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에서 이혼하도록 처분하는 것
조선시대 혼인관계 해소는 대체로 남편이 처를 버리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다만 부부의 의를 지켜야 한다는 명분하에 양반층은 처를 버리면 처벌 대상이 되었고, 관직 진출에 제한을 받기도 했다. 따라서 양반층에서는 기처 후에 관의 승인을 받아 이러한 불이익을 받지 않으려 하기도 했다.
한편, 관에서 명하여 이혼이 성립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를 ‘이이(離異)’라고 했다. 이이는 왕명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이 처분은 첫째, 불법으로 혼인이 성립된 경우, 둘째, 의절(義絶)의 상황, 즉 부부의 의를 끊어야 할 정도의 사건이 발생한 경우에 내려졌다. 『대명률(大明律)』에 의하면 불법으로 혼인이 성립된 경우는 혼인 상대측에 중요한 일을 속이고 혼인한 경우, 처가 있는데 다시 처를 맞이한 경우 등이 있다. 의절에 해당하는 경우는 『대명률강해(大明律講解)』에 따르면 배우자의 조부모, 외조부모, 백숙부모, 형제, 고모, 자매를 죽인 경우, 남편이 처를 구타하여 처가 절상(折傷) 이상의 상해에 이른 경우, 처가 남편을 욕하거나 구타한 경우 등이 있다.
부부의 의가 끊어진 것으로 보아 이이시킨 예로 1490년(성종 21) 조지산이 성종에게 자신의 딸을 사위 한환이 폭행했는데, 그대로 두면 딸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딸 부부의 이이를 청한 사례를 들 수 있다. 성종은 의금부 조사와 대신들의 논의를 거친 후 한환을 처벌하고, 장인 조지산과 사위 한환, 한환과 처 조씨 사이의 의가 끊어져 부부가 형세상 함께 살기 어려우니 이이시켜야 한다는 대신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이이 처분을 내렸다.
관에서 남편이 처를 버린 것을 승인하여 부부 관계 해소를 인정하는 처분을 하는 경우에도 ‘이이’라고 지칭했다. 조선 후기 대표적 이혼 사례인 유정기의 이이 청원에서도 ‘이이’의 이러한 용례가 확인된다. 1690년(숙종 16) 유정기는 처 신씨를 버렸는데, 14년 후 쯤 관에서 정식으로 이혼을 허락받기 위해 예조에 이이 청원을 했다. 그러나 결국 이이 처분을 받지 못했다. 이 외에도 관으로부터 혼인관계 해소를 승인받기 위해 이이시켜달라고 청원한 사례들이 다수 나타난다. 이 경우에 이이 여부를 심의하여 사안에 따라 이이시키기도 하고, 이이 청원을 받아들이지 않기도 했다.
『대명률』
『대명률강해』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
장병인, 『조선전기 혼인제와 성차별』, 일지사, 1997.
박경, 『조선시대 양반의 부부 생활과 이혼』, 세창출판사,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