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대구 옻골 출신의 유학자.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정이(靜而), 대구부 해안현 옻골 출신. 아버지는 최흥점(崔興漸)이고, 어머니는 안동의 고성 이씨(固城李氏)로, 통덕랑 이시성(李時成)의 딸이다. 최사진은 3남 4녀의 맏아들이며, 아우로 상진(尙鎭)과 우진(宇鎭)이 있다. 이지화(李志和)의 딸 한산 이씨(韓山李氏)와 혼인했다.
최사진의 아명은 용채(龍彩)이다. 관례를 치를 때 ‘사진(思鎭)’의 이름을 받았는데, 의(義)를 생각하여 종신토록 힘쓸 것을 생각하며 살기를 바라는 뜻을 담았다. 관례 이후 안동부 일직면 소호리(蘇湖里) 출신의 한산 이씨(1726~1777)와 혼인하여 4남 3녀를 두었다. 최흥원의 『역중일기(曆中日記)』 에 의하면, 장남은 복생(福生, 1748~1768)으로 12살부터 병으로 앓다가 21살에 사망했다. 둘째 아들은 한우(漢羽)로 최흥점의 「묘갈명(墓碣銘)」에 등장하는 락(濼)으로 추정된다. 셋째와 넷째 아들도 어려서 죽었다. 이로 인해 최사진 이후의 가계가 경주최씨 족보에 등장하지 않는다.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 714~1789)이 나중에 최사진의 장인인 이지화의 양자가 되었다. 이상정의 문인록인 고산급문록(高山及門錄)에 아우 상진과 우진, 최흥원의 아들 주진(周鎭)과 손자 식(湜), 삼촌 흥벽(興壁), 사촌 항진(恒鎭)과 화진(華鎭)과 함께 이름이 올랐다. 최사진은 한산 이씨와 혼인했기 때문에 이상정과 이광정이 거주하고 있는 소호리에 자주 출입했다. 최사진은 최주진과 함께 이상정과 이광정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집안에서 운영하는 공부 공간인 계정(溪亭)과 인근의 부인사와 동화사 등 사찰에서 공부하는 가운데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했지만, 합격하지 못했다.
최사진은 공부하는 틈틈이 큰아버지 최흥원의 마을 경영과 집안 경영에 조력자 역할을 했다. 경상감영에 필요한 업무를 보거나 지방관에게 연말 선물인 세의(歲儀)를 전달하는 심부름을 하거나 농사 감독 및 상례와 제례에 최흥원을 대신하여 참여하기도 했다. 친족의 제사와 부조를 위해 만든 조제고(助祭庫)의 관리도 집중적으로 하는 등 집안 경영에 참여하는 가운데 조용하게 여생을 보냈다.
백불암집(百弗庵集)
소산집(小山集)
고산급문록(高山及門錄)
『역중일기(曆中日記)』
『국역 역중일기 1~7』(한국국학진흥원,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