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산중 유람에서 타고 다니던 가마인 남여를 메던 승려
남여는 뚜껑이 없는 의자와 비슷한 가마이다. 대부분 재질이 가벼운 대나무로 만들어져서 ‘남여‧순여(筍輿)‧죽여(竹輿)‧‘편여(箯輿)’ 등으로 불렸고, 어깨에 메고 다닌다 해서 ‘견여(肩輿)’로도 불렸다. 좁은 산길 등을 다니기 용이하게 만들어져서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산중 유람에서 이동 수단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사대부들은 평지에서 나귀나 말을 타고 유람하다가도 산중 유람에는 젊은 승려들이 메는 남여에 옮겨 탔다. 남여를 메는 승려를 ‘남여승’이라고 했다. 가이드는 산길에 익숙한 노승(老僧)이 맡았는데, 손가락으로 길을 가리키는 승려라는 뜻에서 ‘지로승(指路僧)’이라 했다.
승려들이 남여를 메는 풍조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식(李植, 1584~1647)과 정엽(鄭曄, 1563~1625)은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이 회양부사로 있으면서 금강산을 유람할 때 시작된 것이라 했다. 그러나 1544년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의 청량산 유람에 이현보(李賢輔, 1467~1555)가 산중에 남여를 타고 주세붕을 찾아왔고, 이황(李滉, 1501~1570)도 1549년 소백산을 유람하면서 승려가 메는 남여를 탔다. 사대부들이 산중 유람에 승려가 메는 남여가 이용되는 것은 양사언 이전인 조선 전기부터 관행으로 자리 잡아 조선 중기 이후부터 상용화되었다.
그냥 오르기도 힘든 가파른 산길에 남여를 메는 것은 매우 고된 노역이었다. 일부 사대부들은 자신이 남여를 타면서도 남여승을 지극히 불쌍하고 가엽게 여기고 있지만 대부분은 이를 당연하게 생각했고, 나이와 관직 고하를 막론하고 산중 유람에 남여승을 동원했다.
남여승은 유람객의 수에 따라 적게는 2~3명에서 많게는 50~60명까지 동원되었다. 윤휴(尹鑴, 1617~1680)가 1672년 금강산을 유람할 때 안문점(鴈門岾)에 이르자 유점사 승려 50~60명이 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유점사 승려들이 윤휴 일행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남여 교대를 위해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안문점은 회양의 내금강과 고성 외금강의 경계로 승려들이 남여를 교대하는 장소였다. 금강산처럼 큰 산은 유람의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찰의 승려들이 남여 사역을 감당할 수 없었으므로, 일정 구간에서 교대했다. 유람객이 자주 찾는 산에는 사찰들이 유람객을 수행하는 구간을 나누어 놓았기 때문이다. 정엽이 금강산 유람 시 안문점에 이르렀을 때는 장안사의 승려들이 남여 교대를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장안사 승려가 모자라 부득이 유점사의 승려에게 다시 남여를 메게 하였는데 매우 괴롭게 여겼다고 한다.
승려들은 남여 메는 것이 괴롭고 힘들어서 뚱뚱한 유람객은 기피했고, 오르기 어려운 곳은 유람객에게 볼만한 것이 없다고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 산을 처음 찾는 유람객이 높은 봉우리의 경치를 감상하고자 승려들에게 물으면, 승려 대부분은 곧바로 볼만한 곳이 없다 했다. 가마를 메고 오르기 매우 힘들기 때문이었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 수록된 「견여탄(肩輿歎)」이란 시에 승려들이 산중에서 남여를 메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데, “멜빵에 눌려 어깨엔 홈이 생기고[壓繩肩有瘢], 돌에 부딪쳐 멍든 발은 낫지를 않네[觸石趼未癒]. 스스로 고생하여 남을 편케 함이[自瘁以寧人], 당나귀나 말과 다를 것이 없구나[職與驢馬伍].”라고 하여 남여승의 고통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남여승들은 특별한 품삯이 없었다. 사대부들은 유람 중 먹다 남은 쌀 등의 생필품을 사찰에 조금 남겨두고 가거나, 시 한 줄 써주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러나 산중 유람에 남여승을 동원하는 관행은 조선시대 내내 지속되었고, 일제강점기가 되면 유람객이 많이 찾는 금강산과 같은 명산에는 남여를 메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무릉잡고(武陵雜稿)
▸백호전서(白湖全書)
▸수몽집(守夢集)
▸택당집(澤堂集)
▸이상균, 조선 선비들의 로망, 관동유람(세창출판사, 2023)