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방어리의 사계와 동계에서 운영한 재원을 정리한 기록물.
조선후기 경주 내남면 방어리를 중심으로 조직했던 사계 및 동계의 운영을 담당했던 전임 유사(有司) 및 공사원(公事員)이 재임 동안 운영했던 재원의 세부 내용을 기록하고 후임에게 인수인계한 내용이다.
임진·병자 전쟁이라는 두 번의 전란을 겪은 뒤 경주 부남(府南) 방어리에 사는 유력자들이 마을 방위와 ‘환난상구(患難相救)’를 목적으로 사계(射契)를 조직했다. 그리고 1698년(숙종 24) 즈음 사계를 주도하던 경주이씨와 경주최씨가 성리학적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 동계로 중수하였다.
사계와 동계로 전환하는 시기에 계의 결속과 운영을 위해 명단 좌목(座目), 합의한 규약으로 완의(完議)와 절목(節目)을 마련하고 있었다. 그리고 공동의 가치인 협동을 위한 재원을 모으고 분배하는 활동을 실현하고 그 내용을 ‘전여기’로 남겼다. 이러한 작성은 방어리 마을의 독창적인 시도가 아니라 이미 서원이나 문중 조직 그리고 다른 동계에서도 작성하고 있었으므로 하나의 관행이었다.
방어리는 사계와 동계의 운영을 보여주는 많은 자료가 함께 남아 있다. 계의 운영 일지라고 할 수 있는 고왕록(考往錄), 구성원의 명단 동안(洞案)이나 계안(契案) 그리고 각종 규약의 내용을 수록한 절목책(節目冊)등이 남아 있는데 이들 모두 전여기와 함께 작성한 결과이다.
필사본으로 현재 5책이 전하고 있다. 표지와 표제가 모두 남아 있지 않으나 내용은 ‘전여(傳與)’로 밝히고 있어 동일한 성격으로 확인할 수 있다. 작성은 17세기 말에서 조선시대 말에 이르는 200여 년의 내용을 담고있다.
현재 남아 있는 전여기의 가장 오랜 기록은 1690년(숙종 16) 7월의 ‘사계전여(射契傳與)’의 내용이다. 그리고 조선말 19세기까지 사계에서 동계로 전환한 이후의 재원 운영 내용을 담고 있는데, 구성과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서두에는 사계에서 확보한 각종 집물의 내역을 하나씩 열거했다. 예를 들어 상여와 상여를 장식하는 풍령(風鈴) 등의 세세한 구성품도 적었다. 주요 집물은 차일, 과녁, 방석, 휘장 등이 있었다. 이들은 혼상부조(婚喪扶助)를 위해 계원들에게 지원하는 것으로 이용자와 이용료에 대한 기록을 담았다. 집물에는 이 외에도 계에서 확보한 토지의 매매명문과 받자책(捧上冊), 하기책(下記冊과 같은 재원의 수입 지출을 별도로 기록한 문서를 비롯한 문서들의 현황도 전여의 내용에 포함했다.
서두의 집물 내용에 이은 기록은 재임 기간 중의 계원에 대한 지출과 수입 내용을 수록했다. 계원에 대한 혼상 부조와 함께 곡물의 수입과 식리내용 등을 구분하여 일일이 적었다. 혹, 전임자 관리 과정에서 미수금이나 확정하지 않은 내용에 대해서는 별도로 적어서 후임자들이 관리에 참고하도록 했다.
계의 운영을 위해서는 계원에 대한 단속이 중요했으나 그보다 결속을 위한 엄격한 재원의 관리가 필요했다. 전여기의 내용은 이런 사정을 그대로 담고 있으며, 17세기 초부터는 이들 자산을 보관하기 위한 고가(庫家)를 마련하고 전여의 첫 번째 대상으로 삼았다.
[의의 및 평가]
조선시대 각종 결사체, 특히 ‘계’ 연구는 조직 구성원의 신분적 구성의 특징과 그들에 의해 작성한 규약의 강제성에 집중했다. 하지만 이 자료는 17세기 이후 조선시대 말기까지 계의 재원 운영 실태를 낱낱이 기록하고 있어 계 운영의 내부 구조를 재구성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
1. 원전
『방어리동계 전여기(防禦里洞契 傳與記)』
경주읍지(慶州邑誌)
2. 단행본
정승모, 장서각 수집 민속관련 고문서 해제:고문서를 통해 본 조선후기 민속과 사회상(민속원, 2008)
조철제, 『경주의 조선시대 산책』(학연문화사, 2023)
정수환, 『활 쏘는 사람들과 나무 심는 마을 (세창출판사, 2023)
3. 논문
정수환, 「조선후기 경주 방어리(防禦里) 사계(射契)와 동계(洞契)의 호혜와 협동의 가치」(한국학 43-4,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