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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유산기(遊山記)
정의

조선시대 문인이 명산을 유람하고 남긴 산문 기록

 

편찬·간행 경위

유산기는 산을 오르내리는 과정의 체험을 산문(散文)으로 적은 산행 기록이다. 작자의 직접적인 산행을 통해 산행의 동기일정별 산행 기록산행의 총평등 산행에 따른 시간적 기록의 총칭이다. 유산록(遊山錄유기(遊記)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의 유산기는 고려 말기에 문헌상 처음 나타나고, 조선시대에 들어와 국토 인식이 고조되고 지리(地理)에 대한 감식안이 높아지면서 지식인의 유산이 성행하였다. 유산기는 조선시대 지식인의 산에 대한 역사적·문화적·종교적 의미가 함축된 자료이다.

서지사항


구성·내용

우리나라의 명산 중에서 문학적 상상력의 대상이 된 산은 백두산·금강산·지리산이 대표적이다. 금강산은 경관이 빼어나 조선 초기부터 가장 빈번한 유람 장소였고, 작품도 가장 많이 산출되었다. 백두산은 오래전부터 우리 국토의 조종(祖宗)이자 성산(聖山)으로 숭상받았지만, 18-19세기에 이르러서야 유산이 나타난다. 이처럼 유산이 늦었던 것은 함경도의 험한 산세와 추운 날씨가 그 원인으로 거론되기도 하나, 17세기 후반 청()나라와의 국경분쟁이 제기되면서 관심의 대상으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지리산 또한 조선 초기부터 유산이 확인된다. 특히 우리가 사는 인근에 소재하고 있어, 인간의 삶과 더 밀착된 내 가까이 있는 산또는 우리 고장의 산으로 인식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국내 유산기는 16세기에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위의 세 산 외에도 청량산·가야산·소백산·덕유산·주왕산 등 국내 명산에서는 유사한 시기에 유산기가 나타났다. 이후 임진왜란 거치면서 약간 주춤하다가 18세기 이후로 넘어가면서 유산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특히 지리산은 국내외적으로 혼란한 시기 전통 유학에 전념해 무너진 도를 회복하고자 한 영·호남의 문인들이 현실과 괴리된 불편한 심정을 해소하기 위해 지리산을 주로 찾았다.

각 산의 유산기는 해당 산이 지닌 문화지리적 역사적 특성을 담고 있다. 예컨대 청량산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산으로 인식되어 퇴계학파에게서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지리산은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산이라 남명학파와 그 후학에게 유산기가 집중되어 있으며, 가야산은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을 찾는 내용이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유산기는 산에 갔으면서도 사람 이야기를 다루는 기록이다.

 [의의 및 평가]

유산기는 해당 산의 문학을 비롯해 역사·지리·생태 등을 살필 수 있는 전방위의 1차 사료이다. 문학이 인간 삶의 다양한 측면을 특별한 장치를 이용해 형상화하는 작업이라면, 산의 인문학은 산을 매개로 그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인간의 삶과 정신을 해명하는 영역이다. 그 중심에 바로 각 산의 유산기가 있다.

참고문헌

최석기 외,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돌베개, 2000)

최석기 외,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 2-6󰡕(보고사, 2007-2013)

강정화 외, 󰡔금강산 유람록 1-10󰡕(민속원, 2016-2019)

청량산박물관, 󰡔옛 선현들의 청량산 유람록 1-3󰡕(민속원, 2007-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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