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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교육과 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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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의 정읍례 홀기에 규정된 정읍례의 절차를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먼저, 정읍례를 행하기 전에 당일 모인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하여 동서 두 대열로 나누고 대열 별로 당장(堂長), 부당장(副堂長), 조사(曹司)를 선출한다. ○ 다음으로 집례(執禮)가 동서창(東西唱)을 인도하여 먼저 명륜당 뜰 안으로 들어가 선생에게 인사한다. ○ 그 뒤, 당장이 각 대열을 이끌고 뜰 안으로 입장하고, 동서조사가 부당장에게 읍하면 부당장이 답례한다. ○ 다음으로 동편 부당장이 선생에게 거안을 올리면 동서대열이 선생에게 인사한다. ○ 다시, 동서 대열이 모두 돌아 서로 마주 보고 서면, 동서조사가 부당장 앞에 나아가 서립(序立)하였음을 고하고 부당장은 답례한다. ○ 다음으로 제생끼리 상읍례를 행하고, 집례와 동서창도 뜰 중앙에 이르러 마주 보고 상읍한 뒤 퇴장함으로써 모든 절차가 마무리된다. 거재 기간 중 유생의 하루 일과는 대개 〈기상-식전 독서-상읍례-조식-경독-알묘-개별독서-통독 혹은 강회-제술-귀가 전 개별독서에 대한 평가-종강 시 수창시/향사례, 향음주례〉’의 순서로 이루어졌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 빗고 의관을 갖추고 단정하게 앉아 책을 읽다가 북소리가 세 번 울리면 건복(巾服) 차림으로 강당에 올라 상읍례를 행하였다. 상읍례 후 차례대로 앉아 식사를 마치면, 「백록동규」, 「이산원규」, 「은병정사학규」 등 서원의 교육 목표와 방향을 제시한 짤막한 글을 경독하였다. 【그림 33】 「필암서원 상읍례도」,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경독이 끝나면 사당에 알묘한 뒤 각자 거처하는 기숙사로 돌아가 개별 독서를 하였다. 이 때 개별 독서의 교재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각자의 학문 수준과 연령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개별 독서에 대한 평가는 보통 거재, 강회, 통독을 마치는 파재일에 시행하거나 윤번거재의 경우 귀가일에 시행하였고, 한 사람이 수개월간 거재하는 경우에는 1개월에 한 차례씩 시행하기도 하였다. 평가 등급은 보통 ‘우수[通]-약간 부족하지만 통과[略]-부족[粗]-불합격[不 혹은 不通]’의 4등급으로 구별되었다. 평가에서 합격의 기준은 서원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었는데 보통 ‘조’ 혹은 ‘약’ 이상이면 통과시켰다. 평가 결과는 ‘고강단자’라고 불리는 문서에 별도로 기록하기도 하고, 강회와 통독에서 주고받은 토론과 문답내용을 기록하는 강회록에 개별 독서에 대한 평가 기록을 함께 남기기도 하였다. 평가에서 통과하지 못한 경우에는 다음 달 혹은 다음 강학이 개설될 때 충분히 복습하여 다시 평가하고 반드시 통과한 뒤에 다음 진도를 나가도록 하였다. 평가 방식에서도 학습 능력과 암송 능력이 충분한 나이 어린 유생들에게는 교재를 보지 않고 암송[背誦]하게 하고, 나이 많은 학습자에게는 교재를 보고 강독[臨講]하게 함으로써 역시 획일적인 평가가 아닌, 연령과 개인차를 고려한 평가가 이루어졌다. 【그림 34】 「고강단자」, ⓒ 전북대학교 박물관개별 독서에 대한 평가 기록 위 문서는 개별 독서에 대한 세 차례의 평가 기록을 한 번에 기록한 고강단자이다. 그중 소학과 맹자를 강독한 두 명의 유생은 세 차례의 평가에서 모두 ‘불합격[不]’을 받고 있다. 따라서 이 둘은 다음 강회 때 다음 장의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이전에 공부한 부분을 다시 복습해야 했을 것이다. 개별 독서 후 정해진 시간이 되면 연령과 학문 수준이 각기 다른 유생들이 강당에 모두 모여 책 한 권을 정해 다함께 강독, 심층적으로 토론하는 통독 혹은 강회가 이루어졌다. 통독 혹은 강회는 ‘도학의 탐구와 실천’, ‘호혜적 배움의 실현’이라는 서원교육의 이념을 실천하는 중요한 방법적 장치로 서원의 여러 교육 활동 중에서도 가장 중시된 활동이었다. 강회와 통독은 서원교육 이념을 구현하는 방법적 장치인 동시에 내용적으로는 조선 성리학의 다양한 학파 탄생 및 계승, 분화, 발전에 기여한 중요한 매개체로 작용하였다. 조선 후기 남인계 서원에서 주요 통독 교재로 활용한 퇴계의 『주자서절요』, 서인계 서원에서 활용한 율곡의 『성학집요』, 우암의 『기축봉사(己丑封事)』를 통독한 화서학파의 강회 등은 강회와 통독이 자파의 학설을 계승하는 중요한 장치로 활용되었음을 보여 준다. 한편, 통독이나 강회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인 일 중 하나는 바로 유능한 스승을 초빙하는 일이었다. 강회의 수준은 스승의 학문적인 능력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이에 실력과 덕망을 고루 갖춘 영향력 있는 인물이 강회를 개최할 때면 전국 각지에서 문인들이 몰려들어 스승의 학문을 배우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이를 계승, 전파하였다. 그 결과 서원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다양한 문인집단과 학파 탄생의 근거지가 될 수 있었다. 강회나 거재의 마지막 날에는 향사례와 향음주례를 시행하기도 하였다. 죽림서원의 경우에는 ‘거재를 파하는 날에 향사례와 향음주례를 행하여 젊은이들과 나이 어린 유생들로 하여금 고례(古禮)를 익히도록 해야 한다’고 하여 아예 파재 시의 절차에 향음주례를 공식적으로 규정하기도 하였다. 또 19세기 소수서원에서도 강회 마지막 날에 향음주례를 시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향사례와 향음주례는 본래 선진(先秦) 시기부터 고대 학교에서 시행된 의례들이다. 죽림서원 절목에서 이른바 ‘고례’란 바로 이것을 뜻한다. 다산 정약용은 ‘옛날의 이른바 학교는 예를 익히고 악을 익히는 곳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예도 무너지고 악도 무너져서 학교의 교육은 독서에 그치고 있을 뿐이다’라고 예악을 상실한 당시 학교 교육을 비판하며 예악의 기능을 회복할 방안을 제시한 바 있다. 즉, 독서와 함께 예악을 익히는 것은 본래 학교 교육의 핵심을 이루는 두 축이었고, 고대 학교에서 향사례와 향음주례 등의 의례를 시행한 것은 예악을 가르치는 전형적인 하나의 방법이었다. 소수서원에서 격식을 갖춘 정읍례의 절차를 홀기에 엄격히 규정하고, 석실서원에서 강회에 수반되는 까다로운 의식 절차를 강회의절에 상세히 규정하며, 죽림서원절목에서 향사례와 향음주례를 강회의 한 절차로 공식화한 것은 모두 독서나 문자를 매개로 한 지식의 전수뿐 아니라 도의(道義)를 중시하고 예양(禮讓)을 숭상하는 법을 배워 유자로서의 예를 익히고 실천하는 ‘교이예악(敎以禮樂)’의 실천에 서원교육의 또 다른 목적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마지막으로 거재의 전 과정을 파하는 파재일의 마지막 절차는 언제나 ‘수창시’ 짓기로 마무리되었다. 원장이나 원임이 운자를 내면 유생들이 거재 중 강학하면서 느낀 소회 및 배움의 성과, 학문적 뜻과 포부 등을 담아 다함께 돌아가며 수창시를 짓고 이를 반드시 기록에 남겼다. 조선 서원은 보통 제향 공간과 강학 공간을 중심으로 크게 ‘의례와 교육’의 두 가지 기능을 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상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서원 강학 절차 내부에서도 문자를 매개로 한 지식의 전수뿐 아니라 다단한 의례들이 긴밀하게 통합된 채로 이루어졌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경독, 정읍례, 상읍례, 통독, 강회, 수창시, 향사례, 향음주례와 같은 강학 의례는 서원 강학의 목적이 단지 문자 지식의 전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 지식과 덕성, 나와 타자 등의 관계를 훈련하는 전인적 교육에 목적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이는 제향 의례와는 그 성격이 다르지만, 서원교육이 추구했던 ‘관계의 교육학’의 이상을 실현하는 과정이자 중요한 매개체로 작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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