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1년 산음현감 심린(沈潾)이 관아의 객사 서쪽에 세운 2층 누각
산음은 현 경상남도 산청의 옛 이름이다. 1461년 현감 심린이 산음현 객사 서쪽에 세운 공공 건축물로, 공무로 온 관원의 휴식 공간으로 사용했으며, 임진왜란 때 중요한 전략기지로 활용했다. 현 산청군청은 옛 산음관아 자리이고, 산청초등학교는 객사 터이며, 환아정 터는 현 산청초등학교 본관 자리이다. 그 뒤로 거울처럼 맑은 경호강(鏡湖江)이 흐르고 있다.
조선 개국공신 권근(權近)의 손자 권반(權攀 1419-1472)이 ‘환아정’이라 이름하였고, 편액은 석봉(石峯) 한호(韓濩 1543-1605)의 글씨가 걸려 있었다. ‘거위와 바꾸다’라는 뜻의 ‘환아정’ 명칭은, 중국 위진남북조 동진(東晉) 때 서성(書聖)으로 이름난 왕희지(王羲之 307-365)가 절강성 산음에 사는 도사(道士)에게 도덕경을 써주고 거위와 바꾸었다는 일화에서 연유하였다.
환아정은 정유재란에 소실되어 1606년 현감 권순(權淳)이 중수하였고, 송정(松亭) 하수일(河受一 1553~1612)이 기문을 지었다. 1616년 정인홍(鄭仁弘)의 손자 정릉(鄭陵 1590-1624)이 산음현감에 부임하여 환아정을 중수했다. 1625년경에는 도사관(道士館: 객사) 동편에 세연지(洗硯池)와 세연정(洗硯亭)을 창건했다. 이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651년경 현감 이관하(李觀夏)가 중건하였다. 이때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 1593-1666)가 소장하고 있던 한호의 소필(小筆) 원본을 가져다가 다시 편액으로 걸었다. 이후 여러 차례 중수하였다.
1908년 설립 인가를 받은 사립계명학교(私立稽明學校)가 1911년 환아정으로 이전해 교사(校舍)로 사용하였고, 1912년 산청공립보통학교가 개교하면서 세연지와 세연정을 철거하고 운동장을 조성하는 등 대대적인 수리를 감행하였다. 그러다가 1950년 3월 10일 화재로 완전히 소실되었고, 그 자리에는 산청초등학교가 신축되었다. 72년이 지난 2022년 6월 27일 마침내 산청군청 뒤편으로 자리를 옮겨 복원하였다.
[형태와 특징]
환아정은 누각보다 작은 규모의 정(亭)으로 이름하였으나, 누각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실제로 1469년에 편찬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에는 ‘환아루(換鵝樓)’로 되어 있다. 왕희지 고사(故事)에 등장하는 난정(蘭亭)으로 인해 환아정이라 불렸을 것이다.
환아정 기문은 1664년에 쓴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산음현 환아정기(山陰縣換鵝亭記)」와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 1595~1671)의 「환아정중신기(換鵝亭重新記)」를 포함해 모두 10편이 있다. 1770년경에 그린 진재(眞宰) 김윤겸(金允謙, 1711~1775)의 영남기행화첩(보물 제1929호) 속 「환아정」 그림은 18세기 후반 산청의 경호강과 환아정 경내의 모습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어, 여러 번의 중수와 중건에 큰 역할을 하였다. 제영시(題詠詩)는 2백 수에 육박한다.
[의의 및 평가]
환아정은 조선시대를 거쳐오면서 임진왜란 때 진주대첩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였고, 근대전환기에는 산청보통학교가 개교하여 산청지역 근대교육의 산실이었으며, 수많은 문인이 제영시를 읊어내는 풍류의 명승이었다. 창건 이후 숱한 굴곡에도 불구하고 줄곧 공공 건축물로서의 위엄을 유지하고 산청의 역사를 대표하는 명승이었다.
1. 단행본
박은조, 환아정지(換鵞亭誌) (산청문화원, 2006)
강정화 외, 지리산 한시 선집, 덕산·단성·산청·함양·운봉(이화문화사, 2010)
산청박물관, 환아정 1(이룸, 2023)
산청박물관, 환아정 2(이룸, 2023)
2. 논문
강정화, 「풍류의 명승, 산청 환아정」(선비문화 28호, 남명학연구원,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