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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지규식
정의

19세기 후반 사옹원 분원에서 생산된 도자기를 왕실과 중앙 관청에 조달하던 공인(貢人).

가계 및 인적사항

지규식은 1851(철종 2) 음력 617일에 태어났고 사망 시기는 알 수 없다. 양반 신분은 아니었지만 그가 남긴 일기를 통해 하재(荷齋)라는 호를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경기도 양근군(오늘날의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에 거주하였고, 그 부모와 조상의 묘는 남한산성 인근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지규식은 여섯 명의 아들 중 넷째였으나 세 명의 형이 모두 일찍 사망하면서 40대에는 큰아들로서 어머니를 부양하였다. 두 명의 동생 중 지준식(池浚植)도 일찍 사망하였고, 지연식(池演植)만 지규식과 함께 분원에서 도자기업에 종사하였다. 지규식의 부인은 한씨였으며, 처가도 남한산성 인근이었다. 자녀는 61녀를 두었고, 아들의 이름은 차례로 산구(山龜), 재구(再龜), 문구(文龜), 서구(筮龜), 신구(神龜), 수구(水龜)였다.

주요 활동

조선 정부는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관청과 관원 감축안을 시행하면서 1883(고종 20) 사옹원 분원도 분원공소(分院貢所)’로 이름을 바꾸고 그곳에서 생산된 도자기를 왕실과 관청에 납품하는 공인(貢人)을 설정하였다. 1884(고종 21)분원공소절목에서 번소(燔所)의 원역(員役) 중 근실하여 임무를 감당할 자 12명을 새로운 공인[新貢]으로 삼는다.”라고 하였는데, 이때 공인으로 지정된 12명 중 한 명이 지규식이었다. 절목의 내용을 볼 때, 지규식은 공인이 되기 전까지는 분원의 원역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갑오개혁 때 공납제가 폐지되면서 1895년에는 분원공소를 혁파한다는 명령이 내려졌다가 취소되고 궁내부로 이속되었다. 그러한 위기 속에서도 지규식은 분원공소의 명맥을 지키다가 1897(광무 1) ‘번자회사(燔磁會社)’ 설립에 참여하였다. 번자회사는 사장 1명과 출자사원 8명이 만든 합명회사였으며 서울에 본사를 두고 분원에서 자기를 생산하는 체제로 운영되었는데, 지규식은 출자사원 중 한 명으로 참여하였다.

번자회사가 수입 도자기의 유통 확대, 일본인의 자기 생산 등으로 점차 어려움을 겪게 되자, 지규식은 채색 자기를 생산하기 위해 서울 응봉(鷹峰) 아래 은곡(銀谷)에 새 가마를 개설하였다. 1899~1900년에는 분원 내 소학교 설립을 논의하며 분원 내 건물을 학교 건물로 팔았다. 1906(광무 10) 무렵부터는 번사회사(燔砂會社)’로 회사명을 바꾼 뒤 번사주식회사를 결성했으며, 1910(융희 4)에는 분원자기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학문과 저술

지규식은 189111일부터 1911629일까지 20여 년 동안의 일기를 󰡔하재일기(荷齋日記)󰡕라는 제목으로 남겼다. 󰡔하재일기󰡕에는 지규식 개인의 일상뿐만 아니라 분원공소 및 번자회사의 운영과 관련된 경험들도 상세히 담겨 있다.

참고문헌

󰡔하재일기󰡕(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역,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52009)

김미성, 󰡔조선 최후의 공인, 지규식의 일기󰡕(세창출판사, 2023)

박은숙, 개항 후 分院 운영권의 민간 이양과 운영실태 荷齋日記를 중심으로―」(󰡔한국사연구󰡕 142, 2008)

박은숙, 경기도 분원 마을 池圭植의 자녀 혼사와 사돈 관계(1891-1910)(󰡔한국인물사연구󰡕 19,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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