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건의 『이향견문록』 에 등장하는 인물로서 별군관, 선사포 첨사 등을 역임한 무관이자 홍봉한의 겸인(傔人).
출신은 남양(南陽). 이름은 알 수 없음. 『이향견문록』에 노동지(同知)로 되어 있다. ‘동지’는 조선시대 중추부(中樞府)의 종2품 벼슬을 가리키는 명칭인데, 조선 후기에는 직함이 없는 노인, 혹은 나이도 있고 재물도 있으나 지체는 낮으면서 교만하게 구는 늙은이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였다. 노동지는 활을 잘 쏘고 무예가 뛰어났지만, 매번 초시만 합격하고 회시(會試)에 계속 낙방했다. 당시 실세였던 홍봉한을 만나기 위해 어영청 나졸 구타사건을 벌였다. 홍봉한의 눈에 띈 노동지는 영리하고 민첩하게 행동하여 홍봉한이 수족처럼 여기는 겸인이 되었다. 별군관(別軍官)에서부터 선사포(宣沙浦) 첨사(僉使)까지 지냈다.
노동지는 유재건의 『이향견문록』 권3 「계서잡록(溪西雜錄)」에 등장한 인물이다. 남양에 거주하는 노군은 나름 용기와 담력을 갖추고 말타기 활쏘기를 잘하여 과거에 응시했으나 매번 초시만 합격하고 회시는 10여 차례 계속 떨어졌다. 재상가에 의탁해서 기회를 잡아보려고 순라군, 어영청 나졸들을 구타하는 사건을 벌이는 꾀를 냈다. 홍봉한 앞으로 잡혀온 노군이 자신의 꾀를 털어놓고 거두어 달라고 하자, 홍봉한은 그의 영리함에 발탁했다. 매사에 민첩하고 잘 알아서 처리했던 노군은 결국 홍봉한의 겸인이 되었고 덕분에 별군관으로부터 승급해서 선사포 첨사가 되었다. 부임할 때도 홍봉한이 감영이나 병영에 부탁할 정도였다. 노군은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서, 홍봉한에게 “3년 동안의 수입으로 남양의 땅을 사서 살아갈 방도를 마련했다”며 하직인사를 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 1776년 홍봉한이 실각하고 고양의 선영 아래 은거하자 어떤 겸인도 모시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노군이 홀로 돌아와 시중을 들었다. 홍봉한의 병이 깊어지자 간호했고, 사망한 뒤에는 직접 염습하고 입관까지 했다. 장사를 마치자 통곡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정치적 권력이 있을 때는 주인 곁에 많은 겸인이 있지만 주인이 권력을 잃거나 집안에 일이 생겼을 때 대부분 떠나간다. 하지만 노동지는 오히려 다시 돌아와 주인을 모셨고, 사망 후에도 성의를 다하여 신의를 지킨 사례로 기록에 남았다. 조선후기엔 문과시험으로 관리 진출이 어려워져 무과로 관직을 찾는 사람이 늘었지만 이마저도 응시자가 넘쳐나서 무과 급제뿐 아니라 관직을 얻는 것이 더욱 어려워졌다. 따라서 노동지처럼 재상가의 겸인으로 들어가 출세하는 방법이 고려되었다. 재상가의 겸인인 동시에 중앙관청의 서리로서 공적, 사적관계의 네트워크를 볼 수 있는 사례로서 조선후기 사회상의 한 단면을 파악할 수 있다.
1. 원전
유재건,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
2. 단행본
이우성, 임형택 편, 『이조한문단편집(중)』(일조각, 1978)
노혜경, 『조선 후기 중앙관청의 숨은 실세, 경아전』(세창출판사, 2023)
3. 논문
유광수, 「고전의 현재적 계승 방법과 의미-라디오 방송의 경우」(『어문논집』87,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