 팔공산 아래에 위치한다. 마을은 남쪽을 제외한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경주최씨 9세 최동집(崔東㠍, 1586-1661)이 17세기 전반에 옻골에 정착한 이후 가계는 위남(衛南, 1611-1662) → 경함(慶涵, 1633-1699) → 수학(壽學, 1652-1714) → 정석(鼎錫, 1678-1735) → 흥원으로 이어졌다. 【그림 2】 올곶 전경 최흥원의 아버지는 최흥원의 나이 31세(1735)에, 어머니는 최흥원의 나이 61세(1765)에 세상을 떠났다. 최흥원의 아우로는 재열(再悅, 생몰 미상), 흥점(興漸, 1709-1771), 흥건(興建, 1712-1769), 흥후(興厚, 1717-1799)가 있다. 첫째 아우는 이른 나이에 사망하여 일기를 쓸 당시에 최흥원을 포함하여 형제는 4명이었다. 최흥원은 17세(1721)에 절도사를 역임한 밀양 출신의 손명대의 딸과 혼인했다. 부인과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는데, 부인은 최흥원의 나이 36세(1740)에 사망했다. 첫째 아들은 주진(周鎭, 1724-1763)으로, 최흥원보다 무려 23년 일찍 사망했고, 둘째 아들은 돌이 지난 1741년에 죽었다. 딸은 칠곡 석전(石田)의 이경록(李經祿)과 혼인했다. 최흥원은 18세(1722)에 생원 초시에 합격했지만, 관직으로 나아가 입신양명으로 가문의 위상을 높이는 대신 학자로서 소양을 키우고 후학을 양성하는 데 치중했으며, 옻골 최씨가 영남 퇴계학파의 주류로 편입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부양가족의 생계유지와 가문의 정체성 확립에도 기여했다. 그는 아버지를 이어 집안을 경영하는 가운데 개인의 일상뿐만 아니라 집안의 크고 작은 사건을 책력 위에 자세하게 기록했다. 일기는 31세(1735)에 아버지의 병이 위독하던 때의 일을 기록한 것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일기를 본격적으로 쓴 것은 33세(1737)부터이며, 82세(1786)에 사망하기까지 50여 년간 꾸준하게 일기를 썼다. 현재 남아 있는 『역중일기』는 최흥원이 책력 위에 직접 쓴 것을 나중에 옮겨 베낀 것으로, 모두 4권이다. 옻골 경주 최씨 종중에 전하며, 현재 한국국학진흥원 웹사이트(https://diary.ugyo.net/)를 통해 원문 이미지와 탈초본이 제공된다. 2021년에는 일기의 국역본이 간행되었다. 책력을 베껴 옮기거나 후대에 전해지는 과정에서 내용의 교정, 수정, 삭제 등이 있었지만, 일기에 담긴 풍부한 내용은 이미 사료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 【그림 3】 『역중일기』 권1, 한국학진흥원1735년 3월부터 4월 17일까지의 내용 일기에는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최흥원을 중심으로 어머니, 아우, 아들, 손자, 조카, 숙모와 사촌들, 대구의 지묘(智妙), 종지(宗旨), 내동의 여러 일족, 대구 원북(院北)[현재 대구 서구 원대동] 외가의 외숙부와 조씨 사촌들, 밀양 죽서(竹西) 처가의 장모와 손씨 처남들, 안동 하회의 누이동생과 매부 및 풍산 류씨 사람들, 아들 주진의 처가인 풍산 류씨 집안사람들, 현풍의 사촌누이와 곽씨 조카들, 칠곡 석전의 고모와 이씨 사촌들 및 딸과 사위, 둘째 제수씨의 친정인 안동 법흥(法興) 고성이씨 집안사람들, 셋째 제수씨의 친정인 의령 신반(新反)의 안동 권씨 집안사람들, 막내 제수씨의 친정인 경주 하곡(河曲)의 오천 정씨 집안 사람들, 사촌 제수씨의 친정인 구미 오산(吳山)의 인동 장씨 집안사람들, 그리고 최흥원이 거느린 종과 일꾼 등이다. 일기에는 이들의 일상을 배경으로 최흥원이 교유했던 인물과 최흥원의 집을 방문한 인물들과의 이야기 및 최흥원이 겪고 들은 사건들이 시간순으로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다. 최흥원은 자신이 경험하거나 알고 있는 사실을 빠짐없이 기록하고자 했으며, 빠트린 것은 나중에라도 기록했다. 일기에 등장하는 인물은 최흥원과 어떤 사이고, 이름은 무엇인지 가능한 객관적으로 기록하고자 했다. 일기는 단순히 최흥원 개인의 사적이고 내밀한 기록이 아니라 공적인 성격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일기에는 ‘기록해야 한다는 의식’이 강하게 작동하고 있다. 그렇다고 무미건조한 사건의 기록만은 아니다. 50여 년 동안 겪은 무수한 기쁨과 슬픔 및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살이에 대한 회한이 객관적인 기록 사이사이에 잘 스며 있다. 최흥원이 기록에 충실한 것은 집을 경영하는 가장의 역할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다. 조선 후기의 몇몇 일기는 대를 이어 작성하며, 그 가운데는 가장이 집안일과 일기 쓰기를 자녀에게 맡긴 경우도 있다. 최흥원은 아들이 일찍 죽고 손자도 어려서 집안일을 물려주지 못한 가운데 죽는 날까지 일기를 작성했다. 67세(1771)부터 82세(1786)의 일기는 빠진 달도 있고 이전의 기록에 비해 내용도 소략한데, 이는 기력이 쇠하여진 것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최흥원은 죽을 때까지 가장의 역할에서 자유롭지 못했으며, 집안일의 기록에도 최선을 다했다.
  • 왕의 비서실, 승정원 사람들과 승정원일기
    • 기록자료
    • 정치
    3. 『승정원일기』의 편찬과 활용 승정원의 개편과 일기 제목의 변화 【그림 12】 『승정원일기』,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1870년대 이후 구미 열강 및 일본과 통상조약을 체결하고 신문화를 흡수한 1894년, 조선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분야에서 근대사회로의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1894년에 단행된 갑오경장(甲午更張)은 의정부와 육조를 중심으로 한 종래의 행정조직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근대 일본의 내각제를 모방하여 궁내부, 의정부의 이부와 내무·외무 등 팔아문을 설치하고 관제를 대폭 개정하였다. 이때 승정원은 궁내부에 부속되어 승선원으로 개칭되었으며, 도승선, 좌승선, 우승선, 좌부승선, 우부승선 각 1명과 기주관(記注官), 기사관(記事官), 주사(主事) 각 2명을 두어 왕명의 출납과 일기 기록의 임무를 맡게 하였다. 『승정원일기』의 명칭 또한 『승선원일기』로 바뀌었다. 1894년 10월에는 승선원을 폐지하고 궁내부 대신이 왕명의 출납을 대신하면서 『궁내부일기』가 작성되었고, 1895년(고종 32) 4월, 궁내부에 비서감을 설치하면서 다시 『비서감일기』로 명칭이 바뀌었다. 1895년 11월에는 비서감을 비서원으로 개칭하면서 『비서원일기』가 나타났다가, 1905년, 비서원을 다시 비서감으로 개칭하면서, 『비서감일기』로 환원되었다. 그러나 1907년, 궁내부 관제가 대폭 축소되어 비서감이 폐지되고, 비서감의 기록 기능을 규장각에서 담당하면서는 『규장각일기』가 작성되었다. 1894년 이후 이처럼 다양한 명칭의 『승정원일기』가 나타나는 것은 근대사 이후 왕실 비서실 기능의 거듭되는 변화와도 궤도를 같이한다.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정상적인 왕권 행사가 큰 제약을 받았고 이것이 비서실인 승정원의 기능에도 그대로 적용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승정원일기』를 계승한 이러한 자료들은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이 일제의 의도에 따라 편찬되면서 『조선왕조실록』의 정통성을 상실하고 기록이 소략한 실정에서 19세기 후반 이후 국가의 공식 기록으로서 그 부족분을 상당히 메울 수 있다고 여겨진다. 『승정원일기』의 다양한 명칭은 결국, 격동의 시기를 겪으면서 여러 차례 관제 변화를 겪은 근대사의 모습이 『승정원일기』의 제목에도 압축적으로 반영되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역사의 격동 속에서도 조선시대 승정원의 기록은 그대로 이어져, 『승정원일기』는 총 3,243책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남아 있다. 『조선왕조실록』이 조선의 역대 왕의 기록이 단절됨 없이 꾸준히 정리된 기록이라는 점에서 세계적인 가치를 지닌 것처럼, 『승정원일기』 또한 인조 대 이후에 한정되기는 하나, 288년간의 역사 기록이 단절됨 없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를 가장 방대한 분량으로 정리하고 있다는 점은 전통시대 기록문화의 우수성을 한층 돋보이게 한다. 【표 1】 『승정원일기』의 국보 지정 내역
  • 왕의 비서실, 승정원 사람들과 승정원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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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승정원일기』에는 어떤 내용이 기록되어 있을까? 이순신 장군이 남긴 마지막 말씀 『승정원일기』에는 흥미로운 사례들이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다. 1598년(선조 31) 11월 19일,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 직전 남긴 유명한 말씀,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한국인 누구에게나 극적인 감동으로 다가오는 말이다. 그럼 이 말씀의 출처는 어디에서 나왔을까? 바로 『승정원일기』이다. 1631년(인조 9) 4월 5일, 인조가 이원익(李元翼)을 소견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대화를 주고받았음이 나타난다. 상이 이르기를, “전조가 병력이 강성하여 적을 토벌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내란이 연달아 일어났으니 참으로 경이 우려했던 것과 같다” 하였다. 이원익이 아뢰기를, “소신의 소견으로는, 고(故) 통제사(統制使) 이순신 같은 이는 쉽게 얻을 수 없습니다. 요즘에는 이순신과 같은 자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왜란 당시에 이순신 하나밖에는 인물이 없었다”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이순신의 아들 이예(李䓲)가 현재 충훈부도사로 있는데 그도 얻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왜란 때에 이순신이 곧 죽게 되자 이예가 붙들어 안고서 흐느꼈는데, 이순신이 ‘적과 대적하고 있으니 삼가 발상(發喪)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이예는 일부러 발상하지 않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전투를 독려하였습니다” 하였다. ―『승정원일기』 32책(탈초본 2책), 인조 9년(1631) 4월 5일 이어서 인조는 인재 천거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대화를 이어 갔다. “옛 대신들은 필히 인재를 얻어 천거하였다. 경도 쓸 만한 인재를 천거하겠는가?”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이순신 같은 사람이 있다면 천거할 수 있겠지만 신은 병으로 몇 해 동안 칩거하여 사람들과 접하는 일이 드무니, 어찌 누가 쓸 만한지를 알아서 천거하겠습니까. 선묘조(宣廟朝)에 신은 이순신의 훌륭함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천거하였는데 통제사로 등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비국(備局)에서 다시 원균(元均)을 천거하여 통제사로 의망(擬望)하자, 신이 치계(馳啓)하여 이순신을 체차하고 원균으로 대신하면 틀림없이 일이 잘못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재삼 아뢰었으나 비국에서는 끝내 이순신을 체차하였습니다. 원균이 패배한 뒤에 다시 이순신으로 하여금 대신 군대를 이끌게 하였으나 대세가 이미 기울어 결국 패하고 말았으니, 지금까지도 이 일을 생각하면 울분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승정원일기』 32책(탈초본 2책), 인조 9년(1631) 4월 5일 위의 기록에서 이원익이 선조 대에 이순신을 천거한 사실과 더불어,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천거한 부분에 대해서는 울분을 가눌 수 없다고 하였음이 나타난다. 인조와 이원익의 대화가 『승정원일기』에 정리되는 과정에서,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말이 기록되었고,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면서,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다. 【그림 18】 『승정원일기』, 32책, 인조 9년 4월 5일 무신,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그림 19】 남해 관음포 이충무공 전몰 유허 이락사문,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에서 전재
  • 조선의 양반, 가정을 경영하다 -18세기 대구 최흥원의 가사활동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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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한 손명대이다. 일기에는 처남 손진민, 손진방 형제가 자주 등장한다. 손진민은 1730년(영조 6) 무과에 급제하여 개천군수, 진도군수, 병마절도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등을 역임했다. 두 집안 사이에 편지가 자주 오고 갔을 뿐만 아니라 물품도 빈번하게 주고받았다. 처가에서는 인삼 1돈, 환약 5알을 주거나, 기장쌀 두 말, 수박 다섯 개, 참외 열 몇 개 등을 한꺼번에 주기도 했다. 최흥원 역시 처가에 생활용품을 비롯하여 돈도 여러 번 보냈다. 서로가 물질적으로 정서적으로 큰 힘이 되었다. 진도수령을 역임 중인 처남은 수시로 전복, 민어, 빗, 매, 돈 등을 보내기도 했다. 둘째 제수씨의 친정인 안동 법흥, 막내 제수씨의 친정인 경주 하곡, 현풍에 사는 곽정(郭珽)에게 시집간 사촌 누이와 곽씨 조카들, 종수씨(從嫂氏)의 친정인 인동 오산의 인동 장씨와도 교류가 있었다. 책을 빌리거나 선물을 주고받거나 어려운 일이 생기면 도와주기도 했지만, 외가와 처가에 비해 물품의 교류는 적었다. 안부를 비롯한 연락을 주고받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1740년 8월 22일-23일에는 옻골 최씨와 혼인한 여러 성씨들이 최흥원 집에 모여 함께 시간을 보냈다. 석전, 하회, 순흥, 지례, 의령에서 손님이 왔는데, 석전의 광주 이씨, 하회의 풍산 류씨, 지례의 의성 김씨 등은 옻골 최씨와 혼인이 이루어진 성씨이다. 이들은 평소에도 서로 책을 빌려주고 공부하다가 의문 나는 점에 대해 질의하거나 함께 토론하기도 했다. 박 사장(査丈) 집에서 『장릉지(莊陵志)』 2책을 빌려 왔다. ―1739년 3월 13일 상만이 하상(河上)[하회]에서 돌아왔는데, 『서애집』 9권과 『징비록』 1권을 빌려 왔다. ―1741년 6월 9일 상만을 하상에 보내면서 『예의보유』 3책을 매형[류성복]에게 빌려주었다. ―1743년 1월 12일 하상 심부름꾼이 돌아가는 길에 류희연[류성복]에게 『근사록』 4책을 보냈는데, 묻고 배우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마지막 권의 표지 안쪽에 써서 주었다. ―1748년 1월 2일 둘째 아우가…김탁이(金濯而)[김강한의 자字]의 사칠이기론(四七理氣論)에 대한 의혹이 갑자기 풀렸다고 한다. ―1746년 5월 23일 최흥원은 사돈 집안과 물품을 주고받으면서 경제적인 교류도 했지만, 수시로 책을 빌려주거나 공부하는 가운데 모르는 것에 대해 질의하는 등 지적 정보도 공유했다. 박 사장(査丈) 어른이 최흥원 집에 머무를 때 함께 담론하면서 최흥원은 이전에 듣지 못했던 것을 들었다. 특히 사장의 의론은 치우치지 않는 가운데 고상한 견해를 보인 점에서 솔깃했다. 상대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고기반찬을 대접했다. 최흥원의 조카는 이상정 집안의 딸과 혼인했다. 며느리가 신행 올 때 이상정과 이광정 형제가 함께 올 것으로 기대했으나, 이광정만 왔다. 최흥원은 이들을 직접 맞이했다. 신부가 예를 행하는데, 행동거지를 보니 속된 부녀자가 아니란 것을 알 만하여 매우 사랑스럽고 귀한 마음이 생겼다. 그때 원북의 외숙부도 왔다. 다음날에는 조중길이 와서 이광정과 어울렸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이광정은 사칠설(四七說)을 강론하기도 했다. 최흥원은 이광정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가운데 의지할 뜻을 품게 되었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사돈은 형식적인 관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학문과 사상 및 정치를 논하는 벗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사돈 집안끼리는 비슷한 학문적 성향을 띄게 된다. 혼인을 매개로 집단 지성이 형성된 것이다. 혼인은 학문적 위상과 사회적 위상을 결정하는데 매우 의미 있는 행위이다. 혼인에 심혈을 기울이는 이유이다.
  • 왕의 비서실, 승정원 사람들과 승정원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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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승정원일기』에는 어떤 내용이 기록되어 있을까? 1759년 영조의 혼례식 현장 1759년 6월 초여름, 66세의 신랑 영조는 15세 신부 정순왕후(貞純王后)를 계비로 맞아들였다. 조선 왕실의 최대 경사인 결혼식의 모습은 『승정원일기』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을까? 먼저 영조가 66세라는 고령인 점을 고려하여, 계비가 될 후보들의 금혼 연령을 규정한 내용이 흥미를 끈다. 1759년 5월 4일, 예조판서 홍상한(洪象漢)이 계비 간택을 위한 금혼령을 속히 내릴 것을 건의하면서, 금혼 연령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영조의 뜻을 물었다. 이에 영조가 18세에서 20세를 금혼 범위로 하는 것이 좋겠다는 입장을 피력한 내용이 『승정원일기』에 보인다. 영조가 비교적 금혼 연령을 높인 것은 자신의 나이를 어느 정도 감안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는 선조가 51세의 나이로 인목왕후(仁穆王后)를 계비로 맞이할 때 비교적 연령이 높은 19세의 신부를 간택한 사례와도 유사한 사례로 볼 수가 있다. 그런데 다음 날인 1759년 5월 5일의 기록에는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영조가 제시한 금혼 연령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즉 세족대가(世族大家)에는 18세의 규수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금혼 연령 범위를 16세에서 20세로 할 것을 주장하였고, 영조는 이를 수용하여, 금혼령을 내리고 처녀 단자를 올리게 할 것을 예조에 지시하였다. 결국 정순왕후가 15세의 나이로 최종 간택된 점을 고려하면, 당시 조혼의 풍습이 사회 전반에 만연했던 상황을 짐작할 수가 있다. 【그림 22】 『[영조정순후]가례도감도청의궤』의 반차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실록 기록과 비교하여 『승정원일기』는 보다 상세하게 혼례식의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영조실록』에는 6월 9일에 “삼간택을 행하여 유학(幼學) 김한구(金漢耈)의 딸로 정하고,” “대혼(大婚)을 6월 22일 오시(午時)로 택길(擇吉)하고 이날 정사를 열어 김한구를 돈녕도정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런데 『승정원일기』에는 이에 앞서 6월 2일에 재간택을 하여 김한구 등 6명의 딸을 뽑은 기사를 싣고 있어서 간택의 과정에 대해서 보다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가 있다. 그리고 6월 9일의 기록에는 김한구의 딸을 왕비로 정하고 왕이 빈청(賓廳)에 의견을 구하는 과정과 예조에서 친영(親迎)의 길일을 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한 내용 등 실록에 언급되지 않는 내용이 실려 있다. 6월 13일의 납채(納采) 의식에 대해서도 『영조실록』은 ‘국왕이 명정전(明政殿)에 납시어 납채례(納采禮)를 행하였다. 정사(正使) 유척기(俞拓基)와 부사(副使) 조운규(趙雲逵) 등이 궁궐 마당에서 4배를 행하고 채여(彩輿)를 따라서 나갔다’라고 간략히 기록하였지만, 『승정원일기』에는 납채의 의미를 기록한 문장을 비롯하여, 국왕을 시립(侍立)한 신하의 명단, 왕의 복장과 이동 경로, 가마의 위치 등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오늘날 결혼식장에서 거행된 혼례식 행사로 볼 수 있는 친영(親迎) 의식에 대해, 실록에는 ‘국왕이 어의궁(於義宮)에 나아가 친영례를 행하였다’라고 간단히 언급했지만, 『승정원일기』의 같은 날 기록에는 인시(寅時)에 왕의 거둥이 있자 도승지를 비롯한 승정원의 승지, 기사관 등이 배종(陪從)하고, 해당 부서의 군직(軍職)들이 수가(隨駕)한 사실과, 대가(大駕)가 어의궁 막차에 도착한 후 왕이 승지들을 불러 지시한 내용, 환궁 후 약방에서 왕을 문안한 내용까지 정리되어 있다. 이처럼 『영조실록』과 비교해 볼 때 『승정원일기』에는 영조의 혼례 절차가 보다 생생히 기록되어 있다. 물론 영조의 결혼식은 의식의 모습을 자세한 기록과 함께 그림으로 정리한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英祖貞純后嘉禮都監儀軌)』가 있어서 그 모습을 아주 상세히 알 수 있지만, 『승정원일기』의 기록을 통해서도 당시 혼례식 현장에 참석한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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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승정원일기』에는 어떤 내용이 기록되어 있을까? 고종, 춘당대에서 과거시험을 실시하다 【그림 26】 〈동궐도〉,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소장창덕궁의 춘당대 1866년(고종 3) 3월 3일의 기록에는 고종이 직접 창덕궁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유생들을 시험으로 선발한 정황이 나온다. 왕이 거둥한 시간과 입시한 신하의 명단, 왕의 복장과 궁궐에서의 이동 경로, 시험 실시 과정, 시상에 관한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특히 시험 실시 과정에서는 왕과 신하들이 주고받은 대화들을 모두 기록하여 현장의 모습을 그대로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유생들의 입장 여부, 강의할 서책의 낙점과 추첨에 의해 강의할 부분이 정해지는 과정, 시권(試卷)의 제출, 합격자 발표와 포상 내용 등을 빠짐없이 기록하여 현장의 모습을 중계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승정원일기』, 고종 3년(1866) 3월 3일의 기록을 보자. 임금이 춘당대에 거둥하여 춘도기(春到記)에 친림하여 유생을 시취(試取)하였다. 이때 입시한 도승지 이재면, 좌승지 황종현, 우승지 송희정, 좌부승지 이원회, 우부승지 정기회, 동부승지 조성교, 기사관 김경균, 가주서 방효린 등이 차례로 시립하였다. 때가 되자, 통례가 무릎 꿇고 외판(外辦)을 계청하였다. 임금이 익선관과 곤룡포 차림으로 여(輿)에 올라 선화문(宣化門)을 나갔다. 약방제조 김병주와 부제조 이재면이 앞으로 나와 아뢰기를, “아침 일찍 수고로이 거둥하셨는데 성상의 체후는 어떠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한결같다고 하였다. 이어 협양문(協陽門)을 나가 건양문(建陽門)·동룡문(銅龍門)·청양문(靑陽門)을 지나 춘당대로 갔다. 통례가 꿇어앉아 여에서 내리기를 계청하자 임금이 여에서 내려 좌(座)에 올랐다. 이재면이 아뢰기를, “표신(標信)을 내어 둘러친 포장(布帳)을 열어 유생을 입장시킬까요?”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미 내린 표신으로 거행하라” 하였다. … 황종현이 입문 단자(入門單子)를 읽었다. 임금이 시관에게 부(賦)의 제목을 쓰라고 명하였는데, ‘대궐문에 나와 정치에 대해 묻는 날에 조정과 향당에 하유하시니 기강이 서고 풍속이 바로잡히네(端門訪治之日 諭朝廷鄕黨 立紀綱正風俗)’라는 것이었고, 마감 시간은 신시였다. 김세균이 꿇어앉아 써서 읽기를 마치자 홍대종이 받들고 나가 내걸었다. 황종현이 강(講)할 서책 망단자를 올리자 임금이 『시전』을 낙점하였다. 이어 강을 열라고 명하니, 황종현이 아뢰기를, “강할 장(章)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추첨해서 하라” 하였다. 임금이 직접 4명의 강을 받았다. 황종현이 아뢰기를, “전한을 회권(會圈)하라고 명하셨는데, 정관을 패초하여 정사를 열게 하여 하비(下批)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 “첫 번째 장이 이미 들어왔으니, 둘러친 포장을 열어 시권(試券)을 낸 유생들을 차례로 내보낼까요?”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임금이 직접 5명의 시권을 받고, 이어 소차로 들어갔다. 잠시 후에 임금이 소차를 나와 직접 6명의 시권을 받고 임금이 소차로 들어갔다. 조연창(趙然昌)이 강을 끝내고 방목(榜目)을 써 들였다. 이재면이 사알을 통해 구전으로 여쭙기를, “이번에 몇 명을 뽑으며, 과차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니, 사알을 통해 구전(口傳)으로 하교하기를, “10명을 뽑으라” 하였다. 잠시 후에 소차를 나왔다. 김세균이 고시(考試)를 마쳤다. 임금이 과차(科次)를 하라고 명하자 김세균이 과차를 아뢰었다. 홍대종이 첫 번째 시권을 읽자 임금이 그치라고 하였다. 김세균이 아뢰기를, “등차를 어떻게 쓸까요?”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제일 첫 번째 장은 삼하(三下)라 쓰고, 두 번째 장은 초서(草書)로 삼하라 쓰고, 그 나머지는 모두 차상(次上)이라고 쓰라” 하였다. 김세균이 등차를 다 쓰고 나자, 황종현이 아뢰기를, “봉한 곳을 뜯는 것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도승지가 봉한 곳을 뜯으라” 하였다. 이재면이 봉한 곳을 뜯었다. 김세균이 이르기를, “예차(豫次)에다 외(外) 자를 쓸까요?”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이어서 전교를 내려 합격자에 대한 구체적인 시상 내용이 모두 기록이 되어 있다. “춘도기 강에서 통(通)으로 수석한 유학 이신국(李愼國)과 제술의 부에서 삼하로 수석 한 유학 홍만식(洪萬植)은 직부전시(直赴殿試)하고, 강에서 통으로 2등 한 유학 김복성(金復性) 등 7명과 제술에서 초삼하로 2등 한 김영수(金永壽)는 직부회시(直赴會試)하고, 강에서 약(略)으로 3등 한 유학 유정식(柳廷植) 등 6명과 제술에서 차상(次上)으로 3등 한 유학 조병호(趙秉鎬)에게는 2분(分)을 주고, 강에서 약으로 4등 한 유학 권재학(權在學) 등 6명과 제술에서 차상(次上)으로 4등 한 진사 조용섭(趙容燮) 등 2명에게는 1분을 주고, 강에서 조(粗)로 5등 한 생원 정달교(鄭達敎) 등 13명과 제술에서 차상으로 5등 한 생원 유도(柳燾) 등 5명에게는 각각 『규장전운(奎章全韻)』 1건(件)을 사급하라” 하고, 또 명하여 전교를 쓰게 하기를, “합격한 유생들을 내일 대령시키라”고 하였다. 통례가 예가 끝났음을 무릎 꿇고 아뢰니 임금이 자리에서 내려왔고, 통례가 여에 타도록 계청하자 임금이 여에 탔다. 청양문·흥덕문(興德門)·명광문(明光門)·동룡문·건양문을 지나 협양문에 이르렀을 때 병조참판 이주철이 방장(放杖)을 계품하였고, 이원회가 표신을 내어 해엄(解嚴)하기를 청하였다. 선화문을 지나 대내로 돌아가니 신하들이 차례로 물러 나왔다. ―『승정원일기』 2700책(탈초본 128책), 고종 3년(1866) 3월 3일 실록은 이날 춘당대에서 고종이 직접 참여한 시험이 있었음을 간략히 기록하고 있다. 위의 기록에서는 『승정원일기』가 현장 상황을 그대로 중계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접할 수가 있다. 더욱이 왕이 시험의 전 과정에 결정권을 행사하고 있음이 나타나, 조선이 왕조 국가가 확실하다는 모습을 확인할 수가 있다. 위의 사례에서는 무엇보다 『승정원일기』의 기록이 왜 전통 생활사의 보고가 될 수 있는지를 실증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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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 말 『승정원일기』의 기록 정신과 활용 【그림 27】 『승정원일기』, 244책, 숙종 1년 1월 23일 임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승정원일기』에 나오는 날씨 관련 기록 위에서 여러 사례를 살펴본 것처럼 『승정원일기』는 매우 다양한 내용을 다루고 있으며, 그것도 매우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음이 나타난다. 특히 실록의 기록과 비교하며 같은 사안에 대해 왕과 신하의 대화체로 서술하여 마치 현장에 직접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도 받을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승정원일기』의 자료적 가치를 보다 돋보이게 하는 요소는 앞부분에 날씨와 매일의 담당자를 기록한 점이다. 특히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날씨 관련 자료는 288년간의 날씨 기록이 빠짐없이 정리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날씨는 청(晴, 맑음), 음(陰, 흐림), 우(雨, 비), 설(雪, 눈) 등으로 매일의 날씨가 기록되어 있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오전 맑음, 오후 눈(午前晴午後雪)’, ‘아침 비, 저녁 맑음(朝雨夕晴)’ 등으로 하루 중 일기의 변화까지도 기록하였으며, 비가 내린 경우, 측우기로 수위를 측정한 결과까지 꼼꼼히 정리하였다. 『승정원일기』의 날씨 관련 기록만을 모아도 조선시대 288년간의 일기 상황을 확실히 파악할 수 있고 전통시대 기후 연구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기후 예측에도 큰 도움을 안겨 줄 것으로 기대된다. 이처럼 매일의 기후가 단절됨이 없이 기록된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은 사례일 것이며, 이러한 자료의 통계 처리는 오늘날에도 유효하게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림 28】 『승정원일기』, 1767책, 정조 20년 9월 10일 임자,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승정원일기』에 나오는 강아지 관련 기록 또한 『승정원일기』에는 본 내용을 기록하기 전에 승정원 벼슬아치들의 실명(實名)을 꼭 적었다. 앞부분에는 6명의 승지를 비롯하여 주서, 가주서, 사변가주서 등의 실명이 나온다. 무엇보다 매일매일 기록 작성자의 실명을 꼭 적었다. 병이나 사고 등으로 출석하지 못한 상황까지 ‘병(病)’, ‘재외(在外)’, ‘식가(式暇)’ 등의 표현으로 기록하여 기록의 주체를 분명히 하였다. 기록의 실명화는 이들에게 책임감과 함께 국가의 공식 기록에 자신의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이들에게 자부심과 사명감도 아울러 부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시대에는 각종의 기록에서 참여자의 실명을 쉽게 접할 수 있는데, 『의궤』와 같은 자료에서는 화원이나 하급 장인들의 이름까지 일일이 기록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국가적 기록물에 이름만으로도 하급 장인임을 알 수 있는 신돌이(申乭伊), 김순노미(金順老味), 강아지(姜岳只) 등과 홍애(紅愛), 차애(次愛) 등 기녀(妓女)들의 실명이 당당히 들어 있다. 물론 행사에 따르는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려는 뜻도 있었겠지만 미천한 인물에게까지 자부심을 고취하려는 국가적 배려가 숨어 있다. 의궤나 『승정원일기』에 나타난 철저한 실명 기록 방식이 예사롭지 않은 것은 현재에도 이러한 방식이 절실히 요청되기 때문이다. 『승정원일기』는 원본 1부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었으나, 초서(草書)로 기록되어 해독이 용이하지 않았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하여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1961년부터 원래 초서로 쓰인 원본을 탈초(脫草)하여 그 원문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하였다. 현재 국사편찬위원회의 홈페이지에서는 탈초한 원문을 제공하고 있다. 『승정원일기』 탈초와 정보화 사업은 초서로 된 원문을 쉽게 읽을 수 있게 하여 『승정원일기』의 보급에 크게 기여하였지만, 한문으로 쓰인 방대한 원문은 여전히 소수의 전공 분야 연구자만이 이용할 수 있는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족문화추진회(현재의 한국고전번역원)에서 1994년부터 고종 대의 『승정원일기』를 시작으로 국역 사업을 단계적으로 추진하여 현재 인조 대와 영조와 정조 대, 고종 대의 국역이 일부 이루어졌다. 이 성과물은 한국고전번역원의 홈페이지에서 고전종합DB를 통해 제공되어 『승정원일기』 연구 활성화와 국학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최근에 와서는 역사 드라마나 영화의 제작에도 『승정원일기』가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현재 예산과 인력의 부족으로 『승정원일기』의 완역이 모두 이루어질 시기는 예상할 수가 없다. 2022년 한국고전번역원 관계자에 의하면, 현재 전체 번역의 32%가 이루어졌고 2,400여 책의 분량이 남아 있다고 한다. 현재의 진도대로 나간다면, 2048년경에 완성될 것이라고 하였다. 고전번역원의 고전종합DB 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인조, 고종, 순종 대의 전량이 번역되었고, 영조는 즉위년인 1724년부터 1740년(영조 16)까지의 『승정원일기』가 번역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승정원일기』의 국역 사업이 모두 이루어진다면 조선왕조의 역사가 우리에게 보다 객관적이고 생동감 있게 다가설 것으로 기대가 된다. 조선 왕실의 숨결까지 담겨 있는 『승정원일기』는 조선시대 생활사 모습 복원에 가장 기본 자료로 활용할 수 있으며, 『승정원일기』의 적극적인 활용은 조선시대 문화 원형의 복원에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가 된다.
  • 왕의 비서실, 승정원 사람들과 승정원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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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승정원일기』에는 어떤 내용이 기록되어 있을까? 영조의 탄신 행사에 근거가 된 『승정원일기』의 기록 『영조실록』에 의하면 1773년(영조 49) 7월 23일, 영조의 탄신일을 맞이하여 모든 신하가 축하 의식을 가지기를 청했으나 왕이 번거로움을 이유로 들어주지 않았다. 이때 세손으로 있던 어린 정조가 소매 속에서 간지(簡紙)에 쓴 국왕의 글을 꺼내 놓았다. 그것은 꼭 1년 전 같은 날, 영조가 다음 해에는 축하 의식을 받겠다고 약속한 글이었다. 바로 『승정원일기』를 들이기를 명하여 세손의 간지와 맞추어 보니 똑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국왕 영조는 세손의 총명에 감탄하여 더 사양하지 못하고 탄일 의식을 치렀다고 한다. 당시의 기록 속으로 들어가 보자.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서 동몽교관(童蒙敎官)에게 명하여 동몽을 거느리고 입시하여 『소학(小學)』을 강(講)하게 하였다. 대신과 봉조하(奉朝賀) 홍봉한 등이 탄일에 진하(陳賀)하기를 힘써 청하였으나, 임금이 들어주지 아니하였다. 이때 왕세손이 모시고 앉았다가 아뢰기를, “지난해에, ‘금년에는 마땅히 받겠다’는 하교가 계셨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글이 어디에 있느냐?”고 하자, 왕세손이 소매 속에서 간지에 쓴 것을 내어놓았으니, 바로 상교(上敎)이었다. 『승정원일기』를 들이기를 명하여 비교하니, 어긋남이 없었다. 임금이 찬탄하기를, “할아비가 손자에게 명한 것인데 손자가 할아비에게 명한 것이 되었다. 나는 세손이 있으니 다른 근심은 없으나, 다만 이 같은 일로써 세손이 매양 마음을 쓰니 이것이 민망스럽다. 이에서도 또한 그 고심(苦心)을 볼 수 있다” 하였다. 여러 대신이 모두 말하기를, “예효(睿孝)가 천성에서 나왔으니, 행여 굽어 따르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영조실록』 권121, 영조 49년(1773) 7월 23일 위의 기록에서는 세손 정조의 총명함과 더불어 『승정원일기』가 주요 현안의 근거 자료로 활용되었음을 볼 수 있다. 실록과 『승정원일기』의 기록을 보면 영조의 탄일은 9월 13일이었는데, 세손이 미리 이를 환기한 것으로 보인다. 예조에서는 9월 13일 탄일에 왕세손이 치사하여 진하하는 의절을 행할 것을 품의했으나, 영조는 50년 동안 한결같은 뜻이고, 금년은 특히 80세가 되는 해이니 임시로 정지할 것을 전교하였다. 실록에서도 “대전(大殿)의 탄일이므로 조정에서 정후(庭候)하였다”라고 짧게 기록하고 있다. 영조가 고령으로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탄일 행사는 매우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이날 기록에는 승정원 등에서 왕의 건강을 걱정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 조선의 양반, 가정을 경영하다 -18세기 대구 최흥원의 가사활동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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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최흥원, 일기로 들여다보다 퇴계학파로서의 정체성 확립 대구는 오늘날 도청에 해당하는 경상감영이 설치된 이후 중앙의 영향력이 경상도의 다른 고을보다 강했다. 인조반정 이후 권력은 주로 서인 혹은 노론이 장악했는데, 이들은 그 외연을 확대하고자 했다. 17세기 후반부터 대구에는 서인 가문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집권세력 혹은 지방관과 결탁하는 가운데 그들의 입지를 강화했다. 옻골 최씨와 혼인한 적이 있던 대구의 옥천 전씨와 인천 채씨 등도 이미 서인으로 전향했고, 최흥원의 조부 최수학은 모함을 받아 전라도 운봉으로 귀양을 가는 등 지역 사회에서 남인 성향의 양반에 대한 탄압과 회유가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도 최흥원은 당대 영남의 핵심 인물들과 교유하는 가운데 퇴계학파로의 정체성을 분명히 했다. 17세기 영남 퇴계학파의 주요 인물 가운데 한 명이 갈암 이현일이다. 최흥원은 30대에 이현일의 문인인 병곡 권구(1672-1749)와 제산 김성탁(1684-1747)을 방문했다. 권구와 김성탁은 지역에서 학문적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노론 정권하에서 이현일의 문인 혹은 이현일의 신원 활동을 한 이유로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최흥원이 이들을 방문한 것은 퇴계학파로서 정치적, 학문적 입장을 분명하게 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판단된다. 일기에는 최흥원이 평생 교유한 학자들이 등장한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눌은 이광정(1674-1756), 치재 조선적(1697-1756), 강와 임필대(1709-1773), 대산 이상정(1711-1781), 소산 이광정(1714-1789), 난곡 김강한(1719-1779), 후산 이종수(1722-1797) 등이다. 최흥원은 40대에 이상정을 만난 이후 그와 평생 교유가 이어졌다. 이상정은 18세기 퇴계학파의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한 명으로 언급되는데, 최흥원과 이상정과의 교유는 옻골 최씨가 영남 퇴계학파의 주류로 편입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최흥원의 문집인 『백불암문집』에는 397통의 편지가 실려 있으며, 이 가운데 이상정과 주고받은 편지가 53통으로 가장 많다. 1746년 9월 22에 최흥원이 이상정의 집을 방문했고, 1748년 1월 13일에는 이상정이 최흥원을 방문하여 열흘 정도 머물다가 1월 22일에 돌아갔다. 최흥원은 이상정과 함께 공부하고 싶었는데, 그가 방문하여 머물겠다고 하여 매우 기뻤으며, 평소 궁금했던 것들을 이상정과 토론했다. 두 사람은 부인사와 동화사를 비롯하여 입향조 최동집의 흔적이 남아 있는 부인동의 농연(聾淵) 등을 둘러보았다. 이후에도 서로 방문하거나 편지로 심(心), 의(義), 가례(家禮)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그림 4】 『백불암문집』 최흥원은 안동의 이상정, 예천의 박손경(1713-1782)과 더불어 ‘영남삼로(嶺南三老)’로 칭송될 만큼 학문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영남의 인재들이 최흥원에게 와서 배움을 청하기도 했다. 이상정은 아들 이완을 최흥원에게 보내어 수학하도록 했다. 최흥원의 문인록인 「급문록(及門錄)」에는 문인 122명의 성명, 출생 간지, 본관, 거주지, 간단한 이력 등이 기재되어 있다. 대구, 안동, 칠곡, 밀양, 경주 등 영남의 16개 고을에서 최흥원에게 배우러 왔고, 서울에서 온 인물도 있다. 1770년에 영조는 반계 유형원(122-1673)이 쓴 『반계수록』을 경상감영에서 목판본으로 간행토록 했다. 그때 영남의 이름난 학자들에게 교정을 맡기라고 했다. 경상감사 이미(李瀰)는 지역 양반의 의견을 수렴하여 최흥원에게 교정을 맡겼다. 최흥원의 학문적 위상을 확인할 수 있는 지점이다. 최흥원은 자신이 평생 구축한 학문적 위상과 관계망을 후손에게 물려주었다. 이는 옻골 최씨의 사회적 자산이기도 하다.
  • 조선의 양반, 가정을 경영하다 -18세기 대구 최흥원의 가사활동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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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에 대한 내용은 일기가 시작되는 1737년 1월 20일부터 시작된다. 주진의 나이 14세로 이미 공부할 나이다. 이날 현풍에 사는 사촌 누이가 시댁으로 돌아갈 때 주진을 함께 보내어 의령에서 처가살이하는 조선적에게 배우도록 했다. 최흥원은 학문에 대한 이치를 깊이 터득한 조선적에 대한 믿음이 컸다. 그래서 그에게 자제들의 교육을 맡기고 싶었다. 최주진은 조선적에게 1년 이상 머물며 배웠다. 그때 최흥원은 수시로 주진에게 연락하면서 격려했다. 한 달 보름 정도 지난 3월 10일에는 인편을 통해 주진에게 벼루를 담는 연갑(硯匣)을 비롯하여 종이, 붓, 먹 등을 보냈다. 최흥원이 주진에게 주려고 특별히 주문한 붓 10자루가 4월 19일에 도착하자, 다음날 바로 큰 붓과 작은 붓 7자루와 종이 15장을 아들에게 보냈다. 6월 17일에는 조선적에게 문안 편지를 부치고, 아들에게는 먹 2정(丁)과 돈 1꿰미를 보냈다. 아들이 공부하러 떠난 지 반년이 지났기 때문에 갈수록 마음이 쓰였다. 계절이 바뀌었는데도 아들에게 옷가지와 먹을 것들을 마련하여 보내지 못한 답답한 심경을 8월 16일의 일기에 적기도 했다. 9월 10일에 조선적이 주진을 데리고 돌아와서 최흥원은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주진은 한 달 반 정도 집에 머물다가 10월 26일에 다시 조선적에게 갔다. 최흥원은 떠나는 아들 손에 돈 2냥과 종이 1묶음을 쥐여 줬다. 공교롭게도 그날 오후에 바람이 불고 추워져서 최흥원은 길을 떠나는 아들이 염려되었고 마음은 더욱 스산했다. 최흥원은 다시 조선적에게 공부하러 간 아들이 어떻게 공부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그런데 11월 21일에 주진이 오한과 발열 증세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걱정되었다. 12월 10일에 종이 열 몇 장과 오미자를 아들에게 보냈다. 12월 28일, 아들이 계속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걱정이 멈추질 않았다. 그 사이의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주진은 1738년 10월 1일에 조선적의 집에서 돌아왔다. 아들과의 오랜만의 상봉에 최흥원의 마음은 매우 설렜다. 아들의 모습을 보니 의젓하게 자라서 위로가 되었으나, 학습에는 진전이 없는 듯하여 다소 실망스럽고 답답한 심정이었다. 최흥원은 10월 4일부터 주진을 직접 가르쳤다. 셋째 아우와 함께 일꾼 난개의 방에 머물며 공부하도록 했다. 11월 20일에는 『맹자』 읽기를 마쳐서 『대학』을 다시 읽도록 했다. 아들이 경전 공부에 뜻이 있어 최흥원은 흐뭇했다. 1739년 1월 30일에는 팔공산 아래에 있는 지장사의 도명암(道明庵)에 보내어 『맹자』를 읽도록 했다. 주진은 아버지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착실하게 공부했다. 1739년 8월 7일부터는 『서전』을 읽었다. 1740년부터 몇 년 동안 주진이 공부한 내용은 일기에 없다. 어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삼년상을 치른 이후인 1743년 7월 28부터 주진은 다시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주진이 『주역』을 읽고 싶다고 하자, 최흥원은 가지고 있던 책을 주진에게 주며 읽어보라고 했다. 1744년 5월 18일에는 주진이 이천경 군과 함께 동화사에 공부하러 들어갔다. 1745년 7월 22일에는 주진의 벗 이우지가 찾아왔다. 과거 공부에 뜻이 있는 주진이 이우지와 함께 공부하고 싶어 하자, 최흥원은 괜찮은 일이라고 여겼다. 두 사람의 공부 장소는 알 수 없지만, 이들은 보름 정도 함께 공부하다가 8월 8일 아침에 주진은 이우지와 송별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주진이 23세인 1746년부터 과거에 응시한 내용이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8월 17일 사촌과 함께 과거에 응시하러 갔다. 3년 뒤인 1749년 8월 6일에도 과거 길에 올랐다. 그런데 주진이 길을 나서서 몇 리를 가다가 사당에 하직 인사를 올리지 못한 것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와서 사당에 인사를 한 이후 다시 과거 길에 올랐다. 최흥원은 그런 아들이 대견스럽고 흐뭇했다. 1749년 11월 13일-12월 11일, 주진은 벗들과 팔공산 아래 있는 부인사에서 공부했다. 다음 해 1월에 시행되는 과거 준비였다. 최흥원은 아들과 벗들의 공부를 독려했고, 필요한 물품을 수시로 보냈다. 1751년 8월 22일에도 주진이 김용여와 함께 과거를 보러 길을 나섰다. 함께 보낸 종은 매우 재빠르나 그들은 굼떠서 걱정스러웠다. 주진이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했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1754년 6월 14일에 주진은 아버지에게 조용한 곳에 들어가 과거 공부하고 싶다고 했다. 최흥원은 주진이 보재사(寶齋寺)에 가서 공부하도록 했다. 당시 최흥원은 50세가 넘었고, 주진은 30세였다. 주진은 공부하는 가운데 집안일에도 신경을 써야 할 형편이었다. 아버지를 보필하는 가운데 여러 가지 우환으로 평온하지 못한 시간을 보냈다. 최흥원은 주진이 과거 준비와 집안일 모두 신경 쓰는 것이 어려운 일이지만 견뎌 낼 도리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주진은 보재사에서 한 달 가량 공부하다가 7월 14일에 집으로 돌아왔다. 이후 주진이 공부한 내용이 일기에 기록되지 않았다. 주진은 어느 순간 과거 공부를 포기한 듯하다. 최흥원이 주진에 대해 일기에 기록한 것은 집안의 대소사에 참여하거나 집안일을 한 내용이다. 1756년 6월 3일 새벽에 주진이 9마지기 밭의 보리를 타작하러 갔다. 최흥원은 아들이 집안일에 골몰하는 것으로 미루어 공부를 그만둔 것으로 짐작했다. 본인은 과거 응시를 일찌감치 포기했지만 자제들은 열심히 공부하길 바랐는데, 아들이 농사 감독하러 갔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매우 아팠다. 20여 년 동안 애끓은 심정으로 주진의 공부에 정성과 노력을 기울였고 과거 합격으로 조상에게 효도하길 간절하게 원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최흥원의 손자 식(湜, 1762-1807)은 최흥원이 58세 되던 해에 태어났다. 식이 태어난 다음 해 주진이 사망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부재를 느낄 손자에 대해 최흥원은 더욱 애틋한 마음을 가졌고, 손자 교육에 대한 책임과 기대도 컸다. 그러나 1775년 6월 20일의 일기에 최흥원은 14살의 손자가 점차 거칠고 게을러지며 공부도 자주 빼먹어서 가망이 없을 것으로 판단하는 내용을 적었다. 손자의 공부에 대한 체념은 최흥원의 마음을 아리게 했지만, 그렇다고 손자의 교육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최흥원은 손자의 의지를 어떻게 독실하게 할 수 있을지 계속 고민했다. 1779년 11월 15일에 18살의 손자가 ‘소학(小學)’에 입학하게 되어 최흥원은 사당에 아뢰었다. 다음 해 손자는 최흥원에게 『소학』을 읽겠다고 말했다. 최흥원은 손자가 다시 마음을 잡은 듯하나 과연 독실하게 해낼지는 모르겠다고 생각했으며, 점괘로 손자가 계속 공부할 것인지의 여부를 확인해 보기도 했다. 손자의 공부 자세는 의심스러웠지만 일말의 기대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 결국 최흥원은 손자 식의 학문에 대한 성취를 확인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 조선의 양반, 가정을 경영하다 -18세기 대구 최흥원의 가사활동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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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년 6월 9일 일기에는 최흥원이 먹여 살려야 할 식구를 100여 명이라고 했다. 여기에는 동생들의 집에 같이 사는 노비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최흥원의 일상에서 가족을 포함한 식구를 건사하는 것은 가계를 유지하는 기초가 되기 때문에 가족의 건강과 더불어 끼니를 해결할 식량 확보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최흥원은 벼와 보리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작물을 재배하지만 풍년으로 수확이 넉넉하기보다는 가뭄과 홍수 등으로 흉년이거나 생계가 어려운 경우가 더 많았다. 봄에 거둘어 들인 보리로 가을 추수까지 먹기에 부족할 때도 있었다. 사촌 “통숙에게 보리쌀 2말과 돈 5전을 보냈다”, “보리쌀 67되를 사촌 아우가 앓고 있는 곳에 보내어 병구완하는 사람들의 식량을 하도록 했다”, “보리쌀 및 돈 1냥과 장조림을 사촌 아우에게 보낼 계획이다”, “보리쌀 1섬을 실어 보내어 누이 집에 보태 주도록 했다” 등의 내용으로 미루어 최흥원은 본인, 아우, 누이, 사촌의 식량까지 챙겼으며, 이들에게 수시로 곡식을 보냈다. 조제고(助祭庫)는 제수를 위한 것이고, 의고(義庫)는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마련한 기구이다. 최흥원은 흉년이 들거나 끼니를 때우기 힘든 경우에는 여기의 곡식을 변통하여 식구를 먹여 살렸다. 1762년에는 아우들이 가난하여 굶어 죽을 처지가 되었다. 최흥원은 어머니가 너무 걱정할까 봐 어쩔 수 없이 제수로 쓰고 남은 약간의 볏섬으로 식구 수에 따라 나누어 주었다. 가난이 심한 아우부터 먼저 곡식을 주되 한 집 당 5말을 넘기지 않고 기한은 4월로 했다. 4월이면 보리와 밀이 익기 때문이다. 1763년에도 조제고의 곡식을 이용했는데, 5월부터는 각 집에 조제고의 식량을 나눠 주는 것을 그만두었다. 조제고의 곡식이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보리가 익었기 때문이다. 최흥원은 조제고의 곡식이 조상을 섬기기 위한 것으로 생계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용도를 바꾸어 사용했다. 그는 의고도 열어 겉벼와 보리 약간씩을 아우들 집에 나누어 보냈다. 최흥원은 흉년이나 춘궁기에 곡식을 빌려주는 환곡도 이용했다. 환곡을 받기 위하여 상만을 수성창에 보내기도 했고, 환곡을 빌려 식량을 잇게 하거나 돈으로 바꾸어 부세와 잡물을 마련하는 데 사용했다. 부노 진욱은 빌린 돈 20냥과 환곡 겉벼 20섬을 최흥원에게 바쳤는데, 최흥원은 이를 혼수 마련에 사용했다. 1757년에는 엄청난 풍년으로 원근의 논에서 난 곡식의 소출이 이전 해에 비해 두 배나 많았다. 그런데 임금이 특별히 명령을 내려 1755년과 1756년의 환곡을 반감해 주도록 했다. 정말 반가운 소식이었다. 최흥원은 “정말 성군 시대의 정사이다”라고 임금을 칭송했다. 환곡은 형편이 어려운 농민만 이용한 것이 아니었다. 지주 최흥원도 환곡으로 생계를 잇거나 혼수나 잡물을 마련하는 등 일상적으로 필요한 경비에 보태었다. 환곡은 갚을 때는 큰 부담이다. 최흥원은 환곡을 제때 갚지 못해 독촉에 시달리기도 했고, 이 때문에 괴롭고 혼란스러운 감정을 느낀 적도 있었다. 종 만세가 환곡 이자 독촉을 견디지 못하고 힘들어하자, 겉벼 1섬과 돈 2냥을 주어서 마음을 놓도록 했다. 관에서 환곡을 갚을 때는 정결한 품질의 곡식을 요구하기 때문에 곤란한 적도 있었다. 최흥원은 지주로 여유로웠지만 흉년으로 식구들의 끼니를 걱정할 때도 있었고, 공동조직의 기금과 국가의 진휼제도를 이용하기도 했다.
  • 조선의 양반, 가정을 경영하다 -18세기 대구 최흥원의 가사활동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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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기, 매매명문, 일기 등이 있다. 이것을 토대로 최씨가의 경제적 규모가 어느 정도 밝혀졌다. 최흥원의 6대조 최계(1567-1622)의 전답 규모는 1,700여 두락에 이른다. 1두락을 200평으로 잡아 계산하면, 34만 평 정도다. 최계의 둘째 아들이자 옻골의 입향조 최동집의 전답 규모는 대략 1,500-1,600여 두락이다. 최흥원의 고조 최위남의 재산 전모는 알 수 없지만, 1남 4녀에게 상속한 논과 밭은 623두락이고 노비는 22구였다. 호구자료에 근거하면 최흥원의 조부 최수학이 4남 2녀에게 남긴 논과 밭은 712.5두락이고, 노비는 48구이다. 【그림 7】 1760년 10월13일에 조모 조씨가 손자인 최주진에게 노비를 지급한 별급문기(別給文記) 1746년에 최흥원의 아버지 최정석이 5남매에게 물려준 논과 밭은 405두락이고, 노비는 61구였다. 이때 최흥원이 물려받은 논과 밭은 60여 두락이다. 아우 흥점은 양자 간 아들 몫을 포함하여 78두락, 흥건은 66두락, 흥후는 68두락, 사위 류성복은 62두락을 물려받았다. 최흥원의 경우 제사를 지내는 몫으로 정해진 것과 일찍 사망한 동생 재열의 몫까지도 관리했을 것이다. 1733년 최흥원은 조부의 재산 분급 당시 34두락의 논과 밭 및 5구의 노비도 물려받았다. 따라서 문서를 통해 확인되는 최흥원의 논과 밭은 166두락이고, 노비는 23구이다. 실제로 최흥원의 논과 밭 규모는 이보다 훨씬 컸을 것이다. 【표 1】은 『역중일기』에 나오는 논과 밭의 소재지이다. 【표 1】 『역중일기』에 나오는 논과 밭의 소재지 논과 밭의 정확한 소재지를 확인할 수 없지만, 대구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흥원은 위에 언급한 토지 외에도 개간과 매매를 통해 토지를 늘리거나 빚을 갚기도 했다. 1739년 4월 12일에는 깊고 후미진 땅이 일굴 만하여 관아에 정장(呈狀)을 올려 공증 문서를 요청했다. 최흥원은 본인 소유의 논 9마지기를 둘째 아우에게 팔기도 했다. 둘째 아우에게 45냥을 받아, 그에게 진 빚 34냥과 막내아우에게 진 빚 10냥 5전을 갚았다. 하회 누이 몫의 논을 팔아 25냥을 하회에 보내기도 했다. 지묘의 논 8마지기를 팔아서 묵은 빚 18냥을 갚았고, 중심 서씨의 집터와 밭 2마지기를 2냥 5전에 구입하기도 했다. 최흥원은 100여 명의 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재산을 증식하고 이를 꼼꼼하게 관리했다. 작황은 생계에 가장 중요하다. 날씨는 작황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최흥원 일기의 대부분은 날씨의 기록에서 시작한다. 날씨에 따른 작황 현황과 이에 따른 심경을 일기에 기록하기도 했다. 봄비가 때를 알고 내려서 사방 못물이 모두 그득했다. 보리가 비록 알이 배지 못했으나 앞으로 농작물이 매우 살아날 가망이 있어서 다행이다. ―1739년 4월 16일 비가 종일 크게 쏟아져서 강물이 불어 넘칠 듯하니 갯가 보리를 수확하지 못할까 걱정스러워 종들에게 일을 시켰는데, 때맞추어 일을 하지 않아 이런 사태를 불렀으니 역시 반성할 부분이다.(1740년 5월 30일) 오후에 갑자기 서쪽 하늘에서 우레가 치고 큰바람이 불면서 우박이 쏟아졌다. 크기가 환약 알 크기만 했다. 농민들이 목화, 보리, 마가 손상을 입었다고 말했는데, 다만 한 줄기 우박만 급히 지나가서 큰 재앙을 피한 것 같다. ―1759년 5월 10일 날씨 덕분에 풍년이 들기도 하고 날씨 때문에 한 해의 농사를 망치기도 했다. 날씨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최흥원은 날씨를 꼼꼼하게 기록했고, 날씨와 농사와의 연관성도 기록했다. 이 밖에도 씨 뿌리기, 곡식이 익어 가는 상황, 추수와 수확량 등도 자세하게 기록했다. 1739년 8월 1일에 최흥원은 둘째, 셋째 아우와 함께 동구 밖을 거닐고 제방 언덕에 올라서 멀리 들을 바라보니, 햇벼가 한창 익어가고 있어서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만약 바람이나 서리 피해가 없다면 전에 없던 풍년이 될 것이었다. 두보의 ‘나랏일 근심하여 풍년을 기원한다[憂國願年豊]’라는 구절을 읊조리며 기분 좋은 시간을 보냈다. 최흥원은 직접 농사를 관리 감독했다. 농사철에는 파종과 추수로 바빴다. 종들에게 밭에 보리를 파종하도록 했는데, 파종 시기가 늦어 싹이 날까 걱정했고, 해안의 보리타작을 위해 종 10여 명을 보내기도 했으며, 계집종들에게 모내기, 김매기, 가을걷이, 보리타작 등을 시켰다. 종 상만을 강각동에 보내어 거둔 모초로 재를 만들게 하여 가을갈이에 대비하도록 했다. 매일 밭갈이와 곡식 수확을 점검하느라 바쁘게 쫓아다니니, 그런 자신이 우습기도 하고, 한탄스럽기도 했으며, 날마다 생업에 대처하고 힘을 쓰느라 어머니를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 자신을 탓하기도 했다. 논과 밭이 여러 곳에 있어서 최흥원이 일일이 관리하거나 감독할 수 없었다. 아우를 비롯하여 아들 주진, 사촌 통숙과 문희 등에게 파종과 타작을 감독하게 했고, 그들은 최흥원에게 작업 결과를 보고했다. 관직으로 나아가지 않은 양반은 지주로서 농업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습득한다. 최흥원도 여느 양반처럼 농사 기술 등에 대한 나름의 지식이 있었다. 본인의 경험이나 농민에게 들은 말도 명심하고 이를 기록했다. 1738년 봄에 보리 씨가 단단히 뿌리 내리지 못한 것에 대해 최흥원은 씨를 늦게 뿌린 결과라고 판단하고 그 이후에는 일찍 씨를 뿌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다음 해에 최흥원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 나이 든 농부에게 직접 물어봤다. 농부가 호미질을 해서 흙을 부드럽게 해 주면 도움이 된다고 조언하자, 최흥원은 곧바로 종들에게 김매도록 했다. 【그림 8】 김홍도, 《단원 풍속도》, 〈논갈이〉, 국립중앙박물관 최흥원이 농사에 골몰한 것은 꿈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한 번은 죽은 아내가 병들어 신음하면서 한 사람도 와 보지 않는다는 뜻으로 원망하는 꿈을 꾸었다. 깨어나서 생각해 보니, 그저께 내린 비로 무덤이 무너진 것이 아닌가 싶었다. 서숙에게 가서 무덤을 살펴보라고 했는데, 돌아와서 광촌의 논이 물에 쓸려 거의 3-4마지기가 망가졌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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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꼈으며, 이를 일기에 적었다. 8월 2일에는 북산의 종 태공이 당귀 몇 뿌리를 캐어 바쳤는데, 최흥원은 이를 땅에 묻어 두었다가 봄이 오면 심어서 키우고 싶어했다. 최흥원은 종 몇 명을 관아 근처에 파견하여 여러 가지 정보를 파악하거나 관아와 최흥원 집 사이의 연락을 담당하도록 했다. 일기에는 이들을 ‘부노(府奴)’로 적었다. 옻골과 대구부 관아와의 거리는 13km 정도 된다. 부노들은 최흥원에게 수시로 물건을 바쳤다. 책력과 부채 등 관아에서 최흥원에게 주는 것을 받아 전달해 주는 역할을 했다. 부노 하징이 겨울에는 책력을 바쳤고, 여름에는 부채를 바쳤다. 최흥원이 인발을 부노에게 보내어 흰 부채 두 자루를 받아오게도 했다. 부노가 보낸 부채가 그럴듯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익영이 부채 16자루를 바쳤으나 품질이 형편없어서 미운 마음이 생겼다. 옻골 주변에는 동화사, 부인사, 은해사, 파계사 등의 사찰이 있는데, 여기에 소속된 중들도 수시로 최흥원에게 물건을 바쳤다. 관순이 흰 종이 17묶음을 바쳤고, 재생 종이 6권을 바치기도 했다. 최흥원은 부인사에 닥나무껍질 109근을 보냈다. 절에서 종이를 만들거나 책을 간행했기 때문이다. 중들은 붓, 먹, 쑥, 삿갓 모자, 초롱[燭籠] 등을 주거나, 산살구를 바치기도 했다. 은해사 중이 제철 채소를 주었고, 동화사에서 강활(羌活)과 후추를 보내기도 했다. 한번은 중 순해가 꿩을 바친 적이 있었다. 최흥원이 “중으로서 꿩을 바치는 것이 옳은가?”라고 하니, 순해가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이것도 산에서 나는 물건입니다”라고 하기에 웃으면서 받았다. 여러 아우 집에서 벼를 거두어 11말을 모아 두었는데, 순해에게 실어 가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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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표 2】는 일기에 기록된 기제사의 종류와 기일이다. 【표 2】 최흥원이 지낸 기제사의 종류와 기일 1742년 12월 20일, 최흥원은 죽은 아내의 신주를 가묘 서벽(西壁)에 들였다. 동벽(東壁) 아래에 이미 죽은 아우의 신주를 안치해서 봉안할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불천위 제사는 주로 별묘에서 지냈으며, 4대조의 경우에는 신주를 사랑채 마루로 꺼내 모셨다. 사정이 생기면 제례 장소를 바꾸기도 했다. 1736년 아버지 제사 때 어머니가 병환으로 사랑채까지 나오는 것이 어려울 것 같아 안채 마루에서 지냈다. 1739년 아버지 제사 때도 처음에는 신위를 사랑채 마루에 설치하려고 했는데, 어머니가 병으로 사랑채에 나오기 힘들 것 같으니 안채 마루에 제사상을 차리라고 해서, 최흥원은 그대로 따랐다. 1740년 할머니의 기제사는 아내의 병이 위중해서 초당(草堂) 방에서 지냈다. 조선시대 법과 의례의 실행이 매우 형식적인 것 같지만 실제는 의례를 따르면서도 현실적인 여건을 우선시했다. 최흥원은 제사를 지낼 때 주변과 자신을 깨끗하게 하려고 했다. 할머니의 기제사를 하루 앞두고 해산한 지 10일 지난 부인이 있어 집이 깨끗하지 않을까 봐 최흥원은 둘째 아우 집에서 제수를 준비하게 하고, 신주를 사랑채 마루로 옮겨 제사를 지낼 계획이었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아침 일찍 산모를 문밖으로 내보내 거리낌을 면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행동이 의리에 어긋나는 것은 아닐까 고민하면서, 최흥원은 다음에 다시 생각을 정리하기로 했다. 최흥원이 주재한 명절 제사로는 정월 대보름, 단오, 추석, 동지 등이다. 명절 제사는 제사 형식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차례’로 불렀고, 참례(參禮)로 표기한 경우도 많다. 최흥원은 단오를 여름철 제일 으뜸 되는 절일이라고 했다. 추석 차례에는 햇과일, 햇벼, 떡, 쇠고기 등을 올렸다. 동지에는 한 해에 일어난 중요한 일을 조상에 아뢰기도 했다. 시제는 2월과 8월에 지냈다. 날짜는 일정하지 않았다. 날짜를 미리 정해서 사당에 아뢴 이후 정한 날에 지냈다. 최흥원은 시제 3일 전부터 재계했다. 제행 장소는 대개 별묘였다. 묘제의 경우에는 참여 범위가 친족까지 확대되었다. 최동집 부인 여강이씨의 무덤은 대구 도장동에, 고조부모의 묘소는 대구 지동에, 증조부모의 무덤은 경산에, 조부와 아버지의 무덤은 대구 광동에, 어머니의 무덤은 대구 도장동에 있다. 따라서 최흥원이 관리하는 무덤은 대구의 도장동, 지동, 광동 및 경산 등에 위치한다. 무덤이 여러 곳에 흩어져 있어서 10월 묘제는 직지동 6대 조부와 도장동 6대 조모의 묘제를 먼저 지냈고, 지동과 경산의 고조와 증조모, 광동의 조부와 아버지의 묘제를 차례로 지냈다. 특히 광동 묘제는 형제가 모두 모여 지냈고, 나머지는 형제와 자식이 나누어 지냈다. 광동 묘제를 지내고 나서 지역 사람들과 술과 음식을 나누면서 화합의 시간을 가졌다. 최흥원은 제사를 주재하는 사제의 역할을 철저하게 수행하고자 했다. 증조할머니의 기제사를 지내려고 했을 때 서숙이 급하게 말하길 “위패를 모신 상 아래에 개가 토해 놓은 듯 아주 깨끗지 못하니 어쩌겠는가?”라고 했다. 참으로 괴이한 일이어서 곧바로 바깥 마루에 위패를 다시 설치하도록 하고 신주를 내어 와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재계는 엄격하게 했다.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흩어진 조상의 혼령을 불러 흠향하게 하는 것은 오로지 후손의 정성에 달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기일 하루 전 새벽에 일어나 목욕하고 재계했다. 시제에는 제사 지내기 3일 전부터 새벽에 일어나 목욕하고 의관을 갖추고 여러 집사가 함께 모이기를 기다렸다. 재계할 때는 사사로운 일에 관여하지 않아야 하고, 출입도 삼가야 하며, 묘소 가는 길과 주변을 깨끗이 청소하게 했다. 제사 전에는 정침에 신위를 설치하고 물러나 제수를 직접 살피고 새벽까지 잠자지 않고 있다가 닭이 울면 씻고 머리를 빗은 이후 제사를 지냈다. 물론 재계를 엄격하게 지키지 못 할 때도 있었다. 우선, 재계 날짜에 맞추어 사람들이 일정한 장소에 함께 모이는 게 쉽지 않았다. 1744년 8월 18일 별묘 시제 당시 최흥원은 3일 전인 15일부터 재계에 들어갔으나, 여러 친족은 16일부터 재계했다. 다음 해 8월 시제에도 이틀 전에 오거나 하루 전에 온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들을 제재할 수는 없었다. 최흥원은 병으로 괴로웠고 어머니의 건강도 좋지 않은 상황에서 시사에 참석하여 잔을 올려야 할 때는 남에게 머리를 빗기게 하고 세수를 시킨 다음 재계했는데, 몸을 깨끗하게 하지 못하여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재계 시 손님의 방문이다. 최흥원은 재계할 때는 외출을 자제했을 뿐만 아니라 손님을 맞이하지도 않았다. 재계 중에는 어머니의 아침 문안도 생략했다. 어쩔 수 없이 손님을 맞이해야 할 때도 있다. 아버지의 기일 재계 때 홍우정라는 자가 방문했는데, 제사를 앞두고 있어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아팠을 때 긴요한 약재를 많이 얻었던 고마움 때문에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식사를 대접하고 돌려보냈다. 오직 나 자신을 반성하고 뜻을 굳건히 해 정성껏 접대하는 것을 요법으로 삼을 뿐이다. 갑자기 뭇사람과 달리 처신하며 고고한 체하다가 괜히 시속의 기롱을 당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데 해로울 것이니 또한 경계할 점이 작지 않다. ―1745년 3월 22일 최흥원은 재계하는 날 다른 사람과 더불어 수작하고 접대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용감하게 행동하지 못한 자신이 한탄스럽기도 했고, 재계를 엄격하게 하고 싶었지만 세평을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없었다. 이래저래 매우 인간적인 고민이다.
  • 조선 최후의 공인, 지규식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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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하재일기』, 그리고 분원 도자기 공인 지규식 『하재일기』, 조선 공인의 삶을 비추다 19세기 말 조선 상인의 일기 ‘조선’이라는 나라의 특징이 무엇인지 물으면 어떤 답이 많이 나올까. 누군가는 신분 제도가 가장 먼저 떠올라 ‘양반의 나라’라고 할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유교 국가’라고 할지도 모른다. 경제에 초점을 두고 묻는다면 ‘농업사회’ 또는 ‘농본주의 국가’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조선은 성리학이라는 정치이념을 바탕으로 양반이 지배층으로 자리 잡고 농민과 농업을 근본으로 삼았던 사회였다. 따라서 남겨진 사료들도 대부분 양반이 남긴 기록이고, 그들의 정치사상적 논의도 농민들의 삶에 대한 것이 많다. 오늘날 역사를 배울 때도 조선에 대해서는 성리학적 질서, 양반-농민-천민의 신분 차이, 향촌 농업사회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하지만 이 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이야기는 양반도 농민도 아니었던 한 인물에 관한 이야기이다. 유교 이념에서 일반적으로 분류하는 4개의 직분, 즉 ‘사농공상(士農工商)’에서 그 말단에 속했던 상인(商人), 그리고 그와 연결되어 있었던 장인(匠人)들의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비록 조선 사회에서 상인과 장인은 농민에 비해 천시되었으나, 조선이 그 존재의 필요성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공’과 ‘상’은 말단에 속했을지언정, 4개의 직분에 늘 포함되는 필수 요소였다. 조선 초 정부는 농민들이 땅을 이탈하여 상업에 빠질까 우려하여, 또는 도적 떼의 근거지가 될까 우려하여, 지방에서 장시(場市)를 개설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하였다. 하지만 예외도 있었는데, 흉년이 들었을 때는 백성들을 구제하는 방안 중 하나로 장을 열어 생필품을 거래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 농민들의 소소한 물품 교환도 원천 봉쇄하지는 않았다. 그러던 것이 16세기부터 전라도를 시작으로 점점 자연스레 장이 서기 시작하자, 조선 정부도 머지않아 장시 개설을 묵인 또는 용인하게 된다. 도읍지에서도 상업은 필수 요소였다. 유교 국가에서 도성을 구성하는 원칙은 ‘좌묘우사(左廟右社), 전조후시(前朝後市)’로 정리된다. 남쪽을 향해 앉은 왕을 중심으로 왼쪽에 종묘(宗廟), 오른쪽에 사직(社稷), 앞쪽에 조정(朝廷), 뒤쪽에 시전(市廛)을 둔다는 원칙이었다. 조선도 국초부터 원칙에 따라 한양에 시전거리를 설치하였다. 여기에서 시장 또는 저잣거리라는 것이 종묘사직과 조정만큼이나 필수적인 도성의 구성요소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성 백성들의 생계유지, 왕실・관청에서 필요한 관수물자의 조달 등을 위해 도성에서 상인의 존재는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조선 사회에서 말단의 직업으로 여겨졌으나 그래도 필수적 구성원이었던 상인과 장인의 이야기까지 다루어야 조선 사회에 대한 설명을 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상인과 장인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자료는 별로 전해지지 않는 편이다. 문집이나 일기를 남기려면 결국은 글을 쓸 수 있는 능력과 시간적인 여유가 필요했기 때문에, 생계에 쫓기던 이들이 직접 남긴 기록이 별로 많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19세기 말 상인의 역할을 하였던 한 인물의 일기 자료가 발굴되고 학계에 소개되었다. 그 일기는 바로 이 책에서 다루게 될 『하재일기』이다. ‘하재(荷齋)’라는 호를 가진 지규식(池圭植, 1851-?)이 1891년(고종 28)부터 1911년까지 약 20년 동안 써 내려간 일기로, 총 9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재일기』는 조선의 한창때의 기록이 아니라, 왕조가 기울어 가고 국권이 피탈되어 가던 때의 기록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순수한 조선 상인의 원형을 보여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조선의 상인이 근대 자본주의 질서의 침투 속에서 어떤 변화를 겪고, 근대 회사로의 전환을 어떻게 추진하였는지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자료이다. 또한 지규식은 민간의 일개 상인이 아니라, 왕실·관청용 물자의 납품을 맡으라고 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지정해 준, ‘공인(貢人)’이라는 특수한 지위를 지닌 상인이었다. 그는 본래 관청의 하급 관리였다가 공인으로 지정된 인물이기 때문에, 그 신분도 일반 평민보다는 중인에 가까웠다. 자신의 일기에 직접 지은 시를 종종 남겨 놓은 것을 볼 때도 그가 일반 평민답지 않은 학문적 소양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지규식이 조선의 일반적인 상인 계층 전체를 대변해 주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덕분에 이러한 일기를 남길 수 있었다. 조선의 상인이 남긴 자료가 거의 드문 상황에서, 그래도 『하재일기』는 가뭄의 단비 같은 사료이다. 2005년 이후 서울역사편찬원(구 서울시사편찬위원회)에서 차례로 국역본을 간행하였고, 서울역사편찬원 홈페이지 또는 한국고전종합DB에서도 국역본을 모두 읽어 볼 수 있으니 관심이 있는 분들은 직접 읽어 보는 것도 좋겠다. 업무일지와 일상 기록의 공존 지규식은 1883년(고종 20), 그러니까 만 32세에 경기도 양근군 남종면(현재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에 있던 사옹원(司饔院) 분원(分院)의 공인이 되었다. 『하재일기』는 그가 공인이 된 이후에 쓴 일기이다. 그의 직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옹원이 무엇인지, 분원이 무엇인지, 공인이 무엇인지 하나하나 설명해야 하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장에서 다루기로 하자. 미리 간단히 정리하자면, 지규식은 가마터에서 구워진 도자기를 왕실·관청에 제때 납품을 하는 일을 맡아 하던 사람이었다. 나라에서 필요한 도자기를 납품하는 과정에서 민간에도 그릇을 팔거나 주문·판매를 주선하기도 하였으니, 그는 한마디로 도자기 납품업자 또는 도자기 상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지규식의 『하재일기』에는 그가 분원과 서울 또는 또 다른 거래처를 오가며 활동한 내용이 가득하다. 지규식은 분원 공인 중에서도 중책을 맡았던 인물이었으므로, 그의 하루하루 일과에는 분원 이야기가 빠질 수 없었다. 그는 분원으로 출근하여 어떤 업무를 보았는지, 업무와 관련하여 어디로 출장을 갔는지, 누구를 만나 어떤 거래를 하였는지, 들어온 돈과 나간 돈은 얼마인지 등을 매일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일기는 상당 부분 업무일지 같은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일기에 업무와 관련한 내용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재일기』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일상 기록이다. 지규식은 매일의 날씨도 기록하였고, 가족·친지·이웃·지인과 관련된 이야기, 타지를 오갔던 여정, 생필품을 구매한 내역, 자신이 지은 시 등 소소한 일상도 기록하였다. 심지어 매일같이 술집 애인을 찾아가 정담을 나누거나 다투고 화해한 이야기까지도 기록하고 있다. 이렇듯 『하재일기』는 업무일지로서의 성격과 개인적인 일상의 기록으로서의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오늘날 업무일지나 일기를 쓴다고 한다면 보통은 양쪽을 구분해서 쓸 것이다. 특히나 가계부와 직장의 회계장부를 쓴다고 한다면 당연히 따로 구분하여 작성할 것이다. 다시 말해, 오늘날 가계 경영과 회사 경영은 엄연히 구분되는 영역이다. ‘가계’의 사전적 정의는 ‘한 집안 살림의 수입과 지출의 상태’ 또는 ‘집안 살림을 꾸려 나가는 방도나 형편’이다. 즉 집 밖 사업장 등에서의 경제생활과 구분되는 집안의 개인적 경제생활을 가리키는 용어라 할 수 있다. 물론 가계부의 수입 항목도 집 밖에서의 경제활동으로부터 얻어지기 때문에 외부 경제활동이 집안 가계부와 완전히 분리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본업 이외 부업이 있거나 금융활동을 통해 추가적인 수입을 얻는다면 그러한 외부의 경제활동도 끊임없이 가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다만, 현대 가정의 가계부에서는 ‘월급’ 등의 외부 소득을 ‘수입’의 한 항목으로만 처리하고, 그 수입원을 가지고 어떻게 살림을 꾸려 나갔는지에 대해 중점적으로 기재하므로, 회계장부와 구분되는 가계부의 영역이 따로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통사회에서는 ‘가계’와 ‘가계가 아닌 경제생활’의 구분이 더욱더 불명확하였다. 특히 농민의 경우에는, 농사일과 집안 살림이 공간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명확히 구분되어 있다고 보기 어려웠다. 그리고 상인의 경우, 점포와 집이 공간적으로 구분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물질적인 면에서나 사회적인 관계의 면에서 완전히 독립되어 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전통시대에 한 개인이 자신의 일상을 기록할 때는 순수하게 가계 부분만을 떨어트려 독립적으로 서술하기가 쉽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하재일기』에 공인 조직의 운영과 관련된 업무 내용과 개인적인 내용이 혼재하는 것도 ‘공과 사가 뚜렷이 구분되지 않았던’ 당시의 상황이 반영된 결과로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하재일기』에 기록되어 있는 지규식의 여러 경제활동은 어디까지가 분원 공인으로서의 업무 내용이고, 어디부터가 개인적인 차원의 활동인지 명확히 구분해 내기가 어렵다.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덕분에 우리는 이 『하재일기』를 통해 19세기 후반의 조선에 살았던 한 인물의 경제생활을 좀 더 다각적으로 두루 엿볼 수 있다. 왕실·관청용 최상품 도자기를 만들어 내는 분원 사람들의 모습과 그 도자기를 납품하는 일을 맡은 분원 공인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규식이라는 한 개인이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어떻게 가계를 꾸려 나갔는지도 함께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분원에서 만든 도자기 종류마다 어느 관청에 어떻게 납품하고 얼마의 값을 받았는지도 알 수 있으며, 개인적으로 소비했던 땔감·신발·옷감·식료품·담배 등을 어디서 얼마에 샀는지도 알 수 있다. 경제생활만 엿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경제생활에는 늘 사회생활도 얽힐 수밖에 없다. 특히 전통시대에는 더욱 그러하였다. 오늘날에야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도 온라인으로 장을 보거나 송금할 수 있지만, 전통시대에는 상거래도, 돈거래도, 선물교환도 직접 만나지 않고서는 할 방법이 없었다. 또 함께 경제적 활동을 하는 사람들과는 단순히 얼굴을 마주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친밀한 관계가 필수적이었다. 전통시대에 장시라는 공간은 경제적 교류의 장이기도 했지만, 정보 교류의 공간, 공개 처형의 공간, 만남의 공간이었다는 점에서 사회적 교류의 장이기도 했다는 점을 함께 떠올려 볼 수 있다. 『하재일기』에 드러나는 지규식의 인간관계를 들여다보아도 순수한 경제적 관계는 드물고 항상 사회적 관계가 얽혀 있다. 분원의 동료 공인들과는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관계였으므로,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을 가리지 않고 긴밀히 교류하였다. 서울 종로 상인과는 함께 계를 만들기도 했으며, 그가 서울에 갈 때마다 만나고 신세를 지는 사이이기도 했다. 서로의 경조사 때 인사와 부조를 하는 것은 물론이었다. 도자기를 납품할 때 대면하게 되는 관청 관계자에게는 때마다 인사와 선물을 챙기며 관계를 유지하였다. 지규식이 고용했던 묘지기도 묘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잡일도 맡아 하였고, 묘지기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지규식이 적극적으로 도와주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하재일기』에 기록된 지규식의 경제생활을 살펴보되, 분원 공인으로서의 공적 업무 영역과 사적인 가계 영역 중 어느 한쪽만을 조명하기보다는 양쪽을 함께 들여다보고자 한다. 또 경제활동에 초점을 두되, 그에 동반된 사회적인 관계도 함께 살피고자 한다. 혼재된 것은 혼재된 그대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오히려 당시의 실제 생활상에 가까울 것이라 믿으며.
  • 19세기 조선의 종부를 만나다 -유씨 부인의 가계경영과 재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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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녔다. 이처럼 일기에 등장하는 양반 여성들은 그야말로 집에만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외부 출입을 하며, 멀리 떨어져 있는 친족 방문을 위해 여행길에 나서기도 하였다. 문안비의 교환 유씨 부인이 1달에 1회 정도만 외출하였다고 해서 조선의 양반 여성들이 폐쇄적인 삶을 살았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일기에는 그녀의 외출을 대행할 사람과 수단이 기재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문안비(問安婢)였다. 양반 여성들이 새해 등 명절에 양반 여성들이 친족 어른과 사돈댁에 얼굴이 고운 어린 계집종을 잘 차려 입혀 문안 인사를 보냈는데, 이들을 문안비라고 불렀다. 대체로 정월 3일부터 15일 사이에 오고 갔는데, 청국에는 없는 조선 사회의 문화적 특수성에서 기인한 것이라 한다. 부인은 노호댁에 복매를 보내거나 방곡댁에 판절이를 보내 새해 인사를 여쭙고 있다. 친족 어른들의 문병 인사차 문안비를 보내기도 하는데, 사점이와 개덕이를 수한댁과 오곡댁에 보내는 것이 확인되며, 관손이를 오곡댁에 보내 상례 문안을 대신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경우가 총 10번 나타난다. 한편, 오곡댁에서도 유씨 부인의 병문안을 위해 금매와 늦점이를 보내기도 하였다. 그 외 친족 소식이나 정보를 급히 전달하기 위해 하인을 보내기도 하였다. 문안비 교환은 대체로 동일 지역 내로 한정되었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1859년 9월 1일 서울 장동댁에 선물을 보내는데 남자 노복과 함께 금례를 보내어 서울 친족들에게 심부름과 안부 인사를 대신하게 하였다(『경술일기』, 1850년 9월 1일, 1850년 9월 30일). 물론 원거리에 문안비를 파견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 아니었다. ‘서신 왕국’의 여성들 조선시대는 ‘서신 왕국’이라 할 만큼 남성과 여성들은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기존 연구에 따르면 여성들의 편지는 남편과 아내, 시아버지와 며느리, 어머니와 아들 등 직계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가 많았으며, 대부분 집안 남성과 여성 간의 의사소통을 위한 것이었다. 유씨 부인이 외부로 보낸 편지는 총 25통이고, 받은 편지는 48통이다. 도합 73통이다. 그녀가 받은 편지 중 가장 빈도수가 높은 것은 남편의 서한으로 총 13통이다. 김호근은 약 6개월 정도 집을 비웠으므로, 1달에 2번 정도 부인에게 편지를 보냈고, 부인은 1달에 1번 답장을 했다. 첩과 서얼의 존재, 그리고 수한리에 와서도 매일 출타하는 남편의 행동을 볼 때 1달에 2번 편지를 보내는 것은 부부 사이가 유달리 가까워서가 아니라 평균적인 서신 왕래로 보인다. 서신은 원거리 친족들에 한하여 교환된 것은 아니다. 인근에 살고 있던 가곡댁, 후촌댁, 야계댁, 수한댁 등에게 위문편지, 사망이나 병 등 위급한 소식을 전달하고 있다. 그 빈도수는 의외로 상당히 높다. 이 같은 성격의 편지를 부인은 10번 보내고, 10번 정도 받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서신은 예상대로 원거리 친족들과 안부를 주고받는 데 활용되고 있다. 서울의 친족 여성들인 격동댁, 교동댁, 재동댁에게 4번 보내고 6번 받았다. 그리고 예산으로 추정되는 송정댁, 원거리의 월산댁 등과도 서신 왕래가 있었다. 이 중 윤댁으로부터 받는 편지는 총 10번으로 남편 다음으로 빈도수가 높다. 그녀는 부인의 딸처럼 매우 가까운 젊은 새댁으로 득녀 소식와 안부 및 기타 청탁조의 편지를 수시로 보내고 있다. 친정과의 편지도 4번 수신되고 있다. 가장 먼 곳에 거주하고 있는 친족과의 서신 왕래는 황해도 해주이다. 그녀의 서신 네트워크는 서울을 넘어 황해도까지 확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서신은 어떤 방법을 통해 교환되었을까? 편지를 전하는 방법에는 인편, 전인, 관편이 있다. 관편은 관인이 사용하는 공적인 통신 수단이며, 전인은 삯을 주고 대행하는 것이다. 인근 보령에 거주하는 조병덕의 경우 전인의 삯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기에 주로 인편을 이용하고 있다. 부인의 경우 자신의 종을 직접 보내 선물과 편지를 함께 보내는 경우도 있지만, 표에서 볼 수 있듯이 대부분 인편을 활용한다. 주변 친족들이나(『경술일기』, 1850년 11월 17일) 종들이 한양에 갈 때 그편으로 편지를 송부하거나 수신하는 것이다. 또한 황해도 등 원거리 지역으로 서한인 경우 서울로 편지를 보낸 후, 다시 서울에서 인편을 찾아 해당 지역으로 보내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서울 용산으로 가는 인편을 통해 황해도 해주로 가는 편지를 보냈는데(『경술일기』, 1850년 10월 4일), 서울에서 다시 인편을 물색하여 해주로 해당 편지를 송부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19세기 중반 서울은 전국 편지의 집산지이자 재송부처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물 교환과 유대 강화 또 하나의 네트워크 관리방식이 바로 선물 교환이다. 선물은 예나 지금이나 사회적 유대관계를 형성‧지속시키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이다. 조선시대 여성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선물을 서로 주고받았다. 이 같은 현상을 최근의 연구자들은 하나의 ‘선물경제’라는 교환 시스템으로 파악하고 사회경제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김호근가에서는 ‘선물경제’라 칭할 만큼의 선물 교환은 이루어지지 않고, 다만 사회적 유대 강화, 청탁, 상장례의 부조, 친목 도모적인 성격이 더 강하게 나타난다. 특히 선물은 사람 간의 관계성을 긴밀하게 만들고 지속시키는 데 탁월하다. 이러한 목적에서 친족 간 관계 유지 및 유대 강화를 위한 선물 교환이 총 132건(증여: 95회, 수취: 37회)임을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선물 교환망은 전국으로 확대되는 특징을 갖고 있다. 즉, 부인의 사회적 네트워크의 범위가 전국적이라는 뜻인데, 이 점에서 일반 평민 여성들과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선물 교환 대상자는 예산, 청양, 화산, 보령, 부여, 공주, 임실, 서울, 해주, 황주 등지이다. 그것은 친족들의 관직 진출과 혼맥에 따라 연결망의 범위가 서울과 전국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표 5】 대상별 선물 교환의 비중 이러한 선물 교환의 범위는 유씨 부인의 서신 교환망, 방문객의 주거지와도 일치하고 있다. 그중 눈길을 끄는 선물이 있다. 부인은 서울의 전동·장동·교동·격동 및 타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친족들과 상호 왕래 및 많은 선물과 서신을 주고받았는데, 궁궐의 조대비전과 전동의 김대근에게는 거의 일방적인 선물 공세였다. 김대근은 1836년에 병조참의, 경상감사를 지낸 인물이자 그의 부친은 공조판서 김한순(金漢淳)이다. 또한 김대근의 동생 현근은 순조의 부마였기 때문에 왕실과 가까이 연결되어 있는 인물이자 김호근의 친동생 학근이 양자로 간 집안이기도 하다. 전동의 김대근 가에는 세 번의 선물이 보내지고, 이때 궁궐의 조대비전으로 가는 선물도 함께 송부된다. 또한 친동생 학근의 양부이자 해주와 황주목사로 재직했던 김헌순과의 선물 교환도 눈에 띈다. 즉 김대근 가로 보내는 선물은 친족 간의 유대관계 유지라는 성격 외에도 정치적 네트워크 유지 및 강화라는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부인의 사회적 연결망이 서울의 궁궐까지 연결되어 있으며, 친족 간 연망과 선물교환이 단순한 의례 혹은 유대 강화라는 차원을 넘어서 정치적 기제라는 성격이 복합적으로 혼재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일방적인 고가의 선물 증여에서 짐작할 수 있다. 반면 부인이 받는 선물은 송출한 것에 비해 적다. 친족에게서는 37회, 남편의 친구로부터는 7회, 하민으로부터는 9회 정도이다. 일반적으로 고위직 남성 관료의 경우 친족보다 동료 및 하급 관인들로부터 받는 선물의 비중이 높게 나타나지만, 유씨 부인의 경우 여성이며, 남편이 관직에 진출하지 못한 상태이므로 친족 비중이 매우 높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남편쪽 교우와의 선물 교환 빈도수는 낮지만 고급 식재료나 생활용품을 교환한다는 측면에서 특징이 있으며, 부인이 대행한다는 성격을 갖고 있다. 이같은 부인의 사회적 관계와 연결망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지역 경계를 넘어 다양한 방식으로 활발하게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 관계망은 남성들에 비해 협소하다는 특징이 있다. 즉, 당대 여성들이 부계 혈통의 친족망과 교우망에 편입되어 이 관계망을 잘 유지하는 것이 여성의 부덕으로 알고 살았는데, 유씨 부인도 이 역할에 매우 충실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것은 피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우 자발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남편과 자손의 영달, 배타적 통혼권과 기득권 유지, 양반의 사회적 연결망 속에 재편입 등 여러 특권이 주어지거나 유지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유씨 부인은 적극적으로 남성의 연결망을 유지하고 확대하는 데 기여했던 것이다. 실제로 부인의 내조와 네트워크 덕인지 김호근은 동창의 낭청, 장릉참봉(莊陵參奉)을(『승정원일기』, 고종 26년 4월 29일)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고, 큰아들 병대는 동부도사(東部都事, 『승정원일기』, 고종 26년 4월 29일), 홍산현감(『승정원일기』, 고종 31년 2월 27일), 대한제국기 중추원 의관직을 역임하였고, 둘째 아들 병두는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정릉참봉(『승정원일기』, 고종 27년 8월 10일)을 지냈다. 그리고 딸은 19세기 말 군부대신과 학부대신을 역임한 이도재에게 시집을 보냈다.
  • 19세기 조선의 종부를 만나다 -유씨 부인의 가계경영과 재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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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씨 부인의 언문일기 다락방 오동나무 궤짝 속의 『경술일기』 가을이 깊어가는 10월 24일에 작성된 유씨 부인의 일기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일기와는 다른 형식과 내용을 담고 있다. 1849년 10월 24일 맑음 행촌나리께 편지를 부쳤다. 막돌이가 꿀 두식기 가옷(두그릇 반)을 넉냥(4냥)에 사고, 경화의 회갑에 갈비 한 짝을 보냈는데 막돌이가 팔전(8전)에 사 왔다. 왕동댁에서 받은 돈 엿냥 두돈 오푼(6냥 2전 5분)은 내 저고리를 판 값이고, 석냥 너돈 오푼(3냥 4전 5분)은 내 옥잠(옥비녀) 판 것을 받은 것이다. ―『경술일기』 일기란 대체로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을 뜻한다. 위의 유씨 부인 일기는 업무일지나 가계부처럼 보인다. 10월 24일 부인은 무슨 용무인지는 모르지만 인근 마을에 살고 있는 일가 친족 남자 어른께 편지를 보냈다. 아마도 남편이 서울로 출타 중이어서 11월 9일에 지내야 할 차례의 제관 역할을 요청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리고 노비 막돌이를 시켜 고가의 식재료인 꿀을 4냥어치 사 오고, 갈비도 한 짝 구매하여 경화의 환갑 선물로 보냈다. 그리고 자신이 그날 받은 저고리와 옥비녀를 판매한 값으로 총 9냥 7전을 기입하였다. 양반집 맏며느리(종부)가 자신의 저고리와 비녀를 팔았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조선 양반의 모습과 거리가 멀다. 이 일기에는 돈의 흐름과 출납을 구체적으로 적은 다른 이야기들도 종종 등장한다. 당시 대부분의 남성이 생산한 자료들, 즉 행장이나 제문에는 양반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바느질과 길쌈에 힘썼다’, ‘밤낮없이 베를 짜다’, ‘치산으로 집안을 일으켰다’는 등의 서사가 종종 등장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것을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빠져 있거나 다소 막연하게 그려져 있다. 그동안 여성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조선시대 여성들의 아름다운 덕행으로 칭송되던 가사노동과 가계 운영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수행되었을지에 관한 궁금증이 컸다. 아마도 ‘돈은 어디에서 났을까?’ 하는 물음이 핵심이었을 것이다. 필자는 우연한 기회에 『경술일기』는 충남 홍성 갈산면 수한리에 세거했던 안동 김씨 선원파 가문의 다락방에서 종부 기계 유씨(1818-1875)의 언문 일기를 발굴할 행운을 가졌다. 안타깝게도 이 일기는 170여 년 동안의 습기와 쥐의 습격 속에서 일부만 살아남아 1849년부터 1851년까지 약 1년 반 가량의 기록만이 전해져 내려올 뿐이다. 그렇지만 유일한 조선시대 여성의 일기로 남평 조씨의 『병자일기』(1636-1640)만 현존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경술일기』의 발견도 역사적 사료로서 소중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더욱이 다른 일기와는 달리 일종의 가계부적인 성격이 강한 것으로 하루의 금전 출납과 주요 일과 및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어 조선시대 한 가정의 경제생활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뜻이 깊다. 본 책에서는 『경술일기』를 토대로 19세기 중반 종부의 가계경영과 그 시대를 엿보기로 한다. 【그림 1】 경술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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