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안동부 풍산현 하회 출신의 문인
본관은 풍산(豐山), 초명은 상화(尙和), 자는 덕유(德游), 호는 양진당(養眞堂), 안동부 풍산현 하회 출신. 아버지는 류성신(柳聖臣)이고, 어머니는 이윤협(李允協)의 딸 광주 이씨(廣州李氏)이다. 6대조 류운룡은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의 형으로 풍기 군수·원주 목사 등을 역임했으며, 퇴계 이황의 문인이다. 류영의 증조부 회당(悔堂) 류세철(柳世哲, 1627∼1681)은 공조 좌랑·군위 현감 등을 역임했으며, 1666년(현종 7) 기해 복제(己亥服制)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영남 남인의 소두(疏頭)로 활동하였다.
류영은 진양 정씨(1687~1725)와 혼인하였고, 서원 정씨(1699~1729)와 재혼하였으며, 5남 6녀를 두었다. 풍산류씨 겸암파의 종손으로, 관직으로 나아가지는 않고 조상 헌창 사업과 문중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가학으로 퇴계학을 계승하였다.
겸암파의 파조(派祖) 류운룡의 문집 『겸암집』을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겸암집이 목판본으로 간행되기 이전에 류성룡이 형의 글을 모아 필사본 12권을 만들었으나 1605년(선조 38)의 대홍수로 대부분 유실되었다. 이후 류세철이 유문(遺文)을 수집하였고, 이것을 류원지(柳元之, 1598~1674)와 류세명(柳世鳴, 1636~1690)이 교정하여 발간하려다가 잇달아 사망하여 간행하지 못하였는데, 류영이 1742년(영조 18)에 4권의 문집으로 간행하였다.
류영은 『풍산류씨세보』 간행에도 앞장섰다. 족보를 편찬하기 위해서는 먼저 세계(世系)를 정리해야 하는데, 세계의 정리는 류중영(柳仲郢, 1515~1573)부터 시작되어 아들 류성룡에 이르러 어느 정도 체계화되었다. 17세기 후반 류원지가 작성한 족보초(族譜草)와 같은 내용의 필사본 풍산류씨세보가 현전한다. 족보 간행은 1758년(영조 34)에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류원지와 류후장(柳後章) 등이 족보 간행에 뜻이 있었지만 이루지 못하다가 류영이 류종춘(柳宗春)·류풍(柳灃)과 함께 처음으로 간행하였다.
류영은 1662년(현종 3) 류세철이 류성룡의 명으로 상봉대(翔鳳臺) 자리에 건립한 상봉정을 중수하기도 하였다. 이 정자는 1755년(영조 31)의 대홍수에 휩쓸려 없어졌다.
류영은 혼반을 높이기 위해 자녀들의 혼인에도 정성을 쏟았다. 대구 옻골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 1705~1786)의 아들 최주진(崔周鎭, 1724~1763)을 사위로 맞이하기 위해 최흥원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혼인할 의사를 전했으며, 결국 최주진을 사위로 맞이하였다.
류영이 교유했던 대표적인 인물로는 최흥원,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 병곡(屛谷) 권구(權榘, 1672~1749) 등이 있는데, 이들은 당대 영남 최고의 학자들이었다.
『대산집(大山集)』
『병곡집(屛谷集)』
『역중일기(曆中日記)』
『국역 역중일기 1~7』(한국국학진흥원, 2021)
『풍산류씨세보(豐山柳氏世譜)』(풍산류씨세보편찬위원회, 1985)
김명자 외, 『일기를 통해 본 18세기 대구 사림의 일상세계』(새물결, 2019)
김명자, 『안동 하회의 풍산류씨 문중 연구』(경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