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1년~1635년 대마도주와 야나가와[柳川] 일가 사이의 소송 과정에서 조일관계의 국서가 개작되었다는 사실이 폭로된 사건.
임진전쟁이 끝난 후 대마도는 조선과 일본의 국교재개를 간절히 원했고, 이 과정에서 중개를 담당하며 통교역할을 공고히 했다. 1626년 10월 막부의 직접적인 통교무역이 강화될 것이라 예상되는 가운데 야나가와 시게오키[平調興; 柳川調興]는 대마도주 소 요시나리[宗義城]에게 히젠[肥前] 지방의 토지 2천석에 대해 새로 쇼군의 주인장(朱印狀)을 발급받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하였으나 대마도주는 허락하지 않았다. 야나가와 시게오키는 소송을 내어 조부인 야나가와 시게노부[柳川調信] 몫이었던 천석에 대한 주인장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야나가와씨가 막부와 대마도주에게 이중으로 신종(臣從)한다는 것을 의미했으므로 1631년 야나가와씨는 대마도주에게 천석의 토지와 세견선 1척의 권리를 반환할 뜻을 밝혔다. 이에 대해 대마도주는 ‘불신(不臣)’으로, 야나가와씨는 ‘횡포(橫暴)’로 각각 소송하였다. 방치되던 소송은 1633년 5월 막부의 심문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시게오키는 대마도주가 조선과의 외교업무에서 국서를 개작해왔다고 폭로하였다.
1633년~1635년 사이에 폭로된 국서개작의 전말은 회답겸쇄환사 파견 시기를 전후한 1606년부터 1624년까지 총 11회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되었다. 국서는 주로 ‘일본국왕(日本國王)’ 호칭, 별폭, 형식 등 여러 부분에서 개작이 이루어졌다.
1606년 국서개작은 도쿠가와 막부와의 강화교섭을 진행하던 대마도가 선릉과 정릉을 파헤친 범인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국서를 요구한 조선 측 의사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발생하였다. 조선에서는 국서의 내용에서 국왕 칭호, 도서(圖書) 등이 개작된 것으로 보고 위서라고 판단하였다.
1607년에는 회답겸쇄환사가 파견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국서가 개작되었다. 이 때에는 일본국왕에게 회답한다는 ‘봉복(奉復)’을 조선이 먼저 글을 올린다는 ‘봉서(奉書)’로 형식을 바꾸는 개작이 행해졌으므로 총 24자의 원문이 고쳐졌고, 별폭도 개작하여 예단의 물목을 늘리기까지 했다.
1609년 대마도의 교역에 관하여 기유약조(己酉約條)가 약정되는 과정에서 대마도 측에서 지참하고 온 막부장군의 국서도 조선은 위서라고 의심하였지만 회답서를 작성해주었다. 막부장군의 국서는 현존하지 않아 구체적인 진위 여부는 알 수 없다.
1614년 도쿠가와 정권이 오사카에서 승전하며 전국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조선 사절을 요청하게 되었고 1617년에는 회답겸쇄환사가 파견되었다. 이때 조선이 요청한 일본국왕 호칭으로 변경된 점으로 미루어 왕복 국서가 위조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유사한 상황은 1624년 회답겸쇄환사 파견 과정에서도 이루어져 막부에서 보낸 국서는 일본국왕으로 호칭이 변경되었다. 동시에 이 시기에는 별폭도 개작되었다.
1635년 11월, 대마도는 소송의 결과를 알림과 동시에 소송의 책임이 있는 야나가와 시게오키, 이정암(以酊菴), 유방원(流芳院)의 도서와 의관을 조선에 반납하였다. 그리고 정지되었던 송사(送使)의 파견을 재개하면서 세견선의 정관을 줄여서 겸대하는 제도가 1637년부터 확립되었다. 또한 양국의 국서에 일본천황의 연호 사용, 막부장군의 칭호를 ‘대군(大君)’으로 고치는 등의 서식이 개정되었으며, 서식의 주관은 이정암이 윤번하면서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1636년 사절부터는 ‘통신사(通信使)’를 정식 명칭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의의 및 평가]
국서개작사건이 폭로되면서 조선과 일본은 대마도를 중개지로 하여 외교 및 교역을 하는 교린통교체제로 재편되었다.
1. 단행본
손승철, 『조선시대 한일관계사 연구-교린관계의 허와 실』(경인문화사, 2006)
민덕기, 『전근대 동아시아 세계의 韓日관계』(경인문화사, 2007)
김상준‧윤유숙 역, 『근세한일관계사료집 - 야나가와 시게오키 구지 기록[柳川調興公事記錄]』(동북아역사재단, 2015)
2. 논문
유재춘, 「임란 후 한일국교 재개와 국서개작에 관한 연구」(『강원사학』2, 1986)
심민정, 「조선후기 연례송사 겸대제 시행과 외교적 의미」(『인문사회과학연구』24, 부경대학교 인문사회과학연구소, 2023)
심민정, 「조선후기 연례송사(年例送使) 정지 사례를 통해 본 대일교섭」(『한국민족문화』88,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