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이혼할 때 남편이 그 증표로 처에게 작성해 준 문서
조선시대 혼인 관계 해소는 남편이 처를 버리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이때 남편이 혼인 관계 해소의 증표로 처에게 문서를 작성해 주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남편이 처를 버리면서 작성해 준 문서는 ‘기별 문자(棄別文字)’, ‘기별 명문(棄別明文)’, ‘기별지서(棄別之書)’, ‘기별지문(棄別之文)’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남편이 처를 버리는 행위는 ‘버리다’는 의미의 ‘기(棄)’, ‘내쫓다’는 의미의 ‘출(出, 黜)’ 외에도 ‘기별(棄別)’, ‘휴기(休棄)’, ‘기거(棄去)’, ‘기절(棄絶)’ 등으로 지칭되었다. 이 중 부부가 헤어질 때 남편이 처에게 작성해 준 문서는 ‘버려 헤어지다’는 의미를 지닌 ‘기별’을 사용하여 ‘기별 문서’ 혹은 ‘기별의 글’이라고 표현했다. 민간에서는 이 문서를 ‘수세[休書]’라고 하기도 했다.
남편이 처에게 기별 문서를 작성해 주면 혼인 관계가 해소된 것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에 재가할 수 있었다. 양반층 여성이라도 성종대 재가 규제법이 반포되기 전에는 기별 문서를 받은 후라면 재가하는 데 제한을 받지 않았다.
다만 양반층에서는 처를 버린 경우 처벌을 받고 관직 진출에 제한을 받았다. 처를 버린 것이 적발되면 『대명률』의 이유 없이 처를 버리면 장 80에 처하도록 한 규정에 따라 처벌되었다. 또, 처를 버린 자는 부부의 의를 어긴 것으로 간주되어 관직 제수시에 불이익을 받았다. 따라서 처를 버리고자 하는 왕의 허락을 받아 미래의 불이익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다.
『대명률』에는 처를 쫓아낼 수 있는 7가지 사유가 규정되어 있다. 이 7가지 사유는 자식이 없는 경우, 음란한 경우, 시부모를 잘 모시지 않은 경우, 말이 많은 경우, 도둑질한 경우, 투기한 경우, 악질(惡疾)이 있는 경우로 흔히 칠거지악으로 불린다. 그러나 이에 해당하더라도 삼불거(三不去), 즉 시부모의 3년상을 함께 마친 경우, 혼인할 때 가난하고 천했다가 뒤에 부유하고 귀해진 경우, 돌아갈 곳이 없는 경우는 쫓아내지 못하도록 규정했다. 조선에서는 칠거지악에 해당한다 하더라도 실행(失行)했다는 것이 확실한 경우 외에는 기처 승인의 사유가 되지 못했다.
처가 남편을 버리는 것은 용인되지 않았다. 기별 문서를 받지 않았는데, 남편을 떠나는 것은 처벌 대상이 될 수 있었다. 1423년(세종 5) 전의 판관 황순지의 처 세은가이는 남편을 배반하고 유흥수와 간통했다 하여 교형에 처해졌다. 『대명률』에서는 처가 남편을 배반하고 도망하면 장 100에 처하고, 도망하여 개가하면 교형에 처하도록 했다. 세은가이에게는 남편을 배반하고 도망하여 다시 시집간 행위를 처벌하는 형률을 적용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남편을 핍박하여 기별 문서를 받았다 하여 처벌받는 여성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현재 19세기에 작성된 기별 문서 2건이 전해진다. 이 2건의 문서는 수표(手標)의 형태로 작성되었다. 수표는 수기(手記) 혹은 표(標)라고도 불리며, 개인 간에 거래를 하거나 약속할 때 작성하는 간단한 형식의 문서이다. 이 두 문서 작성자 모두 양반 계층이 아니며,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고자 하는 처에게 돈을 받고 혼인 관계 해소를 증빙하는 문서를 작성해 준 사례들이다. 만일 여성의 정절이 매우 중요했던 양반층의 기별 문서가 현존한다면 이와는 내용이 달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별 문서는 혼인 관계 해소에 국가 기관의 조정, 판결, 신고가 필요하지 않았던 사회, 남편 중심의 부처 관계 하에서 처가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할 수 없었던 사회의 모습이 반영된 문서이다.
『대명률』
『조선왕조실록』
「을유년 최덕현 수기」 (전북대학교 박물관 소장)
「1880년 김응원 수표」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장병인, 『조선전기 혼인제와 성차별』, 일지사, 1997.
박경, 『조선시대 양반의 부부 생활과 이혼』, 세창출판사, 2023.
박경, 「조선 전기 棄妻 규제 정책의 영향과 한계」, 『사학연구』 98,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