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해 에 대한 총서 검색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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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양반, 가정을 경영하다 -18세기 대구 최흥원의 가사활동을 중심으로-
- 기록자료
- 경제
포함하여 성주, 흥해, 연일, 영일, 의성 등지였다. 노비들은 빈번하게 도망을 갔다. 주로 인동 할아버지, 막내아우, 아당이 도망간 노비를 잡아 왔다. 1741년에 막내아우와 인동 할아버지가 여러 계집종을 추쇄했고, 신공 열 몇 냥을 거두어 왔다. 오랜만에 신공을 잘 받아와서 최흥원은 흡족했다. 밀양으로 종을 잡으러 갔던 인동 할아버지가 돌아와 말하기를, 도망간 계집종을 찾았으나 잡아 오는 대신, 신공 5냥만 받았다고 했다. 인동 할아버지가 아당을 데리고 군위, 의성, 비안 등지로 갔다가 군위 어로곡에 가서 계집종 명금을 잡아서 돌아오고, 의성 빙산에 사는 계집종 필춘에게는 공물로 소 1마리를 받았다. 계집종 엽덕의 딸 홤진을 추쇄하기 위하여 막내아우와 인동 할아버지를 경주로 보냈는데, 거기서 홤진을 잡았고 계집종 여러 명도 추쇄했으며 신공도 열 몇 냥을 거두어서 최흥원은 매우 흡족했다. 1741년에 의진의 딸 명옥이 도망갔다. 인동 할아버지를 하양에 보냈다. 1742년 1월에 명옥을 잡아 와서 심하게 매질했는데, 장독으로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죄는 괘씸하지만 죽게 만든 것은 지나친 처사여서 최흥원은 종들에게 죄를 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4년 뒤 명옥은 그의 딸과 함께 다시 도망갔다. 최흥원은 이들의 행동에 특별한 미련은 없었다. 다만 안주인이 없어 계집종들이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 걱정되었다. 최흥원은 명옥을 잡아 오기 위해 이번에는 인동 할아버지를 밀양으로 보냈다. 명옥이 거기에 사는 것을 확인했으나, 잡아 오지는 않고 신공 5냥만 가져왔다. 12월 2일에는 아당이 계집종 의춘을 잡아 왔다고 했다. 명옥 사건도 있어 의춘에게는 벌을 대충 주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속량을 요구하는 노비들도 있었다. 부노 계달은 자신의 딸을 속량시켜 달라고 요구했으나, 제사 지내는 데 배정된 종이라서 최흥원은 허락하지 않았다. 노비는 농사와 집안일에 필요했지만, 일을 열심히 하지 않거나, 도망을 가거나, 신공을 제대로 바치지 않아 관리가 쉽지 않았다. 소작인이나 노비 가운데는 신공 이외의 물건을 바치기도 했다. 1739년 6월 25일에 최흥원의 토지가 있는 해안의 군창과 학이 두 사람이 각각 숭어 몇 마리씩을 가져왔다. 같은 해 8월 1일과 3일에 두석이 숭어를 가지고 와서 어머니의 찬거리를 도와주었으니, 최흥원은 그 뜻에 사랑스러운 감정을 느꼈으며, 이를 일기에 적었다. 8월 2일에는 북산의 종 태공이 당귀 몇 뿌리를 캐어 바쳤는데, 최흥원은 이를 땅에 묻어 두었다가 봄이 오면 심어서 키우고 싶어했다. 최흥원은 종 몇 명을 관아 근처에 파견하여 여러 가지 정보를 파악하거나 관아와 최흥원 집 사이의 연락을 담당하도록 했다. 일기에는 이들을 ‘부노(府奴)’로 적었다. 옻골과 대구부 관아와의 거리는 13km 정도 된다. 부노들은 최흥원에게 수시로 물건을 바쳤다. 책력과 부채 등 관아에서 최흥원에게 주는 것을 받아 전달해 주는 역할을 했다. 부노 하징이 겨울에는 책력을 바쳤고, 여름에는 부채를 바쳤다. 최흥원이 인발을 부노에게 보내어 흰 부채 두 자루를 받아오게도 했다. 부노가 보낸 부채가 그럴듯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익영이 부채 16자루를 바쳤으나 품질이 형편없어서 미운 마음이 생겼다. 옻골 주변에는 동화사, 부인사, 은해사, 파계사 등의 사찰이 있는데, 여기에 소속된 중들도 수시로 최흥원에게 물건을 바쳤다. 관순이 흰 종이 17묶음을 바쳤고, 재생 종이 6권을 바치기도 했다. 최흥원은 부인사에 닥나무껍질 109근을 보냈다. 절에서 종이를 만들거나 책을 간행했기 때문이다. 중들은 붓, 먹, 쑥, 삿갓 모자, 초롱[燭籠] 등을 주거나, 산살구를 바치기도 했다. 은해사 중이 제철 채소를 주었고, 동화사에서 강활(羌活)과 후추를 보내기도 했다. 한번은 중 순해가 꿩을 바친 적이 있었다. 최흥원이 “중으로서 꿩을 바치는 것이 옳은가?”라고 하니, 순해가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이것도 산에서 나는 물건입니다”라고 하기에 웃으면서 받았다. 여러 아우 집에서 벼를 거두어 11말을 모아 두었는데, 순해에게 실어 가도록 했다. -
서원교육과 과거
- 기록자료
- 정치
과 노비로 풍기, 흥해, 진주, 산음, 거창의 관속과 속공 노비 10여 구를 서원에 소속시켰다. 또 예천·산음·동래·함안·진보 등에서 압수한 의복, 면목, 그릇 등의 도적 장물을 수송하여 서원지기와 노비에게 분급하였다. 그 밖에 거접 유생들의 기숙사와 전사청, 제기고, 행랑, 차양 등의 건물도 추가로 조성하였다. 이처럼, 경상도 전역의 전폭적 지원하에 1546년 5월 무렵 거접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5월 21일 경상감사 안현은 상주훈도와 협의하여 사문입의의 규정에 따라 10명에 준하는 유생을 불러 거접시키도록 서원에 명하고, 우선 영천에 공문을 보내 쌀을 제공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유생의 규모를 파악하여 필요한 물자를 다른 고을에 추가로 분정하기 위해 거접에 온 유생이 몇 명이나 되는지 감영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6월 12일에는 유생 10여 명이 와서 거접을 시작하였는데 공궤 물자가 부족하여 안동, 의흥, 의성 등 9개 고을에 백미, 콩, 등유 등을 보내도록 조치하였다. 그 결과, 1547년 2월에는 ‘서원에 상시 공궤하는 유생을 10명으로 정하였지만 원근에서 소문을 듣고 온 이름 있는 유생이 수십 명에 이르러 공궤할 식염을 마련할 길이 없다’고 할 정도로 거접이 성황을 이루었다. 당시 거접의 구체적인 운영상을 좀 더 상세히 살펴보자. 사문입의 제정 직후 관찰사 안현은 ‘시간을 정하여 제과(製科)하는 것을 서원의 관례로 삼도록’ 하였다. 즉, 16세기 거접은 과거 대비를 목적으로 과거시험 과목 중 제술 훈련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시·부·의·의·책(詩·賦·疑·義·策)’ 등 과거 문체로 시험문제를 출제하고, 유생들이 정해진 시간 안에 답안을 작성하여 제출하면, 이를 채점하여 성적을 매기고 석차에 따라 시상을 베푸는 방식으로 거접이 시행되었다. 이때 시험문제의 출제와 채점은 주로 풍기군수가 담당하고, 때때로 관찰사나 인근 고을의 수령이 맡기도 하였다. 1547년 2월 거접에서는 관찰사 안현이 시제를 출제하고, 7월에는 영천군수가 출제와 고시를 담당하였으며 시상을 위한 상품은 관찰사가 마련해 주었다. 1549년 4월의 거접에는 풍기군수 이황이 시·부·의·의를 각각 하나씩 출제하여 보내고, 1550년 3월의 거접에서는 관찰사 심통원이 유생들의 제술 상품으로 쓸 종이 등을 보내면서, 예방의 관리로 하여금 직접 서원 유생에게 전달하고 물명 하나하나에 대하여 수령했다는 회답을 받아 감영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1558년 6월 거접에는 풍기군수 장문보가 책문의 시제를 출제하였다. 또한 1547년 1월, 주세붕은 ‘여러 선비들이 과거에 응시할 날도 멀지 않았으니 오직 부지런히 절차탁마하시고 평안하시길 빕니다’라고 하며, 풍기군수에서 체직되어 나간 뒤에도 백운동서원에 편지를 보내 거접 유생들의 과거 공부를 격려하였다. 즉, 16세기 거접은 내용에 있어서도 과업을 위주로 하고, 시제의 출제와 채점, 시상, 재정 지원에 이르기까지 풍기군수와 관찰사 등 지방관이 주도함으로써, 거의 관학과 다름없이 운영되고 있었다. 거접의 참여 대상과 인원은 정확한 기록이 없지만, 사문입의에서 상시 거접 인원을 10명으로 규정하고 상주훈도와 상의하여 선발하도록 하였으며, 1560년 풍기군수 박승임이 ‘원근에서 흠모하고 학자들이 운집하여 사시사철 공궤하는 학생이 많을 때에는 20여 명에 이르렀다’는 기록에 따르면, 경상도 전역에서 보통 10명, 많게는 20명 정도의 유생이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거접에 참여한 유생들에게는 숙식뿐 아니라 거접에서 제술에 쓰이는 지필묵, 거접 유생들이 과거 시험장에서 쓸 명지(名紙)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물품 일체를 서원에서 제공하였다. 1545년 봄, 관찰사 안응창은 먹 20홀과 과거시험장에 쓸 종이 30장을, 1546년 관찰사 안현은 먹 10자루, 부채, 붓, 먹 각 11점 및 종이 5속을 보냈다. 지필묵 외에 개접일과 파접일 혹은 거접 도중에도 풍기군수나 인근 고을의 지방관 및 관찰사가 거접의 개설을 축하하고 격려하는 차원에서 술과 안주, 음식 등을 지속적으로 보내왔다. 1547년에는 안현을 통해 백운동서원에서 거접한다는 소식을 들은 우병사 김순고가 축하한다는 인사와 함께 과메기 30동음, 청어 100동음, 통대구 30마리를 보내고, 관찰사 안현도 1547년 한성부 우윤으로 체직되기 직전까지 청주 2동이, 생치 3마리, 닭 3마리와 함께 거접에 쓸 제술 시험문제를 지어 보냈다. 이후 안현의 후임으로 온 관찰사 임호신이 부임 직후 거접 유생들에게 장지 15첩, 유연묵 10정, 송묵 5자루, 고모필 20자루를, 같은 해 가을에는 술 2동이와 생치 5마리, 대구 5마리, 광어 7마리, 잣 2말을 서원에 보내 거접을 지원하였다. 또한 과거가 있는 해에는 거접 유생들에게 심지어 과거시험장에서 필요한 지필묵까지 서원에서 마련해 주었다. 1546년 6월 29일 관찰사 안현은 ‘서원의 거접 유생들이 가을 과거시험장에서 쓸 명지를 마땅히 보내 주어야 하지만 봉상한 것 중에 남아 있는 것이 없다고 하므로 용궁현에 관문을 보내 도련지 30장을 서원에 봉상하도록’ 조치해 주었다. 이 해 10월에는 식년시(式年試)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 후임 관찰사 임호신도 1547년 7월 27일, 영천군수가 출제, 채점한 거접 유생들의 제술 결과를 첩보하자 석차에 오른 유생들에게 역시 가을 과거시험장에서 쓸 수 있도록 상품을 분급한 뒤 감영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 때 1등을 한 생원 이계와 권응참에게는 각 명지 4장, 고모필 3자루, 유연묵 2자루씩, 2등을 한 남계리, 곽한, 한우, 김희준에게는 각 명지 3장, 붓 3자루, 유연묵 2자루씩을 분급하였다. 1579년과 1580년에는 학문에 정진하여 기대에 부응하라는 편지와 함께 배삼익이 술과 음식, 붓, 먹을, 1581년 11월에는 풍기군수 안봉이 관청의 업무로 분주하여 제술 시권을 미처 채점하지 못한 것에 미안함을 전하며 다음날 파접한다고 하므로 청주 1동이, 생육 5근, 약과 1그릇, 생치 1마리, 잣 1말, 고모필 6자루를 보내고, 1582년과 1583년 11월에도 술과 음식, 붓 등을 보냈다. 1589년 11월에는 풍기군수 변이중이 과거 공부에 힘쓸 것을 격려하며 쾌포, 소고기, 천엽, 간 등을 보내 반찬에 보태 쓰게 하였다. 이후에도 풍기군수와 관찰사는 새로 부임하면 으레 술과 음식, 지필묵 등을 보내 거접을 장려하였으며, 그 외 도사, 찰방, 경차관 및 경기감사, 충청감사 등도 서원에 물품을 보낸 기록이 확인된다. 16세기 거접은 상시 거접이 아니라 개접일과 파접일을 정해 두고 일정 기한 동안 시행되었으며, 특정 시기에 관계없이 사계절에 모두 걸쳐 개설되었다. 다만, 과거가 있는 해나 상식년에는 비교적 집중적으로 거접이 개설되었다. 이와 같이 계절에 관계없이 사계절에 모두 걸쳐 개설된 ‘사시거접’은, 겨울 3개월 동안만 거재를 개설했던 18세기의 ‘삼동거재’나, ‘가을과 겨울에는 거재와 통독을, 봄과 여름에는 백일장과 거접’을 개설했던 19세기와 달리, 16세기에만 나타나는 특징이다. 즉, 최초의 서원으로서 지방관의 전폭적 지원을 제공받았던 16세기 소수서원의 특권적 지위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6세기 소수서원 교육이 철저하게 수령, 관찰사 등 지방관의 물적 지원과 관심에 의존하고, 강학의 형태도 과거 공부를 목표로 한 거접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을 통해, 16세기 소수서원은 당시 쇠퇴한 관학의 기능을 실제로 고스란히 대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16세기 소수서원의 관학적 특성은 앞에서 살펴본 대로, 서원을 과거 준비 기관이자 관학의 보조 기구처럼 인식했던 주세붕의 서원관이 반영된 결과였으며, 이러한 서원 인식은 주세붕뿐 아니라 경상감사 안현을 포함한 16세기 지방관들에게도 여전히 공유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런 특혜의 결과 16세기 소수서원 유생들이 거둔 교육의 성과는 실제 어느 정도였을까. 입원록에 나타난 16세기 소수서원 입원생의 과거 합격 비율을 보면, 16세기 전체 입원생은 473명, 그중 소과 입격자는 178명, 문과 합격자는 50명, 소과와 문과에 모두 합격한 사람은 44명이다. 전체 입원생 중 소과나 문과 중 하나라도 입격한 사람은 184명으로 전체 입원생 중 약 39%에 해당한다. 이렇게 볼 때 16세기 소수서원은 관학이 교육 기능을 상실하다시피 한 당시 조선 사회에서, 과거에 합격하여 국가의 관리가 될 인재를 양성하는 관학의 교육 기능을 무엇보다 충실히 수행해 내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16세기 거접은 철저하게 수령, 관찰사 등 지방관의 물적 지원과 관심에 의존하고, 거접의 시제 출제와 채점 역시 풍기군수가 주도하고 있었다. 이는 한편으론, 서원을 과업을 준비시키는 관학적 속성의 연장선에서 인식한 주세붕과 당시 관리들의 서원관으로부터 비롯된 성과이자, 동시에 주자나 퇴계가 서원 설립을 통해 의도했던 도학과 위기지학이라는 서원 강학 이념은 미처 실현하지 못했던, 초창기 조선 서원이 갖는 한계이기도 했다. 이와 같이 거접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16세기 소수서원의 교육은 ‘과업에서의 성과’와 ‘도학에서의 한계’라는 두 가지 특징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었으며, 이는 초기 서원의 관학적 속성에서 야기된 과도기적 성격으로 이해할 수 있다. -
16세기 어느 양반가 노비의 일상과 생존전략―『묵재일기』를 중심으로- 기록자료
- 사회
공장의 노 정석이 흥해로 퇴거한다며 이문건을 찾아와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날 이문건은 떠나는 정석에게 5되의 노자를 마련해 주었는데, 그에게 보태준 노자가 자신의 마음보다 부족하다며 못내 아쉬워하기도 했다. 이처럼 노비가 노주의 친우나 친인척을 찾아온 까닭은 인간적 정분의 측면 이외에 다양하게 존재했다. 우선 노비들은 먼 곳에 거주하는 노주를 대신해 각종 완호(完護)를 부탁하기 위해 이들을 찾았다. 1545년 11월 사촌형 이공추의 비 극비가 아들 말질손과 함께 찾아오자, 이문건은 이들 모자와 함께 옛일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비 극비가 죽은 노 조명의 딸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이문건은 극비의 아비 역시 알고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이날 이문건은 극비와 말질손에게 밥을 먹이고 하룻밤 재워 보냈다. 얼마 후 말질손이 다시 이문건을 찾아와 판관에게 청해 완초(莞草)를 감면해 달라며 부탁했고, 다음날 이문건은 말질손의 완초와 청밀·심황 등을 감면한다는 내용의 질첩(作帖)을 받아 주었다. 말질손은 어미 극비가 이문건과 안면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어미와 함께 이문건을 찾아가 그에게 완호를 부탁한 것이다. 이후 말질손의 완호 요청은 때로 받아들여지고 때로 거절되면서, 그가 사망할 때까지 계속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이들 노주가 타인 소유 노비들의 각종 완호 요청을 받아주면서 이들 노비의 편의를 돌봐준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당시 양반노주의 재산분재 방식과 이에 따른 소유노비 공동 관리의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노비들은 상속이나 매매 등을 이유로 가족이 흩어져 살아가는 경우가 많았기에, 서로의 근황은 노주를 통해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노비들은 자신의 가족이나 친인척의 소식을 확인하기 위해 노주를 찾았고, 노주를 통해 서로의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1546년 2월 권영의 노 막동이 이문건을 찾아와 서울에 사는 이문건의 비 저비의 소식을 물었다. 막동과 저비와의 관계는 정확히 확인할 수 없지만, 이처럼 노비들은 자신이 찾는 사람들의 소식을 알기 위해 노주를 찾았다. 심지어 노비들은 가족의 사망 소식조차 노주를 통해 들어야 했다. 1548년 1월 노 천수가 서울에서 내려와, 이문건의 누이 청파 자씨의 제사를 받들던 이염의 비 말질개가 지난해 11월 화재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얼마 후 경주에 사는 말질개의 아비 청동이 이문건을 찾아왔는데, 그때까지 아비 청동은 딸 말질개의 사망 소식을 알지 못했다. 한편, 1561년 5월 이문건가를 찾아온 송백상의 노 안수는 이문건의 5촌 조카 이문응이 지난 4월 상처(喪妻)했으며, 이문응의 동생 이수응은 이미 노원에 안장되었음을 전했다. 이어 노 안수가 송백상의 노 중원이 혼인했다는 사실을 전하자, 이문건은 이를 일기에 기록했다. 이처럼 노주가 노비의 혼인과 출산, 사망 등에 관한 일을 자세히 기록한 까닭은 기본적으로 노비가 노주의 물적 재산이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노비의 신상 변동 사항은 곧 재산 상태의 변동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비에 대한 관리와 기록의 대상이 자신의 소유노비뿐만 아니라, 친인척이나 친지의 소유노비까지를 포함한다는 사실은, 노비에 대한 양반노주의 공동 관리라는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노주들은 먼 곳에 거주하는 소유노비에 대한 신공 독납, 도망 방지 및 도망노비 추쇄 등을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친지나 친인척에게 또는 해당 관의 지방관에게 칭념했다. 이를 통해 노주들은 원활한 신공 수취나 도망노비 추쇄 등을 위해 자신의 노비뿐만 아니라 타인 소유의 노비까지 공동으로 관리했고, 이는 양반노주의 광범위한 인적 연결망을 통해 보다 안정적인 노비 관리로 이어졌다. -
서원노비의 삶
- 기록자료
- 사회
대구·영해·상주·흥해·성주·건천·자인·진보·청송·안동·의성 등의 경상도 북부에도 살았다. 옥산서원 노비 중에는 다른 지역에 거주하다가 원저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것을 ‘환거본동(還去本洞)’이라고 하였다. 1744년 원비 임덕(林德)은 경주 홍천에, 원비 계랑(戒郞)과 그녀의 자녀 한중(汗中)·노랑(老郞)·시월(十月)은 언양에 있었고, 원노 원강(元江)과 원비 유월(六月)의 자녀 원가(元嫁)는 경주 노곡에 있었다가 1747년에 본동(원저)으로 돌아왔다. 이는 서원에서 소속 노비들을 서원 근처로 옮긴 것이었다. 이렇게 서원노비 중 다른 지역에 있다가 원저로 돌아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림 15】 도산서원 노비의 주요 거주 지역, 《조선팔도지도 10폭 병풍》 〈충청도〉, 〈강원도〉, 〈경상도〉, 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에서 전재,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도산서원 노비는 대체로 안동과 예안 등 도산서원 주변 지역에 주로 거주하였는데, 18세기에는 영양·영주·봉화 등의 경상도 북부 지역과, 영해·평해 등의 동해안, 강원도와 충청도, 경상도 남부 등 약 33개의 지역에 살았다. 19세기에는 서원 근처에 거주하는 노비가 더 늘어났다. 도산서원 노비가 많은 지역에 거주한 이유는 도산서원의 위상과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인조반정 이후 침체된 도산서원은 숙종 대에 두 가지 변화가 있었는데, 하나는 이현일(李玄逸)의 문인들이 도산서원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영남 남인을 결집시켰고, 다른 하나는 도산서원 원장을 선임하는 데에 예안뿐만 아니라 주변 지역의 명망 있는 사족도 초빙하였다는 것이다. 이후 1755년(영조 31)에는 조정에서 유신(儒臣)을 보내 도산서원에 치제하였고, 1792년(정조 16)에는 도산서원 앞에 과장을 개설하여 별시를 치게 하였다. 또한 사도세자의 신원을 위한 영남만인소를 도산서원에서 주관하였기에, 도산서원은 영남 사림의 중심지로서 그 위상이 더 높아졌다. 도남서원 노비는 주로 경상도 북부 지역에 거주하였고, 특히 원저와 대구·상주·함창 등의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하였다. 경상도 남부의 김해와 충청도 충주 등에도 거주하였다. 다른 서원과의 차이점은 도남서원 노비들은 대구에, 특히 연경서원(硏經書院) 근처에 많이 거주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도남서원 건립의 실질적인 역할을 한 정경세(鄭經世)와 1563년에 창건된 대구 연경서원 원장 서사원(徐思遠)의 관계 때문일 것이다. 정경세는 1607년 대구부사로 부임하면서 한강 정구의 문인인 연경서원 원장 서사원을 만났다. 【그림 16】 도남서원 노비의 주요 거주 지역, 《조선팔도지도 10폭 병풍》 〈충청도〉, 〈경상도〉, 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에서 전재,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두 사람은 연경서원에서 교학활동 등을 하면서 친밀한 교유관계를 가졌으므로, 1606년 도남서원이 창건된 후 도남서원 역시 연경서원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을 것이다. 정경세는 1635년에는 도남서원에, 1660년에는 연경서원에 추향되었다. 이처럼 도남서원과 연경서원의 밀접한 관계로 인해 도남서원 노비가 대구에 많이 거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서원노비들은 처음에는 원저에 주로 거주하였다가, 18세기에는 차츰 서원 근처를 벗어나 다른 지역에 살았다. 반면 19세기에는 다시 서원 주변에 거주하는 노비들만 주로 기재되었다. 이는 한편으로는 다른 지역에 거주하는 노비들을 서원에서 관리하기 힘들어졌다는 것을 의미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옥산서원과 같이 노비 관리를 위해 노비들을 서원 근처로 옮겼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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