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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사계
정의

조선후기 지역사회의 주도권이나 마을의 결속을 도모하기 위해 중인층이 활쏘기를 표명하여 조직한 계.

설립 경위·목적

사계는 지역사회 엘리트라 할 수 있는 양반들이 주도하여 진행했던 향음주례(鄕飮酒禮)와 연계한 향사례(鄕射禮)와는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사계는 호서와 호남의 사례에서 중인층이 궁술 연마를 목적으로 계를 조직하고 이를 중심으로 결속하여 지역사회의 기존 세력에 대항하는 양상을 보이고있다. 사계는 지역과 마을에서 상부상조를 또한 포방하고 있어 마을의 동계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그렇지만 이와 달리 경주 방어리의 사계는 임진전쟁과 병자전쟁 이후 혼란한 지역사회 분위기에서 무예 연마와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조직했다. 사계의 조목 중에는 습사(習射)를 위한 규약이 있으며, 과거를 위해 상경할 때 부조한 내용도 있어 기존 사례와 차이가 있다.

내용(조직·역할)

경주 방어리는 임진전쟁과 병자전쟁이라는 두 번의 전란 이후 마을의 방위 필요성을 절감하고 습사를 통한 무예 연마를 위해 사계를 조직했다. 이 시기 경주지역에는 혼상부조(婚喪扶助)와 환난상구(患難相救)라는 성리학적 가치를 표방하면서 양동리, 국당리, 양월리 등과 같은 부북(府北)지역에 동계를 성립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방어리도 이런 분위기와 필요성에 따라 1652(효종 3) 사계를 조직했다. 사계에서 밝히고 있듯이 목적은 습사와 상호부조였고 구성원도 또한 자신들이 적었듯이 무부(武夫)가 중심이었다.

사계는 동계로 중수되었다. 1698(숙종 24) 사계를 주도하던 이진(16421693)이 남구명(16611719)를 사위로 들이면서 사계는 전환점을 맞았다. 문과에 급제하고 방어리에 우거하는 남구명은 사계를 윤색 및 중수하여 동계로 전환하면서 환난상휼(患難相恤)을 중심으로 한 성리학적 가치를 강화했다. 이에 따라 방어리 인근 여러 마을의 양반들도 계원을 충원함으로써 무부 중심의 사계와는 다른 사족 중심의 동계를 만들었다. 그렇다고 사계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며 18세기 초까지 공존하였다.

동계는 방어리 사족이 주도하여 운영하다가 1841(헌종 7) 상동계(上洞契)로 다시 중수했다. 19세기 이후 경주지역 주도 세력이 양동리가 있던 부북(府北)에서 방어리 등 신흥 세력이 세거하던 부남(府南)으로 주도권이 바뀐 분위기의 반영이었다. 여기서 상동계는 지면을 딴 명칭이 아니라 경주의 으뜸 동계라는 자부심을 반영한 결과였다.

변천

호서 및 호남 지역의 사계는 이서층 중심으로 사계를 조직하고 무과를 통해 신분상승을 도모하고 있었다. 특히 19세기 이후 이런 움직임이 더욱 뚜렷했다. 또한 16세기 지역의 실무 관리들이 사계를 조직하여 상부상조를 실시하다가 18세기 이후 원로들의 모임으로 전환하여 권력화한 사례도 있다.

사계가 호혜와 협동 내용을 담고 있는 사례는 경주 방어리 사계가 있다. 주로 17세기에 활동한 내용은 환난상구(患難相救)’동락지환(同樂之歡)’을 위한 무부들의 의리(義理)를 향하고 있었다. 환난상구의 핵심은 계원에 대한 혼례와 상장례에 있어 물적, 심적 지원에 있었다. 혼상이 발생하면 백주(白酒), 종이, 참기름 등을 제공함은 물론 병풍과 상여들의 공용 물품을 대여해 주었다. 그리고 문상하고 함께 밤을 지세우는 활동을 실현했다. 그리고 동락지환을 위해서는 습사를 위한 강신(講信)을 실현하고 무과를 우해 상경할 경우에는 필요 경비를 지원했다. 그 결과 계원 중 이진을 포함한 2명의 무과급제자를 배출하였고, 급제후 부임할 경우에도 사계에서 축하했다.

방어리 사계의 특징적인 모습은 공유자산의 운영에 기울인 노력이었다. 혼상부조를 위한 상여나 그릇, 병풍 등은 계원들이 모든 계금을 이용해 마련하였으며, 이는 필요한 계원에게 지원하여 호혜의 가치를 실현하는 수단이 되었다. 뿐만아니라 계원들이 이용할 때 훼손하였거나 다른 마을 사람이 이용할 경우 사용료를 받기 위한 규약을 완전한 합의에 의해 마련하는 협동을 실현하였다. 이러한 호혜를 위한 협동은 정기적 혹은 부정기적으로 필요한 경우 계회를 소집하여 완의로 실현했다.


사계는 조선후기 지역사회의 양반 사족 외에도 여러 계층에서 결속 활동을 전개한 사실을 보여주고 있고 그 수단도 습사라는 차별된 양상이었다. 특히, 방어리 사계의 경우는 무부들이 결속하여 마을 방위와 무과를 준비하면서 계원이 공유할 수 있는 집물(什物)을 마련하고 계를 지속하기 위한 규약의 계정을 이어간 특징이 있다. 그렇기에 이 사례는 마을의 여러 조직을 지배와 갈등과 더불어 호혜와 협동의 관점에서 묘사할 가능성을 제공하는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1. 원전

사계고왕록(射契考往錄)

󰡔경주읍지(慶州邑誌)󰡕

󰡔우암선생문집(寓庵先生文集)󰡕(남구명)

 

2. 단행본

정수환, 활 쏘는 사람들과 나무 심는 마을󰡕 (세창출판사, 2023)

조철제, 경주부의 역사(학연문화사, 2024)

 

3. 논문

나선하, 조선 중·후기 영광 이서집단의 계 운영과 그 의미: 사계와 노계를 중심으로(󰡔지방사와 지방문화󰡕 6-1, 2003)

정연태, 조선후기-해방 이전 자산가형 지방 유력자와 사계:포구 상업동시 강경 덕유정계 사례(󰡔역사와현실󰡕60,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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