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외교상대에게 국왕의 명인 국서를 전하는 의례. 통신사행에서는 막부장군에게 조선국왕의 국서를 전달하는 의례를 의미.
조선 개창 후 왜구 금압을 요청하기 위한 사절이 일본에 파견되면서 국서를 전달하는 의례도 시행되어 정착해갔다. 1399년 1402년 등 조선 전기에도 여러 차례 조선 국왕사절이 일본에 파견되었으나 전명의를 어떻게 행했는지 여부는 확인하기 힘들다.
하지만 1443년, 1590년 사행에서는 전명의의 내용을 일부나마 확인할 수 있다. 1443년 일본에 파견되었던 卞孝文은 쇼군 아시카가 요시가츠(足利義勝)를 만날 때 당상에 올라 영외배(楹外拜)를 행했다. 1590년 사행에서는 정하배(庭下拜)를 할 것인지 영외배를 할 것인지 의견대립이 있었지만 김성일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조선 사신은 히데요시에게 영외배를 행했다.
임진전쟁 후 국교가 재개된 상황에서 처음 파견된 국왕사인 1607년 회답겸쇄환사는 에도성(江戶城)에서 도쿠가와 히데타다[德川秀忠]에게 국서를 전달하는 전명의를 행할 때 히데타다는 上堂에 앉았고, 정사․부사․서장관 등은 中堂에서 예를 치른 후 동쪽 마루에 앉았다. 그 외 譯官은 下堂, 閣員은 기둥 밖, 各役은 뜰 아래에서 예를 행했다. 영내배(楹內拜)를 행한 것인데, 조선 전기 행해진 영외배에 비해 사신의 격을 높여 예를 행했다고 할 수 있다. 1617년, 1624년 통신사의 전명의도 영외배로 행했다.
1636년 정식 통신사 명칭으로 사절이 파견된 이후 작은 불협화음이 있었지만 결국 조선의 요구가 받아들여져 1643년, 1655년, 1682년 통신사의 전명의는 모두 영외배로 행해졌다.
1711년 통신사행 때에는 아라이 하쿠세키 주도로 진행된 일본 측의 대대적인 의례 개혁 요청에 의하여 일본국왕으로의 복호, 와카기미에 대한 배례 중지와 로쥬에게 보내는 서폐 중지 등의 변화가 있었다. 전명의도 변화가 생겼다. 1655년부터 국서 전달은 上上官인 堂上譯官이 담당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사가 국서를 전달하게 하고, 전각 바깥에 두던 조선 사신이 지참한 예물을 전각내로 이동하게 했다. 또한 이제까지 쇼군이 가장 위, 그 아래 삼사, 삼사의 아래에서 상관이 예를 행하던 전명의가 예폐를 진설한 곳에서 삼사가 배례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1711년 의례 전반에 대해 아메노모리 호슈가 이의를 제기하였고, 1719년 전명례는 다시 1682년 예로 복구되었다. 이후 1748년, 1764년 행해진 전명례로 동일하게 진행하였다.
1711년 의례개혁 시기를 제외하고 18세기의 전명의 절차는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 『통문관지(通文館志)』 및 사행록 등에 정리되어 있다.
전명의 일정을 정하고 전명의를 행하는 날 아침이 되면 통신사들은 아침 일찍 망궐례를 행하고 국서 용정(龍亭)과 행장을 갖추고 에도성으로 들어갔다. 에도성의 정문인 오테몬에 도착한 통신사는 3개의 문을 더 지나서 혼마루로 들어간다. 3개의 문은 산노고몬[三の御門], 나가노몬[中之門], 주자쿠몬[中雀門]이다. 오테몬에서 당상역관 3명은 가마에서 내리고 삼사신은 산노고몬을 거쳐 안으로 들어간 후 백인번소(百人番所) 앞에서 가마에서 내려 걸어 들어간다. 이때부터 국서가마 및 삼사신 일행은 쓰시마 번주와 장로 2명, 에도막부 조성어용을 포함한 관리 6명 등의 안내를 받으며 나카노몬으로 향한다. 나카노몬에서는 중관 일행들이 밖에서 대기하고 나머지는 주자쿠몬으로 향한다. 한편 국서가 주자코몬을 들어가면 국서를 가마에서 꺼내 당상역관이 받쳐들고 국서가마 및 호송하던 쓰시마번 무사들은 주자쿠몬 안쪽에 머물게 된다. 그후 삼사신 일행이 주자쿠몬에 들어서면 사사봉행(寺社奉行) 등이 대기하고 있다가 안내를 한다.
제3성문은 에도성의 정문으로, 여기에는 ‘하마(下馬)’ 표지석이 있었다. 때문에 조선의 군관들은 모두 말에서 내려 걸어들어가도록 했다. 국서는 혼마루 현관 계단을 올라가 혼마루 내 쓰기노마[次の間라는 방에 잠깐 모셔진다. 이후 막부 쇼군이 오히로마[大廣間: 쇼군이 좌정하는 정당(正堂)]로 나오면 모든 다이묘 앞에서 국서전명식이 시작된다.
삼사신이 대마주수의 안내로 예식 행할 곳을 자세히 살핀 뒤에 외헐소(外歇所 : 빈객(賓客)이 머물러 쉬도록 집의 안채 밖에 마련한 장소. 외부 대기실.)에 돌아와 좌정해 대기하면, 조금 뒤에 대마주수가 일어나 세 사신을 인도하여 들어가서 내헐소(內歇所 : 빈객(賓客)의 내부 대기실)로 이동한다. 국서를 칸막이 된 벽에다 모셔 놓은 다음 세 사신은 국서를 향하여 벌여 앉고, 대마주수는 꺾어진 모퉁이에 앉는다. 또한 북쪽 아래 벽에는 각 주의 일본인 태수들이 자리한다. 각종 예단(禮緞)을 궤가(櫃架)에 담아서 대광간의 서헌(西軒)에 벌여 두고 쇼군이 나오면 본격적인 의례가 진행된다.
이어 당상역관이 국서를 받들고 삼사신은 뒤를 따라 영 밖에 나가 서서 대마주수에게 국서를 전하면, 대마주수가 양손으로 받들고 오히로마 앞까지 가서 약간 꿇어앉는 시늉을 하고서 곧바로 일어나 전(殿) 안으로 들어가 또 고가(高家 : 고가(高家)는 왜국의 대표적 명가문(名家門))의 모씨(某)에게 전하여 전 위에 놓아둔다. 삼사신은 내헐소에 돌아가 대기하고, 집사(執事)하는 여러 일본인들은 손에 각종 예단을 받들어 당 안으로 들어가고, 말은 끌고 나간다. 그러고서 마주수가 일어나서 사신을 인도하여 예식 행하기를 청한다.
사신이 들어가 제 2층 자리 위에 서서 사배례(四拜禮)를 행하고서 내헐소로 다시 물러가면 당상역관에게 사예단(私禮單) 단자를 전달하여 들여보낸다. 집사하는 자가 오히로마에서 나와 각종 사예단을 수납한 뒤에, 집정이 나와서 또 대마주수에게 말을 전하여 사신에게 예식 행하기를 청한다. 그러면 사신이 당 안 제 3층에 들어가서 또 사배례를 행한다.
국서와 예단을 전달하는 의례가 끝나면 연회가 베풀어진다. 하지만 통상적으로 삼사신에게는 쇼군과 술을 마시는 자리가 주어졌다. 1748년 기록을 토대로 쇼군과 삼사신의 주연(酒宴)을 보면, 대마도주가 “관백이 사신과 술을 같이 마시자는 명이 있었습니다.”라는 말을 전하자 삼사신을 차례대로 제 3층 동편 자리 위에 앉았다. 먼저 쇼군 앞에 상을 올리고 나면 또 차례로 세 사신 앞에 상을 올린다. 사하는 자가 쇼군에게 상을 올린 뒤에 대마주수가 정사(正使)를 인도하여 제 2층에 올라 가 앉는다. 술병을 잡은 자가 있어 왼손으로 잔을 올리고서 술을 따르며, 정사가 잔을 들어서 받고 다시 들어서 다 마신 다음 잔을 상 위에 도로 갖다 놓으면, 집사하는 자가 또 쇼군에게 잔을 올린다. 그래서 술잔을 왕래하는 절차가 종사관(從事官)에게 이르는데, 모두 정사와의 의식과 같다. 술이 한 순배 돈 뒤에 집사하는 자가 차례로 상을 거둔다. 세 사신이 제 3층 중앙에 들어가서 사배(四拜)한 후 물러나오고, 행중(行中)의 여러 사람들도 상상관(上上官)에서 각 원역의 종에 이르기까지 차례차례로 그 위치를 낮추어서 모두 절을 한다. 이후 집정이 잔치를 즐기고 파하라는 쇼군의 말을 전하면 삼 사신은 치사(致謝)한 다음 하직하고서 당 안으로 들어가 사배를 하고 물러나면 쇼군 또한 안으로 들어가며 파한다.
[의의 및 평가]
조선국왕의 국서를 전하는 의례는 통신사가 직접 일본 막부장군을 대면하여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기도 했다는 점에서 상당히 우대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조선 전기에 영외배로 진행되던 전명의는 영내배로 더 우대받았다. 국왕의 명을 전하는 통신사는 양국의 외교 현장에서 막부장군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의례를 행하는 사절로, 양국이 대등하게 직접 소통하는 통교체제를 보여주는 의식을 행했다고 할 수 있다.
1. 원전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
『통문관지(通文館志)』
『춘관지(春官志)』
조명채, 『봉사일본시문견록(奉使日本時聞見錄)』
2. 단행본
박화진, 『에도공간 속의 통신사』(한울, 2010)
심민정, 『조선후기 통신사, 일본을 오감하다』(한국국학진흥원, 세창출판사, 2023)
3. 논문
방기철, 「조선시대 대일사신의 傳命儀 연구」(『조선시대사학보』93, 조선시대사학회, 2020)
하우봉, 「조선시대의 통신사외교와 의례문제」(『조선시대사학보』58, 조선시대사학회, 2011)
이훈, 「국서(國書)의 형식과 전달로 본 ‘통신사외교」(『한일관계사연구』61, 한일관계사학회,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