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초기부터 지리산 천왕봉의 성모사(聖母祠)에 있던 여신(女神)의 석상
지리산 천왕봉의 성모사에 안치된 성모가 누구인지, 왜 성모라 부르는지, 누가 언제 그곳에 안치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성모상(聖母像)의 정수리에 칼자국이 나 있다.’라고 했는데, 성모는 이후에도 몸에 칼집이 난 그 상태로 지리산을 지켰다. 성모사는 지리산 천왕봉에 오른 문인에게 밤을 지새우는 숙소가 되었고, 혹세무민하는 무속(巫俗)의 폐단을 낳는 온상이기도 하였다. 성모는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仙桃聖母),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어머니 위숙왕후(威肅王后), 석가모니의 어머니 마야부인(摩耶婦人)’이라고도 하고, 무속에서의 어미 마고(麻姑)나 지리산을 지키는 삼신할미라는 주장도 있다.
지리산 성모는 산천에 복을 빌고 제사를 지내는 대상이었다. 수많은 백성이 제물을 챙겨 찾아갔고, 혹세무민하는 이들에 의해 해괴한 속설이 나돌았다. 이를 믿지 않던 승려 천연(天然)이 1558년 4월 천왕봉 성모사 안의 성모상을 꺼내 절벽으로 내던져 깨버렸다. 성모상의 첫 번째 수난이다. 그러나 얼마 후 지리산 천왕봉에는 또 성모상이 안치되었다.
20세기 서구문명이 들어오면서 성모도 외면받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군이 성모사를 부수고 성모상을 절벽 아래로 굴러버렸는데, 다행히 산청의 한 여인이 발견하여 다시 천왕봉에 안치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몇 차례의 수난을 더 겪었지만, 해방 이후까지 제자리를 지켰고, 1972년 종교단체의 교인들이 훼손한 후로는 사라졌다고 한다.
현재 지리산 중산리에는 천왕사(天王寺)에 안치된 성모와 2000년 산청 시천면(矢川面) 사람들이 조성한 성모상이 있다. 둘은 천왕봉이 올려다보이는 중산리 계곡을 가운데에 두고 양쪽으로 배치해 있으며, 모두 ‘지리산 성모’라 부른다.
[형태와 특징]
1472년 8월 17일 지리산 천왕봉에 오른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은 성모를 보고 ‘석상(石像)인데, 눈과 눈썹 그리고 머리 부분에 모두 색칠을 했으며, 목에 갈라진 금이 있다.’라고 했으며, 1611년 4월 4일 성모상을 본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은 ‘흰옷을 입은 여인상인데,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라고 하였다. 1940년 4월 이병호(李炳浩 1870-1943)는 ‘석상의 양쪽 귀가 떨어지고 코·눈이 모두 함몰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이 시기까지 성모사와 성모상이 천왕봉에 있었으나, 제 모습을 온전히 갖추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었던 듯하다.
천왕사에 안치된 성모는 옥석(玉石)으로 만든 좌상으로 높이 74㎝, 얼굴 높이 37㎝, 얼굴 너비 29㎝, 앉은자리에서 목까지의 높이 38㎝, 어깨너비 46㎝, 몸 너비 43㎝의 크기이다. 틀어 올린 머리를 하고 있으며, 상반신은 저고리를 입고 있는 듯하고, 가슴께로 손을 모아 마주 잡고 있으며, 석상 전체가 청색을 띠고 있다.
[의의 및 평가]
지리산 성모는 천왕봉에서 오랜 기간 우리 민족의 염원이 담긴 역사적 공간으로 존재해 왔다. 무속의 여신으로 지탄받기도 했고, 지리산을 지키는 산신으로 추앙받기도 하였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지리산 천왕봉에 있어야 할 성모가 결국 땅으로 내려왔고, 지리산 자락에서 천왕봉으로 돌아가기를 기다리며 새로운 문화와 역사를 이루어가고 있다.
최석기 외,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돌베개, 2000)
최석기 외,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 2-6(보고사, 2007-2013)
최석기·강정화, 선인들의 지리산 한시 1-3(보고사, 2015-2016)
정치영 외, 지리산 역사문화 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4)
강정화, 산의 인문학, 지리산을 유람하다(세창출판사,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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