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동학농민전쟁기 농민군 세력을 방어하기 위해 양반 유생 및 향리 계층 등 보수 세력이 향약과 접목하여 결성한 군대 조직.
‘민보(民堡)’는 지역 백성들이 관군을 대신하여 지방을 자체적으로 방어하는 것을 이른다. 실학자 정약용(丁若鏞)이 홍경래(洪景來)의 난 초기에 관군이 쉽게 무너지는 것을 보고 1812년 『민보의(民堡議)』를 지어 민간 방어 조직인 민보를 구상하였으며, 1867년에는 신헌(申櫶)이 『민보집설(民堡輯說)』을 지어 민보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민보는 몇 차례 구상과 논의가 있었지만 현실화되지 못하다가,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각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조직되었다.
1894년 전라도에서 봉기한 농민군은 충청도와 경상도 서부 지역으로 진격해 나갔으며, 경기도와 강원도에서도 전투를 벌였다. 이때 농민군은 점령지에서 평소 농민들을 수탈하던 양반 유생과 향리 층에 대해 보복으로 폭행을 가하거나, 재산을 빼앗고 모욕을 주기도 하였다. 그러자 위기를 느낀 양반·향리 등 보수 세력은 농민군을 자체적으로 방어하고자 민보군을 결성하였다. 민보군은 지역에 따라 유회군(儒會軍)·의회군(義會軍)·수성군(守城軍)·집강소(執綱所)·의병(義兵)·소모영(召募營) 등 다양하게 불렸으며, 조직의 효율성을 높이고 운영의 성리학적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향촌 자치 규약인 향약과 접목하기도 했다.
동학농민전쟁기 민보군을 운영한 양반 유생 및 향리 세력은 운영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향약 조직을 민보군과 접목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고을에 따라 형식은 다르지만, 대체로 면(面) 단위를 활용하여 약정(約正)·부약정(副約正) 등의 약임(約任)을 선발하였고, 그들에게 지휘권을 부여하는 등 민보군 운영을 체계화하였다. 또한 면 단위 이하로는 오가작통(五家作統)과 접목시켜, 향약 조직 하부에 편제하였다. 이렇게 향약 조직으로 편제된 민보군은 경상도 의흥(義興)과 상주(尙州)의 사례처럼, 향약의 약임이 각 면의 군정(軍丁)을 징발하거나 훈련시켰다. 또한 각처의 요로나 길목에서 거동 수상자를 적발하기도 했다.
동 단위의 향약인 동약(洞約)과 민보군이 접목되는 경우도 있었다. 진주(晉州) 백곡(柏谷)의 동약은 농민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동리 장정 동원, 무기 마련, 무예 훈련 등의 규정을 마련하였다. 밀양(密陽) 퇴로동약(退老洞約)에서는 기존의 오가작통을 활용하여 무기 체계, 경계 태세, 유사시 연락 체계 및 전술 등의 규정을 새롭게 제정하였다.
민보군은 농민군 축출 후 자연스레 해체되었지만, 고을에 따라 농민군 색출에 가담하기도 했다. 또한 민보군 해체와 별개로 향촌 안정을 위해 향약이 시행되기도 하였다.
[의의 및 평가]
동학농민전쟁이라는 격변기 양반 유생과 향리 세력은 민보군을 통해 기존 질서를 유지하고자 했다. 특히 그들은 향약을 민보군 운영에 접목시킴으로써, 동학농민전쟁으로 인한 향촌 사회의 위기 극복을 전통적 가치관에서 모색하였다.
1. 단행본
오세창 외, 『영남향약자료집성』(영남대학교출판부, 1986)
정해은, 『조선후기 국토방위전략』(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2)
2. 논문
이광우, 「동학농민전쟁기 경상도 유림의 향약 시행」(『민족문화논총』 68,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