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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봉제사
정의

봉제사란 돌아가신 조상의 제사를 특정한 날짜에 받들어 모시는 것을 뜻함.

편찬·간행 경위

조선의 유학자들은 성인의 가르침을 일상의 삶에서 실천하여 도덕군자가 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았다. 그 중 는 유교의 핵심 요소로, ‘봉제사는 돌아가신 부모님께 행하는 효이다. 예기에 따르면, 인간은 혼백(魂魄)으로 구성되었는데, 사람이 죽으면 혼()은 성품으로 하늘로 돌아가고, ()은 육신으로 땅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그런데 혼백이 모두 기()로 완전히 소멸되기 까지 약 120년이 걸리기 때문에, 한 세대를 30년으로 계산하여 4대까지 제사를 모신다고 한다. 120년 동안은 조상의 혼백이 자연에 흡수되기 이전이므로, 후손들과 감응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가례에는 4대 봉사를 규정하고, 죽은 조상을 살아계신 것처럼 간주하고 효성스럽게 모실 것을 강조하고 있다. , 제사는 효의 연장이었다. 조상제사를 받들기 위해서 사가(私家)에서는 가묘(家廟)를 세웠고, 왕실에서는 종묘를 세워 조상 왕들에 대한 제례를 거행하였다.

 

조선에서는 17세기 중·후반기부터 부계 중심의 종법 질서가 확고해졌다. 제사는 유교의 중요한 덕목인 절제와 공경의 덕목을 학습하는 계기가 되지만, 가족 내외적인 관계를 위계화하고 권력화하는 수단으로도 작용하였다. 또한 봉제사를 명분으로 장자 중심의 상속제도가 확립되면서 제사는 경제적 부를 분배하는 기제가 되었다. 봉제사도 아들과 딸 구별없이 자녀들 간에 돌아가면서 제사를 모시는 것에서 장자의 단독 봉사로 변하였다. 이에 따라 재산도 균분상속에서 제사를 모시는 적장자에게 분배되는 경향이 강해졌다. 봉사조는 시간이 흐를수록 기존의 1/5에서 더 많이 배분되었고, 적장자는 가묘가 있는 집과 제사용 재산을 독점적으로 상속했다.

 

봉제사의 실천은 향촌 사회 내 가문의 사회적 위상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을 내포하고 있었다. , 제사는 친족 결속을 통한 친족 마을의 형성과 함께 가문의 위세를 드러내는 중요한 행사로 변화하면서 사회적 신분을 유지·과시하는 수단이 되었다.

 

사대부 가정에서 모신 제사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차례(茶禮): 사당에 4대의 신위를 모시고, 매달 1·15일에 주과포로 간단히 제사를 지냈다. 특별한 음식이나 계절에 첫 수확한 음식을 드리기도 하였다.

사시제(四時祭): 사계절에 드리는 제사로 2·5·8·11월에 사당에서 지냈다.

묘제(墓祭): 산소에서 지내는 제사로 기제로 받들지 않는 조상에 드리는 제사였다.

기제(忌祭): 조상의 사망일 즉, 기일에 지내는 제사였다. 사대봉사(四代奉祀)라 하여 4대까지 모셨다.

생신차례: 망자의 생일에 지내는 것으로 돌아가신 후 3년까지만 지냈다.

서지사항


구성·내용


참고문헌

 

가례(家禮)

최배영, 조선후기 서울 반가의 제례(유교사상문화연구16, 한국유교학회, 2002)

한예원, 조선시대 유교적 죽음 이해(동양철학연구87, 동양철학연구회, 2016)

이숙인, 조선후기 제례 담론의 몇가지 특징(율곡학연구48, 율곡연구원,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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