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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전통 에 대한 총서 검색 결과 전체125건
  • 조선의 양반, 가정을 경영하다 -18세기 대구 최흥원의 가사활동을 중심으로-
    • 기록자료
    • 경제
    다. 현대에는 전통시대에 비해 사회의 역할이 확대되었고 집은 사적인 영역으로 축소되었다. 자본주의의 영향이 커지고, 그에 따른 사회적 성취와 가족부양을 위한 경제적 자원을 획득하기 위한 욕망이 커진 것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 사회에서 가족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자원을 획득하는 가운데 가사활동의 범위와 양도 전통시대에 비해 줄어들었고 가사활동에서 남녀의 고정적인 성 역할도 축소되어 가는 추세이다. 조선시대의 집은 가족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자원을 자급자족하거나 일부는 선물이나 부조 등으로 보충했다. 집은 생활의 공간이자 생산의 공간이자 사회화의 공간이다. 유교가 국교였기 때문에 집은 조상신을 모시는 종교의 공간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의 집은 사적인 영역과 사회적인 영역이 공존한다. 오늘날에 비해 집의 역할과 기능이 훨씬 복잡하다. 16세기 이후 양반 가옥은 안채와 바깥채로 구성되기 시작했다. 여성은 안채를 중심으로 일했고, 남성은 사랑채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서로의 역할을 존중하는 가운데 부부유별을 실천했다. 여성의 역할이 임신과 출산, 음식과 의복 마련 등 가족의 생존과 관련된 것에 집중된 반면 남성은 가족의 생존과 더불어 집의 사회적 역할과 기능을 함께 수행했다. 따라서 남성의 집안 경영과 가사활동에는 사적인 영역의 활동뿐만 아니라 집의 사회적 기능도 포함된다. 조선시대 양반 남성을 대상으로 한 연구는 대체로 정치인, 관료, 사상가, 학자, 지주 등의 관점으로 접근했다. 특히 철학적 관점의 남성은 성리학적 가치관을 실천하는 가운데 학문과 도덕적 완성을 지향하는 고상한 존재로 인식되기도 했다. 양반이 수기치인을 주요한 덕목으로 여기며 스스로 더욱 완성된 존재를 지향하고자 한 측면이 있지만, 이들은 생활 현장을 외면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퇴계 이황, 다산 정약용을 비롯한 여러 인물을 통해 밝혀기도 했다. 양반은 유학을 공부하는 인문학자이자 농업을 경영하는 지주로, 국가 경영, 향촌 경영, 집안 경영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정치, 관직, 학문, 향촌 활동을 하는 모습과 더불어 생활의 현장인 집에서의 역할이 함께 조명되어야 양반 남성에 대한 실체적이고 온전한 복원이 가능할 것이다. 남성의 가사활동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다. 집에서 이루어지는 살림살이와 관련된 다양한 활동을 가사활동으로 정의할 수 있겠다. 가사활동은 역사성을 가지기 때문에 시대별로 그 내용과 범주는 다르다. 조선은 성리학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성리학의 작동 양상은 국가, 향촌, 집 등을 통해 다층적으로 살펴볼 수 있지만, 집은 성리학의 이념을 실천하는 구체적 현장이기도 했다. 집에서 가사활동이 어떻게 분배되는지 살펴보는 것은 성리학의 실현 여부와 작동 양상을 알 수 있는 하나의 창이기도 하다. 조선시대를 들여다볼 수 있는 자료로는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의 관찰자료를 비롯하여 개인이 남긴 문집, 고문서, 일기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개인의 일상을 시간의 흐름을 따라 미시적으로 잘 보여 주는 자료는 일기이다. 양반 가운데 일기를 남긴 인물이 상당수 있으며, 수십 년 혹은 몇 대에 걸쳐 쓴 일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기도 하다. 수십 년간 작성한 생활일기는 양반이 집안을 어떻게 경영했고, 남성의 가사활동 내용은 무엇이었는지,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 미시적으로 살펴보기에 안성맞춤인 자료이다. 2,000년 이후 고문서나 일기자료를 통해 양반 남성의 사생활이나 일상 및 살림하는 남성에 대한 논문과 대중서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는 법제적 연구와는 달리 가장의 역할을 확인했고, 가사노동, 자녀 양육, 가족 돌보기에 주목하는 남성의 모습을 일부 복원했다. 이 책은 필자가 최흥원이 50여 년 동안 기록한 생활일기인 『역중일기』를 통해 조선 후기 남성의 가사활동과 그 의미에 대해 논문으로 작성한 것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 살림살이하는 남성의 모습이 역사의 수면 위로 올라왔지만, 집안의 경영과 가사활동의 구체적인 양상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살펴본 글은 드물다. 지금부터 50여 년 동안 가사활동에 충실했던 남성, 18세기의 대구 양반 최흥원을 만나러 가자. 【그림 1】 《해동지도》, 〈대구부지도〉, 서울대학교 규장각
  • 왕의 비서실, 승정원 사람들과 승정원일기
    • 기록자료
    • 정치
    하고 있다는 점은 전통시대 기록문화의 우수성을 한층 돋보이게 한다. 【표 1】 『승정원일기』의 국보 지정 내역
  • 왕의 비서실, 승정원 사람들과 승정원일기
    • 기록자료
    • 정치
    기』의 기록이 왜 전통 생활사의 보고가 될 수 있는지를 실증해 주고 있다.
  • 왕의 비서실, 승정원 사람들과 승정원일기
    • 기록자료
    • 정치
    파악할 수 있고 전통시대 기후 연구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기후 예측에도 큰 도움을 안겨 줄 것으로 기대된다. 이처럼 매일의 기후가 단절됨이 없이 기록된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은 사례일 것이며, 이러한 자료의 통계 처리는 오늘날에도 유효하게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림 28】 『승정원일기』, 1767책, 정조 20년 9월 10일 임자,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승정원일기』에 나오는 강아지 관련 기록 또한 『승정원일기』에는 본 내용을 기록하기 전에 승정원 벼슬아치들의 실명(實名)을 꼭 적었다. 앞부분에는 6명의 승지를 비롯하여 주서, 가주서, 사변가주서 등의 실명이 나온다. 무엇보다 매일매일 기록 작성자의 실명을 꼭 적었다. 병이나 사고 등으로 출석하지 못한 상황까지 ‘병(病)’, ‘재외(在外)’, ‘식가(式暇)’ 등의 표현으로 기록하여 기록의 주체를 분명히 하였다. 기록의 실명화는 이들에게 책임감과 함께 국가의 공식 기록에 자신의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이들에게 자부심과 사명감도 아울러 부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시대에는 각종의 기록에서 참여자의 실명을 쉽게 접할 수 있는데, 『의궤』와 같은 자료에서는 화원이나 하급 장인들의 이름까지 일일이 기록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국가적 기록물에 이름만으로도 하급 장인임을 알 수 있는 신돌이(申乭伊), 김순노미(金順老味), 강아지(姜岳只) 등과 홍애(紅愛), 차애(次愛) 등 기녀(妓女)들의 실명이 당당히 들어 있다. 물론 행사에 따르는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려는 뜻도 있었겠지만 미천한 인물에게까지 자부심을 고취하려는 국가적 배려가 숨어 있다. 의궤나 『승정원일기』에 나타난 철저한 실명 기록 방식이 예사롭지 않은 것은 현재에도 이러한 방식이 절실히 요청되기 때문이다. 『승정원일기』는 원본 1부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었으나, 초서(草書)로 기록되어 해독이 용이하지 않았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하여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1961년부터 원래 초서로 쓰인 원본을 탈초(脫草)하여 그 원문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하였다. 현재 국사편찬위원회의 홈페이지에서는 탈초한 원문을 제공하고 있다. 『승정원일기』 탈초와 정보화 사업은 초서로 된 원문을 쉽게 읽을 수 있게 하여 『승정원일기』의 보급에 크게 기여하였지만, 한문으로 쓰인 방대한 원문은 여전히 소수의 전공 분야 연구자만이 이용할 수 있는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족문화추진회(현재의 한국고전번역원)에서 1994년부터 고종 대의 『승정원일기』를 시작으로 국역 사업을 단계적으로 추진하여 현재 인조 대와 영조와 정조 대, 고종 대의 국역이 일부 이루어졌다. 이 성과물은 한국고전번역원의 홈페이지에서 고전종합DB를 통해 제공되어 『승정원일기』 연구 활성화와 국학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최근에 와서는 역사 드라마나 영화의 제작에도 『승정원일기』가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현재 예산과 인력의 부족으로 『승정원일기』의 완역이 모두 이루어질 시기는 예상할 수가 없다. 2022년 한국고전번역원 관계자에 의하면, 현재 전체 번역의 32%가 이루어졌고 2,400여 책의 분량이 남아 있다고 한다. 현재의 진도대로 나간다면, 2048년경에 완성될 것이라고 하였다. 고전번역원의 고전종합DB 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인조, 고종, 순종 대의 전량이 번역되었고, 영조는 즉위년인 1724년부터 1740년(영조 16)까지의 『승정원일기』가 번역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승정원일기』의 국역 사업이 모두 이루어진다면 조선왕조의 역사가 우리에게 보다 객관적이고 생동감 있게 다가설 것으로 기대가 된다. 조선 왕실의 숨결까지 담겨 있는 『승정원일기』는 조선시대 생활사 모습 복원에 가장 기본 자료로 활용할 수 있으며, 『승정원일기』의 적극적인 활용은 조선시대 문화 원형의 복원에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가 된다.
  • 조선 최후의 공인, 지규식의 일기
    • 기록자료
    • 경제
    있다. 그러나 전통사회에서는 ‘가계’와 ‘가계가 아닌 경제생활’의 구분이 더욱더 불명확하였다. 특히 농민의 경우에는, 농사일과 집안 살림이 공간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명확히 구분되어 있다고 보기 어려웠다. 그리고 상인의 경우, 점포와 집이 공간적으로 구분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물질적인 면에서나 사회적인 관계의 면에서 완전히 독립되어 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전통시대에 한 개인이 자신의 일상을 기록할 때는 순수하게 가계 부분만을 떨어트려 독립적으로 서술하기가 쉽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하재일기』에 공인 조직의 운영과 관련된 업무 내용과 개인적인 내용이 혼재하는 것도 ‘공과 사가 뚜렷이 구분되지 않았던’ 당시의 상황이 반영된 결과로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하재일기』에 기록되어 있는 지규식의 여러 경제활동은 어디까지가 분원 공인으로서의 업무 내용이고, 어디부터가 개인적인 차원의 활동인지 명확히 구분해 내기가 어렵다.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덕분에 우리는 이 『하재일기』를 통해 19세기 후반의 조선에 살았던 한 인물의 경제생활을 좀 더 다각적으로 두루 엿볼 수 있다. 왕실·관청용 최상품 도자기를 만들어 내는 분원 사람들의 모습과 그 도자기를 납품하는 일을 맡은 분원 공인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규식이라는 한 개인이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어떻게 가계를 꾸려 나갔는지도 함께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분원에서 만든 도자기 종류마다 어느 관청에 어떻게 납품하고 얼마의 값을 받았는지도 알 수 있으며, 개인적으로 소비했던 땔감·신발·옷감·식료품·담배 등을 어디서 얼마에 샀는지도 알 수 있다. 경제생활만 엿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경제생활에는 늘 사회생활도 얽힐 수밖에 없다. 특히 전통시대에는 더욱 그러하였다. 오늘날에야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도 온라인으로 장을 보거나 송금할 수 있지만, 전통시대에는 상거래도, 돈거래도, 선물교환도 직접 만나지 않고서는 할 방법이 없었다. 또 함께 경제적 활동을 하는 사람들과는 단순히 얼굴을 마주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친밀한 관계가 필수적이었다. 전통시대에 장시라는 공간은 경제적 교류의 장이기도 했지만, 정보 교류의 공간, 공개 처형의 공간, 만남의 공간이었다는 점에서 사회적 교류의 장이기도 했다는 점을 함께 떠올려 볼 수 있다. 『하재일기』에 드러나는 지규식의 인간관계를 들여다보아도 순수한 경제적 관계는 드물고 항상 사회적 관계가 얽혀 있다. 분원의 동료 공인들과는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관계였으므로,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을 가리지 않고 긴밀히 교류하였다. 서울 종로 상인과는 함께 계를 만들기도 했으며, 그가 서울에 갈 때마다 만나고 신세를 지는 사이이기도 했다. 서로의 경조사 때 인사와 부조를 하는 것은 물론이었다. 도자기를 납품할 때 대면하게 되는 관청 관계자에게는 때마다 인사와 선물을 챙기며 관계를 유지하였다. 지규식이 고용했던 묘지기도 묘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잡일도 맡아 하였고, 묘지기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지규식이 적극적으로 도와주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하재일기』에 기록된 지규식의 경제생활을 살펴보되, 분원 공인으로서의 공적 업무 영역과 사적인 가계 영역 중 어느 한쪽만을 조명하기보다는 양쪽을 함께 들여다보고자 한다. 또 경제활동에 초점을 두되, 그에 동반된 사회적인 관계도 함께 살피고자 한다. 혼재된 것은 혼재된 그대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오히려 당시의 실제 생활상에 가까울 것이라 믿으며.
  • 조선 최후의 공인, 지규식의 일기
    • 기록자료
    • 경제
    공물이라는 것은 전통 유교 국가에서 거두는 기본적인 세금 명목 세 가지 중 하나였다. 세 가지의 기본 세금 명목은 조(租)·용(庸)·조(調)로 불렸는데, 첫째는 토지에 부과되는 조세였으며, 둘째는 16-60세 남성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부과되는 군역 또는 노역의 의무였고, 셋째는 각 가호 단위로 부과되는 현물세였다. 공물은 그 세 번째 명목이었고, 원칙상 그 지역의 토산물을 현물로 납부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공물의 납부 과정에는 일찍부터 여러 가지 어려움이 발생했다. 지역별로 토산물의 편차가 있다 보니 이를 조정하는 과정에서 그 지역에서 생산되지 않는 물품까지 상납하라는 요구가 있기에 이른다. 심한 경우 산촌 지역에 해산물을 내라고 하는 경우도 생겼다. 이런 경우 그 지역 사람들은 그 공물을 어딘가에서 따로 구해서 납부해야 했는데, 이로 인해 대신 공물을 구해서 납부해 주고 대가를 받는 사람들이 생겼다. 적정한 대가를 받을 때는 이 ‘대납(代納)’이 편한 방법이었지만, 문제는 대납해 주는 이들이 과도한 대가를 요구하며 횡포를 부리기 시작하면서 시작되었다. 본래의 납세자들이 직접 공물을 구해 내려고 해도 오히려 가로막으며 자신에게 대가를 지불하라고 강요하는 사태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행태를 ‘납부를 가로막는다’라는 뜻으로 ‘방납(防納)’이라 한다. 16세기부터 이러한 방납의 폐단이 심화되었고, 그 해결책을 모색하다가 조선 후기에 시행된 것이 대동법이다. 대동법은 공물을 현물로 거두지 않고 쌀이나 포로 대신 거두는 것이었으며, 부과단위도 가호가 아닌 토지로 바꾸는 것이었다. 각 토지에서 거두어들인 대동미는 중앙으로 집결되었고, 정부에서는 이것을 재원으로 하여 공물을 구입하였다. 이때 정부로부터 값을 받고 공물을 사 오는 담당자를 공인이라고 불렀다. 공인으로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지정되기보다는 기존의 상인들, 특히 사적으로 방납 활동을 주도해 오던 이들이 지정되기가 쉬웠다. 어찌 보면 정부는 대납 또는 방납이 만연한 현실 상황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그러한 현실 관행을 양성화, 제도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적인 방납인들이 중간에서 백성들로부터 공물값을 탈취하였다면, 이제는 중앙 정부에서 일괄적으로 공물값을 거둬들이고 공식적으로 지정한 공인들에게 그 값을 주어 공물을 사 오도록 한 것이었다. 사상(私商)들이 제도권 내로 포섭되었던 경향은 같은 시기 시전 제도의 변화에서도 엿볼 수 있다. 시전은 국초에 도성을 설계할 때부터 도성의 필수 구성요소로서 종로에 설치되었던 국가 지정 상업기구였다. 시전은 국가에 대해 일정한 의무를 지면서 각자 맡은 물종을 독점적으로 거래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16세기부터 시전이 아니면서도 도성 안팎에서 상거래를 하는 상인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임진왜란 때 시전 상인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돌아온 이후에는 더욱 그러하였다. 정부는 이미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모든 사상을 일거에 없앨 수도 없었고, 재정난 해결을 위해서는 오히려 이들을 제도권 내로 포섭할 필요를 느꼈다. 정부에서는 이들 사상을 시전으로 공식 등록시키고 나라에 대한 의무를 지우는 방법을 택했다. 그 결과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초 무렵 시전의 수가 대폭 증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추세 속에서 조선 후기 서울에는 시전과 공인의 수가 함께 늘어나고 있었다. 시전인과 공인은 도성민의 주요 구성원이었다. ‘도성민의 생계는 오로지 공물과 시전에 의지’한다고 표현될 정도로, 시전과 공인은 도성 경제의 핵심적인 두 축이었다. 본래 조선 전기까지는 시전인이 도성민의 대표 격으로 묘사되었지만, 이제는 공인도 시전인에 맞먹는 핵심 구성원이 되었다. 공인은 중앙관청으로의 관수물자 납품을 주된 의무로 맡고 있었으므로, 이들은 서울이나 그 인근 지역에 본거지를 둘 수밖에 없었다. 직접 지방 생산지나 장시에 가서 물품을 공수해 온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 최종 집결지는 서울이었으니 말이다. 한편, 공인으로 지정되는 사람이 모두 순수한 상인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각 관청 창고 등에서 물자의 출납을 담당하던 하급 실무직들이 공인의 역할을 하게 되는 사례도 있었다. 이러한 사례들은 조선 후기 관청들에도 상업 활동의 권한이 주어졌던 것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두 차례의 전쟁을 겪은 이후 조선 후기 정부는 재정난에 시달렸고, 재정 보충 수단으로 상업에도 눈을 돌리게 된다. 서울에 거주했던 훈련도감 등의 군병들에게도 밀린 급료를 대신하여 상업활동을 허가해 주어 생계를 이을 수 있도록 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또 지방 관청에서도 상업활동을 통해 부족한 재정을 채울 수 있도록 허용하기 시작하였다. 관청에서 상업활동에 참여한다면, 그 실질적 담당자는 물자의 출납을 맡고 있던 사람들이 되기 쉬웠다. 각 관청의 창고지기(庫直)나 원역(員役)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1753년 공인들이 왕 앞에서 호소했던 각종 폐단을 기록한 『공폐』에는 여러 공인 조직의 명칭이 확인되는데, 그중 특정 관청의 원역과 창고지기 등도 포함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외부에서 공인 활동을 하던 사람을 관청의 창고지기 자리에 앉히는 사례도 보인다. 이렇듯 조선 후기 공인이라는 집단 속에는 오래전부터 전국 각지의 생산지와 서울의 납품처를 이어 주던 상인들의 후예도 포함되어 있었고, 관청에서 물자 출납을 관리하다가 공인의 역할까지 하게 된 사람들도 있었다. 한편, 시전 상인이 공인권을 획득하여 시전과 공인의 역할을 겸하였던 사례도 종종 확인된다. 그 출신이 어떻든 공인의 역할은 상거래를 통해 관수물자를 제때 정해진 수량만큼 구매하여 소속 관청에 납품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무 수행에 대한 대가로 주어지는 것은 조달한 물품값의 지불도 있었지만, 해당 물종에 대한 유통 권한도 있었다. 시전 상인의 경우 각자 취급하는 물종에 대한 독점적인 권한을 가졌고, 도성 안팎에서 자신 이외에 해당 물종을 거래하는 상인이 있다면 이들을 ‘난전(亂廛)’이라고 부르며 단속할 수 있는 권한도 가지고 있었다. 시전은 한성부로 들어오는 물품에 대한 구매 독점권도 가지고 있었고, 그렇게 확보한 물품에 대한 판매 독점권도 가지고 있었다. 시전에게 이러한 특권이 주어졌던 것은 이들이 관수물자를 조달하는 의무를 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관수물자 조달자였던 공인의 경우에도, 시전과 동일한 권한은 아니었지만 유사한 권한이 부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관수물자’라는 명분은 각지에서 물품의 수량을 확보할 때 우선권으로 작용하였다. 특히 목재와 같이 나라의 허가 없이는 함부로 베거나 매매할 수 없었던 물종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였다. 관수용 목재의 조달을 맡았던 공인은, 관청에서 발급해 준 공문을 가지고 현지에 가서 필요한 목재를 확보하였다. 민간의 목재상은 공인의 공식적인 목재 조달 경로에 연결되지 않고서는 함부로 목재를 거래할 수 없었다. 한편, 목재 공인들은 자신들에게 부여된 그 공식적인 권한에 힘입어 관수용 목재뿐만 아니라 곁가지로 민간용 목재도 함께 확보하고 거래하기도 하였다. 공인을 바라볼 때, 정부 관청에 소속되어 관수물자의 조달을 주로 담당하는 역할에만 초점을 두게 되면 단순한 조달업자로만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실질적인 물자 조달 과정에서는 상거래가 필수적으로 이루어졌고 사적인 매매활동도 벌였으므로, 엄연히 상인으로도 분류할 수 있다. 본래 상인으로서 활동하다가 공인으로서의 특권을 노리고 공인이 된 경우에는 그 출신으로 보아도 상인이라는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관청의 하급 실무직 출신으로 공인이 된 일부 사례도, 공인이 된 이후에는 상거래에 직접적으로 뛰어들며 상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여 준다. 지규식이 바로 이런 예에 속하는데, 본래 분원의 원역이었다가 1883년에 공인이 되었고, 왕실과 관청에 대한 납품 거래를 주로 하면서도 민간의 주문·판매도 주도하였으며, 분원공소가 폐지되어 공인의 역할이 없어진 이후에도 계속 도자기 판매 사업에 종사하며 회사 설립을 추진하였다. 이를 볼 때, 출신이 어떻든 공인의 기본적인 직업 정체성은 상인으로 정리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물론 공인은 일반적인 상인들과는 구별되는 특수한 의무와 권한을 가진 상인이었다. 명목상으로는 세금의 일종이었던 공물을 대신 조달하고 그 대가를 받는 이들이었고, 그 명분으로 그 물종에 대한 유통 권한도 얻게 된 상인이었다. 이들의 활동은 국가의 재정 운영과도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으므로, 조정에서도 공인을 보호의 대상으로 여겼다. 영조 때부터는 매년 정례적으로 ‘공시인순막(貢市人詢瘼)’이라는 행사를 열어, 왕이 직접 공인과 시전인을 만나 그들의 고충을 듣고 해결책을 마련해 주려 노력하기도 하였다. 1883년 분원 공인의 지정 이제는 지규식의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지규식은 어떤 경로로 분원의 공인이 되었으며, 그가 맡은 분원 공인의 역할은 일반적인 공인과 얼마나 같고 달랐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분원에 공인이 지정된 시점부터 주목된다. 분원은 1883년에 대대적인 개혁 조치가 있게 되면서 ‘분원공소(分院貢所)’로 정식 명칭이 바뀌게 된다. ‘공소(貢所)’로 이름이 바뀐 것은 이곳이 이제 공인들의 공간이 되었다는 뜻이다. 실제로 이때 분원의 도자기를 왕실과 관청에 납품하는 공인들이 설정되었다. 1884년(고종 21)의 「분원공소절목」에 따르면, “번소(燔所)의 원역(員役) 중 근실하여 임무를 감당할 자 12명을 새로운 공인(新貢)으로 삼는다”라고 하였다. 이때 공인으로 지정된 12명 중 하나가 지규식이었다. 이후 공인이 추가로 설정되어 1893년(고종 30) 무렵에는 30명이 되었다고 한다. 대동법이 17세기에 전국적으로 시행되고 각 공물 종류마다 공인들이 지정되어 활동하였던 것을 비추어 볼 때, 1883년에야 공인이 처음으로 지정되었던 분원의 사례는 일반적이지 않았다. 18세기의 사료들에서 여러 공인을 탐색하다 보면, 봉상시, 사복시, 사도시, 군기시, 선공감, 제용감, 내섬시, 내자시 상의원 등 각 관청에 딸린 공인들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반면, 사옹원에 딸린 공인은 찾아보기 어렵다. 사옹원과 그 분원은 다른 관청에 비해 상당히 늦게 공인을 두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공인이 늦게 지정되었다는 것은, 그 이전까지 계속 관영수공업으로 남아있었던 분야라는 뜻이다. 교과서에서도 설명되듯이 조선의 관영수공업 체제는 16세기부터 쇠퇴의 조짐을 보였고, 조선 후기에는 정부도 수공업의 민영화를 용인하고 민간 수공업자들이 만든 제품을 구매하여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관청에서 필요한 수공업 제품을 시장에서 구매하여 오는 역할을 하는 이가 바로 공인이었다. 하지만 사옹원 분원은 1883년까지도 관영수공업장으로 남아 있었다. 이 시기까지 관영수공업 체제를 유지한 분야는 무기 제조업 등의 극소수 사례에 불과했으므로, 사옹원 분원도 매우 특수한 사례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왕실용 도자기라는 물종이 가지는 특수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된다. 물론 전국의 모든 도자기 제조업이 관영으로 운영되지는 않았다. 1753년 무렵 국상 제례 때 사옹원의 사기가 아닌 다른 제기가 쓰인 것을 보고 엄히 꾸짖은 적이 있었다. 알고 보니 제기가 모자라서 사기계(砂器契)로부터 조달받은 그릇을 썼다고 한다. 이때의 사기계는 내자시에 소속된 반사기계(盤砂器契) 공인을 지칭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반사기계 공인은 왕실 혼례(嘉禮) 때마다 반(盤)과 사기(沙器)를 납품하였다. 그 납품 수량은 적게는 1천여 죽이었고 많게는 1만여 죽에 달했다. 하지만 그 값은 4분의 1 또는 10분의 1밖에 지급되지 않아 반사기계 공인은 여러 차례 손해를 본다고 호소하였다. 한편, 중국 도자기를 무역해 오는 당사기계(唐沙器契) 공인도 보인다. 1793년(정조 17) 당사기계 공인은 자신들이 승정원에서 쓰이는 다기(茶器)를 납품하고 값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일에 대해 거론한 바 있었다. 이런 상황을 볼 때, 왕실용 도자기 중 일부는 이미 18세기 중반부터 민간 구매를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단, 사옹원 분원에서 만드는 왕실용 도자기들은 남다른 의미와 남다른 품질을 갖춘 것이었으므로 19세기 후반까지 계속 관영으로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조 때 제례에서 사옹원 그릇이 아닌 민간의 것을 썼다고 엄히 징계하였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조선시대에 그릇은 그저 단순히 음식을 담는 용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신분과 명분에 따라 엄격한 격식이 요구되었다. 군신 간에도 부자간에도 쓸 수 있는 그릇이 달랐으며, 왕실 내에서도 왕이 쓰는 그릇과 세자가 쓰는 그릇의 격식이 다를 정도였다. 이러한 엄격한 격식에 맞게 왕실용·국가행사용 그릇을 전담하여 만들었던 사옹원 분원은 쉽게 민영화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1883년에는 분원의 운영을 공인들에게 맡기게 되었을까? 일차적으로는 당시 정부의 심각한 재정난과 그것을 타개하기 위해 추진된 관제 개편 때문이었다. 조선 후기부터 국가의 재정난은 해소되지 못하고 있었는데, 개항 이후에는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고 있었다. 재정이 넉넉지 않은 상황과 외세의 침입 속에서 부국강병책과 개화정책을 추진하는 것은 부담을 가중시킬 수밖에 없었다. 고종은 1882년(고종 19) 8월 무렵 재정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방안으로, 궁궐의 음식·의복과 하인을 비롯하여 불필요한 관청과 관원을 감축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러한 감축 조치를 ‘감생(減省)’이라 하였고 감생청을 설치하여 이 일을 하루빨리 추진하도록 하였다. 감생청에서는 사옹원에 대한 구조조정안도 구체적으로 시행하였고, 이때 사옹원 분원에 대한 개혁도 이루어졌다. 분원에 대한 조치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째, 분원에 더 이상 사옹원 관원을 파견하지 않는다. 둘째, 민간에서 도자기를 굽는 것을 허락한다. 셋째, 상납되어야 하는 수량은 공인을 두어 조달하도록 한다. 넷째, 분원에서 관원들에게 정례적으로 바치던 인정(人情)을 없앤다. 다섯째, 정식으로 정해진 그릇값 이외에 지불되는 각종 비용도 없앤다. 이러한 조치는 결국 정부에서 분원의 운영비용을 더 이상 대지 않겠다는 것이었으며, 필요한 그릇값만 지불하고 사서 쓰겠다는 뜻이었다. 단, 분원은 그대로 두었고 또한 완전히 민영화한 것도 아니었다. 분원은 여러 특권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우천을 통과하여 운반되는 목재들에 대해 10분의 1세를 거둘 수 있었고, 우천 장시에서 거래되는 상품들에 대해서도 수세권을 가지고 있었다. 또 분원 도자기의 민간 판매를 허락받으면서, 서울과 경기 지역에서 독점적 판매권도 갖게 되었다. 다른 지역 수공업장에서 생산된 도자기들은 원칙상 서울·경기 지역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다. 물론 이러한 원칙을 어기는 경우는 많이 발생하였고, 분원 공인들은 그 단속에 열을 올리기도 하였다. 이렇듯 분원에게 주요한 특권을 계속 부여하고 있었던 것은, 분원이 여전히 국용의 도자기 생산·납품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원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여전히 왕실과 관청에서 쓸 도자기를 제때 잘 납품하는 것이었다. 사적인 민간 판매를 허용하면서도 ‘공(公)을 우선한다’는 대원칙은 명확히 하였다. 갑오개혁 이후 분원 공인의 처지 변화 1883년에 출범한 분원공소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1894-1895년에 추진된 갑오개혁에서는 공납제를 완전히 폐지하는 수순을 밟고 있었고, 공납을 대리하고 있었던 공인의 의미도 상실되고 있었다. 1883년이 되어서야 뒤늦게 공인이 되었던 분원 공인들로서는 10여 년 만에 공인이라는 이름을 떼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10여 년간의 공인 활동도 순탄하지는 않았다. 분원공소로부터 대량의 도자기를 납품받은 정부는 도자기값을 제대로 주지 못하고 있었다. 1895년(고종 32) 분원공소의 혁파가 논의되는 시점까지 정부에서 지급하지 못한 값은 무려 1,108,300여 냥에 달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분원 공인들은 고리의 사채를 얻어 쓰고 있었다. 지규식은 1895년 3월 16일, 서울에 다녀온 이순석으로부터 “분원을 지금 이미 혁파하였으니, 공인 1명을 불러 대기시키라”라는 명령서를 받게 된다. 지규식은 움직이지 않았고, 다른 사람이 상경하였다. 3월 18일에 서울에서 다시 온 편지에는 다른 이야기가 있었다. “분원을 혁파한다는 말은 와전된 것이다”라는 말과 “(분원)공소를 궁내부로 이속하니 각 항목의 지급 물목을 다시 절목으로 만들라”라는 명령이 담겨 있었다. 이번에는 지규식에게 밤을 새워 올라오라는 말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지규식은 직접 상경하지 않고, 공소 절목책과 편지만 인편에 올려 보냈다. 이때 탁지부대신은 분원의 연소자 10명 정도를 선발하여 일본으로 들여보내 기술을 배우게 하라는 명을 내리기도 했다. 이에 분원에서는 몇몇을 선발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분원공소는 1895년에 ‘혁파’ 또는 ‘궁내부로의 이속’이라는 대혼란을 겪었지만, 그 영업이 중단된 것은 아니었다. 이 무렵 지규식은 분원 상황에 대해 한탄스럽고 답답한 심경을 토로하였지만, 마냥 손을 놓고 있지만은 않았다. 1896년(건양 1)에도 지규식은 공소의 지붕 기와와 담장을 고치고, 공소 성조 생신을 챙기고 치성을 드렸다. 그리고 1904년(광무 8)까지도 곳곳에서 공소의 묵은 그릇값을 받아 내고 있었다. 그렇게 지규식은 분원 공소 조직의 명맥을 이어 오다가 1897년(광무 1)에는 ‘번자회사(燔磁會社)’를 설립하게 된다. 번자회사에 대한 구체적인 구상은 1896년 11월부터 마련하여 전동(磚洞) 김종한(金宗漢, 1844-1932) 대감과 상의하였던 것이 확인된다. 회사는 1897년 1월에 상무회의소에서 승인 절차를 받았던 것으로 보이며, 2월에는 깃대를 세우고 현판도 내걸었고, 3월에는 회사 도중(都中)에 도배를 시작했다. 1897년 2월 28일에는 궐내의 하 상궁을 만나 국장에 쓸 제기를 주문받기도 했다. 이때 지규식은 “나이가 많이 들었고, 마련할 수도 없고 구워 만들 수도 없다”라고 했으나 결국 요구 수량의 반만이라도 마련해 보기로 하고 값을 따져 보았다. 번자회사는 서울에 본사를 두고, 분원에서 자기를 생산하는 체제로 운영되었다. 사장 1명과 출자사원 8명이 만든 합명회사였다. 사장은 최고위 관료 자본가였던 김종한이 맡았고, 서울 본사 사원 3명은 중하위 관료 자본가였으며, 분원 사원 5명은 분원공소 공인 출신들이었는데 그중 1명이 지규식이었다. 총 9명이 각자 15,000냥씩 투자하였고, 이익금을 똑같이 나누어 갖기로 하였다. 번자회사의 본사는 서울 광교(廣橋)에 두었다고 한다. 번자회사는 수입 도자기의 유통 확대, 일본인의 자기 생산 등을 배경으로 점차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대응하여 지규식은 채색 자기를 생산하기 위해 시도하면서 서울 응봉(鷹峰) 아래 은곡(銀谷)에 새 가마를 개설하고, 1906년(광무 10) 무렵부터는 ‘번사회사(燔砂會社)’로 회사명을 바꾼 뒤 ‘번사주식회사’를 결성했으며, 1910년(융희 4)에는 분원자기주식회사를 설립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변화 시도에도 분원 도자기업의 상황은 쉽게 호전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번사회사의 시설도 점차 다른 용도로 떼어져 나가게 된다. 지규식의 일기에는 1899-1900년 무렵에 귀천과 석담의 진사들이 분원 내에 소학교를 설립하는 계획을 상의하는 내용도 나온다. 이때 분원 내의 포목계(布木契) 도가(都家)를 내어 주는 안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1906년에는 청년들이 본격적으로 학교 설립에 대해서 의논하기 시작하였고, 지규식도 학교 설립 자금을 출연하는 문제로 회의에 참여하였다. 청년들의 주도로 학교가 설립되었고 분원 내의 포목계 도가를 학교 건물로 쓰도록 700냥에 팔았다. 번사회사의 사장 김종한은 분원공립보통학교 교장이 되었고, 학교에 130원의 지원금을 내기도 했다. 1907년(광무 11)에는 분원학교 담장을 수축하기 위해 회사의 석재를 헐어 내었고, 회사 옛터에 학도들의 교련장을 만들어 수리하는 공사를 진행했다. 1908년에는 양근군의 가사중건소(家舍重建所)에서 폐허가 된 번사회사의 행랑 3칸의 기와를 뜯어 갔으며, 학교 건물로 쓰기 위해 행랑을 헐기도 했다. 1911년에는 지규식이 “전 번사회사 기지(基地)를 영구히 매도한다는 증서”를 작성하여 본사의 한용식(韓龍植)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한용식은 이에 대해 “전 회사의 기지는 방매하지 않는다”라는 답장을 보내왔다. 이후 번사회사의 옛터와 시설들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1916년에는 분원자기주식회사도 자금난으로 문을 닫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국가적 수요의 도자기를 생산하던 사옹원 분원은 종래 관영수공업으로 운영되다가, 1883년에는 별도로 지정된 공인들이 운영하는 ‘분원공소’로 전환되었고, 갑오개혁 때의 공인제도 혁파 이후로는 일부 분원 공인 출신들과 외부 자본가들의 합자로 1897년의 ‘번자회사’ 설립으로 이어졌다. 자금 순환의 문제, 외국산 도자기 유통의 증가, 일본인의 도자기업 진출과 영향력 확대 등을 배경으로 번자회사는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고 여러 활로를 모색했으나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1910년 무렵 폐업에 이른다. 『하재일기』를 통해 엿보이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분원 공인들의 삶은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많은 굴곡이 있었다. 계속 분원에 남아 도자기업에 종사하고 근대 회사로의 전환을 모색하던 이들도 있었고, 분원을 떠나 새로운 업종에 뛰어들거나, 다른 지역을 떠돌며 생계를 이어 나갔던 사람들도 있었다. 지규식은 그래도 최후까지 분원 도자기업의 명맥을 이어 나가며 근대 회사의 설립 등의 새로운 시도를 주도했던 인물이었다. 그 덕분에 그의 일기를 통해서 분원 도자기업의 굴곡도 구체적으로 엿볼 수 있다. 1891년부터 1911년까지 약 20년 동안 기록된 『하재일기』에는 조선시대 공인의 모습뿐만 아니라 근대화 과정에서 회사로의 전환 및 그 이후의 운영상까지 담겨 있다. 그 한 단계 한 단계 변화하는 모습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이 책에서 그 모두를 다루기는 어렵다. 이번 총서의 초점이 ‘전통시대의 생활상’을 복원하는 것에 맞추어져 있으므로, 『하재일기』에서도 근대적 변화 이전의 모습, 즉 조선시대 제도에서 만들어진 상인의 한 유형인 ‘공인’의 생활에 초점을 두고자 한다. 일기가 시작되는 1891년부터 분원의 ‘공소’ ‘공인’이라는 타이틀이 없어지기 이전인 1894년(고종 31)까지의 기간에 집중하고자 한다. 일기의 앞 시기를 중점적으로 다루되, 대신 공간적인 면에서 공인 지규식의 생활상을 분원마을과 서울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한다. 분원 공인 지규식은 분원마을에 거주하며 분원을 거점으로 인근 지역을 오가며 경제활동을 하면서도, 서울을 자주 오갔다. 특히 일기가 시작되는 1891년 한 해 동안에는 분원에 머물렀던 날보다 서울에 머물렀던 기간이 더 길었다. 공인으로서의 삶을 입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서는 그의 이동 동선을 따라가며 추적해 볼 필요가 있겠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시기별 변화 과정을 추적하기보다는 공간별 활동 양상을 추적해 보기로 한다. 한편, 공인으로서의 본업 활동을 공간별로 나누어 살펴본 후에는, 그의 개인적인 경제활동도 살펴보고자 한다.
  • 조선 최후의 공인, 지규식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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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
    지규식이나 분원은 전통적 방식의 사채에 의존했던 것으로 보인다. 채권자에게는 단순히 경제적인 빚만을 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선물을 보내거나 경조사를 챙기면서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공을 들였다. 대신 고리의 사채를 모두 제때 갚는 대신 가끔은 빚을 탕감받는 일도 있었다.
  • 조선의 양반, 가정을 경영하다 -18세기 대구 최흥원의 가사활동을 중심으로-
    • 기록자료
    • 경제
    방법을 시도한다. 전통시대에는 오늘날에 비해 죽음이 삶과 더욱 가까이 있었고, 전염병이 돌면 주변 사람들이 수시로 죽어가는 끔찍한 현장을 직접 눈으로 보는 일도 빈번했다. 조선시대 전염병이 돌면 국가에서 대응책을 마련하지만, 실제적 혜택이 고을의 백성들에게 골고루 미치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양반은 여러 가지 한계 속에서 가족공동체를 중심으로 질병에 대응하는 가운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절실하고 현실적인 방법들을 시도한다. 일상을 기록한 일기에는 전염병을 비롯한 질병이 비교적 자세하게 잘 기록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최흥원은 전염병이 발생했을 경우 어떻게 대응했을까? 우선 대구와 옻골을 중심으로 발병한 전염병의 발병 연도와 종류를 보면 【표 3】과 같다. 【표 3】 『역중일기』에 보이는 전염병의 발병 연도와 종류 1737년부터 1786년까지 50여 년 동안 대구 지역에서 전염병이 발병한 기간은 거의 14여 년에 해당한다. 최흥원이 1765년 이후에는 일기를 간헐적으로 기록하기도 했기 때문에 빠진 것도 있을 것이다. 당시 유행한 전염병으로는 천연두, 홍역, 이질 등이 대표적이다. 천연두는 거의 12여 년에 걸쳐 있다. 전염병 가운데 천연두가 전염 기간이 가장 길었다.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전염병을 검토한 논문에서는 1651년-1700년 312회, 1701년-1750년 250회, 1751년-1800년 83회 전염병 기록이 나오고, 17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중반까지 대략 200년 동안 전염병 발생 빈도는 250회로 밝혀졌다. 거의 매년 전염병이 발생한 셈이다. 지금은 천연두가 정복되었지만, 전통시대에는 동서양할 것 없이 천연두는 전염성이 강하고, 주기적으로 반복되며, 치명률도 높았다. 홍역이나 이질에 비해 훨씬 공포스러웠으며, ‘큰 마마’, ‘큰 손님’ 등으로도 불렸다. 천연두의 대표적인 증상은 온몸에 발진이 나고, 고열을 동반한다. 천연두에 걸려 생존한 사람 가운데 60% 이상은 얼굴 피부가 울퉁불퉁해진다. 전염병이 급습하면 두려움에 떨고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우왕좌왕하기 마련이다. 숙모님의 이질이 아주 가볍지를 않아서 사람과 말을 의원 집에 보냈으나 정 생(鄭生)이 밀양 관아로 가서 머물고 있으므로 끝내 헛걸음하고 돌아왔으니,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모르겠다. 경험방으로 구급약이 없지 않으나 함부로 써보기에는 너무 두렵다. ―1737년 6월 20일 서숙을 부중으로 보내어 강 의원이나 배 의원을 찾아보도록 했으나 천연두가 치성한 가운데 왕래하는 것이 너무 걱정스럽다. 서숙이 돌아오기도 전에 갑자기 숙모님이 변고를 당했으니, 해가 넘어가려는 때였다. 위험한 조짐이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종지와 지묘의 여러 할아버지와 아재들한테 급히 알렸다. 서숙에게 초혼하도록 했다. 밤중에 여러 곳에 부음을 전했다. ―1737년 6월 21일 1737년 숙모가 이질에 걸렸는데, 최흥원은 의원을 급히 구하기가 쉽지 않았고, 구급약이 있기는 하지만 함부로 써 보기에는 두려워 처방하지 못했다. 숙모는 최흥원이 손써 볼 겨를도 없이 운명을 달리했다. 전염병은 두려움과 공포 그 자체였다. 주상께서 백성을 걱정하시어 벽온단(辟瘟丹)을 나누어 하사하시고, 또한 낭관과 감사를 파견하여 여귀(癘鬼)에게 제사를 올리도록 하셨다. 성은이 이에 이르렀으니, 신민들은 마땅히 감격하여 은혜 갚을 일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세금을 화급하게 독촉하여 전리(田里)에서 소요가 일고 있으니, 역시 성상의 뜻을 우러러 본받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한탄스러울 뿐이다. ―1746년 5월 22일 아침 식전에 갑자기 석전 딸의 편지를 받아 보니 이질에 걸려 괴로움이 가중되었다고 했다. 지촌 할아버지를 부중에 들여보내어 약을 지어오도록 했다. ―1758년 6월 9일 전국적 규모의 전염병이 발생하면 국가에서는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세금을 감면해주고, 금지하던 도축을 허락하여 몸을 보양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으며, 전염병 귀신 추방을 위한 제사를 지내거나 전염병 예방에 좋은 벽온단(辟瘟丹)을 하사하기도 했다. 지방에 마련된 의료제도는 가장 실질적인 대책이다. 대구에는 감영이 있어, 최흥원은 수시로 의국을 이용했다.
  • 19세기 조선의 종부를 만나다 -유씨 부인의 가계경영과 재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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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기에 손색없는 전통 마을의 경관을 갖추고 있었다. 이 마을의 주된 농경지대는 마을 가운데에 흐르는 하천과 그 주변 지역이며, 산자락 부근에는 밭농사가 발달되어 있다. 수한리와 운곡리, 그리고 그 일대는 이른바 ‘갈미 김씨’들이 집단 거주하는 지역이다. 특히 갈산과 결성, 홍주, 예산, 공주, 부여 등은 이 집안의 친족들이 거주했던 지역적 공간이다. 이 중 갈산 지역은 예로부터 서울에 근거를 둔 양반 관료층의 본향으로 많이 언급되는 지역이다. 갈산은 낮은 구릉들과 와룡천 주변으로 평야가 발달하였고, 서울에서 도보로 6일이면 왕복할 수 있는 거리였다. 해안을 통해 수운 또한 발달하여 쌀을 실은 선박과 어선들이 줄지어 서울로 향하는 길목이기도 했다. 이에 이 지역을 포함한 내포 지역은 경화사족들의 세거지로서 주목받았다. 왕실이나 벌열 가문들의 장토가 많이 설치되었고, 이른바 내포문화라는 지역문화를 발달시켰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후 철도 부설과 산업화에서 밀려나 지금은 한적한 시골로 남아 있다. 유씨 부인의 시댁, 즉 ‘갈미 김씨’들은 향촌이나 지역의 유지로서 권력을 획득하거나 지역민에 대한 관심보다는 중앙 정치권력의 움직임에 매우 민감했다. 김호근을 비롯한 이들은 출사와 과거 준비를 위해 서울과 인근 지역에 집을 소유하였을 뿐 아니라, 수시로 서울을 왕래하였다. 유씨 부인 또한 서울과의 서신 교환을 통해 친족 남성들의 유배 소식 혹은 관직 진출에 관련된 소식을 시시각각 접하고 있었다. 이처럼 이들은 충청도의 세족대가(世族大家)로서 반경반향(半京半鄕)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부인의 세계와 네트워크는 수한리와 갈산이라는 지역을 넘어서 서울과 전국으로 확대되어 있었고, 특히 서울의 생활문화에 친밀감을 보인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림 3】 1915년 갈산면 수한리 일대 지형도 【그림 4】 조선총독부, 갈산면 수한리, 1915 【그림 5】 수한리 전경
  • 조선 최후의 공인, 지규식의 일기
    • 기록자료
    • 경제
    서는 근대화 이전 전통사회를 살았던 어느 상인의 생활상을 추적하는 데 초점을 두었으므로 그 최후의 모습을 엿보았던 것으로 만족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 조선의 양반, 가정을 경영하다 -18세기 대구 최흥원의 가사활동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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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
    세상을 떠났다. 전통시대 여성은 출산과 더불어 사망하는 비율이 높았다. 최흥원은 집을 경영하는 데 안살림을 책임져 줄 아내가 일찍 사망했지만, 재혼하지 않아 애로사항이 많았다. 아내가 사망한 다음 해인 1741년 1월 1일 새해에 가장 먼저 떠오른 심상은 아내 없이 홀아비가 된 자신의 처지였다. 그는 새해를 맞이하니 홀아비의 심정이 즐겁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3월 13일은 둘째 아들의 생일이었는데, 낳은 어미가 있지 않으니 참으로 슬프다고 했다. 아내가 죽은 이후 최흥원의 외롭고 쓸쓸한 심정이 일기 곳곳에 묻어났다. 보리가 덜 익어서 조도(調度)[경비]가 아주 구차하고 가난하다. 이럴 때는 더욱 홀아비의 괴로움이 심해지는 것을 깨닫는다. ―1751년 5월 22일 정신이 어두워 아내의 제사를 잊고 재물을 미리 마련하지 못했다. 기운과 넋이 쇠약하고 빠졌으니 오래 살 수 없을 듯하다. 집안 살림을 물려줄 대상도 없고 일을 대신할 사람도 없으니 어찌하고 어찌하겠는가? ―1771년 4월 3일 최흥원은 규모 있는 살림을 하지 못하는 홀아비의 처지를 괴로워했다. 그는 평생 혼자 외로움을 견디며 가정을 이끌었는데, 믿고 의지하던 첫째 아들마저 최흥원이 59세(1763) 되던 해에 사망했다. 나이가 들어서는 더욱 기력이 떨어졌는데도 여전히 살림살이를 책임지는 가운데 아내의 기일을 잊어버리기도 했다. 최흥원 일상의 중심에는 늘 어머니가 있었다. 아내의 부재는 어머니를 모시는 데 여러 가지로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1741년에 전염병이 유행하여 집을 떠나 임시처소에서 머물다가 철수할 때 집에 어머니를 봉양할 주부가 없어서 우선은 둘째 아우 집에 어머니를 머물게 했다. 1743년의 어머니 생일에도 아내가 없어 잔칫상을 잘 차리지 못했고, 생선과 고기 장만은 둘째 아우에게 맡겼다. 홀아비로서 곤궁하여 자식의 직분을 다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거듭 한탄했다. 아내가 죽은 지 두 해가 지나자 슬슬 중매 이야기가 나왔다. 류춘삼 군이 최흥원을 위해 최후숭 집에 중매하려고 했다. 그의 정의는 두터우나 이는 자신을 모르고 한 일이라고 하면서 최흥원은 거절 의사를 밝혔다. 그는 어머니를 모시는 데 안주인이 없어 불편했지만, 아내의 빈자리를 채우지 않았고 불편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1748년부터 주변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최흥원에게 첩을 들이라고 했다. 어머니의 병치레를 아내 없이 돌보는 형의 처지를 보다 못한 둘째 아우가 안동의 류대남 집에서 첩을 구하여 최흥원에게 권유했으나, 최흥원은 이를 거절했다. 아들의 마음이 꿈쩍하지 않자 이번에는 어머니가 나섰다. 어머니는 여성의 자질이 그럴듯함을 듣고는, 최흥원에게 적극적으로 맞아들이라고 했고, 셋째 아우도 어머니의 말씀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는 뜻으로 형한테 간곡하게 권유했다. 효자였던 최흥원은 어머니의 뜻을 거스를 수도 없어 고민했지만, 첩을 둔다면 본인의 처지가 더욱 험악해질 것 같았다. 최흥원 집에서는 첩을 들이는 일로 반년 이상 이야기가 오갔다. 최흥원은 어머니의 말이 은근하고, 아우들도 힘써 권했으며, 친구들도 최흥원의 고집을 탓하자,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옳은지 마음이 조금은 흔들렸지만, 결국 첩을 들이지 않았다. 어머니의 환후는 다행히 심해지지 않았다. 어머니를 집으로 모셨으나 아침저녁 진지상의 반찬이 둘째 아우 집에 계실 때만 못하니 매우 애가 타고 마음이 절박하다. 죽고 싶도록 가련한 나의 사정을 누가 알겠는가. 막내아우가 다음 달 초이틀부터 그의 아내를 별거시키려고 하니, 이제부터 어머니 주방을 돌볼 사람이 없다. 모두가 내가 박덕하고 불효하기 때문이니, 옛사람에게 부끄럽고 스스로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연꽃과 국화를 모종하여 치자 화분과 함께 늘어놓고, 이 세 가지 식물로 벗 삼아 때때로 근심과 어지러운 일을 잊어 볼까 한다. ―1747년 5월 30일 최흥원은 아내가 없어 어머니를 제대로 모시지 못하는 자신의 어지러운 마음을 때로는 공부로, 때로는 벗들과 어울리면서, 때로는 좋은 경치를 보면서 달랬다. 화단에 정성을 쏟은 것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오늘날 단독주택에서 부부가 방을 따로 사용하는 경우는 있지만, 정원을 별도로 가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조선시대 양반가의 남성과 여성은 거주 공간을 달리했기 때문에, 각각의 정원을 가졌다. 물론 안채의 정원을 살뜰하게 가꾼 경우는 보기 힘들고, 대체로 사랑채 정원을 잘 가꾼 기록이 남아 있다. 남성의 문집과 일기에서 꽃과 자연에 대한 서정성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시인이자 유학을 공부하는 양반의 인문학적 감성이 공간에 표출되었기 때문이다. 최흥원의 화단은 계절마다 즐길 꽃들을 염두에 두고 조성되었다. 집 동쪽에는 고목이 된 매화나무가 있는데, 할아버지가 심은 것이다. 해마다 가장자리에 잔떨기 꽃이 피어 사랑스럽고 또한 추억에 잠기게 했다. 이른 봄 눈보라가 겨울철과 다름이 없으나 뜰 앞의 매화가 꽃망울을 틔우려고 하여 왕성하게 생동하는 기운을 느끼기도 했다. 【그림 5】 백불암고택 1744년 3월 4일에는 뜰에 작은 화단을 만들도록 했는데, 국화를 심을 요량이었다. 다음 날 봄비가 그쳐 나비가 꽃을 찾아들고 사방의 산이 초록빛을 띠어 최흥원의 혼란스러운 마음도 자연스럽게 풀렸다. 3월 21일에는 국화 40포기를 마루 앞에 심어서 가을철 눈요깃거리로 삼고자 했으나 생기가 크게 줄어들어서 아쉬웠다. 최흥원은 감나무 접붙이기도 했는데, 세 그루가 모두 살아서 정감을 느꼈다. 두 그루는 담장 안에 있고, 한 그루는 동쪽 계곡 위 종 아당의 집 뒤에 있었다.
  • 조선의 양반, 가정을 경영하다 -18세기 대구 최흥원의 가사활동을 중심으로-
    • 기록자료
    • 경제
    한 때문에 가문의 전통이 날로 쇠퇴하여 지금 상중(喪中)에 있으면서 많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음을 겪고 있으니, 차라리 내가 죽어서 몰랐으면 좋겠다. 통곡한들 어찌하겠는가. ―1766년 7월 6일 일기에는 학자로서 수양의 길을 원하는 내면적 욕망과 가장으로서의 현실적 책임 사이의 고민이 잘 드러난다. 최흥원은 내면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을 겪었지만, 한 번도 일탈하지 않고 끊임없는 집안일에 마지막까지 성실했다. 최흥원은 영남 지역의 동향이라던가 지방관의 교체 소식은 일기에 기록했다. 그렇지만 향촌 활동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대구 향교의 교임으로 추천되었지만, 대구부와 향교에 거듭 거절 의사를 밝혔다. 1747년 11월 19일에는 대구 수령이 지역 양반들의 추천으로 최흥원을 경학 훈장에 임명했지만, 최흥원은 바로 사임 단자를 써서 수령에게 전했다. 최흥원은 외출도 자제했다. 이러한 인식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 있다. 1739년 2월 초 손군묵이 처가에 가는 길에 최흥원에게 들렀다가 4월 6일에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최흥원을 방문했다. 최흥원은 농담으로, “그대는 어버이를 모시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어찌 그렇게 오래도록 집을 떠나 있는가? 효성이 처자식으로 인하여 쇠해진다는 것이 이를 이르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니, 손 군이 부끄러운 기색을 띠었다고 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농사를 관리 감독하는 것도 최흥원의 중요한 일과였다. 하상(河上)[하회] 누이의 논을 팔아 25냥을 보냈다고 한다. 두애가 보러 왔기에 논을 파는 일을 지시했다. 종들에게 명령하여 오늘부터 전답을 갈도록 했다. ―1749년 2월 6일 목화에 굼벵이가 생겨 뿌리를 먹고, 큰놈은 올라와 줄기까지 먹어 치우고 있으니, 수확이 크게 줄어들 것이 틀림없다. ―1743년 5월 28일 흐리고 비가 내렸다. 어머니의 병환은 여전하고 입부[세째 아우]의 병도 한결같다. 애가 타고 마음이 절박하다. 양식이 오랫동안 떨어져서 뭇 식솔들이 굶주림을 호소한다. 며느리를 생각하니 더욱 불쌍하다. 그러나 가난한 집의 소원은 오직 아이들이 공부를 잘 하기를 바라는 것뿐이다. ―1748년 3월 29일 최흥원은 지식인이자 학자로서의 삶보다는 식솔들의 끼니를 걱정하고 농사를 관리하며 자제들의 출세를 위해 노력하는 일상이 우선이었다. 그에 따른 번뇌가 삶을 관통했지만, 내면의 욕망보다는 현실적 책임에 더욱 충실했다. 50여 년 동안 종손과 가장으로 날마다 자신이 수행한 역할과 집을 둘러싸고 전개된 다양한 이야기를 일기에 꼼꼼하게 기록했다. 일기는 자신의 역할과 활동에 대한 성실한 보고라고 할 수 있다. 일기를 통해 최흥원의 집안 경영과 가사활동의 내용과 실상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 활 쏘는 사람들과 나무 심는 마을
    • 기록자료
    • 사회
    한 노력은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17세기부터 경주의 많은 숲을 위해 선비들이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오리수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1623년(인조 1), 경주의 역리, 즉 교통로를 지키는 하급 관료들이 말 관리를 위한 땅을 확보하기 위해 오리수를 훼손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경주 여론을 주도하고 있던 대표적 선비 정극후(1577-1658)는 경주를 대표하여 조정에 바로 상소를 올렸다. 아! 우리 고을의 형세는 다만 하나의 외로운 섬입니다. 그래서 이른바 북천의 물이 터져 남쪽으로 물이 흐르면 사당을 가로질러 나누고는 남천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서쪽 방면이 터지면 왕의 사당을 충돌해 지나가서 서천에서 합류하게 됩니다. 이로써 읍내에 거주하는 주민부터 부윤까지 모두가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큰물이 갑자기 나면은 머물 곳이 없어 갑작스런 순간에 사람들은 물고기가 됩니다. ―정극후, 『쌍봉선생문집(雙峯先生文集)』 권2, 「대경주사민청금보문평개거소(代慶州士民請禁普門坪開渠疏)」 역리들이 숲의 나무를 베고 밭을 만들고 북천의 둑을 뚫어 물길을 내자 그 즉시 정극후를 비롯한 경주의 뜻있는 선비들과 관리들은 들고일어난 것이다. 그들은 이들이 훼손한 오리수가 강의 범람을 막고 있고, 강둑이 훼손되면 홍수에 어쩔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고 호소했다. 이들은 북천이 범람하면 물이 시내를 완전히 덮쳐서 공자와 왕의 사당마저 위협한다고 설명했다. 사당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가장 소중한데 홍수를 방비하지 못하면 그럴 수 없고 마음에 큰 충격이라고 강조했다. 사실 한 해 전에 이미 수해가 경주를 덮쳤기에 그 두려움은 점점 커졌다. 경주의 또 다른 뜻있는 선비 김종일(1597-1675)은 이 사건에 대해 수해로 경주 읍내와 들판이 물에 잠겨 주민들이 물기나 자라와 다름이 없었다고 되새겼다. 그리고 그는 경주 주위에 나무를 심고 그곳에 대한 개간을 엄히 금지하고 있는 이유가 수재를 방지하고 풍수를 가꾸는 데 있다고 보았다. 정극후는 숲과 강둑이 무너지면 강으로 둘러싸인 경주 읍내가 물에 완전히 잠긴다고 묘사했다. 역리들이 숲을 다투면서 경주의 관리와 더불어 주민들이 매일매일 불안해하는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숲을 다툰 결과 강둑이 무너져 강물이 시내로 흘러들면 경주 시민들은 물고기가 되어 목숨을 위협받는 일이 눈앞에 선하다고 극적으로 적었다. 사람들은 경주 주위에 점점이 가꾸고 있는 숲은 강변과 연결되면서 수해를 방지하고 풍수를 만드는 기능이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숲이 주는 말림갓으로의 기능이 컸기에 땔감과 목재의 확보 그리고 개간을 통한 경작의 이익을 위해 서로 숲을 다투고 있었다. 이런 모습은 비단 경주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 조선시대 사람들의 더불어 살기, 향약
    • 기록자료
    • 사회
    안정복은 향약의 전통이 『주례』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았지만 그것의 기원은 『주례』에 언급된 향대부 및 향삼물(鄕三物)·향팔형(鄕八刑) 등과 같은 제도일 것이다. 그 전통은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 실시한 삼로·이정·보장·방장 등의 교화 정책과 향약 제정으로 이어졌다. 그중 향약이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여러 선현에 의해 실시되었다. 안정복은 성리학자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여러 교화 정책과 향약을 계승하여 이리동약이 제정되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리동약의 제 규정도 향약의 기본 형태를 따르고 있다. 구성원의 명부인 기명적(記名籍), 선행과 과실을 각각 기록하는 기선적(記善籍)과 기과적(記過籍)이 있는데, 이는 주자증손여씨향약에서 말한 세 개의 장부이다. 이리동약의 동회(洞會) 의식은 향약의 강신례를 참조하였다. 이리동약의 ‘여씨향약부조(呂氏鄕約附條)’는 주자증손여씨향약의 4대 강목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세부 조항은 시의(時宜)를 참작하여 변용해 놓았다. 최흥원의 부인동동약과 안정복의 이리동약은 조선 후기에 제정된 동약 중에서도 운영 규정이 상세하고 체계적인 편이다. 특히 두 동약은 하층민을 포괄하는 상하합계에 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두 동약에는 동리 안에서 신분 질서를 명확히 하고 하층민을 통제하기 위한 조항이 제정되어 있다. 그런데 하층민을 포괄하는 상하합계 형태의 동약·동계는 18세기 후반 이후에는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다. 조선 후기 사대부 중심의 신분 질서에도 변화가 일어났고, 그것이 동약·동계 조직에도 영향을 끼쳤다. 특히 사대부 계층의 권위 약화와 하층민의 의식 성장은 상하합계가 구축해 놓은 향촌 질서를 위협하였다. 하층민은 사대부 계층이 주도하는 동약·동계에서 이탈하였으며, 대신 자신들의 거주지를 중심으로 별도의 촌락 공동체를 결성해 나갔다. 신분 질서의 변화 속에 상하합계 형식의 동약·동계가 해체되었다고 해서, 향약이 가지는 권위가 동약·동계에서 사라지거나 약화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대부 문화를 지향하는 새로운 계층의 성장 속에 향약의 권위가 더욱 광범위하게 활용되었다. 무릇 동에 명부가 있는 것은 향(鄕)에 서(序)가 있고, 주(州)에 학(學)이 있는 것과 같다. 대개 옛날에는 풍속이 간박하고 인정이 순후하여, 고기 잡고 나무하고 밭 갈고 책 읽음을 각자 수업해 왔으니, 이는 곧 만세의 큰 아름다움이었는데, 근세에 이르러 풍속이 퇴패해지고 인정의 소박해짐이 여러 대에 이어져 동안에 이름이 실리는 것이 드물게 되었다. … 대개 이 동리가 동이 된 것이 어느 때에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바다가 동쪽에 임해 있어 해가 처음 뜨고 물과 육지가 뒤섞인 집들이 즐비하니, 한 동리의 사람들은 같은 들판에서 쟁기질 하며 농사일에 힘쓰고 같은 바다에서 배타며 생애를 보내며, 질병이 있으면 함께 도우고 수화(水火)에는 서로 구제하니, 비록 행원(杏垣)의 이웃이 아니지만, 오히려 남전(藍田)의 옛 규약을 지키니, 이것은 습속의 돈후함과 이웃 간 서로 구휼함이 정말로 지금 세상에 하나 있는 오래전 백성들의 동리가 아니겠는가? ―「동안(洞案)」, 김경두(金景斗) 서문 中 위의 서문은 강원도 평해(지금의 경상북도 울진) 구암동(狗巖洞)의 동계 조직이 1909년 작성한 「동안」의 서문이다. 서문에서는 구암동 동계가 향약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동안의 전통이 고대 중국의 향서(鄕序)와 주학(州學)에 버금간다고 하였다. 유학의 교육·교화 기관과 향약에서 동계의 연원을 찾고 있다. 이러한 평가는 16세기 이후 여러 명현들이 작성한 동약·동계의 서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서문에 언급되어 있듯이 동해안 가에 위치한 구암동은 반농반어(半農半漁)의 촌락에 해당한다. 구암동에는 밀양박씨(密陽朴氏) 가문의 족세가 강하나, 주민들의 생업과 촌락에서 거행되는 의례의 형태를 보았을 때 전통적인 반촌과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구암동의 동계는 일반적인 반촌의 동족의식과 별개로 촌락민의 생업과 관련 깊은 공동체 조직이다. 실제 구암동 동계의 주요 사업도 상호부조, 복리 증진, 부세 대응이 주축을 이루고 있으며, 어촌 촌락의 특징을 살려 미역 채취나 멸치 조업을 조정하는 역할을 했다. 【그림 19】 1909년 구암동 「동안」 구암동 동계가 시작된 시점은 1840년 무렵이다. 1840년 구암동 동계에서 제정한 완의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생각하건대 우리 상(上)·하촌(下村)이 합동(合洞)했을 때 각항(各項) 상납(上納)이 복잡할뿐더러, 시비가 가끔 일어남이 끊이지 않는 까닭에 상·하 촌민이 별반으로 공의(公議)하여 박곡(朴谷)은 박곡의 동역(洞役)을 하고, 구암은 구암의 동역을 한다면, 장래에는 끝내 예전처럼 안도할 것이니, 이에 영구히 준행할 일. ―「구암분동동안(狗巖分洞洞案)」, 〈완의〉 中 이 완의는 1840년 구암동이 이웃한 박곡동과 ‘분동(分洞)’할 때 작성한 것이다. ‘분동’은 동약·동계의 단위인 ‘동’이 분리됨을 뜻한다. 동약·동계는 보통 하나의 촌락으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주도 세력의 영향력이 미치는 복수의 촌락을 포괄하기도 한다. 그럴 경우 사대부 계층이 세거하는 반촌이 주로 동약·동계를 주도적으로 운영하였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은 촌락은 조직 운영에서 통제를 받거나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았던 촌락의 여건이 좋아지고, 촌락민의 의식도 성장한다면, 이들은 동약·동계를 주도하던 세력에게 동등한 권리를 요구할 것이다. 만약, 그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 경우, 기존의 동계·동약에서 이탈하여 별개의 공동체 조직을 운영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분동’의 형태로 나타난다. 앞서 살펴본 부인동동약이 19세 중반 중단된 것도 바로 ‘분동’ 때문이었다. 1840년 구암동의 분동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원래 박곡동과 구암동은 하나의 동으로 묶였는데, 부세 문제로 분쟁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그래서 의논을 모아 분동을 하기로 합의를 보았고, 구암동은 박곡동과 완전 별개의 동계를 운영하게 된다. 그런데 완의에 따르면 박곡동이 상촌, 구암동이 하촌으로 인식되고 있다. 아마 하나의 동으로 묶여졌을 때, 구암동보다 박곡동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구암동이 분동을 요구한 것도 촌락민의 사회·경제적 성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구암동은 1840년에 분동하여, 비교적 늦은 시기에 동계를 운영하였다. 이러한 점을 감안할 때 구암동 동계는 조선시대 결성된 유서 깊은 반촌의 동약·동계와 같은 선상에서 이해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1909년 서문에 언급되어 있듯이, 구암동의 촌락민은 자신들의 동계가 향약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았다. 더 이상 향약은 양반 사대부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조선 후기 이후 신분 상승이 욕구와 더불어 사대부 문화를 지향하는 계층이 증가하게 된다. 그러면서 기본의 사대부 계층이 향유하던 문화와 규범이 사회 저변으로 확대되어 갔다. 향약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전통적인 신분 관념이 해체되어 가는 근대 전환기에 이르면, 일반 촌락민도 자신들의 결사 조직에 향약 정신과 규정을 접목시키는 경우가 늘어나게 된다. 현재 우리가 향약을 양반 사대부만의 규범이 아니라, 향촌사회의 보편적인 실천 규범으로 인식하는 것도 이렇게 조선시대 동안 사회 저변에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다.
  • 조선시대 사람들의 더불어 살기, 향약
    • 기록자료
    • 사회
    결성된 온계동계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예안 온계 앞을 흐르는 토계(兎溪) 주위를 개척하며, 진성이씨 일족은 족세를 번창시켜 나갔다. 계상이란 반촌도 이때 형성되었다. 계상에 정착한 진성이씨 일족이 별도의 동계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계상동계이다. 계상동계도 온계동계처럼 상하합계의 형태로 운영되었다. 운영 규정은 모두 20개 조 구성되어 있는데, 앞의 12개 조는 퇴계 이황이 제정한 퇴계향약의 벌목을 옮겨 온 것이다. 나머지 8개 조는 온계동계의 규정을 약간 변용하였다. 하나. 약중(約中)에 화재가 있으면 상하가 서로 모여 구원하고 또한 위문한다. 각기 빈 가마니[空石]와 이엉[蓋草], 장목(長木)을 내어 힘써 도와준다. 도적을 당하면 서로 구원하고 질병이 있으면 서로 문안한다. 전염병[癘疫] 때문에 농사일을 못 하면 상하가 각기 농군(農軍)을 내어 밭 갈거나 씨를 뿌리거나, 김을 매거나 수확해 준다. 홀아비·과부·고아 또는 늙어서 자식 없는 사람[鰥寡孤獨]이 몹쓸 병에 걸렸는데, 돌봐 줄 사람이 없는 저는 모두 가엾게 여기고 도와주어, 잃어버리는 바가 없게 한다. 하나. 약중에 초상이 생기면 상하가 모두 모여 함께 조문한다. 호상유사(護喪有司) 1원과 하유사(下有司) 2인을 정하여 돌보게 하며, 장례 때 또한 그렇게 한다. 양반은 각기 힘센 종[壯奴] 1명을 내고 상인(常人)이면 역부(役夫) 1명을 내어 상여를 메거나 묘소를 만드는데 하루 동안 가서 일을 도와준다. 하나. 흉사는 상하 모두 각기 백미 두 되, 탁주 여섯 사발, 통 한 기(器), 일꾼 한 명을 내는데, 만약 다른 일이 있는 자는 하루 나와 일하고, 뒤에 곡식 두 말을 거두어들인다. —「온계동규(溫溪洞規) 부(附) 계상동계(溪上洞契)」 中 위의 조항은 계상동계의 운영 규정 중 상호부조와 관련된 것이다. 기본적으로 재난이 일어났을 때, 상장례 때, 각종 흉사를 당했을 때 물력과 노동력을 내어 주고, 슬픔을 나누기로 규정하고 있다. 특히 이 조항은 20개 조에 이르는 계상동계 규정 중에서도 가장 상세한 편이다. 계상동계가 구성원 간의 결속력 강화와 공동체 유지에 있음을 잘 보여 준다. 이러한 상호부조 항목 중 사대부 입장에서 가장 절실한 것이 노동력 차출이었다. 하층민의 노동력이 필요한 것은 상장례 때뿐만이 아니었다. 하층민의 노동력은 동내에서 거행되는 각종 의례와 행사, 공공사업을 수행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였다. 사대부 계층은 동계 조직을 통해 ‘동’ 안의 하층민과 각종 하계 조직을 통제하고 노동력을 징발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형태의 동계·동약은 상하합계 형태로 운영되었으며, 명문 벌족이 세거하는 반촌에서 쉽게 확인된다. 1719년(숙종 45) 경상도 삼가의 옥계정계에서는 동안을 새롭게 정비하면서, 개정된 규정을 완의로 남겼다. 해당 완의는 모두 10개 조 구성되어 있는데, 아래의 조항은 하층민에 대한 통제 규정이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이 완의는 동의 풍속을 부식(扶植)하고 기강을 일으키기 위한 것이다. 우리 동의 풍속은 평소 순후하였으나, 근년 이래 예(禮)가 무너지고 풍속이 경박해져 사람마다 그 마음에 연소자는 어른을 알지 못하고, 천인(賤人)은 귀인(貴人)을 알지 못하며, 논의할 때에 이르러서는 망령되이 스스로 존대하고, 혹 지위가 낮은데 소리를 높이고, 혹 연소한데 잘못된 의논을 일으켜 장로를 장로로서 대하지 아니하고, 집강을 집강으로써 대하지 아니하니 … 지금 이후부터 만약 외람된 자가 동의 여론을 빗나가게 하고, 언사가 거만하고 무례한 것은 동내에서 있을 수 없으니 동안에서 삭거(削去)할 것이다. 하나. 상한(常漢)[상놈]의 선악은 일일이 장부에 적어서 상벌을 행하고 그중에 완악한 자는 일제히 관에 정문(呈文)을 올려 엄하게 다스리며, 불통수화(不通水火)할 것. 하나. 동내 상한과 향도(香徒) 등이 조묘(造墓)와 성빈(成殯)의 역을 동유사가 미리 분부한 후에도 거역하고 행하지 않거나, 유사의 분부가 아닌데도 사사로이 일을 할 경우가 있으니, 이 습속이 매우 통탄스러우므로 지금 이후로 규찰관(糾察官)과 동유사가 함께 이름을 장부에 적은 뒤 강신과 회집하는 때에 좌중에 두루 보인 다음 일일이 벌을 내릴 것. 하나. 동내의 수행원이 만약 혼상(昏喪)을 당하면 상중하를 막론하고 유사가 동중에 발문(發文)·통고(通告)하여 각기 두루 돌아보고, 아무 까닭 없이 불참하는 원은 삭적하고 제마수(齊馬首)를 하게 할 것. —「동안 기해년수정(洞案 己亥年修正)」, 〈완의(完議)〉 中 1719년 옥계정계에서는 새롭게 동계 규정을 완의하였다. 그 서문에서는 완의의 목적이 상하 간의 질서를 뚜렷이 하는 데 있다고 명시해 놓았다. 이는 동계 안에서 하층민이 사대부의 통제를 잘 따르지 않고 있음을 의미한다. 옥계동에서 하층민은 상한과 향도라고 불렀다. 여기서 향도는 상장례 때의 상여꾼으로 보이며, 상하합계에서 하계를 구성하였다. 【그림 20】 상여행렬, 국가문화유산포털 상한과 향도는 옥계정계 내에서 노동력으로 동원되었다. 무덤을 조성하는 조묘와 빈소를 차리는 성빈 때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한데, 사대부에서 임명되는 동유사가 이들의 노동력을 차출하고 통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만약 동계의 지시를 듣지 않거나 상장례 때 참여하지 않으면, ‘불통수화’와 ‘제마수’ 같은 처벌을 받았다. 여기서 ‘불통수화’는 동리 안에서 일체 교류하지 않는 것이며, ‘제마수’는 용서받는 대신에 술과 음식을 다른 구성원에 대접하는 것이다. 한편, 동리 안에는 다양한 목적의 결사 조직이 존재하였다. 하층민들도 상호부조와 생업 및 공동노동을 목적으로 하는 조직을 별도로 운영하고 있었다. 이에 사대부들은 자신들이 주도하는 동계·동약 조직으로 이들을 통제하고, 하층민의 조직을 노동력으로 동원하고자 했다. 1601년(선조 34) 경상도 예천 고평동(高坪洞)에서 시행한 동계는 이러한 하층민 조직을 체계적으로 관리하였다. 원래 고평동계(高坪洞契)는 임진왜란 이전에서 존재하였으나, 전란으로 중단되어 1601년 새롭게 중수하였다. 당시 중수를 주도한 인사는 선조 연간 정승을 지낸 정탁(鄭琢, 1526-1605)이었다. 정탁은 향약을 중수 때 작성한 서문에서 “남전여씨향약 전질(全帙)을 빌려다가 참고하면서 현실에 맞는 몇 가지를 간추리니 겨우 여씨향약에서 열에 한둘에 불과하나 힘써 따르기에 편리한 것과 세속의 사례를 몇 가지를 끼워 넣어 한 편으로 만들었다”라고 하였다. 고평동계 역시 주자증손여씨향약을 따르되 시의를 참작하여 변용한 것이다. 상계(上契) -도유사(都有司): 1원 -부유사(副有司): 좌우 2원 하계(下契) -유사: 3인 -고직(庫直): 2인 -영수(領首): 정원에 한정이 없음 그 밖에 혹 영장(領長)을 두어 그 영(領)을 규찰하는 소임을 맡긴다. ―「고평동계약문(高坪洞契約文)」, 〈계중입식(契中立式)〉 中 하계의 서인(庶人)이 이것[약조]를 어기는 등의 죄를 저질렀을 때 가벼우면 당대(當隊)의 영수가 스스로 규찰하거나, 아니면 벌주(罰酒)를 준다. 무거우면 하계유사에게 알리고, 하계유사는 수본(手本)[보고 서류]을 상계유사에게 바치며, 상계유사는 범한 바에 따라 여러 존위(尊位)에게 고하여 벌을 주되, 만약 큰 잘못을 저질렀으면 사유를 일일이 들어 단자를 써서 관아에 알리어 법의 심판을 받게 함과 동시에 동계에서 영원히 축출한다. 만약 스스로 뉘우쳐 벌을 받고 향례대로 복속하기를 원하거나 조약에 따라 벌을 받기 원하면 들어준다. 무릇 사노(私奴)가 약조를 어겨 저대로 그 죄가 있는데도 그 주인이 간혹 정리로 비호하는 자가 있으면 각별히 벌을 준다. 그래도 경계할 줄 모르고 도리어 구실을 붙여 약조를 경시하는 자는 영원히 동계에서 축출하고 공동 우물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한다. ―「고평동계약문」, 〈금제조(禁制條)〉 中 고평동계 관련 규정과 문적을 엮어 놓은 「고평동계약문(高坪洞契約文)」에 따르면 상계와 하계에 각각 임원을 둔 것으로 나타난다. 운영 규정인 ‘금제조(禁制條)’에서는 하계에서 죄를 범하는 일이 발생할 경우 하계유사가 전말을 갖추어 상계유사에게 보고하는 상하 구조를 명백하게 규정하였다. 특히 주목할 점은 하계에 대한 규찰을 ‘당대의 영수’가 맡는다고 규정한 대목이다. 여기서 ‘당대’와 ‘영수’는 농경사회에서 유래한 두레 용어로 보인다. 두레에서는 일정한 인원으로 각 대(隊)를 만들고 그 대의 장을 영수라고 하였다. 당연히 두레 조직은 하층민으로 구성되었다. 고평동계의 특징은 하층민을 개별적으로 통제한 것이 아니라, 두레 조직을 하위 구조에 두고 상하 관계를 명백하게 규정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고평동의 사대부들은 상호부조나 동리 단위의 공공사업 때, 두레 조직이 관리하는 개별 하층민의 노동력을 활용하였을 것이다. 상호부조와 더불어 부세 대응도 동계·동약의 중요한 공동체 사업이다. 조선 후기 하위 해정 구역이 정비됨에 따라, 각종 부세와 잡역세(雜役稅) 등이 면리 단위로 부과되었다. 그 중 동리 단위로 부과되는 부세는 동약·동계 조직이 공동납의 형태로 대응하였다. 그 방법으로는 특정 동리에 일정 분량의 부세가 부과되면, 동약·동계 조직이 동리 안에 거주하는 촌락민의 사정을 감안하여 재분배한 세액을 거두어들이는 형태와 ‘존본취식(存本取殖)’을 통해 동리에서 부세를 미리 대비하는 형태가 있다. 부세 중 잡역세의 경우 관아 운영이나 수령 부임 때 투입되는 비용, 기타 부족한 세액을 메꾸기 위한 명목으로 부과하였다. 잡역세는 비정기적으로 부과되는 경우가 많았기에 일반적인 부세와 달리 미리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해당 비용은 주로 동약·동계에서 ‘존본취식’ 즉,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늘리는 방식으로 마련하였다. 대구 부인동동약의 ‘선공고(先公庫)’는 공동납의 모범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선공고는 “공적인 일을 먼저하고 사사로운 일을 뒤에 한다”라는 ‘선공후사(先公後私)’라는 용어에서 취한 것으로 최흥원이 주도하여 1753년에 조성하였다. 약중에서 부유한 자들과 약속하여, 공세(公稅)를 먼저 내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방도를 도모하였다. 이에 동의 밭 1단을 팔아 수천 전을 받고 또 강회(講會)에 쓰고 남는 것을 별도로 저축하여, 해마다 늘였다가 이자를 떼어서 토지를 매입한 것이 수십 년에 이르니, 사들인 논이 백여 두락에 가깝고 저축한 곡식도 수백 곡(斛)에 이른다. 그 밭을 공전(公田)이라 하고 창고를 공고(公庫)라고 해서, 이것으로써 약중 백성의 세역(稅役)에 충당하기로 하였다. ―『부인동지(夫仁洞誌)』, 「공전비문(公田碑文)」 中 위의 「공전비문(公田碑文)」은 1765년에 선공거의 조성 경위를 밝히기 위해 찬술되었다. 비문에서는 동리 백성에게 공동납이 형태로 부과되는 공세, 즉 부세를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선공고를 조성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림 21】 『부인동지』,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선공고의 재정은 하루아침에 조성된 것이 아니었다. 우선 동의 밭을 팔아 기본 자금을 마련하고, 이를 여러 해 동안 이자를 놓아 다시 공전을 매입하는 방식으로 조성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관리하기 위한 규정으로 「선공고절목(先公庫節目)」을 제정하였다. 그 절목에 따르면 선공고는 상안(上案), 즉 사대부로 구성된 상계에서 뽑은 상유사 1인과 하안(下案), 즉 하계에서 뽑은 하유사 1인에 의해 관리되었다. 동리의 사대부와 하층민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선공고는 공동납의 모범 사례로서 조정에도 알려졌다. 당시 경상도관찰사는 최흥원의 부인동동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으며, 정조는 신료들에게 최흥원을 등용하라고 지시하였다. 전 주부(主簿) 최흥원은 행실만 훌륭할 뿐만 아니라, 재물을 내어 빈궁한 사람을 구제하였으며, 집안에 ‘선공후사’의 창고가 있어서 이웃 사람들이 일정한 부역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으며, 또 향약으로 권장하고 가르칩니다. ―『정조실록』, 7년 2월 19일 기사 中 이리동약을 시행했던 안정복도 공동납을 적극 활용하고자 했다. 다만 그의 공동납 구상은 수령 때 계획되었다. 안정복은 평소 왕도정치 실현을 위해, 그 대리인으로 지방에 파견되는 수령의 올바를 자세에 대하여 고심하였다. 그 결과 수령의 정무 지침서라 할 수 있는 『임관정요(臨官政要)』를 저술하게 된다. 1776년(정조 즉위) 안정복은 목천현감(木川縣監)으로 부임하였다. 안정복은 자신이 구상했던 수령 통치를 목천현에서 시험하고자 했다. 그는 수령 통치에서 교화와 명분을 우선순위로 삼았으며, 그 후에야 세세한 절목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안정복은 수령을 보조할 교화 체계로 동약을 주목하였다. 이와 관련해 『임관정요』에서는 “모든 정교(政敎)는 동약이 시행된 뒤에야 쉽게 거행할 수 있다. 부임한 뒤에 동리에 동약이 있는지 없는지를 묻되 동약이 있으면, 그 동헌(洞憲)을 거둬들여서 미비한 약조는 정리한다”라고 하였다. 고을의 교화는 올바른 동약의 실시 여부에서 시작된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부임 직후 목천현 전체에 다음과 같은 유시문을 내리게 된다. 듣건대 이곳에는 모두 동계가 있다고 하는데, 무릇 한 동네 안에서 선을 표창하고 악을 미워하는 일이 있다면 그 동네의 정사가 닦여져서 교화가 밝아지고 명분이 바르게 되는 것이 이로부터 가능해질 것이다. 이는 실로 옛사람이 행한 향약의 뜻이며, 향리의 비(比)·여(閭)·족(族)·당(黨)의 운영도 이를 통해서 행해지는 것이다. 각 마을의 군자들은 동헌을 잘 다듬어서 실시하되, 이 두 가지를 반드시 실천해야 할 급무(急務)로 삼기 바란다. ―『순암집(順菴集)』, 「목주정사(木州政事)」 中 안정복은 목천현에서 동리 단위로 결성된 자치 조직의 현황을 파악했을 것이고, 동약은 아니더라도, 관내 곳곳에 동계가 조직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동리별로 광범위하게 동약·동계 조직이 운영되고 있었던 것이다. 안정복은 지금 목천에서 동약이 없더라도, 동계 조직이 있으면 동규를 제정하여 향약의 형태로 운영하면 된가도 판단하였다. 나아가 안정복은 동약을 단위로 방역소(防役所)를 운영하고자 했다. 방역소는 방역고(防役庫)라고도 불리는 민고(民庫)이다. 민고는 고을별로 공동납의 형태로 부과되는 각종 잡역세를 대비하기 위해 만든 재정 기구였다. 이를 위해 안정복은 방역전(防役錢)을 조성하였으며, 이를 운영하기 위한 규정으로 8개 조의 절목과 23개 조의 추후(追後) 절목을 제정했는데,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은 방역전의 관리 및 운영 계통이다. 「방역소절목(防役所節目)」 하나. 2백 냥을 마련한 뒤 8개 면의 각 동에 나누어 준다. 동이 모두 40개이므로 매 동당 5냥씩 나누어 관리케 하고 이름을 방역전이라 한다. … 각 동의 상존위(上尊位) 및 여러 소임들이 맡아서 내어 주고 받아들인다. 하나. 지금 이 방역소를 관가에 설치하고, 유향소와 아전 무리로 하여금 맡아서 관리하게 하고자 하나, 만일 관가에 설치한다면 그 수가 방대하여 거두고 내는 때에 반드시 한 가지 폐단이 생길 것이다. … 그러니 대소 백성들은 이런 뜻을 부디 깊이 체득하여 오래도록 시행할 수 있게 해 주기 바란다. 하나. 이 돈이 이미 동의 물건이 되고 나면 동의 상계 및 소임들이 이를 침탈해서 쓰는 경우가 필시 많을 것이니, 이럴 경우 완의를 통해 논벌해서 손을 대지 못하도록 한다. 「방역추후절목(防役追後節目)」 하나. 각 리의 백성으로서 동을 이루지 못하여 통괄하는 곳이 없는 자들은, 부근의 동에 분속시켜서 규례에 따라 거두고 낸다. 하나. 이 돈은 사채(私債)와는 다르다. 그러므로 사고가 있다고 핑계대어 받기 어려운 자가 있으면, 관에 알려서 면임으로 하여금 징수해 주게 한다. 하나. 매년 가을 모임을 마친 후에 각 동에서는 나누어주고 받아들인 문서 한 통을 면유사(面有司)에게 바쳐서 증빙 자료로 삼는다. 하나. 대동의 역[대동세]을 당하여 관가에서 옛 규례에 따라 전령(傳令)하여 도유사에게 알려주기만 하면, 도유사가 각 면의 존위(尊位)에게 통고한다. 그리하여 각 면별로 거두어 면유사의 집에 모으게 하고, 각 동의 신실한 하소임(下所任)을 시켜서 문서를 갖추어 관에 바치도록 한다. 하나. … 상계(上契)와 당시의 소임(所任)은 절대로 이 돈을 써서는 안 되며, 이것을 범한 자는 면존위(面尊位)가 적발하여 벌을 준다. ―『순암집』, 「목주정사」 中 위의 두 절목은 안정복이 동약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잘 보여주는데, 여기서 확인되는 특징을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그림 22】 안정복의 「목주정사」 첫째, 방역전은 ‘방역소-면-동’으로 분배되는데, 최종적인 분배는 ‘동’ 단위로 이루어졌다. 여기서 ‘동’은 안정복이 조직을 권장했던 동계·동약의 시행 범위이다. 최하위 행정구역 단위로는 ‘리’가 있지만, 자치 조직이 결성되어 있는 ‘동’을 운영 단위로 설정하였다. 만약 여기서 제외된 ‘리’가 있다면, 인근 ‘동’에 분속시켜 운영하도록 했다. 둘째, ‘동’에서 방역전은 동계·동약 조직이 운영하였는데, 그 운영 책임은 사대부로 구성된 상계가 맡았다. 안정복은 사대부가 실질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동’을 향촌 교화 정책의 단위로 설정하였으며, 나아가 이 조직을 각종 부세에 대응하는 자치 조직으로 운영하고자 했다. 향촌의 실질적인 담당자에게 부세를 담당하게 함으로써, 중간 계층의 농간이 개입하는 것을 방지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셋째, 유향소[향청]과 질청은 방역전 운영에서 제외하였다. 대신 교화를 담당하는 동약 조직에게 방역전 운영을 전담시킴으로써, 관부의 개입을 차단하고 있다. 부세를 거두어들이고 납부하는 데 있어서, 명목 없는 잡세가 발생하는 폐단을 무수히 목격하였기에 향청과 질청의 개입을 배제한 것이다. 넷째, 관부는 단지 방역전 운영을 감독하고 행정적 지원을 해 줄 뿐인데, 이는 면리 조직이 담당하였다. 각종 면임과 이임은 동계·동약의 상계에서 함부로 방역전을 소용하지 않도록 감독하며, 방역전을 미납하는 자가 있으면 공권력을 동원해 대신 징수하는 정도이다. 최흥원의 선공고와 안정복의 방역전은 모두 부세 대응을 목적으로 조성되었으며, 동약 조직에서 운영하였다. 동약이 부세 대응에 앞장선 것은 촌락 공동체의 안정을 위해서이다. 당시 수령과 아전들은 부세를 부과하는 과정에서 가렴주구를 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과중한 부세로 인해 하층민들이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다면, 촌락 공동체 유지도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뜻있는 사대부들은 동약을 통해 각종 부세를 적극적으로 대응해 나갔던 것이다.
  • 입양, 조선시대 양반의 아들 교환
    • 기록자료
    • 사회
    가족주의의 뿌리로 전통적 가족 관념을 제시한다. 이것이 우리가 조선시대 입양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다. 가장 기본적인 사회조직인 가족이 인위적으로 재편되는 모습을 통해 유교의 핵심 원리인 효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하였는지, 그리고 조선시대 가족과 친족 개념이 얼마나 고도로 발달하였는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들을 주고받기 위해 고려해야 했던 다양한 요소들을 살펴봄으로써 당시 양반들이 중요하게 여겼던 가치도 확인할 수 있다. 나아가 다른 나라와의 비교를 통해 우리 가족문화에 더 객관적으로 접근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조선시대 입양이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조선시대 의미로서의 입양 그 자체가 오늘날에는 사라졌기 때문이다. 전통적 의미의 가계 계승 개념도 많이 사라졌다. 보건복지부의 ‘연도별 입양 아동 현황’에 따르면, 1950년 한국전쟁 이후부터 2019년까지 입양인 수는 국내 80,864명(32.5%), 국외 167,864명(67.5%) 등 총 248,728명에 달한다. 즉 현재 진행되는 대부분의 입양은 해외로의 입양이라는 것이다. 또 한국 정부는 2001년 이후 국내외로 입양되는 아이들의 수를 조사하고 있다. 이 데이터에서는 2001-2020년의 국내 입양아 가운데 남아는 평균 34.8%에 불과하며 그마저도 장기적으로 조금씩 감소하는 추세를 보인다. 이는 조선 후기에는 거의 모든 입양이 남성들을 대상으로 하였다는 사실과는 크게 대비된다. 오늘날 봉사자로서의 남성 입양이 필요성이 사라진 것이다. 친딸들을 제쳐 두고 조카에게 기업을 상속시키는 대기업 회장의 결정이 뉴스거리가 된 것도 이런 행위가 더 흔하지 않은 일이 되어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림 21】 국내외로 입양된 아동 가운데 남아의 비율 개인의 감정이나 친소 관계는 무시한 채 항렬, 혈연적 거리, 사회적 위상, 능력 등의 기준에 따라 가족을 인위적으로 재구성하는 전통시대 입양은 오늘날 한국사회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소들을 여럿 가지고 있다. 하지만 타인을 가족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고 그 관계를 하늘이 내린 것처럼 소중히 여기던 조선시대 입양의 정신과 관습에 대해서는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가족 자체가 새롭게 정의되어야 하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시사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피가 섞이지 않은 남을 가족으로 삼는 데서 느끼는 양부모와 양자의 불안감을 종교적 가족 윤리로 보완해 주던 유교의 역할 역시 낮은 국내 입양률과 출산율에 대한 고민거리를 던져 준다.
  • 조선 선비들의 로망, 관동유람
    • 기록자료
    • 문화
    제일이라 하는데_전통 조선 선비들의 취미는 다양했다. 유흥으로 소일하는 파락호(破落戶)도 있었지만, 대체로 책과 그림을 수집하여 독서와 감상을 하거나, 시를 짓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다도(茶道)를 즐기거나, 매화를 가꾸는 원예(園藝) 등의 고상한 취미를 즐겼다. 이 중 야외에 나가 즐기는 대표적인 여가 활동이 아회(雅會)와 유람이었다. 【그림 1】 이인문, 〈누각아집도〉, 조선후기, 국립중앙박물관 아회는 선비들이 경치 좋은 곳에 모여, 이를 구경하고 문학 작품으로 남기고자 하는 문화였다. 당시 선비들은 중국 명(明)나라 문풍(文風)의 영향을 받아 “마음에 산수를 간직하고 있다면 도시에 있어도 그곳에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성시산림(城市山林)을 구현하고, 산수를 유람하며, 이를 글이나 그림 등의 작품으로 남기는 취미가 있었다. 아회는 산수에 살거나 이를 유람하고자 하는 선비들의 염원이 일상 문화로 자리하면서 나타난, 모임문화의 한 형태였다. 시간적 여유가 있거나 금전적 여력이 된다면, 아회보다는 더 호방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유람에 나섰다. 그럼 유람은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를 말하는 것인가? 유람은 ‘돌아다니며 구경한다’는 사전적 의미가 있다. 조선시대의 유람은 오늘날 여행의 의미와 같을 것이다. 일상의 번다함에서 벗어나 마음속 번민을 털고자 산천의 경치를 두루 보고 즐기며, 선진 문물을 배우는 것이다. 유람은 심신을 수양하는 여가문화였다. 유람 문화가 명확히 어느 시기에, 어느 장소를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발달해 왔는지는 알 수 없다.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여력이 생기면, 잠시라도 자신이 거주하는 공간이나 일상에서 벗어나 심신을 쉬이고자 하는 기대를 품는다. 어디론가 길을 나서 새로운 경물을 보고 즐기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즉 유람 문화는 자연을 유람의 대상으로 삼아 그 속에서 흥취를 즐기고자 하는 내면적 의식의 발현을 통해 발달해 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고대부터 자연을 신성시해 왔다. 자연은 인간 생명의 근원이며 삶의 토대라는 점에서도 항상 관심의 대상이었다. 특히 우리나라 자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산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각별했다. 더러는 천신(天神)이 강림하는 곳인 신산(神山)으로 여겼고, 이러한 명산들은 국가 주도로 산천제(山川祭)를 지내기도 했다. 국가에서는 산을 영역화하고 상징성을 부여했다. 불가(佛家)에서는 사찰의 입지로 여겨 신성시하였고, 풍수적으로는 길지(吉地)를 선택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민간에서는 삶의 터전이자 신앙의 대상이었다. 특히 조선 선비에게 산수는 각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었다. 선비들은 산수를 도덕 수양의 장소이자 삶의 이치를 터득하는 곳으로 인식하였다. 개개인이 산수를 탐방하며 즐기고자 했고, 그곳에 내재된 의미를 섭렵하고자 하였다. 즉, 산수를 단지 자연물로만 보지 않고, 탐구하고 활용하고자 하였다. 산수를 영역화하고 의미화하는 주체는 국가나 특정 종교에서 벗어나 개인으로 확대되어 갔다. 산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고조되고, 이는 자연을 유람하는 문화가 본격적으로 유행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선비들은 문예 취향을 즐기는 데 가장 적합한 장소로 산수를 선호하였다. 많은 선비가 산수를 소재로 글을 썼다. 산수를 문예 작품의 소재로 삼기 위해 직접 산수를 유람했다. 선비들은 산수미(山水美) 발견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산수를 대상으로 삼아 유람에서 본 경치나 느낀 감흥을 집중적으로 묘사한 시문[詠物詩]을 창작하는 등 적극적으로 산수에 대한 문예적 표현을 시도했다. 이처럼 유람을 통한 문예 양상을 통칭 ‘기유문예(紀遊文藝)’라 하는데, 이는 산수 유람의 유행에서 기인한 문예 창작 현상이다. 다른 시기도 그러했겠지만, 특히 조선시대에는 당면한 정치적 현실로 인해 강호(江湖)로 물러나 산수를 애호(愛好)하며, 그 속에 은둔하여 속박됨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삶을 즐기는 선비가 많았다. 관직에 나아간 선비 중에는 사화(士禍)‧당쟁(黨爭)을 겪은 후 벼슬에서 물러나 강호로 돌아가거나, 아예 처음부터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은거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들은 현실을 개탄하고, 술을 마시며 거리낌 없이 노는 음주방일(飮酒放逸)을 소일로 삼거나 평생토록 독서하며 저술하는 것을 낙으로 삼기도 했다. 그리고 자연을 벗하며 세속에서 벗어나 일생토록 바라던 유람을 적극적으로 행하기도 한다. 관직에 나아가 자칫 사화와 당쟁에 휩쓸려 일신과 가문을 위기로 몰고 가기보다는 자연에 귀의하여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면서 안전한 삶의 방식을 추구하고자 했다. 산수를 유람하며 안분(安分)을 추구하고자 했던 것은 현직 관료들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의 선비 대다수는 학문의 이치를 궁구하고, 이를 바탕으로 관료로 나아가는 것을 삶의 본분이자 이상으로 여겼다. 관료가 된다는 것은 자신이 궁구한 학문적 이상을 천하를 다스리는 데 적용하는 경세가(經世家)의 길을 걷는 것이었다. 그러나 학문적 이상과 정치라는 현실은 항시 상치되는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는 나라에 도(道)가 있을 때는 관료로 나아가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는 ‘겸선천하(兼善天下)’를 이행하고, 도가 없을 때는 은거하여 자신을 수양하는 ‘독선기신(獨善其身)’을 하는 것이 신하의 도리라 하였다. 조선의 관료로 생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평시에는 묘시(卯時, 오전 5-7시) 출근, 유시(酉時, 오후 5-7시) 퇴근이었다. 해가 짧은 동절기에는 진시(辰時, 오전 7-9시)에 출근하여 신시(申時, 오후 3-5시)에 퇴근했다. 하루 동안 길게는 12시간, 짧게는 8시간 일 했다. 이러한 출퇴근 규정을 ‘묘유법(卯酉法)’이라고 했는데, 묘유법을 어기고 무단으로 지각‧조퇴한 관료는 태형(笞刑) 50대에 처하였다. 관료들은 공무 외에도 글쓰기에 골몰했고, 술도 자주 마셔야 했다. 무려 45년 동안 관료로 지냈던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지나친 공무로 인해 말년에 당뇨와 고질적인 두통에 시달렸다. 격무(激務)와 과음, 글쓰기 등에 스트레스로 인하여 병을 얻기도 했다. 조선후기의 관인 무명자(無名子) 윤기(尹愭, 1741-1826)는 57세 때인 1797년, 12일 동안 의금부에 수감되었다가 직첩 2등급을 박탈당하고 풀려났다. 충청남도 남포현감(藍浦縣監) 재직 중 국왕 정조가 서원난립 금지령을 반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고을 유생들이 주자영당(朱子影堂)과 백이정(白頤正)의 사당을 건립했기 때문이었다. 이 일로 현감이었던 윤기는 파직되어, 의금부에 하옥되었다. 풀려난 직후 하는 일 없이 유유자적 지내며 녹봉이 없어 부양할 가족을 걱정하면서도 현감 재직 중 상관을 맞이하던 일, 백성들을 매질하던 일, 세금을 독촉하던 일, 장부를 정리하던 일 등을 회상하면서 오히려 무거운 짐을 벗고 속세를 벗어난 것 이상의 홀가분함을 느끼고 있다. 윤기의 예를 든 것이 단편적이긴 하나 대체로 관인들의 생활은 이처럼 팍팍한 공무와 스트레스의 연속이었다. 관료 생활은 바쁜 일상의 연속이었다. 자신이 추구했던 학문적 이상과 관인이라는 현실에 대한 괴리감에 더하여 번다한 일에 시달릴 때면 공무에서 벗어나 탈속의 자유를 느끼고자 하는 열망을 품었다. 격무에 대한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장 많이 택한 공간은 산수였고, 그곳을 유람하며 스트레스를 해소했다. 그러나 재직 중에 여러 날이 소요되는 원거리 유람을 떠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가까운 산수를 찾아 잠시나마 유람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림 2】 강세황, 《송도기행첩》 중 나귀를 타고 유람하는 부분, 1757년,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에는 국내의 산수를 유람하는 것에도 큰 비용과 시간이 소요되었다. 교통이 발달한 현재처럼 1-2일의 여정이 아니라, 길게는 몇 달이 소요되는 여정이었으므로 서민들은 쉽게 결행하지 못하였다. 예를 들자면 유람에서 가장 필요한 준비물은 나귀였다. 말은 빠르다는 장점이 있으나, 가격이 비싼 데다가 먹이도 많이 먹고 지구력도 부족했다. 그에 비해 나귀는 먹는 양도 적고 지구력도 강해, 여유를 즐기기 위한 유람에 적격이었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1765년 지인(知人)인 즉지헌(則止軒) 유언호(兪彦鎬, 1730-1796) 등과 함께 금강산을 유람하고자 했으나 나귀 살 돈이 없어 주저했다. 박지원의 사정을 안 김이중(金履中, 1736-1895)이 나귀 살 돈 100냥을 보태 주어 박지원은 유람을 떠나게 된다. 이는 단편적인 예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대체로 유람에 많은 비용과 시간이 소요되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 주는 사례이다. 조선의 선비들이 주로 유람하는 곳은 금강산‧지리산‧청량산 등과 같은 명산이었는데, 산세가 매우 험준하여 산중 유람의 경우 때로는 일부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다. 조선시대의 산수 유람은 장기간 이동하며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경제적 능력과 시간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만의 상류층 문화였다. 고령으로 거동이 불편한 사람은 재력이 있어도 이동이 매우 힘들어 집안 노비 등의 많은 수행원을 동반하여야만 가능했다. 그러므로 산수를 유람하는 다수의 주체는 선비들이었고, 유람은 선비들이 누릴 수 있는 대표적인 여가문화였다. 당시 선비들 사이에서는 금강산‧지리산 등 일생에 한 번 이상 명산 유람을 다녀오지 않으면 문화 흐름의 대세에 무지몽매한 사람으로 취급받을 정도였다. 관료들부터 무명의 선비에 이르기까지 유람을 갈망했고, 유람을 통해 보고 즐기고자 했던 산수를 늘 그리워하며 생각에서 지우지 못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고질병 환자처럼 산수에 대한 강한 애착심으로 인해 산수벽(山水癖)을 관념처럼 지니고 살았다. 잠시라도 기회가 생기면 산수를 유람하고, 그 여흥을 잊지 못해 다시 유람하고픈 갈망에 시달릴 정도였다. 산수에 취해 평생 유람을 다니는 사람도 있었는데, 이런 사람들은 유람을 다녀온 뒤에도 감흥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였다.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은 부귀에 빠져 한 번도 산수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들이 많음을 탄식했다. 그는 부귀를 떠나 선비들이 생애에 한 번쯤 꼭 해 봐야 하는 것이 유람이라 강변했다. 유람 문화는 조선 선비들을 중심으로 확산되었고, 조선에서 열풍을 일으킨 문화 현상으로 주목된다. 조선 선비들에게 산수는 삶의 지향으로 표현하는 ‘강호’였고, 유람은 그들이 가장 선호하는 풍류이자 여가였다. 경제‧시간적 여유가 없거나, 노쇠하여 거동이 불편한 이들은 마당에 산수의 축소판인 가산(假山)을 조성하거나, 산수 유람을 기록한 산수유기(山水遊記)와 그림을 통해 와유(臥遊, 누워서 유람)를 즐겼다. 뿐만 아니라 가상의 유람을 떠나는 놀이 또한 즐겼다. 경승지를 여행하며 시문을 작성하는 보드게임의 일종인 「승람도(勝覽圖)」 놀이가 유행하였다. 「승람도」는 명승지를 유람하는 도표라는 뜻이다. 이 놀이는 유람객이 일정한 지점에서 출발하여 도표 위에 그려진 명승지를 구경한 다음, 다시 출발한 장소로 빨리 되돌아오기를 겨루는 놀이이다. 이것이 일상 문화가 될 정도로 선비들의 유람 욕구는 대단했다. 선비들 사이에서 가장 장쾌하고 호탕한 일을 꼽으라면, 유람이 단연 제일이었다. 【그림 3】 《승람도》, 조선후기, 국립민속박물관
  • 조선 선비들의 로망, 관동유람
    • 기록자료
    • 문화
    수유기로 표현하는 전통이 정립되었다. 그리고 유람하며 보고 겪은 것을 화폭에 담았는데, 이것을 ‘기행사경(紀行寫景圖)’이라 칭한다. 산수유기 창작과 기행사경도 제작은 조선 선비들 유람 문화의 한 단면이었다. 조선의 주요 유람 계층은 선비들이었으므로 산수유기의 작자도 대부분 선비들이다. 중인계층과 부녀자들이 남겨 놓은 산수유기도 있지만, 선비들의 것에 비해 극히 드물다. 선비들은 유람의 내용을 기록으로 남겨 와유의 도구로 삼기도 했지만, 후대 누군가의 유람 지침서가 되길 희망하였다. 앞사람이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으면 새로이 기록하고, 앞사람의 것이 미진하면 보충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사진 29】 김개국(金蓋國, 1548-1603), 「관동록」, 한국국학진흥원 선비들이 산수유기를 작성하게 되는 직접적인 이유는 이들의 산수유기 기록에서 살필 수 있다. 유람객 대부분은 자신의 유람 기록 말미에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이황이 1549년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소백산을 유람하고 지은 「유소백산록(遊小白山錄)」에, 유람을 기록으로 남기는 이유를 비교적 소상히 밝히고 있다. 유람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후대 유람객에게 큰 도움이 되고, 다른 사람이 기록을 남겼다 하더라도 각자의 느낀 바가 다르므로 그 감흥을 다시 기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황은 소백산 유람에 나서기 전, 먼저 주세붕의 소백산 유람 기록을 구해 읽고 감흥을 얻었고, 소백산 유람에 참고하였다. 그러면서 주세붕 이후 여러 선비가 소백산을 유람했지만,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것을 비판했다. 빼어난 산의 명성을 알리고 참다운 감상을 위해서는 반드시 유람 기록을 남겨야 함을 피력했다. 후대에 이황 자신의 글을 보는 사람의 감흥이, 자신이 주세붕의 유람 기록을 읽고 느낀 감흥과 같기를 바라고 있다. 유람한 선비들은 이황과 같이 자신의 유람 기록을 후대 사람이 읽을 것을 염두에 두었다. 양대박은 1572년 금강산을 유람하고 「금강산기행록」을 남겼다. 이를 기록한 것은 금강산이 한양에서 멀리 떨어져 사람들이 자주 가지 못하므로, 뜻이 있으면서도 유람하지 못한 자를 깨우쳐 주기 위해서였다. 자신의 금강산 유람 여정과 감상을 기록으로 남겨 후대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는 뜻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후에 자신의 유람 기록을 읽을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쓴 것이다. 당시 선대의 유람 기록은 유람에 대한 사전정보 습득에 매우 유용한 지침서 구실을 하였다. 그러므로 선비들은 유람에 나서기 전, 선대의 기록을 통해 유람 정보를 습득하고, 자신 또한 유람을 기록으로 남겨 후대 사람이 길잡이로 삼을 수 있도록 했다. 특히 유람 장소로 가장 흥행을 이끌었던 금강산과 관동팔경에 대해서는 자주 애독되던 선대의 유람 기록들이 있었다. 고려시대 이곡의 기록과 조선시대 이원(李黿, ?-1504)‧성제원(成悌元, 1506-1559)‧홍인우‧양대박의 기록 등이 베스트셀러였다. 양대박은 금강산 유람 전 이곡의 「동유기」를 사전에 읽어 참고했고, 관동을 유람한 윤휴는 이원의 「유금강록(遊金剛錄)」을 읽고 유람에 나선다. 유가적 소양을 가진 선비들의 유람은 학문수양의 목적으로 행해진 경우가 많았으므로, 유람 후 자신의 학문을 성찰하고 반성하는 자료로 삼기 위해 유람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공자가 태산에 대해, 주자가 남악에 대해 학문의 깊이를 발휘한 이유를 유람을 통해 깨달았다는 것이다. 공자와 주자에 비하면 유람에서 깨달은 바는 미미하지만, 유람의 전말을 기록하여 보관하고, 깨달은 바를 힘쓰고자 했다. 또 벗들과의 유람에서 수많은 시를 짓기도 하는데, 시에 대해 더불어 토론하고 연구하지 못한 반성으로 유람 기록을 남기고, 스스로 책망하고자 하는 자료로 삼기도 한다. 지금껏 살핀 많은 이유들 외에 조선 선비들이 유람 기록을 남긴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을 곁에 두어 와유의 자료로 삼기 위함이었다. 훗날 자신이 다시 보며 와유로 즐길 것에 대비하고, 다른 사람들의 와유를 위해 남겨 두고자 했다. 당시는 교통편이 좋지 않아 유람이 쉽지 않았다. 원거리 유람의 경우 한 번 하고 나면 언제 다시 할 수 있을지 기약이 없었다. 그러므로 염원했던 유람을 이루면 그 기억을 잊지 않고 간직하기 위해 기록으로 남겨 두고자 했다. 와유를 위해 기록해 두었다가 시간이 없거나 노년에 거동이 불편할 때 다시 꺼내 보며 유람 때의 감흥을 오래도록 느껴 보고자 한 것이다. 이산해가 평해에 유배되었을 때 선암사(仙巖寺)를 유람한 적이 있는데, 훗날 늙고 병들어 세속에 묻혀 살다 보면 다시 와서 유람하기 쉽지 않을 듯하고, 오랜 시간이 지나면 기억에 잊힐까 염려하여 이때의 유람을 기록으로 남겼다. 성제원은 1531년 금강산을 유람하면서 평생 품었던 장대한 뜻을 온전히 이루지 못한 것에 아쉬워하며, 유람의 내용을 기록으로 남겨 훗날 감흥을 일으키는 자료로 삼았다. 신익성도 자신이 관동을 유람한 자취가 없어질까 하여 유람을 기록으로 남겨 훗날 와유의 자료로 삼는다. 선비들은 자신이 직접 유람을 가지 못하면 유람을 떠나는 이에게 산수의 풍광과 여정을 기록해 줄 것을 부탁한다. 윤증은 손자가 장차 유람하려고 하자 편지를 보내, 와유의 자료로 삼을 수 있도록 날마다 유람 내용을 기록해 놓았다가 가져다줄 것을 주문했다. 이덕무도 박제가가 장차 관동유람을 떠나려 하자 경치와 유적을 잘 기록하여 자신으로 하여 와유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다른 이의 유람 기록을 통해 산수에서 노니는 흥취를 대리 만족하고자 했다. 여러 사정으로 유람하지 못할 때는 자신이 남겨 놓은 기록이나 다른 이의 유람 기록을 읽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 것이다. 【사진 30】 『와유록』,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조선 선비들은 산수에 대한 애착이 강했으므로 산수 유람 기록은 문예 취향의 독서물로 애용되었다. 역시 와유를 즐기기 위함이었다. 한 자리에서 여러 산수를 한꺼번에 즐기기 위해 선대의 산수 유람 기록을 선별하여 『와유록(臥遊錄)』을 편찬하기도 하고, 자신의 유람 기록을 모아 책으로 만들어 보기도 하였다. 현전하지는 않지만, 조선의 산수를 대상으로 한 최초의 『와유록』은 1664년 김수증이 편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로도 선비들의 문집류에 『와유록』에 대한 기록이 간간이 나타난다. 김창협은 1671년 금강산을 유람할 때 『와유록』을 지참하였고, 1662년 금강산을 유람한 윤증도 『와유록』을 보았다. 박세당은 지인인 회은(晦隱) 남학명(南鶴鳴, 1654-1722)이 편찬한 『와유록』에 서문을 써 주면서 “이 『와유록』을 읽고, 노쇠하여 유람하지 못한 숙원을 풀었다”고 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극재(克齋) 신익황(申益愰, 1672-1722)은 『동국승경와유록(東國勝境臥遊錄)』을 엮었고, 잠옹(潛翁) 남하행(南夏行, 1697-1781)은 평소 산수 유람을 좋아했으나 산천을 두루 다닐 수 없어 선배들의 유람 기록을 모아 『와유록』을 만들어 읽었다고 하였다. 현전하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와유록』은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본 『와유록』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본 『와유록』, 동국대학교 소장본 『와유록』이 있다. 이 『와유록』 속에는 관동산수의 유람 기록이 가장 많다. 담허재(澹虛齋) 김지백(金之白, 1623-1671)은 수많은 사람이 자신보다 먼저 지리산을 유람하며 유람록을 지었고, 세상에 유행한 것이 참으로 많다고 했다. 지리산만을 대상으로 하더라도 17세기에는 많은 유람 기록이 출현하면서 사람들이 애독하였다. 1748년 지리산을 유람한 명암(冥菴) 이주대(李柱大, 1689-1755)도 산을 유람하고 기록을 남기는 것은 오래전부터 있어 온 일이라 하고, 이 같은 일은 훗날 와유의 도구로 삼거나 유람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남기려 한 것이라 하였다. 조선 선비들은 유람 내용을 기록하여 후대에 전하는 것을 관행시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현재 국내 산수를 대상으로 한 조선 선비들의 유람 기록은 방대하게 남아 있다. 필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약 1,400여 편에 달하는데, 유람 장소로 유명했던 주요 산들로만 놓고 보면 금강산이 140여 편으로, 수적이나 내용의 분량상으로 단연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한다. 선대의 유람 기록은 그 소재가 되는 유람 장소가 더욱 홍보되는 계기가 되었고, 유람의 관심 또한 촉진시켰다. 사숙재(私淑齋)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은 이곡의 「동유기」와 안축의 『관동와주』를 보고, 예나 지금의 시인묵객이 반드시 가서 유람하고자 하는 관동을 직접 유람하기를 열망하였다. 양대박도 금강산을 유람하기 전 이곡의 「동유기」를 보고, 금강산에 오르는 것을 평생의 소원으로 간직했다. 선비들은 유람의 여정을 글로 기록하는 것에 더하여 유람 중 현장에서 마주한 경치를 본인이 직접 그리거나 대동한 화가를 통해 그리게 하였다. 또는 화가들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직접 유람에 나서기도 한다. 이러한 그림을 기행사경도라 하는데, 그림의 소재가 유람 장소의 산수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와 대동소이하다. 실경산수화나 진경산수화는 그림의 소재를 접하는 장소에서 직접 그리기도 하고, 자신이 봤던 산수를 회상하며 그리기도 한다. 조선을 대표하는 화가인 정선을 필두로 유행하였던 진경산수화는 단순히 경치의 외형묘사에 그친 것이 아니라 회화적 재구성을 통하여 경관에서 풍기는 가흥과 정취까지 화폭에 표현하고자 한 특색이 있다. 이러한 정선의 화풍은 조선 화가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형상의 사실에 기초하면서 정신까지 표출하는 전신사조(傳神寫照)의 영향이 반영된 것이다. 이 화론(畫論)은 중국 인물화의 최고로 불리는 동진(東晋) 고개지(顧愷之)의 초상화 이론을 바탕으로 한 것인데, 조선 화가들은 초상화뿐만 아니라 모든 그림에 반영하고자 했다. 이러한 점에서 기행사경도는 현장감 있는 기록성이 더 강조된다는 일면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종래 중국의 그림을 베껴 그리는 관념 산수에서 벗어나 조선에 실재하는 산수를 소재로 한 진경산수의 전통이 정선에 의해 구체적으로 발전되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정선이 활동하던 시기 이전에도 국내의 실경을 대상으로 한 기행사경도류의 제작이 있었다. 고려의 화원 이녕(李寧)이 「예성강도(禮成江圖)」를 그린 것이나, 「송도팔경도(松都八景圖)」를 그린 것이 고려시대부터 국내의 실경을 소재로 한 그림이 그려졌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국내의 여러 실경 중 금강산을 대상으로 한 그림은 고려시대부터 그려시기 시작했다. 양촌(陽村) 권근(權近, 1352-1409)이 “내가 어릴 적, 일찍이 듣건대 천하에 구경하러 오기 원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나 보지 못함을 한탄하여 그림을 걸어 놓고 예찬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하니 금강산을 향하여 그리워함이 이와 같다”라고 한 것을 보면, 고려 말에도 금강산 그림이 그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금강산은 고려시대부터 국외에까지 그 명성이 알려졌고, 유람을 소망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금강산 유람의 염원을 그림으로 대신하고자 한 것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명나라 사신들이 오면 금강산 유람을 직접 가거나 혹은 가기를 원했고, 때로는 「금강산도」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1431년 명나라 사신 창성(昌盛)이 세종에게 금강산 그림을 요구하자 내려 주었고, 1455년에는 사신 정통(鄭通)이 금강산 그림을 요청하여 단종(端宗)이 화공을 시켜 그려 오게 하였다. 세조는 1468년 화원 배련(裵連)을 금강산에 보내 그 형상을 그려서 오도록 했고, 예종(睿宗)은 1469년 명나라 사신 최안(崔安)‧정동(鄭同)에게 「금강내산도」를 각기 한 폭씩 내려 주었다. 명나라 사신들이 요구한 「금강산도」가 비록 공리적 목적으로 그려졌다고는 하나, 당시의 화원들이 금강산을 직접 방문하여 그림을 그리고 있어 어느 정도 기행사경의 형식을 갖춘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조선의 선비들이 그림에 남긴 제화시(題畫詩)들이 상당수 남아 있다. 삼탄(三灘) 이승소(李承召, 1422-1484)는 「박연폭포도」,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 1485-1541)은 「신륵강산도(神勒江山圖)」, 이황은 「유경포대도(遊鏡浦臺圖)」에 제화시를 남겼다. 낙파(駱坡) 이경윤(李慶胤, 1545-?)은 금강산을 유람하고, 「제학림수유금강축(題鶴林守遊金剛軸)」을 남겼는데, 양송당(養松堂) 김제(金禔, 1524-1593)가 산형을 그리고 이산해와 노수신이 시를 지었다. 김제는 1537년 부친인 희락당(希樂堂) 김안로(金安老, 1481-1537)가 권력을 남용하다 죽음을 맞이하자 과거와 벼슬길이 막혀 독서와 서화로 일생을 보낸 인물인데, 그 시기 명성이 높던 화가이기도 했다. 김제가 그린 「유금강축」은 현전하지 않지만, 화원뿐만 아니라 문인화가에 의해서도 기행사경도가 그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557년 강원도관찰사 정암(正菴) 박민헌(朴民獻, 1516-1586)이 강릉을 유람하다가 기묘사화 때의 명현이었던 강호(江湖) 박공달(朴公達, 1470-1552)이 기거하던 쌍한정(雙閒亭)의 풍광을 화가를 시켜 그려 가기도 한다. 정선을 필두로 하여 진경산수화가 발달하는 조선후기 이전에도 국내의 실경을 대상으로 한 기행사경도류의 그림 제작은 꾸준히 있었으나, 기행사경도 제작이 급증하는 시기는 17세기 이후부터이다. 유람의 붐이 조성되면서 산수유기의 작성은 물론, 기행사경도 제작이 함께 급증하기 시작한다. 그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유람이다. 정선‧김홍도 등의 전문 화가들은 진경을 그리기 위한 목적으로 유람하기도 했지만, 그림 기술이 없는 선비들은 유람에 화공을 대동하여 그림을 그려왔다. 1603년 금강산을 유람한 이정귀는 표응현(表應賢)이라는 화공을 대동하여 자신이 유람한 금강산을 화폭에 담았다. 1603년 흡곡현령 시절 금강산을 유람했던 한호도, 유람을 기념하기 위해서 화공을 시켜 병풍을 제작하였다. 이 사실은 최립의 『간이집(簡易集)』에 실려 있는 「관동승상록발(關東勝賞錄跋)」에 기록되어 있다. 한호는 간성군수로 재직하고 있던 최립과 함께 금강산을 유람하였다. 여기서 최립은 몸소 체험하는 유람을 ‘쾌(快, 즐거움)’라 하고, 이를 그림으로 소장하여 간편하게 산수를 늘 가까이 두고 즐기는 것을 ‘요(要, 요긴하다)’라 설명했다. 최립은 한호가 ‘쾌’와 ‘요’를 겸비한 인사라고 칭찬한 것이다. 이는 선비들이 산수의 직접 체험인 유람과 간접 체험인 와유를 함께 중요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최립은 한호가 금강산을 직접 유람한 후 기행사경도로 남겨 소장하고, 훗날 와유의 자료로 삼음으로써 직간접적인 체험 모두를 즐길 줄 앎을 칭찬하고 있다. 이정귀‧한호와 같은 선비들은 화공을 대동하여 기행사경도를 그렸지만, 창강(滄江) 조속(趙涑, 1595-1668)과 같은 문인화가는 오대산‧금강산‧삼일포를 유람하며 자신이 직접 그림을 그렸다. 17세기에는 조선에서 유행한 소상팔경 시화(詩畵)로 인해 국내의 팔경도가 본격적으로 그려졌다. 이식은 화가 이신흠(李信欽)에게 현 양평군의 동계(東溪)팔경 병풍을 그려 달라고 청하였고, 백아곡(白鵶谷) 경치가 아름다워 8곳을 골라 팔경도를 만들어 감상하였다.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은 1674년 함경도의 「북관십경도(北關十景圖)」와 「함흥십경도(咸興十景圖)」에 서문을 남기고 있다. 팔경이 시문학에서 주로 다루어져 오다가 기행사경도식 팔경도가 제작되었고, 관동팔경이 그림의 소재로 가장 많이 애용되었다. 【그림 41】 작자미상, 〈관동팔경팔폭병풍〉, 국립민속박물관 기행사경도 제작이 점점 늘어나는 것은 산수를 감상하고 즐기는 방식에 그림 활용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그림은 선비들에게 애호되는 감상품이었고, 산수화는 와유를 가장 손쉽게 즐길 수 있어 산수유기와 함께 선비들이 선호하는 와유의 수단이었다. 조선 전기의 선비들이 주로 와유를 즐겼던 그림은 중국의 「소상팔경도」나 「서호도(西湖圖)」 등이었다. 선비들은 중국의 산수에 폭넓은 관심을 보였고, 중국을 가 보지 못하는 대신 그 경치를 베껴 그린 산수화를 보고 와유를 즐겼다. 그러나 중국의 산수화를 즐기는 것은 어디까지나 중국 산수의 관심과 동경이었고, 조선의 경치에 대한 흥취를 대신하지는 못했다. 그러므로 조선의 풍광을 와유하고자 할 때는 조선을 소재로 그린 그림으로 즐겼다. 이러한 현상은 종래 선비들이 관념 산수화를 와유의 도구로 사용하다가 기행사경도를 제작해 와유의 자료로 삼고자 하는 풍조를 만들어 냈다. 유람의 확산에 따른 와유 체험이 유행하고, 이에 대한 도구로 기행사경도의 제작도 활발히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글로만 유람 기록을 남기던 방식에 그림이 더해지면서 18세기부터 기행사경이 본격적으로 유행한다. 중국에서는 명나라 때 산수 유람의 유행과 동시에 기행사경도의 제작이 증가하고, 유람의 욕구를 대체하는 와유물이 부각되었다. 특히 명나라 때 소주(蘇州)에서 활동한 문인화가 집단인 오파(吳派)의 심주(沈周)와 문징명(文徵明)에 의한 소주의 기행사경도 제작은 중국 실경산수화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고, 문인 산수화의 새로운 영역으로 정착되었다. 기행사경도는 중국 명‧청대 화단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조선에서도 명나라의 그림 풍조에 관심을 보였고, 명나라의 이러한 화풍은 18세기 조선의 기행사경도 제작의 확산에도 영향을 주었다. 또 선비들의 기유문예 취미 현상도 기행사경도 제작 증가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정선의 관동지방 기행사경은 후대 화가들의 기행사경을 촉진시킨다. 정선은 1711‧1712‧1747년 3회에 걸쳐 금강산과 관동지역을 유람하며 사경하였다. 1711년 《신묘년풍악도첩》과 1747년의 『해악전신첩』이 현존하는데, 이 그림은 18세기 기행사경도의 대표적인 작품 유형으로 자리 잡았다. 정선의 지기인 이병연은 정선의 「달성원조도(達成遠眺圖)」 발문에 “시인의 사경(寫景)과 화가의 사경이 유사하다”라고 하여 시와 그림이 사물을 묘사하는 의미가 비슷하다는 것을 피력하였다. 글로 남기던 유람의 가흥과 정취가 그림으로 함께 표현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병연은 정선과 함께 김창흡의 문하에서 수학한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이병연은 당시 시로써 금강산을 표현해 낸 대표적인 선비로 칭송받았고, 정선은 그림으로 표현해 낸 최고의 화가로 인정받았다. 두 인물은 당시 조선의 경치를 시와 그림으로 가장 잘 표현해 낸 각 분야의 대가들이었다. 어디에서 이곳 물의 근원을 물을 수 있으랴 / 欲從何處問源頭 깊고 얕은 물 서로 통하며 위에서 아래로 흐르네 / 深淺相通上下求 삐죽삐죽 기울어진 봉우리는 빈 땅을 다투고 / 擾擾側峯爭隙地 푸르게 빗긴 산등성이 가을 하늘에 닿았네 / 蒼蒼橫嶺界高秋 골짜기가 골짜기 속으로 열려 끝을 알 수 없고 / 洞開洞裏不窮路 못물이 못 가운데로 떨어져 고요히 흐를 일 없구나 / 潭落潭中無靜流 해 질 무렵 구름 밖에서 옥 악기 소리 들리는 듯 / 薄暮如聞雲外磬 숲속이 아득하여 홀연히 시름이 이는구나 / 中林漠漠忽生愁 이병연, 『사천시초(槎川詩抄)』 권상, 시 「만폭동(萬瀑洞)」 【그림 42】 정선, 〈금강전도〉, 1734년, 삼성미술관리움(사진, 문화재청) 【그림 43】 정선, 《신묘년풍악도첩》 중 〈금강내산총도〉, 1711년, 국립중앙박물관 정선의 그림은 최고 문인들의 시문과 나란히 비견될만한 가치를 인정받았다. 정선은 선비들에게 가장 인기 높은 화가였다. 금강산 화첩을 여러 차례 그린 것은 선비들의 요구에 부응한 것이기도 했다. 1712년 지기인 이병연과 함께 금강산을 유람했고, 금강산 곳곳의 명소를 담아낸 산수화를 그려 화첩으로 만들었다. 이 화첩에 이병연의 제화시와 스승 김창흡의 제화시를 부쳤다. 정선의 화첩은 유람을 즐긴 선비들이 훗날 와유를 즐기기 위해 그려졌다. 창하(蒼霞) 원경하(元景夏, 1698-1761)는 정선의 그림을 보고 “김창흡의 시와 정선의 그림을 얻어 명산을 와유하니, 진실로 고인이 부럽지 않다”고 하면서 와유의 흥취를 즐기고 있다. 이병연은 시나 그림이 사경을 표현하는 작품으로 유사하다 보고 있지만, 실경을 보지 못한 사람이 글을 읽었을 때는 풍광을 상상하는 것에 그치므로 현장의 실감을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기행사경도는 산수유기가 표현하지 못하는 시각적인 효과를 화면에 담아냄으로써 산수유기와 함께 와유 체험의 도구로 수요가 증가하게 된 것이다. 기행사경도를 많이 그렸던 강세황은 본인이 금강산을 유람하고 작성한 「유금강산기」에서, 산수유기도 사경의 좋은 문예물이지만, 회화가 사물의 실제 모습을 만분지일이라도 잘 표현할 수 있어 후일 와유를 위한 자료로 적합하다고 역설했다. 그리고 금강산이 생긴 이래 제대로 그려낸 사람이 없었는데, 김홍도가 기행사경한 금강산 그림을 보고, 수려하고 섬세한 것이 교묘한 모양을 다하여 우리나라에 전에 없던 신필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관동의 경치는 정선을 필두로 심사정(沈師正, 1707-1769)‧허필(許佖, 1709-1768)‧이인상(李麟祥, 1710-1760)‧김윤겸(金允謙, 1711-1775)‧강세황‧김응환‧정수영(鄭遂榮, 1743-1831)‧김홍도‧이인문(李寅文, 1745-1824)‧이방운(李昉運, 1761-1815)‧조정규(趙廷奎, 1791-?)‧김하종(金夏鍾, 1793-1875)‧엄치욱(嚴致郁, 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 등 17-19세기를 대표하는 화가들이 화폭에 담아 갔다. 강세황은 정선과 심사정의 그림을 평하면서, 정선은 평소에 익힌 필법을 가지고 마음대로 휘둘렀기 때문에 돌 모양과 봉우리 형태를 막론하고 열마준법(裂麻皴法, 삼베가 세로로 찢어진 생김의 필법)으로 일관하여 난사(亂寫)하였으므로 진경을 그렸다고 논하기는 부족함이 있다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좀 더 사실적인 김홍도의 금강산 그림을 높이 평가하였다. 김홍도는 정선에게 부족했던 현장의 사실성을 보완하여 기행사경도의 자기 양식을 완성하였다는 것이다. 【사진 31】 김홍도‧김응환의 해운정과 오죽헌 방문기록(좌: 『해운정역방록』, 우: 『심헌록』) 김홍도는 1788년 정조의 명에 의해서 금강산을 비롯한 관동지역을 기행사경하였다. 도화서 화원 김응환이 함께하였다. 서화가 조희룡(趙熙龍, 1789-1866)의 『호산외사(壺山外史)』에 의하면, 정조는 이때 관동 각 고을에 명을 하달하여 기행사경을 떠나는 김홍도 일행을 각별하게 대접하라고 지시하였다고 한다. 정조는 김홍도의 그림을 통해 자신이 직접 가 보지 못한 금강산을 비롯한 관동지역의 명승을 와유로 즐기고자 한 것이다. 김홍도와 김응환이 강릉의 경포대를 사경 할 때 이이가 출생한 오죽헌과 강릉 출신 문신인 어촌(漁村) 심언광(沈彦光, 1487-1540)이 경포호변에 건립한 해운정(海雲亭)을 방문하고, 이곳 방명록인 오죽헌 『심헌록(尋軒錄)』과 『해운정역방록(海雲亭歷訪錄)』에 각각 이름을 남긴 것이 지금도 전하고 있다. 【그림 44】 전 김홍도필, 《해동명산도첩》 중 〈와선대〉, 조선후기, 국립중앙박물관 【그림 45】 전 김홍도필, 《해동명산도첩》 중 〈해금강〉, 조선후기, 국립중앙박물관 관동의 경치는 유람 온 선비들도 그려 가길 원했고, 유람하지 못한 이들은 그림을 구해 보고자 하였다. 특히 정선과 김홍도가 관동을 유람하며 기행사경을 한 후, 관동지역은 사경 장소로 크게 유명해져서 전국의 화원이 관동으로 오게 되었다. 현존하는 기행사경도 중 관동을 소재로 한 그림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신선의 세계로 불릴 만큼 정평이 나 있던 관동의 경치가 신필(神筆)의 경지를 지닌 두 화원의 붓끝으로 묘사되자 감상하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훌륭한 소재와 명인의 기예가 만나 사람들의 혜안을 자극하는 회화작품이 탄생하였고, 당시 사람들은 이 그림에 열광했다. 김홍도의 금강산 그림을 모사한 임모본(臨摹本)이 유행했고, 대형병풍에 정선의 금강산도가 과장하여 그려지기도 했다. 【그림 46】 작자미상, 〈금강산도십폭병풍〉, 조선후기, 국립중앙박물관 19세기에 접어들면, 유람하는 선비들이 직업 화가를 대동하고 기행사경도를 주문하는 사례가 더욱 빈번해진다. 이 시기 직업 화가로 동참한 인물들은 조정규‧엄치욱‧이재관(李在寬, 1783-1837)‧이인문‧김하종‧이방운 등이었다. 이들은 선비들의 유람에 동참하여 기행사경도를 주문받아 그렸다. 이광문(李光文, 1778-1838)‧이유원‧이풍익(李豊瀷, 1804-1887)‧안숙(安叔) 등과 같은 문인들은 유람에 나서면서 직업 화가들을 대동해 기행사경도를 제작하였다. 19세기 유람수요에 부응하여 기행사경도 제작이 더욱 활성화된 것이다. 기행사경도는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민화의 유행에 따라 특정 계층이 누리던 고급화된 그림에서 탈피하여 서민들의 수요에 부응하기 위한 민화풍의 다양한 표현으로 그려졌다. 조선후기 기행사경도는 회화의 한 장르로 크게 진작되었고, 기행사경을 유행시킨 산수의 중심에는 관동지역의 수려한 경관이 있었다. 【그림 47】 김하종, 《해산도첩》 중 〈가섭동〉, 1815년, 국립중앙박물관 【그림 48】 엄치욱, 〈구룡폭〉, 조선후기, 국립중앙박물관
  • 산의 인문학, 지리산을 유람하다
    • 기록자료
    • 문화
    산에 대한 이러한 전통적 선망 의식은 선현들에게 명산 유람을 갈구하게 하였다. 박여량이 그러했듯, 죽기 전 반드시 오르고자 하는 평생의 염원이었고, 닮고자 하는 대상이었다. 그의 원기(元氣)는 계속 솟아나고, 신비한 변화는 헤아릴 수 없다. 웅혼하고 심오하고 넓고 장대한 점은 마치 천왕봉과 반야봉(般若鋒)이 서로 우뚝하게 솟아 하늘을 떠받치며 구름 속에서 보였다 잠겼다 하는 듯하다. 그 풍요롭고 화려(富麗)하며 전아(典雅)한 점은 마치 신흥동(神興洞) 안에 따뜻한 봄날이 되면 온갖 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수석(水石)이 맑고 맑은 것과 같다. 그 강경(剛勁)하고 결단력 있는 점은 마치 청학동(靑鶴洞)의 높은 봉우리에 서리가 내려 잎이 떨어지고, 허공에 드리운 불일폭포(佛日瀑布)가 온 골짜기에 우레처럼 울리는 것과 같다. 대개 그가 읊은 한 작품 한 작품은 모두 두류산(頭流山)의 팔만 사천 봉우리에서 나온 것이니, 그 기상이 의연하고 법도가 삼엄함을 알겠다. 공(公)의 시를 살펴보면 또한 방장산(方丈山)의 모습을 알 수 있으니, 이로써 공이 품부받은 기상은 오로지 이 지리산에서 나온 것임을 더욱 징험할 수 있다. ―조위한(趙緯韓), 『청계집(靑溪集)』 「발(跋)」 중에서 언뜻 읽으면 마치 지리산에 관한 감상문인가 싶다. 그러나 이는 조위한(1567-1649)이 청계(靑溪) 양대박(梁大樸, 1543-1592)의 문집에 써 준 발문(跋文)의 일부이다. 조위한은 양대박의 아들 양경우(梁慶遇, 1568-1629)와 양형우(梁亨遇, 1570-1623)의 벗이었고, 양대박과는 전라북도 남원의 동향(同鄕)이다. 위 인용문에 나오는 신흥동과 청학동은 지리산 권역의 대표적 동천(洞天)으로, 모두 현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에 해당한다. 두류산과 방장산은 지리산의 다른 이름으로, 조선조 선현들은 ‘지리산’ 못지않게 두 이름도 자주 사용하였다. 조위한은 양대박의 작품이 지리산에서 나왔고, 그의 작품에서 지리산의 모습을 알 수 있으며, 양대박의 기질과 성품도 지리산에 연원(淵源)했다고 하였다. 양대박은 지리산 기슭 남원에서 생장하였고, 젊은 시절 짧은 기간의 출사(出仕) 외에는 지리산에서 일생을 보냈다. 많지 않은 분량의 문집에서 네 차례 지리산 유람이 확인되고, 거기에는 10여 편의 지리산 한시가 실려 있다. 이것만으로는 조위한이 양대박에게서 본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조위한은 지리산과 닮은 양대박을 통해 ‘지리산’을 보았을 것이다. 지리산은 이처럼 여느 산과 달리 수천 년 동안의 인간과 자연이 공존해 온 역사적 문화적 특수성이 녹아 있는 공간이다. 특히 수많은 지식인이 세상을 피해 숨어들었던 ‘사람의 산’이다. 그러므로 역사적으로 지리산은 인간 삶의 안식처이자 절체절명의 순간 생명의 버팀목이 되어 준 곳이다. ‘산의 인문학’이 산을 통해 인간 삶의 흔적을 찾아가는 학문이라면 지리산만큼 적합한 명산도 없을 것이다. 지리산은 그 속에서 살아간 우리 인간의 삶과 정신을 해명하는 영역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지리산은 일찍부터 학문적 영역으로 편입되어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 조선시대 사람들의 더불어 살기, 향약
    • 기록자료
    • 사회
    이어지는 향약의 전통은 퇴계학파를 계승한 여러 지역에서 제정되었다. 예컨대 밀양에서는 1648년 밀양부사(密陽府使) 강대수(姜大遂)가 유향소를 중심으로 주현향약인 이른바 ‘무자향약(戊子鄕約)’을 시행하였다. 강대수는 장현광의 문인으로서, 그가 제정한 무자향약은 현풍현향약의 조항과 거의 동일하다. 대구 부인동(夫仁洞)에서는 1739년(영조 15) 최흥원(崔興源)이 동약을 제정했는데, 그 역시 김기향약과 현풍현향약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주현향약은 고을 수령뿐만 아니라, 한 도의 장관인 관찰사가 시행하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경상도관찰사 이헌영의 향약 시행을 주목하고자 한다. 이헌영은 개항기 내외 관직을 두루 지내면서, 관직 생활 중의 주요 기록과 문서를 정리한 여러 편의 공무 일기를 남겼다. 그 중 「교번집략(嶠蕃集略)」은 1890년 12월부터 1893년 3월까지 경상도관찰사를 지내면서 작성한 일기이다. 여기에는 각 고을에 향약 시행을 지시하면서 작성한 여러 기록이 수록되어 있다. 1891년 경상도관찰사 이헌영은 직접 제정한 「향리약법(鄕里約法)」을 경상도 70여 고을에 배포하였는데, 그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언급이 있다. 대개 향약의 법은 주관(周官) 삼물(三物)·팔형(八刑)의 뜻에 근원하며, 송나라 남전 여씨의 조례에 있는 것이다. 주부자[주자]가 증손한 것은 대개 풍속을 더 낫게 고쳐, 세상을 좋게 하는데 있다. 이것보다 좋은 것이 없는 까닭에, 우리 열성조(列聖朝)에서 여러 차례 반시(頒示)하는 지시를 내렸고, 여러 선유(先儒) 또한 수행하는 노력을 많이 하였다. … 이곳을 평소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 칭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진실로 개탄스러움을 이길 수 없다. … 일찍이 여러 군(郡)을 맡을 때, 또한 이 법을 행하였는데 효과가 없지 아니하였으니 … 이에 참람하고 방자함을 무릅쓰고, 향약의 여러 조항 중 번잡한 것은 깎고 그 요점만 취해 수정한 다음, 향약장과 직월 및 여러 임원에게 하송하였으니, 반드시 한 고을의 좋은 선비를 택할 것이며, 응해서 거행하는 규정을 그들과 함께 잘 의논하여 좋은 방법을 강구할 것이다. … 만일 세속의 풍습에 길들어져 오활한 것으로 돌아가 별일 아닌 것으로 보고 지시를 잘 따르지 않는다면, 진실로 감영과 고을 간에 서로 믿는 뜻이 없어질 것이다. ―『교번집략(嶠蕃集略)』, 「향리약법서(鄕里約法序)」 中 위의 서문에는 향약 제정의 취지가 잘 드러난다. 이헌영은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기 전에 외직으로 부안현감·정주목사·의주부윤·영흥부사를 지냈는데, 부임지마다 어김없이 향약을 시행하였다.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경상도 여러 고을에서 시행할 향약을 만들었다. 이헌영 역시 이황이 그랬던 것처럼 향약의 유래를 『주례』에서 찾았다. 여기서 삼물(三物)과 팔형(八刑)은 각각 주나라 때 백성을 다스리는 세 가지 일과 여덟 가지 형벌을 뜻한다. 이러한 전통이 북송의 여씨향약, 남송 주자의 증손향약, 그리고 우리 조선에서 여러 명현이 제정한 향약으로 이어졌다고 하였다. 그러나 근래 향약의 전통이 단절되었고, 특히 경상도의 풍속이 예전과 같지 않다며, 각 고을에 향약 시행을 지시하고 있다. 서문 말미에는 감영과 고을 간의 신뢰를 강조해 놓았다. 이처럼 이헌영은 관찰사로서 원활한 지방 통치를 도모하고 개항기 새로운 문물이 유입되는 과정에서 전통적인 가치를 고수하기 위하여 향약을 시행하였다. 【그림 12-1】 경상도 비안현에 배포된 이헌영의 「향리약법」 【그림 12-1】 경상도 비안현에 배포된 이헌영의 「향리약법」 그런데 이헌영의 주현향약은 김세렴의 현풍현향약과 비교해 관부의 영향력이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 이는 유향소의 기능 약화와 무관하지 않다. 16-17세기 사대부 계층의 향촌 지배력 강화와 함께 유향소의 권위도 높아졌다. 유향소가 향약을 시행하는 장소로 주목받았으며, 그 구성원은 향대부에 비견되기도 했다. 그러나 18-19세기를 거치면서 유향소는 향권을 다투는 자리로 변질되어 갔다. 특히 수령권의 강화는 유향소의 자치 기능을 제한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치 기능보다 수령 행정을 보조하는 기능이 부각되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어느 시기부터 유향소는 향청(鄕廳)으로 불려졌다. 행정적 기능이 강화되면서 유향소는 아전들의 기구인 질청[作廳]과 비슷한 성격의 기구로 인식된 것이다. 이헌영도 이러한 점을 알고 있었기에 유향소보다는 관부가 주도하는 향약 조직을 구상하였다. 1891년 이헌영이 반포한 「향리약법」의 〈입약장(立約章)〉에는 향약의 직임과 임무 등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도약장(都約長): 해당 고을의 수령 도직월(都直月): 향교 재임(齋任) 중에서 임명, 각면의 약속을 규찰 면약장(面約長): 대중이 나이·덕행·학행이 있는 자를 추천, 면내의 약속을 관장 면직월(面直月): 근면하고 공정한 자를 임명, 여러 규약의 실무를 주관 우선 「향리약법」에서 향약을 주관하는 자는 다름 아닌 각 고을의 수령이다. 향약이 제대로 시행될 수 있도록 수령이 도약장을 맡게 했다. 그리고 부임은 향교의 임원인 재임, 즉 교임(校任)이 맡도록 하였다. 이는 앞서 현풍현향약에서 유향소 좌수를 향약 임원으로 임명한 것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나아가 〈입약장〉에서는 세 개의 장부를 둔다고 하였다. 그것은 각각 향약에 들어오기를 원하는 ‘자원입약자(自願入約者)’ 명부, 행실이 바른 ‘덕업가관자(德業可觀者)’ 명부, 과실을 저지른 ‘과실가규자(過失可規者)’ 명부로서, 주자증손여씨향약에서 규정한 명부·선적·악적으로 구성된 세 개의 장부와 같다. 그런데 선적에 해당하는 ‘덕업가관자’ 명부는 향촌의 여러 임원을 선발하는 기준이 되었다. 즉, 여기에 입록된 인사 중에서 면약의 약장과 직월을 비롯해 향교의 교임·재임 및 면임과 이임까지 선발하게 했던 것이다. 또한 「향리약법」에서는 면 단위 향약을 지시하였다. 각 면에서 명망 있는 자를 대중으로부터 추천받아 면약장으로 삼게 하였다. 「향리약법」에 수록된 〈면약의주(面約儀註)〉는 면 단위로 거행되는 집회 때의 절차를 규정한 것인데, 여기에 참여하는 인사로는 향약 구성원 외에도 관내의 향교 교생(校生), 서원 원생(院生), 그리고 무업(武業)에 종사하는 무열인(武列人)까지를 포괄한다. 해당 면에서 영향력을 가진 모든 인사를 향약례에 참여시킴으로써, 주현향약을 시행하는 관부의 권위를 높이고자 했던 것이다. 관부의 영향력은 향약 집회 규정에 잘 드러난다. 집회 규정을 수록한 11개조의 조목 중에서 다음 5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나. 향약 중에 선한 자가 있으면 무리에서 추천하고, 허물이 있는 자는 직월이 규제한다. 선한 자는 선적에 기록하고, 허물이 있는 자는 과적에 기록해 좌중에게 두루 보여 준다. 선행과 과오가 가장 큰 자는 관청에 보고하여 상벌을 내린다. 하나. 선행을 기록하고 과오를 기록하는 것이 공정하지 아니하면, 한 고을이 함께 관에 호소해 변무한다. 하나. 지금 이 약조를 집집마다 베껴서 두고, 때때로 읽고 익힌다. 매번 약회 때 향약 읽기를 마치면, 약장이 향약 중의 각 사람에게 약편(約篇)을 고강해서 등급을 나누어 관에 보고한다. 관은 향교에서 약회를 거행할 때, 다시 고강해서 상벌을 내린다. 하나. 30세 이하로 관례를 마친 자가 향약에 참여하지 않고 약회에 3회 빠지면, 향약에서 벌을 내리는데, 끝내 불복하는 자는 관에 보고하여 벌을 내린다. 하나. 봄과 가을 약회가 끝난 후, 설행 일자를 즉각 감영에 보고한다. ―『교번집략』, 「향리약법서」, 「향리약법서·집회독약청고강장약(集會讀約聽考講章約)」 中 여기서 관은 향약 시행에 있어 중재 및 관리의 역할을 하고 있음이 나타나는데, 특히 관의 고강 규정이 주목된다. 각면에서 「향리약법」을 고강하고, 우수한 자를 향교에서 개최하는 약회 때 재차 고강한다는 개념이다. 그리고 규정 말미에는 감영에 향약 시행 일자를 보고하라고 지시해 놓았다. 경상도관찰사의 정령에 의해 제정된 주현향약인 만큼, 감영이 각 고을의 향약 시행 여부를 직접 감독하였다. 이처럼 원활한 지방 통치를 위하여 뜻있는 수령들은 주현향약을 제정하고 직접 시행하였다. 향약 규정의 제정부터 임원의 임면까지 모두 관부가 총괄하되, 향약 조직에게 향촌 교화에 대한 임무를 부여함으로써, 수령의 막중한 업무를 분담할 뿐만 아니라, 향촌 세력의 자발적인 교화와 협조를 이끌어 내고자 했다. 그러나 수령 주도의 주현향약은 통치 보조를 위해 시행되었기 때문에 관변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며 여러 부분에서 한계를 드러내었다. 가장 큰 한계는 본연의 자치 기능이 퇴색되었다는 점이다. 그 형태는 수령 또는 관부와 관련된 인사가 향약의 임원을 맡거나, 향촌에서의 역할이 수령의 행정을 보조하는 수준으로 격하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 현풍현향약의 전통을 계승한 밀양에서는 17-19세기 동안 수령 주도의 주현향약이 여러 차례 제정되었다. 처음에는 고을의 명망 있는 사대부와 유향소의 좌수가 향약의 임원이 되어 향약을 운영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제정된 밀양 지역 주현향약의 제 규정은 자치보다는 통치 보조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난다. 그런 가운데 1889년 밀양부사 정병하(鄭秉夏)는 「기축장정(己丑章程)」 또는 「밀주장정(密州章程)」이라는 명칭으로 주현향약을 제정하였다. 해당 향약의 규정은 모두 25개의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기에 규정된 약임의 권한과 임무는 종전의 그것과 차이가 크다. 향촌 교화와 관련된 권한은 소략한 데 반해, 부세·단속·공사 등 각종 행정 업무가 상세하게 규정되어 있다. 특히 다음의 조항은 「기축장정」에서 규정하고 있는 약임의 위치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하나. 약정은 각리의 공의(公議)에 따라 면임을 차정한다. 두 사람은 식자(識者)이며 일을 해결함에 게을리하지 않는 자들이다. 무릇 지시를 거행함에 있어, 각리의 여러 가지 일을 상세하고 명백하게 왕복해서 처리할 것이며, 모호하게 지연시켜 일이 지체되고 시끄럽게 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밀주징신록(密州徵信錄)』, 「고종기축장정(高宗己丑章程)」, 中 종전에는 각면의 약임에게 교화를 담당케 하고, 면임은 관령에 따른 행정업무를 맡게 하였다. 그러나 위의 조항에서 관부가 바라보는 약임과 면임의 위치는 큰 차이가 없다. 같은 행정 업무 종사자로 인식하고 있다. 19세기에 이르러 수령이 주도하는 주현향약의 관변적 성격이 더욱 강화됨에 따라, 향약은 관의 정령을 하달받는 위치로 전락해 버렸다. 이는 마치 교화와 풍속 검찰의 임무를 가지고 있다가 조선 후기 이후 점차 권위가 약해져, 행정업무를 보조하는 향청으로 전락해 버린 유향소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관변적 주현향약의 또 다른 한계는 수령의 의지에 따라 시행되었기 때문에 임기가 끝난 후에는 흐지부지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향약에 협조해야 하는 사대부들도 해당 수령이 향약을 시행할 때는 협조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수령이 이임하면 조직해 놓은 향약을 방치해 버렸다. [1891] … 6월에 향약책자와 강학조규(講學條規)로써 각읍에 고루 배포하였으나, 가을이 이미 다 지났고, 겨울 또한 반이 지났다. … 각 고을 중 오히려 강약장(講約長)과 향교 수임을 차정하고 보고하지 않은 것이 반에 이르니, 준행하고도 그렇게 한 것인가? ―『교번집략』, 「칙각읍강장급향교수임보래(飭各邑講長及鄕校首任報來)」 中 지난 임진년[1892]에 명을 받들어 남쪽으로 오니, … 이에 안타깝게 여겨 100여 동(銅)을 내어서, 강약소(講約所)를 창설해서 많은 선비들이 강습하는 재용으로 삼았다. 지금 또 이 자리에 올라 물어 채집하였는데, 도중에 군의 서리에 의해 다 써 버리고, 마침내 본소에서 사용할 것이 없게 되었으니, 어찌 해괴한 일이 아닌가? ―『재번집략(再蕃集略)』, 「대구향교별보절목(大邱鄕校別補節目)」 中 앞의 글은 1891년 6월 이헌영이 관내 각 고을에 「향리약법」을 배포하고 연말까지 향약 조직을 편제하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이를 따른 고을은 절반이 채 되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실제 편제를 한다고 해도 독약회만 거행하고 향약 시행을 주저하는 고을이 상당수였다. 뒤의 글은 1902년 경상북도관찰사로 재부임한 이헌영이 향약 시행을 위해 제정한 절목 중 일부이다. 1891년 이헌영은 자신의 녹봉 중 일부를 내어 달성향약(대구향약)을 지원한 적이 있었다. 시간이 흘러 1902년 경상북도관찰사로 재부임한 이헌영은 이번에도 달성향약을 시행하기 위하여, 10여 년 전 자신이 낸 지원금의 용도를 확인하였는데, 그 돈은 이런저런 일로 고을의 서리가 모두 써 버리고 말았다. 감영이 소재한 대구에서조차 수령이 떠나 버리자 향약은 유야무야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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