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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역지통신
정의

1811년 대마도로 지역을 변경하여 의례를 행하게 된 통신사행.

편찬·간행 경위

1. 역지통신(易地通信)의 개념

1811년 통신사행 의례가 대마도에서 행해지게 되면서 일본에서는 대체로 역지빙례라고 하지만 유상필은 동사록(東槎錄)에서, 대마도로 가는 사행이라 하여 역지신행(易地信行)’, 대마도에서 막부 사절과 교린하는 것이라 하여 역지통신이라고 표현하였다.

 

2. 역지통신 시행 배경 및 과정

1787년 도쿠가와 이에나리[德川家齊]가 막부장군직을 습직하면서 통신사 파견 요청이 이루어졌어야 하지만 막부는 이듬해인 1788년 대기근과 대홍수 등의 재해로 인해 재정의 곤란을 이유로 들어 통신사 파견 연기를 요청하였다.

조선이 막부의 요청을 맏아들인 이후 1791년에는 막부에서 통신사 파견 지역을 바꾸어 의례를 행할 것을 요청하는 역지빙례의 안을 제시하였다. 조선에서는 전례가 없는 일이라 하여 서계를 거부하기도 하였고, 역관(譯官)이 뇌물을 수수하여 대마도의 서계 위조에도 관여하는 등 통신사 파견 지역을 바꾸는 일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1809년 문위행(問慰行)으로 현의순(玄義洵), 변문규(卞文圭), 최석(崔昔) 등이 대마도에서 교섭을 진행하고 돌아왔으며, 1810년에는 왜관에서 현식(玄烒), 현의순이 강정절목을 논의한 결과 통신사행 접대와 국서 교환 의례, 사행 인원, 선척(船隻), 예단 등에 대해 결정하였다.

 

3. 역지통신의 시행

1811년 기존 통신사와 달리 종사관 일행이 빠지고, 통신 정사 김이교(金履喬), 부사 이면구(李勉求) 이하 총 336명의 인원이 대마도에 파견되었다.

통신사와 대면하는 일본 사절로는 정사 오가사와라 다다카타[小笠原忠固], 부사 와키사카 야스타다[脇坂安董]가 참여하였다. 국서 전명례(傳命禮)는 대마도주의 사저(私邸)에서 행해졌다. 또한 막부로부터 답서를 받아오는 수답서의(受答書儀)도 행해졌다.

 

4. 역지통신의 의의

역지통신의 배경에 조선에 대한 일본의 멸시관이 반영된 것이라는 연구도 있었지만 동사록이나 쓰시마일기를 보면 이전과 마찬가지로 활발한 문화교류가 이루어졌다. 또한 통신사행과 관련한 양국의 재정 비용은 상당히 감축되었다. 이후 오사카 역지통신도 추진되었지만 성사되지 않았으며 대마도 역지통신이 마지막이 되었다. 통신사가 단절되는 동안 일본에는 국학(國學)이 확산되면서 조선에 대한 긍정적 인식은 점차 사라져갔다.

서지사항


구성·내용


참고문헌

1. 원전

유상필, 동사록(東槎錄)

김이교, 신미통신일록(辛未通信日錄)

구사바 하이센(草場珮川),쓰시마일기(津島日記)

 

2. 단행본

손승철, 조선시대 한일관계사 연구-교린관계의 허와 실(경인문화사, 2006)

이와카타 히사히코, 19세기 조선의 대일 역지통신 연구(경인문화사, 2017)

 

3. 논문

정장식, 1811년 역지통신과 통신사 (일본문화학보26, 한국일본문화학회, 2005)

정성일, 대마도역지빙례에 참가한 통신사 일행에 대하여(호남문화연구20, 전남대학교 호남문화연구소, 1991)

문경호, 「『신미통신일록(辛未通信日錄)의 특징과 역사적 가치(충청학과 충청문화3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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