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진도 군수·오위도총부 부총관 등을 역임한 무신.
본관은 일직(一直), 자는 덕이(德而), 밀양(密陽) 출신. 안동부의 일직현을 본관으로 하며, 밀양 입향조는 태종대의 손관(孫寬)이다. 아버지는 경상좌도 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를 역임한 손명대(孫命大, 1675~1733)이고, 동생은 손진방(孫鎭邦)이다. 대구부 해안현 옻골 출신의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 1705~1786)의 처남이다.
손진민은 1730년(영조 6) 무과에 급제하였다. 1733년(영조 9)에 선전관(宣傳官)에, 1737년(영조 13)에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에 제수되었다. 같은 해 개천 현감(价川縣監)이 되었고, 1741년(영조 17)에 탄핵받고 밀양으로 돌아왔다.
1745년(영조 21) 진도 군수(珍島郡守)에 제수되었으며, 1749년(영조 25) 삼수 부사(三水府使)에 임명되었다. 1750년(영조 26) 충청도 수군절도사(忠淸道水軍節度使)에 임명되었는데, 이는 부친 손명대가 이인좌(李麟佐)의 난 당시 전라도의 관문인 팔량치(八良峙)에서 반란군을 저지한 공로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1752년(영조 28) 경상좌도 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에 제수되었다. 1754년(영조 30) 남도 병마절도사(南道兵馬節度使)에, 1757년(영조 33)에 북도 병마절도사(北道兵馬節度使)에 임명되었다. 1759년(영조 35)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이 되었다.
손진민은 누이가 최흥원과 혼인하면서 최흥원의 관계망에 편입되었다. 손진민의 누이가 1740년(영조 16) 이른 나이에 사망했지만, 손진민은 최흥원 집안 및 최흥원과 교유하던 인물들과 평생 가깝게 지냈다. 손진민은 관직 생활을 하는 가운데 곡물·전복 등을 비롯하여 방한모 휘항(揮項) 등 귀한 물건도 장만하여 최흥원에게 선물로 주거나 최흥원이 일상에 필요한 물품들을 제공해 주기도 하였다.
밀양 출신의 손진민은 아버지 손명대를 이어 일직 손씨의 혼반을 높이고 관계망을 확대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손진민은 최흥원의 처남이었만, 자신의 딸을 최흥원의 조카 상진(尙鎭)과 혼인시키기 위해 몇 년 동안 심혈을 기울였다. 손진민은 딸에게 상당한 재산을 물려주어 최상진의 경제적 기반이 확대되었다. 손진민은 손녀도 최흥원의 조카와 혼인시켰다. 당시 대구 옻골 최씨가 영남에서 위상이 높았기 때문에 손진민은 옻골 최씨와 중첩 혼인을 통해 혼반을 높이려고 하였다. 손진민은 최흥원을 통해 18세기 영남의 최고 학자 가운데 한 명으로 언급되는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과도 교유하였다.
『영조실록(英祖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대산일기(大山日記)』
『역중일기(曆中日記)』
『국역 역중일기 1~7』(한국국학진흥원, 2021)
김명자 외, 『일기를 통해 본 18세기 대구 사림의 일상세계』(새물결,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