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적 집안의 자손과 이혼하는 것
역가 이혼은 역적 집안의 자손과 이혼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처가 남편을 버리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체로 역가 이혼은 역적 집안의 딸과 이혼하는 것을 지칭한다. 이는 조선 전기에는 정부에서 역적 집안 딸과의 이혼을 억제했지만 17세기 이후에는 점차 이를 허락해주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대명률』에서는 모반(謀反), 모대역(謀大逆)을 저지른 자는 능지처사에 처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그리고 아버지와 16세 이상의 아들은 교형에 처하고, 15세 이하의 아들, 어머니, 딸, 처, 첩, 조부, 손자, 형제, 자매, 아들의 처와 첩은 공신의 집에 주어 노비로 삼도록 하는 연좌법이 규정되어 있다. 모반, 모대역을 저지른 자의 처와 첩, 그 아들의 처와 첩은 연좌하여 공신 집의 노비로 삼도록 했는데, 혼약을 한 여성은 연좌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혼인한 여성은 친정 아버지와 형제가 역옥(逆獄) 범죄를 저질렀다 해도 연좌되지 않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삼강의 하나인 부부 사이의 의(義)를 중요하게 여겼다. 따라서 연좌에서 제외되는 혼인한 여성을 역적 집안의 딸이라는 이유로 이혼하게 하는 것은 부부의 의를 중시하는 정책에 반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조선 전기에는 역적 집안의 딸과 이혼시켜달라고 청하는 남편 측의 청원을 들어주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에는 이를 허가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김시양의 저서인 『하담록』의 내용을 인용한 『연려실기술』의 기사에는 계축 옥사 때 처벌받은 김채의 딸 김씨, 이괄의 난으로 처벌받은 원종경의 딸 원씨의 이혼 사례를 수록했다. 광해군대에 김상헌은 김채가 계축 옥사에 연루되자 상소하여 아들 김광찬과 며느리 김씨의 이혼을 청했다. 예조 판서 이이첨은 법에 이혼이 합당하지 않다고 계문했지만 광해군이 이혼을 허락했다. 인조대에 권반은 원종경이 이괄의 난으로 복주되자 상서하여 손자인 권제와 원씨의 이혼을 청했다. 그런데 이때는 예조 판서 이정구가 그 충성스러움을 포장(褒獎)하고 청원을 들어주기를 청했다. 김시양은 이에 대해 세태가 변화한 것을 볼 수 있다고 기록했다. 역적 집안의 딸이라고 하더라도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던 조선 전기의 방침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 당대인에게도 포착되고 있었던 것이다.
1712년(숙종 38) 예조에서는 “역적 집안의 친딸을 이이시키는 것은 비록 법 외의 일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미 관례가 되어 쉽게 고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18세기 초에는 혼인에 관한 주무 기관인 예조에서 역적 집안의 딸과의 이혼을 허락하는 것이 이미 관례가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다만 이때 역적 집안의 손녀를 이이시키는 것은 금지하는 법을 제정하여 『속대전』에 수록되었다. 인조대 소현세자빈 강씨의 어머니 강석기 처 신씨가 강씨의 옥사에 연루되어 역적으로 처벌받자 신씨의 손녀 사위인 여성제가 예조에 청원하여 처 강씨와 이혼했다. 당시인들이 강빈의 옥사를 억울한 일로 생각했기 때문에 이때에 이르러 조태채가 여성제의 이혼과 같은 폐단을 막기를 청하여 역적 집안의 손녀는 이이시키지 않도록 법제화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적 딸과의 이이는 여전히 허락되었다. 영조대 무신란 주동자로 지목받았던 심유현, 박필현의 딸은 별다른 논의없이 남편들이 이이를 청하는 소지를 올리자 ‘전례에 의해’ 이이를 허락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부부의 의를 중요시하여 역적 딸이라 하더라도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던 조선 전기의 정책은 왕권의 정통성, 왕위 계승 분쟁 등과 관련된 정치적 분쟁이 심화되는 역가 이혼이 관례화되는 방향으로 변화해갔다.
『대명률』
『속대전』
『연려실기술』
『조선왕조실록』
박경, 『조선시대 양반의 부부 생활과 이혼』, 세창출판사,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