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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후의 공인, 지규식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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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
는 어렵다. 이번 총서의 초점이 ‘전통시대의 생활상’을 복원하는 것에 맞추어져 있으므로, 『하재일기』에서도 근대적 변화 이전의 모습, 즉 조선시대 제도에서 만들어진 상인의 한 유형인 ‘공인’의 생활에 초점을 두고자 한다. 일기가 시작되는 1891년부터 분원의 ‘공소’ ‘공인’이라는 타이틀이 없어지기 이전인 1894년(고종 31)까지의 기간에 집중하고자 한다. 일기의 앞 시기를 중점적으로 다루되, 대신 공간적인 면에서 공인 지규식의 생활상을 분원마을과 서울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한다. 분원 공인 지규식은 분원마을에 거주하며 분원을 거점으로 인근 지역을 오가며 경제활동을 하면서도, 서울을 자주 오갔다. 특히 일기가 시작되는 1891년 한 해 동안에는 분원에 머물렀던 날보다 서울에 머물렀던 기간이 더 길었다. 공인으로서의 삶을 입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서는 그의 이동 동선을 따라가며 추적해 볼 필요가 있겠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시기별 변화 과정을 추적하기보다는 공간별 활동 양상을 추적해 보기로 한다. 한편, 공인으로서의 본업 활동을 공간별로 나누어 살펴본 후에는, 그의 개인적인 경제활동도 살펴보고자 한다. -
조선 사람들의 차림새, 멋내기로 통하다
- 기록자료
- 문화
이씨가 쓴 『규합총서(閨閤叢書)』에는 계란을 술에 담가 밀봉하여 약 한 달 정도 지난 뒤에 얼굴에 바르라고 했다. ‘얼굴이 트지 않을 뿐 아니라 윤택하여 마치 옥같이 되었다’는 조선판 후기가 존재한다. 실제 계란 노른자에 있는 레시틴 성분은 피부를 촉촉하게 가꾸어 줄 뿐 아니라 잔주름을 없애 주며, 흰자는 세정력이 있어 피지를 제거하는 데 효과적이라고 알려져 있다. 피부에 대한 조선 여성의 관심이 과연 얼마만큼이었기에 계란을 활용한 피부미용법까지 개발해 낸 것일까? ‘윤기’에 대한 조선 여인들의 관심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녀들은 들깨, 살구씨, 목화씨, 쌀, 보리에서 추출한 기름을 직접 얼굴에 발랐다. 고본 기름은 새살을 돋아나게 해 주근깨와 여드름 치료에 효과가 있었다. 참기름은 신진대사를 활발하게 해서 기미를 없애고 촉촉한 피부를 만드는 데 효과적이었다. 모두 자연에서 얻은 순수한 화장품이다. -
조선 사람들의 차림새, 멋내기로 통하다- 기록자료
- 문화
있다. 『규합총서』를 쓴 빙허각 이씨는 귀주머니는 나비 5치 5푼, 길이 7치 5푼이면 귀까지 만든다고 하였으며, 두루주머니는 나비 5치, 길이 2치 5푼으로 만들어야 손실이 적다고 했다. 기본적인 크기는 있어도 다양한 형태의 주머니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수주머니, 무슨 소원을 담았을까 옛날의 주머니는 거의 다 수를 놓았다. 수주머니를 꽃주머니 또는 복주머니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들 주머니에 넣는 물건 중 흥미로운 것은 곡식이다. 왕실에서는 한 해 동안 액을 면하고 복을 기원하는 뜻으로 볶은 콩을 붉은 종이에 싸서 오방낭에 넣어 종친들에게 보냈다. 민간에서도 새해 첫 번째 돼지날이나 쥐날이 되면, 볶은 콩이나 곡식을 주머니에 넣어 선물했다. 들쥐나 멧돼지로부터 피해를 받지 않는다는 속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돌을 맞이한 어린아이에게는 【그림 91】과 같이 돌띠에 쌀·깨·조·팥 등의 곡식을 담은 주머니를 달아 주었다. 풍성한 먹거리가 평생 이어지기를 바라는 부모 마음을 담은 주머니이다. 또 혼인 때에는 신랑의 노란 주머니에 씨 박힌 목화 한 송이와 팥 아홉 알을 넣은 주머니를 달아 주었다. 아홉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두라는 뜻으로 자손이 번창하길 바라는 의미였다. 【그림 91】 김홍도, 〈모당홍 이상공 평생도〉의 부분, 국립중앙박물관 주머니에 어떤 것을 담을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각자의 염원을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도 중요했다. 금박을 찍을 수도 있고, 그림을 그릴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한 것은 수를 놓는 방법이었다. 여러 가지 색실을 이용하여 경사스러운 의미를 담고 있는 수(壽)·복(福)·오복(五福)·다남(多男)·부귀(富貴) 등의 문자를 수놓는 것이다. 글자로 자신의 염원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가 하면 은유적인 표현도 함께 썼다.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 장수를 상징하는 복숭아, 십장생뿐 아니라 국화·매화·석류·연꽃·박쥐 등이 갖고 있는 상징적 의미를 표현했다. 어떤 방법이 됐든 염원하는 바는 수복강녕(壽福康寧), 부귀영화(富貴榮華)로 귀결되었다. 주머니, 옷에 맵시를 더하다 주머니의 꾸밈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주머니를 마무리하기 위한 매듭이나 끈에도 의미를 담았다. 이때 사용하는 매듭은 다른 가닥의 매듭이 풀어지지 않도록 고정시키거나 끝마무리를 할 때 사용하는 가장 기본적인 도래매듭, 생쪽매듭을 시작으로 병아리매듭, 국화매듭, 딸기매듭, 장구매듭을 맺는다. 매듭은 다시 봉술, 낙지발술, 딸기술, 잔술 등과 연결한다. 그중에서도 귀주머니에는 봉술보다 길이가 짧은 잔술을 달고, 은파란으로 만든 표주박이나 괴불을 단다. 괴불은 비단 조각을 이용하여 삼각 모양을 겹으로 만들고 솜을 탄탄히 넣은 다음 둘레를 색실로 휘갑친 후 작은 고리를 만들어 삼각형의 위 꼭지점에 끼우고 삼각형의 양 모서리에는 술을 달아 장식한다. 괴불의 뾰족한 세 모서리는 물, 불, 바람의 세 가지 악재를 눌러 주어 액을 막는다는 벽사의 의미가 담겨 있다. 염원을 위해 장식을 추가한 모습이다. 이제 이 멋진 주머니를 어디에 찰 것인가. 아기의 돌띠 주머니는 허리띠에 매달아 주머니가 등 뒤에 가도록 달아 준다. 어린이들의 복주머니는 보기 좋게 허리춤에 달아 준다. 저고리 아래 주머니와 매듭 끈이 같이 흔들려 생동감을 준다. 어른도 마찬가지다.【그림 92, 93】 그런데 조금 다른 멋을 부리고 싶은 사람은 주머니를 두 개 달아 개성을 더한다. 또 주머니를 허리춤이 아닌 배자 위에 달기도 한다. 이는 도포자락이 휘날릴 때 그 사이로 주머니가 살짝 보이게 하여 포인트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돈과 담배 따위를 넣고 다니는 작은 비단 주머니는 보통 오렌지색이나 파란색으로 만든다. 기본적으로 옅은 색을 띠는 우리 옷에 단조로움을 없애 주기 위함이다. 여인들 역시 작은 주머니 안에 보석, 가위, 은장도, 행운을 비는 호랑이 발톱, 향낭, 금은으로 만든 고누판을 가지고 다녔다. 정성을 다해 염원을 담은 주머니가 패션을 완성시킨다. 【그림 92】 신윤복, 〈유곽쟁웅〉의 부분, 한국데이터베이스산업진흥원 【그림 93】 신윤복, 〈야금모행〉의 부분, 한국데이터베이스산업진흥원 -
조선 사람들의 차림새, 멋내기로 통하다- 기록자료
- 문화
허각 이씨의 ‘규합총서’에 실린 다듬이질 노하우를 들어 보자.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귀하다고 생각한 자주색은 풀을 뜨물과 같은 농도로 묽게 개어 먹인 뒤 살짝 말랐을 때 힘껏 밟아 홍두깨에 감아 밀어 가며 다듬질하는 방법이다. 푸른색을 만들 때에는 대암풀을 먹이고, 진홍색에는 대왕풀과 아교풀을 섞어 먹인다. 또 보라색은 생토란을 갈아 그 즙을 먹이고 아청색은 아교풀을 먹인다. 또 직물에 따라서도 먹이는 풀이 달랐다. 비단에는 대왕풀을 먹이고 명주는 달걀흰자를 녹말풀에 섞어 쓴다. 무명에는 백면가루를 섞어 먹이고 모시는 활석이나 녹말을 먹여야 한다. 이제 풀을 먹였으면 햇볕에 널어 꾸덕꾸덕하게 말릴 차례이다. 너무 바짝 마르면 다듬이질이 어렵게 되니 손에 물을 묻혀 골고루 뿌려 주거나 입으로 물을 뿜어 숨을 죽인다. 이 또한 기술이 필요하다. 물을 뿌렸으면 골고루 물이 배도록 보자기에 싸서 이리저리 뒤집어 가며 발로 밟는다. 그 작업이 끝나면 다시 펴서 양쪽에서 잡고, 틀어진 올을 맞추고 솔기도 잘 정리하면서 다듬잇돌보다 조금 작은 크기로 반듯하게 접는다. 다듬이질, 난타가 따로 없다 이제 본격적으로 다듬이질이 시작된다. 옷감을 홍두깨에 감아 방망이로 두들기거나 다듬잇돌 위에 올려놓고 방망이질을 한다. 또 다듬이질은 혼자 할 수도 있고 둘이 마주 앉아 할 수도 있다. 혼자보다는 둘이 할 때 훨씬 리듬감이 있다. 다듬잇돌의 크기는 50㎝ 정도이다. 그러다 보니 서로 호흡이 맞지 않으면 방망이끼리 부딪치게 되거나 맨 다듬잇돌만 두들기게 될 수도 있다. 다듬이 소리가 돌 깨지듯 둔탁하게 되지 않으려면 운율을 타야 한다. 리듬감 있는 소리는 둘의 호흡에 달려 있다. 시어머니나 동서에게 마음 상한 일이 있었더라도 방망이로 빨래를 두드리는 순간만큼은 서로의 눈을 쳐다보고, 마음을 읽고 이해해야만 비로소 방망이의 호흡이 척척 맞아떨어지게 된다. 깊은 밤 다듬이 소리가 소음이 아니라 어떤 악기로도 표현할 수 없는 청아하고 정겨운 소리로 들렸던 것은 서로에게 맞추려 노력하고 이해하는 마음에서 방망이를 두들겼기 때문이다. 방망이를 두드리는 순간 가족의 화목과 행복이 살아나고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가 사라지면서 울려 퍼지는 소리. 어찌 기쁜 소리가 아니겠는가. -
왕의 비서실, 승정원 사람들과 승정원일기
- 기록자료
- 정치
)』 등을 한국사료총서 『조선시대사초(朝鮮時代史草) Ⅱ』에 수록하였다. 이 사초들은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도 제공되고 있다. 【표 2】 현존하는 당후일기의 목록 김종직의 『필재당후일기』 『필재당후일기』는 조선 전기 사림파의 영수로 추앙을 받은 점필재(佔畢齋) 김종직(1431-1492)이 주서로 있으면서 쓴 기록이다. 500년간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합가리의 선산 김씨(善山金氏) 종택에서 소장하고 있었으며, 현재 대가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다른 김종직의 문적 유품들과 함께 1985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09호로 지정되었다. 이 기록은 1482년 11월 1일부터 같은 해 12월 25일까지 기록으로, 김종직의 연보에 따르면 그는 1482년 4월, 춘추관 기주관으로 임명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따르면 이 기록은 김종직이 기주관의 신분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권벌의 「당후일기」 「당후일기(堂后日記)」는 조선 중종 때의 문신인 충재(冲齋) 권벌(權橃, 1478-1548)이 주서로 있으면서 쓴 친필 일기이다. 권벌의 종가가 있는 경상북도 봉화군 닭실마을의 후손이 소장하고 있다. 권벌의 일기인 『충재일기(沖齋日記)』에 포함되어 있고, 『충재일기』는 현재 대한민국 보물 제261호이다. 『충재일기』는 「한원일기(翰苑日記)」 2책, 「당후일기」 1책, 「승선시일기(承宣時日記)」 2책, 「신창령추단일기(新昌令推斷日記)」 1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벌은 문과에 급제하던 해에 한림 벼슬이었던 정9품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제수되었다가 이듬해 봄, 정8품 대교(待敎)에 승진했고, 이 기간 사관직을 수행하면서 기록한 사초가 「한원일기」이다. 그리고 「당후일기」는 권벌이 한림 벼슬인 대교에서 정7품 승정원 주서로 옮긴 후, 당후관의 직책을 수행하면서 사관으로 활동하던 시기에 작성된 사초이다. 다음으로 「승선시일기」는 그가 승정원 승지로 발탁되어 겸사관(兼史官)으로 활동하던 중 1518년(중종 13) 5월 15일부터 11월 6일까지 기록한 사초로, 역시 승지직에 있으면서 쓴 일기이다. 권벌의 일기는 당시 실록 내용과 글자까지 일치하는 부분이 매우 많아, 실록을 편찬하는 데 사초가 기본적인 자료였음을 입증하고 있다. 또한, 실록에 누락되어 있는 부분도 일기에 수록되어 있어서, 실록을 보완해 주는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다. 공서린의 「당후일기(堂後日記)」 【그림 14】 『휴암실기』, 국립중앙도서관 소장공서린의 「당후일기」 「당후일기(堂後日記)」는 조선 중기 문신 공서린(孔瑞麟, 1483-1541)이 중종 대에 저술한 일기류 사초이다. 공서린은 1507년(중종 2) 생원이 되고, 그해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였다. 이어 1509년(중종 4)에 좌랑, 1511년(중종 6)에는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거쳐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역임하였다. 1516년(중종 11), 장령(掌令)으로 경연(經筵)에 참석하여 노산군(魯山君)과 연산군의 입후문제(立後問題)를 제기하였고, 이듬해 시강관(侍講官)으로 경연에 참석하여 언로(言路)의 확장을 주장하였다. 1518년, 『성리대전(性理大全)』을 강독할 능력이 있는 인물로 선발되었고, 승지가 대간을 논박하였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물러났다. 1519년(중종 14)에 좌승지로 다시 서용되었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趙光祖) 등 사림파 인물과 함께 투옥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당후일기」는 공서린의 문집인 『휴암실기(休巖室記)』 제4권에 「시사상언(諡事上言)」·「사개관(賜改貫)」·「명신록(名臣錄)」·「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복계(覆啓)」·「증시(贈諡)」·「계(啓)」·「통문(通文)」 등과 함께 그 전문이 수록되어 있다. 이황과 김성일의 『당후일기』 이황과 김성일의 『당후일기(堂后日記)』는 『퇴계사전초(退溪史傳草)』라고도 부른다. 1571년(선조 4), 퇴계의 부음을 들은 제자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이 1540-1550년대에 퇴계 이황이 저술한 『당후일기』에 있는 내용을 모두 뽑아 연보로서 기록한 것이다. 퇴계가 중종에게 올린 고군진계(告君陣誡) 6조에 관한 내용, 명종과의 경연에서 심통성정(心統性情)에 대하여 문답한 내용 등이 수록되어 있다. 광해군 대까지의 『승정원일기』가 소실되었기 때문에 실록을 보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료로서의 가치가 크다. 『퇴계선생언행록(退溪先生言行錄)』, 『학봉집(鶴峰集)』 등에 수록되어 있는데, 『학봉집』에는 「학봉김문충공사료초존(鶴峯金文忠公史料鈔存)」이라는 명칭으로 수록되어 있다. 원본은 현재 김성일 종가 전적(金誠一 宗家 典籍)이라는 이름으로 대한민국 보물 제905호로 지정되어 있다. 김용의 『당후일기초본』 『당후일기초본』은 김용(1557-1620)이 1615년(광해 7) 8월부터 1616년(광해 8) 6월까지 약 10개월간 기록한 『당후일기』의 초본이다. 현재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되어 있다. 김용은 의성 김씨로, 학봉 김성일의 조카이자, 이황의 외손녀사위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인 안동에서 의병장으로도 활약했고,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치는 동안 춘추관(春秋館)의 편사관(編史官)을 겸하면서 『선조실록』을 편찬하는 데 참여하기도 했다. 이 기록은 1615년 윤8월 초6일부터 1616년 6월 18일까지 광해군 대의 경연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1차 사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원래는 천(天)·지(地)·인(人)의 3책으로 이루어져 내려오던 것을 일제강점기 때 새로 제본한 것이다. 이도장의 『주서일기』 『주서일기(注書日記)』는 이도장(李道長, 1603-1664)이 승정원의 가주서 및 주서로 재임할 때 쓴 일기이다. 이도장은 광주(廣州) 이씨로, 부친은 정구(鄭逑), 장현광(張顯光) 등 영남학파의 학문을 계승한 이윤우(李潤雨)이다. 부친 이윤우도 사관을 지냈으며, 이도장의 후손인 이원정(李元禎), 이담명(李聃命), 이한명(李漢命)까지 직계에 다섯 명의 사관을 배출한 집안이기도 했다. 일기의 작성 시기는 1630년(인조 8)과 1636년(인조 14)에서 1637년(인조 15)까지이다. 이도장은 1630년에 승정원 가주서를, 1636년에는 승정원 주서를 지냈다. 1744년의 화재로 인하여, 1623년부터 1721년(경종 1)까지를 기록한 『승정원일기』가 소실되어, 영조 대에 다시 작성하게 되는 점을 고려하면, 인조 당대의 기록인 이도장의 『주서일기』가 차지하는 1차 사료로서의 가치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도장의 『주서일기』에 대해 광주 이씨 일가에서는 수차례 걸친 정리 작업을 진행했다. 그 결과 초기 정서본에 해당하는 자료는 현재 대구 가톨릭대학교에 소장되어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 소위 ‘이도장본’의 원소장처는 경북 칠곡 광주 이씨 해은고택(海隱古宅)이다. 해은고택 소장본은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에 기탁 보관 중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는 이 기탁본을 영인하여 수록하고, 정수환의 해제를 앞에 실은 『이도장의 승정원일기』를 ‘한국학자료총서 43’으로 출간하였다. 이도장은 『주서일기』에서 일기와 실록, 『승정원일기』를 비교하고 있어, 『주서일기』가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 어떻게 반영되는지를 살펴보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 권두기의 『당후일록』 『당후일록(堂后日錄)』은 숙종 대 관리인 권두기(權斗紀, 1659-1722)가 1700년(숙종 26) 11월부터 1701년(숙종 27) 2월까지 약 3개월간을 기록한 것으로, 현재 국사편찬위원회에 소장되어 있다. 건(乾)·곤(坤)의 2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구한말에 유창식(柳昌植), 유일우(柳馹佑), 김진의(金鎭懿), 김도화(金道和) 등과 함께 안동의진(安東義陣)을 일으켜 일본군과 교전하였던 후손 권철연(權徹淵)이 소장하고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에 조선사편수회가 새로이 등사한 것이다. 권두기의 『당후일록』은 영조 대의 일기청 자료 수집 목록에 들어가지 않았다. 따라서 권두기의 『당후일록』에 수록된 대부분 내용은 실록과 『승정원일기』에는 없는 기록들이기 때문에 숙종 대의 실록을 보완해 줄 수 있는 자료로서 그 사료적 가치가 높다. 이상정의 『당후일기』 이 당후일기는 조선 영조 대의 문신, 학자인 이상정(1710-1781)이 1735년 윤4월 23일에 작성한 것이다. 이상정은 경북 안동 출신이며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아버지는 이태화(李泰和)이며, 어머니는 재령 이씨(載寧李氏)로 이현일(李玄逸)의 손녀이자 이재(李栽)의 딸이다. 그는 18세기 영남학파를 대표하는 학자로서, 1735년, 사마시와 대과에 급제하여 가주서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당후일기』는 이상정이 가주서로 짧은 관직 생활을 하던 기간에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정조가 왕위에 오른 뒤, 그는 병조참지(兵曹參知), 예조참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운영의 「당후일기」 이운영(李運永, 1722-1794)의 「당후일기(堂后日記)」는 조선 영조 대의 문신인 이운영이 1766년(영조 42)에 저술한 것이다. 이운영의 본관은 한산, 자는 건지(健之), 호는 옥국재(玉局齋)이다. 아버지는 생원 이기중(李箕重)이며, 판서 이태중(李台重)의 조카이다. 그는 1759년(영조 35),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었으며, 이듬해에 세마(洗馬)가 되었고, 부수(副率)를 거쳐 정조가 즉위하자 형조정랑에 부임하였다. 이 「당후일기」는 이운영이 평생 쓴 글들을 모아놓은 문집인 『옥국재유고(玉局齋遺稿)』 10권에 전문이 수록되어 있다. 『옥국재유고』에 실린 일기류 작품은 「계방강연일기(桂坊講筵日記)」와 「당후일기」 2종이 있는데, 「계방강연일기」는 1764년(영조 40) 10월 21일부터 서연에서 경전을 강의하면서 경험한 정치 및 학문에 관한 크고 작은 사건들을 모아 기록한 것이고, 「당후일기」는 1766년 3월 4일 경연에서 강의한 내용과 왕과 대신들의 대화 등을 담고 있다. 류이좌의 「당후일기」 류이좌(柳台佐, 1763-1837)의 「당후일기(堂后日記)」는 조선 정조 대의 문신인 류이좌가 1799년에 저술한 것이다. 류이좌의 본관은 풍산이며,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후손이다. 경상북도 안동시 하회마을의 풍산 류씨 집안인 화경당(和敬堂), 일명 북촌택(北村宅)에서 소장하고 있던 자료로, 류이좌가 주서로 재직했던 1799년 5월 17일의 정사를 기록한 「당후일기」의 원본이다. 2004년에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되었다. 이진철의 「당후일기(堂后日記)」 이진철(李晋哲, 1591-1664)의 「당후일기(堂后日記)」는 조선 후기의 문신인 이진철이 순조 대에 저술한 것으로, 그의 문집인 『쌍계문집(雙溪文集)』 4권에 전문이 수록되어 있다. 『쌍계문집』에는 이진철이 조정에서 근무할 당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해 후일의 참고가 되게 한 「일사(逸事)」와 승문원과 성균관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기록한 「당후일기」 2종 등이 수록되어 있다. 강원형의 「당후일기」 강원형(姜遠馨, 1862-1914)의 「당후일기(堂後日記)」는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독립운동가인 강원형이 1893년(고종 30)에 저술한 것으로, 강원형의 문집인 『혜사문집(蕙社文集)』 2권에 전문이 수록되어 있다. 강원형이 승정원 가주서로 있을 때인 1893년 2월 22일에서 27일까지의 기록이다. 앞에서 현존하는 당후일기들을 살펴보았지만, 당후일기가 사초의 형태로 남아 있는 경우는 극히 한정되며, 대부분은 개인의 문집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이는 당후일기 담당자가 주서로 있으면서 작성한 초본을 세초하지 않았거나, 세초를 한 경우에도 그대로 그 문건을 남겼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례에서 『승정원일기』의 원본이 되는 당후일기의 세초는 실록의 세초와는 달리 엄격히 지켜지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또한, 주서로 재임한 기간 전체의 일기보다는 일정한 시기에 작성한 일부의 일기가 현재까지 전해짐을 볼 수가 있다. -
섬주민, 공간을 기획하다- 기록자료
- 사회
강회의 저서 『유암총서』에 「운곡선설(雲谷船說)」이라는 논문을 작성했다. 이강회는 「운곡선설」의 저술 동기에 대해 “손암 정약전이 이곳 바닷가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문순득의 구술을 받아 『표해록』을 작성했는데, 이국의 설화와 토산, 풍속과 궁실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한 반면, 선박에 대해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았다. 손암이 갖추지 못한 것을 보충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림 43】 『표해시말』 내표지문순득이 동아시아 표류경험담을 흑산도 유배인 정약전에게 들려주었다. 손암 정약전이 문순득의 구술을 토대로 채록한 내용이 『표해시말』이다. 문순득의 구술을 토대로 채록한 내용이 『표해시말』이다. 문순득이 마을 사람들과 함께 홍어를 구입하러 태사도에 갔다가 해난사고를 당하여 오키나와, 여송, 마카오, 중국을 경유하여 조선으로 돌아온 여정과 각국의 언어, 의상, 풍속 등이 기술되어 있다. 「운곡선설」의 주된 내용은 본론에 수록된 선박건조술 36조목이다. 이는 문순득이 외국 선박의 장점을 제안하고, 이강회가 전통 한선에 대입시켜 비교한 다음 본인의 견해를 서술하는 방식으로 기술되었다. 예컨대 이강회의 선박건조술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항목은 선박의 저판(底板)이다. 이름하여 전통 한선은 평저선이라 부르고, 외국 선박은 첨저선이라 칭한다. 이 점은 전통 한선과 외국 선박의 가장 극명하게 다른 점이다. 즉 한선은 배의 밑 부분이 넓으면서 평편하고, 외국 선박은 좁고 뾰쪽하다. 이에 대해 문순득은 “배의 저판은 대개 1개의 널빤지 위에 3-4조각을 좌우에 부착하여 하단은 좁고, 위로 올라갈수록 가파르고 넓다”라고 외국 선박의 특징이자 장점이라고 제안했다. 또 이강회는 “좁은 저판은 베틀의 묵과 흡사하다. 저판이 좁을수록 파도에 출렁거리지 않고 속도가 빠르다. 마치 달리는 기세가 탄환과 같다”라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자연조건에는 전통 한선의 저판이 넓고 평편할 때 효과적일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서해의 경우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여 물때에 따라 선박의 항해와 정박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썰물일 때 갯벌에 정박하는 선박의 경우 평저선이 유리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문순득의 구술과 이강회의 견해가 옳고 그름을 떠나서 선박의 세부 구조에 대해 장·단점을 제시하여 분석하고 있다는 점이 높이 평가된다. 【그림 44】 전통 한선의 저판, 평저선,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그림 45】 중국의 첨저선, 국립해양유산연구소 소장 19세기 홍어장수 문순득이 아시아 3국을 표류하고 그 체험을 구술했다. 또 흑산도 유배인 정약전과 강진 출신 실학자 이강회가 채록하여 각국의 문화를 비교 검토했다. 특히 뱃사람 문순득이 외국 선박을 관찰한 바를 제안하고, 실학자가 전통 한선의 구조와 비교하여 새로운 선박건조술을 서술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처럼 전근대 표류 연구는 이국 문화에 대한 견문을 넓힐 수 있었다는 점에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면, 21세기의 표류 연구는 동아시아 각국에 전승되고 있는 표류민 기록을 공유하여 연구 영역의 확대가 요구된다. -
조선시대 외국어 공부와 시험- 기록자료
- 정치
울대학교출판부 기획총서 ‘한국의 탐구’의 한 권이다. 제목에서 ‘한국의 역학’이라 했듯이, 조선시대만을 다루지는 않았다. 그 책의 2장(조선시대 이전의 역학)에서는 조선 이전의 역학과 통사(通事)를 다루고 있다. 그런 다음 조선시대의 역학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다. 전체적으로 “이 책에서는 이와 같은 역학의 변천사항과 역학자들의 활약, 그리고 역학자들이 편찬한 역학서의 종류와 이들 역학에서의 자료적 가치를 밝히고, 아울러 이들 역학서를 통해서 연구할 수 있는 해당 언어에 대한 역사적 연구의 가능성과 국어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는 면을 살펴보았다”라고 했다. 저자들의 전공으로 보면 국어학 분야의 연구성과라 할 수 있다. 필자는 후학으로서 차별화를 시도해 두는 것이 좋겠다. 이 책에서는 조선시대의 외국어 공부와 시험에 대해서 필자가 공부해 온 한국사적인 관점에서 다가서고자 한다. 말하자면 역사적인 접근법을 취하려는 것이다. 국어학이나 국어사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기존의 연구성과를 토대로 삼고자 한다. 한편 책 제목에서 ‘외국어교육’을 사용한 정광(2014)의 경우, 535쪽에 이르는 방대한 저작이다. 내용과 깊이를 다 갖추었다. “세계 언어학계가 인정하고 경의를 표하는”(표지 뒷날개) 저자는 30여 년 동안 조선시대 역학과 역학서 분야를 연구해왔을 뿐 아니라 새로운 자료의 발굴과 소개 작업을 진행해왔다. 그 분야에 관심을 가지는 경우 저자의 많은 저서와 논문을 빠뜨릴 수가 없다. 필자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 연구성과를 필자의 출발점으로 삼고자 한다. 그에 의하면 조선 사역원의 외국어 교육이 얼마나 우수했는지를 살피면서 이 책의 결론을 대신 한다고 하면서, 사역원의 외국어 교육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으로 요약하고 있다. 언어의 조기교육, 집중적인 반복교육, 생생한 구어(口語)를 교육한 것, 언어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 외국어 교육이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는 것, 사역원과 같은 조선시대 외국어 교육제도와 교육기관이 한 번도 중단되지 않고 700년간 계속되었다는 것을 환기하고 싶다고 했다. 이어 이렇게 결론짓고 있다. “세계 역사에서 이처럼 외국어 교육기관을 전문적으로 설치해 중단 없이 이어온 민족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또 이처럼 당시의 외국어 교육은 오늘날의 교육제도와 교육방법에 비추어도 전혀 손색이 없을 만큼 훌륭했다.” 오랜 기간의 연찬 끝에 지적한 이런 측면들은 자랑스러워해야 할 유산이 분명하며, 필자 역시 동의하고 있다. 하지만 천려일실(千慮一失)이라 해야 할까, 아주 사소한 것이지만 수정되어야 할 부분도 없지는 않다. 단적으로 조선시대 사역원은 1393년(태조 2) 9월 설치되었다가 갑오경장(1894)과 더불어 그 책무를 다하고 역사 속으로 들어갔다. 햇수로 따지자면 501년 정도가 된다. 고려시대에 통문관(通文館)이 설치되었다가(1276, 충렬왕 2) 사역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아마도 그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포함했다고 여겨진다. 설령 관서 이름이 같을지라도 고려와 조선은 완전히 다른 왕조 체제이므로 응당 구분해야 할 것이다. 보다 근본적인 논점을 제시해 보자면, 이는 앞에서 언급한 연구성과 모두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시기적으로 검토의 하한선이 1894년 갑오경장 이전의 사역원 및 4학[한어, 몽어, 왜어, 여진어(청어)] 시스템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이미 아는 바와 같이 1876년(고종 13) 강화도조약의 체결과 더불어 조선은 조약체결을 근간으로 하는 ‘근대 세계시스템’(혹은 ‘만국공법(萬國公法)’ 체제)에 편입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종래의 ‘동아시아 세계질서’(혹은 ‘사대(事大) 질서’ 체제) 속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1882년(고종 19) 미국, 1883년(고종 20) 영국과 독일, 1884년(고종 21) 러시아와 이탈리아, 1886년(고종 23) 프랑스, 1892년(고종 29)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과 수호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이다. 그 같은 새로운 국제관계 형성 과정에서, 사역원과 외국어 시스템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 단적인 예로 1883년(고종 20) 미국으로 간 보빙사(報聘使) 사절단에는 중국인과 일본인 통역이 한 사람씩 따라갔다. 지극히 상징적인 장면이다(5. ‘사역원 체제’에서 ‘관립외국어학교 체제’로 참조). 다시 말해서 조선어와 영어 사이에 직접적인 통역이 아니라 조선어에서 중국어나 일본어로 통역한 것을, 다시 영어로 통역해 주고, 거꾸로 영어를 중국어나 일본어로 통역하고, 그것을 다시 조선어로 통역해 주는 이른바 ‘이중통역’(二重通譯) 혹은 ‘중역’(重譯) 과정이 그사이에 끼었다. 기존의 한어(중국어)와 왜어(일본어)가 나름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영어를 비롯한 서양 각국의 언어들과 직접 소통하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로 인해서 새로운 외국어에 눈뜰 수밖에 없었고, 더불어 새로운 교육 역시 모색되었다. 영어 교육을 위한 동문학(同文學)이나 육영공원(育英公院)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다 마침내 1895년(고종 32) 5월 10일 ‘외국어학교관제’(칙령 제88호)가 반포되었으며, 비로소 외국어 교육에 대한 법적인 근거가 마련된다. 그리고 6개 외국어를 가르치는 ‘관립외국어학교’가 등장하게 되었다. 6개 외국어는 영어, 한어, 일어, 법어(法語, 프랑스어), 덕어(德語, 독일어), 아어(俄語, 러시아어)이다(몽어와 청어는 중요 외국어에서 빠졌다). 흔히 ‘개항기’ 내지 ‘개화기’로 불리는 시대의 새로운 외국어와 교육에 대해서는 한국근대사, 교육학, 각국의 외국어 교육 분야에서 상당한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이광숙의『개화기의 외국어교육』(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14)은 그 대표적인 한 예라 할 수 있는데, 1883년부터 1911년까지 이루어진 외국어교육의 전반적인 실태를 조사, 검토하고 있다. 외국어별로 이루어진 연구 성과의 내역은 다루지 않기로 한다(이 책의 〈참고문헌〉 참조). 그 같은 변화 과정에 대해서 필자는 ‘사역원의 4학 체제’에서 ‘관립외국어학교의 6개 외국어체제’로 이행한 것으로 파악했으며, 그들 사이에 사역원과 신식 외국어교육기관이 병존하는 과도기 내지 공존기(1883~1894)를 설정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조선시대의 외국어 교육과 학습에 대해서 총체적으로 관심을 갖는다면, 사역원 체제뿐 아니라 관립외국어학교와 새로운 외국어들 역시 중요한 한 부분으로 같이 다루어야 할 것이다. 필자가 이 책에서 지향하는 바는 바로 그 같은 거시적인 흐름과 변화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하에서는 먼저 분석적 이해를 돕기 위해서 외국어와 역학에 대해서 개념적으로 접근할 것이다. 그런 다음 조선 5백여 년 동안 지속된 사역원과 4학 체제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이어 19세기 중엽 이후 국제관계의 변모와 새로운 외국어의 등장, 그리고 관립외국어학교의 6개 외국어 체제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설정한 조선시대는 1392년 조선 개국에서 시작해서 1910년 한일합병에 이르는 긴 시기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맺음말에서는 조선에서의 외국어의 거시적인 흐름과 변화의 특성을 요약, 정리할 것이며, 그에 앞서 ‘외국어와 통사’와 관련해서 다소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모아 놓은 장도 마련해 보았다(6장). 큰 흐름에서 빠지기 쉬운 개별 사항 혹은 역관 인물에 관한 이야기 편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런 시도는 말하자면 『사기』의 ‘열전’ 부분이나 『통문관지』의 ‘인물편’을 모델로 삼은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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