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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해사일기 에 대한 총서 검색 결과 전체8건
  • 조선 후기 통신사, 일본을 오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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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엄, 『해사일기』 현재는 비와호를 관망하였던 망호루가 소실되어 당시의 풍광을 느끼기는 힘들지만, 통신사의 사행록을 통해 그려 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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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엄, 『해사일기』 배를 잇대어 만든 다리로 강을 건너고 오가키에서 나고야로 이르는 길에 통신사들은 3-4개의 다리를 건너야 했다. 하지만 이 다리는 이미 만들어져 있던 다리가 아니라 ‘주교(舟橋)’라고 하는 배로 만든 다리였다. 신유한은 『해유록』에서 은고(殷股), 사카이가와강(界川, 境川), 고시카와강(越川)를, 조엄은 사도가와강(洲川), 사카이가와강, 고시카와강을 건널 때마다 배다리를 이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림 29】 이성린, 《사로승구도》 〈월천주교(越川舟橋)〉(1748년 5월 7일), 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에서 전재 배다리는 배들을 줄지어 이어서 그 위에 판자를 깔아 만든 다리이다. 판자의 양쪽은 철사 등으로 묶어서 배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였는데, 이렇게 이어진 배들은 300여 척에 이르렀다고 한다. 배다리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이 잘 남아 있다. 모두 물 위에 배를 가로놓고 큰 줄과 쇠사슬(鐵鎖)로 좌우에 얽어매었고, 그 위에 판자를 깔고 양쪽 머리에는 각각 아름드리나무를 세워서 매었다. 이런 곳이 세 곳이었는데 기소가와가 가장 커서 배 3백 척을 연결하여 길이가 천여 보(800m 정도)이니, 공력과 비용을 상상할 만하다. ―신유한, 『해유록』 동쪽으로 가서 좌도천(佐渡川)에 이르니, 내의 너비가 한 마장 남짓하다. 작은 배 70여 척으로 내를 가로질러 부교를 만들고, 위에 두꺼운 널빤지를 깔았는데 틈 벌어진 곳이 하나도 없다. 양가에는 쇠사슬을 붙이고 굵기가 다리만 한 밧줄을 꿰고 또 팔뚝만 한 철사로 덧누르고, 이쪽저쪽의 양 언덕에 각각 아름드리나무 기둥을 세우고 고패(높은 곳에 기나 물건을 달아 올리고 내리기 위한 줄을 걸치는 작은 바퀴나 고리)를 설치하여 철사와 밧줄을 당겨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게 하였다. 선미(船尾)마다 지키는 자 한 사람과 물통 하나가 있으니, 그 시설이 튼튼하고 물력이 큰 것은 이를 미루어서 알 만하다. 묵후천(墨俣川)에 이르니, 역시 배 위에 다리를 놓았는데 한 마장(약 393m)이 넘는다. 또 작은 내가 있어 이것이 계농, 미장 두 고을의 경계인데, 다리의 만듦새는 묵후천과 같다. 10리쯤 가니, 또 월천(越川)이라는 큰 내가 있는데, 좌도천에 비하여 너비가 세 곱이며, 이은 배의 수가 2백 80여 척이나 된다. 이것이 육로에서 으뜸가는 장관이다. ―조명채, 『봉사일본시문견록』 배다리의 제도는 배를 잇대어 판자를 깐 다음, 양쪽을 새끼와 철사, 또는 포도등(葡萄藤)으로 매고, 또 닻줄을 두 줄로 하여 배다리를 묶어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아무리 큰물이 인다 하여도 갑자기 부서지지 않을 듯했으니 어제 중수하였다는 말은 믿을 수가 없다. 제1, 제2 배다리는 배를 맨 것이 백여 척에 불과했는데, 제3 배다리는 거의 3백 척이 넘었으며, 두 배를 서로 이은 사이에 또한 배 한두 척을 더 수용하겠으니, 이로써 계산을 한다면 천 보에 가까운 배다리라고 하겠다. ―조엄, 『해사일기』 이렇게 장관은 연출하는 배다리는 2년에 걸쳐 공사를 했다고 한다. 원래는 막부의 쇼군만이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다리였는데, 이 다리를 만들고 이용하는 것이 통신사에게만 추가적으로 허락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시간과 노동력, 정성을 들여 만든 배다리는 통신사행이 돌아가고 나면 바로 철거했다고 한다. 지방 다이묘들이 쉽게 강을 건널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한편으로는 통신사행이 있을 때마다 만들어지는 배다리의 장관을 보기 위해 일본인들도 몰려들었다. 신유한은 ‘양쪽 언덕에서 관광하는 남녀는 나니와강(浪華江)과 같았는데, 가마를 타고 발을 드리우고 온 자는 귀족 부녀들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강홍중은 ‘귀한 집 부녀들이 가마를 타고 양쪽에 줄지어 있으니 참으로 장관이었다. 역관 등이 왜인에게 물으니 모두 미카와(三河), 미노(美濃), 오와리(尾張) 등 먼 지방 사람들인데, 관광하기 위하여 며칠 전부터 와서 머물렀다고 한다’라며 일본인 구경꾼들의 모습을 기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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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엄, 『해사일기』 이 인부들은 위 그림에서 오른쪽 하단에 보이는 우리 같은 곳에 갇혀서 이동해 왔다가 이 일이 끝나면 다시 이동하는 임시 인부인 것 같다. 조명채도 ‘울타리 안에 인부들을 가두어 놓았다가’라고 하였고, 조엄도 ‘내를 건네주는 군사를 울타리 속에 가두어 대기시켰다’라고 하였다. 어떻게 동원된 인부들인지, 인부들이 도주할 수 없도록 울타리를 설치한 것인지 그 내막은 알 수 없으나, 한겨울에도 동원되었다고 하니 통신사의 이동을 위해 고초를 겪었을 상황이 짐작된다.
  • 조선 후기 통신사, 일본을 오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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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影 ―조엄, 『해사일기』, 「수창록」 하코네 고개에서 아래로 조금 내려오면 만나게 되는 화산호인 하코네 호수 또한 그 기이한 분위기로 인해 문필가들의 시상을 자극하였다. 신유한은 호수의 물결이 밀려왔다가 밀려오는 것, 물이 바다처럼 줄었다가 늘어나는 것이 신기한데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구룡택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하코네 호수는 전설에 의하면, ‘아홉 개의 머리를 가진 신룡(神龍)이 물속에 있어서 사람이 혹 그 앞에 가까이 가면 문득 잡아먹힌다’라고 하는 말을 전하며 기이함을 더 자극하기도 했다. 상근호(箱根湖) 무더운 땅 기운 솟아나 샘이 되었으니, / 薰蒸志氣湧爲泉 깎아지른 산마루에 깊은 못 있음을 괴이하게 여기지 마오. / 無怪深淵在絶嶺 봉우리는 부용인 양 참하게 물에 젖었고, / 峯近芙蓉純浸水 비늘을 감춘 용은 혹시 하늘로 올랐는가. / 龍藏鱗甲或升天 비파호 사백 형상은 감(坎)으로 나뉘었고, / 琶湖四百形分坎 상역 삼 천 이익은 전지에 미쳤다네. / 桑掝三千利及田 우리나라 백두산 마루에도 큰 못 있으니, / 東土白頭山有澤 남피에서 어느 해 바다를 건넜던고. / 南皮渡海問何年 ―조엄, 『해사일기』, 「수창록」 상근호(箱根湖) 상근산 가운데가 꺾여 호수를 이루었으니, / 箱根中折作平湖 십 리나 되는 맑은 물, 넓은 언덕 둘렀구나. / 十里泓澄闊岸紆 거꾸로 선 부상의 그림자, 끊어진 돌을 봉했고, / 倒影扶桑封斷石 은하수 근원 나눠 넓은 저수지를 만들었구나. / 分源河漢建洪樞 노는 사람들 감히 여기서 물고기 새우 잡지 못하고, / 遊人不敢魚蝦掇 음지의 짐승들은 굴집에서 죽음을 맞이하네. / 陰獸由來窟宅殊 어찌하면 요리(要離)가 척검을 던지게 하여, / 安得要離提尺劒 잠깐 사이에 푸른 물결을 피로 물들이겠는가? / 碧波爲血在須臾 ―조경, 『동사록』 에도에서의 의례가 끝나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는 귀로에서도 하코네 고개는 여전히 신비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냈다. 그 풍경의 변화를 보며 비가 오던 날이 맑아지고, 여름이었던 계절이 가을이 되고, 다시 조선 땅, 부산포로 돌아가게 될 희망과 기대가 아래의 조경이 쓴 시에 담겨 있다. 거듭 상근령을 지나며 올 때는 상근에 비가 오더니, / 來時箱根雨 갈 때엔 상근에 날이 개었네. / 去時箱根晴 올 때는 한여름이 덥더니, / 來時朱夏熱 갈 때엔 가을이 서늘하네. / 去時素秋淸 묻노니, 누역·삿갓 쓴 것이, / 借問帶蓑笠 맨몸으로 감과 어떠하냐? / 何如乾淨行 묻노니, 무더운 장독이, / 借問炎瘴毒 해맑은 하늘과 어떠하냐? / 何如天宇晶 하물며 나 예순 살 늙은이가, / 況我六十翁 죽지 않고 돌아가는 길 밟는구나. / 不死踏歸程 복명을 기약할 수 있겠고, / 復命可指期 어버이도 아울러 뵐 수 있겠네. / 寧親亦可幷 어젯밤에 북당을 꿈꾸니, / 昨宵夢北堂 원추리가 예전대로 우거져 있네. / 萱草依舊榮 험난함을 조금만 참아 낸다면, / 險難宜少忍 창해에 물결도 잔잔해지리. / 滄海浪亦平 쏜살같이 배가 가니, / 雲帆疾如箭 부산포가 벌써 눈 속에 환해지네. / 釜浦眼中明 ―조경, 『동사록』
  • 조선 후기 통신사, 일본을 오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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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엄, 『해사일기』 한편 이상의 사행록에는 나오지 않지만 1655년의 통신사 종사관이었던 남용익이 시를 남긴 후, 1711년, 그의 서자인 남성중이 통신사 서기로 세이켄지를 방문했을 때 아버지의 시를 차운하여 시를 남기기도 했다. 부자간에 통신사 사행원으로 활동하여 차례로 글을 남기고, 사행원들이 차례로 글을 이어가는 모습은 세이켄지의 풍광이 선사한 선물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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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엄, 『해사일기』 앞의 그림은 1811년(순조 11), 통신선이 조선으로 돌아가기 전 쓰시마섬에서 예인선과 호송선을 갖추어 뱃길을 인도하는 모습이다. 비단 귀로뿐 아니라 통신사선이 포구에 도착했을 때, 다른 포구로 이동할 때, 암초 지대를 알려줄 때도 쓰시마섬 예인선과 안내선이 동원되곤 했다. 종착지인 후추 앞바다에 통신사선이 이르면 도주와 이테이안(以酊菴)의 장로승이 채색선을 타고 나와 통신사선을 맞이했다. 배에서 서로 맞이할 때에는 읍례를 행하는데 도주와 장로가 두 번 읍례를 하면 통신 정사·부사·종사관도 두 번 읍례로 답하였다. 후추는 현재의 이즈하라에 있다. 15세기 후반에 대마도주 소 사다쿠니(宗貞國)가 자신의 본거지를 사카에서 이곳으로 옮기면서부터 중심지가 되었다. 통신사들은 후추에 대해 ‘사람이 많은 도회지’, ‘고기잡이하는 배가 줄지어 있는 어업 도시’, ‘상선이 드나드는 중개무역 도시’로 기록하고 있다. 통신사들이 후추에 발을 내딛으면 본격적인 사신 업무가 그들을 기다렸다. 업무를 행하기 전 사신들은 후추에 마련된 숙소로 안내되어 대기하며 일상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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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서 조엄이 쓴 『해사일기』에는 이키섬의 선창에 대한 설명이 자세한데, ‘우리 배가 와서 배를 댄 곳은 물이 얕았으므로 이키섬에서는 작은 배들을 가로로 배치하고 죽교(竹橋)를 30여 보나 길게 설치하였는데, 이곳 사람들이 밤낮으로 지켜서 밝은 등불이 떠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신유한도 『해유록』에서 ‘포구에 물이 얕아 배가 들어갈 수 없으므로 배를 이어서 육지같이 만든 것이 수십 척인데, 그 위에 판자를 깔고 좌우에 대나무로 난간을 만들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성린의 《사로승구도》 중 〈일기도풍본포〉(【그림 10】)에도 배들로 줄지어 만든 선창이 잘 나타나 있다. 물이 얕은 포구에서 통신사선을 맞이하기 위해 정성으로 준비한 이키섬 지역의 노력이 엿보이는 모습이다. 좁은 섬이라 해도 이키섬에서 통신사들에게 마련해 준 객사와 베풀어 준 접대는 결코 빈약하지 않았다. 통신사들이 조선으로 돌아가면 모두 다 허물어 버릴 객사였지만 100여 칸이나 되는 건물을 정교하게 만들었고, 방마다 목욕하는 곳, 세수하는 곳, 차를 끓이는 곳과 화장실을 마련하여 불편함이 없도록 만전을 기하였다. 이곳에서 통신사들은 별미로 스기야키(杉焼, 삼자(杉煮), 승기악(勝妓樂))도 맛보았다. 왜관에서도 일본인들에게 대접을 받고는 했던 음식인데, 삼나무로 만든 통에 생선과 나물, 해조류 등을 섞고 일본식 된장인 미소를 풀어 끓인 탕이었다. 그 맛에 대해서는 ‘기악(妓樂)을 이긴다’는 뜻의 ‘승기악(勝妓樂)이라는 조선식 명칭에서도 볼 수 있듯이 통신사들 대부분이 흡족해하였다. 조엄은 이키섬의 전통놀이인 ‘고래잡이 놀이(捉鯨戱)’를 구경하기도 했다. 이 놀이는 작은 배 수십 척이 마치 고래를 뒤쫓아가는 모습으로 빙 둘러싸고 나아가는데, 나는 듯이 빨리 노를 저으며 일본어로 구령을 붙였다. 정말 고래를 잡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조엄은 당시 이들이 노를 젓는 속도, 쏜살같이 나아가는 배의 속도에 감탄을 하기도 했다.
  • 조선 후기 통신사, 일본을 오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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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
    도였다. 조엄도 『해사일기』에서 관사의 뒷산에 올라 소풍하면서 저녁노을이 산으로 돌아가고 거울처럼 맑은 바닷물이 자아내는 경치에 반해 화사(畫師)에게 그림을 그리게까지 할 정도였다. 신유한은 아이노섬에서 본 일본인들의 무덤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대나무 울타리와 꽃밭을 둘러보고 해변으로 내려간 그는 돌을 포개어 쌓고 목판으로 표지를 세운 일본인 무덤을 발견하였다. 일본인들, 특히 서민들의 무덤은 흙을 쌓아 봉분을 만들지 않고, 산에 묫자리를 쓰지도 않았다. 대부분 물 아래나 길가에 돌을 쌓아서 시신을 매장하는데, 목판을 세워 표식으로 삼았다. 반면 어느 정도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구덩이를 만들고 돌을 깎아서 관을 짜 그 속에 넣고 깎은 돌로 덮어 매장했다. 그리고 비석을 세우고 사방에 난간을 설치하여 일반인들의 출입을 막았다고 한다. 한편 밤의 아이노섬은 환한 등불들로 화려한 야경을 선사하였다. 캄캄한 밤이 되면, 배에 등불을 켜고 바다를 밝혀 물빛과 등불의 빛이 찬란하게 빛나는데, 조선에서 하는 광릉(廣陵)의 4월 초파일 관등놀이도 소소한 장난에 불과할 것이라고까지 할 정도였다. 통신사들은 아이노섬에서도 깨끗하고 화려한 객관에서 풍성한 음식을 비롯하여 융숭한 접대를 받았다. 조명채는 ‘국서를 받들고 관소로 들어갔는데, 모든 제구(諸具)의 정교하고 사치스럽기가 일기도(壹岐島)와 마찬가지이다’라 하였지만, 대부분의 사행원들은 하나같이 이키섬보다 몇 배나 낫다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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